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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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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후레는 이집트 제5왕조의 파라오로, 기원전 25세기 전반에 통치했다. 그의 부모는 파라오 우세르카프와 왕비 네페르헤테페스 2세로 추정되며, 네페리르카레 카카이가 그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했다. 사후레는 레바논과의 교역, 푼트 원정, 시나이 반도 채굴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으며, 시리아 불곰을 공물로 받기도 했다. 그는 아부시르에 피라미드 단지를 건설했는데, 이 단지는 이후 고대 이집트 장례 단지의 모델이 되었다. 사후레의 예술적 유산은 후대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부조는 고대 이집트 예술의 정점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숭배는 중왕국 시대, 신왕국 시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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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레
기본 정보
회색 반점 돌 조각상, 네메스와 가짜 수염을 쓴 남자가 앉아 있음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03번 전시실에 있는 사후레의 편마암 조각상 머리
이름사후레
다른 이름사후라, 사후-레, 세프레스, Σϵϕρής
재위약 13년, 기원전 2491년 – 기원전 2477년경
왕조제5왕조
선대우세르카프
후대네페리르카레 카카이
이름
즉위명사후레 "사ꜣḥ.w.rꜥ" 에게 가까이 있는 자, 혹은 라가 만진 자, 라가 내게 주신 자
즉위명 (상형문자)M23:t-L2:t-<-N5-D62-G43->
본명사후레 "사ꜣḥ.w.rꜥ" 에게 가까이 있는 자
본명 (상형문자)N5-D62-G43
호루스 이름호루스 네브카우 "nb-ḫˁ-w" 호루스, 발현의 주
호루스 이름 (상형문자)V30-N28-G43
네브티 이름네브티 네브카우 "nb.tj nb ḫˁ w" 두 여신, 발현의 주
네브티 이름 (상형문자)V30:N28-G43
황금 호루스 이름비크위 네부 "bḳ.wj nbw" 황금빛 두 매
황금 호루스 이름 (상형문자)G7*G7:S12
가족
배우자메레트네브티
자녀라네페르 (네페리르카레 카카이로 즉위), 네체르이렌레 (아마도 솁세스카레와 동일 인물), 호렘사프, 라엠사프, 카카레, 네반크레
아버지우세르카프
어머니네페르헤테페스 2세
사망일기원전 2477년경
건축물 및 유적
기념물사후레 피라미드 "사후레의 바 영혼의 솟아오름"
태양 신전 "의 들판"
궁전 "사후레의 화려함이 하늘로 솟아오르다" 와 "사후레의 왕관이 나타나다"
매장지사후레 피라미드
기타 정보
재위 기간 (일본어 문서)13년 5개월 12일, 기원전 25세기 초

2. 가족

미로슬라프 베르너와 타렉 엘-아와디가 아부시르에서 사후레의 피라미드 발굴 작업을 진행하면서 초기 제5왕조 왕족에 대한 정보가 밝혀졌다. 피라미드 단지의 계곡 사원과 장례 사원을 잇는 도로의 부조를 통해 사후레의 어머니가 왕비 네페르헤테페스 2세임이 확인되었다.[1] 그녀의 피라미드가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 바로 옆에 위치하고, "왕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은 것으로 보아, 그녀는 우세르카프의 아내였으며, 따라서 우세르카프가 사후레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5]

2005년, 베르너와 엘-아와디는 사후레 피라미드의 제방을 장식했던 부조에서 사후레가 두 아들 라네페르와 네제리렌레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1] 라네페르의 이름 옆에 "상하 이집트의 왕 네페리르카레 카카이"라는 글이 추가되어 있어, 라네페르는 사후레의 아들이며 아버지 사후 네페리르카레 카카이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2]

같은 부조에는 왕비 메레트네브티[4]가 묘사되어 있는데, 그녀는 사후레의 왕비이자[5] 라네페르와 네제리렌레의 어머니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6] 사후레의 장례 사원 부조에는 카카레, 호렘사프, 네반크레 등 세 명의 아들이 더 있지만, 그들의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

2. 1. 부모

2000년대 초 미로슬라프 베르너와 타렉 엘-아와디의 지휘 아래 아부시르의 사후레의 피라미드 발굴 작업은 초기 제5왕조 왕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피라미드 단지의 계곡 사원과 장례 사원을 연결하는 도로의 부조는 사후레의 어머니가 왕비 네페르헤테페스 2세임을 보여준다.[1] 그녀의 피라미드가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 바로 옆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듯이, 그녀는 파라오 우세르카프의 아내였으며, "왕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았다.[5] 따라서 우세르카프가 사후레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사카라에 있는 우세르카프의 장례 사원에서 사후레의 카르투시가 발견된 사실로 더욱 강화되는데, 이는 사후레가 아마도 그의 아버지가 시작한 건축물을 완성했음을 나타낸다.[6]

이는 사후레가 이전 제4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셉세스카프의 아내로 여겨졌던 왕비 켄트카우스 1세의 아들이라는 이전의 이론과 모순된다.[2] 켄트카우스 1세는 우세르카프 또는 네페리르카레의 형제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이론에 따르면 켄트카우스 1세는 첫 번째 남편의 죽음 후 우세르카프와 재혼하여 사후레와 그의 뒤를 이은 왕 네페리르카레 카카이를 낳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 이론은 켄트카우스 1세가 ''mwt nswt bity nswt bity''라는 칭호를 가졌다는 사실에 근거하는데, 이는 "두 왕의 어머니"로 번역될 수 있다. 웨스트카르 파피루스의 이야기는 마법사가 쿠푸에게 그의 혈통의 몰락이 신과 Rededjet|레데제트영어라는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세 형제로부터 올 것이며, 그들이 제5왕조의 처음 세 왕으로 연이어 통치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을 들려준다. 따라서 일부 이집트학자들은 켄트카우스 1세가 사후레의 어머니이자 레데제트의 역사적 모델이라고 제안했다. 베르너와 엘-아와디의 아부시르 발굴 결과에 따라 이 이론은 폐기되었고[1], 켄트카우스 1세의 실제 역할은 여전히 확인하기 어렵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녀의 칭호 번역이 문제가 되고 제4왕조에서 제5왕조로의 이행에 대한 세부 사항이 아직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덧없는 파라오 제데프타가 셉세스카프와 우세르카프 사이에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2. 2. 자녀

2005년, 이집트학자 미로슬라브 베르너와 타렉 엘-아와디는 사후레 피라미드의 제방을 장식했던 부조를 발견했다. 이 부조에는 사후레가 그의 두 아들 라네페르와 네제리렌레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1] 라네페르의 이름 옆에는 "상하 이집트의 왕 네페리르카레 카카이"라는 글이 추가되어 있었는데, 이는 라네페르가 사후레의 아들이며 아버지 사후 네페리르카레 카카이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음을 나타낸다.[2] 베르너와 엘-아와디는 라네페르와 네제리렌레가 모두 "왕의 장자"라는 칭호를 받았기에, 라네페르가 먼저 태어난 쌍둥이였을 가능성을 추측한다. 그들은 네제리렌레가 나중에 셉세스카레라는 이름으로 짧은 기간 동안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이는 여전히 추측에 불과하다.[3]

같은 부조에는 왕비 메레트네브티[4]가 묘사되어 있는데, 그녀는 사후레의 왕비이자[5] 라네페르와 네제리렌레의 어머니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6] 사후레의 장례 사원 부조에는 카카레, 호렘사프, 네반크레 등 세 명의 아들이 더 있지만, 그들의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

네제리렌레는 궁정 고위직에 해당하는 여러 종교 직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아버지를 위해 총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미셸 보드는 사후레 시대에 왕족 왕자들이 총리직에서 축출되는 과정이 진행 중이었거나 이미 완료되었다는 점을 지적했기 때문에 이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3. 통치

사후레의 통치는 역사 기록과 유물에 의해 잘 뒷받침된다. 그는 우세르카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네페르이르카라 카카이가 그의 뒤를 이었다.[1] 토리노 왕명표에는 사후레의 재위 기간이 12년 5개월 12일로 기록되어 있다. 팔레르모석에는 그의 재위 2, 3, 5, 6년과 마지막 해, 그리고 사망일(9월 28일)이 기록되어 있으며,[4][5] 6회 또는 7회의 가축 조사가 언급되어 있다.[6] 고왕국 시대의 가축 조사는 격년으로 실시되었다고 여겨지므로, 이는 최소 12년의 재위 기간을 시사한다. 만약 사후레 재위의 가장 늦은 연도가 7번째가 아니라 6번째 가축 조사 이후의 해라면, 이는 사후레가 재위 13년에 사망했음을 의미하며, 토리노 왕명표보다 1년 더 길고, 마네토의 『이집트사』에 나오는 13년과도 가깝다.

사후레는 투트모세 3세 때 작성된 카르나크 왕명표와 람세스 2세 시대의 사카라 석판에도 등장한다. 학자들은 그의 재위 시기를 기원전 25세기 전반으로 추정한다.

사후레는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주로 경제적인 목적을 띠었다. 레바논과의 교역을 통해 시다 나무를 수입하고, 푼트 땅으로 원정대를 보내 몰약, 공작석, 엘렉트럼 등 진귀한 물품을 가져왔다. 시나이 반도의 광산에서는 터키옥과 구리를 채굴했다.

군사적인 활동으로는 리비아를 공격하여 많은 가축을 전리품으로 획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이전 시대의 기록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의 장례 사원 부조에는 신 아쉬가 사후레에게 주변 지역의 모든 부를 주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사후레 시대에 활동했던 주요 관리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직책비고
니안크세크메트사후레의 주치의왕에게 가짜 문 제작 요청, 왕이 투라 산 석회암으로 조각해주고 장수를 기원함
페헤네우카이사제, 재상사후레와 네페르이리카라 카카이 치세에 우세르카프의 장례 사제, 후자의 치세에 재상 역임
페르센장례 사제사후레의 어머니 네페르헤테페스의 장례 사제, 사카라에 마스타바 무덤
푸타하셰프세스푸타하 대사제, 왕실 미용사멘카우라 치세에 태어남, 니우세르라 이니 치세에 재상으로 승진
세케무카라왕자, 재상카프라의 아들, 우세르카프와 사후레 시대 재상
와슈프타하사제, 재상사후레 시대 사제, 네페르이리카라 카카이 치세에 재상, 사카라에 마스타바 무덤
웰바우바재상사후레 치세 재상, 왕족이 아닌 것으로 추정, 사후레가 비왕족을 고관으로 발탁하는 정책을 추진했음을 보여줌


3. 1. 연대기

사후레의 상대 연대는 역사 기록과 동시대 유물에 의해 충분히 확립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은 사후레가 우세르카프의 뒤를 이었고, 네페르이르카라 카카이가 그 뒤를 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1]

토리노 왕명표는 람세스 시대(기원전 1292년~기원전 1189년) 초기 제19왕조 때 만들어진 왕 목록으로, 사후레의 재위 기간을 12년 5개월 12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제5왕조와 비슷한 시대의 연대기인 팔레르모석에는 사후레의 재위 2, 3, 5, 6년과 마지막 해, 그리고 사망일(9월 28일)이 기록되어 있다.[4][5] 이 문서는 6회 또는 7회의 Cattle count (Egypt)|cattle count|ko=가축 조사영어를 기록하고 있는데, 고왕국 시대의 가축 조사는 격년(2년에 1회)으로 실시되었다고 여겨지므로, 최소한 12년의 재위 기간을 시사한다.[6] 만약 윌킨슨의 주장처럼 사후레 재위의 가장 늦은 연도가 7번째가 아니라 6번째 가축 조사 이후의 해라면, 이는 사후레가 재위 13년에 사망했음을 의미하며, 13년 5개월 12일의 재위 기간이 할당되어야 한다. 이는 토리노 왕명표의 12년보다 1년 더 길고, 마네토의 『이집트사』에 나오는 13년과도 가깝다.

사후레는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년~기원전 1425년) 때 작성된 Karnak king list|Karnak king list|ko=카르나크 왕명표영어의 세 번째와, 람세스 2세(기원전 1279년~기원전 1213년) 시대의 Saqqara Tablet|Saqqara Tablet|ko=사카라 석판영어의 26번째에도 등장한다. 이 두 자료는 그의 재위 기간을 기록하지 않았다. 사후레의 재위 절대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25세기 전반으로 추정한다.

3. 1. 1. 상대 연대기

사후레의 통치 시기는 역사 기록, 당대 유물, 고고학적 증거 등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자료들은 그가 우세르카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네페르이카레 카카이가 계승했다는 데 일치한다.[1] 이러한 계승 순서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자료로는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원전 283~246년) 통치 시대에 작성된 이집트 역사서인 ''아이깁티아카''(Αἰγυπτιακά)가 있다. 마네토가 저술한 이 책은 현재 원본이 남아있지 않으며,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와 유세비우스의 후대 저술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비잔티움 학자 게오르기우스 싱켈로스에 따르면, 아프리카누스는 ''아이깁티아카''에서 제5왕조 초기에 "우세르케레스 → 세프레스 → 네페르케레스"의 계승 순서를 언급했다고 기록했다. 우세르케레스, 세프레스(그리스어, Σϵϕρής), 네페르케레스는 각각 우세르카프, 사후레, 네페르이카레의 헬레니즘식 이름으로 여겨진다.[2] 마네토가 재구성한 제5왕조 초기의 왕위 계승 순서는 아비도스 왕명록(사후레의 카르투슈가 27번째에 기록되어 있음)과 사카라 비석(사후레의 이름이 33번째에 기록되어 있음)이라는 두 개의 역사적 자료에서 제시된 순서와 일치한다. 이러한 왕 목록은 각각 세티 1세람세스 2세의 통치 기간에 작성되었다.[3]

토리노 왕명표는 람세스 시대(기원전 1292-기원전 1189) 초기 제19왕조 때 만들어진 왕 목록으로, 사후레에게 12년 5개월 12일의 통치 기간을 할당하고 있다. 한편, 제5왕조와 비슷한 시대의 연대기인 팔레르모석에는 그의 재위 2, 3, 5, 6년과 마지막 해, 그리고 사망일(9월 28일)이 기록되어 있다.[4][5] 이 문서는 6회 또는 7회의 가축 수두 조사를 언급하고 있는데, 제5왕조 초기의 가축 수두 조사가 격년(2년에 1회)으로 실시되었다면 최소 12년의 재위 기간을 시사한다.[6] 만약 윌킨슨의 주장처럼 사후레 재위의 증명 가능한 가장 새로운 연도가 7번째가 아니라 6번째 가축 수두 조사 이후의 해라면, 이는 사후레가 재위 13년에 사망했음을 의미하며, 13년 5개월 12일의 재위 기간이 할당되어야 한다. 이는 토리노 왕명표의 12년보다 1년 더 길고, 마네토의 『이집트사』에 나오는 13년과도 가깝다.

사후레는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기원전 1425) 때 작성된 카르나크 왕명표의 세 번째와, 람세스 2세(기원전 1279-기원전 1213) 시대의 사카라 비석의 26번째에도 등장한다. 이 두 자료는 그의 재위 기간을 기록하지 않는다. 사후레의 재위 절대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25세기 전반으로 추정한다.

3. 1. 2. 절대 연대기

크림색 돌에 새겨진 세 개의 상형 문자: 원, 그 아래 세 개의 발가락과 병아리
아비도스 왕 목록의 사후레 카르투슈


사후레의 통치 시기는 역사 기록, 당대 유물, 고고학적 증거 등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자료들은 그가 우세르카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네페르이카레 카카이가 계승했다는 데 일치한다.[1] 이러한 계승 순서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자료로는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원전 283~246년) 통치 시대에 작성된 이집트 역사서인 ''아이깁티아카''(Αἰγυπτιακά)가 있다. 마네토가 저술한 이 책은 현재 원본이 남아있지 않으며,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와 유세비우스의 후대 저술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비잔티움 학자 게오르기우스 싱켈로스에 따르면, 아프리카누스는 ''아이깁티아카''에서 제5왕조 초기에 "우세르케레스 → 세프레스 → 네페르케레스"의 계승 순서를 언급했다고 기록했다. 우세르케레스, 세프레스(그리스어, Σϵϕρής), 네페르케레스는 각각 우세르카프, 사후레, 네페르이카레의 헬레니즘식 이름으로 여겨진다.[2] 마네토가 재구성한 제5왕조 초기의 왕위 계승 순서는 아비도스 왕명록(사후레의 카르투슈가 27번째에 기록되어 있음)과 사카라 비석(사후레의 이름이 33번째에 기록되어 있음)이라는 두 개의 역사적 자료에서 제시된 순서와 일치한다. 이러한 왕 목록은 각각 세티 1세람세스 2세의 통치 기간에 작성되었다.[3]

토리노 왕명표는 람세스 시대(기원전 1292~1189년) 초기인 제19왕조 때 작성된 왕 목록으로, 사후레의 재위 기간을 12년 5개월 12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거의 동시대의 제5왕조 왕실 연대기인 팔레르모석에는 사후레의 즉위 2년차, 3년차, 5년차, 6년차, 그리고 마지막 13년차 또는 14년차가 기록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기록하지 않았다. 현직 왕의 통치 시작 이후의 연도를 세었으며, 이러한 연도는 왕의 즉위 이후 발생한 가축 계수(cattle counts)영어 횟수로 나타냈다. 가축 계수는 인구에 대한 세금 부과량을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행사였으며, 소, 황소 및 작은 가축을 세는 작업이 포함되었다.[4] 제5왕조 전반기에 이러한 계수는 2년에 한 번씩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5] 항상 정기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6] 이러한 원칙에 따라, 팔레르모 돌은 사후레 재위의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 또는 일곱 번째 가축 계수 이후의 연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계수가 실제로 2년에 한 번씩 이루어졌다면(불확실함), 이는 사후레의 2년차, 3년차, 그리고 14년차에 해당할 것이다. 심지어 사후레의 사망일을 수확기(Season of the Harvest)영어 1개월 28일(9월 말에 해당)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정보들을 종합해 볼 때, 제5왕조의 왕실 연대기는 사후레의 재위 기간을 13년 5개월 12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투린 왕 목록보다 1년 길고, 마네토의 ''아이깁티아카''에서 제시된 13년이라는 수치와도 가깝다.[2]

사후레는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1425년) 재위 시대에 작성된 카르나크 왕명표의 세 번째 항목과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3년) 재위 시대의 사카라 석판의 26번째 항목에도 등장한다. 이 두 자료 모두 그의 재위 기간을 명시하지는 않는다. 사후레의 재위 기간의 절대 연대는 불확실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25세기 전반기로 추정하고 있다.

사후레의 장례 사당 부조에 묘사된 시리아에서 귀환하는 이집트 선박

3. 2. 대외 활동

사후레의 대외 활동은 주로 경제적인 목적을 띠었으며, 무역과 공물 획득에 초점을 맞추었다. 레바논과의 교역을 통해 시다 나무를 수입하고, 푼트 땅으로 원정대를 보내 몰약, 공작석, 엘렉트럼 등 진귀한 물품을 가져왔다. 시나이 반도의 광산에서는 터키옥과 구리를 채굴했다.

군사적인 활동도 일부 기록되어 있는데, 사후레는 리비아를 공격하여 많은 가축을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그러나 이 묘사는 이전 시대의 기록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사후레의 장례 사원 부조에는 신 아쉬가 사후레에게 주변 지역의 모든 부를 주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사후레 시대의 활발한 대외 관계와 번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3. 2. 1. 무역과 공물

사후레의 통치 기간 동안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으며, 대부분 군사적 충돌보다는 경제적인 목적을 띈 것으로 보인다. 사후레의 피라미드 단지에서 발견된 부조는 레바논에서 귀중한 시다 나무 통나무를 가득 싣고 돌아오는 함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배에는 "아시아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노예 또는 상인으로 추정되며, 사후레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부조에는 통역관이 배에 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외국과의 무역을 돕기 위해 통역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와디 마그하라에서 발견된 사후레의 부조


이집트 미술에서 유일하게 묘사된 부조에는 여러 마리의 시리아 갈색곰이 있는데, 아마도 해상 무역을 통해 레반트 해안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곰들은 시리아산 붉은색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12개와 함께 나타나는데, 이집트학자들은 이것들이 공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사후레는 비블로스와 무역 관계를 맺었다. 바알랏-게발 신전 발굴 과정에서 사후레의 이름이 새겨진 맥반석 그릇이 발견되었다. 이 신전의 건축 양식은 사후레의 계곡 신전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제5왕조 시대 레반트 지역과의 무역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로는 레바논에서 발견된, 이 왕조 파라오들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여러 개의 돌 그릇이 있다. 또한 나무 왕좌에 찍힌 얇은 금 조각에 사후레의 카르투슈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도락 보물"로 알려진 유물 중에서 튀르키예의 불법 발굴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보물의 존재는 현재 널리 의심받고 있다. 고고학자 그레고리 멈퍼드는 "사후레는 국제 관계에서 가장 잘 기록된 왕이며" 그의 통치 기간에 비례하여 시나이에 새겨진 텍스트의 수가 가장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후레는 마지막 해에 전설적인 푼트 땅(지금의 소말리아 해안으로 추정)으로 최초로 기록된 원정대를 보냈다. 메르사 가와시스 항구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원정대는 팔레르모 석판에 기록되어 있는데, 몰약 8만 단위, 공작석, 엘렉트럼 6천 단위, 그리고 아마도 흑단으로 만들어진 2,600 또는 23,020개의 지팡이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사후레는 또한 와디 마그하라와 시나이 반도의 와디 카리트에 있는 구리와 터키옥 광산으로 원정대를 보냈다. 와디 카리트의 구리 광산 원정대는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다. "호루스, 떠오르는 자의 주, 상하 이집트의 왕 사후레, 영원히 살아 계시다. 아시아를 박살내는 공포의 주인 토트". 이곳은 적어도 제3왕조 초부터 채굴 활동이 있었던 곳이다. 팔레르모 석판에도 언급된 이 원정대는 6,000개가 넘는 터키옥을 가져왔고, 시나이에 두 개의 부조를 남겼다. 그중 하나는 사후레가 아시아인을 때리는 모습과 "위대한 신이 모든 나라의 아시아인들을 때린다"라는 문구를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아부 심벨 근처의 디오라이트 채석장이 사후레 통치 기간 동안 개발되었다.

사후레 왕의 은 원통형 인장, 월터스 미술관


사후레의 군사 작전은 주로 그의 장례 건축물 부조에서 확인 가능하다. 부조에는 북쪽 서쪽 사막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테제무' 지역 출신 리비아인들에 대한 원정이 묘사되어 있다. 이 원정을 통해 이집트는 막대한 수의 가축을 획득했다. 부조에는 123,440마리 이상의 소, 223,200마리 이상의 당나귀, 232,413마리의 염소, 243,688마리의 양이 전리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장면에서는 212,400마리의 당나귀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수치가 과장되었더라도 '테제무'는 이집트인들에게 풍요로운 땅으로 여겨졌으며, 이웃 지역을 통제하려는 이집트인들의 시도에는 경제적 고려가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부조에는 사후레가 현지 족장들을 제압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지만, 이러한 묘사의 역사적 진실성은 의심스럽다. 왕을 칭송하기 위한 상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리비아 공격 장면은 200년 후 페피 2세(기원전 2284~2184년)의 장례 사원과 사후레 사후 약 1800년 후에 건설된 카와의 타하르카 사원에서도 사용되었다. 특히 현지 족장들의 이름이 동일하게 언급된다. 따라서 사후레 역시 이전의 묘사를 복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레는 서쪽 나일 삼각주 지역의 여러 감독관을 임명했는데, 이는 이 관리들이 고왕국 시대에 불규칙적으로만 존재했던 행정직을 맡았고, "이집트-리비아 국경을 넘나드는 교통 규제"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중요한 결정이었다. 동시에 사후레의 장례 사원에는 에피루스 해안에서 나일 삼각주를 습격한 해적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제시되어 있다.

이집트 주변 땅과 부에 대한 사후레의 주장은 그의 장례 사원의 부조에 요약되어 있다. 부조에는 신 아쉬가 왕에게 "나는 너에게 이 [리비아]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줄 것이다", "나는 너에게 모든 적대적인 사람들과 외국 땅에 있는 모든 물자를 줄 것이다", "나는 너에게 서쪽과 동쪽의 모든 외국 땅과 모든 땅에 있는 이운티와 몬티우 궁수들을 줄 것이다"라고 말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운티와 몬티우는 각각 누비아와 아시아 유목민이었다.

3. 2. 2. 군사 활동

사후레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는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으며, 이는 대부분 군사적인 충돌보다는 경제적인 목적을 띈 것으로 보인다. 사후레의 피라미드 단지에 남아있는 부조는 레바논으로 파견된 함대가 시다 나무 원목을 싣고 귀환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배들에는 "아시아인"이라고 불리는, 가나안과 오늘날의 레바논, 튀르키예 남부 해안 지역 출신으로 추정되는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은 노예 또는 상인으로 추정되며, 사후레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1][2][3]

같은 부조에는 통역관이 등장하는데, 이는 외국과의 무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4]

이집트 미술에서 유일하게 묘사된 여러 마리의 시리아 갈색곰은 레반트 해안에서 배를 통해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곰들은 시리아산 붉은색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12개와 함께 표현되어 있는데, 이집트학자 카린 소와다와 윌리엄 스티븐슨 스미스는 이를 공물로 해석하기도 한다.[5][6]

사후레 시대에 비블로스와의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바알랏-게발 신전에서 사후레의 이름이 새겨진 맥반석 그릇이 발견되었다.[2] 이 신전의 건축 양식 또한 사후레의 계곡 신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제5왕조 시대 레반트 지역과의 무역을 뒷받침하는 추가적인 증거로, 레바논에서 이 왕조 파라오들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여러 개의 돌 그릇이 발견되었다. 또한, "도락 보물"로 알려진 튀르키예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사후레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얇은 금 조각이 있는데, 이 보물의 진위 여부는 현재 의심받고 있다.[1] 고고학자 그레고리 멈퍼드는 사후레가 국제 관계에서 가장 잘 기록된 왕이며, 그의 통치 기간에 시나이에 새겨진 텍스트의 수가 가장 많다고 언급했다.

사후레는 또한 전설적인 푼트 땅(오늘날의 소말리아 해안으로 추정)으로 최초로 기록된 원정대를 파견했다. 메르사 가와시스 항구에서 출발한 이 원정대는 팔레르모 석판에 기록되어 있는데, 몰약 8만 단위, 공작석, 엘렉트럼 6천 단위, 그리고 흑단으로 추정되는 2,600개 또는 23,020개의 지팡이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2]

사후레는 와디 마그하라와 시나이 반도의 와디 카리트에 있는 구리와 터키옥 광산으로도 원정대를 보냈다. 이 원정대는 제3왕조 초부터 채굴 활동이 있었던 곳으로, 팔레르모 석판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 원정대는 6,000개가 넘는 터키옥을 가져왔고, 시나이에 두 개의 부조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는 사후레가 아시아인을 때리는 모습과 "위대한 신이 모든 나라의 아시아인들을 때린다"라는 문구를 보여준다.[2] 이와 함께 아부 심벨 근처의 디오라이트 채석장도 사후레 통치 기간 동안 개발되었다.

3. 3. 이집트 내 활동

나일강을 배경으로 무성한 파피루스 식물과 야자수가 있는 사진
사후레는 그의 통치 초기에 엘레판틴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후레는 아부시르와 그 인근 지역에 피라미드와 태양 신전을 건설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사후레의 영광이 하늘로 치솟는다"라는 뜻의 ''Uetjes Neferu Sahure''라는 궁전과 "사후레의 왕관이 나타난다"라는 궁전이 있었는데, 이 궁전들은 아부시르 호숫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경에는 나일강, 중경에는 무성한 식물과 야자수, 배경에는 황량한 사막 언덕이 보임
엘카브에서 발견된 사후레의 조각상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광산 탐험의 출발점이었을 가능성이 있음


사후레의 건물과 조각상에 사용된 돌은 이집트 전역에서 채석되었다. 예를 들어 피라미드의 석회암 외피는 투라에서, 사후레 장례 신전 바닥에 사용된 검은 현무암은 파유뭄의 게벨 카트라니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집트 남쪽, 하부 누비아의 아부심벨 북서쪽 사막에 있는 디오라이트 채석장에서는 사후레의 이름이 새겨진 스텔레가 발견되었다.

사후레는 동부 사막의 와디 아부 게리다에서 철광석을 채굴하고, 엘카브를 동부 사막과 누비아 탐험의 출발점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카르투슈는 투마스와 하부 누비아의 제1 나일강 폭포에 있는 부헨의 인장 인상에서 발견되었다.

사후레 시대에 활동했던 주요 관리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직책비고
니안크세크메트사후레의 주치의왕에게 가짜 문 제작 요청, 왕이 투라 산 석회암으로 조각해주고 장수를 기원함
페헤네우카이사제, 재상사후레와 네페르이리카라 카카이 치세에 우세르카프의 장례 사제, 후자의 치세에 재상 역임
페르센장례 사제사후레의 어머니 네페르헤테페스의 장례 사제, 사카라에 마스타바 무덤
푸타하셰프세스푸타하 대사제, 왕실 미용사멘카우라 치세에 태어남, 니우세르라 이니 치세에 재상으로 승진
세케무카라왕자, 재상카프라의 아들, 우세르카프와 사후레 시대 재상
와슈프타하사제, 재상사후레 시대 사제, 네페르이리카라 카카이 치세에 재상, 사카라에 마스타바 무덤
웰바우바재상사후레 치세 재상, 왕족이 아닌 것으로 추정, 사후레가 비왕족을 고관으로 발탁하는 정책을 추진했음을 보여줌


3. 3. 1. 종교 활동

팔레르모 석에 기록된 사후레의 이집트 내 활동은 대부분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 이 왕실 연대기에는 사후레가 "처음 여행을 떠난 해"에 엘레판틴 요새로 가서, 누비아 족장들의 복종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의례 행위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2] 왕의 동상 여섯 개를 제작하고 입의 개방 의식을 거행한 것도 보고되었다.[3]

사후레 즉위 5년 차에는 팔레르모 석에 신성한 배 제작(아마도 헬리오폴리스에서), 200명의 사제 임명, , 하토르, 네크베트, 와제트에게 바치는 빵과 맥주의 정확한 양(라는 세 개의 사원에서 각각 138, 40, 74 단위, 하토르는 4단위, 네크베트는 800단위, 와제트는 4,800 단위)을 왕이 정한 것이 언급되어 있다.[4] 또한 1~204 아루라(0.7~약 140 에이커)에 이르는 사원 부지에 대한 토지 기증도 보고되었다.[5] 하이집트와 관련하여, 이 통치 시대에 해당하는 돌 기록은 델타 지역의 아트리비스 도시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을 제공한다.[6]

사후레가 이집트 칭호 ''Nb írt-ḫt''를 사용한 가장 오래된 왕이라는 점은 종교 활동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이 칭호는 "효과적인 일을 하는 주인"을 의미하며, 그가 이집트의 질서와 정의 개념인 마아트의 존속을 보장하기 위해 직접 신성한 활동을 수행했음을 나타낸다. 이 칭호는 약 1500년 후 헤리호르 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사후레의 통치 시대는 "송아지 몰이" 의식이 행해진 가장 이른 시대로 알려져 있다. 이 의식은 5왕조 전반에 걸쳐 오시리스 숭배가 점차 등장하는 맥락에서 중요하며, 이후 오시리스 신화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후대에는 이 의식이 보리밭을 짓밟는 송아지를 몰아 오시리스를 탈곡하는 세트에 해당되었다.

3. 3. 2. 건설 및 광산 활동

팔레르모 석에 기록된 사후레의 이집트 내 활동은 대부분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 이 왕실 연대기에는 사후레가 "처음 여행을 떠난 해"에 엘레판틴 요새로 가서 누비아 족장들의 복종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1][2] 또한 왕의 동상 여섯 개를 제작하고 입의 개방 의식을 거행한 것도 보고되었다.[3]

사후레 즉위 5년 차에는 팔레르모 석에 신성한 배 건조(아마도 헬리오폴리스에서), 200명의 사제 임명, 왕이 에게 매일 바치는 빵과 맥주의 정확한 양(세 개의 사원에서 각각 138, 40, 74 단위), 하토르(4 단위), 네크베트(800 단위), 와제트(4,800 단위)를 정한 것이 언급되어 있다.[4] 1~204 아루라(0.7~약 140 에이커)에 이르는 사원 부지에 대한 토지 기증도 보고되었다.[5] 하이집트와 관련하여, 이 통치 시대에 해당하는 돌 기록은 델타 지역의 아트리비스 도시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을 제공한다.[6]

사후레가 이집트의 칭호 ''Nb írt-ḫt''를 사용한 가장 오래된 왕이라는 점은 종교 활동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이다. 이 칭호는 "효과적인 일을 하는 주인"을 의미하며, 그가 이집트의 질서와 정의 개념인 마아트의 존재와 지속을 보장하기 위해 직접 신성한 활동을 수행했음을 나타낸다. 이 칭호는 약 1500년 후 헤리호르 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사후레의 통치 시대는 "송아지 몰이" 의식이 행해진 것으로 알려진 가장 이른 시대이기도 하다. 5왕조 전반에 걸쳐 오시리스 숭배가 점차적으로 등장하는 맥락에서, 이 의식은 이후 오시리스 신화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기에 중요하다. 후대에는 이 의식이 보리밭을 짓밟는 송아지를 몰아 오시리스를 탈곡하는 세트에 해당되었다.

사후레는 사카라에서 우세르카프가 건설한 그의 어머니 네페르헤테페스 2세의 장례식 건물을 재정비했다. 그는 그녀의 사원에 네 개의 기둥이 있는 입구 현관을 추가하여 입구가 더 이상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를 향하지 않도록 했다.

사후레의 통치 기간은 이집트 해군의 발전 시기였을 가능성이 있다. 푼트와 비블로스로의 원정은 공해 해군의 존재를 보여주며, 그의 장례 사원의 부조는 셸리 왁스만에 의해 "이집트에서 최초로 확실하게 묘사된 항해선"으로 묘사된다. 그중 일부는 길이가 100큐빗(약 50m)에 달했을 것이다.

과거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사후레가 이집트 해군을 창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것은 과장된 주장으로 인식된다. 우세르카프 신전의 파편적인 부조에는 수많은 배가 묘사되어 있으며, 공해 해군은 3왕조 시대 초기에 이미 존재했을 것이다. 가장 오래된 항구로 알려진 와디 알 자르프는 홍해에 위치하며 쿠푸 치하에서 운영되었다. 일부 부조가 이전의 예시에서 복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레는 지중해를 건너 시리아로 군대를 수송하는 데 해상력을 묘사하고 활용한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통치자로 남아 있다.

사후레 장례 사원의 광범위한 항해 장면은 당시 군사용 및 의식 훈련을 위한 특수 경주용 보트가 건조되었음을 보여줄 만큼 상세하다. 또한, 호깅 트러스와 같이 배에 사용되는 특정 밧줄의 가장 초기 묘사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선박 건조에 대한 정확한 추정이 가능하며, 예를 들어 항해선의 중앙부 자유현이 1m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사용된 돛대는 거꾸로 된 Y자 모양의 이족형이었다.

그 외 희귀한 묘사로는 화려하게 장식된 돛을 단 범선의 선미에 서 있는 왕의 모습, 고대 이집트에서 유일하게 두 개 중 하나인, 경주 중인 배 위에서 노를 저어 파도 모양으로 헤엄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부조가 있다.

3. 3. 3. 이집트 해군 발전

사후레의 통치 기간은 이집트 해군이 발전한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푼트비블로스로의 원정은 공해 해군의 존재를 보여주며, 그의 장례 사원의 부조는 셸리 왁스만에 의해 "이집트에서 최초로 확실하게 묘사된 항해선"[1]으로 묘사된다.[2] 그중 일부는 길이가 100큐빗(약 50m)에 달했을 것이다.[3]

이 때문에 과거 학자들은 사후레가 이집트 해군을 창설했다고 생각했으나, 오늘날에는 과장된 주장으로 여겨진다. 우세르카프 신전의 파편적인 부조에는 수많은 배가 묘사되어 있으며, 공해 해군은 이미 3왕조 시대 초기에 존재했을 것이다.[2] 가장 오래된 항구로 알려진 와디 알 자르프는 홍해에 위치하며 쿠푸 치하에서 운영되었다.[4] 일부 부조는 이전의 예시에서 복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레는 지중해를 건너 시리아로 군대를 수송하는 데 해상력을 묘사하고, 따라서 활용한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통치자로 남아 있다.[2]

사후레 장례 사원의 광범위한 항해 장면은 당시 군사용 및 의식 훈련을 위한 특수 경주용 보트가 건조되었음을 보여줄 만큼 상세하다.[5] 또한, 호깅 트러스와 같이 배에 사용되는 특정 밧줄의 가장 초기 묘사를 제공한다.[6] 이를 통해 선박 건조에 대한 정확한 추정이 가능하며, 예를 들어 항해선의 중앙부 자유현이 1m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사용된 돛대는 거꾸로 된 Y자 모양의 이족형이었음을 보여준다.[2]

그 외 희귀한 묘사로는 화려하게 장식된 돛을 단 범선의 선미에 서 있는 왕의 모습, 그리고 고대 이집트에서 유일하게 두 개 중 하나인, 아마도 경주 중에 있는 배 위에서 노를 저어 파도 모양으로 헤엄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부조가 있다.

4. 피라미드 복합체

사후레의 피라미드 복합체는 이전 건축물보다 정교한 부조 장식을 특징으로 한다. 장례 신전은 약 10000m2 면적의 부조로 장식되었고, 235m 길이의 제단 도로 벽도 다색 부조로 덮여 있었다. 이 부조들은 사후레 생전에 완성되었으며, 미로슬라프 바르타는 이를 "기원전 3천년기에서 알려진 가장 큰 컬렉션"이라고 묘사한다.

이 부조들은 이전의 장례 신전보다 훨씬 정교하며, 몇몇 묘사는 이집트 미술에서 독특하다. 예를 들어 가족 앞에서 궁전에서 몰약 나무(''Commiphora myrrha'')를 돌보는 사후레, 시리아 갈색곰, 주 피라미드로 피라미디온을 운반하고 복합 단지 완공 후 의식을 보여주는 부조 등이 있다. 부조의 높은 장인정신은 모든 인물의 미세하게 둥근 가장자리에 나타나며, 배경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명확하게 두드러진다. 고슴도치와 쥐토끼처럼 보여지는 동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며, 머리카락 대신 옥수수 이삭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된 옥수수와 같은 의인화된 식물도 보여준다.

상형 문자 기호와 함께 두 줄로 서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부조
지방 신들과 의인화된 농업 토지들이 사후라의 장제전으로 공물을 가지고 행진하는 모습


장제전, 제단 도로 및 계곡 사원의 많은 부조는 다양한 장면을 묘사한다. 여기에는 사후레가 야생 황소와 하마를 사냥하는 모습, 네크베트가 사후레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왕이 낚시와 사냥을 하는 모습, 여신 세샤트 앞이나 앞에서 외국인을 계산하는 모습, "외국 국가의 주인"인 신 소프두가 아시아 포로들을 이끄는 모습, 비블로스에서 온 이집트 함대의 귀환을 묘사하는 모습 등이 있다. 붉은 화강암으로 저부조 조각한 것들 중 일부는 아직도 현장에 남아 있다.

사후레 피라미드는 건설 당시 높이가 약 47m로, 이전 제4왕조의 피라미드들보다 작았다. 내부 핵심 구조는 대략 다듬어진 돌들이 계단식으로 배열되었고, 많은 부분이 두꺼운 진흙 모르타르로 고정되었다. 이 기법은 이전의 돌 기반 기법보다 저렴하고 빨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심하게 손상되었다. 현재 피라미드는 대부분 파괴되어 잔해와 모르타르로 이루어진 조악한 돌무더기에 불과하며, 외피석은 고대에 도난당했다.

북쪽 입구는 짧은 경사로 내려가는 통로로 이어지며, 붉은 화강암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통로는 각각 수 톤의 무게가 나가는 큰 석회암 들보로 이루어진 박공지붕이 있는 매장실로 이어진다. 현재 이 들보는 모두 파손되어 구조가 약해졌다. 19세기 중반 존 셰 페링이 처음 매장실에 들어갔을 때, 사후레의 것으로 추정되는 현무암 관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피라미드 주변에는 높이 약 12m의 작은 제2의 예배 피라미드가 있는데, 이는 왕의 카를 위해 건설되었다.

4. 1. 위치

(섹션 제목 '위치'에 대한 내용은 원본 소스에 존재하지 않아 출력되지 않았습니다.)

4. 2. 장례 신전

사후레의 장례 신전은 약 10000m2에 달하는 정교한 부조로 장식되었다. 이 부조들은 사후레의 생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며, 235m 길이의 제단 도로 벽도 다색 저부조로 덮여 있었다. 미로슬라프 바르타는 이 부조들을 "기원전 3천년기에서 알려진 가장 큰 컬렉션"이라고 묘사한다.

장례 복합 단지 벽을 장식했던 부조의 많은 조각들은 매우 높은 품질이며 이전 장례 신전의 것보다 훨씬 정교하다. 몇몇 묘사는 이집트 미술에서 독특한데, 가족 앞에서 궁전에서 몰약 나무(''Commiphora myrrha'')를 돌보는 사후레를 보여주는 부조, 시리아 갈색곰을 묘사한 부조와 주 피라미드로 피라미디온을 가져오고 복합 단지 완공 후 의식을 보여주는 부조 등이 있다. 부조의 높은 장인정신은 모든 인물의 미세하게 둥근 가장자리에 나타나며, 배경과 동시에 조화를 이루면서도 명확하게 두드러진다. 부조는 고슴도치와 쥐토끼와 같이 보여지는 동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며, 머리카락 대신 옥수수 이삭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된 옥수수와 같은 의인화된 식물도 보여준다.

장제전, 제단 도로 및 계곡 사원의 많은 부조는 사후라가 야생 황소와 하마를 사냥하는 모습, 네크베트가 사후라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가장 초기의 왕이 낚시와 사냥을 하는 모습, 이집트학자 마크 레너가 "모든 악이나 무질서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 여신 세샤트 앞이나 앞에서 외국인을 계산하는 모습, "외국 국가의 주인"인 신 소프두가 아시아 포로들을 이끄는 모습, 그리고 아마도 비블로스에서 온 이집트 함대의 귀환을 묘사하고 있다. 붉은 화강암으로 저부조 조각한 것들 중 일부는 아직도 현장에 남아 있다. 사후라 사원의 중요한 혁신 중에는 숭배하는 모습의 인물, 즉 서 있거나 웅크리고 양팔을 들고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손을 벌린 모습을 처음으로 부조로 묘사한 것이 있다.

장제전에는 이집트 사원 중 처음으로 야자수 모양의 기둥, 사후라의 칭호가 새겨진 구리로 덮인 거대한 화강암 아치트레이브, 사자 머리 우수관, 검은 현무암 바닥 및 화강암 대좌가 있었다.

4. 3. 피라미드

사후레의 피라미드는 건설 당시 높이가 약 47m에 달했는데, 이는 이전 제4왕조의 피라미드들보다 훨씬 작았다. 내부 핵심 구조는 대략 다듬어진 돌들이 계단식으로 배열되어 있고, 많은 부분이 두꺼운 진흙 모르타르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 건설 기법은 이전에 사용되던 돌 기반 기법보다 훨씬 저렴하고 빠르게 시행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훨씬 더 심하게 손상되었다. 이 때문에 사후레의 피라미드는 현재 대부분 파괴되어 잔해와 모르타르로 이루어진 조악한 돌무더기에 불과하며, 외피석은 고대에 도난당한 후 내부가 드러났다.

핵심 구조물이 건설되는 동안, 무덤 방은 별도로 건설된 후 남은 돌덩이와 잔해로 덮인 갱도로 이어지는 통로가 열린 채로 남아 있었다. 이 건설 전략은 특히 네페르프레의 피라미드에서 볼 수 있는 후대의 미완성 피라미드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기법은 또한 이집트 제3왕조의 이전 양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제4왕조 동안 다슈르와 기자의 5대 피라미드 건설자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버려진 후 다시 유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북쪽에 있는 입구는 짧은 경사로 내려가는 통로로, 붉은 화강암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각각 수 톤의 무게가 나가는 큰 석회암 들보로 이루어진 박공지붕이 있는 매장실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 현재 이 들보들은 모두 파손되어 피라미드 구조가 약해졌다. 19세기 중반 존 셰 페링이 처음으로 매장실에 들어갔을 때, 아마도 사후레의 것으로 추정되는 현무암 관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피라미드 주변의 장례식 건축물에는 높이 약 12m에 달했을 작은 제2의 예배 피라미드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원래 왕의 카를 위해 건설되었다.

5. 유산

사후레는 아부시르에 태양 신전을 건설한 최초의 파라오였다. 이 신전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네크헨레"(Nḫn Rʿw|네크헨 레egy) 또는 "레의 요새"로 알려졌으며, 사후레 사후에도 미완성으로 남았다.[1] 건설은 사후레의 통치 기간을 포함하여 최소 4단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그의 후계자들인 네페르이르카레 카카이와 니우세르레 이니 시대에도 계속되었다.[2][1]

사후레는 자신의 무덤과 장례 의식을 위해 '카바 사후라'(Ḫꜥbꜣ Sꜣḥw Rꜥw|카바 사후라egy)라는 피라미드 단지를 건설했다.[3] 이 이름은 "사후레의 바 영혼의 부활",[4][5] "사후레의 바가 나타나다",[6] "왕의 영혼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사후레의 피라미드", 또는 "영광 속에 사후레의 영혼이 나타나다"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사후레의 피라미드는 규모와 건축 기법 면에서 쇠퇴를 보였지만, 장례 사원은 당시까지 가장 정교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후레 단지는 야자수 기둥과 같은 건축 혁신을 통해 이후 약 300년간 장례 단지 건축의 모델이 되었다.

사후레는 고왕국 말기까지 약 300년 동안 숭배를 받았다. 그의 장례 숭배와 관련된 경제 시스템은 매우 정교했으며, 다른 숭배 의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사카라와 아부시르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문과 유물들을 통해 사후레의 장례 숭배 또는 태양 신전에서 봉사한 여러 사제들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이름설명
티지사후레, 네페리르카레, 네페레프레, 니우세르레의 태양 신전 감독관[5]
네페르카이사후레 장례 숭배의 사제[6]
카바우프타사후레, 네페리르카레, 네페레프레, 니우세르레의 사제
아트제마이집트 제6왕조 시대 사후레의 태양 신전 사제
쿠이엠스네위네페리르카레와 니우세르레 통치 기간 동안 사후레의 장례 숭배 사제
니카레이집트 제5왕조 시대 사후레 숭배의 사제이자 창고 서기관 감독관
세네완크우스르카프와 사후레의 숭배 의식에서 봉사하고 사카라에 있는 마스타바에 묻힘
세다우그사후레 숭배의 사제이자 우스르카프의 태양 신전에서 라의 사제이며 왕과 친분이 있었음
테페만크이집트 제4왕조부터 이집트 제5왕조 초기에 이르는 왕들의 숭배 의식 사제(우스르카프와 사후레 포함)였고 아부시르에 있는 마스타바에 묻힘



중왕국 시대에는 세누세르트 1세가 카르나크 신전에 사후레의 조각상을 봉헌했다. 신왕국 시대에는 투트모세 3세의 카르나크 신전 왕 목록에 사후레가 등장하며, 이집트 제18왕조 후반과 이집트 제19왕조 시대에는 사후레의 장례 신전에서 "사후레의 세크메트" 숭배 의식이 행해졌다. 람세스 2세의 아들 카엠와세트는 사후레의 피라미드를 복원하기도 했다.

이집트 제25왕조 시대에는 타하르카가 사후레 신전의 부조 일부를 복제했으며, 이집트 제26왕조 시대에는 사후레의 조각상이 카르나크 신전에서 발견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까지 사후레의 세크메트 숭배가 신전에서 계속되었음을 보여주는 낙서들이 발견되었다. 사후레 피라미드의 해체는 로마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5. 1. 예술 및 건축 유산

우세르카프는 아부시르에 태양 신전을 건설한 최초의 왕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네크헨레"(Nḫn Rʿw|네크헨 레egy) 또는 "레의 요새"로 알려진 이 신전은 그의 사후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1] 건설 작업은 최소 4단계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중 첫 번째 단계는 사후레 치세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1] 이후 그의 후계자인 네페르이르카레 카카이와 니우세르레 이니 치세에도 계속되었다.[2][1]

2006년 피라미드의 도로에서 본 사후레의 훼손된 피라미드


사후레는 자신의 무덤과 장례 의식을 위한 피라미드 단지를 건설했는데, 그 이름은 '카바 사후라'(Ḫꜥbꜣ Sꜣḥw Rꜥw|카바 사후라egy)이다.[3] 이는 "사후레의 바 영혼의 부활",[4][5] "사후레의 바가 나타나다",[6] "왕의 영혼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사후레의 피라미드", 또는 "영광 속에 사후레의 영혼이 나타나다"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규모, 부피, 그리고 사용된 저렴한 건축 기법 측면에서 사후레의 피라미드는 피라미드 건축의 쇠퇴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동시에, 단지의 다른 부분에 사용된 돌의 질과 다양성은 증가했고, 장례 사원은 그 당시까지 건설된 것 중 가장 정교한 것으로 여겨진다.

야자수 기둥의 사용과 같은 많은 건축 혁신을 통해 사후레 단지의 전반적인 배치는 사후레 통치 기간부터 제6왕조 말기까지 약 300년 동안 건설된 모든 장례 단지의 모델이 되었다. 전체 장례 단지의 벽을 장식하는 다양한 색상의 부조는 고대 왕국 시대 전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솜씨와 풍부한 개념을 보여준다.

사후레의 장례 사원 벽을 덮고 있는 채색 부조는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최고 수준의 예술적 업적으로 인정받았다. 예를 들어 아부시르에서 발견된 신왕국 시대 비문은 이 사원을 보름달이 비추는 하늘에 비유하는 시적인 표현을 담고 있다.

후대의 예술가와 장인들은 사후레의 부조를 모방하여, 이를 구왕국 시대 후대의 왕과 왕비 무덤의 모본으로 사용하려 했다. 사후레의 상층 사원 배치 또한 참신했으며, 이는 이후 구왕국 시대의 모든 피라미드 단지의 표준 모본이 되었다. 야자수 모양 기둥과 같은 일부 건축 요소는 이집트 건축의 특징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후대에도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중왕국 시대의 세누세르트 1세는 자신의 사원 부조를 사후레의 부조에서 직접 베꼈다. 그는 또한 사후레 단지의 혁신적인 배치를 다시 따르기로 했다.

센우세르트 1세가 건립을 명령한 사후레의 옥좌에 앉은 조각상


제12왕조(기원전 1991-기원전 1802) 초기, 중왕국 시대가 시작될 무렵, 파라오 센우세르트 1세(기원전 1971-기원전 1926)는 사후레의 조각상을 만들게 했다. 이 조각상은 카르나크 신전에 있으며, 아마도 고인이 된 왕들의 군상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 사후레 조각상은 현재 카이로의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목록 번호 CG42004). 조각상은 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 50cm이다. 사후레는 주름치마와 곱슬머리를 하고 옥좌에 앉아 있다. 옥좌 양쪽에는 사후레의 조각상을 만들게 한 것이 센우세르트 1세임을 나타내는 비문이 있다.

사후레가 중왕국 시대 동안 잊히지 않았다는 증거는 웨스트카 파피루스이며, 이것은 제12왕조 시대에 쓰여졌다. 이 파피루스는 제5왕조의 기원에 대한 신화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우세르카프, 사후레, 네페르이르카라 카카이를 와 라데제트(Rededjet)라는 이름의 여성 사이의 세 형제로 등장시키고 있다.

5. 2. 종교적 유산

사후레는 죽은 뒤에도 고왕국 말기까지 약 300년 동안 숭배를 받았다. 이 숭배 의식에 필요한 제물을 제공하기 위해 최소 22개의 농장이 설립되었다.[1] 제방 상부의 장식된 부조는 사후레를 위해 만들어진 150명이 넘는 사후 세계의 신격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행렬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왕의 사후 숭배와 관련된 정교한 경제 시스템이 있었음을 보여준다.[2] 사후레의 장례 사원과 태양 신전으로 쏟아져 들어온 엄청난 양의 제물은 하토르 신전과 같이 그 사원 구내에서 사제들이 의식을 집전하던 다른 숭배 의식에도 혜택을 주었다.[3]

사카라와 아부시르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문과 유물 덕분에 후기 5왕조와 6왕조 시대에 사후레의 장례 숭배 또는 태양 신전에서 봉사한 여러 사제들이 알려져 있다.[4]

이름설명
티지사후레, 네페리르카레, 네페레프레, 니우세르레의 태양 신전 감독관[5]
네페르카이사후레 장례 숭배의 사제[6]
카바우프타사후레, 네페리르카레, 네페레프레, 니우세르레의 사제
아트제마6왕조 시대 사후레의 태양 신전 사제
쿠이엠스네위네페리르카레와 니우세르레 통치 기간 동안 사후레의 장례 숭배 사제
니카레5왕조 시대 사후레 숭배의 사제이자 창고 서기관 감독관
세네완크우스르카프와 사후레의 숭배 의식에서 봉사하고 사카라에 있는 마스타바에 묻힘
세다우그사후레 숭배의 사제이자 우스르카프의 태양 신전에서 라의 사제이며 왕과 친분이 있었음
테페만크4왕조부터 5왕조 초기에 이르는 왕들의 숭배 의식 사제(우스르카프와 사후레 포함)였고 아부시르에 있는 마스타바에 묻힘



중왕국 시대에는 사후레의 장례 의식에 봉사한 사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시대의 증거는 기원전 20세기경에 활동한 이집트 제12왕조의 파라오 세누세르트 1세가 카르나크 신전에서 수행한 작업에서 나온다. 그는 사후레를 포함한 고왕국 시대의 왕들의 조각상을 봉헌했다. 이 조각상과 함께 있는 고인이 된 왕들의 초상화들은 왕족 조상들의 일반적인 숭배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 사후레의 조각상(목록 번호 CG 42004)은 검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약 50cm이다. 사후레는 주름 장식이 달린 치마와 둥근 곱슬 가발을 쓰고 즉위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왕좌의 양쪽에는 세누세르트 1세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진 사후레의 초상화임을 나타내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사후레의 유산은 중왕국 시대까지 충분히 지속되어, 서카르 파피루스의 이야기에 언급되어 있다. 이 파피루스는 5왕조의 기원에 대한 신화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우세르카프, 사후레,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왕을 세 형제로 묘사하며, 그들은 와 레데젯이라는 여인의 아들들이며 쿠푸의 계보를 대체할 운명이었다고 한다.

새 왕국 시대에 사후레는 왕가의 조상들을 위한 표준적인 숭배 의식의 일환으로 사후에도 종교적인 제물을 받았다. 예를 들어, 사후레는 투트모세 3세의 카르나크 신전인 아크메누의 벽에 새겨진 카르나크 왕 목록에 등장한다. 다른 고대 이집트 왕 목록과 달리, 이 목록의 왕들은 연대순으로 나열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이 목록의 목적은 카르나크 신전에서 예우받을 고인이 된 왕들의 이름을 거명하는 순전히 종교적인 것이었다.

이집트 제18왕조 후반과 이집트 제19왕조 시대에 많은 방문객들이 신전에 비문, 스텔라, 조각상을 남겼다. 이러한 활동들은 투트모세 3세 시대부터 사후레의 장례 신전에서 행해지던 숭배 의식과 관련이 있다. 이 숭배 의식은 세크메트 여신과 관련된 형태로 신격화된 왕에게 바쳐졌다. "사후레의 세크메트"라고 불리는 형태였다. 예를 들어, 서기관 프타헤무이아와 동료 서기관들은 람세스 2세 재위 30년(기원전 1249년경)에 사후레의 신전을 방문하여 세크메트에게 110년의 장수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새 왕국 시대에 이러한 숭배 의식이 나타난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사후레의 세크메트 숭배는 순전히 지역적인 현상이 아니었는데, 그 흔적이 상이집트 마을 데이르 엘-메디나에서 발견되었으며, 매년 페레트의 첫 번째 달 16일과 그 계절의 네 번째 달 11일에 열리는 두 개의 축제 기간에 기념되었다.

같은 시기에 람세스 2세의 아들인 왕자 카엠와세트는 파괴된 피라미드와 신전에 걸쳐 이집트 전역에서 공사를 벌였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건설 프로젝트에 사용할 돌을 확보하면서 숭배 목적으로 최소한의 복원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사후레의 피라미드 석재 외장에 새겨진 비문은 당시 이러한 공사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심의 재점화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는데, 특히 귀중한 투라 석회암을 얻기 위한 아부시르 기념물의 첫 번째 해체가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사후레의 장례 신전은 세크메트 숭배의 존재로 인해 이 시기에 무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숭배의 영향력은 람세스 2세 재위 후 감소하여 지역적인 예배 장소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집트 제25왕조(기원전 744~656년) 시대, 이집트 제3중간기 말기에 사후레 신전의 부조 일부가 타하르카에 의해 복제되었는데, 여기에는 스핑크스로서 적들을 짓밟는 왕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다.

그 직후, 이집트 제26왕조(기원전 664~525년)의 후기 시대에 사후레의 조각상이 카르나크 신전의 은닉 장소에 있던 여러 고왕국 시대 왕들의 조각상들 중 하나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그 당시까지 어떤 형태의 종교적 관심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아부시르 피라미드 해체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사후레의 피라미드는 다시 한번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32~30년)까지 사후레의 세크메트 숭배가 신전에서 계속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비록 영향력은 매우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아마시스 2세(기원전 570~526년), 다리우스 2세(기원전 423~404년) 통치 시대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까지 이어지는 여러 낙서들이 그곳에서 계속된 종교 활동을 증명한다. 예를 들어, 어떤 호리브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사후레의 세크메트 신전의 세크메트 사제"였다.

사후레 피라미드의 해체는 로마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그 주변에서 풍부하게 발견되는 맷돌, 석회 생산 시설, 작업자 거주 시설의 존재로 알 수 있다.

참조

[1] 비디오 Don't Eat the Pictures: Sesame Street a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 서적 ドドソン, ヒルトン 2012
[3] 서적 ティルディスレイ 2008
[4] 서적 ドドソン, ヒルトン 2012
[5] 문서 畜牛頭数調査は、納税額を確定するために行われていたもので、古王国時代は2年に1回実施されていたと考えられている。
[6] 간행물 King Sahure in Elkab http://pastpreserver[...] Egyptian Archaeology 2017-03-01 # Spring을 3월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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