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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티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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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티니아는 고대 트라키아인 부족인 비티니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지역으로, 현재 튀르키예 북서부에 위치한다. 프로폰티스 해안을 따라 니코메디아, 니케아 등 주요 도시들이 있었으며, 비옥한 계곡과 해안 지역을 포함한 산악 지형을 특징으로 한다. 기원전 297년 비티니아 왕국이 건국되어 독립을 유지하다가, 마지막 왕 니코메데스 4세가 로마에 왕국을 유증하면서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폰토스와 함께 속주로 통치되었으며, 비잔틴 제국 시대에는 사카리아 강을 경계로 두 개의 주로 나뉘었다. 비티니아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니카이아의 히파르코스, 아리아누스 등 여러 주요 인물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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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티니아
개요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내 비티니아 위치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내 비티니아 위치
기본 정보
위치아나톨리아 북부, 현재의 튀르키예
국가그리스인
비티니아인
티니인
역사적 수도니코메디아 (이즈미트)
니카이아 (이즈니크)
역사
존속 기간기원전 297년–기원전 74년
로마 속주비티니아
언어
사용 언어고대 그리스어

2. 지리

마르마라해(프로폰티스)의 비옥한 해안가에는 니코메디아, 칼케돈, 키오스, 아파메아 등 주요 도시들이 있었다. 비티니아에는 또한 니케아 신조가 탄생한 곳으로 유명한 니케아가 있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비티니아는 동쪽으로 상가리우스 강을 경계로 했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구분은 파플라고니아와 구분되는 파르테니우스 강까지 확장되어 마리안디니가 거주하는 지역을 포함했다. 서쪽과 남서쪽으로는 뮈시아와 린다쿠스 강으로 구분되었으며, 남쪽으로는 프리기아갈라티아에 접해 있었다.

산과 숲이 많지만, 비옥한 계곡과 해안 지역도 있다. 가장 중요한 산맥은 울루다(미시아 올림푸스)(약 2438.40m)로, 부르사 위에 우뚝 솟아 있으며 이스탄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뚜렷하게 보인다(약 112.65km). 그 정상은 일 년 중 대부분 눈으로 덮여 있다. 동쪽으로는 산맥이 사카리아 강에서 파플라고니아까지 약 160.93km 이상 뻗어 있다. 이 두 산맥 모두 아나톨리아, 튀르키예의 광대한 고원을 경계로 하는 산의 일부이다.

보스포루스 해안까지 서쪽으로 뻗어 있는 넓은 지역은 언덕이 많고 숲으로 덮여 있지만, 터키의 ''Ağaç Denizi''(나무의 바다)로 불릴 만큼 어떤 산맥도 지나가지 않는다. 서쪽 해안은 두 개의 깊은 만으로 움푹 들어가 있는데, 가장 북쪽은 이즈미트 만(고대 아스타쿠스 만)으로, 약 64.37km 에서 약 80.47km 정도 내륙으로 들어가 이즈미트(고대 니코메디아)까지 뻗어 있으며, 불과 약 40.23km 정도의 지협으로 흑해와 분리되어 있다. 무다냐 만 또는 젬리크 만(키오스 만)은 약 약 40.23km 길이이다. 그 끝에는 이즈니크 호수와 통하는 계곡 입구에 젬리크(고대 키오스)라는 작은 마을이 있으며, 그곳에는 니케아가 위치해 있었다.

주요 강으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방을 가로지르는 상가리오스 강, 뮈시아와 구분하는 린다쿠스 강, 빌라에우스(필리오스) 강이 있다. 빌라에우스 강은 알라다그에서 발원하여 바다에서 약 약 80.47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현대의 볼루 (고대 비티니온-클라우디오폴리스)를 지나 약 160.93km 이상의 길이를 거쳐 헤라클레아 폰티카 (현대 카라데니즈 에레글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약 64.37km 떨어진 고대 티움의 폐허 근처에서 흑해로 흘러 들어간다. 지방의 동쪽 경계인 파르테니우스 강은 훨씬 작고 중요하지 않은 강이다.

흑해 방향의 계곡에는 오렌지와 같은 온갖 종류의 과일 나무가 풍부하며, 상가리우스 계곡과 부르사이즈니크(니케아) 근처의 평원은 비옥하고 잘 경작되어 있다. 광대한 뽕나무 농장은 부르사가 오랫동안 유명해 온 비단을 공급하며, 이곳에서 대규모로 생산된다.

2. 1. 지형

비티니아는 대부분 산과 숲으로 덮여 있었지만, 계곡과 해안 지역은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높은 산은 울루다(부르사 위에 솟아 있으며, 약 2438.40m)로 이스탄불에서도 멀리서 보인다(약 112.65km). 산 정상은 일 년 중 대부분 눈으로 덮여 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비티니아는 동쪽으로 상가리우스 강을 경계로 했지만, 일반적으로 파플라고니아와 구분되는 파르테니우스 강까지 확장되어 마리안디니가 거주하는 지역을 포함했다. 서쪽과 남서쪽으로는 뮈시아와 린다쿠스 강으로 구분되었으며, 남쪽으로는 프리기아갈라티아에 접해 있었다.

보스포루스 해안까지 서쪽으로 뻗어 있는 넓은 지역은 언덕이 많고 숲으로 덮여 있지만, 터키의 ''Ağaç Denizi''(나무의 바다)로 불릴 만큼 어떤 산맥도 지나가지 않는다. 서쪽 해안은 두 개의 깊은 만이 있는데, 북쪽의 이즈미트 만(고대 아스타쿠스 만)은 약 64.37km 에서 약 80.47km 정도 내륙으로 들어가 이즈미트(고대 니코메디아)까지 뻗어 있으며, 약 40.23km 정도의 지협으로 흑해와 분리되어 있다. 무다냐 만 또는 젬리크 만(키오스 만)은 약 약 40.23km 길이로, 끝에는 이즈니크 호수와 통하는 계곡 입구에 젬리크(고대 키오스)가 있으며, 그곳에는 니케아가 위치해 있었다.

주요 강으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방을 가로지르는 상가리오스 강, 뮈시아와 구분하는 린다쿠스 강, 볼루(고대 비티니온-클라우디오폴리스)를 지나 헤라클레아 폰티카(현대 카라데니즈 에레글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약 64.37km 떨어진 고대 티움 근처에서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 빌라에우스(필리오스) 강(약 160.93km 이상)이 있다. 파르테니우스 강은 훨씬 작고 중요하지 않은 강이다.

흑해 방향의 계곡에는 오렌지와 같은 온갖 종류의 과일 나무가 풍부하며, 상가리우스 계곡과 부르사이즈니크 근처의 평원은 비옥하고 잘 경작되어 있다. 부르사는 광대한 뽕나무 농장을 통해 비단을 대규모로 생산한다.

2. 2. 강

스트라본에 따르면, 비티니아는 동쪽으로 상가리우스 강(현 사카리아 강)을 경계로 했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구분은 파플라고니아와 구분되는 파르테니우스 강까지 확장되었다. 서쪽과 남서쪽으로는 뮈시아와 린다쿠스 강으로 구분되었다.

주요 강으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방을 가로지르는 상가리오스 강, 뮈시아와 구분하는 린다쿠스 강, 그리고 알라다그에서 발원하여 바다에서 약 약 80.47km 떨어진 빌라에우스 (필리오스)가 있는데, 현대의 볼루 (고대 비티니온-클라우디오폴리스)를 지나 약 160.93km 이상의 길이를 거쳐 헤라클레아 폰티카 (현대 카라데니즈 에레글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약 64.37km 떨어진 고대 티움의 폐허 근처에서 흑해로 흘러 들어간다. 지방의 동쪽 경계인 파르테니우스 강(현대 바르틴)는 훨씬 작고 중요하지 않은 강이다.

2. 3. 주요 도시

마르마라해(프로폰티스)의 비옥한 해안가에는 니코메디아, 칼케돈, 키오스, 아파메아 등 주요 도시들이 있었다. 니케아 신조로 유명한 니케아 또한 비티니아에 위치했다.

2. 4. 자원

흑해 방향의 계곡에는 오렌지와 같은 온갖 종류의 과일 나무가 풍부하며, 상가리우스 계곡과 부르사, 이즈니크(니케아) 근처의 평원은 비옥하고 잘 경작되어 있다. 광대한 뽕나무 농장은 부르사가 오랫동안 유명해 온 비단을 공급하며, 이곳에서 대규모로 생산된다.

3. 역사

비티니아는 트라키아인 부족인 ''비티니''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헤로도토스 (VII.75)는 ''티니''와 함께 언급하며, 발칸 반도에서 소아시아로의 "트라코-프리지아인" 이주가 청동기 시대의 붕괴 이후 또는 초기 철기 시대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한다. 티니족과 비티니족은 아시아의 인접 지역에 동시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그곳에서 미시아인, 카우콘인 및 기타 소수 부족을 몰아내거나 정복했다. 마리안디니는 북동부에서 자리를 지켰다. 헤로도토스는 티니족과 비티니족이 나란히 정착했다고 언급한다.[1]

이후 고대 그리스인들은 해안에 키우스(현 겜리크), 보스포루스 해협 입구의 칼케돈(현 카디쿄이), 비잔티움(현 이스탄불)과 마주하며, 헤라클레아 폰티카(현 카라데니즈 에레을리)를 흑해에 건설했다. 보스포루스 해협 동쪽에 위치한다.[2]

비티니아인들은 크로이소스 왕에 의해 리디아 왕국에 편입되었으며, 페르시아 제국(기원전 546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헬레스폰트와 보스포루스 해협까지의 모든 국가를 포함하는 사트라피 프리지아에 포함되었다.[1]

알렉산드로스 정복 이전에도 비티니아인들은 독립을 주장했고, 바스와 지포이테스 1세 치하에서 이를 성공적으로 유지했는데, 지포이테스 1세는 기원전 297년에 왕(''바실레우스'')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니코메데스 1세는 니코메디아를 건설했으며, 그의 긴 통치 기간(기원전 278년경 ~ 기원전 255년경)과 그의 후계자들인 프루시아스 1세, 프루시아스 2세, 니코메데스 2세 (기원전 149년 ~ 기원전 91년) 동안 비티니아 왕국은 아나톨리아의 소규모 군주국들 사이에서 상당한 위상과 영향력을 가졌다. 그러나 마지막 왕인 니코메데스 4세는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에 대항하여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로마 원로원에 의해 왕위에 복위된 후,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왕국을 로마 공화국에 기증했다(기원전 74년).[1]

로마 속주로서 비티니아의 경계는 자주 변경되었다. 이 시기 동안, 비티니아는 로마 제국 내에서 행정적 목적으로 폰토스 속주와 함께 통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시대, 대 플리니우스가 이 통합된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을 때(109/110년 ~ 111/112년)가 그러했다.

비잔틴 제국 치하에서 비티니아는 다시 상가리우스 강을 경계로 두 개의 주로 나뉘었는데, 강 서쪽 지역만이 비티니아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비티니아는 도로와 북쪽의 다뉴브 강, 남동쪽의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동방 관구와의 통신을 확보하기 위해 562년경에 기념비적인 상가리우스 다리가 건설되었다. 병사들은 종종 니코메디아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 시기에 비티니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들은 니코메데스 1세가 건설한 니코메디아와 니케아였으며, 두 도시는 수도 지위를 놓고 오랫동안 경쟁했다.

3. 1. 고대

헤로도토스(VII.75)에 따르면 비티니아라는 지명은 트라키아인 부족인 ''비티니''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티니''와 함께 언급된 비티니족은 청동기 시대의 붕괴 이후 또는 초기 철기 시대에 발칸 반도에서 소아시아로 이주한 "트라코-프리지아인"으로 추정된다. 티니족과 비티니족은 아시아의 인접 지역에 동시에 정착하여 미시아인, 카우콘인 및 기타 소수 부족을 몰아내거나 정복했으며, 마리안디니는 북동부에 남았다. 헤로도토스는 티니족과 비티니족이 나란히 정착했다고 언급한다.[1] 이들의 원래 언어는 전해지지 않지만, 헤로도토스는 이들을 트라키아 출신 부족과 관련이 있다고 묘사한다.

이후 고대 그리스인들은 해안에 키우스(현 겜리크), 보스포루스 해협 입구의 칼케돈(현 카디쿄이), 비잔티움(현 이스탄불)과 마주하며, 헤라클레아 폰티카(현 카라데니즈 에레을리)를 흑해에 건설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동쪽으로 약 193.12km 떨어진 곳이다.[2]

비티니아인들은 크로이소스 왕에 의해 리디아 왕국에 편입되었고,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 제국에 복속되었다. 이후 헬레스폰트와 보스포루스 해협까지의 모든 국가를 포함하는 사트라피 프리지아에 포함되었다.[1]

3. 2. 비티니아 왕국 (기원전 297년 ~ 기원전 74년)

알렉산드로스 3세 정복 이전에도 비티니아인들은 독립을 유지했으며, 바스와 지포이테스 1세 치하에서 성공적으로 독립을 지켜냈다. 지포이테스 1세는 기원전 297년에 왕(''바실레우스'') 칭호를 사용했다.[1]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니코메데스 1세는 니코메디아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는 곧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니코메데스 1세의 긴 통치 기간(기원전 278년경-기원전 255년경)과 그의 후계자들인 프루시아스 1세, 프루시아스 2세, 니코메데스 2세 (기원전 149년-91년) 동안 비티니아 왕국은 아나톨리아의 소규모 군주국들 사이에서 상당한 위상과 영향력을 가졌다. 그러나 마지막 왕인 니코메데스 4세는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에 대항하여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로마 원로원에 의해 왕위에 복위된 후,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왕국을 로마 공화국에 기증했다(기원전 74년).

이 왕들의 주화는 그들의 왕족 초상화를 보여주는데, 이는 매우 능숙한 헬레니즘 양식으로 조각되는 경향이 있었다.[1]

3. 3. 로마 제국 시대

로마 속주였던 비티니아의 경계는 자주 변경되었다. 이 시기 동안, 비티니아는 로마 제국 내에서 행정적 목적으로 폰토스 속주와 함께 통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시대, 대 플리니우스가 이 통합된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시기(109/110년~111/112년)가 그러했다. 이는 당시 로마 속주 행정에 관해 역사학자들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기원전 74년 마지막 왕 니코메데스 4세는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패했다. 이후 로마의 힘을 빌려 비티니아 왕국을 재건했지만, 니코메데스 4세는 죽으면서 비티니아를 로마에 유증했다.

로마 지배 하에 들어간 이후 비티니아 속주의 경계는 때때로 변경되었지만, 인접한 폰토스와 함께 하나의 속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110년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대 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 속주의 총독이 되었는데, 트라야누스 황제와의 왕복 서신이 포함된 서간집 10권은 로마 제국의 속주 행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 비티니아 속주는 다시 사카리아 강을 경계로 두 개로 분할되었고, 비티니아라는 명칭은 서쪽 속주에만 남았다.

비티니아 속주는 북쪽의 도나우 강 국경과 남동쪽의 유프라테스 강 국경 사이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했으며, 중요한 가도 또한 통과했기 때문에 로마 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군단은 종종 니코메디아에서 겨울을 보냈다.

가장 중요한 도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에 건설된 니코메디아와 니케아이며, 어느 쪽이 주도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보다 훨씬 오래된 시대에 그리스인보스포루스 해협 입구 근처, 콘스탄티노플 맞은편에 키오스, 칼케돈 등의 정착지를 건설했고,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동쪽으로 200km 떨어진 흑해 연안에 헤라클레아 폰티카를 건설했다. 이들 도시는 상업이 번성했다. 이 외에 이즈미트스쿠타리(현 위스퀴다르) 등은 오늘날까지 중요한 도시로 이어지고 있다.

3. 4. 비잔틴 제국 시대

비잔틴 제국 시대에 비티니아는 상가리우스 강을 경계로 두 개의 주로 나뉘었다. 강 서쪽 지역만이 비티니아라는 이름을 유지했다.[1]

비티니아는 도로와 북쪽의 다뉴브 강, 남동쪽의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동방 관구와의 통신을 확보하기 위해 562년경에 기념비적인 상가리우스 다리가 건설되었다.[1] 니코메디아에서 병사들이 종종 겨울을 보냈다.[1]

이 시기에 비티니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들은 니코메데스 1세가 건설한 니코메디아와 니케아였다. 두 도시는 수도 지위를 놓고 오랫동안 경쟁했다.[1]

3. 5. 오스만 제국 시대 이후

(오스만 제국 시대 이후의 내용은 원본 문서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4. 주요 인물


  • 니카이아의 히파르코스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천문학자. 세차운동을 발견하고, 일식의 시기를 예측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 비티니아의 테오도시우스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 비티니아의 아스클레피아데스 (기원전 169년경 ~ 기원전 100년경), 그리스 의사.
  • 안티누스 (2세기),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카타미테이자 에로메노스.
  • 카시우스 디오 (155년경 ~ 235년경), 로마 역사가, 로마 원로원 원로원 의원, 로마 집정관.
  • 아리아누스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아리아누스, 기원후 86년경 ~ 160년경), 그리스 역사가.
  • 헬레나 (250년경 ~ 330년경),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 프리니쿠스 아라비우스 (2세기), 문법학자.
  • 비티니아의 아욱센티우스 (400년경 ~ 473년), 은둔자.
  • 비티니아의 히파티우스 (450년경 사망), 은둔자.
  • 비티니아의 벤데미아누스 (6세기), 은둔자.

5. 비티니아 왕국 역대 군주

이름재위 기간
지포이테스 1세기원전 328년 ~ 기원전 279년
니코메데스 1세기원전 279년 ~ 기원전 255년
지포이테스 2세기원전 279년 ~ 기원전 276년
에타제타기원전 255년
지아엘라스기원전 255년 ~ 기원전 228년
프루시아스 1세기원전 228년 ~ 기원전 185년
프루시아스 2세기원전 185년 ~ 기원전 149년
니코메데스 2세기원전 149년 ~ 기원전 128년
니코메데스 3세기원전 128년 ~ 기원전 94년
니코메데스 4세기원전 94년 ~ 기원전 74년


참조

[1] 웹사이트 Kings of Bithynia - Asia Minor Coins - Photo Gallery https://www.asiamino[...]
[2] 서적 Herodot, VII. 75
[3] 웹사이트 プリニウス(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 https://kotobank.jp/[...] 2021-10-22
[4] 웹사이트 プリニウス(小) https://kotobank.jp/[...]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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