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페레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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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페레프레는 이집트 제5왕조의 파라오로,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와 켄트카우스 2세의 아들로 추정된다. 그는 아부시르에 피라미드를 건설했으나, 2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피라미드는 미완성된 채로 남겨졌다. 그의 피라미드는 벤벤의 형태를 띠도록 설계되었으며, 장제전과 태양 신전도 계획되었으나 완성되지 못했다. 네페레프레의 미라는 발견되었으며, 그의 장례 숭배는 고왕조 말기에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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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페레프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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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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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루스 이름 | 네페르카우 |
네브티 이름 | 네페르엠네브티 |
황금 호루스 이름 | 비크네부네페르 |
즉위명 | 네페르에프라 |
탄생명 | 이시 |
그리스어 이름 | Χέρης (체레스) |
신상 정보 | |
출생 추정 시기 | 기원전 2480년경 |
사망 시기 | 기원전 2458년경 (향년 약 22세) |
배우자 | 켄트카우스 3세 (추정) |
자녀 | 멘카우호르 (남) (추정) 솁세스카레 (남) (추정) 나크트사레 (남) 카카이바에프 (남) (추정) |
아버지 | 네페르일카레 카카이 |
어머니 | 켄트카우스 2세 |
통치 정보 | |
통치 기간 | 약 2년, 기원전 2460년경 – 기원전 2458년경 |
왕조 | 이집트 제5왕조 |
이전 통치자 | 네페르일카레 카카이 (가장 유력) 또는 솁세스카레 |
다음 통치자 | 솁세스카레 (가장 유력) 또는 니우세르레 이니 |
매장지 | 네페르에프레의 피라미드 |
기념물 | |
피라미드 | 네체리바우 라네페레프 |
태양 사원 | 호테프-레 |
2. 가족
네페레프레는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와 왕비 켄트카우스 2세의 장남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은 "라네페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우자는 켄트카우스 3세로 추정되며, 그녀의 마스타바가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 남동쪽에서 발견되었다. 켄트카우스 3세는 "왕의 어머니"로 불렸는데, 이는 그녀의 아들이 파라오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멘카우호르 카이우는 네페레프레와 켄트카우스 3세의 아들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셰프세스카라는 네페레프레의 숙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 1. 부모와 형제
네페레프레는 전임 파라오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와 왕비 켄트카우스 2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부시르 인근 마을의 한 집에서 발견된 석회암 판에 새겨진 부조에는 네페리르카레와 그의 아내 켄트카우스가 "왕의 장남 라네페르"와 함께 묘사되어 있다.''[s3-nswt] smsw Rˁ-nfr''|라네페르egy 이 이름은 네페레프레 자신의 이름과 동일한 변형을 가지며, 라네페르가 아직 왕세자였을 때, 즉 왕위에 오르기 전의 네페레프레의 이름이었음을 나타낸다.네페리르카레와 켄트카우스는 최소한 또 다른 아들, 즉 미래의 왕 니우세르레 이니를 두었다. 셉세스카레와 네페레프레의 관계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이집트학자 실케 로스는 두 사람이 형제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베르너는 셉세스카레를 사후레의 아들이자 네페레프레의 삼촌으로 보았고, 야로미르 크레치는 셉세스카레를 네페레프레의 아들로 보았다.
네페레프레와 니우세르레보다 어릴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형제로는 이리엔레가 제안되었다. 그는 ''iry-pat'' 왕자였다.Jrj-pˁt|이리 파트egy 그의 부자관계는 그의 장례 의례가 어머니의 장례 의례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로 추정되며, 두 의례 모두 켄트카우스 2세의 사원에서 이루어졌다.
- 배우자: 켄트카우스 3세
- 자녀: 멘카우호르 카이우 (네페레프레와 켄트카우스 3세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음)
- 숙부: 셰프세스카라 (전 왕 혹은 차기 왕)
2. 2. 배우자와 자녀
2014년까지는 네페레프레의 배우자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해 말,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 남동쪽에 위치한 아부시르에서 활동하는 체코 이집트학 연구소 고고학자들에 의해 켄트카우스 3세의 마스타바가 발견되었다. 무덤의 위치와 시기,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된 비문들은 켄트카우스 3세가 네페레프레의 왕비였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실제로 켄트카우스 3세는 네페레프레의 통치 이후 몇 십 년 동안 묻혔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마스타바가 그의 피라미드와 매우 가까이에 위치해 있으며, "왕의 아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어 그녀가 왕비였음을 증명한다.게다가, 켄트카우스 3세는 그녀의 무덤 비문에서 "왕의 어머니"라고 불렸으며, 이는 그녀의 아들이 파라오가 되었음을 나타낸다. 네페레프레의 두 번째 계승자인 네우세르레 이니가 그의 아들이 아닌 형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진흙 도장에 의해 나타나듯이 켄트카우스 3세가 네우세르레의 통치 기간 동안 묻혔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는 네페레프레의 일시적인 계승자인 셰프세스카레 또는 네우세르레의 계승자인 멘카우호르 카이우만이 가능성을 남겨둔다. 이 두 가지 대안에 관해 이집트학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베르너는 셰프세스카레가 네페레프레의 삼촌이었고 따라서 멘카우호르 카이우가 네페레프레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크레이치는 셰프세스카레가 켄트카우스 3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네페레프레의 아들이라는 반대 가설이 더 유력하다고 본다.
베르너는 네페레프레와 켄트카우스 3세의 두 아들을 더 제안했다. 그의 무덤의 일반적인 시기와 위치에 의해 뒷받침되는 "왕의 아들" 나크트사레와 아부시르에 묻힌 엘리트 계층의 일원인 카카이바에프이다. 크레이치는 카카이바에프와 관련하여 "왕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며, 베르너의 주장의 추측성을 강조한다.
3. 즉위와 통치 기간
네페레프레 시대의 고고학적 자료는 매우 드물다. 미로슬라프 베르너를 포함한 이집트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네페레프레의 통치 기간이 매우 짧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통치 시기에 해당하는 비문은 단 하나만 존재하는데, 이는 피라미드 하부 구조로 이어지는 통로 끝 부분의 모서리 블록에 피라미드 건설자들이 남긴 것이다. 이 비문은 아케트 계절 4일째에 기록되었으며, 이는 전국 가축을 세는 행사인 가축 조사가 처음 시행된 해였다. 고왕국 시대에는 2년마다 이러한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전통적으로 믿어졌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집트학자들은 보다 불규칙하고 다소 더 빈번한 조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문은 네페레프레의 즉위 첫해 또는 두 번째 해, 늦어도 세 번째 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네페레프레의 통치 시기 또는 그 직후에 제작된 몇몇 유물이 그의 장제 단지와 아부시르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물에는 그의 호루스 이름이 새겨진 점토 봉인 등이 있다. 켄트카우스 2세의 신전에서 발견된 아부시르 파피루스 중 일부는 제5왕조 중후반 시기에 제작되었으며, 네페레프레의 장제 신전과 장례 숭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파피루스는 그의 통치 시기와 거의 동시대의 기록으로,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 단지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을 때에도 그 존재를 확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왕의 장례 숭배의 행정 조직과 중요성에 대한 세부 사항도 제공한다.
3. 1. 즉위 순서에 대한 논쟁
네페레프레는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작성된 여러 고대 이집트 왕 목록에 등장한다. 네페레프레가 언급된 가장 오래된 목록은 세티 1세(fl. 기원전 1290–1279년) 통치 기간에 작성된 아비도스 왕 목록으로, 그의 프레노멘은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와 니우세르레 이니 사이에 29번째 항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람세스 2세(fl. 기원전 1279–1213년)의 통치 기간 동안, 네페레프레는 사카라 석판에 솁세스카레 다음,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의 두 번째 후계자로 등장한다. 이 목록에서 네페레프레의 이름은 필사자의 실수로 "칸네페레" 또는 "네페르카레"로 표기되어 있다.
네페레프레의 프레노멘은 토리노 왕 목록(세 번째 열, 21번째 행)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토리노 왕 목록은 사카라 석판과 같은 시대에 작성되었지만, 문서에 영향을 미치는 큰 결손으로 인해 유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경이 네페레프레에게 귀속한 통치 기간의 일부는 여전히 읽을 수 있으며, 하나의 획 표시는 1년의 통치를 나타낸다. 원칙적으로 10년이 더해질 수 있지만, 해당 기호는 문서의 결손으로 인해 사실상 유실되었을 것이다.
네페레프레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원전 283–246년) 통치 기간에 이집트 사제 마네토가 기원전 3세기에 저술한 이집트 역사서인 ''아이깁티아카''에도 언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이깁티아카''의 사본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는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와 유세비우스의 후대 저작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누스는 ''아이깁티아카''가 제5왕조 중기에 "네페르케레스 → 시시레스 → 케레스"의 계승을 언급했다고 전한다. 네페르케레스, 시시레스, 케레스는 각각 네페리르카레, 솁세스카레, 네페르카레(즉, 네페레프레)의 헬레니즘화된 형태이다. 따라서 마네토의 제5왕조 재구성은 사카라 석판과 일치한다. 아프리카누스의 ''아이깁티아카'' 요약본에서 케레스는 20년 동안 통치했다고 전해진다.
셉세스카라와 네페레프레 중 누가 먼저 즉위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첫 번째 설은 네페리르카라 이후 셉세스카라가 즉위하고, 그 후 네페레프레가 즉위했다는 설이다. 두 번째 설은 네페리르카라 이후 네페레프레가 먼저 즉위하고, 그 후 셉세스카라가 즉위했다는 설이다.
3. 2. 통치 기간
네페레프레 시대와 동시대의 고고학적 자료는 매우 드물며, 이는 현재 미로슬라프 베르너를 포함한 이집트학자들이 통치 기간이 매우 짧았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베르너는 그의 통치 시기에 해당하는 비문이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비문은 피라미드 하부 구조로 이어지는 통로 끝 부분의 모서리 블록에 그의 피라미드 건설자들이 남긴 것이다. 이 비문은 아케트 계절의 4일째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징수할 세액을 평가하기 위해 전국 가축을 세는 행사인 가축 조사가 처음 시행된 해였다. 이집트 고왕국 시대에는 2년마다 이러한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전통적으로 믿어졌지만, 최근의 재평가를 통해 이집트학자들은 보다 불규칙하고 다소 더 빈번한 조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문은 네페레프레의 즉위 첫해 또는 두 번째 해, 늦어도 세 번째 해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네페레프레는 고대 이집트 왕 목록 여러 곳에 등장하며, 모두 이집트 신왕국 시대에 작성되었다. 네페레프레가 언급된 가장 오래된 목록은 세티 1세(fl. 기원전 1290–1279년) 통치 기간에 작성된 아비도스 왕 목록으로, 그의 프레노멘은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와 니우세르레 이니 사이에 29번째 항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람세스 2세(fl. 기원전 1279–1213년)의 통치 기간 동안, 네페레프레는 사카라 석판에 등장하며, 이번에는 솁세스카레 다음으로,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의 두 번째 후계자로 나타난다. 필사자의 실수로 인해, 이 목록에서 네페레프레의 이름은 "칸네페레" 또는 "네페르카레"로 표기되어 있다.
네페레프레의 프레노멘은 토리노 왕 목록 (세 번째 열, 21번째 행)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사카라 석판과 같은 시대에 작성되었지만, 문서에 영향을 미치는 큰 결손으로 인해 유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경이 네페레프레에게 귀속한 통치 기간의 일부는 여전히 읽을 수 있으며, 하나의 획 표시가 1년의 통치를 나타내며, 이에 원칙적으로 10년이 더해질 수 있는데, 해당 기호는 문서의 결손으로 인해 사실상 유실되었을 것이다.

마네토의 ''아이깁티아카''(Aegyptiaca) 요약본에서는 네페레프레의 재위 기간을 약 20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이 숫자가 그의 실제 재위 기간을 과대평가한 것이며, 훨씬 짧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아부시르에서 진행된 광범위한 발굴 결과가 완전히 발표되기 전, 전통적인 계승 가설을 따르던 이집트 학자들은 그의 재위 기간과 동시대의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근거로 네페레프레가 약 10년 동안 통치했다고 추정했다.
실제로 베르너는 그의 재위 기간이 2년을 넘지 않는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의 결론은 고고학적 증거에 기반한다: 미완성된 그의 피라미드의 상태와 그의 통치 시기에 해당하는 문서의 전반적인 부족. 베르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네페레프라의 무덤 형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고고학적 발견들은 왕의 장례 기념물의 건설이 왕의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중단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미완성 건물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변경되어야 했고, 미완성된 피라미드(핵심의 불완전한 최하층만 건설됨)를 "사각형 모양의 마스타바" 또는 더 정확하게는 양식화된 원시 언덕으로 급하게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왕이 죽었을 때 매장 아파트도 건설되지 않았고, 장제전의 기초도 놓이지 않았다.
더욱이, 두 개의 역사적 자료가 짧은 재위 기간 가설과 일치한다: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석공의 비문은 "기념물의 현존하는 핵심 높이의 약 3분의 2 지점"에서 발견되었으며 아마도 네페레프레가 즉위한 지 1년 또는 2년차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며, 토리노 왕령 목록은 네페레프레의 재위 기간을 2년 미만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고학적 증거와 역사적 증거의 조합은 네페레프레의 재위 기간이 "약 2년을 넘지 않았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4. 건설 활동
네페레프레는 아버지 네페르이르카레의 피라미드를 완성해야 했다. 이 피라미드는 밑변 길이가 105m, 높이가 72m로, 제5왕조 시대에 지어진 피라미드 중 가장 컸다. 네페레프레가 죽었을 때 피라미드는 상당 부분 완성되었지만, 외부 석회암 피복과 부속 장제 신전은 아직 건설되지 않았다.
네페레프레는 피라미드 표면에 석회암을 덮고 피라미드 동쪽에 석조 신전의 기초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계획은 중단되었고, 아들 니우세레에게 완성 의무가 넘어갔다. 니우세레는 피라미드 표면을 덮는 대신 벽돌과 나무로 장제 신전을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4. 1.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
네페레프레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아부시르의 왕실 묘역에 자신을 위한 피라미드 건설을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피라미드를 ''Netjeribau Raneferef''라고 불렀는데, 이는 "네페레프레의 바는 신성하다"는 의미였다.108m의 정사각형 기저부를 계획했던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는 우세르카프와 사후레의 피라미드보다 크고 아버지 네페르이르카레의 피라미드보다 작을 예정이었다. 네페레프레의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인해 피라미드는 하부 구조만 완성되었고, 높이는 약 7m에 달했다. 그 후, 니우세르레는 열악한 품질의 석회암, 모르타르, 모래로 중앙 부분을 채워 서둘러 기념물을 완성했다. 이 건물의 외부 벽은 78° 각도로 회색 석회암으로 매끄럽고 거의 수직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는 직사각형 모양 대신 정사각형 평면을 가진 마스타바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옥상 테라스는 점토로 덮였고, 그 위에 지역 사막 자갈을 눌러 주변 사막의 언덕처럼 보이게 했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기념물을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 기념물은 신왕국 시대부터 석재 채석장으로 사용되었지만, 거칠고 미완성이며 버려진 피라미드처럼 보여 도굴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더 이상의 피해로부터 보존되었다.
네페레프레가 사망했을 당시, 장제전 공사는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왕의 죽음과 매장 사이에 허용된 짧은 70일의 기간 동안, 네페레프레의 후계자는 작은 석회암 예배당을 지었다. 이 작은 예배당은 니우세르레 치세 동안 완성되었다. 네우세르레는 형제 네페레프레를 위해 더 큰 장제전을 지었는데, 이는 피라미드 측면 전체에 걸쳐 있었지만, 더 저렴한 진흙 벽돌로 지어졌다.
사원 입구는 두 개의 돌 기둥과 24개의 나무 기둥으로 장식된 안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뒤에는 고대 이집트의 가장 초기의 홀(Hypostyle hall)이 있었는데, 지붕은 석회암 받침대 위에 놓인 연꽃 무리 모양의 나무 기둥으로 받쳐져 있었다. 이 홀은 당시 왕궁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 구조물에는 왕의 대형 나무 조각상과 전쟁 포로의 조각상이 보관되어 있었다. 공물을 보관하는 창고는 홀 북쪽에 있었고, 주요 홀 동쪽에는 의식을 위한 도살장 역할을 하는 "칼의 성소"가 있었다.
프라하 대학교 이집트학 연구소의 발굴 조사 중에 네페레프레 장제전의 창고에서 행정 파피루스 묶음이 발견되었다. 이 파피루스 묶음의 존재는 이집트 제5왕조 중반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이었다. 네페르이르카레와 네페레프레 모두 피라미드 단지가 완성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니우세르레는 그들의 계획된 배치를 변경하여 네페르이르카레의 피라미드로 이어지는 길을 자신의 것으로 돌렸다. 이는 네페레프레와 네페르이르카레의 장제 단지가 다소 고립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사제들은 임시 주거 시설에서 사원 구내 옆에 살아야 했으며, 그들은 행정 기록을 현장에 보관했다.
이집트 제5왕조의 창시자인 우세르카프가 세운 전통에 따라 네페레프레는 태양신 라에게 바치는 신전을 계획하거나 건설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신전을 '호테프-레'(''Hotep-Re'')라고 불렀으며, 이는 "라는 만족한다" 또는 "라의 제물상"을 의미한다. 이 신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부시르에 있는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신전에 대한 정보는 북 사카라에 있는 티의 마스타바에서 발견된 비문에서만 알려져 있다.
베르너는 네페레프레의 매우 짧은 통치 기간, 티의 마스타바 외에는 '호테프-레'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신전에서 봉사한 사제도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 신전이 완공되지 못했고 따라서 신전으로서 기능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그는 이 신전이 네페레프레의 젊은 형제일 가능성이 있는 니우세레가 건설한 태양 신전인 ''셰세피브레''에 통합되었거나, 그 자재가 재사용되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4. 1. 1. 피라미드의 구조
네페레프레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아부시르의 왕실 묘역에 자신을 위한 피라미드 건설을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피라미드를 ''Netjeribau Raneferef''라고 불렀는데, 이는 "네페레프레의 바는 신성하다"는 의미였다.
108m의 정사각형 기저부를 계획했던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는 우세르카프와 사후레의 피라미드보다 크고 아버지 네페르이르카레의 피라미드보다 작을 예정이었다. 네페레프레의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인해 피라미드는 하부 구조만 완성되었고, 높이는 약 7m에 달했다. 그 후, 니우세르레는 열악한 품질의 석회암, 모르타르, 모래로 중앙 부분을 채워 서둘러 기념물을 완성했다. 이 건물의 외부 벽은 78° 각도로 회색 석회암으로 매끄럽고 거의 수직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는 직사각형 모양 대신 정사각형 평면을 가진 마스타바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옥상 테라스는 점토로 덮였고, 그 위에 지역 사막 자갈을 눌러 주변 사막의 언덕처럼 보이게 했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기념물을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미로슬라프 베르너는 이 기념물이 벤벤의 형태, 즉 원시 수 누에서 솟아난 언덕의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이러한 방식으로 완성되었다고 제안했다. 이는 헬리오폴리스 형태의 고대 이집트 종교의 창조 신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기념물은 신왕국 시대부터 석재 채석장으로 사용되었지만, 거칠고 미완성이며 버려진 피라미드처럼 보여 도굴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더 이상의 피해로부터 보존되었다.
4. 1. 2. 장제전
네페레프레가 사망했을 당시, 고인의 장례 의식을 치를 장제전 공사는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왕의 죽음과 매장 사이에 허용된 짧은 70일의 기간 동안, 네페레프레의 후계자(아마도 솁세스카레)는 작은 석회암 예배당을 지었다. 이 예배당은 원래 계획에서 피라미드 케이싱이 놓였을 피라미드 기단 플랫폼의 5m 간격, 즉 조적조와 플랫폼 가장자리 사이에 위치했다. 이 작은 예배당은 네우세르레 치세 동안 완성되었다. 네우세르레는 형제 네페레프레를 위해 더 큰 장제전을 지었는데, 이는 피라미드 측면의 전체 65m 길이에 걸쳐 있지만, 더 저렴한 진흙 벽돌로 지어졌다.
사원 입구는 두 개의 돌 기둥과 24개의 나무 기둥으로 장식된 안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뒤에는 고대 이집트의 가장 초기의 홀(Hypostyle hall)이 있었는데, 그 잔해는 아직도 감지할 수 있으며, 지붕은 석회암 받침대 위에 놓인 연꽃 무리 모양의 나무 기둥으로 받쳐져 있었다. 이 홀은 당시 왕궁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 구조물에는 왕의 대형 나무 조각상과 전쟁 포로의 조각상이 보관되어 있었다. 공물을 보관하는 창고는 홀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 방에서 네페레프레의 여러 조각상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왕의 머리 6개가 포함되어 있어 네페레프레는 가장 많은 조각상을 소유한 제5왕조의 왕이 되었다. 주요 홀 동쪽에는 의식을 위한 도살장 역할을 하는 "칼의 성소"가 있었다. 메인 홀의 가짜 문 앞에 있는 중앙 제단의 양쪽에 있는 두 개의 좁은 방에는 30m 길이의 태양선이 쿠푸의 배와 비슷하게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다.
1982년 프라하 대학교 이집트학 연구소의 발굴 조사 중에 네페레프레 장제전의 창고에서 네페르이르카레와 켄트카우스 2세의 사원에서 발견된 아부시르 파피루스와 비슷한 규모의 상당한 행정 파피루스 묶음이 발견되었다. 이 파피루스 묶음의 존재는 제5왕조 중반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이었다. 네페르이르카레와 네페레프레 모두 피라미드 단지가 완성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네우세르레는 그들의 계획된 배치를 변경하여 네페르이르카레의 피라미드로 이어지는 길을 자신의 것으로 돌렸다. 이는 네페레프레와 네페르이르카레의 장제 단지가 아부시르 고원에서 다소 고립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사제들은 임시 주거 시설에서 사원 구내 옆에 살아야 했으며, 그들은 행정 기록을 현장에 보관했다. 반대로, 다른 사원의 기록은 사후레 또는 네우세르레의 피라미드 근처의 피라미드 마을에 보관되었으며, 현재 지하수 수위로 인해 파피루스는 오랫동안 사라졌다.
4. 1. 3. 태양 신전
네페레프레는 이집트 제5왕조의 창시자인 우세르카프가 세운 전통에 따라 태양신 라에게 바치는 신전을 계획하거나 건설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신전을 '호테프-레'(''Hotep-Re'')라고 불렀으며, 이는 "라는 만족한다" 또는 "라의 제물상"을 의미한다. 이 신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부시르에 있는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신전에 대한 정보는 북 사카라에 있는 티의 마스타바에서 발견된 비문에서만 알려져 있으며, 이곳에서 네 번 언급되었다. 티는 사후레, 네페르이르카레, 니우세레의 피라미드와 태양 신전에서 행정 관리로 일했다.
베르너는 네페레프레의 매우 짧은 통치 기간, 티의 마스타바 외에는 '호테프-레'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신전에서 봉사한 사제도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 신전이 완공되지 못했고 따라서 신전으로서 기능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그는 이 신전이 네페레프레의 젊은 형제일 가능성이 있는 니우세레가 건설한 태양 신전인 ''셰세피브레''에 통합되었거나, 그 자재가 재사용되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1905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비싱의 지휘 하에 독일 고고학 탐험대가 아부 고라브에 있는 니우세레의 태양 신전 아래에서 흙벽돌로 된 대규모 건물의 폐허를 발굴했는데, 이는 베르너의 이론을 입증할 수 있다. 비록 이 식별을 확인하는 비문이 없지만, 이것이 네페레프레의 태양 신전의 잔해일 가능성이 있다.
4. 2.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의 피라미드 완성
Neferefre영어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아버지의 피라미드를 완성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 피라미드는 밑변의 길이가 105m, 높이가 72m로, 제5왕조 시대에 지어진 피라미드 중 가장 컸다. 네페레프레가 죽었을 때 상당 부분 진척되었지만, 피라미드는 외부 석회암 피복이 부족했고 부속 장제 신전은 아직 건설되지 않았다. 따라서 네페레프레는 피라미드 표면을 석회암으로 덮고 피라미드 동쪽에 석조 신전의 기초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죽음으로 중단되었고, 기념비를 완성해야 하는 의무는 네페레프레의 아들 니우세레에게 넘어갔다. 니우세레는 피라미드 표면을 덮는 작업을 포기하고 대신 벽돌과 나무로 장제 신전을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5. 장례 숭배
네페레프레는 고왕조 시대의 다른 파라오들처럼 사후에 장례 예배를 받았다. 제5왕조 시대에 있었던 이 숭배의 몇몇 세부 사항은 아부시르 파피루스에서 전해진다. 사망한 통치자를 기리기 위해 연례 10일 축제가 열렸으며, 이 기간 동안 적어도 한 번은 장례 사원 도축장에서 130마리 이상의 황소가 희생되었다. 대량의 동물 희생 행위는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왕실 장례 숭배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증명하며, 베르너가 비생산적이라고 판단한 활동에 막대한 농업 자원이 투입되었음을 보여주며, 이는 고왕국의 쇠퇴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희생의 주요 수혜자는 필요한 의식 후에 제물을 소비한 숭배 사제들이었다.
네페레프레의 장례 숭배는 고왕조 말기 또는 제1중간기에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중왕국 시대에 숭배 부활의 흔적이 있을 가능성은 희미하고 모호하다. 이집트 제12왕조 시대에 쿠얀크라는 인물이 네페레프레의 장례 사원에 묻혔다. 이것이 그가 사망한 통치자와 밀접하게 연관되기를 원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지역의 다른 숭배 활동으로 인해 쿠얀크의 무덤 위치 선택이 제한되었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6. 미라
미라 붕대 조각과 카르토나주, 흩어진 인골 조각이 피라미드의 매장실 동쪽에서 발견되었다. 유해는 왼손, 피부로 덮인 왼쪽 쇄골, 이마, 위 눈꺼풀, 왼쪽 발에서 나온 피부 조각과 몇 개의 뼈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유해는 붉은 화강암 석관의 파편과 왕의 장례 용품 잔해와 같은 고고학적 층에 있었다는 점에서 네페레프레의 것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는 미라에 사용된 방부 처리 기술에 대한 후속 연구를 통해 더욱 뒷받침되었는데, 이는 고왕국 시대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왕의 시신은 아마도 나트론으로 건조된 후, 얇은 수지 층으로 덮여 백색 석회질 코팅이 입혀졌을 것이다. 고왕국 이후의 미라 제작 기술에서 예상되는 뇌 제거의 증거는 없다. 미라의 신원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것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으로, 유해에 대해 기원전 2628~2393년의 연대 간격을 얻었으며, 이는 제5왕조의 추정 연대와 밀접하게 일치한다. 따라서 네페레프레는 제드카레 이세시와 함께 미라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고왕국 시대의 왕 중 한 명이다.
네페레프레 유해에 대한 생물 고고학적 분석 결과, 왕은 격렬한 노동을 하지 않았으며, 20세에서 23세 사이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고, 키가 1.67m였을 것으로 밝혀졌다.
두 번째 개인의 유해가 매장실에서 발견되었지만, 이는 서기 14세기 경에 살았던 후기 중세 시대의 개인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단순히 헝겊 위에 눕혀져 모래로 덮여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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