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미 니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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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미 니시키는 미토번 출신으로, 검술을 익혀 신도무념류 면허개전을 받았다. 1863년 로시구미에 가맹하여 삼번조 소두가 되었고, 교토 잔류 후에는 아이즈번에 소속되어 닌부 낭사를 자칭하며 세리자와 가모, 곤도 이사미와 함께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사로서의 활동은 미미했고, 난폭한 행위로 기록되었다. 니미의 최후에 대해서는 할복설과 암살설 등 여러 설이 있으며, 료젠 초혼사에 제사된 점 등으로 미루어 존왕양이파와의 관계가 할복 이유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니미 니시키가 니이노미 구메타로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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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미 니시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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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신가 구메타로 (新家粂太郎) |
출생 | 1836년경 |
사망 | 1863년 10월 25일 |
소속 | 신센구미 |
직책 | 국장 보좌 총장 |
상세 정보 | |
별명 | 주정뱅이 |
사망 원인 | 할복 (자살) |
2. 생애
니미 니시키의 출신과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적으나, 많은 문헌에서 미토번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덴포 7년(1836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3], 신도무념류 검술에 능했다는 평가가 있다.[4]
분큐 3년(1863년),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교토 상경 경호를 위해 조직된 로시구미에 참여하여 간부급인 삼번조 소두(小頭)를 맡았다. 이후 세이카와 하치로의 에도 귀환 결정에 반발하여 세리자와 카모, 곤도 이사미 등과 함께 교토에 남아 아이즈번의 비호 아래 미부로시구미(壬生浪士組, 신선조의 전신) 결성에 참여했다. 초기에는 국장(局長) 중 한 명이었으나 이후 부장(副長)으로 강등되었다는 설이 있다.
미부로시구미 내에서 니미는 세리자와 카모를 중심으로 한 미토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으나, 구체적인 활약상보다는 난폭한 행동과 품행 문제로 곤도 이사미 등 시위관파와 갈등을 빚었다는 기록이 더 많이 남아있다.[6] 오사카 상인에게서 금품을 강탈한 사건에 연루된 기록[7] 외에는 뚜렷한 활동 기록을 찾기 어렵다.
그의 최후와 실제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과 설이 엇갈린다. 나가쿠라 신파치의 기록에는 시위관파에 의해 할복을 강요당했다는 설과 별도의 사건으로 처형되었다는 설이 공존하며, 이는 신선조 내부 권력 다툼 과정에서 미토파가 숙청된 사건과 연관 지어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그가 실제로는 미토번 낭사 '''니이노미 구메타로'''(新納久米太郎)[8][14][16] 또는 '''타나카 이오리'''라는 다른 인물이었다는 설도 제기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모신 교토 료젠 호국 신사에 그가 합사된 점 때문에 그의 죽음이 단순 품행 문제가 아닌 정치적 이유와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2. 1. 출신과 초기 이력
신미의 출신과 전반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많은 문헌에서 미토번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베가 사료집 공여록』에 기록된 나이(28세)를 토대로 역산하면, 덴포 7년(1836년)생으로 추정된다.[3]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오카다 스케에몬에게 검술을 배워 신도무념류 면허개전을 받았으며, 실력에 대해서는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남아 있다.[4]분큐 3년(1863년) 2월, 세이카와 하치로의 주선과 마쓰다이라 치카라노스케의 건의로 에도 막부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교토 상경 경호를 위해 조직된 로시구미에 참여하여 삼번조 소두(小頭)가 되었다. 당시 신선조를 결성하게 되는 세리자와나 에도 시위관(천연리심류)의 곤도 이사미 등도 로시구미에 참여했는데, 신미가 간부급인 소두에 임명된 것을 보면 이미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미가 이끈 조에는 이노우에 겐자부로, 오키타 린타로 등 다마(多摩) 지역 천연리심류 문인 5명이 배속되었다.
2월 8일 에도를 출발하여 23일 교토에 도착했으며, 같은 미토번 출신인 카스야 신고로와 함께 난부 카메지로의 저택에 머물렀다. 세리자와와 곤도는 야기 겐노조의 저택에 머물렀는데, 야기 가문의 아들 야기 타메사부로의 회고에 따르면 신미와 카스야는 세리자와가 있는 야기 저택에도 드나들었다고 한다.[5]
2월 27일, 세이카와가 로시구미의 에도 귀환을 선언하자 세리자와, 곤도 등과 함께 교토 잔류를 표명하며 로시구미를 이탈했다. 이탈한 인원들은 세리자와, 신미 등 미토 출신 낭사 5명과 곤도, 히지카타 토시조, 야마나미 게이스케, 오키타 소지 등 시위관 문인 8명이었고, 여기에 톤노이 요시오, 네기시 유잔, 카스야 등이 합류했으나 내부 갈등으로 톤노이는 살해되고 네기시와 카스야는 탈퇴했다. 이로 인해 잔류 낭사들은 자연스럽게 세리자와, 신미 중심의 미토파와 곤도, 히지카타 중심의 시위관파로 나뉘게 되었다.
3월, 잔류 낭사들은 교토수호직인 아이즈번주 마츠다이라 가타모리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아이즈번 휘하의 닌부로시(壬生浪士)를 자칭하게 되었다. 신미는 조직 결성 초기 편제에서 세리자와, 곤도와 함께 국장(局長)을 맡았던 것으로 보이나, 이후 부장(副長)으로 강등된 것으로 여겨진다. 세리자와의 심복(心腹)으로서 행동을 함께했다고 전해지지만, 대원으로서의 구체적인 활동 기록은 불분명한 점이 많다. 세리자와나 곤도의 일을 잘 기억했던 야기 타메사부로조차 신미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다"거나 "어느샌가 없어졌다"[6]고 말할 정도였다. 신선조 간부였던 나가쿠라 신파치는 『낭사 분큐 보국기사』에서 신미가 "난폭한 행동이 심하고 법도를 어겨 세리자와나 곤도의 설득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기록했으며, 코모자와(小島鹿之助)의 『신선조 시말기』에도 "유흥에 빠져 임무를 게을리하고, 군자금 조달을 명목으로 민가에서 금품을 강탈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세리자와가 일으킨 오사카 역사(力士) 소동이나 야마토야 사건 등에 신미가 가담했다는 기록은 없다.
대원으로서의 활동 중 기록으로 남은 것은 4월에 오사카의 상인에게서 100냥을 강탈했을 때 연명장에 세리자와, 곤도와 함께 이름이 적힌 것이 거의 유일하다. 하지만 5월 25일 마츠다이라 가타모리에게 제출된 명단에는 신미의 이름이 없었으며[7], 같은 달 입대한 시마다 카이가 남긴 『영명록(英名録)』에도 그의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2. 2. 로시구미 가담과 상경
분큐 3년(1863년) 2월, 세이카와 하치로의 주선과 마쓰다이라 치카라노스케의 건의로, 에도 막부 14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교토행을 경호하기 위해 로시구미가 조직되었다. 니미 니시키는 이때 로시구미에 가담하여 삼번조의 소두(小頭)를 맡았다. 훗날 신선조를 결성하는 세리자와나 에도 시위관(천연리심류)의 곤도 이사미 등도 로시구미에 함께 가입했다. 니미가 간부급인 소두에 임명된 것을 보면, 당시 이미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니미가 이끄는 조에는 이노우에 겐자부로, 오키타 린타로 등 다마 지역 천연리심류 문인 5명이 배속되었다.로시구미는 2월 8일 에도를 출발하여 2월 23일 교토에 도착했다. 니미는 같은 미토번 출신인 카스야 신고로와 함께 난부 카메지로(難波亀二郎)의 저택에서 머물렀다. 한편, 세리자와와 곤도는 야기 겐노조의 저택에 묵었는데, 야기 가문의 아들 야기 타메사부로는 훗날 니미와 카스야가 세리자와를 만나러 야기 가에도 드나들었다고 회고했다.[5]
2. 3. 미부로시구미 결성과 내부 갈등
분큐 3년(1863년) 2월, 세이카와 하치로의 주선과 마쓰다이라 치카라노스케의 건의로 에도 막부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교토 상경을 경호하기 위해 로시구미가 조직되었다. 니미 니시키는 여기에 가담하여 삼번조의 소두(小頭)를 맡았다. 당시 신선조의 핵심 인물이 되는 세리자와 카모, 곤도 이사미 등도 로시구미에 속해 있었다. 니미가 간부급인 소두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이미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니미가 이끄는 조에는 이노우에 겐자부로, 오키타 린타로 등 다마 지역 천연리심류 문인 5명이 배속되었다.로시구미는 2월 8일 에도를 출발하여 23일 교토에 도착했다. 니미는 같은 미토번 출신인 카스야 신고로와 함께 난부 카메지로의 저택에 머물렀다. 세리자와와 곤도는 야기 겐노조의 저택에 묵었는데, 야기 가문의 아들 야기 타메사부로는 니미와 카스야가 세리자와를 만나러 야기 가문을 드나들었다고 회고했다.[5]
그러나 2월 27일, 로시구미 결성을 주도했던 세이카와 하치로가 돌연 에도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자, 니미는 세리자와, 곤도 등과 함께 이에 반발하며 교토에 남기로 결정했다. 교토 잔류파는 세리자와, 니미를 포함한 미토 출신 낭사 5명과 곤도, 히지카타 토시조, 야마나미 게이스케, 오키타 소지 등 시위관(試衛館) 출신 8명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톤노이 요시오, 네기시 유잔, 카스야 신고로 등이 잠시 합류했으나, 곧 내부 다툼이 벌어져 톤노이는 살해되고 네기시와 카스야는 이탈했다. 이 과정에서 잔류파는 자연스럽게 세리자와, 니미 등 미토파와 곤도, 히지카타 등 시위관파로 나뉘게 되었다.
3월, 교토에 남은 낭사들은 교토수호직을 맡고 있던 아이즈번주 마츠다이라 가타모리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고, 아이즈번의 감독 하에 미부로시구미(壬生浪士組, 훗날 신선조)를 결성했다. 니미는 초기 조직에서 세리자와, 곤도와 함께 국장(局長)을 맡았으나, 이후 부장(副長)으로 강등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는 세리자와의 측근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인 활동 기록은 매우 드물다.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억하던 야기 타메사부로조차 니미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다"거나 "어느샌가 없어졌다"[6]고 말할 정도였다.
신선조 간부였던 나가쿠라 신파치는 『낭사 분큐 보국기사』에서 니미가 "난폭한 행동이 심하고 법도를 어겼으며, 세리자와나 곤도의 만류도 듣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코모자와 로쿠로(子母澤寛)의 『신선조 시말기』에서도 "유흥에 빠져 임무를 게을리하고, 대금이라 칭하며 민가에서 금품을 갈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세리자와가 주도한 오사카 스모 선수들과의 난투 사건이나 오사카의 호상 야마토야(大和屋) 방화 사건 등에 니미가 가담했다는 기록은 없다.
니미의 구체적인 활동으로 기록된 것은 4월 오사카의 상인에게서 100냥을 강탈했을 때, 협박장에 세리자와, 곤도와 함께 이름을 올린 것이 거의 유일하다. 그러나 5월 25일 마츠다이라 가타모리에게 제출된 미부로시구미 대원 명단에는 니미의 이름이 빠져 있으며[7], 같은 달 입대한 시마다 카이가 남긴 『영명록』(英名録)에도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니미의 최후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나가쿠라 신파치의 『신선조 전말기』(新撰組顛末記)에 의하면, 니미가 자주 드나들던 기온 신치(新地)의 요정 '야마오'(山緒)에 곤도 일파가 들이닥쳐 그의 여러 비행을 추궁하며 "할복하지 않으면 법도에 따라 참수하겠다"고 압박하자 결국 할복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리자와와 히라야마 고로 역시 시위관파에게 암살당하면서 신선조 내 미토파는 사실상 제거되었다.
반면, 나가쿠라가 남긴 또 다른 기록인 『낭사 분큐 보국 기사』에서는, 니미의 처분을 두고 논의한 끝에 할복시키기로 결정했으나, 그 사이에 니미가 시조 기야초에 머물던 미토 낭인 요시나리 츠네로(요시나리 유타로의 동생 츠네지로로 추정됨)에게 또다시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8월 14일 혹은 15일에 우메즈 모(梅津某)라는 인물의 집에서 할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경위는 불분명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조슈 등 유신 지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료젠 초혼사(霊山招魂社)에 막부 측 인물인 니미가 합사되어 있고, 전 신징구미(新徴組) 대원 쿠라치 요시노부가 쓴 『근세 고명 일람 근왕 위황국』(近世高名一覧勤王偉皇国)에도 그의 이름이 포함된 점 등을 근거로, 니미의 할복 이유가 단순한 품행 불량이나 시위관파와의 갈등뿐 아니라, 미토번, 조슈번, 토사번 등 존왕양이파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제기된다.
2. 4. 최후와 의혹
나가쿠라 신파치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니미 니시키의 최후는 두 가지 상반된 설명이 존재한다.『신선조 전말기』에서는 니미가 자주 드나들던 기온 신치의 요정 "야마토"에서 곤도 이사미 일파에게 평소의 악행을 추궁당했으며, 할복을 강요받아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한다. 니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리자와 카모와 히라야마 고로 역시 시위관파에 의해 암살되면서, 신선조 내 미토파는 사실상 제거되었다.
그러나 나가쿠라의 또 다른 기록인 『낭사 분큐 보국 기사』에서는 다른 경위를 설명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동료들과의 논의 끝에 니미의 할복이 결정되었으나, 그가 집행 전에 시조 기야초에 머물던 미토 출신 낭인 요시나리 츠네로(츠네지로로 추정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음력 8월 14일 혹은 15일에 우메즈 모(梅津某)라는 인물의 지시로 할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두 기록 중 어느 것이 정확한 사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편, 니미의 할복 이유에 대해서도 단순한 품행 불량이나 시위관파와의 대립 외에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조슈 번 출신 지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교토 료젠 호국 신사에 신선조의 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니미가 합사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전 신초구미 대원이었던 쿠라치 요시노부가 유신 지사들을 기록한 『근세 고명 일람 근왕 위황국』에 니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등이 그 근거다. 이를 통해 니미의 죽음이 미토번, 조슈번, 토사번 등 존왕양이파와의 긴밀한 관계가 문제가 되어 일어난 정치적 숙청의 결과일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
3. 이설(異説)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니미 니시키는 같은 미토 낭사 출신이자 세리자와 카모의 이전 이름으로 알려진 시모무라 쓰구지와 다마쓰쿠리 분무관 당(다마쓰쿠리 세력)의 동지였던 '''新納 久米太郎|니이노미 구메타로일본어'''라는 설이 유력하다.[8] 시모무라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니이미 니시키"를 자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니이노미는 신도무넨류 검객 金子健四郎|가네코 겐시로일본어의 문하생이었다. 분큐 3년 (1863년) 5월, 니조 木屋町|키야마치일본어에 머물던[9] 미토 번사 吉成勇太郎|요시나리 유타로일본어와 中山忠能|나카야마 타다요시일본어의 일기 속에 세리자와와 함께 이름이 나타나는 미토 낭사 今泉与一太郎|이마이즈미 요이치타로일본어[10]와 함께 연서한 차용서가 남아 있어, 당시 교토에 머물렀음이 확인된다.[11][12]
같은 해 6월 16일, 니이노미는 양이 감찰사 正親町公董|오기마치 킨토모일본어의 친병(親兵)[13]으로서 조슈로 내려갔을 때 주사(酒邪, 술버릇)로 인해 불상사를 일으켰다. 이때는 킨토모의 가신인 徳田隼人|토쿠다 하야토일본어의 중재로 처분이 보류되었다. 그러나 다시 주사로 인한 난폭한 행위를 일으켜, 음력 9월 15일에 할복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三田尻|미타지리일본어의 쿠루마즈카(현 야마구치현 防府市|호후시일본어 쿠루마즈카 1)에 있던 楞厳寺|로쇼지일본어에 묘비(현존하지 않음)가 세워졌다.[14] 기록된 사망 당시 나이(세는 나이)는 28세[14]로, 니미의 추정 연령과 일치한다. 다른 기록에는 "新見粂次郎|신미 쿠메지로일본어"[15]라는 표기도 있다. 또한, 요시나리 유타로는 미부 낭사(신센구미의 전신)가 구메타로를 감당하지 못해 데려갔다고 기록하고 있어[16], 기록상 니미의 이름이 사라진 5월 이후 곤도, 세리자와 등과 협의하여 그의 근신 처분을 해제하고 미부 낭사에서 탈퇴시켜 다른 곳에서 활약할 기회를 주려 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2]
한편, 西村兼文|니시무라 켄분일본어의 『신선조 시말기』에는 니미의 이름이 보이지 않고, 대신 미부 낭사 창설 멤버로서 '''田中 伊織|타나카 이오리일본어'''라는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는 타나카 이오리의 최후에 대해 "곤도의 뜻에 따르지 않는 일이 있자 노려져 암살당했다"고 서술하고 있어, 이것이 니미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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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インサイド】〝酒乱〟で近藤勇とモメて切腹? 場所にも諸説…新選組の新見錦、ナゾの人物像に光当たる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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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撰組草創期の幹部、新見錦の性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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会津藩庁記録 文久三年 第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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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壬生浪士幹部?の借用証発見 同一人物説の新家粂太郎連署
京都新聞
201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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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歴史インサイド】〝酒乱〟で近藤勇とモメて切腹? 場所にも諸説…新選組の新見錦、ナゾの人物像に光当たるか - 産経WEST.html
https://www.sanke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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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尊攘之儀ニ付建白書〕
岡山大学附属図書館
文久3年8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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