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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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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측천무후는 중국 당나라의 황후이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이다. 무측천은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고종 사후 섭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690년 국호를 '주'로 고치고 황제에 즉위하여 15년간 통치했으며, 705년 장안으로 돌아와 당나라가 복원되면서 태상황이 되었다. 그녀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인재를 등용하고 사회 안정을 이루었으나, 권력 유지를 위해 숙청을 자행하고 측근을 중용하여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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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장쉬안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송나라 초상화
장쉬안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송나라 초상화
이름성: 무 ()
이름: 처음에는 기록 없음. 나중에, 조 (), 아마도 원래는 조 ()이었을 가능성이 있음
자(字): 무미 ()
묘호없음
시호약칭: 측천황후 ()) –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 – 의 시작이었음. 존칭은 그녀가 10개월 후 사망했을 때 시호로 사용되었지만, 그녀는 당나라 시대 내내 "천후"로도 자주 불렸음.}}
전칭: 측천순성황후 ()
무미 (武媚) -> 무조 (武曌)
생몰출생:
사망:
출생지당나라 리저우
사망지당나라 뤄양
묻힌 곳건릉
종교불교
통치
정치 체제무주
재위 기간690년 10월 16일 - 705년 2월 21일
칭호성신황제 (聖神皇帝)
금륜성신황제 (金輪聖神皇帝)
월고금륜성신황제 (越古金輪聖神皇帝)
자씨월고금륜성신황제 (慈氏越古金輪聖神皇帝)
천책금륜성신황제 (天冊金輪聖神皇帝)
측천대성황제 (則天大聖皇帝)
연호광택 (光宅): 684년
수공 (垂拱): 685년 - 688년
영창 (永昌): 689년
재초 (載初): 689년 - 690년
천수 (天授): 690년 - 692년
여의 (如意): 692년
장수 (長壽): 692년 - 694년
연재 (延載): 694년
증성 (証聖): 695년
천책만세 (天冊萬歲): 695년
만세등봉 (萬歲登封): 695년 - 696년
만세통천 (萬歲通天): 696년 - 697년
신공 (神功): 697년
성력 (聖暦): 698년 - 700년
구시 (久視): 700년 - 701년
대족 (大足): 701년
장안 (長安): 701년 - 704년
즉위690년 10월 16일
퇴위705년 2월 21일
이전왕조 성립 (예종이 당나라 황제로 재위)
이후왕조 폐지 (중종이 당나라 황제로 복위)
섭정683년 12월 27일 – 690년 10월 16일
종류군주
가계
아버지무사확
어머니양씨 부인
배우자당 태종
당 고종
자녀이홍, 의종 황제
이현, 장회태자
이현, 중종 황제
이단, 예종 황제
태평공주
왕조
가문무 (武)
왕조당나라 (결혼으로)
무주 (건국으로)

2. 생애

624년 음력 1월 23일, 무사확과 양달의 딸 양씨 사이의 차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무사확은 수 양제 양광의 대토목 공사로 거부가 된 유명한 목재상이었고, 617년 양광의 폭정에 반발해 일어난 대반란에 이연과 함께 참전했다. 당나라 건국 후 이연에게서 태원군공 겸 이주도독이란 작위를 받았다. 620년 무사확은 본처를 잃고 양씨를 새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가 무조이다.[82]

무측천 시대에는 여성의 출생 이름이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무조는 권력을 잡은 후 이름을 무조(武曌중국어)로 바꾸었다.[4]중국어는 때때로 瞾중국어로 표기되기도 한다. 무(武)는 그녀의 성씨였으며, 고종과 결혼한 후에도 이씨 가문의 성씨를 유지했다. 태종은 그녀에게 "매혹적인"을 의미하는 예명 무미(武媚)를 하사했다.[14]

무측천은 생전과 사후에 다양한 공식 칭호를 받았다. '후(后)'와 '황제(皇帝)'는 모두 칭호이며, 무조(武照)로 태어난 그녀는 655년 황후 칭호를 받기 전까지는 '무후(武后)'로 불리지 않았다.


  • 당 고조 (618년 ~ 626년) 재위 기간:
  • 무씨 (624년 ~)
  • 당 태종 (626년 ~ 649년) 재위 기간:
  • 재인(才人) (637년 ~) - 17품 궁인
  • 당 고종 (649년 ~ 683년) 재위 기간:
  • 소의(昭儀) (650년 ~) - 6품 궁인


무조는 당나라 초기에 정치를 담당했던 관롱 귀족 집단 중 방계 가문 출신이었으나, 대대로 재산가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고도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2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이복 형과 사촌에게 핍박받는 생활을 했다.

정관 11년, 태종후궁으로 들어가 재인(정5품)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정에 "당 삼대에 여왕 창(昌)이 나타나고", "이(李)를 대신하여 무(武)가 흥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태종은 이를 "무조의 총명함이 당조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라는 뜻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차츰 무조를 멀리하게 되었다. 도중에 이군선이라는 무장이 "무(武)가 흥한다"의 "무"로 의심받아 처형되기도 했지만, 태종은 이군선의 처형 후에도 여전히 무조와 거리를 두었다.

태종이 병이 깊어져 위중해지자, 간병하던 황태자 이치(훗날의 고종)와 처음 만나 그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었다. 정관 23년 태종이 붕어하자 무조는 출가하게 되었지만, 이마에 낙인을 찍는 정식 불교 승려가 되는 것을 피하고 여성 도사(곤도)가 되어 도교 사원(도관)에서 수행했다. 1년 후, 사원을 방문한 고종과 재회했다.[77]

그 무렵 고종에게는 황후 왕씨와 고종이 총애하던 소숙비가 대립하고 있었다. 황후는 고종의 총애를 소숙비에게서 돌리기 위해 무조의 입궁을 추천했다. 무조가 소의(정2품)로 후궁에 입궁하자 고종의 총애는 왕황후의 의도대로 소숙비에게서 돌아섰지만, 왕황후 자신도 고종에게 소외당하게 되었다.

654년, 무조는 첫 딸 안정공주를 낳았다. 왕황후가 무조의 처소를 방문하여 아기를 보고 간 후,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죽이고 왕황후에게 누명을 씌웠다.[90] 이 일로 인해 655년 10월 13일, 고종은 왕황후를 폐서인하고 무조를 황후로 삼았다. 황후가 된 무조는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였다고 한다. 또한 왕황후와 소숙비의 성을 각각 망(蟒, 이무기), 효(梟, 올빼미)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황후 무씨는 남편 고종의 외숙부이자 승상장손무기를 자결하도록 강요하고, 장손씨 일가를 몰살시켰다.[91] 656년에는 황태자 이충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 이홍을 황태자로 앉혔다. 무씨의 전횡에 반발한 고종이 대신들과 무씨의 폐위를 의논했으나, 무씨의 심복들이 밀고하여 대신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이충은 귀양 후 664년사약을 받고 죽었다.

무씨는 고종에게 '건언12사'라는 건의문을 올려 정치적 역량을 보였고, 고종은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고종의 건강 악화로 황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이홍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91] 이홍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권력에서 밀려날 것을 우려한 측천무후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지만, 병약했던 이홍이 과로사했다는 반론도 있다.[92][93]

이후, 둘째 아들 이현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던 명숭엄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측천무후는 이현을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680년 이현은 황태자에서 폐출되었고, 681년 파주(巴州)로 유배되었다.[94] 684년 무씨는 조사를 명목으로 구신적을 파견하여 이현을 자살하게 만들었다.[95]

이현이 황제에 올랐으나, 얼마 안 되어 무씨는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폐위시키고 여릉왕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막내아들인 이단을 황제로 올렸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무씨는 낙양을 신도(神都)라 고치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다.[4]

684년 9월, 양주의 서경업이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격문을 낙빈왕이 썼다. 무씨는 30만 명의 진압군을 파견하여 40일 만에 반란을 평정하고, 이 반란에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내각을 새로이 개편하였다.

무씨는 조카 무승사(649~698)가 '성모임인 영창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이라 쓰여진 돌을 바치자 기뻐하며 연호를 '영창'으로 고쳤다. 이원가의 반발을 진압한 후, 690년 국호를 '주'로 고치고 15년간 황제로서 중국을 다스렸다. 역사가들은 그녀의 성씨를 따 '무주(武周)'라고도 불렀다.

백미신영도전


무씨는 혹리들을 동원해 충성 세력을 양성하고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몰살시켰으며, 이후 혹리들의 정치 참여를 꺼려 그들을 죽이는 '토사구팽'을 취했다. 그러나 국법을 엄격히 해 통치 시스템 구축과 사회 안정을 이뤄나갔고, 과거 제도를 개편하여 회시, 공사, 전시의 순으로 삼아 많은 인재들을 등용시켰다. 적인걸, 장간지 등 유능한 대신들을 중용하여 태종 시대에 버금가는 풍족한 생활을 백성들에게 제공했다.

그녀는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사원을 세우고 승려들을 양성했으며, 장안성은 인구 100만 명이 넘는 국제도시로 자리 잡았다. '진실의 함'을 만들어 백성의 소리를 듣고자 했으며, 50여 년 동안 민란과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2년 3모작이 가능해졌으나, 전쟁이 없어 영토 확보가 되지 않자 자영농이 쇠퇴하고 지주가 등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만년에 무씨는 조카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고민했으나, 699년 여릉왕 이현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705년 병에 걸린 무씨는 재상 장간지가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을 보고 당 황조 복원을 승낙하여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다. 무씨는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다.

705년 음력 11월 26일, 무조는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고 명하였다.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당 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무씨는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무주를 세웠기에 역적으로서 태묘(太廟)에서 제사 지낼 수 없었으나, 두 아들이 모두 황위에 오른 이후 예종의 후손들이 황위를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당나라의 황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었다.[4]

건릉 봉황 문 동쪽에 위치한 무자비(Blank Tablet). 높이 6.3미터, 무게 98톤이다. 비석 측면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고 상단에는 굴이 조각되어 있다.


무자비 비석의 측면도.

2. 1. 초기

624년 음력 1월 23일, 무사확과 양달의 딸 양씨 사이의 차녀로 당나라 이주(利州, 지금의 쓰촨성 광위안시)에서 태어났으며, 는 '''조'''이다. 아버지 무사확은 수 양제 양광의 대토목 공사로 거부가 된 유명한 목재상이었다. 617년 양광의 폭정에 반발해 일어난 대반란에 당시 태원 유수 이연과 함께 참전했고, 얼마 뒤 당나라가 건국되자 황제가 된 이연에게서 태원군공 겸 이주도독이란 작위를 받았다. 620년 무사확은 본처를 잃고 양씨를 새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가 무조이다.[82]

무측천 시대에는 여성의 출생 이름이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무조는 권력을 잡은 후 이름을 무조(武曌)로 바꾸었다.[4] 武曌중국어로 표기되며, 曌중국어는 때때로 瞾중국어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 글자들은 모두 그녀의 원래 이름일 수 있는 照중국어에서 파생되었으며, 瞾는 무측천이 만든 글자 중 하나이다. 무(武)는 그녀의 성씨였으며, 고종과 결혼한 후에도 전통적인 중국 관습에 따라 이씨 가문의 성씨를 유지했다. 태종은 그녀에게 "매혹적인"을 의미하는 예명 무미(武媚)를 하사했다.[14] 따라서 중국인들은 그녀를 젊은 시절에는 무미(武媚) 또는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부른다.

무측천은 생전과 사후에 다양한 공식 칭호를 받았다. '후(后)'와 '황제(皇帝)'는 모두 칭호이며('후'에 추가된 글자는 중요성이 덜하다), 무조(武照)로 태어난 그녀는 655년에 황후 칭호를 받기 전까지는 '무후(武后)'로 불리지 않았다.

  • 당 고조 (618년 ~ 626년) 재위 기간:
  • 무씨 (624년 ~)
  • 당 태종 (626년 ~ 649년) 재위 기간:
  • 재인(才人) (637년 ~) - 17품 궁인
  • 당 고종 (649년 ~ 683년) 재위 기간:
  • 소의(昭儀) (650년 ~) - 6품 궁인


무조는 당나라 초기에 정치를 담당했던 관롱 귀족 집단 중 방계 가문 출신이었으나, 대대로 재산가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고도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2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이복 형과 사촌에게 핍박받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정관 11년 (637년), 태종후궁으로 들어가 재인(27세 부인 중 하나, 정5품)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정에 "당 삼대에 여왕 창(昌)이 나타나고", "이(李)를 대신하여 무(武)가 흥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태종은 이를 "무조의 총명함이 당조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라는 뜻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차츰 무조를 멀리하게 되었다. 도중에 이군선이라는 무장이 "무(武)가 흥한다"의 "무"로 의심받아 처형되기도 했지만, 태종은 이군선의 처형 후에도 여전히 무조와 거리를 두었다.

태종이 병이 깊어져 위중해지자, 간병하던 황태자 이치(훗날의 고종)와 처음 만나 그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었다. 정관 23년 (649년) 태종이 붕어하자 무조는 출가하게 되었지만, 이마에 낙인을 찍는 정식 불교 승려가 되는 것을 피하고 여성 도사(곤도)가 되어 도교 사원(도관)에서 수행했다. 1년 후, 사원을 방문한 고종과 재회했다.[77]

그 무렵 고종에게는 황후 왕씨와 고종이 총애하던 소숙비가 대립하고 있었다. 황후는 고종의 총애를 소숙비에게서 돌리기 위해 무조의 입궁을 추천했다. 무조가 소의(구빈 중 하나, 정2품)로 후궁에 입궁하자 고종의 총애는 왕황후의 의도대로 소숙비에게서 돌아섰지만, 왕황후 자신도 고종에게 소외당하게 되었다.

2. 2. 후궁 시절

636년, 당 태종 이세민이 황후 장손씨를 잃자, 그 이듬해에 무조(武照)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12세의 무조를 입궁시켜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렀다.[83] 무사확이 죽은 뒤로 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보내던 무조는 입궁하게 된 것을 반갑게 여겼다.[82] 그러나 무조는 가문이 빈한하여 황제의 후궁 중 비교적 낮은 지위인 재인(才人: 정5품)에 봉해졌고, 다른 후궁들의 업신여김을 받으며 어려운 궁중 생활을 보냈다.[84]

정관 11년 (637년), 태종의 후궁에 들어가 재인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정에 "당 삼대에 여왕 창(昌)이 나타나고", "이(李)를 대신하여 무(武)가 흥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지자, 태종은 이를 "무조의 총명함이 당조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라는 뜻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차츰 무조를 멀리하게 되었다. 도중에 이군선이라는 무장이 "무(武)가 흥한다"의 "무"로 의혹을 받아 처형된 사건이 있었지만, 태종은 이군선의 처형 후에도 여전히 무조와 거리를 두었다.

어느 날 태종이 대신들에게 성질이 사나운 말 한 마리를 다룰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조가 나서서 "신첩에게는 철편, 철추, 비수 단 세 가지 물건만이 필요합니다. 우선 철편으로 말을 때리고, 듣지 않으면 철추로 머리를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머리를 잘라버리겠습니다." 고 답하였다.[84] 이세민은 무조의 기개를 칭찬하며 그녀에게 상을 내렸다 한다.

태종의 병이 깊어져 위중한 상태에 빠지자, 간병하던 황태자 이치 (후의 고종)와 처음 만나 황태자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었다. 649년 태종의 붕어와 함께, 무조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천조'''(穿照)라는 법명으로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갔다. 이치는 태자 시절,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고, 무조 또한 이치에게 반하였다고 한다. 650년 여름 이치는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무조를 본 순간 또다시 옛정이 떠올랐고 무조 또한 이치에게 몰래 〈여의낭〉(如意娘)이라는 시를 지어 보였다.[85] 무조는 그길로 고종을 따라 입궁했다.

그 무렵 고종에게는 황후 왕씨와, 고종이 총애하던 소숙비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황후는 고종의 총애를 소숙비에게서 돌리기 위해 고종에게 무조의 입궁을 추천했다. 무조가 소의 (구빈 중 하나, 정2품)로 후궁에 입궁하자, 고종의 총애는 왕황후의 의도대로 소숙비에게서 돌아섰지만, 왕황후 자신도 고종에게 소외당하게 되었다.

2. 3. 재입궁과 권력 장악

무조(武照)는 650년에 고종의 후궁으로 재입궁했는데, 이는 왕황후의 도움이 컸다. 왕황후는 당시 고종의 총애를 받던 소숙비를 질투하여 무조를 이용해 소숙비를 견제하려 했다.[86] 왕황후는 무조에게 머리를 다시 기르게 하고 고종에게 무조를 후궁으로 삼으라고 권했다. 무조는 왕황후에게 매우 공손하게 대했고, 왕황후는 무조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복종한다고 믿고 고종에게 무조를 칭찬했다.[87] 고종이 무조를 소의(昭儀)로 봉하려 하자 왕황후는 흔쾌히 동의했다.[88]

652년, 무조는 고종의 장남 이홍(李弘)을 낳고, 왕황후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폐출시켰다. 이후 궁내에서 왕황후와 그 일족의 오만한 태도에 대한 평판을 이용하여 그들을 반대하는 궁인들을 모아 왕황후의 행동을 감시했다.[89]

654년, 무조는 첫 딸 안정공주를 낳았다. 왕황후가 무조의 처소를 방문하여 아기를 보고 간 후,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죽이고 왕황후에게 누명을 씌웠다.[90] 이 일로 인해 655년 10월 13일, 고종은 왕황후를 폐서인하고 무조를 황후로 삼았다. 황후가 된 무조는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였다고 한다. 또한 왕황후와 소숙비의 성을 각각 망(蟒, 이무기), 효(梟, 올빼미)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2. 4. 권력 강화와 숙청

황후 무씨는 남편 고종의 외숙부이자 승상장손무기를 자결하도록 강요하고, 장손씨 일가를 몰살시켰다.[91] 656년에는 황태자 이충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 이홍을 황태자로 앉혔다. 무씨의 전횡에 반발한 고종이 대신들과 무씨의 폐위를 의논했으나, 무씨의 심복들이 밀고하여 대신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이충은 귀양 후 664년사약을 받고 죽었다.

무씨는 고종에게 '건언12사'라는 건의문을 올려 정치적 역량을 보였고, 고종은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고종의 건강 악화로 황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이홍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91] 이홍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권력에서 밀려날 것을 우려한 측천무후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지만, 병약했던 이홍이 과로사했다는 반론도 있다.[92][93]

이후, 둘째 아들 이현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던 명숭엄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측천무후는 이현을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680년 이현은 황태자에서 폐출되었고, 681년 파주(巴州)로 유배되었다.[94] 684년 무씨는 조사를 명목으로 구신적을 파견하여 이현을 자살하게 만들었다.[95]

2. 5. 여제로 가는 길

이현이 황제에 올랐으나, 얼마 안 되어 무씨는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폐위시키고 여릉왕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막내아들인 이단을 황제로 올렸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무씨는 낙양을 신도(神都)라 고치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다.[4] 하지만, 이에 반발한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

684년 9월, 양주의 서경업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격문을 낙빈왕이 썼다. 무씨는 그 격문을 보고 낙빈왕이 자신의 수하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30만의 진압군을 파견하여 40일 만에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이 반란에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내각을 새로이 개편하였다.

무씨는 하늘의 뜻을 거론하며 여론을 조작하기도 했는데, 그녀의 조카 무승사(649~698)가 '성모임인 영창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 즉, 황태후께서 군림하시니, 여제의 기운이 대대손손 번창하리라는 쓰여진 돌을 가져와 무씨에게 바쳤고, 이것을 본 무씨는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으로 고쳤다. 한편, 당 고조 이연의 11남인 한왕 이원가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할 뻔했으나, 무씨는 군사를 보내 이를 진압함으로써 여제 즉위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였다.

당나라 황족의 거병을 격파한 후, 무후는 여제(女帝)의 출현을 암시하는 예언서(불경 중의 『대운경』에 가탁하여 창작된 의경)를 전국에 유포하고, 또한 주나라 시대에 존재했다고 하는 "명당"(성천자가 여기서 정치를 행했다)을 궁궐 안에 건조하게 하여 권위를 강화하고, 제위 찬탈을 준비했다.

천수 원년 (690년), 무후는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로 하고, 스스로를 '''성신황제'''라고 칭했으며, 천수로 개원했다. 예종은 황태자로 격하되었고, 이씨 성 대신 무씨 성을 받았다. 이 왕조를 "'''무주'''"라고 부른다.

2. 6. 여제 즉위와 통치

683년 고종 이치가 사망하자, 셋째 아들 이현이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무씨는 황후 위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한다는 이유로 중종을 폐위시키고 여릉왕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막내아들 이단을 황제에 올렸다. 이때부터 무씨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낙양을 신도(神都)라 고치고 관제를 새로이 개편하였다.

684년 9월, 양주의 서경업이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격문을 낙빈왕이 썼다. 무씨는 30만 명의 진압군을 파견하여 40일 만에 반란을 평정하고, 이 반란에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내각을 새로이 개편하였다.

무씨는 조카 무승사가 '성모임인 영창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이라 쓰여진 돌을 바치자 기뻐하며 연호를 '영창'으로 고쳤다. 이원가의 반발을 진압한 후, 690년 국호를 '주'로 고치고 15년간 황제로서 중국을 다스렸다. 역사가들은 그녀의 성씨를 따 '무주(武周)'라고도 불렀다.

무씨는 혹리들을 동원해 충성 세력을 양성하고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몰살시켰으며, 이후 혹리들의 정치 참여를 꺼려 그들을 죽이는 '토사구팽'을 취했다. 그러나 국법을 엄격히 해 통치 시스템 구축과 사회 안정을 이뤄나갔고, 과거 제도를 개편하여 회시, 공사, 전시의 순으로 삼아 많은 인재들을 등용시켰다. 적인걸, 장간지 등 유능한 대신들을 중용하여 태종 시대에 버금가는 풍족한 생활을 백성들에게 제공했다.

그녀는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사원을 세우고 승려들을 양성했으며, 장안성은 인구 100만 명이 넘는 국제도시로 자리 잡았다. '진실의 함'을 만들어 백성의 소리를 듣고자 했으며, 50여 년 동안 민란과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2년 3모작이 가능해졌으나, 전쟁이 없어 영토 확보가 되지 않자 자영농이 쇠퇴하고 지주가 등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만년에 무씨는 조카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고민했으나, 699년 여릉왕 이현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705년 병에 걸린 무씨는 재상 장간지가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을 보고 당 황조 복원을 승낙하여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다. 무씨는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다.

705년 음력 11월 26일, 무조는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고 명하였다.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당 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무씨는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무주를 세웠기에 역적으로서 태묘(太廟)에서 제사 지낼 수 없었으나, 두 아들이 모두 황위에 오른 이후 예종의 후손들이 황위를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당나라의 황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었다.[4]

2. 7. 말년과 죽음

704년 가을, 장이, 장창종 형제와 그들의 형제들에 대한 부패 혐의가 제기되었다. 비록 관료들이 이들 형제의 처벌을 주장했으나, 재상 양재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무측천은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이후 재상 위안석이 다시 부패 혐의를 제기했다.[39]

704년 겨울, 무측천은 병으로 병상에 눕게 되었고, 장 형제만이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장 형제가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반역 혐의가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최현위는 이현과 이단만이 그녀를 간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무측천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환언범과 송경이 장 형제에 대한 추가 혐의를 제기한 후, 무측천은 송경에게 조사를 허락했지만, 조사가 완료되기 전에 장이에 대한 사면을 발표하여 조사를 무산시켰다.[39]

705년 봄, 무측천은 다시 심각한 병을 앓았다. 장간지, 경휘, 원서기는 장 형제를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 이들은 이현의 동의를 얻어 2월 20일에 행동을 개시하여 장이와 장창종을 죽이고, 무측천이 거처하던 장생전을 포위했다. 그들은 무측천에게 장 형제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고 보고하고 이현에게 왕위를 양보하도록 강요했다. 2월 21일, 이현을 섭정으로 임명하는 칙령이, 2월 22일에는 이현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칙령이 무측천의 이름으로 반포되었다. 2월 23일, 이현은 공식적으로 왕위를 되찾았고, 다음 날 무측천은 섭정 자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는 칭호를 유지한 채 상양궁(上陽宮)으로 옮겨졌다.[39] 3월 3일,[42] 당나라가 복원되어 주나라가 멸망했다.[43]

무측천은 12월 16일에 사망했으며,[44] 마지막 칙령에 따라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불렸다.[43] 706년, 무측천의 아들 당 중종은 그의 아버지 당 고종과 무측천을 수도 장안 근처의 건릉에 합장했다.

3. 연호

묘호성 및 이름재위 기간연호 및 해당 날짜
없음무조(武曌)690년–705년



측천문자가 있는 연호(*표시) 사용 예시는 다음과 같다.


  • '''증성''' 원'''년''' 구'''월''' 구'''일''' :
    측천문자의 「증성 원년 9월 9일」
  • * 주: 「증성」은 무측천 시대의 연호 중 하나.
  • '''천수''' 2'''년 정월 초하루''' :
    측천문자의 「천수 2년 정월 초하루」
  • * 주: 「천수」는 무측천 시대의 연호 중 하나. 「정월 초하루」는 설날.


; 천후 시대

# 광택 684년

# 수공 685년 - 688년

# 영창 689년

# 재초 690년

; 성신황제 시대 (무주)

# 천수 690년 - 692년*

# 여의 692년

# 장수 692년 - 694년

# 연재 694년*

# 증성 695년*

# 천책만세 695년 - 696년*

# 만세등봉 696년

# 만세통천 696년 - 697년*

# 신공 697년

# 성력 698년 - 700년*

# 구시 700년

# 대족 701년

# 장안 701년 - 704년

4. 존호, 시호, 묘호, 능호

황제 신분으로 올린 존호는 자씨월고금륜성신황제(慈氏越古金輪聖神皇帝)이며, 후에 개칭하여 천책금륜성신황제(天冊金輪聖神皇帝)로 존호를 고쳤으며, 태상황 신분으로 받은 존호는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이다.[65]

사후에 당나라 황후로 신분이 복원되어 시호를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올렸으며, 후에 천후(天后), 대성천후(大聖天后), 천후성제(天后聖帝) 등으로 개칭 하였고, 최종적으로 올린 정식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이다.[79]

능호는 고종과 합장된 건릉(乾陵)이다.

당륭 원년(710년), 중종은 '''천후'''로 고쳤다.

경운 원년(710년), 예종은 '''대성천후'''로 고쳤다.

연화 원년(712년), 예종은 '''천후성제'''로 고쳤다.

개원 4년(716년), 현종은 '''측천황후'''로 고쳤다.

천보 8년(749년), 현종은 '''측천순성황후'''의 시호를 추가한다.

5. 가족 관계


  • 부: 무사확(576년~635년)
  • 모: 무사확의 후처 영국부인 양씨(榮國夫人 楊氏, 579년 ~ 670년) - 수나라 양제의 4촌 아우이자 재상인 양달(楊達)의 딸.
  • 언니: 한국부인 무씨(韓國夫人 武氏, 본명 무순(武順), 623년 ~ 665년) - 동생 측천무후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음.
  • 형부: 한국부인 무순(武順)의 남편 하란안석(賀蘭安石)
  • * 조카: 하란민지(賀蘭敏之, 642년 ~ 671년)
  • * 조카: 위국부인 하란씨(魏國夫人 賀蘭氏, ?년 ~ 666년) - 이모 측천무후에게 피살되었다는 설이 있음.
  • 여동생: 무씨(武氏)
  • 제랑: 여동생 무씨(武氏)의 남편 곽효신(郭孝慎) - 요절
  • 남편/시아버지: 태종 이세민(李世民, 598년 ~ 649년, 재위: 626년 ~ 649년)
  • 남편: 고종 이치(李治, 628년 ~ 683년, 재위: 649년 ~ 683년) - 이세민의 9남
  • * 장남: 이홍(의종(義宗), 652년 ~ 675년)
  • * 장녀: 안정공주(654년 ~ 654년) - 영아 때 사망. 산후 부주의로 인한 돌연사라는 설이 있음.
  • * 차남: 장회태자 이현(李賢, 655년 ~ 684년) - 의문사
  • * 삼남: 중종 이현(李顯, 656년 ~ 710년, 재위: 683년 ~ 684년, 705년 ~ 710년) - 즉위 50여 일 만에 어머니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 연금되었다가 705년 복위. 710년 황후 위씨(韋氏)와 7녀 안락공주에게 독살당함.
  • ** 손녀: 안락공주(이과아(李裹児), 684년 ~ 710년) - 중종의 7녀. 아버지 중종을 독살한 직후 친모 위씨(韋氏)와 함께 처형됨.
  • * 사남: 예종 이단(李旦, 662년 ~ 716년, 재위: 684년 ~ 690년, 710년 ~ 712년) - 중종 폐위 후 즉위했으나 690년 어머니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710년 복위. 712년 양위 후 사망.
  • ** 손자: 현종 이융기(李隆基, 685년 ~ 762년, 재위: 712년 ~ 756년) - 예종의 3남. 756년 양위 후 사망.
  • * 차녀: 태평공주(665년 ~ 713년) - 710년 거사, 713년 현종의 강요로 자살.

6. 평가

716년 측천무후의 아들이었던 태상황 예종이 사망하자 현종은 무측천의 시호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무측천의 정책을 부정했으며, 그녀나 무씨 일족에 의해 숙청된 자들의 명예회복을 실시하였다.[96]

후세 중국 사회나 문인 사회에서 측천무후는 여성으로서 군주의 권한 위에 군림하면서 당의 황위를 찬탈하였다는 부정적 평가가 이어졌고, 찬탈에 실패한 위황후의 행실과 함께 '무위의 화'라 불리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치세 중의 사적에 대해서도 그녀가 정치를 펼쳤던 시대에 떠돌거나 도망친 호수가 늘어나는 등 전적(田籍) 파악이 등한시되고 은전(隠田)이 늘어나 균전제를 실시하기 곤란해졌으며, 측천무후 자신의 씨족을 요직에 앉혀서 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에 대해서도 혹평을 받았다.[96]

한편으로 그녀가 권력을 쥐었던 시기에 중국에서 농민반란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정관 말기의 호수가 줄지 않고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민중의 생활은 그전보다 안정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녀의 인재 등용 능력은 측천무후를 혹평했던 후세의 역사가들도 인정하는 것으로, 측천무후에 의해 등용되었던 인재들이 현종 시대 개원의 치를 이끌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또한 전근대의 사학자들 가운데 "밝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평했던 남송홍매[97]나 "여자 중의 영명한 군주"(女中英主)라 부르며 현상 유지나 구습 타파에 대해 호평한 청나라의 조익처럼 무측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도 존재한다.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은 병든 남편의 후계자로 고려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 위한 선전 캠페인의 일환으로 무측천을 재평가했다. 프랭크 디쾨터(Frank Dikötter)는 장칭이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통치했던 여황제, 즉 무측천 자신과 비교하기 시작했다."라고 주장했다.[70]

조나단 클레멘츠(Jonathan Clements)는 그의 전기 ''무측천''에서 이처럼 극단적으로 다른 역사적 인물에 대한 묘사가 종종 모순적이고 심지어 히스테리컬한 특징으로 이어졌다고 썼다. 그녀의 딸의 요절과 같은 많은 독살 의혹 및 기타 사건들은 후대의 반대자들에 의해 왜곡된 합리적인 설명이 있을 수 있다.[71]

전통적인 중국 역사관은 측천무후에 대해 일반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내렸는데, 통치 능력은 칭찬했지만 황제의 권력을 찬탈한 행위는 비난했다. 낙빈왕조차 생전에 이와 같은 내용으로 이경업의 반란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썼다. 후진 왕조의 역사가이자, ''구당서''의 주 편집자인 유서의 논평이 전형적인 예이다.[72] 유학 역사가들인 유서[74]원숙[75] 등은 무측천의 즉위와 통치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유서사마광[76]과 같이 무측천을 칭찬하는 이들도 있었다. 남송 시대에 신유학이 중국의 주류 정치 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무측천에 대한 평가는 더욱 부정적으로 굳어졌다.

측천무후는 여걸로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왔기 때문에, 인품을 전하는 많은 일화가 남아 있다.

6. 1. 긍정적 평가

측천무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주로 그녀의 뛰어난 통치 능력과 인재 등용에 집중된다. 측천무후 집권 기간 동안 농민 반란이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고, 정관(貞觀) 말기의 호수가 유지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96] 특히 인재 등용 능력은 후대 역사가들도 인정하는 부분으로, 측천무후가 등용한 인재들이 현종 시대의 개원(開元)의 치(治)를 이끌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96]

남송의 홍매(洪邁)는 "밝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평가했으며,[97] 청나라의 조익(趙翼)은 "여자 중의 영명한 군주"(女中英主)라 칭하며 현상 유지와 구습 타파에 대해 호평하는 등 전근대 사학자들 중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인물들이 존재한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측천무후가 관직을 과도하게 사용했지만, 무능한 자는 즉시 해임하거나 처형하는 등 엄격하게 관리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처벌과 포상의 권한을 장악하고 국가를 통제했으며, 정책 결정에 대한 뛰어난 판단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34] 이러한 능력 덕분에 당대의 유능한 인재들이 기꺼이 측천무후에게 등용되려 했다고 한다.

현대의 비중국인 작가들 역시 측천무후를 매력적이고 정치적으로 예리하며 사람을 잘 판단하는 비범한 여성으로 평가한다. 이들은 측천무후가 자신의 노력만으로 유교의 반대를 극복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며, 그녀의 집권 기간이 중국에 좋은 시기였다고 평가한다.[73],[50]

6. 2. 부정적 평가

후세 중국 사회나 문인 사회에서 측천무후는 여성으로서 군주의 권한 위에 군림하면서 당나라 황위를 찬탈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이어졌다. 찬탈에 실패한 위황후의 행실과 함께 '무위(武韋)의 화(禍)'라 불리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치세 중의 사적에 대해서도 그녀가 정치를 펼쳤던 시대에 떠돌거나 도망친 호수가 늘어나는 등 전적(田籍) 파악이 등한시되고 은전(隠田)이 늘어나 균전제를 실시하기 곤란해졌으며, 측천무후 자신의 씨족을 요직에 앉혀서 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에 대해서도 혹평을 받았다.[96]

전통적인 중국 역사관은 측천무후에 대해 일반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내렸는데, 통치 능력은 칭찬했지만 황제의 권력을 찬탈한 행위는 비난했다. 낙빈왕조차 생전에 이와 같은 내용으로 이경업의 반란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썼다. 후진 왕조의 역사가이자, ''구당서''의 주 편집자인 유서의 논평이 전형적인 예이다.[72]

유학 역사가들인 유서[74]원숙[75] 등은 무측천의 즉위와 통치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유서사마광[76]과 같이 무측천을 칭찬하는 이들도 있었다. 남송 시대에 신유학이 중국의 주류 정치 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무측천에 대한 평가는 더욱 부정적으로 굳어졌다.

6. 3. 한국사에 미친 영향

측천무후는 696년 거란족의 이진충과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패배했다. 이 와중에 돌궐 제2제국의 아사나 모초가 주나라와 거란족을 공격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손만영은 칸의 자리를 이어받아 주나라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했다. 측천무후는 아사나 모초에게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며 평화를 유지하려 했고, 697년 모초의 공격으로 거란군은 붕괴되고 손만영이 사망하면서 거란족의 위협은 종식되었다.[38]

698년, 아사나 모초는 당나라 황족과의 결혼을 요구하며 주나라를 압박했다. 이는 그의 가족을 당나라와 결합시키고 주나라를 몰아내려는 의도였다. 측천무후가 자신의 조카 손자인 무연수를 보내 결혼시키려 했으나 모초는 이를 거부하고 주나라를 공격했다.[40]

699년에는 티베트의 위협이 사라졌다. 티베트 황제 티두 송첸이 가르 트리린의 세력을 제거하고, 트리린은 자살했다. 이후 티베트는 내분으로 혼란에 빠졌고, 주나라는 국경 지역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38]

7. 등장 작품

측천무후를 다룬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구분제목원제방영/출판 연도국가배역
도서『여걸 측천무후』武则天传1991년린위탕(林語堂)
도서측천무후則天武后쓰모토 요(津本陽)
도서『측천무후』2004년샨사(山颯)
도서『측천무후』武則天1986년(전6권), 1995년(전5권)하라 모모요(原百代)
도서쌍자환기행双子幻綺行2001년모리후쿠 미야코(森福都)
도서《남국의 신부 - 백제의 마지막 공부 부여란 그 애틋한 연가녀》2014년조아라
도서《측천무후》武則天2010년쑤퉁(蘇童)
영화무측천武則天1963년홍콩이려화(李麗華)
영화『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狄仁傑之通天帝國2010년중국 ・ 홍콩유가령 (최문자 더빙)
영화『적인걸2 - 신도해왕의 비밀』狄仁杰之神都龍王2013년중국 ・ 홍콩유가령
영화『적인걸3 - 사대천왕』狄仁杰之四大天王2018년중국 ・ 홍콩유가령
드라마무측천武則天1984년풍보보(馮寶寶)
드라마『측천무후』一代女皇1985년반영자(潘迎紫) (송도영 더빙)
드라마무측천武則天1995년류샤오칭(刘晓庆)
드라마대명궁사大明宮詞2000년귀아뢰(帰亜蕾)
드라마『여황제 무측천』至尊紅顔2003년자징원(賈靜雯)
드라마연개소문2006년~2007년한국 (SBS)장은비
드라마대조영2006년~2007년한국 (KBS)양금석
드라마무측천비사武則天秘史2011년인타오(殷桃), 류샤오칭, 쓰친가오와
드라마미인천하唐宮美人天下2011년짱팅(張庭)
드라마태평공주비사太平公主秘史2012년리샹(李湘), 리우유신(劉雨欣)
드라마당궁연唐宮燕2013년후이잉훙
드라마미인제조美人製造2014년등취문(鄧萃雯)
드라마무미랑전기武媚娘傳奇2014년~2015년중국 대륙 (CCTV)판빙빙


  • 드라마에서의 묘사:
  • 연개소문: 당 태종 사후 비구니였던 측천무후를 왕 황후가 불러들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장손무기를 내치고, 665년부터 당 고종을 대신해 고구려 원정 계획을 수립하나 실패한다. 이후 연남생의 투항을 계기로 고구려에 대규모 공세를 펼친다.
  • 대조영: 대조영과 대립하며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막고 중국 통치자가 되려는 인물로 등장한다. 고도의 정치술을 가진 여인으로 묘사되며, 690년 황제 즉위 후 698년 발해 건국 이후 대조영과 긴장관계를 유지한다.
  • 무미랑전기: 궁녀 생활부터 태상황이 될 때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주변 인물들의 괴롭힘을 극복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과정과 용인술이 돋보인다. 왕 황후와 소숙비의 음모, 조카의 아들 살해 등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황태후로서 아들을 섭정했으나, 아들의 무능함을 이해하고 직접 황제가 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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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Chen gui and Other Works Attributed to Empress Wu Zetian. https://www2.ihp.sin[...] 2020-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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