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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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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낙타 전투는 656년, 제4대 칼리프 알리와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 그리고 탈하와 주바이르가 이끄는 반대 세력 간에 벌어진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내전이다. 알리와 아이샤 사이의 갈등, 우스만 암살 사건의 여파, 그리고 알리의 칼리프 즉위 과정에서 불거진 정치적, 종교적 이견이 전투의 배경이 되었다. 전투는 아이샤가 낙타를 타고 지휘하는 가운데 바스라에서 벌어졌으며, 알리 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는 이슬람 공동체의 분열을 심화시켰으며,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의 기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알리는 전투 후 관용적인 조치를 취했지만, 무아위야를 비롯한 반대 세력과의 갈등은 계속되었으며, 쿠파로의 천도는 시아파의 성장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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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명칭낙타 전투
부분제1차 피트나
날짜656년 12월 8일 (AH 36년 즈마달 울라 15일)
장소이라크 바스라
결과알리의 승리
낙타 전투에서의 알리 (4대 칼리프)와 아이샤
알리 (4대 칼리프)와 아이샤, 낙타 전투에서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알리 군대
교전 세력 1 상세바누 하심
쿠파 부족민
바스라의 바누 압둘 카이스와 바누 바크르
타이이
자트
교전 세력 2아이샤, 탈하, 주바이르 군대
교전 세력 2 상세바누 우마이야
메카의 쿠라이시
바스라의 바누 타밈과 아즈드 일부
바누 아미르
지휘관 및 지도자
알리 군 지휘관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하산 이븐 알리
후세인 이븐 알리
말리크 알아슈타르
아디 이븐 하팀
암마르 이븐 야시르
무함마드 이븐 아비 바크르
압둘-라흐만 이븐 아비 바크르
아부 카타다 이븐 라비 알-안사리
자비르 이븐 압드-알라
무함마드 이븐 알-하나피야
아부 아유브 알-안사리
카이스 이븐 사드
압드 알라 이븐 압바스
쿠자이마 이븐 타비트
준답 알-아즈디
알리 이븐 다누르
아이샤 군 지휘관아이샤
주바이르 이븐 알-아왐
탈하 이븐 우바이드 알라
무함마드 이븐 탈하
카압 이븐 수르
압드 알라 이븐 알-주바이르
마르완 1세
압드 알라 이븐 사프완
야히야 이븐 알-하캄
우트바 이븐 아비 수프얀
주파르 이븐 알-하리스 알-킬라비
압둘-라흐만 이븐 앗타브 이븐 아시드
병력 규모
알리 군 병력약 10,000명
아이샤 군 병력약 10,000명
피해 규모
알리 군 사상자400명~500명 이상
아이샤 군 사상자2,500명 이상

2. 배경

무함마드의 사촌인 알리와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 사이에는 생전부터 감정적인 대립이 있었다.[5] 아이샤는 무스탈리크족과의 전투 후 무함마드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을 때, 알리가 신의 계시가 내려질 때까지 자신의 정절을 의심했기 때문에 알리에게 원한을 품었다.[3][6] 무함마드 사후 칼리프 선출 과정에서 알리는 무함마드의 장례식을 이유로 참가하지 않았고, 아이샤는 아내임에도 장례식 참가를 거부당한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7] 또한 무함마드의 딸이자 알리의 아내인 파티마의 유산 상속은 아이샤의 아버지 아부 바크르에게 인정받지 못해, 알리 부부에게 불신감이 남았다.[7]

제3대 정통 칼리프 우스만이 암살당한 후, 알리는 칼리프로 추대되었으나 한 번 거절했다. 이후 주바이르와 탈하 등 메카의 정적들이 바이야 (충성의 맹세)를 한 후에 즉위했다.[8] 알리는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정책에 소극적이었고, 무하지룬보다 안사르의 입장을 취했다.[9] 그는 즉위 후 우스만 암살에 관여한 모든 사람에게 은사를 내리고, 우마이야가 출신 총독들을 대거 경질했다.[8] 이러한 알리의 대처에 우마이야가는 불만을 품었고, 메카에 거주하던 아이샤에게 모인 사람들은 알리에게 우스만 살해 책임을 묻는 운동을 일으켰다.[8]

2. 1. 우스만 이븐 아판 암살 사건과 그 여파

우스만쿠란수나에서 벗어났다는 비난을 자주 받았으며, 탈하와 주바르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위 동료들도 이러한 비판에 동참했다. 우스만은 족벌주의, 부패, 불의로 널리 비난받았으며, 알리는 그의 친족들에게 보낸 호화로운 선물을 포함하여 그의 행동에 항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리는 또한 아부 다르와 아마르와 같은 솔직한 동료들을 칼리프의 분노로부터 보호했다. 알리는 초기 자료에서 우스만을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서 그를 제지하는 영향력으로 나타난다. 알리의 일부 지지자들은 우스만에 대한 반대 세력의 일부였으며, 무함마드의 동료였던 탈하와 주바르, 그리고 그의 미망인 아이다가 그들의 노력에 동참했다. 아이다는 우스만의 종교적 혁신과 족벌주의를 비판했지만, 그녀의 연금을 삭감한 것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35/656년에 지방에서 온 불만 세력들이 메디나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집트 반대파는 알리의 조언을 구했는데, 그는 탈하와 아마르 이븐 야시르와 달리, 우스만과 협상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이집트인들에게 도시로 진격하라고 부추겼을 수도 있다. 알리는 또한 이라크 반대파에게 폭력을 피하도록 요청했고, 그들은 이에 따랐다. 그는 또한 우스만과 지방 반대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 번 이상 수행하여 그들의 경제적 및 정치적 불만을 해결했다. 특히 그는 반군이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고 첫 번째 포위를 끝내기 위해 우스만을 대신하여 약속을 협상하고 보장했다. 알리는 그 후 우스만에게 공개적으로 뉘우칠 것을 촉구했고, 그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칼리프는 곧 그의 진술을 철회했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비서 마르완이 뉘우침이 반대파를 더욱 용감하게 할 것이라고 그를 설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몇몇 이집트 반군이 그들의 처벌을 명령하는 공식 서신을 가로챘다. 그들은 메디나로 돌아와 우스만의 거주지를 두 번째로 포위하고, 그가 퇴위할 것을 요구했다. 칼리프는 거부했고 그 편지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편지에 대해 마르완은 초기 자료에서 종종 비난을 받는다. 알리와 또 다른 동료는 그 편지에 대해 우스만을 지지했으며, 마르완을 의심했지만, 수니파 알-발라두리의 보고에 따르면 칼리프는 알리가 편지를 위조했다고 비난했다. 이것은 알리가 더 이상 우스만을 위해 중재하는 것을 거부했을 때일 가능성이 높다. 알리가 그 편지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레오네 카에타니의 의견이기도 하다. 조르지오 레비 델라 비다는 확신하지 못하는 반면, 윌퍼드 매델룽은 어떤 증거도 없다는 점에서 그것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하며 그 비난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그는 차례로 우스만의 호전적인 비서인 마르완을 비난하며, 휴 N. 케네디는 그 편지에 대해 우스만이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칼리프는 그 후 35 AH(656년 6월)의 마지막 날에 이집트 반군에 의해 메디나의 그의 거주지에 대한 습격 동안 암살되었다.

우스만의 사후, 알리는 칼리프로 추대되지만 칼리프 취임을 한 번 거절하고, 주바르와 탈하 등 메카의 정적이 바이야 (충성의 맹세)를 한 후에 즉위했다. 알리는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가 취했던 정책에 소극적이었고, 무하지룬 (히즈라에 의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이슬람교도)보다 안사르 (히즈라 이전부터 메디나에 거주하며, 히즈라 후에 개종한 이슬람교도) 측 입장을 취했다. 즉위한 알리는 우스만 암살에 관여한 모든 사람에게 은사를 주고, 많은 우마이야가 출신 총독을 경질했다.

2. 2. 알리와 반대 세력의 갈등

무함마드 생전부터 무함마드의 사촌인 알리와 무함마드의 아내인 아이샤 사이에는 감정적인 대립이 있었다.[5] 아이샤는 무스탈리크족과의 전투 후 무함마드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을 때, 알리가 신으로부터 계시가 내려질 때까지 자신의 정절을 의심했기 때문에 알리에게 원한을 품었다.[3][6] 무함마드 사후 칼리프 선출 과정에서 알리는 무함마드의 장례식을 이유로 참가하지 않았고, 아이샤는 아내임에도 장례식 참가를 거부당한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7] 또한 무함마드의 딸이자 알리의 아내인 파티마의 유산 상속은 아이샤의 아버지 아부 바크르에게 인정받지 못해, 알리 부부에게 불신감이 남았다.[7]

제3대 정통 칼리프 우스만 사후, 알리는 칼리프로 추대되었으나 한 번 거절했다. 이후 주바이르와 탈하 등 메카의 정적들이 바이야 (충성의 맹세)를 한 후에 즉위했다.[8] 알리는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정책에 소극적이었고, 무하지룬 (히즈라를 통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이슬람교도)보다 안사르 (히즈라 이전부터 메디나에 거주하다가 히즈라 이후 개종한 이슬람교도)의 입장을 취했다.[9] 알리는 즉위 후 우스만 암살에 관여한 모든 사람에게 은사를 내리고, 우마이야가 출신 총독들을 대거 경질했다.[8] 이러한 알리의 대처에 우마이야가는 불만을 품었고, 메카에 거주하던 아이샤에게 모인 사람들은 알리에게 우스만 살해 책임을 묻는 운동을 일으켰다.[8]

3. 낙타 전투의 전개

알리우스만을 비판했지만, 그의 폭력적인 죽음을 정당화하거나 살해범들을 비난하지는 않았다.[10] 알리는 우스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일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무아위야에게 보낸 편지에서 적절한 시기에 살인자들을 재판에 회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0]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알리가 이들을 처벌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고 주장한다.[10]

즈바일과 탈하는 한때 알리에게 바이아를 했지만, 메카아이샤와 합류하여 알리가 우스만 암살의 배후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656년 10월, 이들은 바스라로 입성하여 도시를 장악했다.[11]

알리는 쿠파로 이동하여 아이샤 등과 대항했다.[9] 656년 12월, 바스라 교외의 와디 사바|사자의 마른 골짜기ar에서 알리 군과 반란군은 대치한다. 알리가 탈하에게 바이아 불이행을 추궁하자, 탈하는 앞선 바이아는 협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되받아쳤다.[17] 알리는 즈바일에게 무함마드의 "네가 불의를 행할 때에만 그와 싸우라"는 말을 인용하며 설득했고, 즈바일은 군 철수를 승낙했다.[18] 그러나 즈바일은 아들 압둘라의 설득에 다시 알리와 대진했다.[18]

전투 전날 밤, 알리는 화해를 호소했지만, 우스만 암살 참가자들의 습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19] 전투 중에 탈하는 흐르는 화살에 의한 출혈로 전사하고,[20] 즈바일은 메디나로 퇴각하는 도중에 살해된다.[21] 아이샤는 아스칼이라는 낙타를 타고 전투를 독려했지만,[23] 알리 군이 낙타를 공격하여 아이샤는 포로가 되었다.[24]

3. 1. 반 알리 세력의 결집과 바스라 점령

아이샤, 탈하, 주바이르는 메카에서 연합하여 알리에게 우스만 암살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10] 656년 10월, 이들 반(反) 알리 세력은 우스만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은 바스라로 이동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알리에게 대항할 준비를 했다.[11] 바스라로 가는 동안 탈하와 주바이르는 예멘의 카아브, 라비아의 문지르, 바스라의 아흐나프 등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이들은 긍정적인 답변을 주지 않았다.[11]

처음에 바스라 주민들은 알리와 아이샤 중 누구를 지지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의견이 나뉘었다.[12] 그러나 알리가 바스라를 다스리도록 임명했던 우스만 빈 후나이프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이슬람교도 사이의 싸움을 막으려고 노력했던 사하바 후카임 빈 자바라는 탈하에게 살해당했다.[13] 후카임이 살해된 후, 탈하와 주바이르는 바스라에 숨어 있던 우스만 암살 관련자들을 처형하고, 바스라를 완전히 장악했다.[13]

3. 2. 알리의 대응과 쿠파로의 이동

알리는 우스만 암살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칼리프 자리에 올랐지만, 메디나를 장악한 지방 반군과 안사르의 지지를 받았다.[10] 그러나 우마이야 가문은 메디나에서 도망쳤고, 알리는 우스만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10]

탈하와 즈바일은 한때 알리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메디나를 떠나 메카아이샤와 합류하여 알리가 우스만 암살의 배후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10] 이들은 우스만의 지지세가 강한 바스라로 이동하여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11]

알리는 초기에는 반란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아랍인들이 많아 자신의 지지 기반이 될 수 있는 쿠파로 이동하여 군대를 소집했다.[9] 알리의 심복 아슈타르는 쿠파에서 알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12,000명의 쿠파 시민들이 알리 군에 합류했다.[16]

3. 3. 전투의 발발과 경과

알리는 탈하와 주바이르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우스만 암살 책임 문제와 알리의 칼리파직 인정 여부를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17] 와디 사바ar("사자의 마른 골짜기"의 뜻)에서 알리 군과 반란군은 대치하였다. 알리가 탈하에게 바이아 불이행을 추궁하자, 탈하는 앞선 바이아는 협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되받아쳤다.[17] 알리는 주바이르의 잘못을 지적한 후, 무함마드의 "네가 불의를 행할 때에만 그와 싸우라"는 말을 인용하며 설득했고, 주바이르는 군 철수를 승낙했다.[18] 그러나 주바이르는 아들 압둘라의 설득에 다시 알리와 대진했다.[18]

656년 12월, 바스라 교외에서 알리 군과 반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19] 전투 전날 밤 알리는 화해를 호소하며 반란군을 설득하려 했고, 반란군도 한때 제안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밤중에 처벌을 두려워한 우스만 암살 참가자들이 반란군 진영을 습격했고, 반란군은 이를 알리 측의 공격으로 오인하여 전투 준비를 재개했다.[19] 반란군의 동향을 알게 된 알리는 화해의 뜻이 없음을 확인하고 개전을 결의했다.[19]

전투 중 탈하는 흐르는 화살에 의한 출혈로 전사하고,[20] 주바이르는 메디나로 퇴각하는 도중에 살해된다.[21] 아이샤는 아스칼이라는 낙타를 타고 전투를 독려했고,[23] 낙타 주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정오 무렵, 아이샤는 가마를 단 낙타를 타고 전투 중지를 호소했으나, 우스만 살해자들이 아이샤에게 공격을 가해 전투가 재개되었다.[22] 아스칼 주변에서 격전이 벌어져, 알리 군 병사가 낙타에게 화살을 쏘자 70명 정도의 반란군 병사가 아이샤를 지키다 전사했다.[23] 알리는 낙타의 다리를 공격하라고 명령했고,[23] 반란군이 도주할 때 낙타의 뒷다리가 잘렸다.[24]

3. 4. 알리의 승리와 아이샤의 체포

알리 군은 아이샤가 탄 낙타를 쓰러뜨리고 아이샤를 체포하면서 전투는 알리의 승리로 끝났다.[3][8]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우마이야 가문은 우스만 암살 이후 메디나를 탈출했는데, 그중에는 그의 비서 마르완이 있었다.[4] 이들 대부분은 메카에 모였으나 일부는 다마스쿠스로 갔다.[4] 메카는 알리에 맞서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4] 반란군은 우스만의 메카 총독이었던 압드 알라 이븐 아미르와 동맹을 맺었다.[4] 우마이야 가문은 탈하, 주바이르와 함께 알리에게 반대했지만, 이들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 마델룽은 이들이 우스만 사후 칼리파 자리가 자신들의 권리라고 믿었을 것이라 추정한다.[4] 실제로 일부 우마이야 가문 사람들은 탈하와 주바이르가 승리하면 칼리파 자리를 노릴 것이 분명해지자 이탈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사'이드 이븐 알-아스와 압드 알라 이븐 칼리드 이븐 아시드가 포함된다. 반란군에 남은 이들 중에는 마르완과 우스만의 아들들인 아반과 왈리드가 있었다.[4]

쿠파에 거점을 둔 알리는 적대 세력의 불만을 해소하고자 공고를 내고 현금을 지급했다.[4] 우스만 시대에 임명된 지방 총독 대부분은 해임되거나 알리에게 충성 맹세를 했지만,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는 우스만 암살범 처벌을 요구하며 충성 맹세를 거부했다.[4] 메디나아이샤는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무함마드의 언행을 전하며 평온한 삶을 보냈다.[4] 주바이르의 아들 우르와는 아이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학문에 정진했다. 탈하의 묘는 바스라에 안치되어 많은 시민들의 신앙 대상이 되었다.[27]

낙타 전투는 이슬람교도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전투(피트나)였으며,[3][8] 고위 교우들 간의 항쟁은 훗날 이슬람 사상사에서 쟁점이 되었다.[10]

4. 1. 알리의 관용 조치와 그 한계

알리는 낙타 전투에서 승리한 후 포로들을 석방하고, 반란 가담자들에게 대대적인 사면령을 발표했다.[4] 이는 알리가 이슬람 공동체의 화합을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조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알리의 관용적인 조치에 불만을 품은 일부 세력은 '하와리즈'로 분리되어 알리에게 대항했다.[8][10] 이들은 알리가 반란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더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했다. 하와리즈의 등장은 알리가 직면한 또 다른 어려움을 보여준다.

4. 2. 쿠파로의 천도와 시아파의 성장

알리는 쿠파를 거점으로 삼았다.[4] 이 사건은 훗날 시아파수니파의 대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졌으며, 부와이흐 왕조 시대에는 바그다드의 수니파 주민들이 시아파 주민들을 도발하기 위해 낙타 전투를 연출하기도 했다.[10]

4. 3. 이슬람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 심화

낙타 전투는 이슬람 공동체 내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무력 충돌로, 이후 이슬람 세계의 분열과 갈등을 예고했다.[3][8] 이 전투는 알리를 지지하는 세력과 아이샤, 탈하, 주바이르를 중심으로 하는 반대 세력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단순히 파벌 간의 권력 다툼으로만 볼 수 없는 이 사건의 배경에는 칼리프의 역할과 움마(이슬람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근본적인 의견 차이가 있었다.[8] 특히, 우스만의 죽음에 대한 책임 문제와 알리의 대응 방식은 양측의 갈등을 더욱 격화시켰다.

이 전투는 이후 시아파수니파 분열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0] 후대에 시아파에 대한 수니파의 싸움의 상징으로도 여겨졌으며, 부와이흐 왕조 시대에는 바그다드의 수니파 주민이 시아파 주민을 도발하기 위해 낙타 전투를 연출하기도 했다.[10]

5. 역사적 평가 및 논쟁

바스라 사람들은 알리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뉘었지만, 대체로 알리에게 충성을 유지했다.[4] 알리가 이전에 평판이 좋지 않던 우스만 총독을 안사르 출신의 정직한 우스만 이븐 후나이프로 교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4] 일부는 탈하가 이전에 우스만의 죽음을 요구하는 편지를 쓴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복수 요구에 반대하기도 했다.[4]

알리와 반군 사이의 협정은 총독의 관저, 모스크, 재무부는 총독의 통제를 유지하고 반군은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4] 그러나 반군은 곧 도시를 습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바스라와 그 재무부를 장악했다.[4] 총독은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지만, 나중에 석방되어 도시에서 추방되었다.[4] 일부 (수니파) 전통은 반군의 온건함과 자기 방어를 칭찬하지만, 베치아 바글리에리는 이를 일축하며 반군이 식량과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폭력을 선동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4] 반군은 바스라 사람들에게 우스만의 포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고, 약 600명의 남자가 반군에 의해 살해되었다.[4]

바스라에서 아이샤는 알리에 반대하도록 선동하는 편지를 쿠파인과 그들의 총독, 메디나인, 그리고 하프사 빈트 우마르(무함마드의 또 다른 미망인)에게 보냈다. 그러나 하프사 빈트 우마르는 반대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다.[4] 쿠파에 거점을 둔 알리는 적대 세력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공고를 열어 현금을 지급했다.[4]

메디나의 아이샤는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무함마드의 언행을 전하며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4] 주바이르의 아들 중 한 명인 우르와는 아이샤에게 사사하여 학문에 매진했다. 탈하의 묘는 바스라에 놓여 많은 시민의 신앙 대상이 되었다.[27]

5. 1. 낙타 전투에 대한 다양한 해석

낙타 전투는 이슬람교도 간에 처음 일어난 전투(피트나)로[3][8], 고위 교우들의 항쟁은 후세 이슬람 사상사에서 쟁점이 되었다[10]。이 전투는 단순히 알리파와 아이샤파의 파벌 항쟁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으며, 칼리프의 역할, 움마(이슬람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의견 차이도 무력 충돌의 배경에 있었다고 여겨진다[8]。훗날 시아파에 대한 수니파의 싸움의 상징으로도 여겨졌으며, 부와이흐 왕조 시대에는 바그다드의 수니파 주민이 시아파 주민을 도발하기 위해 낙타 전투를 연출하기도 했다[10]

5. 2. 낙타 전투의 역사적 의의

낙타 전투는 이슬람교도 간에 처음으로 일어난 전투(피트나)이며[3][8], 고위 교우(敎友)들의 항쟁은 이후 이슬람 사상사에서 쟁점이 되었다[10]。 이 전투는 단순히 알리파와 아이샤파의 파벌 항쟁으로만 해석할 수 없으며, 칼리파의 역할, 움마(이슬람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의견 차이도 무력 충돌의 배경에 있었다고 여겨진다[8]。 훗날 시아파에 대한 수니파의 싸움의 상징으로도 여겨졌으며, 부와이흐 왕조 시대에는 바그다드의 수니파 주민이 시아파 주민을 도발하기 위해 낙타 전투를 연출하기도 했다[10]

참조

[1] 웹사이트 Islamic period http://www.ismaili.n[...] 2006-07-06
[2] 웹사이트 The Battle of Basra (the battle of Camel) https://www.al-islam[...] 2013-11-10
[3] 서적 ヒッティ『アラブの歴史』上、351-353頁
[4] 서적 佐藤『イスラーム世界の興隆』、84-85頁
[5] 서적 小杉『イスラーム文明と国家の形成』、187-188頁
[6] 서적 前嶋『イスラム世界』、89-92,118頁
[7] 서적 小杉『イスラーム文明と国家の形成』、188頁
[8] 서적 レザー・アスラン『変わるイスラーム』(白須英子訳, [[藤原書店]], 2009年3月)、190-192頁
[9] 서적 余部『イスラーム全史』、60-61頁
[10] 서적 清水「ラクダの戦い」『岩波イスラーム辞典』、1036頁
[11] 서적 森、柏原『正統四カリフ伝』下巻、184-185頁
[12] 서적 森、柏原『正統四カリフ伝』下巻、186-187頁
[13] 서적 森、柏原『正統四カリフ伝』下巻、194-195頁
[14] 서적 森、柏原『正統四カリフ伝』下巻、177,183頁
[15] 서적 森、柏原『正統四カリフ伝』下巻、183-184頁
[16] 서적 森、柏原『正統四カリフ伝』下巻、198-199頁
[17] 서적 アッティクタカー『アルファフリー』1、179頁
[18] 서적 アッティクタカー『アルファフリー』1、180頁
[19] 서적 森、柏原『正統四カリフ伝』下巻、202-203頁
[20] 서적 アッティクタカー『アルファフリー』1、181頁
[21] 서적 小杉『イスラーム文明と国家の形成』、328頁
[22] 서적 森、柏原『正統四カリフ伝』下巻、205頁
[23] 서적 前嶋『イスラム世界』、120頁
[24] 서적 アッティクタカー『アルファフリー』1、182頁
[25] 서적 アッティクタカー『アルファフリー』1、180,182頁
[26] 서적 小杉『イスラーム文明と国家の形成』、189頁
[27] 서적 アッティクタカー『アルファフリー』1、181-182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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