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아덴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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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닉 아덴하트는 2008년과 2009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에서 투수로 활동한 미국 프로 야구 선수였다. 1986년 메릴랜드주 실버스프링에서 태어난 아덴하트는 고등학교 시절 야구 유망주로 주목받았으며, 2004년 메이저 리그 드래프트에서 에인절스에 지명되어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2008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4경기에 출전했으나, 2009년 4월 9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이후, 에인절스 구단은 닉 아덴하트 최우수 투수상 제정, 추모 행사 진행 등 아덴하트를 기리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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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아덴하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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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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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Nicholas James Adenhart 니컬러스 제임스 아덴하트 |
출생지 | 메릴랜드주 실버스프링, 미국 |
사망 장소 |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미국 |
포지션 | 투수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윌리엄스포트 고등학교 |
프로 입단 | 2004년 드래프트 |
드래프트 순위 | 2004년 MLB 드래프트 14라운드 (전체 413위) |
소속 팀 |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2008–2009) |
메이저 리그 기록 | |
데뷔 (MLB) | 2008년 5월 1일 |
마지막 경기 (MLB) | 2009년 4월 8일 |
승패 기록 | 1승 0패 |
평균자책점 | 6.00 |
삼진 | 9 |
2. 어린 시절
메릴랜드주 실버스프링에서 전직 미국 비밀검찰국 직원이었던 아버지 짐 아덴하트와 어머니 재닛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132] 부모는 이혼했으며, 어머니 재닛은 재혼하여 아들 헨리를 얻었다.[98]
고등학교 마지막 경기에서 20여 명의 스카우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덴하트는 세 번째 타자에게 커브를 던지다가 팔꿈치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팔꿈치 인대 부분 파열로 토미 존 수술을 받아야 했다.[106] 200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 2주 전의 부상으로 1라운드 지명이 유력했던 아덴하트는 평가가 급락했다.[106]
아덴하트는 하프웨이 리틀 리그와 헤이거스타운 포니 리그에서 투수로 활동하며 야구 경력을 시작했다.[99][100] 메릴랜드주 헤이거스타운에 있는 세인트 마리아 고레티 고등학교와 윌리엄스포트 고등학교에서 야구 선수(투수, 유격수, 외야수)와 농구 선수(가드)로 활동했다.[101][99] 14세 때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후원하는 아마추어 야구팀 오리올랜더스에 합류했고, 16세 때는 유시스 메릴랜드 오리올스에서 투수로 뛰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102][103][104]
고등학교 2학년 때 윌리엄스포트 고등학교로 전학 후 농구를 포기하고 야구, 특히 투수에 집중했다.[105] 그 해 메릴랜드 주 게토레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105] 플레이오프 8강전에서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105] 고등학교 마지막 시즌에는 5승 1패, 평균자책점 0.73을 기록하며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101]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106] 고등학교 마지막 경기에서 팔꿈치 부상을 당했다.[10]
3. 야구 경력
아덴하트는 2004년 7월 26일 710000USD의 사이닝 보너스를 받고 애너하임 에인절스와 계약했다.[108] 2005년에는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에 다니면서 팔꿈치 재활에 전념했다.[109]
2005년 6월 25일, 파이오니아 리그의 오렘 아울스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110] 2006년 시즌에는 올스타 퓨처스 게임에 출전했고, 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예선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 명단에도 포함되었다.[113][116] 2007년에는 더블 A로, 2008년에는 트리플 A로 승격되었다.[119]
2008년 5월 1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홈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121] 2008년 5월 1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첫 승을 기록했다.[125] 2009년 시즌,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아덴하트를 에인절스 내 최고 유망주이자 전체 68위로 평가했다.[113][127] 스프링 트레이닝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에인절스의 3선발로 2009년 시즌을 시작했다.[132]
3. 1. 아마추어 시절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아덴하트를 고등학교 2학년 때 주니어 1순위 유망주,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미국 고등학생 야구 1순위 유망주로 선정했다.[105][101] 고등학교 2학년 때 6승 무패, 평균자책점 1.04를 기록하며 메릴랜드 주 게토레이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105] 플레이오프 8강전에서는 팀이 0-1로 패했지만, 14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노히트 피칭을 선보였다.[105]
고등학교 마지막 시즌 첫 경기에서는 21명의 타자를 상대로 15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퍼펙트 게임을 기록했다.[101][108] 마지막 시즌에는 5승 1패, 평균자책점 0.73, 1이닝 당 평균 2.2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106]
아덴하트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진학하여 노스캐롤라이나 타 힐 베이스볼 팀에서 뛰기 위해 협약서(National Letter of Intent)에 서명했지만,[106] 200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 2주 전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평가가 급락했다.[10]
3. 2. 프로 입단 및 마이너 리그 시절
200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14라운드 전체 413번째로 애너하임 에인절스에 지명되었다.[107] 에인절스의 설득으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의 장학금 제안을 거절하고, 710000USD의 사이닝 보너스를 받고 에인절스와 계약했다.[108] 토미 존 수술 후 다음 해인 2005년,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에 다니면서 재활에 전념했다.[109]
2005년 6월 25일, 에인절스 루키 리그 팀인 파이오니아 리그의 오렘 아울스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110] 2005년 시즌, 애리조나 리그에서 13경기에 출장해서 2승 3패, 3.68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52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110] 2006년에는 싱글 A 팀에서 뛰며 16경기에 나서서 10승과 1.95의 평균자책점, 99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110] 2006년 올스타 퓨처스 게임에 출전했으며, 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예선에 참가하는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었다.[113][116] 2007년 더블 A로 승격되어, 26번 등판해 10승 8패, 3.6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110] 2008년 트리플 A로 승격되었다.[119]
3. 3. 메이저 리그 시절
아덴하트는 2008년 5월 1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에인절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에서 홈경기 선발 투수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당시 아덴하트는 메이저 리그 25인 선수 명단에 든 선수 중 가장 어린 선수였다.[121] 데뷔 첫 등판에서 2이닝 동안 5실점 5볼넷을 기록, 승패 없이 물러났고 팀은 8-15로 패했다.[123] 아덴하트는 "팀을 실망시켰다. 동료, 감독, 코치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나 자신에게도 실망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121]
두 번째 등판은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상대로 한 경기였으며, 4⅓이닝 3실점 3탈삼진을 기록, 승패는 없었고 팀은 5-3으로 승리했다.[124] 마이크 소시아 감독은 "(이 날 투구는) 확실히 제대로 된 스타트였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24]
2008년 5월 1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홈경기에서 5⅔이닝 4실점을 기록, 팀의 10-7 승리를 이끌며 메이저 리그 첫 승을 따냈다.[125] 이후 아덴하트는 다시 트리플 A 솔트레이크 비스로 내려갔다.[126] 솔트레이크에서 남은 시즌 동안 26경기에 등판, 9승 13패, 5.7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110]
2009년 시즌,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아덴하트를 에인절스 내 최고 유망주, 전체 68위로 평가했다.[113][127]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6번 선발 등판, 26이닝 동안 3승 무패, 3.12의 평균자책점, 18탈삼진, 9실점, 5볼넷을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139] 이러한 활약으로 에인절스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 2009년 시즌을 에인절스의 3선발로 시작하게 되었다.[132]
2009년 4월 8일, 시즌 첫 등판에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6이닝 동안 7피안타, 무실점, 5탈삼진, 3볼넷을 기록하며 호투했지만 승패는 기록하지 못했다.[128]
4. 사망
2009년 4월 9일 새벽, 닉 아덴하트는 캘리포니아주 풀러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99][130][129] 아덴하트는 선발 투수로 등판한 경기 직후였으며, 토요타 시에나 미니밴 운전자가 빨간 신호를 무시하고 아덴하트가 탑승한 미쓰비시 이클립스를 들이받았다.[3][32][31] 이 사고로 이클립스 운전자 코트니 스튜어트와 동승자 헨리 피어슨은 현장에서 사망했고,[129] 아덴하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메디컬 센터로 긴급 이송되었으나 끝내 숨졌다.[130] 미쓰비시에 함께 타고 있던 존 윌하이트는 내부적 두개골 절단이라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5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생존했다.[131][33]
미니밴 운전자 앤드루 토머스 갈로는 사고 현장에서 도주했다가 30분 만에 체포되었다.[132][133] 갈로는 세 건의 살인, 뺑소니, 음주 운전 등의 혐의로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 대배심에 기소되었다.[134] 사고 당시 갈로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법적 기준치를 초과한 0.19%였으며, 운전 면허도 정지된 상태였다.[134]
2010년 9월, 소배심은 갈로에게 제2급 살인죄를 적용하여 유죄를 선고했다.[136] 갈로는 이전에도 음주 운전 전력이 있었음에도 재범하여, 우발적 교통사고에 적용되는 3급 살인이 아닌 2급 살인죄가 적용되었다.[134] 2010년 12월, 갈로는 징역 51년 형을 선고받았다.[138]
5. 추모
에인절스 구단은 닉 아덴하트의 사망 다음 날 경기를 연기하고, 2009년 시즌 동안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진행했다.[140] 선수들은 유니폼에 검은색 34번 패치를 부착했고,[141] 덕아웃에는 아덴하트의 유니폼을 걸어 놓았다.[142] 에인절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에는 아덴하트의 사진과 추모 공간이 마련되었다.[113][141][143] 아덴하트의 유족과 에인절스 단장 토니 레아긴즈는 아덴하트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했다.[139]
2009년 9월 28일, 에인절스는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 우승을 기념하며 아덴하트의 유니폼에 샴페인과 맥주를 부었고, 그의 사진 앞에서 팀 단체 사진을 찍었다.[147] 아덴하트의 아버지 짐은 "그것이 야구다. 닉이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도 같이 선수들과 술을 마셨을 것이다."라 말하며 유족들이 팀원들의 행동을 반대하지 않았음을 밝혔다.[148] 에인절스 선수들은 2009년 플레이오프 상금 138038.57USD 전액을 아덴하트의 유족들에게 기부했다.[149] 에인절스 감독 마이크 소시아는 2009년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아덴하트에게 헌정했다.[150]
에인절스 구단은 '닉 아덴하트 올해의 투수상'을 제정하여 매년 뛰어난 투수에게 수여하고 있다.[151] 제러드 위버가 2009년 첫 수상자가 되었다.[153] 아덴하트의 가족은 닉 아덴하트 추모 기금을 설립하여 어린이 야구 단체를 지원하고 있다.[154] 이 기금은 첫 지원으로 메릴랜드주 하프웨이 리틀 리그에 5000USD를 전달했다.[100]
2010년 6월 20일, 에인절스의 싱글 A 팀인 시더래피즈 커널스는 아덴하트의 번호 21번을 영구 결번시켰다.[157] 오렘 아울스 선수단은 아덴하트의 사진과 번호 34번이 찍힌 특별 제작 유니폼을 입었다.[159] 제러드 위버를 비롯한 많은 선수들이 아덴하트를 기리는 행동을 이어갔다.[163]
6. 연도별 성적
타자
자책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