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종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율종은 계율의 연구와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종파이다. 중국에서는 도선이 남산율종을 개창하여 율종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이후 천태종의 교의를 수용하여 율종을 재흥시킨 원조가 남산율종을 중흥시켰다. 일본에서는 간진이 사분율을 전파하며 율종이 시작되었으나, 헤이안 시대 이후 쇠퇴하였다가 가마쿠라 시대에 부흥하여 선종과 융합되기도 했다. 현재 일본 율종의 총본산은 도쇼다이지이며, 미부데라도 대본산으로 여겨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율종 | |
---|---|
개요 | |
![]() | |
종류 | 나라 불교 |
기원 | 나라 시대 |
중심 사찰 | 도다이지 |
주요 경전 | 화엄경 범망경 금광명최승왕경 |
역사 | |
성립 시기 | 나라 시대 |
배경 | 불교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 |
주요 활동 | 국가의 안녕 기원 불교 교학 연구 |
주요 종파 | |
종파 | 조실종 법상종 삼론종 화엄종 율종 구사종 |
특징 | 각 종파는 고유한 교학과 수행법을 발전시킴 |
교학 | |
주요 연구 분야 | 유식 중관 구사 계율 |
특징 | 다양한 불교 교리를 연구하고 발전시킴 각 종파의 특징적인 교학 체계를 확립 |
영향 | |
일본 불교 | 헤이안 시대 이후의 일본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침 일본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영향을 끼침 |
현대 | 현대 일본 불교에도 그 영향이 남아 있음 |
참고 | |
관련 항목 | 남도육종 일본 불교 나라 시대 |
2. 중국의 율종
중국에서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었기에, 계율에 대한 연구는 오래전부터 이루어졌다. 동진 시대에 『십송율』, 『사분율』, 『마하승기율』 등 여러 율장이 한역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북위에서는 법총이 '''사분율종'''을 열었으며, 이후 혜광이 율종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당대에 이르러 계율 연구는 더욱 활발해졌다. 도선은 '''남산율종'''을 개창하고 『사분율행사초』를 저술하여 계율학을 집대성했다. 그의 문하에서는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으며, 특히 감진은 일본에 계율을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같은 시기 법려는 '''상부종'''을, 그의 제자 회소는 '''동탑종'''을 각각 창시하며 다양한 율종 분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부종과 동탑종은 점차 쇠퇴하였고, 도선이 창시한 남산율종만이 송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며 번성했다. 의정 삼장이 많은 율서를 인도에서 가져와 번역했지만, 이는 당시 중국 율종의 전반적인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2. 1. 초기 율종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며, 이에 대한 연구는 오래전부터 이루어져 왔다.동진 시대에 『십송율』, 『사분율』, 『마하승기율』 등 여러 율장이 한문으로 번역되면서 계율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북위 시대에는 법총이 '''사분율종'''을 처음 열었다. 이후 지론종에 속했던 혜광(468년 - 537년)이 율종의 영향력을 넓혔다.
당나라 시대에는 '''남산율종'''을 창시한 도선이 나타나 『사분율행사초』를 저술하며 계율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도선은 혜광의 학문적 계보를 이었으며, 그의 제자로는 문강, 주수, 도세, 홍경 등이 있었다. 문강의 제자의 제자인 감진은 일본 유학승들의 요청으로 일본에 계율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법려(569년 - 635년)는 『사분율』을 연구하여 '''상부종'''을 열었다. 그의 제자인 회소(624년 - 697년)는 스승 법려의 『사분율소』를 비판하며 새로운 해석을 담은 신소(新疏)를 저술하고 '''동탑종'''을 창시했다.
이후 상부종과 동탑종은 점차 세력이 약해졌고, 남산종만이 번성하여 송나라 시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갔다. 의정 삼장이 많은 율서를 번역했지만, 이것이 율종 자체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2. 2. 남산율종
당나라 시대에 도선이 '''남산율종'''을 개창하였다. 그는 북위의 법총이 개창한 '''사분율종'''과 지론종 소속 혜광의 계통을 잇는다.[7] 도선은 율 연구에 있어 소승의 계율인 《사분율》을 대승불교도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주목했다. 그는 유식의 교리를 받아들여 삼취정계를 바탕으로 소승계를 중시하면서도 대승과 소승을 융화시키는 방향으로 율종의 교리를 체계화했다.[7] 이를 통해 계율학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주요 저서로는 《사분율행사초》·《갈마소》·《계본소》 등이 있다.[7] 또한 도선은 율종 연구 외에도 경전 목록인 《대당내전록》, 승려 전기인 《속고승전》, 도교 관련 저술인 《광홍명집》·《고금불도논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펼쳐 폭넓은 지식을 보여주었다.[7]도선의 문하에서는 문강, 주수, 도세, 홍경 등의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문강의 손제자인 감진은 일본 유학승들의 요청을 받아 일본에 건너가 계율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한편, 법려가 《사분율》을 연구하여 상부종을 개창했고, 그의 제자 회소는 스승의 학설을 비판하며 동탑종을 열었다.[7] 그러나 상부종과 동탑종은 점차 쇠퇴하였고, 남산율종만이 송대까지 이어지며 번성하였다.[7] 이후 천태종의 교의를 받아들인 원조가 남산율종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그는 남산율종의 중흥조로 평가받는다.[7] 비록 의정 삼장이 많은 율서를 한역했지만, 이는 당시 율종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7]
2. 3. 기타 율종
동진 시대에 『십송율』, 『사분율』, 『마하승기율』 등 다양한 계율 서적들이 한자로 번역되면서 중국에서의 계율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북위 시대에는 법총이 『사분율』을 중심으로 '''사분율종'''을 창시하였다. 지론종에 속했던 혜광(468년 - 537년)은 사분율종의 세력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당대에 이르면 계율 연구는 더욱 발전하여 여러 종파가 등장했다. 법려(569년 - 635년)는 『사분율』을 깊이 연구하여 '''상부종'''을 개창했다. 법려의 제자인 회소(624년 - 697년)는 스승 법려의 『사분율소』를 비판하며 새로운 해석을 담은 신소(新疏)를 저술하고 '''동탑종'''을 세웠다.
한편, 도선이 개창한 '''남산율종'''은 당대 계율학을 집대성하며 크게 번성했다. 도선은 혜광의 학문적 계통을 이었으며, 그의 문하에서는 문강, 주수, 도세, 홍경 등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문강의 손제자인 감진은 일본 유학승들의 요청을 받아 일본에 계율을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부종과 동탑종은 점차 세력이 약해졌고, 남산율종만이 송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며 번성했다. 삼장법사 의정이 인도에서 많은 율서를 가져와 한역했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당시 율종의 실제적인 전개나 세력 판도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3. 일본의 율종
일본에 계율이 비교적 초기에 전해졌으나, 처음에는 그 의미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고 일부 사찰에서의 연구에 머물렀다. 본격적인 일본 율종의 시작은 덴표쇼호 5년(753년) 당나라의 승려 간진이 일본으로 건너오면서부터이다. 간진은 도다이 절에 계단을 설치하고 쇼무 상황과 쇼토쿠 천황 등에게 정식으로 계율을 수여했으며, 이후 도쇼다이지를 건립하여 계율 연구의 중심지로 삼았다. 간진이 전한 『사분율』에 기반한 이 율종은 난토 육종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2].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면서 사이초나 구카이와 같은 새로운 불교 지도자들이 등장하여 독자적인 계율관을 제시함에 따라, 간진이 전한 전통적인 율종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특히 사이초는 엔랴쿠지에 독자적인 대승계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 시기 수계 의식 자체는 활발했지만, 점차 국가 공인 승려 자격을 얻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로 변질되는 경향을 보였다.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는 지쓰한, 묘에 등이 계율의 본래 정신을 되살리려는 부흥 운동을 제창했다. 이를 이어받아 가테이 2년(1236년) 카쿠죠, 유겐, 엔세이, 에이손 등은 국가 주도의 계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계율을 지킬 것을 서약하는 자서수계(自誓受戒|지세이주카이일본어)를 행하였다. 이후 카쿠죠는 도쇼다이지를 부흥시켜 사분율 중심의 율종 재흥을 이끌었고, 에이손은 사이다이지를 거점으로 진언종의 『십송율』을 중시하는 진언율종을 열었다. 또한 교토 센뉴지의 슌뇨가 남송에서 새로운 율종을 들여오면서, 가마쿠라 시대에는 이들 세 분파를 중심으로 율종이 다시 활발해졌다. 이 새로운 흐름을 '신기의 율'(新義の律|신기의 리쓰일본어)이라 부르며 이전의 '고의 율'(古義の律|고기의 리쓰일본어)과 구분하기도 한다. 중세에는 선종과 함께 '선율'(禅律|젠리쓰일본어)로 불리며 존중받았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선종의 성장에 밀려 다시 쇠퇴하였으나, 에도 시대에 묘닌, 유손, 에운 료카이, 토쿠몬 후쟈쿠, 신준 등 여러 승려들에 의해 계율 부흥 운동이 다시 시도되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 도쇼다이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율종 사찰은 진언종 산하로 편입되었으나, 1900년(메이지 33년)에 이르러 율종으로서 다시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2].
3. 1. 초기 일본 율종
일본에서도 비교적 초기에 계율이 전해졌지만, 불완전하여 그 의미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고 일부 사찰에서의 연구에 머물렀으며, 수계 의식도 행해지지 않았다.덴표쇼호 5년(753년), 간진이 여섯 차례의 항해 시도 끝에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는 도다이 절에 계단을 설치하고, 쇼무 상황과 쇼토쿠 천황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일본 최초로 정식 계율을 수여했다. 이후 도쇼다이지를 중심으로 계율 연구에 힘썼으며, 이는 난토 육종의 하나로 인정받아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잇고 있다[2]. 간진이 전한 계율은 『사분율』에 기반한 것이었다.
3. 2. 간진의 율종 전래
일본에서도 비교적 초기에 계율이 전해졌지만, 불완전한 것으로 그 의의가 충분히 이해되지 않아 일부 사찰에서의 연구에 머물렀고, 수계 의식도 행해지지 않았다.덴표쇼호 5년(753년), 간진이 6번의 항해 끝에 당나라에서 초청되어 도다이 절에 계단을 열었다. 그는 쇼무 상황과 쇼토쿠 천황을 시작으로 여러 사람에게 일본 최초로 정식 계율을 수여했다. 이후 도쇼다이지를 본거지로 삼아 계율 연구에 전념하였고, 이는 난토 육종의 하나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2]. 간진이 전한 계율은 『사분율』에 기반한 것이었다.
3. 3. 헤이안 시대 이후
헤이안 시대에 들어 사이초와 구카이는 간진이 전한 사분율 중심의 계율을 따르지 않았다. 사이초는 엔랴쿠지에 독자적인 계단을 설치하여 수계를 시작했으며, 구카이는 십송율을 중시했지만 수계 자체는 난토 육종처럼 도다이지에서 행하는 등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일본의 계율에 대한 이해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고, 전통적인 율종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또한, 수계 의식 자체는 도다이지나 엔랴쿠지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으나, 점차 국가가 인정하는 승려(관승) 자격을 얻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로 변질되었다.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지쓰한과 묘에 등이 계율의 본래 의미를 되살리려는 부흥 운동을 주장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가테이 2년(1236년) 카쿠죠, 유겐, 엔세이, 에이손 네 승려가 국가와 결탁된 기존의 계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계율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자서수계'(自誓受戒|지세이주카이일본어)를 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후 카쿠죠는 사분율을 중시하며 도쇼다이지를 부흥시켜 율종 재흥의 중심지로 삼았다. 반면 에이손은 나라시의 사이다이지를 거점으로 삼아 진언종의 십송율을 중심으로 한 진언율종이라는 새로운 종파를 열었다. 여기에 교토 센뉴지의 슌뇨가 남송에서 새로운 율종(베이징 율)을 들여오면서, 가마쿠라 시대에는 크게 세 개의 율종 흐름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 세 분파, 즉 슌뇨의 '베이징 율', 카쿠죠 중심의 도쇼다이지파('난토 율'), 에이손 중심의 사이다이지파(진언율종, '난토 율')를 기존의 율종과 구분하여 '신기의 율'(新義の律|신기의 리쓰일본어)이라 부르기도 하며, 그 이전의 율종은 '고의 율'(古義の律|고기의 리쓰일본어)로 칭하기도 한다. 이들 신기의 율 세 분파는 서로 논의하고 교류하며 율종의 사상을 심화시키고 재흥을 이끌었으며, 중세에는 선종과 함께 '선율'(禅律|젠리쓰일본어)로 불리며 존중받았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선종의 세력이 커지면서 율종은 다시 쇠퇴기를 맞았다. 그러나 에도 시대에 이르러 묘닌, 유손, 에운 료카이, 토쿠몬 후쟈쿠, 신준 등 여러 종파의 승려들이 다시 계율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도쇼다이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율종 사찰들이 진언종 산하로 편입되었으나, 1900년(메이지 33년)에 이르러 다시 율종으로서 독립하였다[2].
3. 4. 가마쿠라 시대의 율종 부흥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지쓰한과 묘에 등이 계율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며 부흥 운동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받아 가테이 2년(1236년), 카쿠죠, 유겐, 엔세이, 에이손 네 명의 승려는 국가가 관리하는 계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수계를 받는 자서수계를 행하였다. 이는 당시 관 주도의 형식화된 수계 방식에서 벗어나 계율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중요한 시도였다.이후 카쿠죠는 간진이 전한 『사분율』을 중시하며 도쇼다이지를 부흥시켜 율종 재흥의 중심지로 삼았다. 반면 에이손은 나라의 사이다이지를 거점으로 삼아 진언종의 『십송율』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진언율종을 열었다. 여기에 교토 센뉴지의 슌뇨가 남송에서 새로운 율종을 들여오면서, 가마쿠라 시대에는 세 개의 주요 율종 흐름이 생겨났다.
- 도쇼다이지 파 (난토 율): 카쿠죠 중심, 『사분율』 기반
- 사이다이지 파 (난토 율, 진언율종): 에이손 중심, 『십송율』 기반
- 센뉴지 파 (남송 전래 율): 슌뇨 중심, 남송에서 전래
이 세 파는 당시 새롭게 일어난 혁신적인 흐름이라는 의미에서 신기의 율이라 불렸으며, 이전 시대의 율종을 고의 율과 구별하기도 한다. 이들 신기의 율 3파는 서로 논의하고 교류하며 율종 연구를 심화시키고 교세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중세에는 선종과 함께 율종이 존중받아 '선율'(禅律)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선종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율종은 다시 쇠퇴기를 맞았으나, 에도 시대에 이르러 묘닌, 유손, 에운 료카이, 토쿠몬 후쟈쿠, 신준 등 여러 종파의 승려들이 다시 계율 부흥 운동을 펼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3. 5. 무로마치 시대 이후
무로마치 시대에는 선종에 밀려 다시 쇠퇴했지만, 에도 시대에는 묘닌, 유손, 에운 료카이, 토쿠몬 후쟈쿠, 신준 등 여러 종파의 승려에 의해 다시 계율 부흥이 제창되었다.한편, 메이지 초기에는 도쇼다이지를 제외하고 다른 율종 사원은 모두 진언종에 소속되었지만, 1900년 (메이지 33년) 율종으로서 독립했다.
4. 율종의 종의(宗義)
계율 연구와 실천을 주로 한다.
5. 일본 율종의 본산
일본에 비교적 초기에 계율이 전해졌지만, 이는 불완전하여 그 의미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고 일부 사찰에서의 연구에 그쳤으며, 수계 의식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덴표쇼호 5년(753년), 당나라의 승려 간진이 여섯 번의 시도 끝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는 도다이 절에 계단을 열고, 쇼무 상황과 쇼토쿠 천황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정식 계율을 수여했다. 이후 간진은 759년[2] 도쇼다이지를 건립하여[2] 이를 본거지로 삼아 계율 연구에 힘썼다. 그가 전한 것은 『사분율』에 기반한 계율이었다. 이를 통해 율종은 난토 육종의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2].
참조
[1]
서적
Princeton Dictionary of Buddh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2]
서적
宗教年鑑 令和5年度版
https://www.bunka.go[...]
2023-12
[3]
웹사이트
Shinden
http://shinden.boo.j[...]
[4]
웹사이트
Shinden
http://shinden.boo.j[...]
[5]
웹사이트
Shinden
http://shinden.boo.j[...]
[6]
웹사이트
Yaokami
https://yaokami.jp/1[...]
[7]
백과사전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분파 > 중국불교의 종파 > 율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