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티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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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티낙스는 193년에 로마 황제로 잠시 재위했던 인물이다. 그는 해방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군 경력을 쌓았으며, 코모두스 황제 암살 후 황제로 추대되었다. 황제가 된 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를 본받아 개혁을 시도했으나, 군사 규율 강화와 재정 개혁으로 인해 프라이토리아니의 반발을 샀다. 결국 그는 암살당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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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티낙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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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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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Pubeullius Heolwiuseu Peoltinakseu |
칭호 | 로마 황제 |
재위 기간 | 193년 1월 1일 – 193년 3월 28일 |
이전 통치자 | 콤모두스 |
다음 통치자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
출생일 | 126년 8월 1일 |
출생지 | 이탈리아, 알바 폼페이아 |
사망일 | 193년 3월 28일 (66세) |
사망지 | 로마, 이탈리아 |
매장지 | 로마 |
배우자 | 플라비아 티티아나 |
자녀 |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카이사르 헬비아 |
전체 이름 |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
즉위명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
정치 | |
왕조 | 없음 (오 황제의 해) |
가족 | |
아버지 | 헬비우스 수케수스 |
2. 생애
페르티낙스는 파르티아 전쟁에서[10] 두각을 나타내어 승진을 거듭했다. 브리타니아 (제6 ''승리군단''의 군사 호민관)과 다뉴브강을 따라 배치된 후 프로쿠라토르로 다키아에서 복무했다.[1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위 기간 동안 궁정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좌천되기도 했지만, 곧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를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돕기 위해 소환되었다.[5] 175년에는 보궐 집정관이 되었고,[51] 185년까지 상부 및 하부 모에시아, 다키아, 시리아, 그리고 브리타니아 총독을 역임했다.
180년대에 페르티낙스는 로마 원로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친위대장 섹스투스 티기디우스 페레니스에 의해 공직에서 쫓겨났다.[12] 3년 후 브리타니아로 소환되어 반란 상태에 있던 로마 군대를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군단의 공격을 받아 죽을 뻔했다. 187년에 사임한 이유는 군단이 그의 가혹한 통치에 적대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14]
이후 188년부터 189년까지 아프리카 총독을 역임하고,[15] 로마의 도시 행정을 맡았으며,[16] 콤모두스 황제와 함께 정식 집정관으로 두 번째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프라이토리아니 퀸투스 아에밀리우스 레투스, 콤모두스의 정부 마르키아, 시종 에클렉투스 등이 실행한 음모에 의해 암살되었다. 당시 로마 시의 장관이었던 페르티낙스는 프라이토리아니로 불려가 황제로 선포되었다.[17] 그러나 그의 통치는 87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불안정했다.[18]
페르티낙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절제된 행위를 모방하고, ''알리멘타''를 개혁하려 했지만, 많은 곳에서 적대감을 샀다. 프라이토리아니는 즉위 시 후한 ''도나티붐''을 기대했으나, 실망하자 돈을 요구하며 동요했다.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의 재산을 매각하여 자금을 마련하고,[19][20] 데나리우스의 은 순도를 74%에서 87%로 높이는 통화 개혁을 단행했다.[21]
또한, 페르티낙스는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엄격한 군사 규율을 부과하려 했다.[22] 193년 3월 초, 오스티아 안티카에서 곡물 수송 준비를 점검하던 중 퀸투스 폼페이우스 소시우스 팔코를 황제로 세우려는 음모를 막았으나,[23] 이 음모로 여러 장교가 처형되었다.[24]
193년 3월 28일, 약 300명(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200명)의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이 황궁을 공격했다.[25][26] 그들은 약속된 급여의 절반만 받았다고 주장했으며,[23] 경비병과 궁전 관리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페르티낙스는 레투스를 보내 그들을 만나게 했지만, 레투스는 반군 편에 섰다.[27] 페르티낙스는 반군과 대화하려 했으나, 결국 병사 중 한 명에게 살해당했다.[28]
2. 1. 어린 시절과 초기 경력
페르티낙스는 이탈리아의 알바 폼페이아에서 해방 노예 헬비우스 수세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5] 카시우스 디오는 헬비우스가 귀족 출신은 아니었지만 페르티낙스가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6][7] 그는 수사학 교사로 직업을 시작했으나,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제국 군의 병사로 전직했다.[46][47]루키우스 헤디우스 루푸스 롤리아누스 아비투스 (또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의 후원을 받아 코호르트의 장교로 임명되었다.[8][9] 군인으로서 재능을 발휘한 페르티낙스는 백인대장이 되었고, 파르티아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군단 사령관까지 승진했다.[48][49]
브리타니아 (제6 ''승리군단''의 군사 호민관)와 다뉴브강을 따라 배치된 후 프로쿠라토르로 다키아에서 복무했다.[11] 몇몇 군단의 지휘관을 역임한 후, 다키아 총독으로서 정계에 진출했다.[5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위 기간 동안 궁정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좌천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를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돕기 위해 소환되었다.[5] 175년에 보궐 집정관의 영예를 얻었고, 185년까지 페르티낙스는 상부 및 하부 모에시아, 다키아, 시리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브리타니아 총독을 역임했다.
180년대에 페르티낙스는 로마 원로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친위대장 섹스투스 티기디우스 페레니스에 의해 공직에서 쫓겨났다.[12] 3년 후 브리타니아로 소환되었는데, 그곳에서 로마 군대가 반란 상태에 있었다.[13] 그는 그곳의 난폭한 병사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한 군단이 그의 경호원을 공격하여 페르티낙스를 죽을 뻔하게 만들었다. 187년에 사임했을 때, 그 이유는 군단이 그의 가혹한 통치 때문에 그에게 적대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14]
188년부터 189년까지 아프리카의 총독으로 복무했으며,[15] 이어서 로마의 도시 행정을 맡았고,[16] 황제 코모두스와 함께 정식 집정관으로 두 번째 집정관직을 수행했다.
2. 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재위 기간 동안, 페르티낙스는 법정 공방에 휘말려 좌천되었다.[5] 그러나 마르코만니 전쟁이 발발하자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를 돕기 위해 소환되었고, 전쟁에서 공을 세워 복귀하였다.[5] 175년에는 보궐 집정관에 임명되었으며,[51] 185년까지 모에시아, 다키아, 시리아의 총독을 역임했다.2. 3. 콤모두스 치세
콤모두스 황제 즉위 후, 페르티낙스는 근위대장 섹스투스 페렌니스와의 갈등으로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52] 그러나 페렌니스가 숙청된 후 브리타니아 총독으로 복귀했다.[53] 콤모두스 치세 말년에는 192년 두 번째 집정관에 서임되고[54] 수도 장관으로 영전했다.[57]192년,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당하자, 원로원은 새벽이 오기 전에 회의를 열고 페르티낙스를 황제로 선포했다.[58]
2. 4. 황제 즉위와 암살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된 후, 페르티낙스는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장관으로 복무하던 중 근위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17] 그의 짧은 87일 통치는 불안정했다.[18]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절제된 행위를 모방하고, ''알리멘타''를 개혁하려 했지만, 많은 곳에서 적대감을 샀다.[59]고대 작가들은 근위대가 그의 즉위 시점에 후한 ''도나티붐''(특별 급여)을 기대했으며, 실망하자 돈을 내놓을 때까지 동요했다고 자세히 설명한다.[60][61][62] 그는 콤모두스의 재산(첩 마르키아의 저택 포함[63][64])을 매각하여 자금을 마련했다.[62] 그는 로마 통화를 개혁하여, 데나리우스의 은 순도를 74%에서 87%로 높였다.[21]
페르티낙스는 제멋대로인 근위대에게 더 엄격한 군사 규율을 부과하려 했다.[22] 193년 3월 초, 오스티아 안티카에서 곡물 수송 준비를 점검하던 중 퀸투스 폼페이우스 소시우스 팔코를 황제로 세우려는 음모를 가까스로 막았다.[23]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팔코는 사면되었지만, 쿠데타를 주도한 여러 장교는 처형되었다.[24] 이 사건으로 원로원과 페르티낙스 황제의 불화는 결정적이 되었다.
193년 3월 28일, 근위대 병사 약 300명(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200명)[26]이 황궁 정문을 돌격했다.[25] 고대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약속된 급여의 절반만 받았다고 한다.[23] 페르티낙스를 싫어했던 궁궐의 경비병과 관리들은 쉽게 반란군을 궁궐로 맞이했고, 페르티낙스는 근위대장 레투스를 보냈지만, 레투스는 반군 편에 서서 황제를 버렸다.[27]
페르티낙스는 도망가라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반군과 대화하려 했고, 거의 성공했지만, 병사 중 한 명에게 쓰러졌다.[28] 페르티낙스는 자신이 직면한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아내나 아들에게 황제 칭호를 사용하기를 거부하여, 자신의 암살 이후 그들을 보호했다.[69]
3. 황제로서의 정책과 개혁 시도
코모두스 황제의 행동이 190년대 초반부터 불안정해지자, 192년 12월 31일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퀸투스 아에밀리우스 레투스, 코모두스의 정부 마르키아, 시종 에클렉투스 등이 암살 음모를 꾸몄다.[17] 암살 후, 로마 시의 장관이었던 페르티낙스는 프라이토리아니로 불려가 황제로 선포되었다.[17]
페르티낙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절제된 행위를 모방하고, ''알리멘타''를 개혁하려 했지만, 여러 곳에서 반발을 샀다.[59] 프라이토리아니는 즉위 시점에 후한 ''도나티붐''을 기대했지만, 실망하자 돈을 요구하며 동요했다. 이에 페르티낙스는 코모두스의 재산(성적 쾌락을 위해 둔 첩과 청년 포함)을 매각하여 자금을 마련하려 했다.[19][20] 또한 데나리우스의 은 순도를 74%에서 87%로 높여(실제 은 무게 2.22g→2.75g) 통화 개혁을 단행했다.[21]
페르티낙스는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엄격한 군사 규율을 부과하려 했다.[22] 193년 3월 초, 오스티아 안티카에서 곡물 수송 준비를 점검하던 중 퀸투스 폼페이우스 소시우스 팔코를 황제로 세우려는 음모를 가까스로 막았다.[23] 팔코는 사면되었지만, 쿠데타 주도 장교들은 처형되었다.[24]
3. 1. 재정 개혁
페르티낙스는 선제 콤모두스 황제의 사치스러운 재정 운영을 개혁하고자 했다. 기번은 페르티낙스의 통치를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의 금욕적인 문화 정책과 긴축 재정을 목표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59] 그러나 급격한 개혁은 원로원의 반발을 샀다.[59]페르티낙스는 군사비 지출을 억제하고, 황제 즉위 시 관례였던 도나티붐(근위대에 대한 특별 급여)을 실시하지 않는 등 근위대를 소외시켰다.[60][61][62] 또한 콤모두스의 유산 일부(첩 마르키아의 저택 포함[63][64])를 몰수하여 도나티붐용 자금을 마련하려 했다.[62]
3. 2. 군사 개혁
기번은 페르티낙스의 통치에 대해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의 금욕적인 문화 정책과 긴축 재정을 목표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고찰했다.[59] 그러나 급격한 개혁은 원로원으로부터 많은 반발을 초래했다.[59] 황제 즉위 시 관례였던 도나티붐(근위대에 대한 특별 급여)을 실시하지 않는 등 지지 기반인 근위병들을 소외시키고,[60][61][62] 라에투스와의 관계마저 냉각되었다.초조해진 페르티낙스는 선제인 콤모두스 황제의 유산 일부(첩 마르키아의 저택 포함[63][64])를 몰수하여 도나티붐용 자금을 마련하려 했다.[62]
3. 3. 정치 개혁
페르티낙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절제된 통치 방식을 모방하려 했다.[59] 그러나 급격한 개혁은 원로원의 반발을 샀다.[59] 황제 즉위 시 관례였던 도나티붐(근위대에 대한 특별 급여)을 실시하지 않아 근위병들을 소외시켰고,[60][61][62] 라에투스와의 관계도 냉각되었다.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 황제의 유산 일부를 몰수하여 도나티붐용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62] 반(反) 페르티낙스파는 이미 제국의 지배층에서 확고한 세력이었다. 3월에는 오스티아 항 방문 중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는데,[60] 주모자는 집정관 퀸투스 소시우스 팔코를 즉위시키려던 반 페르티낙스파 원로원 의원들이었다. 페르티낙스는 소시우스를 사면하면서 반 페르티낙스파 의원을 처형했고,[65] 이 사건으로 원로원과 페르티낙스의 불화는 결정적이 되었다.
4. 암살 이후
친위대는 페르티낙스 사후 황제 칭호를 경매에 부쳤고, 부유한 원로원 의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낙찰받았으나, 그의 통치는 193년 6월 1일 암살로 몇 주 만에 끝났다.[29] 율리아누스를 이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즉위했다.[30]
페르티낙스는 황제 즉위의 위험을 인지하여 부인 플라비아 티티아나에게 황후 칭호를 부여하지 않았고,[69] 덕분에 플라비아는 이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 의한 숙청을 면했다.
근세 이탈리아의 역사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페르티낙스의 치세에 대해 "병사들에게 미움을 받고 군대를 통제하지 못했다"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70]
4. 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복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로마에 입성한 후 페르티낙스를 정당한 황제로 인정하고 그를 살해한 군인들을 처형했다.[31] 원로원을 압박하여 페르티낙스를 신격화하고 국장을 치르게 했으며,[31] 자신의 이름에 "페르티낙스"라는 그의 ''코그노멘''을 추가했다.[3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얼마 동안 페르티낙스의 즉위 기념일과 그의 생일에 경기를 열었다.[33]4. 2. 역사적 평가
페르티낙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의 동료이자 역사가이며 원로원 의원이었던 카시우스 디오는 그를 "훌륭하고 정직한 사람"[34]이라고 칭하며, "제국의 행정에서 인간성과 청렴함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경제적인 관리와 공공 복지에 대한 가장 신중한 배려"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19]하지만 디오는 페르티낙스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병사들과 대면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고결하다"는 평가와 "무모하다"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음을 인정했다.[26] 또한 코모두스의 과도한 통치를 개혁하려 했던 속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며, 좀 더 신중한 접근 방식이 그의 암살 가능성을 낮췄을 것이라고 시사했다.[35]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논하며, 페르티낙스를 좋은 행동으로도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예시로 들었다. 마키아벨리는 페르티낙스를 훌륭한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방탕한 생활에 익숙해진" 병사들을 개혁하려는 그의 시도가 실수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병사들의 미움을 불러일으켜 결국 그의 몰락과 죽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36] 마키아벨리는 페르티낙스의 치세에 대해 "병사들에게 미움을 받고 군대를 통제하지 못했다"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70]
데이비드 흄은 그의 에세이 "원계약에 관하여"에서 페르티낙스를 "훌륭한 군주"로 묘사하며, 병사들이 황제로 선포하러 왔을 때 코모두스가 자신의 죽음을 명령했다고 믿었던 일화를 언급하며 그의 겸손함을 드러냈다.[37]
미국 헌법 비준 논쟁 당시, 1788년 버지니아 비준 회의에서 버지니아 정치인 존 도슨은 친위대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된 페르티낙스를 상비군 창설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예시로 언급했다.[38][39]
기번은 페르티낙스의 짧은 통치(86일)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의 금욕적인 문화 정책과 긴축 재정을 목표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59] 그러나 급격한 개혁은 원로원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59] 또한 황제 즉위 시 관례였던 도나티붐(근위대에 대한 특별 급여)을 실시하지 않는 등 지지 기반인 근위병들을 소외시키고,[60][61][62] 라에투스와의 관계마저 냉각시켰다.
결국 페르티낙스는 선제인 콤모두스 황제의 유산 일부(첩 마르키아의 저택 포함[63][64])를 몰수하여 도나티붐용 자금을 마련하려 했지만,[62] 반(反) 페르티낙스파는 이미 제국의 지배층에서 확고한 세력이 되어 있었다. 3월에는 오스티아 항 방문 중에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고,[60] 주모자들은 집정관 퀸투스 소시우스 팔코를 즉위시키려던 반 페르티낙스파 원로원 의원들이었다. 페르티낙스는 소시우스를 사면하면서 반 페르티낙스파 의원을 처형했고,[65] 이 사건으로 원로원과 페르티낙스의 불화는 결정적이 되었다.
193년 3월 28일, 원로원의 암살 미수 사건이 있은 지 몇 주 지나지 않아, 근위대가 페르티낙스를 살해하기 위해 궁궐 성문에 집결했다.[66] 페르티낙스를 싫어했던 궁궐 경비병과 관리들은 반란군을 궁궐로 들였고, 궁지에 몰린 페르티낙스는 근위대장 라에투스를 보냈지만, 라에투스 또한 황제를 버리고 반 페르티낙스 파로 돌아섰다.[67] 측근들은 페르티낙스에게 탈출을 권했지만 그는 거부하고 병사들을 설득하는 연설을 했으나, 연설 도중 한 병사에게 칼을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68]
페르티낙스는 황제 즉위의 위험을 이해하고 부인 플라비아 티티아나에게 황후 칭호를 부여하지 않았으며,[69] 덕분에 플라비아는 다음 황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 의한 숙청을 면할 수 있었다.
5. 대중문화 속 페르티낙스
프랑스 언론인 앙드레 제로(André Géraud, 1882–1974)는 필명으로 페르티낙스를 사용했다.[40]
소피아 맥두걸의 가상 대체 역사 소설 ''로마니타스''에서 페르티낙스의 통치는 분기점이 된다. 소설 속 역사에서 페르티낙스 암살 음모는 실패하고, 그는 로마 제국을 21세기에도 주요 강대국으로 유지할 수 있는 개혁을 추진한다.[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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