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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기이치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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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1927년 4월 20일부터 1929년 7월 2일까지 805일 동안 재직한 일본의 내각이다. 쇼와 금융 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행의 긴급 융자를 실시하고, '산업 입국' 노선을 채택하여 국내 산업 발전을 도모했다. 치안유지법을 개정하고, 일본 공산당을 탄압하는 등 반공 정책을 추진했으며, 총선거를 앞두고 정우회에 비판적인 지사를 면직하는 등 선거 관리를 했다. 중국 대륙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정책을 추진하며 산둥 출병을 실시했으나, 장쭤린 폭사 사건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로 쇼와 천황의 불신임을 받아 내각이 총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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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기이치 내각
내각 정보
내각 이름다나카 기이치 내각
일본어 이름다나카 기이치 나이카쿠 (田中義一内閣)
대수26대
수상 이름다나카 기이치
수상 전직귀족원 의원, 입헌정우회 총재
성립 연도1927년
성립 날짜4월 20일
종료 연도1929년
종료 날짜7월 2일
여당입헌정우회
선거제1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해산1928년 1월 21일 (보통선거 해산)
총리다나카 기이치
정부 수반 직함총리
국가 원수 직함천황
국가 원수쇼와
다나카 기이치 내각 각료
친임식 후의 각료
내각 번호26대
관할일본
성립일1927년 4월 20일
해산일1929년 7월 2일
이전 내각제1차 와카쓰키 내각
다음 내각하마구치 내각
정치 정당중의원 블록:
|border=darkgray}} 헌정회
귀족원 블록:
연구회
코우유 클럽
의회 정보
의회 기간제53회 제국의회
제54회 제국의회
제55회 제국의회
제56회 제국의회

2. 재직 기간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재직 기간은 1927년(쇼와 2년) 4월 20일부터 1929년(쇼와 4년) 7월 2일까지이다. 총 재직 일수는 805일이다.

3. 내각 구성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

; 국무대신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국무대신은 1927년 4월 20일에 임명되어 1929년 7월 2일까지 805일간 재직하였다.[2]

직책성명출신 등특명 사항 등비고
내각총리대신26다나카 기이치70px귀족원
입헌정우회
(무회파)
퇴역육군대장
(육대 8기)
남작
외무, 내무, 탁무대신 겸임입헌정우회 총재
외무대신39다나카 기이치70px귀족원
입헌정우회
(무회파)
퇴역 육군 대장
(육대 8기)
남작
내각총리대신、
내무, 탁무대신 겸임
입헌정우회 총재
내무대신38스즈키 기사부로70px귀족원
입헌정우회
(연구회)
1928년 5월 4일 면[3]
39다나카 기이치70px귀족원
입헌정우회
(무회파)
퇴역 육군 대장
(육대 8기)
남작
내각총리대신、
외무, 탁무대신 겸임
1928년 5월 4일 겸[3]
1928년 5월 23일 면겸[4]
입헌정우회 총재
40모치즈키 게이스케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1928년 5월 23일 임[5][4]
대장대신28다카하시 고레키요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1927년 6월 2일 면[6][7]
29미쓰치 주조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전임
1927년 6월 2일 임[8][7]
육군대신18시라카와 요시노리70px육군 대장
(육대 12기)
첫 입각
해군대신12오카다 게이스케70px해군대장
(해대 장교과 갑종 2기)
첫 입각
사법대신31하라 요시미치70px민간[9]첫 입각
문부대신35미쓰치 주조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첫 입각
1927년 6월 2일 면[8][7]
36미즈노 렌타로70px귀족원
입헌정우회
(교우구락부)
1927년 6월 2일 임[7]
1928년 5월 25일 면[10][11]
37쇼다 가즈에70px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1928년 5월 25일 임[11]
농림대신5야마모토 데이지로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첫 입각
상공대신5나카하시 도쿠고로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체신대신31모치즈키 게이스케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첫 입각
1928년 5월 23일 면[5][4]
32구하라 후사노스케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첫 입각
1928년 5월 23일 임[4]
철도대신7오가와 헤이키치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탁무대신(탁무성 미설치)1929년 6월 10일 설치
1다나카 기이치70px귀족원
입헌정우회
(무회파)
퇴역 육군 대장
(육대 8기)
남작
내각총리대신、
외무, 내무대신 겸임
1929년 6월 10일 겸[12]
입헌정우회 총재



; 내각 서기관장·법제국 장관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내각서기관장은 하토야마 이치로(입헌정우회)가, 내각법제국 장관은 마에다 요네조(입헌정우회)가 1927년 4월 20일에 임명되어[2] 1929년 7월 2일까지 재직하였다.[1]

; 정무차관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정무차관은 1927년 4월 22일에 임명되었다.[13]

직책성명출신 등비고
외무정무차관모리 가쿠중의원/입헌정우회1929년 4월 27일 면
(결원)1929년 4월 27일부터
내무정무차관무토 킨키치중의원/입헌정우회1928년 4월 23일 사망결원[14]
(결원)1928년 5월 29일까지
아키타 기요시중의원/입헌정우회1928년 5월 29일 임[15]
대장정무차관오구치 기로쿠중의원/입헌정우회
육군정무차관다케우치 도모지로중의원/입헌정우회
해군정무차관우치다 신야중의원/입헌정우회
사법정무차관하마다 구니마쓰중의원/입헌정우회
문부정무차관야마자키 다쓰노스케중의원/입헌정우회1929년 4월 30일 면
(결원)1929년 4월 30일부터
농림정무차관히가시 다케시중의원/입헌정우회
상공정무차관요시우에 쇼이치로중의원/입헌정우회
체신정무차관아키타 기요시중의원/입헌정우회1928년 5월 29일 면[16][15]
히로오카 우이치로중의원/입헌정우회1928년 5월 29일 임[15]
철도정무차관우에노 야스타로중의원/입헌정우회



; 참여관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참여관은 1927년 4월 22일에 임명되었다.[13] 참여관에는 입헌정우회 소속 의원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직책성명출신 등비고
외무참여관우에하라 에쓰지로중의원/입헌정우회1929년 4월 19일 면
(결원)1929년 4월 19일부터
내무참여관가토 구메시로중의원/입헌정우회
대장참여관야마구치 요시이치중의원/입헌정우회
육군참여관다카쿠사 미요조중의원/입헌정우회1928년 3월 9일 면[17]
핫타 소키치중의원/입헌정우회1928년 3월 9일 임[17]
해군참여관마쓰모토 쿤페이중의원/입헌정우회
사법참여관구로스미 나리야키중의원/입헌정우당1928년 7월 17일 사망결원[18]
(결원)1928년 7월 24일까지
이소베 히사시중의원/입헌정우회1928년 7월 24일 임[19]
문부참여관안도 마사즈미중의원/입헌정우회1929년 4월 27일 면
(결원)1929년 4월 27일부터
농림참여관스나다 시게마사중의원/입헌정우회
상공참여관마키노 료조중의원/입헌정우회
체신참여관무카이 야오중의원/입헌정우회
철도참여관시가 와타리중의원/입헌정우회



; 세력 조견표

출신국무대신정무차관참여관기타
입헌정우회71111내각서기관장, 법제국 장관[1]
연구회100align="left" |
군부200align="left" |
민간100align="left" |
합계111111align="left" |


3. 1. 국무대신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국무대신은 1927년 4월 20일에 임명되어 1929년 7월 2일까지 805일간 재직하였다.[2]

직책성명출신 등특명 사항 등비고
내각총리대신26다나카 기이치70px귀족원
입헌정우회
(무회파)
퇴역육군대장
(육대 8기)
남작
외무, 내무, 탁무대신 겸임입헌정우회 총재
외무대신39다나카 기이치70px귀족원
입헌정우회
(무회파)
퇴역 육군 대장
(육대 8기)
남작
내각총리대신、
내무, 탁무대신 겸임
입헌정우회 총재
내무대신38스즈키 기사부로70px귀족원
입헌정우회
(연구회)
1928년 5월 4일 면[3]
39다나카 기이치70px귀족원
입헌정우회
(무회파)
퇴역 육군 대장
(육대 8기)
남작
내각총리대신、
외무, 탁무대신 겸임
1928년 5월 4일 겸[3]
1928년 5월 23일 면겸[4]
입헌정우회 총재
40모치즈키 게이스케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1928년 5월 23일 임[5][4]
대장대신28다카하시 고레키요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1927년 6월 2일 면[6][7]
29미쓰치 주조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전임
1927년 6월 2일 임[8][7]
육군대신18시라카와 요시노리70px육군 대장
(육대 12기)
첫 입각
해군대신12오카다 게이스케70px해군대장
(해대 장교과 갑종 2기)
첫 입각
사법대신31하라 요시미치70px민간[9]첫 입각
문부대신35미쓰치 주조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첫 입각
1927년 6월 2일 면[8][7]
36미즈노 렌타로70px귀족원
입헌정우회
(교우구락부)
1927년 6월 2일 임[7]
1928년 5월 25일 면[10][11]
37쇼다 가즈에70px귀족원
무소속
(연구회)
1928년 5월 25일 임[11]
농림대신5야마모토 데이지로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첫 입각
상공대신5나카하시 도쿠고로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체신대신31모치즈키 게이스케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첫 입각
1928년 5월 23일 면[5][4]
32구하라 후사노스케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첫 입각
1928년 5월 23일 임[4]
철도대신7오가와 헤이키치70px중의원
입헌정우회
탁무대신(탁무성 미설치)1929년 6월 10일 설치
1다나카 기이치70px귀족원
입헌정우회
(무회파)
퇴역 육군 대장
(육대 8기)
남작
내각총리대신、
외무, 내무대신 겸임
1929년 6월 10일 겸[12]
입헌정우회 총재


3. 2. 내각 서기관장·법제국 장관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내각서기관장은 하토야마 이치로(입헌정우회)가, 내각법제국 장관은 마에다 요네조(입헌정우회)가 1927년 4월 20일에 임명되어[2] 1929년 7월 2일까지 재직하였다.[1]

3. 3. 정무차관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정무차관은 1927년 4월 22일에 임명되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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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신정무차관아키타 기요시중의원/입헌정우회1928년 5월 29일 면[16][15]
히로오카 우이치로중의원/입헌정우회1928년 5월 29일 임[15]
철도정무차관우에노 야스타로중의원/입헌정우회


3. 4. 참여관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참여관은 1927년 4월 22일에 임명되었다.[13] 참여관에는 입헌정우회 소속 의원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직책성명출신 등비고
외무참여관우에하라 에쓰지로중의원/입헌정우회1929년 4월 19일 면
(결원)1929년 4월 19일부터
내무참여관가토 구메시로중의원/입헌정우회
대장참여관야마구치 요시이치중의원/입헌정우회
육군참여관다카쿠사 미요조중의원/입헌정우회1928년 3월 9일 면[17]
핫타 소키치중의원/입헌정우회1928년 3월 9일 임[17]
해군참여관마쓰모토 쿤페이중의원/입헌정우회
사법참여관구로스미 나리야키중의원/입헌정우당1928년 7월 17일 사망결원[18]
(결원)1928년 7월 24일까지
이소베 히사시중의원/입헌정우회1928년 7월 24일 임[19]
문부참여관안도 마사즈미중의원/입헌정우회1929년 4월 27일 면
(결원)1929년 4월 27일부터
농림참여관스나다 시게마사중의원/입헌정우회
상공참여관마키노 료조중의원/입헌정우회
체신참여관무카이 야오중의원/입헌정우회
철도참여관시가 와타리중의원/입헌정우회


3. 5. 세력 조견표

출신국무대신정무차관참여관기타
입헌정우회71111내각서기관장, 법제국 장관[1]
연구회100align="left" |
군부200align="left" |
민간100align="left" |
합계111111align="left" |


4. 주요 정책

제1차 와카츠키 내각이 쇼와 금융 공황에 대한 대응 실패로 총사퇴한 후, 입헌정우회다나카 기이치 총재가 사이온지 긴모치의 추천(헌정의 정도)으로 1927년 4월 28일 총리로 취임하여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성립되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전 총리가 금융 공황 해결을 조건으로 대장대신에 취임하여, 일본은행의 긴급 융자를 통해 금융 공황에 대처했다. 이때 수요를 맞추기 위해 한쪽 면만 인쇄된 신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산업 입국' 노선을 채택하여 국내 산업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는 혁신 구락부 (이누카이 쓰요시 총재)가 정우회와 합동할 때의 조건이기도 하였다. 이누카이는 군축을 통해 남은 경비를 국내 투자에 충당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나카는 적극적인 재정과 중국 대륙에서의 세력 확대에 따른 시장 확대 및 대륙으로의 이민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하였다. 국내 투자에서는 철도 분야 등에 대한 투자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이는 후에 오가와 철상(소관 대신)을 피고로 하는 5 사철 의혹을 낳았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치안유지법을 개정하여 최고형을 사형으로 강화했다. 또한, 3·15 사건을 일으켜 일본 공산당을 탄압하는 등 반공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총선거에 앞서 부현 지사의 대규모 인사 이동을 실시하여 정우회에 비판적인 지사를 휴직·면직시켰다. 이는 입헌민정당정권을 잡았을 때도 보복으로 행해져, '당폐'라고 불리며 지방 정치의 침체를 초래하여, 후에 혁신 관료의 대두와 그들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모으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스즈키 내상은 제1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대규모 선거 간섭을 실시했다. 이것은 국민·야당뿐만 아니라, 귀족원이나 정우회 내의 고참 간부(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추진 세력)의 반감을 사, 스즈키는 실각한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중국 대륙에서 신해혁명(1912년)으로 청조가 붕괴된 이후, 각지의 군벌이 할거하는 동란의 와중에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감행하자, 산둥성의 거류민 보호 및 장쭤린에 대한 원조를 목적으로 산둥 출병을 실시하였다. 또한, 동방 회의를 개최하여 중국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정책을 추진했다. 1928년, 장쭤린의 세력이 약화되자 일본 측은 장쭤린에게 본거지인 봉천으로 퇴각할 것을 설득했고, 장쭤린은 6월 3일 베이징을 떠났다.

1928년 6월 4일 새벽, 장쭤린이 베이징에서 봉천으로 철수하던 중 탑승한 열차가 폭파되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발생 직후부터 관동군이 장쭤린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한 것으로 의심받았다.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미네 유키마쓰 헌병 사령관을 현지에 파견하여 조사를 지시했다. 10월까지의 조사 결과, 가와모토 다이사쿠 관동군 고급 참모(육군 대좌)가 주모한 관동군의 소행으로 결론 내려졌다.

이후 진상 공개 및 관련자 처벌 여부를 두고 의견이 대립했다. 다나카 총리는 진상 공개 및 관련자 처벌을 주장했으나,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신, 오가와 헤이키치 철도대신 등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다나카사이온지 긴모치 원로의 동의를 얻고 쇼와 천황에게도 "엄중한 처벌"을 약속했다. 그러나 정부 내에서는 진상 비공개파가 우세했고, 1929년 6월, 관동군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철로 수비 미비에 대한 행정 처분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 최종 방침은 쇼와 천황의 분노를 샀고, 다나카 총리는 쇼와 천황의 불신임을 받아 결국 내각 총사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총사퇴하게 되었다.

4. 1. 쇼와 금융 공황 대처

제1차 와카츠키 내각이 쇼와 금융 공황에 대한 대응 실패로 총사퇴한 후, 입헌정우회의 다나카 기이치 총재가 사이온지 긴모치의 추천(헌정의 정도)으로 1927년 4월 28일 총리로 취임하여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성립되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전 총리가 금융 공황 해결을 조건으로 대장대신에 취임하여, 일본은행의 긴급 융자를 통해 금융 공황에 대처했다. 이때 수요를 맞추기 위해 한쪽 면만 인쇄된 신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4. 2. 경제 정책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산업 입국' 노선을 채택하여 국내 산업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는 혁신 구락부 (이누카이 쓰요시 총재)가 정우회와 합동할 때의 조건이기도 하였다. 이누카이는 군축을 통해 남은 경비를 국내 투자에 충당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나카는 적극적인 재정과 중국 대륙에서의 세력 확대에 따른 시장 확대 및 대륙으로의 이민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하였다.

국내 투자에서는 철도 분야 등에 대한 투자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이는 후에 오가와 철상(소관 대신)을 피고로 하는 5 사철 의혹을 낳았다.

4. 3. 반공 정책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치안유지법을 개정하여 최고형을 사형으로 강화했다. 또한, 3·15 사건을 일으켜 일본 공산당을 탄압하는 등 반공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4. 4. 선거 관리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총선거에 앞서 부현 지사의 대규모 인사 이동을 실시하여 정우회에 비판적인 지사를 휴직·면직시켰다. 이는 입헌민정당정권을 잡았을 때도 보복으로 행해져, '당폐'라고 불리며 지방 정치의 침체를 초래하여, 후에 혁신 관료의 대두와 그들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모으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스즈키 내상은 제1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대규모 선거 간섭을 실시했다. 이것은 국민·야당뿐만 아니라, 귀족원이나 정우회 내의 고참 간부(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추진 세력)의 반감을 사, 스즈키는 실각한다.

4. 5. 대륙 정책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중국 대륙에서 신해혁명(1912년)으로 청조가 붕괴된 이후, 각지의 군벌이 할거하는 동란의 와중에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감행하자, 산둥성의 거류민 보호 및 장쭤린에 대한 원조를 목적으로 산둥 출병을 실시하였다. 또한, 동방 회의를 개최하여 중국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정책을 추진했다. 1928년, 장쭤린의 세력이 약화되자 일본 측은 장쭤린에게 본거지인 봉천으로 퇴각할 것을 설득했고, 장쭤린은 6월 3일 베이징을 떠났다.

4. 6. 장쭤린 폭사 사건 (만주 모종 중대 사건)

1928년 6월 4일 새벽, 장쭤린이 베이징에서 봉천으로 철수하던 중 탑승한 열차가 폭파되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발생 직후부터 관동군이 장쭤린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한 것으로 의심받았다.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미네 유키마쓰 헌병 사령관을 현지에 파견하여 조사를 지시했다. 10월까지의 조사 결과, 가와모토 다이사쿠 관동군 고급 참모(육군 대좌)가 주모한 관동군의 소행으로 결론 내려졌다.

이후 진상 공개 및 관련자 처벌 여부를 두고 의견이 대립했다. 다나카 총리는 진상 공개 및 관련자 처벌을 주장했으나,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신, 오가와 헤이키치 철도대신 등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다나카사이온지 긴모치 원로의 동의를 얻고 쇼와 천황에게도 "엄중한 처벌"을 약속했다. 그러나 정부 내에서는 진상 비공개파가 우세했고, 1929년 6월, 관동군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철로 수비 미비에 대한 행정 처분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 최종 방침은 쇼와 천황의 분노를 샀고, 다나카 총리는 쇼와 천황의 불신임을 받아 결국 내각 총사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총사퇴하게 되었다.

5. 평가

5. 1. 한국 독립운동 탄압

5. 2. 만주 침략의 발판 마련

참조

[1] 웹사이트 Tanaka Giichi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27-04-20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28-05-04
[4]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28-05-23
[5] 문서 逓信相から内相へ横滑り人事。
[6] 문서 金融恐慌の鎮静化のため、蔵相辞任。
[7]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27-06-02
[8] 문서 文相から蔵相へ横滑り人事。
[9] 문서 農商務省出身。弁護士。
[10] 문서 水野文相優諚問題により引責辞任。
[11]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28-05-25
[1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 https://dl.ndl.go.jp[...] 1929-06-10
[13] 간행물 『官報』第93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27-04-23
[14] 간행물 『官報』第396号「帝國議会」 https://dl.ndl.go.jp[...] 1928-04-26
[15] 간행물 『官報』第425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28-05-30
[16] 문서 逓信政務次官から内務政務次官へ横滑り。
[17] 간행물 『官報』第358号 1928-03-10
[18] 서적 『衆議院議員略歴 第1回乃至第19回』 https://dl.ndl.go.jp[...] 2018-05-17
[19] 간행물 『官報』第473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28-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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