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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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검투사는 고대 로마 시대에 열린 대중적인 오락으로, 검과 방패 등으로 무장한 투사들이 다른 투사, 맹수와 싸우는 경기를 의미한다. 검투사 경기는 로마의 역사와 함께 발전했으며, 초기에는 장례 의식의 일부였으나 점차 정치적 선전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검투사들은 전쟁 포로, 노예, 범죄자 등으로 충원되었으며, 혹독한 훈련을 거쳐 다양한 종류로 나뉘어 경기에 참여했다. 경기는 관중의 호응을 얻기 위해 잔혹성과 유혈을 조절하며 진행되었고, 승리자에게는 명예와 금전적 보상이 주어졌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향으로 쇠퇴하여 681년에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검투사 경기는 로마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이며, 현대에도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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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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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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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 gladiātor |
어원 | 글라디우스(gladius, 칼) |
활동 시기 | 기원전 3세기 ~ 5세기 |
활동 지역 | 로마 공화정, 로마 제국 |
역할 | |
주요 역할 | 검투 시합 참가자 |
다른 역할 | 죄수 처형, 맹수 사냥 |
훈련 및 조직 | |
훈련 장소 | 검투사 양성소(ludus) |
조직 | 검투사 조합(familia gladiatoria) |
장비 및 계급 | |
주요 장비 | 칼, 방패, 투구, 갑옷 |
계급 | 다양한 계급 존재 (예: 레티아리우스(retiarius), 미르밀로(mirmillo), 트라켸스(thraex)) |
사회적 지위 | |
지위 | 노예 또는 자유민 출신 |
사회적 인식 | 낮은 사회적 지위, 높은 인기 |
검투 경기 | |
주요 경기 장소 | 원형 경기장(amphitheatrum) |
경기 종류 | 검투사 대 검투사, 검투사 대 맹수 |
주최 | 국가 또는 부유한 개인 |
기타 | |
유명 검투사 | 스파르타쿠스(Spartacus) |
관련 유물 | 즈리텐 모자이크(Zliten mosaic) |
2. 역사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검투사들.
장 레옹 제롬의 그림, 1859년]]
검투사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에트루리아인의 장례 의식에서 유래했다는 설은 현재 지지받지 못하며,[251] 기원전 4세기 남부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의 장례 풍습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 유력하다.[252][253] 로마에서 기록된 가장 오래된 검투 시합은 기원전 264년,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데키무스 형제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거행한 것이다.[255] 초기에는 이처럼 고인의 명복을 비는 장례 의식의 일부인 '무누스(munus)'로 시작되었으나,[257] 점차 그 규모가 커지고 오락적 성격이 강해졌다.
공화정 시대 로마의 영토 확장과 함께 전쟁 포로들이 검투사로 공급되면서 다양한 유형의 검투사가 등장했고,[305] 경기는 점차 대중적인 오락거리이자 정치인들의 선전 도구로 변모했다.[257][259] 특히 공화정 말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대규모 검투 경기를 개최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263] 기원전 73년에는 카푸아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대규모 노예 봉기(스파르타쿠스 전쟁)가 이탈리아 반도를 뒤흔들기도 했다.[262]
로마 제국 시대에 들어서 검투 경기는 황제의 후원 아래 절정을 맞이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검투 경기를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며 관련 제도를 정비했고,[267][40] 이후 많은 황제들이 대규모 경기를 개최했다. 서기 80년 콜로세움 완공은 검투 경기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으며,[272] 티투스, 트라야누스 황제 등이 주최한 경기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272][44] 심지어 콤모두스 황제는 직접 검투사로 경기에 참여하기도 했다.[273] 제국 전역에 수많은 원형 경기장이 건설되었고,[274][275] 로마에는 황제 직속의 검투사 양성소까지 운영되었다.[277]
그러나 검투 경기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경기의 비인간성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고,[273] 380년 기독교가 국교화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또한 3세기 이후 경기 내용이 지나치게 잔혹하고 단순해지면서 오락적 가치를 잃어버린 것도 쇠퇴의 원인으로 지목된다.[280]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검투사 형벌을 제한한 것을 시작으로,[50]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려졌다. 404년 서로마 제국의 호노리우스 황제가 공식적으로 검투 경기를 금지했고,[278] 이후 점차 사라져 681년에 최종적으로 소멸했다.[279]
2. 1. 기원
기원전 4세기경]]검투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1] 기원전 1세기 후반의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는 검투사가 에트루리아 문명에서 유래했다고 보았으나,[2] 이 설은 현재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251] 한 세대 후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기원전 310년 캄파니아인들이 삼니움과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며 처음 검투 경기를 열었다고 기록했다.[3] 기원전 4세기경 캄파니아의 파에스툼 지역 무덤 벽화에는 헬멧, 창, 방패를 들고 싸우는 두 전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것이 초기 로마 검투 경기의 원형인 장례 의식의 일부였음을 시사한다.[8][252]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그림 증거를 바탕으로 검투 경기가 캄파니아에서 기원했거나 적어도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높게 본다.[6] 실제로 고대 캄파니아에는 가장 초기의 검투사 양성 학교(루디)가 있었다.[7] 기원전 1세기경에는 남부 이탈리아가 검투 경기가 가장 성행했던 지역이었다.[254]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에서 기록된 최초의 검투 경기는 기원전 264년 제1차 포에니 전쟁 초기에 열렸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데키무스 형제가 아버지 브루투스 페라의 장례식을 맞아 로마의 보아리움 광장에서 세 쌍의 검투사를 죽을 때까지 싸우게 했다.[10][255] 리비우스는 이를 '무누스'(munus, 복수형 munera)라고 칭했는데, 이는 죽은 조상의 영혼(마네스)에게 후손이 바치는 기념 의무, 즉 '선물'을 의미했다.[10][11] 기원전 3세기부터 2세기까지 여러 투기 대회가 열렸으며, 기원전 174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주최한 74명의 검투사가 참여한 대회가 특히 주목할 만했다.[256] 초기에는 고인을 애도하기 위한 추도 투기 대회(무누스)가 주를 이루었으며,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의 축제(사투르날리아) 즈음에 열리는 경향이 있었다.[257] 기원전 2세기에는 원형 경기장이 건설되면서 로마 시내의 경기는 주로 포로 로마노에서 열렸다.[258]
추도 목적의 투기 대회는 점차 그 규모가 커지고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고인을 추모하기보다는 대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오락 행사로 변모했다. 결국 정치인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민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게 되었다.[257][259] 대중은 검투 경기에 열광했고 정치인들에게 개최를 요구했으며, 이는 공직 선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260] 이로 인해 경기는 점점 더 화려해졌고, 이를 우려하여 개최 일수나 검투사 수를 제한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대중 역시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공직 선거와 투기 대회의 연계는 제정 초기까지 계속되었다.[261]
로마 공화정 시기 영토 확장 과정에서 확보된 다수의 전쟁 포로들은 각 민족의 전통 무장을 하고 검투사로 투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원전 2세기 초에는 갈리아 검투사와 삼니움 검투사(삼니테스)가, 기원전 1세기에는 트라키아 검투사 등 다양한 검투사 유형이 등장했다.[305][12] 리비우스는 로마인들이 적의 화려한 갑옷을 신들에게 바친 반면, 캄파니아인들은 삼니움인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들의 복장을 한 검투사들을 잔치 여흥거리로 삼았다고 기록하며, 이러한 행태가 검투 경기의 연극적 성격을 강화했다고 보았다.[13][14]

검투 경기가 크게 성행하던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약 70명의 검투사가 탈출하여 제3차 노예 전쟁(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곧 12만 명 규모로 커져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뒤흔들었다. 반란군은 로마군 포로들에게 검투 시합을 강요했는데, 고대 역사가 오로시우스는 이를 "이제껏 볼거리 취급을 당했던 이들이, 이제는 관객이 되었다"고 묘사했다.[262] 반란은 기원전 71년 크라수스에 의해 진압되었다.
검투 경기의 정치적 이용은 공화정 말기에 더욱 심화되었다. 술라는 프라에토르 시절 자신의 사치 금지 법을 어기면서까지 아내 메텔라의 장례식에 성대한 무누스를 열었다.[30] 기원전 6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쿠룰레 아이딜에 선출된 후, 20년 전에 사망한 아버지를 기린다는 명목으로 은으로 도금된 갑옷을 입은 320쌍의 검투사를 동원한 대규모 경기를 개최했다.[34] 당시 원로원은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기억과 카이사르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 개인이 보유할 수 있는 검투사 수를 320쌍으로 제한했지만,[35] 카이사르의 쇼는 규모와 비용 면에서 전례가 없었다.[36] 그는 기원전 46년에는 1,200명의 검투사를 동원한 더 큰 규모의 경기를 열었으며, 이때는 8년 전에 사망한 딸 율리아 카이사리스를 추모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여성의 장례를 위해서도 경기를 개최하는 전례를 만들었다.[265] 또한 카이사르는 로마 근교의 마르스 광장 (로마)에 인공 호수를 만들어 군함을 띄우고 모의 해전(나우마키아)을 벌여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는 후대 황제들에게도 이어졌다.[264] 역사학자 조르주 빌(George Ville)은 본래 검투 경기와 별개였던, 맹수와 싸우는 베스티아리이(Bestiarii)의 "야생 맹수 사냥"(베나티오, Venationes)이 검투 경기의 일부로 편입되기 시작한 것을 세속화의 중요한 계기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기원후 6년 드루수스 추모 경기에서 처음 나타났다고 주장했다.[266]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는 경기에 대한 황제의 권위를 확립하고 이를 시민적, 종교적 의무로 공식화했다.[40] 그는 사치 금지법을 개정하여 사적 및 공적 지출을 제한하고, 검투사 무네라 개최를 사투르날리아와 킨쿠아트리아 축제로 한정하려 했다.[41] 황제의 프라에토르가 주관하는 공식 무누스는 최대 120명, 비용은 25,000데나리 이하로 제한되었으나, 황제가 직접 주최하는 루디(ludi)는 훨씬 큰 규모로 열릴 수 있었다.[42] 아우구스투스는 재위 기간 8번의 투기 대회를 열어 1만 명의 검투사를 싸우게 했고, 다른 경기와 합쳐 3,500마리의 맹수를 죽였다.[267] 제국 전역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경기는 이제 국가가 후원하는 황제 숭배와 결부되어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이 되었다.[43][26] 반면, 티베리우스 황제(재위 14년 ~ 37년)는 경기를 전혀 개최하지 않아 인기가 없었다.[268] 칼리굴라(재위 37년 ~ 41년)와 클라우디우스(재위 41년 ~ 54년)는 성대한 경기를 열었으나, 네로(재위 54년 ~ 68년)는 전차 경주나 연극을 더 선호했다.[269] 귀족들 역시 인기를 얻기 위해 사적으로 라니스타(검투사 양성소 소유주)나 도크토레(검투사 조련사)를 고용해 검투사단을 운영했다.[277]

민중의 검투 경기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다. 북부 이탈리아의 폴렌티아에서는 한 관리가 사망했을 때 추도 경기가 열리지 않자 분노한 주민들이 장례식을 방해하려다 군대가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270] 59년에는 폼페이의 원형 경기장에서 폼페이 주민들과 인근 누케리아 주민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져 10년간 경기 개최가 금지되기도 했다.[271]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매몰된 폼페이 유적에서는 원형 경기장과 검투사 양성소, 관련 유물과 낙서들이 발견되어 당시 검투사의 실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80년, 로마에는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콜로세움)이 완공되었다. 티투스 황제(재위 79년 ~ 81년)는 준공 기념으로 100일간 맹수 사냥, 검투 시합, 모의 해전을 포함한 대규모 행사를 열었으며, 하루에 5천 마리의 맹수가 죽었다고 전해진다.[272]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년 ~ 117년)는 다키아 정복을 기념하여 123일 동안 1만 명의 검투사와 11,000마리의 동물을 동원한 경기를 열었고,[44] 코모두스 황제(재위 180년 ~ 192년)는 스스로 검투사가 되어 735번이나 싸웠다고 한다.[273] 로마 제국 전역에는 186개 이상의 원형 경기장이 확인되었으며, 미확인된 것까지 합하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274][275]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년 ~ 96년) 시대 이후 로마 시의 경기 개최는 관리가 담당하게 되었고, 황실 직속의 검투사 양성소인 대양성소(Ludus Magnus), 갈리아 양성소(Ludus Gallicus), 다키아 양성소(Ludus Dacicus), 마투티누스 양성소(Ludus Matutinus, 조조 양성소)[276] 등 4곳이 설립되었다. 루두스 마그누스는 지하 통로로 콜로세움과 연결되어 있었다.[277]
검투 경기는 오랫동안 로마 최고의 오락거리였지만, 기독교는 이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3세기 초 기독교 작가 테르툴리아누스는 경기가 살인 행위이며 이교의 인간 제물 의식과 다름없다고 비판하며 신자들의 관람을 금했다.[48] 380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는 검투사, 조련사 등 관련자들을 세례 부적격자로 규정했다.[273] 그럼에도 경기는 규모가 축소된 채 한동안 지속되었다. 3세기 위기는 제국의 재정에 부담을 주었고, 검투 경기를 후원해야 하는 하급 관리들에게 이는 큰 부담이 되었다.[47]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년 ~ 337년)는 325년 범죄자를 검투사로 만드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으나,[50] 이것이 완전한 금지를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그 자신도 말년에 히스펠룸 시민들에게 검투 경기를 열 권리를 부여했다.[51] 발렌티니아누스 1세(재위 364년 ~ 375년)는 기독교인을 아레나로 보내는 판사에게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했고,[52]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년 ~ 395년)는 393년 니케아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고 이교 축제를 금지했다.[55] 서로마 제국의 호노리우스 황제(재위 395년 ~ 423년)는 404년 검투 경기를 법적으로 금지했는데, 이는 경기장에서 시합 중단을 외치다 관중에게 맞아 순교한 성 텔레마쿠스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테오도레토스는 전한다.[56][278] 이후 경기는 거의 열리지 않았지만, 440년경까지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279][57] 발렌티니아누스 3세(재위 425년 ~ 455년)가 438년에 금지령을 재확인했고,[57] 523년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다시 금지 포고를 내렸다. 공식적으로는 681년에 완전히 소멸된 것으로 여겨진다.[279] 다만 맹수를 사냥하는 베나티오는 536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57]
검투 경기의 쇠퇴 원인으로는 기독교의 영향 외에도, 3세기 이후 패자를 거의 무조건 살해하는 방식으로 변질되고, 다양한 검투사 유형이 사라져 경기가 단조로워진 점 등이 지적된다. 즉, 기술을 보여주는 오락적 요소가 사라지고 잔혹한 살육전으로 변질되면서 대중의 흥미를 잃고 소멸에 이르렀다는 분석도 있다.[280]
2. 2. 발전

검투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에트루리아인의 제물 의식에서 유래했다는 설은 현재 지지받지 않는다.[251] 기원전 4세기 캄파니아 지방 파에스툼(Paestum)의 무덤 벽화에 투사 시합 모습이 그려져 있어, 캄파니아 기원설이 제기된다.[252] 역사가 리비우스는 캄파니아인들이 삼니움인 포로를 투사로 싸우게 했다고 기록했다.[253] 기원전 1세기경 남부 이탈리아는 투사가 가장 성행했던 지역이었다.[254]
기록상 가장 오래된 투사 시합은 기원전 264년 로마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데키무스 형제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맞춰 보아리움 광장에서 연 것이다.[255] 기원전 216년에는 집정관이자 아우구르였던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로마 포룸에서 22쌍의 검투사를 동원하여 3일간의 검투 경기(''munera gladiatoria'')를 열었다.[17] 10년 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포에니 전쟁 중 사망한 아버지와 삼촌을 기리기 위해 이베리아에서 기념 경기를 열었는데, 이때 높은 신분의 비로마인과 로마인들이 자원하여 검투사로 나섰다고 전해진다.[18] 이러한 초기 경기들은 칸나이 전투와 같은 군사적 위기 속에서 사기를 진작시키고, 군사적 승리를 축하하며 종교적 속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19]
기원전 183년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의 장례 경기는 3일간 120명의 검투사가 동원되고 고기 배급(''visceratio data'')이 포함되는 등 더욱 호화로워졌다.[20][21] 기원전 174년에는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74명의 검투사가 참여하는 나흘간의 경기를 개최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였다.[256][23] 이처럼 죽은 이를 추모하기 위한 경기인 무누스(''munus'')가 점차 인기를 끌었으며,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 축제 즈음에 열리기도 했다.[257] 기원전 2세기에는 원형 투기장이 건설되면서 로마 시내에서는 주로 포로 로마노에서 경기가 열렸다.[258]
시간이 지나면서 추도 경기는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점차 대중적인 볼거리로 변모했고, 정치가들의 정치 선전(프로파간다)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257][259] 대중들은 경기에 열광하며 정치가들에게 개최를 요구했고, 이는 공직 선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경기의 규모와 화려함은 더욱 커져갔다.[260] 경기 개최 일수와 투사 수를 제한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이러한 경향은 제정 초기까지 이어졌다.[261] 기원전 105년에는 집정관들이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카푸아 출신 검투사들의 시범 경기를 로마에 도입하면서 국가가 주관하는 경기인 루디(''루디'')에도 검투 시합이 포함되기 시작했다.[24][25]
로마 공화정 시대 로마의 영토 확장으로 확보된 다수의 전쟁 포로들은 각 민족의 전통 무장을 한 채 검투사로 투입되었다. 기원전 2세기 초에는 갈리아 투사와 삼니움 투사가, 기원전 1세기에는 트라키아 투사가 등장했다.[305] 검투 경기가 크게 유행하던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투사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대규모 노예 봉기(스파르타쿠스 전쟁)가 일어났다. 약 70명의 투사 탈주로 시작된 봉기는 12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어 이탈리아 반도를 휩쓸었다. 반란군은 로마군 포로에게 검투 시합을 강요하기도 했는데, 역사가 오로시우스는 이를 "이제껏 볼거리 취급을 당했던 이들이, 이제는 관객이 되었다"고 기록했다.[262] 기원전 71년, 반란은 크라수스에 의해 진압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검투 경기를 정치 선전의 장으로 적극 활용했다. 그는 기원전 65년 아버지의 추모를 명분으로 320쌍(640명)의 검투사를 동원한 대규모 경기를 열었고,[34][263] 기원전 46년에는 딸 율리아의 추모를 명목으로 1,200명의 투사를 동원한 더 큰 규모의 경기를 개최했다.[263][265] 카이사르는 이미 막대한 개인 부채가 있었음에도 은으로 도금된 갑옷을 사용하는 등 호화로운 경기를 연출했으며,[34]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사병화된 검투사 세력과 높아지는 인기를 경계하여 로마 내 검투사 보유 수를 320쌍으로 제한하기도 했다.[35] 카이사르는 로마 근교의 마르스 광장에 인공 연못을 만들어 군함을 띄우고 벌이는 나우마키아(''naumachia'', 모의 해전)를 개최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는 후대 황제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264] 또한, 맹수를 사냥하는 베나티오네스(''venationes'')가 검투 시합 전에 열리는 볼거리로 추가되면서 경기의 세속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266]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는 재위 중 8번의 검투 경기를 개최하여 약 1만 명의 투사를 동원했고, 다른 경기들을 포함해 총 3,500마리의 맹수를 사냥했다고 전해진다.[267] 그는 경기에 대한 황제의 권위를 확립하고 관련 법률을 정비하여 사치스러운 지출을 제한하고 개최 시기를 사투르날리아와 킨쿠아트리아 축제로 한정하려 했다.[40][41] 황제가 주관하는 공식 경기의 검투사 수는 최대 120명, 비용은 25,000 데나리우스 이하로 제한되었으나, 황제의 루디(''ludi'')는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 수 있었다.[42] 이러한 제정 시대의 검투 경기는 황제 숭배와 결합되어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43][26] 반면, 티베리우스 황제(재위 14년 ~ 37년)는 경기를 거의 개최하지 않아 인기가 없었다.[268] 칼리굴라(재위 37년 ~ 41년)와 클라우디우스(재위 41년 ~ 54년)는 다시 성대한 경기를 열었으나, 네로(재위 54년 ~ 68년)는 전차경기나 연극을 더 선호했다.[269] 귀족들도 인기를 얻기 위해 사적으로 라니스타(''lanista'', 투사 양성소 소유주)나 도크토레(''doctore'', 투사 교관)를 고용하여 투사단을 운영했다.[277]
대중의 검투 경기에 대한 요구는 매우 강했다. 북부 이탈리아 폴렌티아에서는 고위 관리의 장례식 때 추도 경기가 열리지 않자 주민들이 장례식을 방해하여 군대가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270] 서기 59년에는 폼페이 원형 투기장에서 폼페이 주민들과 인근 누케리아 주민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져 10년간 경기 개최가 금지되기도 했다.[271]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매몰된 폼페이 유적에서는 원형 투기장, 투사 양성소, 각종 방어구와 투사에 관한 낙서들이 발견되어 당시 검투 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서기 80년, 로마에는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플라비우스 원형 투기장, 즉 콜로세움이 완공되었다. 티투스 황제(재위 79년 ~ 81년)는 준공 기념으로 100일간 맹수 사냥, 검투 시합, 모의 해전 등 대규모 행사를 열었으며, 하루에 5천 마리의 맹수가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272]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년 ~ 117년)는 다키아 정복을 기념하여 1만 명의 검투사와 11,000마리의 동물을 동원한 경기를 123일간 개최했고,[44] 콤모두스 황제(재위 180년 ~ 192년)는 스스로 검투사가 되어 735번이나 싸웠다고 전해진다.[273] 로마 제국 전역에는 최소 186곳의 원형 투기장이 확인되었으며, 미확인된 곳까지 합하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274][275]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년 ~ 96년) 시대 이후 로마의 검투 경기는 행정관이 관리하게 되었고, 황제 직속의 4개 투사 양성소(대양성소(Ludus Magnus), 갈리아 양성소(Ludus Gallicus), 다키아 양성소(Ludus Dacicus), 조조 양성소(Ludus Matutinus))가 설립되었다.[276] 이 중 대양성소는 지하 통로로 콜로세움과 연결되어 있었다.[277]



2. 3. 절정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년 ~ 14년)는 재위 기간 동안 8번의 투기 대회를 주최하여 약 1만 명의 검투사를 동원하고 3,500마리의 맹수를 사냥하는 등[267] 검투 경기를 적극 활용했다. 그는 경기에 대한 황제의 권위를 확립하고 이를 시민적, 종교적 의무로 공식화했으며,[40] 사치 금지법 개정을 통해 ''무네라''의 비용과 개최 시기를 규제하려 했다.[41] 이에 따라 황제의 프라에토르가 주관하는 공식 ''무누스''는 최대 120명의 검투사와 25,000데나리 이하의 비용으로,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루디''는 180,000데나리 이상의 비용으로 상한선이 설정되었다.[42] 제정 시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성대하고 유명한 검투 경기는 국가가 후원하는 황제 숭배와 결부되어 황제의 신성함과 권위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43][26]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도 검투 경기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티베리우스(재위 14년 ~ 37년)는 경기를 열지 않아 인기가 없었던 반면,[268] 칼리굴라(재위 37년 ~ 41년)와 클라우디우스(재위 41년 ~ 54년)는 성대한 경기를 개최했다.[269] 네로(재위 54년 ~ 68년)는 전차경기나 연극을 더 선호했지만,[269] 귀족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얻기 위해 사적으로 투사 양성소 소유주(라니스타)나 트레이너(도크토레)를 고용해 투사단을 조직하는 것이 유행했다.[277]
민중의 검투 경기에 대한 열광은 대단해서, 59년 폼페이의 원형투기장에서는 폼페이 주민들과 인근 누케리아 주민들 간의 난투극이 벌어져 이후 10년간 투기 대회 개최가 금지되기도 하였다.[271] 79년 베수비오 산 분화로 매몰된 폼페이 유적에서는 원형투기장과 투사 양성소 유적, 방어구, 투사에 관한 낙서 등이 발견되어 당시 검투 문화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정 시대 검투 경기의 절정은 80년 로마에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콜로세움)이 완공되면서 시작되었다. 티투스 황제(재위 79년 ~ 81년)는 콜로세움 준공 기념으로 100일 동안 대규모 투기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맹수 사냥, 검투사 시합, 심지어 모의해전까지 벌어졌으며 하루에 5천 마리의 맹수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272]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년 ~ 117년)는 다키아 정복을 기념하여 123일간 1만 명의 검투사와 11,000마리의 동물을 동원한 거대한 경기를 열었다.[44] 콤모두스 황제(재위 180년 ~ 192년)는 황제의 체통을 버리고 스스로 검투사가 되어 735회나 경기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273] 이러한 인기를 반영하듯, 로마 제국 전역에는 186개 이상의 원형 경기장이 확인되었으며, 미확인된 것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274][275]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년 ~ 96년) 시대 이후, 로마 시에서의 투기 대회 개최는 점차 황제 직속 관리들의 감독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 로마에는 4개의 제국 직속 검투사 양성소가 설립되었다.[276]
양성소 이름 | 라틴어 명칭 |
---|---|
대(大)양성소 | Ludus Magnus |
갈리아 양성소 | Ludus Gallicus |
다키아 양성소 | Ludus Dacicus |
조조(早朝) 양성소 | Ludus Matutinus |
이 중 대양성소(Ludus Magnus)는 지하 통로를 통해 콜로세움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277]
그러나 검투 경기의 규모가 커지고 사치스러워지면서 막대한 비용 문제가 발생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비용 제한을 시도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고, 서기 177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역시 법률로 비용을 통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아들 콤모두스 황제는 이러한 규제를 완전히 무시했다.[45]
2. 4. 쇠퇴
3세기 위기는 로마 제국의 재정에 군사적 부담을 가중시켰고, 제국은 이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하급 관리들은 의무적으로 부과되는 각종 행사(''무네라'') 비용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럼에도 황제들은 여전히 대중의 관심사였던 검투 경기를 계속 지원했다.[47]기독교는 초기부터 검투 경기에 비판적이었다. 서기 3세기 초, 기독교 작가 테르툴리아누스는 검투 경기가 살인이며, 관람은 영적, 도덕적으로 해롭고, 검투사는 이교의 인간 제물 도구라고 주장하며 기독교인들의 참석을 비난했다.[48] 다음 세기에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친구 타가스테의 알리피우스가 기독교 신앙과 구원에 반하는 검투 경기의 구경거리에 매료된 것을 안타까워했다.[49]
315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이 유괴범을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에게 던져 처형(''ad bestias'')하도록 명령하는 등, 원형극장은 여전히 제국의 정의를 보여주는 장소로 기능했다. 그러나 10년 후인 325년, 그는 범죄자들이 검투사로서 싸우다 죽게 하는 형벌을 금지했다.
> 피 묻은 광경은 우리의 시민적 평화와 가정의 평온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범죄 행위로 인해 이러한 상태와 형벌을 받을 자격이 있었던 사람들이 검투사가 되는 것을 금지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광산에서 일하도록 선고하여 피로 그들의 범죄에 대한 처벌을 인정하게 하십시오.[50]
이는 종종 검투 경기 자체의 금지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말년에 히스펠룸 시민들에게 검투 경기로 자신의 통치를 기념할 권리를 부여하기도 했다.[51]
380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검투 경기에 대한 반대는 더욱 강해졌다. 교회는 투사 양성소 소유주(라니스타)와 교관(도크토레)을 비롯해 검투 경기와 관련된 모든 이들을 세례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규정했다.[273] 365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기독교인을 아레나로 보내는 판사에게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위협했고,[52] 384년에는 검투 경기의 비용을 제한하려 시도했다.[53][54] 393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니케아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고 이교 축제를 금지했다.[55]
검투 경기는 점차 규모가 축소되었고 인기도 하락했으며, 훈련생 모집도 어려워졌다.[273] 404년, 수도사 성 텔레마쿠스가 콜로세움에서 검투 경기를 중단시키려다 관중이 던진 돌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는 투기장을 폐쇄하고 검투 경기를 법적으로 금지했다(399년 첫 금지령 이후 재확인).[278][56] 이후 검투 경기는 거의 열리지 않았지만, 440년경까지 간헐적으로 개최되었다는 기록도 있다.[279]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438년에 이 금지령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57]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된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523년에 검투 경기를 금지하는 포고를 내렸다.[279] 맹수 사냥 쇼인 ''베나티오''는 536년 이후까지 지속되었으나,[57] 검투 경기는 681년에 공식적으로 완전히 금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279]
검투 경기의 쇠퇴 원인으로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영향이 가장 크게 꼽힌다. 하지만 다른 분석도 존재한다. 3세기 이후 검투 경기가 패배 시 무조건 죽음으로 이어지도록 변하고, 심판의 역할이 모호해졌으며, 다양한 검투사 스타일 대신 특정 유형(세크토르, 레티아리이 등)만 남게 되는 등 경기가 점차 과격해지고 단순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검투사의 기술을 감상하는 재미가 줄어들고 단순한 살육전으로 변질되면서 관객의 흥미를 잃고 결국 소멸에 이르렀다는 분석이다.[280] 비잔틴 제국에서는 연극 공연과 전차 경주가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 인기를 누렸다.
3. 징집, 양성, 사회적 지위
검투사는 주로 전쟁 포로나 노예 시장에서 거래된 이들, 때로는 자원한 자유민이나 처벌을 받은 범죄자 중에서 충원되었다.[281][282][283][284] 이들은 lanista|라니스타la가 운영하는 검투사 양성소(ludus|루두스la)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286][287][288] 훈련 과정은 매우 고되고 위험했으며,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이들도 있었다.[290][291][292]
검투사는 승리를 통해 부와 명성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로마 사회에서는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infamis|인파미스la(수치스러운 자)로 분류되어 매우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285] 이들은 창녀나 최하층 노예와 동급으로 취급받으며 멸시당했지만[285], 동시에 경기장에서 대중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 모순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살아남아 은퇴한 검투사에게는 자유를 상징하는 목검(Rudis|루디스la)이 주어지기도 했으나[297], 완전한 시민권을 얻는 경우는 드물었다.[304]
3. 1. 징집
검투사가 되는 이들의 대다수는 전쟁 포로나 노예 시장에서 거래되던 이들이었다. 특히 반항적인 기질 때문에 주인이 투사로 팔아버리는 노예가 많았다.[281] 또한 로마 공화국 말기부터는 자발적으로 검투사가 되려는 자유민들도 있었는데, 연구에 따르면 검투사 10명 중 1명[283]에서 많게는 2명[282] 정도가 자유민 출신이었다고 추정된다. 이들은 주로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 범죄자 역시 처벌의 일환으로 투기장으로 보내져 검투사가 되었다.[284] 팍스 로마나 시대처럼 비교적 전쟁이 적었던 시기에는 범죄에 대한 형벌로 경기장이나 검투사 학교로 보내진 노예들(damnati ad ludum|담나티 아드 루둠la)과 자발적으로 계약을 맺고 참여하는 지원자들(auctorati|아우크토라티la)이 검투사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다.[65][66] 가난한 이들이나 비시민권자에게 검투사 학교는 기술 훈련, 규칙적인 식사, 거처를 제공받고 명성과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67] 예를 들어, 유대인 반란 이후에는 많은 유대인 포로들이 검투사 학교로 보내졌다.[63]
검투사는 계속 승리하면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로마 사회에서는 "타락한 자", "야만인", "수치스러운 자"(infamis|인파미스la)로 취급받았다. infamia|인파미아la는 로마 시민의 즐거움을 위해 로마법의 보호에서 제외된 계층을 의미하며, 이들은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아 창녀와 동급으로 여겨졌고, 노예 중에서도 가장 낮은 등급으로 멸시당했다.[285]
징집된 노예나 자유민들은 대개 lanista|라니스타la(검투사 훈련소 소유주 겸 관리자)가 소유한 검투사단(familia gladiatorial|파밀리아 글라디아토리아la)에 속하게 되었다. 이들은 검투사 양성소(Ludus|루두스la)에서 장기간 훈련을 받은 후 투기 대회에 출전했다. 라니스타는 종종 살아남아 자유를 얻은 전직 검투사 출신으로, 재산을 모으는 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사회적으로는 매춘업자 등과 같이 비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다.[286]
반면, 범죄자 출신 검투사들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채 감옥에서 바로 투기장으로 보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방어구도 없이 싸워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경기장에서 목숨을 잃었다.[284][353]
3. 2. 양성
검투사가 되는 이들은 주로 전쟁 포로나 노예 시장에서 거래되던 이들이었으며, 반항적인 기질 때문에 주인이 투사로 팔아버린 노예도 많았다.[281] 드물게 자유민이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연구에 따르면 투사 10명 중 2명은 자유민 출신이었다고 한다.[282][283] 범죄자 역시 투사로 투기장에 보내졌다.[284] 검투사는 승리를 거듭하면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로마 사회에서는 "타락한 자", "야만인", "수치스러운 자"(infamis)로 여겨졌고 사회적 지위도 낮아 창녀와 동급으로, 노예 중에서도 최하 등급으로 멸시받았다.[285]
징집된 노예나 자유민 지원자들은 라니스타(lanista: 투사 훈련소 소유자 및 관리자)가 소유한 투사단(`familia gladiatoria`)에 속하게 되어, 루두스(ludus: 투사 양성소)에서 장기간 훈련을 받고 투기 대회에 출전했다. 라니스타는 대부분 투기 대회에서 살아남아 자유를 얻은 전직 투사 출신으로, 재산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으나 사회적으로는 매춘업주와 같은 비천한 신분으로 취급받았다.[286] 가장 초기에 이름이 알려진 양성소는 기원전 105년경 카푸아에 있던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의 것으로, 그는 국가에 고용되어 군단병 훈련과 대중 오락을 위한 검투사를 양성했다.[143]
검투사 양성소에는 기술을 가르치는 전직 투사 출신의 도크토레(Doctore: 투사 트레이너)나 교사(`Ludi Magister`) 외에도 숙련된 의사와 마사지사가 배치되어 검투사 양성을 도왔다.[287] 도크토레는 행진, 무기 사용법, 발기술, 칼로 동맥을 찾는 법 등 전투 기술 전반을 철저히 훈련시켰다.[288] 훈련생들은 기본적으로 목검을 들고 연습했으며, 짚으로 만든 인형을 상대로 공격 연습을 하거나 훈련생끼리 연습 시합을 통해 경험을 쌓았다. 실제 무기는 반란 및 부상 위험 때문에 투기 대회 때만 지급되었다.[289] 훈련은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여 익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우아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이 선호되었다. 또한, 훈련 과정에는 흔들림 없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준비시키는 스토아적 정신 교육도 포함되었다.[153]
훈련 강도는 매우 높았고,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가혹한 벌이 주어졌으며,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290] 제정 초기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세네카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투사들의 사례를 기록했다. 어떤 게르만인 베스티아리이(Bestiarii: 짐승과 싸우는 투사)는 변소 청소용 스펀지 막대로 목구멍을 찔러 자살했고, 또 다른 베스티아리이는 마차로 이송되던 중 조는 척하다가 마차 바퀴에 머리를 부딪혀 목숨을 끊었다.[291] 동료와 싸우기 싫었던 야만족 출신 투사들이 서로의 목을 졸라 함께 죽거나, 모의 해전 중에 로마인들의 구경거리가 된 것에 분노하며 자살한 투사의 이야기도 전해진다.[292] 징계는 매우 엄격했으며 때로는 치명적이었다.[156]
훈련생들의 숙소는 중앙 훈련장 주변에 감방 형태로 배치되었으며, 검투사의 유형과 지위에 따라 엄격히 분리되었다. 예를 들어, 레티아리우스는 `damnati`(유죄 판결을 받은 자)와 분리되었고, 방패를 사용하는 투사는 갑옷을 입은 중무장 투사와 분리되었다.[155] 폼페이의 루두스 유적에서는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천장이 낮은 매우 작은 감방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가벼운 처벌을 위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57] `ad ludum`(투사 학교행) 판결을 받은 자들은 얼굴, 다리, 손 등에 낙인이나 문신(`stigma`)을 새겼을 수 있다.[154]
가혹한 훈련에도 불구하고 검투사들은 라니스타에게 중요한 자산이었으므로, 일반적으로 좋은 음식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았다. 식단은 보리, 삶은 콩, 오트밀, 재, 말린 과일 등으로 구성된 고칼로리 채식 위주였다.[158][159] 당시 로마인들은 보리가 밀보다 열등하다고 여겨(군인에게 밀 대신 보리를 배급하는 것은 처벌의 일종이었다) 주로 가축 사료로 사용했지만, 신체를 튼튼하게 하고 지방을 늘려 출혈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에 투사들에게 주식으로 제공했다.[160][294] 이 때문에 투사들을 '보리 먹는 자들'(`hordearii`)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295] 정기적인 마사지와 양질의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었으며, 유명한 의사 갈렌은 페르가뭄의 검투사 학교에서 근무하며 이들의 훈련, 식단, 건강 상태를 관찰하고 기록했다.[161]
기초 훈련을 마친 신입 투사는 민첩성, 힘, 체격, 숙련도 등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트라케스(Thraces: 트라키아인 풍의 장비를 한 전사), 삼니테(Samnite: 삼니움인 풍의 장비를 한 전사), 레티아리이(Retiarius: 그물투사), 무르밀로(Murmillo: 물고기 모양 투구를 쓴 투사), 세크토르(Secutor: 추격투사) 등이 있었다. 훈련을 따라가지 못한 이들은 주로 베스티아리이(Bestiarii: 짐승과 싸우는 투사)가 되었다. 반면 범죄자 출신 투사들은 별도 훈련 없이 감옥에서 바로 투기장으로 보내졌고, 방어구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대부분 경기장에서 목숨을 잃었다.[284][353]
투사들은 내부적으로 팔루스(palus: 서열)라는 등급 체계를 가졌으며, '수석 투사'(`primus palus`)가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300][152] 노예 출신 훈련생은 열악한 환경에서 지냈지만, 자유민 출신이거나 연승을 거둔 투사에게는 더 나은 환경이 주어졌고, 수석 투사 지위에 오르면 최고의 대우를 요구할 수 있었다.[301] 또한 투사들의 생활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어서 연인을 두거나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302]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개인 소유 양성소에서 시작된 이후, 공화정 말기에는 사병 집단화 가능성 때문에 검투사 양성소에 대한 국가 통제가 강화되었다. 양성소의 소유, 위치, 조직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페르가뭄, 알렉산드리아, 프라에네스테, 카푸아 등 주요 양성소들이 사실상 국영으로 운영되었다.[147] 로마 시에는 4개의 국영 양성소가 있었다: 루두스 마그누스(Ludus Magnus, 가장 크고 중요하며 약 2,000명 수용), 루두스 다키쿠스(Ludus Dacicus), 루두스 갈리쿠스(Ludus Gallicus), 그리고 베스티아리이를 전문적으로 훈련시킨 루두스 마투티누스(Ludus Matutinus).[58]
제국 시대에 자유민이 자원하여 투사(아우크토라티, auctorati)가 되려면 치안 판사의 허가와[148] 학교 의사의 신체 검사 통과가 필요했다. 계약(`auctoramentum`)에는 공연 빈도, 전투 스타일, 수입 등이 명시되었다. 파산자나 채무자는 계약을 통해 부채의 일부 또는 전부를 탕감받기도 했다.[149] 모든 예비 검투사는 입소 시 신성한 맹세(`sacramentum`)를 해야 했다.[150]
3. 3. 사회적 지위
검투사가 되는 사람 대부분은 전쟁 포로나 노예 시장에서 팔려 온 이들이었으며, 반항적이라는 이유로 주인이 검투사로 팔아버린 노예도 많았다[281][241]. 자유민이 자원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연구에 따르면 검투사 10명 중 1~2명은 자유민 출신이었다고 한다[282][283][241]. 범죄자 역시 검투사로 투기장에 보내졌다[284][241].
검투사는 계속 승리하면 부와 명성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241], 로마 사회에서는 "타락한 자", "야만인", "수치스러운 자"(infamis|인파미스la)로 여겨졌다. Infamia|인파미아la는 로마인의 즐거움을 위해 로마법의 보호에서 제외된 계층을 의미하며, 이 계층에 속한 자를 infamis|인파미스la라 불렀다. 검투사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아 매춘부와 동급으로 취급되었고, 노예 중에서도 가장 낮은 등급으로 멸시받았다[285][241]. 검투사를 조롱하는 말로 "보리 먹는 놈들"(hordearii|호르데아리우스la)이라는 표현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로마 시민의 주식인 밀과 달리 보리가 주로 가축 사료로 쓰였고 검투사에게 지급되었기 때문이다[295][241].
검투사를 훈련시키고 관리하는 lanista|라니스타la(투사 훈련소 소유자)는 대부분 살아남아 자유를 얻은 전직 검투사 출신이었다. 이들은 재산을 모을 수는 있었으나, 그 직업은 매춘업소 주인과 동급의 비천한 신분으로 여겨져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286][241].
법적으로 경기장이나 검투사 양성소로 보내진 damnati ad ludum|담나티 아드 루둠la은 servus poenae|세르부스 포이나이la(형벌의 노예)로 간주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았으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해방되기 어려웠다[163]. 특정 범죄를 저지른 노예나 시민권이 박탈된 시민이 검투사가 될 수 있었다[165]. 경기장에 선 모든 사람(arenarii|아레나리이la)은 법적, 사회적으로 infamia|인파미아la 상태에 놓여 시민으로서의 권리 대부분을 박탈당했다[174]. 이들은 투표하거나 법정에서 변론할 수 없었고, 유언장을 남길 수도 없었으며, 해방되지 않는 한 생명과 재산은 주인의 소유였다[175].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일부 검투사가 아내와 자녀에게 재산을 유증하거나[176], 심지어 동로마의 여러 그리스 도시에서 시민권을 부여받은 사례도 있었다[177]. 또한 검투사들의 생활이 반드시 외부와 차단된 것은 아니어서, 연인을 두거나 가정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302][241].
검투사는 전투 실력 때문에 군사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기원전 100년경에는 신병 훈련을 위해 군 지휘관에게 고용되어 보병에게 전투 기술을 가르치는 교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305][288][241]. 하지만 검투사는 본래 병사가 아니었으며, 서기 69년 네 명의 황제의 해 내전 당시 오토 황제가 2,000명의 검투사로 부대를 편성하자,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들을 "수치스러운 보조병"이라고 비판적으로 기록했다[306][241].
공화정 시대에는 주로 하층 계급 출신이 검투사가 되었지만, 제정 시대에 들어서면서 기사 계급이나 원로원 계급이 투기장에 나서는 사례도 나타났다[307][241]. 심지어 콤모두스 황제는 스스로 검투사로서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308][241].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원전 46년 경기에는 기사 계급, 집정관의 아들, 원로원 의원 등이 자원하여 참여했다는 기록도 있다[178]. 이러한 상류층의 참여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금지되기도 했으나[179], 이후 황제들에 의해 무시되거나 다시 허용되기도 했다.
여성 검투사도 존재했지만 드물었으며, 주로 "매우 호화로운 구경거리의 이국적인 징표"로 여겨졌다[70]. 서기 66년 네로 황제는 에티오피아 여성들이 참여하는 경기를 열었으며[71],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인 서기 89년에는 "아마존"으로 묘사된 여성 검투사들의 싸움이 있었다[74]. 할리카르나소스에서 발견된 2세기 부조에는 "아마존"과 "아킬리아"라는 이름의 여성 검투사가 묘사되어 있다[75]. 오스티아의 한 비문은 지역 유력자가 처음으로 여성에게 무기를 주어 싸우게 했다고 기록한다[75]. 그러나 여성 검투사에 대한 로마 사회의 시선은 엇갈렸으며, 일부는 이를 로마의 타락한 도덕과 여성성의 상실로 보았다. 결국 서기 20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여성 검투사의 출전을 금지했다[78][79].
검투사는 경기장에서 관중의 환호를 받고 많은 보상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설령 살아남아 은퇴하고 목검(Rudis|루디스la)을 받아 해방되더라도[297][241], 다른 해방 노예와 달리 로마 시민이나 라틴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신분은 자유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항복 외부인"(dediticii|데디티키이la)에 해당했다[304][241].
4. 투기 대회
검투 경기는 고대 로마 사회의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초기에는 귀족의 장례식에서 고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열리는 사적인 행사(munera gladiatoriala)로 시작되었다. 기원전 216년,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장례식에서 그의 아들들이 22쌍의 검투사를 동원해 3일간 경기를 치른 것이 기록된 초기 사례 중 하나이다.[17] 10년 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포에니 전쟁 중 전사한 아버지와 삼촌을 기리기 위해 이베리아에서 기념 munus|무누스la(경기)를 열기도 했다.[18] 이러한 초기 경기들은 군사적 승리를 축하하고 전쟁의 희생을 기리며, 때로는 군사적 재앙 이후 사기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19]
시간이 지나면서 검투 경기는 점차 규모가 커지고 호화로워졌으며[20], 로마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18] 기원전 105년에는 국가가 주관하는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검투 경기가 로마에 도입되어 큰 인기를 끌었고[24], 이후 주요 종교 축제에 포함되는 공적인 경기(ludi|루디la)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25]
공화정 말기에는 검투 경기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해졌다. 경기를 후원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자신의 부와 관대함을 과시하고 대중의 인기를 얻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28][29] 특히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은 사망한 가족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화려한 경기를 개최하여 유권자의 환심을 사려 했다. 술라는 자신의 사치 금지법을 어기면서까지 아내의 장례식에 성대한 munusla를 열었으며[30], 기원전 65년 당시 쿠룰레 아이딜리스(라틴어: curule aedile)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버지 장례 20주년을 기념한다며 320쌍의 검투사를 동원한 대규모 munusla를 개최하여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34] 당시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여 로마 시내에서 개인이 보유할 수 있는 검투사의 수를 제한하기도 했다.[35] 이처럼 검투 경기는 점차 본래의 장례 의식적 성격보다는 정치적 선전과 오락의 성격이 강해졌다.[37]
로마 제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검투 경기는 더욱 체계화되고 황제의 권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경기에 대한 황제의 통제권을 확립하고, 경비 지출 상한선을 두는 등 관련 규정을 정비했다.[40][41][42] 이제 검투 경기는 황제 숭배 사상과 결합하여 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43][26]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키아 정복을 기념하여 123일 동안 보고된 바에 따르면 1만 명의 검투사와 1만 1천 마리의 동물이 동원된 거대한 경기를 열기도 했다.[44]
경기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전용 경기 시설인 원형 경기장이 건설되었다. 초기에는 로마 포룸과 같은 개방된 공간에 임시 좌석을 설치하여 경기를 진행했으나[187], 기원전 70년경 폼페이에 최초의 석조 원형 경기장이 세워졌고[191], 로마 시내에도 목조 및 부분 석조 경기장을 거쳐 마침내 콜로세움(플라비우스 원형 극장)이 건설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착공하여 서기 80년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된 콜로세움은 약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건축물로, 제국 전역에 건설된 수많은 원형 경기장의 모델이 되었다.[194] 원형 경기장은 단순한 경기장을 넘어, 황제나 관료들이 대중과 소통하고 여론을 파악하며, 때로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195][196][197] 아우구스투스는 원형 경기장의 좌석을 신분별로 엄격히 구분하는 규정을 만들기도 했다.[198]
그러나 화려했던 검투 경기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3세기 위기 동안 제국의 재정난이 심화되면서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경기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고[47],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경기의 잔혹성과 이교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48][49] 콘스탄티누스 1세는 325년에 범죄자를 검투사로 만드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고[50], 이후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교 축제를 금지했다.[55] 마침내 404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검투사 경기를 법적으로 금지하면서[56], 오랜 역사를 가진 로마의 투기 대회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다만, 맹수를 사냥하는 venatio|베나티오la는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57]
4. 1. 개최 방식
황제에 경의를 표하는 투사들.장 레옹 제롬 그림, 1859년]]
검투사 경기는 주최자의 성향이나 야심에 따라 잔혹함의 정도나 볼거리의 진귀함, 흘릴 피의 양이 달라졌다. 하지만 적어도 검투사끼리의 시합은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규칙 없는 잔혹한 쇼만은 아니었다.
투기 대회는 황제나 정치가, 지방 명문가가 주최했으며, 비싼 표(tessera|테세라la)는 무료로 시민들에게 배포되었고(공화정 말기부터는 판매되기도 했다), 표가 없는 하층 계급이나 여성, 비시민 계급의 사람들도 최상단 관람석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309]. 민중은 무료 관람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기원전 122년경에는 고급 정무관이 특권을 이용하여 투기장에 열람석을 설치하고 유료로 시합을 보게 했지만, 당시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민중을 위해 직공을 보내 열람석을 철거하고 무료로 관람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310].
투기 대회의 규모는 다양했다. 집정관 선출을 위해 클로디우스 플라쿠스가 주최한 투기 대회의 경우 30개의 시합으로 3일간이었다[311]. 또한, 폼페이에서 발굴된 네로 황제의 종신 신관 데키무스 루크레티우스 사투리우스 발렌스 부자의 투기회 고지문에서는 30개의 시합으로 4일간이었다[312]. 기원전 22년에 검투사 흥행에서는 120경기를 최대로 하는 규정이 정해졌지만, 황제가 주최하는 경우에는 이 범위를 벗어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재위: 기원전 27년 - 14년)는 8번의 흥행에서 5000경기를 싸우게 했다[313].
투기 대회는 흥행의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전날에는 연회가 열려 검투사들에게는 푸짐한 음식이 제공되었고, 이것을 시민들이 구경했다[314]. 투기 대회는 이른 아침부터 개최되었고, 먼저 퍼레이드용 투구와 자수 장식이 된 망토를 착용한 검투사들의 입장식(폼파)이 있었고, 주최자는 인기를 끌기 위해 여러 가지 묘안을 냈지만, 관중들은 매우 지루해했다고 한다[315]. 황제가 투기회의 주최자인 경우, 검투사들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경례를 했다.
>'''황제 만세! 죽어가는 자들이 경의를 표합니다.'''
(Ave Imperator, morituri te salutantla 또는 Ave, Caesar, morituri te salutantla)
이 경례의 사료상 첫 등장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41년 - 54년)가 모의 해전을 주최했을 때인데, 이에 황제가 구명을 암시하는 대답을 하자,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던 군함의 승무원들이 목숨을 아끼려고 배를 흩뜨리기 시작하여 황제를 격노하게 했다[264].


오전에는 맹수 사냥(Venationesla)이 열렸다. 유럽,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모여진 곰, 호랑이, 사자, 표범 등의 맹수와 코끼리, 기린과 같은 진귀한 짐승들이 투기장에 풀려나, '베스티아리이'(Bestiariila, 짐승과 싸우는 투사)들이 이것을 사냥하여 죽였다[317]. 원래 맹수 사냥과 검투사 시합은 별도로 열렸지만, 차츰 검투사 시합의 여흥이나 전좌로 열리게 되었고, 제정기에 들어서면서 이것이 고정화되었다[318]. 베스티아리이는 무장하고 있었고, 맹수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는 빈도도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중죄인과 맹수와의 싸움은 공개 처형이었고, 대부분의 중죄인이 맹수에게 살해되었다[319].
오후가 되면 죄인(Noxiusla)의 처형이 행해졌고, 그들은 무기를 들고 죄인끼리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검투사와 싸워 죽게 된다[320]. 유혈로 인해 미끄러지지 않도록 모래가 깔린 곳에서의 살육전이 시작되면, 아직 숨이 붙어있는 죄인은 시합 종료 후에 옮겨진 후 숨통을 끊었다[321].
죄인의 처형이 끝나면 검투사 시합이 시작된다. 먼저 실력이 부족한 양성소 검투사(Meridianila, 한낮에 싸우는 검투사)의 시합으로, 그들은 제비뽑기로 조합을 정하여 싸운다[322]. 여기서 싸우는 신인 검투사들은 첫 번째 싸움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323]. 저녁 무렵부터는 필두 검투사(Primus palusla)를 비롯한 이름난 검투사들의 시합이 된다[324].
검투사의 이름이 불리고, 무기의 위력을 확인한 후, 두 명의 심판원(summa rudisla)이 있는 투기장 중앙으로 나아가게 된다[325]. 시합은 상대를 죽이거나 부상시켜 무력화시킬 때까지 계속된다. 시합을 끝내고 싶다면 집게 손가락을 높이 들거나, 방패를 내던지면 "항복"의 의사 표시가 되며, 항복한 상대를 상처 입히는 것은 비열한 행위로 여겨졌다[326]. 때로는 관중들이 "Habet, hoc habetla"(그는 당할 만큼 당했다)라고 외치거나 심판의 판단으로 시합을 중단시켰다.

장 레옹 제롬 그림, 1872년
그리고 결판이 난 후, 시합의 패자에 대해서는 관객이 구명할지 처형할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용감하게 싸웠다고 구명(Missusla)하려면 엄지손가락을 위로, 보기 흉한 패배를 했다고 처형하려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하는 것이 신호였다고 하지만, 현대의 연구자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주먹과 함께 "죽여라!"라고 외치면 처형, 엄지손가락을 내리면 구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327]. 역전의 검투사라면, 관객에게 죽음을 선고받을 만한 보기 흉한 패배는 하지 않도록 특훈을 받는다. 그전에 거액을 들여 양성한 검투사를 잃는 것은 경영자(Lanistala)에게도 큰 손실이기 때문에, 검투사가 관중의 희망에 따라 나무 칼(Rudisla)을 수여받고 자유롭게 되거나, 중상을 입어 싸울 수 없게 되거나 죽는 경우, 주최자는 시장 가격에 맞는 금액을 흥행사에게 지불해야 했다[328].
승리자(Victorla)에게는 그 증거인 종려나무 가지(Palmala)가 주어졌고, 탁월한 자에게는 월계관(Coronala)이 수여되었다[296]. 때로는 승리의 보상으로 거액의 금품을 얻기도 했다[329]. 또, 시인에게 칭송받고, 보옥이나 단지에 초상화가 그려지고, 부인들의 사랑을 받았다[326].

공화정 시대에는 투기회의 고지문에는 "구명 없음"(Sine missionela)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것을 금지했고, 역사학자 조르주 빌(George Ville)의 연구에 따르면, 1세기에 100경기에 출전한 200명의 검투사 중 사망자는 19명, 생존율은 90%를 넘었다[331]. 하지만, 투기회는 다시 과격해지는 경향을 보여, 3세기에는 1경기마다 사망자가 나오게 되었고, 마침내 검투사 시합의 패자는 거의 살해되었다[332]. 덧붙여, 이 시대는 라티푼디움이 곤경에 처해 코로나투스로 이행하는 등, 노예 부족이 심각해지고 오히려 귀중해진 노예를 보호하는 법률이 시행된 시기이기도 하다[333]. 검투사도 잘 훈련된 노예가 줄어들고, 종전이라면 낙오될 수준의 노예나 범죄자가 검투사로 동원되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사망률이 높아졌다.
주최자의 취향에 따른 변칙적인 투기회도 전해진다. 시합은 1대1로 진행되지만, 칼리굴라 황제(재위 37년 - 41년)는 그물 투사(Retiariusla) 5명과 추격 검투사(Secutorla) 5명으로 싸우게 했다[334]. 코모두스 황제(180년 - 192년)는 하지를 잃은 자들을 로마 시중에서 긁어모아 뱀 꼬리 의상을 입게 하고, 곤봉으로 그들을 모조리 때려 죽였다[335]. 정치가 쉼마쿠스(Symmachus)가 주최한 투기회에서는 색다른 취향으로 관중의 흥미를 끌기 위해 그가 사들인 검투사들은 싸우지 않고 서로 목을 조여 죽게 했고, 마지막 한 명은 절명할 때까지 스스로 벽에 머리를 들이받게 했다[336].
기원전 46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도시 로마 근교의 마르스 광장(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인공 연못을 만들고 16척의 군함을 띄워, 4,000명의 죄인이나 포로를 노젓는 사람으로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모의 해전(나우마키아)을 처음으로 개최했다[264]. 57년에 네로 황제(재위 54년 - 68년)는 캄푸스 마르티우스의 원형 투기장 안에 물을 채워 모의 해전을 행하게 했다. 티투스 황제(재위 79년 - 81년)는 상설 인공 연못을 만들어 살라미스 해전을 재현하게 했다[337].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년 - 96년)는 완공된 지 얼마 안 된 콜로세움에서 두 번의 모의 해전을 개최했다.
검투사는 1년에 3번이나 4번 정도의 시합을 치르고, 20번 정도를 경험하기 전에 죽거나 나무 칼 수여자가 되어 은퇴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1세기경의 상황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20명 중 1명 정도였다[338][339]. 시칠리아 섬의 추격 검투사(Secutorla) 플람마(Flamma)의 묘비에는 4번 나무 칼(Rudisla)을 받았음에도 싸움을 계속했고, 25번의 승리를 거두고, 4번의 구명, 그리고 9번의 싸움에서는 무승부였다고 한다[340][297]. 검투사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헌신한 노예는 그 공을 기려 해방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검투사였던 노예는 관객의 갈채를 받았던 경험을 잊지 못하고, 은퇴해도 다시 검투사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341].
맹수 사냥 | 검투사 시합 |
---|---|
-- -- | ![]() 추격 검투사는 그물에 걸리면서도 싸우고(아래), 망투사가 패배하여 단검을 내밀고, 패배를 인정했다(위). Kalendio의 이름 뒤에 죽음을 의미하는 θ(세타)의 문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
검투사 시합 | 모의 해전 |
![]() Simmachius가 승리하고, 패배한 Maternus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위). Maternus의 이름 뒤에 죽음을 의미하는 θ(세타)의 문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투사했거나 처형되었다. | ![]() -- |
![]() | ![]() | ![]() |
4. 2. 경기 규칙
장 레옹 제롬 그림]]검투사들의 시합은 단순히 잔혹하기만 한 쇼가 아니라, 정해진 규칙과 심판의 통제 하에 진행되었다.[325] 시합은 상대를 죽이거나 싸울 수 없게 만들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싸우는 도중 검투사가 집게손가락을 높이 들거나 방패를 던지면 항복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었다. 항복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비열한 행위로 여겨졌다.[326] 또한, 관중들이 "habet, hoc habet"(그는 당할 만큼 당했다)라고 외치거나 심판의 판단에 따라 시합이 중단되기도 했다.
시합이 끝나면 패배한 검투사의 생사는 관중이나 경기를 주최한 에디토르의 결정에 맡겨졌다. 일반적으로 용감하게 싸운 검투사는 살려주고, 비겁하게 싸웠거나 관중의 미움을 산 검투사는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흔히 엄지손가락을 올리면 살려주고 내리면 죽이라는 신호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오히려 엄지를 위로 치켜세우며 "죽여라!"라고 외치는 것이 처형 신호였고, 엄지를 아래로 내리는 것이 살려주라는 신호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327] 숙련된 검투사는 관중이 죽음을 선고할 만큼 보기 흉하게 패배하지 않도록 훈련받았다. 많은 돈을 들여 양성한 검투사를 잃는 것은 라니스타(검투사 양성소 주인)에게 큰 손실이었기 때문에, 패배하더라도 목숨을 건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초기 로마 제국 시대에는 생존율이 상당히 높았다.
승리한 검투사에게는 승리의 증표로 종려나무 가지(파르마)가 주어졌고, 뛰어난 승리를 거둔 검투사에게는 월계관(코로나)이 수여되었다.[296] 때로는 막대한 상금이 주어지기도 했다.[329]
훈련된 검투사들은 전문적인 전투 규칙을 따라야 했으며, 대부분의 시합에는 수석 심판(수마 루디스, summa rudis)과 조수가 참여했다. 이들은 긴 막대기(루데스, rudes)를 들고 있다가 규칙 위반 시 주의를 주거나 위험한 상황에서 개입하여 잠시 시합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심판은 주로 은퇴한 검투사가 맡았으며, 그들의 판정은 존중받았다.[105][106] 대부분의 시합은 10분에서 15분, 길어도 20분 정도 소요되었다.[100]
그러나 모든 경기가 규칙대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주최자의 성향에 따라 매우 잔혹하거나 변칙적인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칼리굴라 황제는 레티아리우스(그물 투사) 5명과 세쿠토르(추격 투사) 5명을 동시에 싸우게 했고,[334] 콤모두스 황제는 다리를 잃은 사람들을 모아 뱀처럼 꾸민 뒤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335] 정치가 슘마스크는 자신의 투사들에게 상대를 목 졸라 죽이게 하고, 마지막 생존자는 스스로 벽에 머리를 부딪혀 죽게 만들었다.[336] 싸우기를 꺼리는 검투사는 채찍질을 당하거나 뜨거운 쇠붙이로 지져지며 싸우도록 강요받기도 했다.[104]
시대에 따라 경기의 잔혹성에도 변화가 있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목숨을 살려주지 않음(sine missione)"이라는 조건이 붙는 경기도 있었으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금지했다. 1세기경에는 검투사의 생존율이 90%를 넘었다는 연구도 있다.[331] 하지만 점차 경기가 다시 과격해져 3세기경에는 패배한 검투사 대부분이 살해당하게 되었다.[332] 이는 노예 부족 현상과 맞물려 훈련된 검투사 대신 질 낮은 노예나 범죄자를 투사로 투입하는 비율이 높아진 것도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된다.
4. 3. 관중의 역할
관중이 패배한 검투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모습을 묘사한 장 레옹 제롬의 그림. 엄지 방향의 의미에 대해서는 현대 연구에서 다른 해석도 제기된다.]]검투 경기에서 관중은 단순한 구경꾼을 넘어 경기의 일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패배한 검투사의 생사를 결정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326] 시합 중 한쪽이 싸움을 포기하는 의사(집게손가락을 들거나 방패를 던짐)를 보이거나, 부상으로 더 싸울 수 없다고 판단될 때(관중이 "habet, hoc habet" 즉, '그는 당할 만큼 당했다'고 외치거나 심판이 중단시킬 때), 관중은 패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했다. 일반적으로 패자가 용감하게 싸웠다고 판단하면 살려주기를 원했고, 반대로 비겁하거나 보기 흉하게 싸웠다고 생각하면 죽음을 요구했다.
패자의 생사를 결정하는 신호로 엄지손가락을 사용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전통적으로는 엄지를 올리면 살려주고 내리면 죽이라는 신호로 해석되었으나, 현대 연구자들은 오히려 엄지를 위로 치켜세우며 "죽여라!"라고 외치는 것이 처형 신호였고, 엄지를 아래로 내리는 것이 자비를 베풀라는 의미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327] 경험 많은 검투사들은 관중의 죽음 선고를 피하기 위해 용맹하게 싸우는 훈련을 받았다. 검투사 양성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으므로, 검투사를 소유하고 관리하는 라니스타나 경기를 주최하는 에디토르 입장에서도 숙련된 검투사를 쉽게 잃는 것은 큰 손실이었다.[328]
관중들은 단순히 생사 결정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특정 검투사나 검투사 유형을 열광적으로 응원하며 파벌을 형성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무거운 방패(스쿠툼)를 든 세쿠토르나 무르밀로를 지지하는 '세쿠타리이'(Secutarii)와 가벼운 방패(파르마)를 든 트라에스 등을 지지하는 '파르물라리이'(Parmularii)로 나뉘어 경쟁했다.[201] 이러한 파벌 경쟁은 때때로 매우 격렬해져서, 네로 황제 시대에는 파벌 간의 다툼이 심해지자 군대를 동원해 진압해야 할 정도였다.[202][203] 황제들 역시 개인적인 선호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티투스와 트라야누스는 파르물라리이를, 도미티아누스는 세쿠타리이를 선호했다고 전해진다.[202]

지역 간의 경쟁의식이 경기장 내 관중의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 서기 59년 폼페이의 원형 경기장에서는 지역 주민들과 인근 누케리아에서 온 관람객들 사이에 벌어진 욕설이 집단적인 돌팔매질과 폭동으로 번졌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네로 황제는 폼페이에서의 검투 경기 개최를 10년간 금지하는 처벌을 내렸다.[204] 이는 관중의 행동이 경기 자체의 개최 여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관중, 특히 로마의 민중은 검투 경기를 무료로 관람할 권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공화정 말기부터 표를 판매하기도 했지만[309], 무료 관람은 기본적인 권리로 인식되었다. 기원전 122년경, 일부 특권층이 유료 관람석을 설치하려 하자 당시 호민관이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민중의 편에 서서 이를 강제로 철거시키고 무료 관람을 보장하기도 했다.[310] 이는 검투 경기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로마 사회의 정치, 사회적 역학 관계를 반영하는 중요한 장이었음을 시사한다.
5. 검투사의 종류
(Thraex)
구부러진 모양의 시카(Sica)나 팍스(Falx)를 무기로 사용했다. 작은 원형 또는 사각형 방패인 파르물라(parmula)를 들고, 양쪽 다리에는 허벅지까지 오는 다리 보호대를 착용했다.[351] 머리에는 크레스트(Crest, 닭 벼슬 모양 장식)가 붙고 그리핀이 새겨진 투구를 썼으며, 화려한 깃털 장식이 달려 있었다.[352]
기원전 1세기에 등장했으며,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가 이 유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53]

(Samnis)
커다란 크레스트 장식이 붙은 투구를 쓰고, 긴 직사각형 방패(스쿠툼)와 짧은 검, 혹은 창을 들었으며, 왼쪽 다리에 다리 보호대를 착용한 중장비 검투사였다.[354]
갈리(Galli, 갈리아인 풍의 검투사)와 함께 기원전 2세기에 등장한 초기 형태이다.[371] 무르밀로가 등장하면서 삼니테는 점차 줄어들었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는 대부분 사라졌다.[355]

(Murmillo)
로마 군단 병사용 직사각형 긴 방패(스쿠툼)를 들고 글라디우스를 무기로 사용했다. 팔 보호대(manica)를 착용했으며, 성기 보호구와 벨트를 착용했다. 오른쪽 다리에는 발등까지 덮는 두꺼운 각반을 착용하고, 발등 보호를 위해 매우 짧은 다리 보호대를 덧붙였다.[356][357] 폼페이 유적의 낙서에는 삼지창을 든 무르밀로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358]
레티아리우스와 자주 싸웠다고 여겨지나, 역사 자료에서 레티아리우스와의 시합 기록은 적다.[357] 주로 트라케스나 호플로마키와 함께 싸웠다.[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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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iarius)
아우구스투스 시대 초기에 발전했으며, 맨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에 용모가 준수한 젊은이들이 많았다고 한다.[361]
(Secutor)
주로 레티아리우스와 싸웠기 때문에, 그물에 걸리지 않도록 투구는 장식이 적고 둥글고 매끄러웠다. 또한 두 개의 작은 눈구멍을 제외하고 얼굴 전체를 투구로 보호했다.[362][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