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혜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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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양혜충은 8세기 당나라 시대의 선승으로, 혜능의 제자이며 국사로 추앙받았다. 16세까지 말을 하지 않다가 혜능을 만나 제자가 되었고, 이후 남양 백애산에서 40년간 은거하며 교화에 힘썼다. 당나라 숙종과 대종의 존경을 받았으며, 경전 연구와 선 명상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의 가르침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쳐, 여러 공안집에 등장하며, 중국에서 국사라 하면 혜충을 지칭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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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혜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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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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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남양 혜충 |
다른 이름 | 충국사(忠國師) |
중국어 | 남양 혜충(南陽慧忠, Nányáng Huìzhōng) |
한국어 | 남양 혜충(南陽慧忠, Namyang Hyech'ung) |
일본어 | 남양 혜충(南陽慧忠, Nan'yō Echū) |
베트남어 | 남양 혜충(Nam Dương Huệ Trung) |
출생 | 675년 |
사망 | 775년 (100세) |
종교 | 선 |
종파 | 선 |
사상 | 무정불성(無情佛性) |
존칭 | 국사(國師), 대증선사(大証禅師) |
속성 | 염(冉)씨 |
출생지 | 월주(越州) 제기현(諸曁縣). 현재의 저장성주지시. |
사찰 | 남양 백애산 향엄사 |
학문 및 경력 | |
스승 | 대감 혜능 |
제자 | 담연 |
직업 | 선사 |
기타 정보 | |
시호 | 대증선사(大証禅師) |
2. 생애
남양혜충은 주지 시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율종 스승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16세에 혜능의 제자가 되어 수행하고 인가를 받았다.[5] 혜능이 입적한 후 오령, 사명산, 천목산 등을 다니며 공부했고, 남양 백애산(白崖山)의 당자곡에 암자를 짓고 40년 동안 은거했다.[6]
상원 2년(761년) 숙종의 부름으로 장안에 올라 궁정에서 가르침을 설했다. 숙종과 대종 두 황제가 남양혜충에게 보살계를 받고 국사(國師)로 예우했다.[6] 혜충은 "선종 황금기"를 거치며 동산 종파가 여러 종파로 분열되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특정 파벌과 연계하지 않고 남양에서 40년간 선 수행에 정진했다.[1]
혜충은 일부 홍주 스승들이 경전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에 비판적이었으며, 선 수행과 경전 연구를 함께 강조했다. 또한 마조 도일의 가르침을 비판하기도 했다.[2] 대력 10년 12월 19일(776년 1월 14일) 입적했고, 대종은 국사호를 내렸다. 중국에서는 국사라고 하면 대부분 혜충을 가리킨다. 그의 가르침 일부는 서하어 버전으로 카라코토에서 발견되어 보존되었다.[3]
2. 1. 출가 전
남양혜충은 16세가 될 때까지 말도 하지 않았고, 사람을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어느 선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예배를 하였다. 부모가 이를 보고 선사에게 아들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선사는 남종선 6대 조사인 혜능을 추천해주었다.[5] 혜충은 어린 시절부터 불법을 배워 경전에 능통했다.2. 2. 혜능의 제자
남양혜충은 16세가 될 때까지 말도 하지 않았고, 사람을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어느 선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예배를 하였다. 부모가 이를 보고 선사에게 아들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선사는 남종선 6대 조사인 혜능을 추천해주었다.[5]혜능의 제자가 되어 수행하고 인가를 받은 후, 남양(南陽) 백애산(白崖山)의 당자곡에 머물며 40년 동안 교화를 하였다.[6] 16세에 혜능의 문하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었다. 혜능이 입적한 후 오령, 사명산, 천목산 등을 역유하며 참학했고, 남양 백애산의 당자곡에 암자를 짓고 40년 동안 은거했다.[6]
2. 3. 은거와 교화
혜능의 제자가 되어 수행하고 인가를 받은 후, 남양 백애산(白崖山)의 당자곡에 머물며 40년 동안 교화를 하였다.[5] 상원 2년(761년) 정월 16일에 숙종이 불러 장안의 천복사(千福寺) 서선원(西禪院)에 머물렀다. 후에, 광택사(光宅寺)로 돌아갔다. 숙종과 대종이 남양혜충으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국사(國師)의 예를 내렸다.[6]혜충은 주지 시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율종 스승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혜충은 소위 "선종 황금기"를 거쳤으며, 이 시기에 많은 중요한 발전이 있었는데, 특히 동산 종파가 북종, 남종, 그리고 사천 종파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국사는 다양한 파벌과의 연계를 피했다. 대신 그는 761년 숙종 황제에 의해 소환되기 전까지 남양의 백애산(白崕) 당자곡(黨子)에서 40년 동안 끊임없이 선 수행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이 시점에서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졌고, 그는 두 명의 중국 황제, 숙종과 대종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으며 황실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또한 국사(國師)라는 드문 칭호를 받았다.[2]
혜충은 남종의 일부 홍주 스승들이 경전 공부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신 혜충은 선 명상 수행과 함께 경전 연구를 선의 길을 실천하는 올바른 방법으로 강조했다.[2] 그는 또한 "부처는 마음이다"라고 말하는 마조 도일의 가르침을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비판했다.[2]
혜능이 입적한 후 오령, 사명산, 천목산 등을 역유하며 참학했고, 남양 백애산의 당자곡에 암자를 짓고 40년 동안 은거했다.
3. 사상과 가르침
혜충은 주지 시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율종 스승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혜충은 소위 "선종 황금기"를 거쳤으며, 이 시기에 동산 종파가 북종, 남종, 그리고 사천 종파로 분열되는 등 많은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혜충은 다양한 파벌과의 연계를 피했다. 대신 761년 숙종 황제에 의해 소환되기 전까지 남양의 백애산(白崕) 당자곡(黨子)에서 40년 동안 끊임없이 선 수행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이 시점에서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졌고, 숙종과 대종 두 명의 중국 황제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으며 황실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또한 국사(國師)라는 드문 칭호를 받았다.[2]
혜충은 후대에 영향력 있는 인물로 남았으며, ''벽암록'', ''종용록'', ''무문관''을 포함한 수많은 공안집에 등장한다. 그의 가르침 중 일부는 서하어 버전으로 카라코토에서 발견되어 보존되었다.[3]
3. 1. 경전과 선의 조화
혜충은 남종의 일부 홍주 스승들이 경전 공부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가졌다.[2] 혜충은 선 명상 수행과 함께 경전 연구를 선의 길을 실천하는 올바른 방법으로 강조했다.[2] 그는 또한 "부처는 마음이다"라고 말하는 마조 도일의 가르침을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비판했다.[2]3. 2. 즉심즉불 비판
혜충은 남종의 일부 홍주 스승들이 경전 공부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2] 그는 선 명상 수행과 함께 경전 연구를 선의 길을 실천하는 올바른 방법으로 강조했다.[2] 또한 "부처는 마음이다"라고 말하는 마조 도일의 가르침을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비판했다.[2]4. 일화
남양혜충과 관련된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혜능은 남양혜충을 보고 전쟁 없이 천자가 되어 60년간 나라를 다스리고 불법을 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남양혜충은 100년 동안 천자 자리에 있는 것도 원치 않는다며 출가를 요청했고, 혜능은 그가 세상에 홀로 선 부처가 될 것이라며 허락했다.[7]
국사가 시자를 세 번 부르자 시자가 세 번 대답했다. 국사는 자신이 시자를 저버린 줄 알았는데, 오히려 시자가 자신을 저버렸다고 말했다.
숙종 황제가 충국사에게 백 년 후에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자, 국사는 무봉탑(無縫塔)을 하나 지어달라고 답했다. 황제가 탑의 형상을 묻자 국사는 한참 있다가 "알겠는가?"라고 물었고, 황제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국사는 자신의 제자 담원이 이 일에 정통하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국사가 세상을 떠난 후, 황제는 담원에게 조서를 내려 물었고, 담원은 "상(湘)의 남쪽, 담(潭)의 북쪽."이라고 답했다.
4. 1. 천자의 꿈
혜능이 남양혜충을 보고는 성스럽고 밝아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도 천자가 되어 60년을 다스릴 것이니, 불법을 위하라고 말했다. 이에 남양혜충은 60년뿐 아니라 100년의 천자도 원하지 않으니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 혜능은 남양혜충이 천하에 홀로 선 부처가 되리라고 하며 출가를 허락했다.[7]4. 2. 무문관 제17칙
국사가 시자를 세 번 불렀다. 시자가 세 번 대답했다. 국사가 말하길, "나는 네가 나를 저버린 줄 알았는데, 원래는 너가 나를 저버렸구나."4. 3. 벽암록 제18칙
숙종 황제가 충국사에게 물었다. "백 년 후에 무엇이 필요하오?" 국사가 말했다. "늙은 중에게 무봉탑(無縫塔)을 하나 지어주십시오." 황제가 말했다. "스님, 탑의 형상을 말씀해주십시오." 국사가 한참 있다가 말했다. "알겠는가?" 황제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국사가 말했다. "저에게는 법을 전수받은 제자 담원이 있어, 이 일에 정통합니다. 조서를 내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국사가 세상을 떠난 후, 황제는 담원에게 조서를 내려 물었다. "이 뜻이 어떠하오?" 담원이 말했다. "상(湘)의 남쪽, 담(潭)의 북쪽."5. 영향
혜충은 주지 시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율종 스승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혜충은 소위 "선종 황금기"를 거쳤으며, 이 시기에 동산 종파가 북종, 남종, 그리고 사천 종파로 분열되는 등 많은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국사는 다양한 파벌과의 연계를 피했다. 대신 761년 숙종 황제에 의해 소환되기 전까지 남양의 백애산(白崕) 당자곡(黨子)에서 40년 동안 끊임없이 선 수행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이 시점에서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졌고, 숙종과 대종 두 명의 중국 황제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으며 황실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또한 국사(國師)라는 드문 칭호를 받았다.[2]
혜충은 남종의 일부 홍주 스승들이 경전 공부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혜충은 선 명상 수행과 함께 경전 연구를 선의 길을 실천하는 올바른 방법으로 강조했다.[2] 그는 또한 "부처는 마음이다"라고 말하는 마조 도일의 가르침을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비판했다.[2]
혜충은 후대에도 영향력 있는 인물로 남았으며, ''벽암록'', ''종용록'', ''무문관''을 포함한 수많은 공안집에 등장한다. 그의 가르침 중 일부는 서하어 버전으로 카라코토에서 발견되어 보존되었다.[3]
참조
[1]
서적
Zen's Chinese heritage: the masters and their teachings
Wisdom Publications
[2]
서적
Yongming Yanshou's Conception of Chan in the Zongjing Lu: A Special Transmission Within the Scriptures
Oxford University Press
[3]
논문
"The Chán Teaching of Nányáng Huìzhōng (-775) in Tangut Translation"
https://terebess.hu/[...]
[4]
웹인용
"[김진무의 중국불교의 고승들] 23. 동산법문 계통 남종선 최초 ‘無情佛性’ 제창"
https://www.hyunbuln[...]
현대불교신문사
2023-09-24
[5]
웹인용
"[김진무의 중국불교의 고승들] 23. 동산법문 계통 남종선 최초 ‘無情佛性’ 제창"
https://www.hyunbuln[...]
현대불교신문사
2023-09-24
[6]
웹인용
"[김진무의 중국불교의 고승들] 23. 동산법문 계통 남종선 최초 ‘無情佛性’ 제창"
https://www.hyunbuln[...]
현대불교신문사
2023-09-24
[7]
웹인용
"[김진무의 중국불교의 고승들] 23. 동산법문 계통 남종선 최초 ‘無情佛性’ 제창"
https://www.hyunbuln[...]
현대불교신문사
202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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