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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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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15 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의 4선 및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위해 자행된 대한민국의 선거 부정 사건이다. 자유당은 공무원, 경찰,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조직적인 부정 선거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이로 인해 이승만이 대통령에,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전국적인 시위와 4·19 혁명을 촉발하여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후 재선거가 결정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인한 정국 변화로 인해 무산되었고, 대한민국 제2공화국 헌법 하에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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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선거 종류대통령 선거
국가대한민국
이전 선거1956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56년
다음 선거1960년 8월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다음 선거 연도1960년 8월
선거일1960년 3월 15일
투표율97.0%
대통령 선거
이승만
후보이승만
소속 정당자유당
득표수9,633,376
득표율100%
당선인이승만
당선 정당자유당
부통령 선거
이기붕
후보이기붕
소속 정당자유당
득표수8,337,059
득표율79.2%
장면
후보장면
소속 정당민주당
득표수1,843,758
득표율17.5%
당선인이기붕
당선 정당자유당
이전 부통령장면
이전 부통령 소속 정당민주당
선거 관련 정보
선거 부정3·15 부정선거
관련 웹사이트3·15부정선거(三一五不正選擧) March 15 Election Fraud

2. 후보

1960년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에는 여러 정당 및 무소속 후보들이 출마했다.

대통령 선거에는 자유당 이승만 후보와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출마했으나, 자유당 측에서 공권력과 정치 깡패를 동원해 다른 후보들의 출마를 방해했다.[15][16] 조병옥 후보가 선거 직전 사망하면서 이승만 후보가 단독 출마하게 되었다.

부통령 선거에는 자유당 이기붕 후보, 민주당 장면 후보, 통일당 김준연 후보, 대한여자국민당 임영신 후보가 출마했다.

2. 1. 자유당

대통령 선거에는 이승만 자유당 후보와 조병옥 민주당 후보 2명만 입후보하였다. 다른 정당 및 후보자도 출마를 시도했으나, 자유당 측에서 공권력과 정치 깡패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입후보를 방해하여 모두 무산되었다.[15][16]

부통령 선거에는 이기붕 자유당 후보, 장면 민주당 후보 외에도 김준연 통일당 후보, 임영신 대한여자국민당 후보가 입후보하여 4명의 후보가 나왔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4선 당선을 노리는 한편, 86세 노인인 이승만 대통령의 서거 시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어 있는 부통령 자리를 다시 한번 노리기 위해 이기붕 추대 공작도 병행하였다. 자유당은 1959년 6월 29일 이승만·이기붕 진용을 재구축하였고 서둘러 출마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김준연 통일당 부통령 후보, 임영신 대한여자국민당 부통령 후보 등이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지지한다면서 부통령 선거전에 뛰어들어, 이승만 지지 표가 갈려서 패했던 4년 전 부통령 선거 때의 상황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돌게 되었다.

자유당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후보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
160x160px
제1·2·3대 대통령
제헌 국회의장
제헌 국회의원
제3대·제4대 전반기 민의원의장
제3대 국방부 장관
제3·4대 민의원의원



자유당은 유력 야당인 민주당을 견제하기 위해 조기 대선을 계획했다.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의 파벌 싸움 끝에 대통령 후보로 구파의 조병옥을, 부통령 후보로는 현직 부통령인 장면을 지명했다. 그러나 조병옥이 1960년 1월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을 틈타 이승만 정권은 관례적으로 5월에 실시되던 대통령 선거를 두 달이나 앞당겨 3월 15일을 투표일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3월 선거는 선거 관례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조병옥 후보가 치료 중임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앞당기는 것은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된다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공개 질의서를 제출하고 답변을 요구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3월 선거 방침을 바꿀 수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 와중에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미국에서 수술을 받은 후 2월 15일 급서하면서,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의 당선이 사실상 확정되었다.[11] 따라서 자유당에게는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당선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2. 2. 민주당

민주당은 부통령 선거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연이어 좋은 성적을 거두며 자유당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서는 신파와 구파 간의 갈등이 심해 후보를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1959년 11월 26일, 민주당은 정·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구파의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신파의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15][16]

민주당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후보
대통령 후보
조병옥
부통령 후보
장면
160x160px
제5대 내무부 장관
제3·4대 민의원의원
초대 경무부장
제4대 부통령
제2대 국무총리
초대 주미 대사
제헌 국회의원



하지만 조병옥은 선거를 한 달가량 앞둔 1960년 2월 15일 지병으로 미국에서 요양하던 중 갑자기 사망했고, 이승만은 단독 후보가 되었다. 이로써 민주당은 지난 대선에서 신익희 후보가 유세 중 사망한 것에 이어 두 번째로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대선 후보를 잃게 되었다.[11]

이승만의 대선 상대가 사라진 후,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되면서 부통령 선거가 중요해졌다. 이승만에 대한 반대표는 민주당 후보 장면에게 집중되었다.[2] 민주당은 선거 결과를 거부했고, 같은 날 마산에서 선거 결과 조작에 항의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시위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8]

자유당은 민주당을 견제하기 위해 조기 대선을 계획했다. 민주당은 파벌 싸움 끝에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조병옥이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간 사이, 이승만 정권은 5월에 실시되던 대통령 선거를 3월 15일로 앞당겼다. 민주당은 이에 대해 공개 질의서를 제출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결국 조병옥 후보가 사망하면서,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의 당선이 확정되었다.[11]

대통령 후보를 잃은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가 1명일 경우 그 득표수가 전체 유권자 수의 3분의 1 이상이어야 한다는 선거법을 역이용하여, 이승만의 득표수를 3분의 1 미만으로 억제해 재선거를 통해 장면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 전략을 사용했다.

2. 3. 통일당

통일당은 1959년 11월 17일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 김준연 당 위원장을 부통령 후보로 각각 지명할 것을 결의하였다. 11월 18일에는 대의원 515명 중 399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 김준연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17]

2. 4. 기타 후보

자유당이승만 후보와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 외에도 여러 정당 및 후보자들이 출마를 시도했으나, 자유당 측의 방해로 무산되었다.[15][16]

  • 민족주의민주사회당: 1959년 12월 20일, 노농당은 당명을 민족주의민주사회당(약칭 민사당)으로 바꾸고 전진한을 대통령 후보, 이훈구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자유당의 방해와 선거관리위원회의 당명 변경 문제 제기로 후보 등록이 좌절되었다.
  • 반독련: 1960년 2월 8일, 장택상을 대통령 후보, 박기출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후보 등록 서류를 3번이나 탈취당하고, 깡패들이 장택상의 집에 침입하는 등 방해 공작이 벌어졌다. 장택상은 입후보 좌절 시 야당의 조병옥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밝혔으나, 결국 서류 미비로 후보 등록에 실패했다.
  • 민주혁신당: 서상일 간사장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시도했으나, 정당 등록 불허 등을 이유로 1960년 1월 9일 포기했다.[20]
  • 김달호: 전 진보당 부위원장은 무소속으로 출마하려 했으나, 입후보 방해로 1960년 2월 13일 포기했다.[21]
  • 한기도: 의사 한기도는 1960년 2월 13일 무소속 대통령 후보로 등록하려 했으나, 법정 요건 미비로 거부되었다. 그는 유권자 추천서를 경찰에게 강탈당했다고 주장했다.[22]


이후 이강학 당시 치안국장은 후보 등록 방해가 장택상의 자작극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장택상은 이를 부인했다.[18][19]

3. 선거 운동 및 부정 선거

이승만 정권의 여당인 자유당은 12년에 걸친 독재와 잇따른 실정으로 국민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하여, 정권 유지를 위해 온갖 부정 수단을 써야 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으로 당선되어, 대통령과 부통령의 소속 정당이 여야로 나뉘는 상황이었다. 고령의 이승만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헌법 규정에 따라 대통령직은 자동적으로 부통령에게 승계되므로, 이 선거에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 모두에서 승리하는 데 여당은 전력을 다했다.

자유당은 유력 야당인 민주당을 견제하기 위해 조기 대선을 계획했다.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의 파벌 싸움 끝에 대통령 후보로 구파의 조병옥을, 부통령 후보로는 현직 부통령인 장면을 지명했다. 그러나 조병옥이 1960년 1월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을 틈타 이승만 정권은 관례적으로 5월에 실시되던 대통령 선거를 두 달이나 앞당겨 3월 15일을 투표일로 결정했다. 민주당은 3월 선거는 선거 관례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조병옥 후보가 치료 중임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앞당기는 것은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된다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공개 질의서를 제출하고 답변을 요구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3월 선거 방침을 바꿀 수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 와중에 조병옥 후보가 미국에서 수술을 받은 후 2월 15일 급逝하면서,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의 당선이 사실상 확정되었다.[11] 따라서 자유당에게는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당선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대통령 후보를 잃은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가 1명일 경우 그 득표수가 전체 유권자 수의 3분의 1 이상이어야 한다는 선거법 규정을 역이용하여, 이승만의 득표수를 3분의 1 미만으로 억제함으로써 재선거를 통해 장면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 전략을 펼쳤다.

여당 자유당은 1959년 6월 29일에 개최된 제9차 대의원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을, 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지명하고, 1960년 2월 5일에 입후보 등록을 완료했다. 야당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조병옥,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2월 7일에 입후보 등록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조병옥이 선거운동 기간 중인 2월 15일에 사망함으로써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이 사실상 확정되었고, 초점은 부통령 선거로 옮겨갔다.

통일당 당수 김준연, 대한여자국민당임영신도 부통령 후보로 등록했지만, 선거전은 사실상 자유당과 민주당의 일기토가 되었다.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당선을 막고자 하는 자유당의 의지에 따라, 민주당의 선거운동은 경찰에 의한 연설회 참가자 감시와 위협, 연설장소 사용 금지 등 심한 방해를 받았다. 2월 28일에 장면 부통령 후보가 대구에서 정견을 발표했을 때는, 그날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대구시내 모든 중학교·고등학교에 등교하도록 명령하여 야당 후보의 정견을 듣지 못하도록 했다. 이에 반발한 대구 시내 고등학생 1200명 이상은 “일요일 등교 지시”에 항의하여 거리 시위를 벌였다.

3월 9일과 10일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각각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민주당은 부정선거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25]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언론에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26]

개표 중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무위원들은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어 갈 것을 우려하였고, 이렇게 되면 부정선거임이 들통 날까봐 '''"걱정"'''을 하였다.[27] 그러자 최인규·이강학 등은 경비전화를 통해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각 지에서는 감표에 들어갔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하였다.[28] 하지만 이러한 혼란에도, 이기붕의 표는 79%로 하향 조정하게 되었다.[29]

3. 1. 자유당의 부정 선거 계획

선거 벽보


자유당이기붕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내무부 관료들과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와 개표 조작을 감행하였다.[23][24]

자유당은 전국의 공무원경찰 등 공권력은 물론 정치 깡패, 완장 부대까지 동원해 야당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고 주민들에게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하도록 압박하였다. 자유당은 또한 야당 참관인들을 갖은 핑계로 투표장에서 끌어내었으며, 투표자들을 3인 1조로 투표하게 하고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자유당 측 참관인에게 보여주도록 하는 공개 투표를 시행했다. 유권자들에게 투표 방법을 교육하는데 쓰겠다는 핑계로 가짜 투표용지를 만들어두었다가 투표함에 무더기로 투입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자유당은 조기 선거를 치른 후, 경찰 등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계획했다. 공무원을 이용한 선거운동 조직을 만들고, 경찰이 이를 감시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이를 위해 내무부(현 대한민국 행정안전부)에서는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하여 3인조, 9인조의 공개 투표반을 편성하는 한편, 경찰에게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도록 지시했다. 또한, 내무부 최인규 장관, 이성우 차관, 이강학 치안국장 등을 중심으로 서울특별시와 각 도의 경찰서장, 사찰과장, 경찰서장 등 경찰 간부와 각 시장, 군수, 읍장 등 지방자치단체장을 내무부로 소환하여 다음과 같은 선거운동 방침을 지시했다.

  • 자연 棄権票(기권표), 선거인 명부에 허위 기입된 유령표,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도록 조작한 표 등을 유권자의 4할 정도 만들어 미리 자유당 후보에게 기입, 투표하게 하는 것('''4할 사전 투표''').
  • 자유당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미리 조작된 유권자들로 3인조 또는 9인조를 편성하여, 조장이 조원의 투표용지 기입 상태를 확인한 후, 각 조원이 기입한 투표용지를 자유당 측 선거위원장에게 보여준 후 투표함에 투표하게 하는 것('''3인조, 9인조 공개 투표''').
  • 자유당 지지자에게 완장을 차게 하여 투표소 주변을 자유당 일색으로 만들고, 야당 지지 유권자에게 심리적 압력을 가하여 자유당에 투표하도록 유도하는 것.
  • 민주당 측 투표 참관인을 매수하여 무관심하게 만들거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어떤 이유를 대서 야당 측 참관인을 투표소 밖으로 몰아내는 것.


이상의 지시에 따라, 내무부 간부들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했다. 이 구체적인 방안은 1960년 1월에 잇달아 개최된 전국 각 시·도 경찰서장 사찰과 제2계장 및 분실장 합동회의에서 지시된 동시에, 만약 담당 경찰관을 비롯한 각 시장, 군수, 읍장이 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경우에는 파면하기로 하고, 미리 사표를 제출하도록 했다.

  • 선거일에는 자유당 완장 착용자 상당수를 투표소 100미터 부근에 배치하는 것.
  • 투표함 수송 도중, 투표함을 자유당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위장 조작된 투표함과 바꾸는 것.
  • 개표 시 혼란을 이용하여 미리 준비한 자유당 후보 표 다발을 섞어 넣거나 야당 후보 표를 제거하는 것.
  • 개표 완료 후, 위장한 개표 결과표를 공표하는 것.
  • 자유당 후보의 득표 목표를 야당 후보 득표에 대해 5대 1, 즉 83% 이상으로 하는 것.

3. 2. 선거 당일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3월 15일 선거 당일, 자유당은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거나, 한 명당 투표 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지 감시하고,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기도 했다.[26]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과 내무부 소속 공무원들이 조직적으로 부정 행위에 개입하였다. 이 일로 내무부 차관급과 실국장급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26]

전국적으로 자유당 지지자들이 완장을 착용한 완장부대와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야당 측 투표 참관인들이 투표소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3명 또는 9명이 한 조를 이루어 공개 투표를 실시했다.

민주당은 투표 마감 30분 전에 본 선거가 부정선거이며 무효임을 선언했다.

민주당이 발표한 선거 불법·무효 이유는 다음과 같다.[12]


4. 선거 결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960년 3월 18일에 이승만이 대통령에,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음을 발표했다. 같은 날 국회에서도 이 결과를 승인했지만, 민주당은 이 선거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며 국회에서 퇴장했다.[7]


  • 선거인 수: 11,196,490명
  • 투표자 수: 10,862,272명
  • 투표율: 97.0%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 결과[7]
후보자정당득표수비고
이승만자유당9,633,376대통령
이기붕자유당8,337,059부통령
장면민주당1,843,758
김준연통일당249,095
임영신대한여자국민당97,533



이와 같은 부정선거는 전국 각지에서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져 결국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가져왔다.

4. 1. 대통령 선거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는 자유당이승만 후보가 단독으로 출마한 선거였다. 경쟁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직전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사실상 무투표 당선되었다.[5]

당시 헌법에는 단독 후보일 경우, 전체 투표수의 30% 이상을 득표해야 당선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88.7%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에 대한 반대는 도시 지역에서 더 두드러졌다. 서울에서는 투표의 3분의 1 가량이 무효표이거나 기권이었던 반면, 동시에 실시된 부통령 선거에서는 무효표가 2.9%에 불과했다.[6]

3월 1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을 발표했다. 같은 날 국회에서도 이를 승인했지만, 민주당은 선거가 불법이라며 이승만 대통령의 즉시 사퇴를 요구하며 퇴장했다.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결과
후보정당득표수득표율
이승만자유당9,633,376100%
조병옥민주당사망-
합계9,633,376-
무효표1,228,896


  • 선거인 수: 11,196,490명
  • 투표자 수: 10,862,272명
  • 투표율: 97.0%


이러한 부정선거는 전국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초래했다.

4. 2. 부통령 선거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경쟁자 없이 당선되면서, 동시에 치러진 부통령 선거가 주목을 받았다. 이승만에 대한 반대는 1956년에 당선된 현직 민주당 후보 장면에게 집중되었다.[2] 선거 결과는 자유당 후보 이기붕의 압승(약 80% 대 장면의 17.5%)을 보였지만, 이는 여론과 전혀 다른 결과였고, 결과가 광범위하게 조작되었다는 것이 분명했다. 한은 "선거 결과는 경찰청과 내무부에 의해 완전히 조작되었다"고까지 말한다.[2]

민주당은 결과를 거부했고, 같은 날 마산에서 선거 결과 조작에 항의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4월 초 이 시위에 참여했던 16세 소년의 시체가 훼손된 채 발견되면서 더 큰 항의의 물결이 일었고, 이승만의 완고한 태도는 불안을 증폭시켜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8] 비록 이승만은 이기붕에게 정계 은퇴를 강요했지만,[9] 선거 결과는 그 해 후반 혁명의 승리 후 무효화되었고, 장면 또한 4월 23일 사퇴했다.[10]

3월 1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승만이 대통령에,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음을 발표했다. 같은 날 국회에서도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 결과를 승인하여 이승만과 이기붕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었음을 선포했지만, 민주당은 앞서 언급했듯이 본 선거가 불법 선거라고 선언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즉시 사퇴를 요구하며 국회에서 퇴장했다.

부통령 선거 결과
후보자정당득표수
이기붕자유당8,337,059
장면민주당1,843,758
김준연통일당249,095
임영신대한여자국민당97,533
출처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


4. 3. 지역별 결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와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의 지역별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지역이승만무효표기권%
colspan="2" |
득표수%득표수%
서울특별시684,14666.0264,19325.587,5778.5
경기도1,139,92784.9168,40112.534,9902.6
강원도829,13194.044,6655.17,9020.9
충청북도510,36986.266,06811.215,8552.7
충청남도988,18090.768,9526.332,7553.0
전라북도919,52987.8113,64010.814,6191.4
전라남도1,398,88792.0108,9027.212,8020.8
경상북도1,403,46183.9203,10512.166,9564.0
경상남도1,632,15986.7190,15810.160,2493.2
제주특별자치도127,58799.08120.65130.4
합계9,633,37686.01,228,89611.0334,2183.0
colspan="7" |
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7]



지역이기붕장면김준연임영신
colspan="2" |colspan="2" |colspan="2" |colspan="2" |
득표수%득표수%득표수%득표수%
서울509,69355.3378,39941.120,1542.212,7041.4
경기955,80475.6278,68622.120,3721.68,7710.7
강원786,59591.664,7437.55,4680.61,5430.2
충북437,88378.698,58317.715,1962.75,1650.9
충남884,85684.7140,56713.512,4881.26,3270.6
전북851,87885.589,8469.032,1763.222,7992.3
전남1,218,24783.8140,6649.780,4915.513,6120.9
경북1,166.34175.5340,21422.027,7591.811,2860.7
경남1,398,63779.5311,32017.734,8692.015,2840.9
제주127,12599.37360.61220.1420.0
합계8,337,05979.21,843,75817.5249,0952.497,5330.9



5. 4.19 혁명과 재선거

4.19 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월 26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밝혔고, 국회 역시 이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후 국회는 개헌 전까지 재선거를 보류하기로 결정했고,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를 존중하면서 재선거는 무산되었다.

5. 1. 재선거 결정 및 무산

국회는 1960년 3월 18일 이승만이기붕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로 발표하였으나, 부통령 부정 선거에 대한 야권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대국민 담화에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밝혔다.[1] 같은 날 국회에서도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1] 결국 다음날인 27일 대통령 당선자인 이승만은 사퇴하고, 5월 3일 국회에서 사퇴서를 정식으로 수리하면서 제4대 대통령의 재선거가 확정됐으며,[1] 28일에는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가 사망함으로써 제5대 부통령 역시 재선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1] 대법원에 제기돼있던 선거 무효 소송은 소송 대상이 둘 다 없어졌고 어차피 재선거가 확정된 터라 진행되지 않았다.[1]

본래 대통령과 부통령의 재선거는 재선거 사유 확정 이후 40일 이내로 시행돼야 했으므로 제5대 부통령의 재선거는 6월 7일, 제4대 대통령의 재선거는 12일까지 실시돼야 했으나,[1] 5월 2일 국회에서 개헌 뒤까지 정·부통령 재선거 보류가 만장일치로 결의되고 재선거 공고권자인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회의 의사를 존중할 것을 표명하면서 재선거는 치러지지 않았다.[1] 1960년 6월 15일 제2공화국 헌법이 시행되며 제1공화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의 직위는 없어져 재선거를 치르지 않아도 되게 되었고, 대신 제2공화국의 헌법 하에 새로이 제4대 대통령 선거를 국회 간접 선거로 실시해 윤보선이 당선되게 되었다.[1]

참조

[1] 서적 Elections in Asia: A data handbook, Volume II
[2] 서적 The Failure of Democracy in South Kore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3] 서적
[4] 웹사이트 3·15부정선거(三一五不正選擧) March 15 Election Fraud https://encykorea.ak[...] 2024-01-27
[5] 서적 Han Unbound: The Political Economy of South Korea Stanford University Press
[6] 간행물 Results of 1948-1992 Presidential Elections National Election Commission of the Republic of Korea
[7] 웹사이트 개표현황 http://info.nec.go.k[...] 2021-04-14
[8] 서적
[9] 서적
[10] 서적 The Republic of Korea: A Political and Economic Study Greenwood Press
[11] 문서 한국의 선거법에서는 후보가 선거운동 기간 중에 사망 등으로 후보자가 부족한 경우에 예비후보를 세울 수 있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12] 서적 분단 후의 한국 정치-1945~1986- 木鐸社
[13] 문서 이미 사망한 사람이나 실제로는 없는 사람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투표용지를 발행하여 자유당 관계자가 부정투표를 하는 것이다.
[14] 문서 투표용지 기입 장소의 비밀성이 유지되지 않고 투표자끼리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서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내통식"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15]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5-05
[16]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5-21
[17]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0-03-26
[18]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0-03-08
[19]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0-03-08
[20]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0-03-26
[21]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0-03-26
[22]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0-03-26
[23] 웹인용 야당계 자치단체장에 압력 https://newslibrary.[...] 2019-05-20
[24] 간행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5] 간행물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편
[26] 서적 선거의 권위주의적 운용과 역기능 나남
[27] 간행물 학민사 편집부 편
[28] 간행물
[29] 서적 다시 찾는 우리 역사 (전면 개정판) 경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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