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황제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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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섯 황제의 해는 192년부터 193년까지 로마 제국에서 다섯 명의 황제가 난립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콤모두스 황제의 암살 이후, 페르티낙스가 잠시 황위에 올랐으나 암살당하고, 근위대의 경매를 통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이후 각 지역의 유력한 장군들이 황위를 주장하며 내전이 벌어졌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세베루스 왕조를 개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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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황제의 해 | |
---|---|
개요 | |
명칭 | 다섯 황제의 해 |
로마자 표기 | Annus quinque imperatorum |
주요 내용 | 콤모두스 황제 암살 페르티낙스 황제 즉위 및 암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제 즉위 및 암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간의 권력 투쟁 |
배경 | |
선행 사건 | 콤모두스 황제의 폭정 및 암살 |
원인 | 황제 계승의 불안정 군대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 원로원의 권위 약화 |
전개 | |
192년 | 12월 31일: 콤모두스 황제 암살 |
193년 | 1월 1일: 페르티낙스 황제 즉위 3월 28일: 페르티낙스 황제 암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황제 즉위 (군대의 매관매직)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황제를 자칭하며 내전 발발 |
주요 인물 | |
황제 | 콤모두스 (Commodus) 페르티낙스 (Pertinax)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Didius Julianus)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Septimius Severus)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Pescennius Niger)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Clodius Albinus) |
결과 |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승리 |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격파 (194년)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격파 (197년) |
영향 | |
로마 제국의 정치적 불안정 심화 | 군대의 영향력 강화 황제 권위 약화 |
세베루스 왕조의 등장 | 군사력 중심의 제정 강화 |
참고 문헌 | |
같이 보기 | |
관련 사건 | 네 명의 황제의 해 (AD 69년) 여섯 황제의 해 (AD 238년) |
2. 배경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콤모두스 황제는 지나친 사치와 국정 방임으로 제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콜로세움에서 직접 검투사로 나서 시합을 벌이는 등 기행을 일삼았으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인물은 가차 없이 제거했다.[6][7]
182년, 콤모두스의 친누이 루킬라와 근위대장 페렌니스가 처형되는 등 황제의 잔혹함과 방탕함으로 인해 제국은 오랜 기간 혼란을 겪었다. 결국 192년, 콤모두스는 애첩 마르키아, 근위대장 라에투스, 시종 엘렉투스의 음모로 인해 살해당했다.[6][7]
2. 1. 콤모두스의 몰락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콤모두스(Marc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la, 163년 8월 31일-192년 12월 31일) 황제는 지나친 사치를 일삼고, 콜로세움에서 직접 검투사가 되어 세쿠토르 복장과 무기를 갖추고 735번이나 시합을 벌이며 국가 정사를 내팽개쳤다. 또한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인물은 신분에 관계없이 제거했다.[6][7]182년에는 콤모두스 황제의 친누이 루킬라와 이후 근위대장 페렌니스가 처형되는 등 오랜 기간 제국은 황제의 잔인함과 방탕함으로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애첩 마르키아와 근위대장 라에투스, 시종 엘렉투스가 음모를 벌여 192년에 콤모두스를 살해했다.[6][7]
콤모두스의 정신은 그의 측근 클레안데르가 죽은 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귀족들의 일련의 즉결처형으로 이어졌다. 그는 황제 지위를 계승할 때 아버지가 주었던 이름 대신 출생 이름을 사용하면서 통치자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기 시작했다. 점점 더 편집증에 시달리면서 그의 행동은 더욱 타락했다. 그는 기원후 192년 새해 전야에 로마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여, 자신이 유일한 집정관이 되려 했다. 엑렉투스, 마르키아, 라에투스 세 명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표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콤모두스가 그렇게 하기 전에 그를 교살했다. 암살자들은 그 후 페르티낙스를 새로운 카이사르로 선포했다.[1]
콤모두스 살해를 계획한 인물의 정체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콤모두스가 죽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페르티낙스를 암살의 배후로 지목한다. 그러나 페르티낙스에 대한 혐의는 그의 적들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보이며, 그의 명성을 훼손하려는 시도였던 것 같다. 사실, 이러한 비난자들은 암살의 배후가 누구인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1]
2. 2. 페르티낙스 즉위와 암살
콤모두스 황제 암살 후, 원로원의 추대로 페르티낙스(Publius Helvius Pertinaxla, 126년 8월 1일 ~ 193년 3월 28일)가 황제가 되었다. 그는 해방 노예의 아들이었지만,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절 모든 속주의 총독을 지냈다. 처음에는 황제 자리를 거부했지만, 원로원의 간곡한 요청과 동료 의원들의 압력으로 결국 황제 자리에 올랐다.[8]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 황제 시절의 폭정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콤모두스에게 재산과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비어 있던 국고를 채우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여 로마 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근위대는 엄격한 규율이 다시 자리 잡고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여 불만을 품었다.[8]
결국 근위대는 페르티낙스의 반대파와 모의하여 콤모두스가 죽은 지 86일째 되던 날 반란을 일으켰다. 페르티낙스는 도망치는 대신 암살자들 앞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설명했지만, 결국 근위대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목은 근위대에 의해 병영으로 옮겨졌다.[8] 그는 재위 3개월 만에 프라이토리아니의 손에 살해당했다.[8]
페르티낙스는 군 경력을 통해 지위를 얻었으며, 아프리카 총독이 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한 여러 황제 중 첫 번째였다.[2] 그는 콤모두스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비난과 제국의 재정 악화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콤모두스의 측근인 클레안데르 살해 혐의를 받았을 수도 있다.[2]
페르티낙스는 프라이토리아니에게 돈티바툼 지급을 거부하고 콤모두스 시대의 특권을 박탈하면서 그들의 환심을 잃었다. 프라이토리아니와의 평화 협상에 실패한 그는 결국 살해당했다.[2] 그의 사후,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의 상징인 자주색 옷을 최고가를 부르는 사람에게 경매에 부쳤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는 평범한 병사에서 백부장을 거쳐 군단장에까지 오른 자수성가한 군인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콤모두스 황제를 거쳐 요직을 역임한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 암살 당시 로마 방위를 책임지는 수도 총독이었다. 그는 암살 실행자였던 근위대장 퀸투스 아에리우스 라에투스를 지원했고, 암살 다음 날인 193년 1월 1일, 황제 즉위에 관한 비밀 협약을 맺었다.
즉위한 페르티낙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본받아 긴축 재정과 문화 통제를 실시했지만, 해방 노예의 아들이었기에 정치적 기반이 부족하여 원로원 및 민중과 불화를 겪었다. 3월 초에는 오스티아 항구 방문 중 원로원 반대파의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군축의 일환으로 근위대에 대한 즉위식 특별 보상금(도나티브뭄)을 지급하지 않고 봉급을 절반으로 줄이는 등의 조치는 라에투스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것은 원로원과 대립하는 페르티낙스를 더욱 고립시켰고, 결국 즉위 83일째 궁궐에 난입한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다.
3. 다섯 황제의 난립
193년, 페르티낙스가 암살된 후 로마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근위대에게 뇌물을 주고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원로원과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9] 이러한 상황에서 각지의 유력한 총독들이 황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레프티스 마그나 출신으로,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 능력을 인정받아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콤모두스 황제 암살과 페르티낙스의 실각 당시 판노니아 속주 총독이었던 그는, 민중과 원로원의 대립을 기회로 삼아 군단의 지지를 얻어 황제를 자처했다.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손을 잡고 라벤나로 진군하여 율리아누스의 근위대를 격파했으며, 율리아누스의 공동 황제 제안을 거절하고 로마로 진군했다. 로마 입성 당시 율리아누스는 이미 배신한 근위대에게 암살당한 뒤였다. 원로원의 지지로 황제가 된 세베루스는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토벌하기 위해 동방 속주로 떠났다. 키지쿠스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니케아 전투와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니게르를 제거했다.[10]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부황제로 임명하며 세베루스의 통치가 시작되었지만, 점차 두 사람은 대립했다. 알비누스의 반란으로 내란이 재개되었으나, 루그두눔 전투에서 세베루스가 알비누스를 격파하며 내란을 종식시켰다.[11][12] 이로써 세베루스 왕조가 성립되었다.
결과적으로, 193년 한 해 동안 다섯 명의 황제가 난립했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최종 승리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 페르티낙스 (재위: 193년)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재위: 193년)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재위: 193년 ~ 211년)
-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193년에 황제를 칭함)
- 클라우디우스 알비누스 (193년에 황제를 칭함)
3. 1.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라틴어:Marcus Didius Iulianus,133년 1월 30일-193년 6월 1일)는 로마의 부유한 갑부 중 한 명이었다. 페르티낙스 황제 사후, 근위대는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쳤고, 율리아누스는 전임 황제의 장인인 술피키아누스와의 경쟁에서 이겨 근위병 1명당 6350드라크마를 주기로 약속하고 황제로 추대되었다.[9] 그러나 로마 제국 전 지역의 군대는 페르티낙스의 죽음에 애도하고 근위대의 행동에 분노하였다.
각 지역 군대는 율리아누스와 근위대를 토벌하겠다며 총독을 황제로 추대했다. 시리아 군단의 페르켄니우스 니게르,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지역 군단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판노니아 군단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거병하였다. 이탈리아반도와 가장 가까운 세베루스가 로마로 빠르게 진격하자, 율리아누스는 코끼리까지 동원해 전쟁에 대비했다. 세베루스에게 공동 황제 자리를 제안하며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대세는 이미 세베루스에게 기울었다. 결국 세베루스의 밀사에 설득당한 근위대에 의해 욕실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66일이었다.[9]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메디오라눔(Mediolanum)의 명문가 출신 귀족으로, 젊은 시절부터 출세 가도를 달렸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어머니 도미티아의 추천으로 20인관이 된 후, 재무관, 조달관, 법무관, 속주 총독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군단 사령관으로서 카우키족과 카티족 토벌에서 명성을 얻었다. 코모두스 황제 암살 당시에는 아프리카 총독이었으므로 암살과 직접 관련은 없었다. 페르티낙스 암살 후, 근위대의 황위 경매에서 승리하여 근위대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근위대의 군사적 압력으로 원로원의 황위 승인을 받았지만, 강압적인 방법은 원로원과 민중의 반감을 샀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등 유력한 장군들이 이반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세베루스가 본토에 먼저 도착했고, 율리아누스는 근위대를 이끌고 항전했지만 패했다. 타락한 근위대는 숙련된 군단병들과 대적할 수 없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원로원은 율리아누스의 황위를 무효로 하고 폭군으로 규정했다. 근위대도 율리아누스를 배신했고, 그는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통치 기간에 암살당했다.
3. 2. 지방 총독들의 반란
페르켄니우스 니게르는 시리아 총독으로, 페르티낙스 황제가 살해되고 근위대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리아 군단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선포했다.[10]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경쟁했으나, 이수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비잔티움 포위전에서 세력이 소탕되면서 몰락했다.[10]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브리타니아 지역의 속주 총독으로, 니게르와 마찬가지로 그 지역 군단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세베루스가 황제가 된 후 부황제로 임명되어 잠시 동맹을 맺었으나, 니게르와의 전쟁이 끝난 후 루그두눔 전투에서 패배하고 죽음을 맞이했다.[11][12]


두 사람의 배경과 반란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물 | 출신 및 배경 | 반란 과정 |
---|---|---|
페르켄니우스 니게르 | 시리아 총독, 이탈리아 본토 기사 계급 출신 | 율리아누스 즉위 후 반기를 들고 이집트 등 주변 지역 확보에 주력. 세베루스와의 이수스 전투에서 패배 후 전사. |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 브리타니아 총독, 하드루멘툼 상류층 출신 | 세베루스와 동맹을 맺고 부황제로 임명되었으나, 이후 대립. 루그두눔 전투에서 패배 후 자결. |
4. 내전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승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페르티낙스가 암살된 후 혼란을 틈타 황제가 되었다. 그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처형하고, 황위를 노리는 니게르와 알비누스와 대립했다.[1]
세베루스는 즉위 초기에 동방의 니게르와의 내전에 집중했다. 이 때문에 알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주며 동맹을 맺었으나, 실질적인 군사력은 주지 않았다.[4] 니게르를 패퇴시킨 후,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두 경쟁자를 모두 제거했다.[5] 이후 자신의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경쟁자들의 추종자들을 제거하고 세베루스 왕조를 건설했다.
4. 1. 세베루스의 진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판노니아 지역 총독 출신으로, 페르티낙스 황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그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처형하고 근위대를 무장 해제시킨 뒤 재산을 몰수하고 로마 100마일 밖으로 추방했으며, 저항하는 자는 처형했다.[13] 또한 페르티낙스의 시신을 수습하여 성대한 장례를 치르고 그를 신격화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당성을 연설하여 로마 시민과 군대의 지지를 얻었다.[13]
세베루스는 페르티낙스가 암살된 후 사실상 황제가 되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세베루스와 페르티낙스를 동맹 관계로 묘사하기도 한다.[1] 그는 코모두스가 살해된 후 황위를 차지하려고 했으나, 암살자들이 서둘러 페르티낙스를 황제로 임명하면서 계획이 무산되었다. 페르티낙스 암살 12일 후인 3월 28일, 세베루스는 상원의 지지로 스스로 통치자가 되었다.[1] 그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처형하고 황위를 노리는 다른 강력한 귀족들인 알비누스와 니게르와 적이 되었다.
세베루스는 레프티스 마그나 출신의 기사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 능력을 인정받아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콤모두스 황제 암살과 페르티낙스의 실각 당시에는 본토에 가까운 판노니아 속주 총독이었다. 율리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획득하자, 민중과 원로원과의 대립을 기회로 여기고 판노니아 주둔 군단의 지지를 얻어 황제 자리를 요구했다. 그는 브리타니아 총독 알비누스와 손을 잡고 라벤나로 진군하여 율리아누스의 근위대를 격파했다.
율리아누스로부터 공동 황제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로마로 진군했다. 로마에 입성했을 때 이미 배신한 근위대에 의해 율리아누스는 암살당한 뒤였다. 세베루스는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 황제가 된 후,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를 치기 위해 동방 속주로 친정을 떠났다. 세베루스는 키지쿠스 전투에서 페스켄니우스 군에게 한 번 패배했지만, 니케아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수스 전투에서 페스켄니우스 자신을 전사시켜 승리했다.
세베루스는 알비누스를 부황제로 임명했지만, 점차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되었다. 알비누스의 반란으로 내란이 재개되었지만, 루그두눔 전투에서 세베루스는 알비누스를 격파하고 내란을 완전히 종식시켰다. 이로써 모든 황제 자리 요구자가 쓰러지고, 제국의 새로운 지배자인 세베루스 왕조가 성립했다.
4. 2. 경쟁자들의 제거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시리아 총독으로, 페르티낙스 황제가 살해되고 근위대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는 소식을 듣자 시리아 군단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선포했다.[10]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율리아누스를 처단한 뒤 세베루스와 경쟁했으나, 이수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비잔티움 포위전에서 그의 세력은 소탕되었으며, 그와 그의 가족들은 모두 몰살당했다.[10]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브리타니아 지역의 속주 총독으로, 니게르와 마찬가지로 그 지역 브리타니아 군단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세베루스가 황제가 된 이후 부황제로 임명되어 세베루스와 잠시 동맹을 맺었다. 니게르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 세베루스와 루그두눔 전투[11]에서 양측 로마군 15만 명이 격돌했지만 결국 패배하여 힘을 잃고 죽음을 맞이했다.[1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판노니아 지역 총독 출신으로, 경쟁자들과 마찬가지로 페르티낙스 황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이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처형하고 근위대를 무장 해제시킨 뒤 재산을 몰수하고 로마 100마일 밖으로 추방했으며, 저항하는 자는 처형했다. 페르티낙스 황제의 시신을 수습하여 성대한 장례를 치르고 신격화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연설하여 로마 시민과 군대의 지지를 얻었고, 경쟁자인 니게르와 알비누스를 물리친 후 세베루스 왕조를 열었다.[13]
4. 3. 세베루스 왕조의 개창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판노니아 지역 총독 출신으로, 페르티낙스 황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그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처형하고 근위대를 무장 해제시킨 뒤 재산을 몰수하고 로마 100마일 밖으로 추방하였으며, 저항하는 자는 처형했다.[13] 또한 페르티낙스의 시신을 수습하여 성대한 장례를 치르고 신격화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로마 시민과 군대의 지지를 얻었다.[13] 이후 경쟁자인 니게르와 알비누스를 물리치고 세베루스 왕조를 개창한다.[13]세베루스는 페르티낙스가 암살된 후 황제가 되었는데, 일부 자료에서는 그와 페르티낙스를 동맹 관계로 묘사하기도 한다.[1] 그는 코모두스가 살해된 후 황위를 차지하려 했으나, 암살자들이 페르티낙스를 황제로 임명하면서 계획이 무산되었다. 페르티낙스 암살 12일 후인 3월 28일, 세베루스는 상원의 지지로 스스로 통치자가 되었다.[1] 그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처형하고, 황위를 노리는 다른 강력한 귀족들인 니게르, 알비누스와 대립하게 되었다.
즉위 초기 몇 년 동안 세베루스는 동방에서 니게르와의 내전에 몰두했기 때문에, 알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하며 동맹을 맺었지만 실질적인 군사력은 주지 않았다.[4] 니게르를 패퇴시킨 후, 세베루스는 알비누스를 제거하기 위해 내전을 벌여 승리했다.[5] 두 경쟁자를 모두 물리친 세베루스는 자신의 지위를 굳히기 위해 그들의 추종자들을 제거하고 세베루스 왕조를 건설했다.
세베루스는 레프티스 마그나 출신의 기사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 능력을 인정받아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코모두스 황제 암살과 페르티낙스의 실각 당시에는 판노니아 속주 총독이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획득하자, 세베루스는 판노니아 주둔 군단의 지지를 얻어 황제 자리를 요구했다. 브리타니아 총독 알비누스와 손을 잡고 라벤나로 진군하여 율리아누스의 근위대를 격파했다.
율리아누스로부터 공동 황제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로마로 진군했는데, 로마에 입성했을 때 이미 배신한 근위대에 의해 율리아누스는 암살당한 뒤였다.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 황제가 된 세베루스는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를 치기 위해 동방 속주로 친정을 떠났다. 키지쿠스 전투에서 한 번 패배했지만, 니케아 전투와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페스켄니우스를 전사시켰다.
알비누스를 부황제로 임명하면서 세베루스의 통치가 시작되었지만, 점차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되었다. 알비누스의 반란으로 내란이 재개되었지만, 루그두눔 전투에서 세베루스는 알비누스를 격파하고 내란을 완전히 종식시켰다. 이로써 모든 황제 자리 요구자가 쓰러지고, 제국 새로운 지배자인 세베루스 왕조가 성립했다.
5.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The African Emperor? The Life, Career, and Rise to Power of Septimius Severus, MA thesis
https://thecorner.wo[...]
University of Wales Lampeter
[2]
서적
Septimius Severus: The African Emperor
Routledge
[3]
서적
Septimius Severus: The African Emperor
https://archive.org/[...]
Routledge
[4]
학술지
Legal Status of Clodius Albinus, 193–196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28-04-00
[5]
서적
The Age of Constantine the Grea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6]
서적
로마제국 쇠망사
[7]
웹인용
Year of the Five Emperors « IMPERIUM ROMANUM
https://imperiumroma[...]
2022-06-19
[8]
서적
로마제국 쇠망사
[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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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로마제국 쇠망사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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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Year of the Five Emperors
https://www.socialst[...]
2022-06-19
[12]
서적
로마제국 쇠망사
[13]
서적
로마제국 쇠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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