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타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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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리타니아는 로마가 브리튼 섬을 지칭한 이름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원정을 시작으로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에 본격적인 정복이 이루어졌으며, 브리타니아 속주가 설치되었다. 로마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브리타니아를 통치하며 도로, 도시, 행정 체제를 구축했다. 브리튼인들의 저항과 반란, 그리고 4세기의 위기를 거치며 로마의 지배는 점차 약화되었고, 410년 이후 로마 군단의 철수와 함께 브리타니아는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 로마의 지배는 도로망, 도시 건설 등 다양한 유산을 남겼지만, 언어는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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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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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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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브리타니아 속주 |
통칭 | 로마령 브리타니아 |
국가 | 로마 제국 |
시대 | 고대 |
수도 | 카물로두눔 론디니움 |
총독 | 총독 |
설치 년도 | 43년 |
설치 사건 | 클라우디우스에 의한 합병 |
해체 년도 | 410년경 |
해체 사건 | 로마 통치 종료 |
현재 국가 | 영국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
이전 국가 | 브리튼 철기 시대 |
다음 국가 | 탈 로마 브리튼 |
역사 | |
분할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 분할 (197년경) 4세기 초 분할 (312년경) |
기타 | |
브리타니아 로마자 표기 | Britannia |
데모님 | 브리튼인 |
2. 로마의 브리타니아 정복과 통치
로마 제국과 브리타니아의 관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5년과 기원전 54년에 두 차례 원정을 감행하면서 시작되었으나, 이는 본격적인 정복보다는 로마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준에 그쳤다.[14][15]
본격적인 브리타니아 정복은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에 이루어졌다. 로마는 카투벨라우니족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아트레바테스족의 왕 베리카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침공을 시작했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가 지휘하는 약 4만 명의 로마 군대는[24] 켄트 해안 등에 상륙하여[29] 메드웨이 강 전투와 템스 강 전투에서 브리튼족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직접 카물로두눔(현재의 콜체스터) 점령을 마무리하고 브리타니아 속주 설치를 공식 선포했다.
로마의 초기 통치는 브리타니아 남동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미래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등이 남서부 지역으로 점령지를 넓혀나갔다.[30] 로마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속주를 통치했으며, 주요 지역에 로마 군단을 주둔시키고 복속된 부족들을 로마식 행정 단위인 civitasla로 재편하여 관리했다. 한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코기두브누스와 같은 일부 브리튼족 지도자들을 우호적인 왕으로 인정하여 간접 통치를 활용하기도 했다.[31]
그러나 로마의 지배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웨일스 지역에서는 카라타쿠스가 이끄는 실루레스족 등이 완강하게 저항했으며,[33] 60-61년에는 이케니족의 여왕 부디카가 로마의 착취와 폭정에 반발하여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카물로두눔, 론디니움(런던), 베룰라미움(세인트올번스) 등을 파괴하기도 했다.[34][35] 로마는 이러한 저항들을 군사력으로 진압했으며, 가이우스 스웨토니우스 파울리누스 총독은 앵글시 섬의 드루이드교 중심지를 파괴하기도 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이후 로마는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총독의 지휘 아래 스코틀랜드 북부까지 진출하여 그라우피우스 산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다.[38] 하지만 북부 지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는 어려웠고, 결국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서기 122년경 브리타니아 북부 경계에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건설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기에 잠시 더 북쪽에 안토니누스 장벽을 쌓기도 했으나, 지속적인 반란과 관리의 어려움으로 인해 다시 하드리아누스 장벽으로 국경선이 후퇴했다. 이처럼 로마의 브리타니아 통치는 정복과 저항, 그리고 국경 지역에서의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는 과정이었다.
2. 1. 초기 접촉과 카이사르의 원정
브리타니아는 고대 세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들은 기원전 4세기에 콘월 지역의 주석을 거래했다.[11] 그리스인들은 이 지역을 ''(주석 섬)라 부르며 유럽 서해안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12] 카르타고의 항해사 히밀코는 기원전 6세기 또는 5세기에, 그리스 탐험가 피테아스는 기원전 4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브리타니아는 신비로운 곳으로 여겨져 일부 저술가들은 그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다.[13]로마와 브리타니아가 처음으로 직접 접촉한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 중이던 기원전 55년과 기원전 54년에 두 차례 원정을 감행했을 때이다.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인들이 갈리아의 저항 세력을 돕고 있다고 판단하여 원정을 결정했다. 첫 번째 원정(기원전 55년)은 완전한 침략이라기보다는 정찰에 가까웠고, 켄트 해안에 발판을 마련했지만, 폭풍으로 인한 선박 피해와 기병 부족으로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군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는 정치적 성공이었다. 로마 상원은 브리타니아에서 인질을 확보하고 대륙으로 돌아오는 길에 벨기 부족을 물리친 카이사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로마에서 20일간의 공휴일을 선포했다.[14]
두 번째 원정(기원전 54년)에는 훨씬 더 큰 병력이 투입되었고, 카이사르는 많은 토착 켈트 부족들에게 평화를 대가로 조공을 바치고 인질을 제공하도록 강요하거나 초청했다. 친로마적인 현지 왕 만두브라키우스가 임명되었고, 그의 경쟁자 카시벨라우누스는 항복했다. 인질이 잡혔지만,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돌아간 후 조공이 지불되었는지 여부에 대해 역사가들의 의견이 분분하다.[15]
카이사르는 영토를 정복하거나 병력을 남기지 않았지만, 의뢰인을 확보하고 브리타니아를 로마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34년, 27년, 25년에 침략을 계획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실행하지 못했고,[16] 브리타니아와 로마의 관계는 외교와 무역의 관계로 자리 잡았다.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기에 저술한 스트라보는 무역세가 정복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연간 수입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17] 고고학적 증거는 영국 남동부에서 수입 사치품이 증가했음을 보여준다.[18] 스트라보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사절을 보낸 브리타니아 왕들을 언급했고, 아우구스투스 자신의 ''Res Gestaela''는 그가 난민으로 받아들인 두 명의 브리타니아 왕을 언급한다.[19] 기원후 16년 티베리우스의 일부 함선이 게르마니아 원정 중 폭풍에 휩쓸려 브리타니아로 표류했을 때, 그들은 괴물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왔다.[20]
로마는 브리타니아 남부에서 카투벨라우니(타시오바누스의 후손이 통치)와 아트레바테스(콤미우스의 후손이 통치) 두 강력한 왕국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21] 이 정책은 기원후 39년 또는 40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때 칼리굴라가 카투벨라우니 왕조의 망명자를 받아들이고 브리타니아 침략을 계획했지만, 갈리아를 떠나기도 전에 다소 우스꽝스러운 상황 속에서 무산되었다.[22][23] 클라우디우스가 기원후 43년에 성공적으로 침략했을 때, 그것은 아트레바테스의 또 다른 도망친 통치자 베리카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2. 2.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정복과 속주화
서기 40년 칼리굴라 황제가 브리타니아 침공을 계획했으나, 현실성이 부족하여 실행되지 못했다.[22][23] 이후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카투벨라우니족에게 쫓겨난 아트레바테스족의 왕 베리카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단행했다.침공군의 총사령관은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였으며,[24] 약 4개의 로마 군단으로 구성된 약 4만 명의 로마 군대가 동원되었다. 참전이 확실히 증명된 군단은 미래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지휘한 Legio II Augusta|제2 아우구스타 군단la이다.[25] Legio IX Hispana|제9 히스파니아 군단la,[26] XIV Gemina|제14 게미나 군단la(후에 Martia Victrix|마르티아 빅트릭스la로 개칭), 그리고 XX Valeria Victrix|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la[27] 역시 부디카의 봉기(60/61년) 당시 브리타니아에 주둔했던 것으로 보아 초기 침공부터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로마 군대는 필요에 따라 부대가 이동했기 때문에 초기 침공 당시의 정확한 군단 구성은 불확실하다. IX Hispana|제9 히스파니아 군단la은 이후 에보라쿰(요크)에 주둔했으며(71년 기록), 108년 건물 비문이 발견된 후 제국 동쪽에서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28]

침공은 군대의 반란으로 잠시 지연되었으나, 황제의 해방노예가 병사들을 설득하여 원정은 시작되었다. 로마군은 세 개의 부대로 나뉘어 항해했으며, 주력 부대는 켄트의 리치보로에 상륙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는 서섹스주 피시번 근처에 상륙했을 수도 있다.[29]
로마군은 카투벨라우니족과 그들의 동맹군을 상대로 두 차례의 큰 전투에서 승리했다. 첫 전투는 메드웨이 강 유역에서, 두 번째 전투는 템스 강 유역에서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브리튼족 지도자 중 한 명인 토고두므누스가 전사했지만, 그의 형제인 카라타쿠스는 항복하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 저항을 이어나갔다. 플라우티우스는 템스 강에서 진격을 멈추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코끼리를 포함한 지원군과 함께 브리타니아에 도착하여, 카투벨라우니족의 수도인 카물로두눔(현재의 콜체스터)으로 향하는 최종 진군을 지휘했다. 카물로두눔이 함락된 후, 클라우디우스는 그곳에서 브리타니아 속주 설치를 선포했다. 이로써 서기 43년 브리타니아는 공식적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초기 점령 지역은 카물로두눔(후에 로마 식민지가 됨)을 중심으로 한 남동부 일대에 한정되었지만, 로마는 점차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군단은 남서부 지역을 정복했으며,[30]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코기두브누스와 같은 일부 브리튼인 지도자들은 로마의 우호적인 왕으로 임명되어 간접 통치를 받았다.[31] 로마는 직접 통제하지 않는 다른 부족들과도 조약을 맺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리처드 힝글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원정부터 하드리아누스 장벽 건설까지 이어지는 로마의 브리타니아 정복 과정이 결코 순탄하거나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된 복잡한 과정이었음을 지적했다.[32]
2. 3. 로마 통치 체제와 원주민 저항


브리타니아 속주는 기본적으로 압도적인 군사력에 기반한 통치 체제였다. 서기 43년,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다.[24] 당시 파병된 군단의 정확한 수는 불분명하지만, 미래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지휘한 Legio II Augustala의 참전은 확인되었다.[25] 이후 부디카의 봉기(60/61년) 당시에는 Legio IX Hispanala,[26] XIV Geminala(후에 Martia Victrixla로 개칭), XXla(후에 Valeria Victrixla로 개칭) 군단이 복무 중이었던 것으로 보아[27] 초기 침공부터 주둔했을 가능성이 높다. IX Hispanala 군단은 71년 에보라쿰(요크)에 주둔했고, 108년 건물 비문이 발견되었으나 이후 제국 동쪽에서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28]
침공은 군대의 반란으로 잠시 지연되었으나, 황제의 해방노예가 병사들의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설득한 후 재개되었다. 로마군은 세 부대로 나뉘어 항해했으며, 켄트의 리치보로에 상륙했을 가능성이 높고, 일부는 서섹스주 피시번 근처에 상륙했을 수도 있다.[29]
카투벨라우니족과 동맹군은 메드웨이 강 전투와 템스 강 전투에서 패배했다. 지도자 토고두므누스는 전사했으나 그의 형제 카라타쿠스는 저항을 이어나갔다. 플라우티우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황제는 코끼리 부대까지 포함한 증원군과 함께 도착하여 카투벨라우니족의 수도 카물로두눔(콜체스터)을 점령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남서부를 정복했고,[30] 코기두브누스와 같은 일부 브리튼 지도자들은 로마와 협력하는 왕으로 임명되었다.[31]
로마의 통치는 군사력에 크게 의존했다. 총독에는 군단장 경험이 있는 인물들이 임명되었고, 카물로두눔은 예비역 병사들을 위한 식민 도시로 건설되었다. 주요 군단 주둔지는 다음과 같이 설치되어 각 지역의 방어와 내부 감시를 담당했다.
주둔지 위치 | 로마 시대 명칭 | 현재 지명 | 담당 지역 |
---|---|---|---|
콘월 지방 | 이스카 두므노니오룸 (Isca Dumnoniorum) | 엑서터 | 남서부 |
웨일스 남부 | 이스카 실룸 (Isca Silurum) | 카얼리온 | 웨일스 남부 |
노섬브리아 | 에보라쿰 (Eboracum) | 요크 | 북부 |
웨일스 북부 | 데우아 (Deva) | 체스터 | 웨일스 북부 및 중부 |
로마 제국은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침공을 시작으로 약 4세기 동안 브리타니아 섬의 상당 부분을 통치했다. 이 시기 브리타니아는 로마 속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겪었다. 로마의 통치는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으며, 섬 곳곳에 군단 기지와 로마식 도시가 건설되었다. 로마 행정 체계가 도입되어 세금이 징수되었고, 때로는 현지 부족과의 갈등으로 부디카의 반란과 같은 대규모 저항이 일어나기도 했다.[34][35] 시간이 흐르면서 브리타니아는 행정적으로 여러 속주로 분할되었고, 군사 지휘권과 행정권이 분리되는 등 통치 구조에도 변화가 있었다.
행정적으로 로마는 복속시킨 부족들을 로마식 행정 단위인 '키위타스'(civitasla)로 개편하여 세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순종적인 부족의 권리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며, 로마에 협력한 이케니족, 아트레바테스족, 레그니족 등은 일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부족도 왕위 계승자가 없으면 로마에 강제 병합되었다.
로마의 지배에 대한 원주민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섬 남부를 점령한 로마는 현재의 웨일스 지역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실루레스족, 오르도비케스족, 데케앙글리족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실루레스족은 카라타쿠스의 지휘 아래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펼쳤다. 51년, 총독 푸블리우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는 카라타쿠스의 최후의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켰다. 카라타쿠스는 브리간테스족에게 피신했으나, 여왕 카르티만두아는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그를 넘겨주었다. 로마로 압송된 카라타쿠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앞에서 연설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실루레스족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카르티만두아의 전 남편 베누티우스가 새로운 저항의 중심인물이 되었다.[33]
네로 황제 시대, 총독 가이우스 스웨토니우스 파울리누스는 60-61년에 앵글시(모나)를 공격하여 드루이드교의 중심지를 파괴하고 드루이드들을 학살했다. 파울리누스가 앵글시 원정 중일 때, 브리튼 남동부에서는 부디카가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부디카는 최근 사망한 이케니족 왕 프라수타구스의 미망인이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프라수타구스는 왕국의 절반을 네로에게 유증하여 나머지를 보존하려 했다. 그러나 로마는 그의 유언을 무시하고 왕국 전체를 몰수했다. 부디카가 이에 항의하자 로마는 그녀와 딸들을 채찍질하고 모욕했다. 분노한 이케니족은 트리노반테스족과 연합하여 봉기했고, 로마 식민지 카물로두눔(콜체스터)을 파괴하고 주둔군을 격파했다. 반란군은 이어 론디니움(런던)과 베룰라미움(세인트올번스)까지 파괴하며 약 7만에서 8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파울리누스는 급히 돌아와 왓링가 스트리트 전투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부디카는 패배 후 자살하거나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34][35] 이 사건으로 네로 황제는 브리타니아에서 로마군을 완전히 철수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36]
69년 "네 황제의 해"의 혼란기에 브리간테스족의 베누티우스가 다시 봉기하여 북부를 장악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제국을 안정시킨 후, 총독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와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가 각각 브리간테스족과 실루레스족을 진압했다.[37] 프론티누스는 남웨일스 전역으로 로마 지배를 확장하고 돌라우코티 금광과 같은 광물 자원 개발을 시작했다.
이후 총독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타키투스의 장인)는 78년에 오르도비케스족을 정복하고, 84년에는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그라우피우스 산 전투에서 칼레도니아인을 격파하며 로마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다.[38] 그러나 아그리콜라는 곧 로마로 소환되었고, 87년경 로마는 체비엇 힐스 북쪽 대부분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39] 국경은 스테인게이트 선으로 후퇴했다. 빈돌란다 요새에서 발견된 필기판들은 이 시기 로마 변방 요새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105년경 북부에서 피크트족에게 심각한 패배를 겪은 정황이 있으며, 일부 로마 요새가 파괴되었다. 국경은 솔웨이-타인 지협의 스테인게이트 선으로 더 남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통치 초기(117년)에도 북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퀸투스 폼페이우스 팔코가 진압했다. 120년경 브리타니아를 방문한 하드리아누스는 스테인게이트 국경선 근처에 하드리아누스 장벽 건설을 지시했다. 이 공사를 위해 아울루스 플라토리우스 네포스 총독이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에서 제6 빅트릭스 군단(Legio VI Victrixla)을 데려왔는데, 이는 기록에서 사라진 제9 히스파니아 군단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138-161)에는 퀸투스 롤리우스 우르비쿠스 총독이 스코틀랜드 저지대를 다시 점령하고 142년경 안토니누스 장벽을 건설하여 국경을 잠시 북쪽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155-157년 브리간테스족의 반란으로 첫 번째 점령이 끝나고,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총독이 반란을 진압했다. 안토니누스 장벽은 잠시 탈환되었으나 163년 또는 164년에 최종적으로 포기되고 국경은 다시 하드리아누스 장벽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뉴스테드 등 일부 북부 요새는 180년경까지 유지되었다.
180년에는 피크트족이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돌파하여 지휘관이 전사하는 등 북부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카시우스 디오는 이를 코모두스 통치 시대의 가장 심각한 전쟁이라고 묘사했다. 울피우스 마르켈루스 총독이 파견되어 평화를 회복했으나, 곧 병사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병사들은 로마까지 1,500명의 대표단을 보내 자신들에게 부당하게 하급 기병 계급 인물을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프라이토리아 근위대 대장 티기디우스 페레니스의 처형을 요구하기도 했다. 미래의 황제 페르티낙스가 총독으로 부임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그 역시 병사들의 폭동으로 위험에 처했고 로마로 소환을 요청했다.
브리타니아에는 많은 군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황제는 신뢰할 수 있는 노련한 인물을 총독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베스파시아누스, 페르티낙스, 고르디아누스 1세 등 여러 미래의 황제들이 브리타니아 총독이나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년 로마 황제 자리를 놓고 세베루스와 다툰 클라우디우스 알비누스도 브리타니아 총독이었다.
3. 로마 통치하의 브리타니아
경제적으로는 광업(특히 금, 납, 주석)과 농업이 발달했으며,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과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졌다.[65][66] 로마식 빌라(Villa)가 건설되고 도로망이 정비되면서 농촌 사회의 모습도 변화했다. 사회적으로는 로마인, 브리튼 원주민, 그리고 제국 각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함께 살아가며 다문화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83][84]
문화적으로는 토착 켈트족의 드루이드 신앙이 억압받는 대신 로마 다신교와 로마 황제 숭배가 도입되었으며, 미트라교와 같은 동방 종교도 유입되었다. 기독교 역시 점차 전파되어 4세기에는 주요 종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99][100] 로마의 브리타니아 지배는 5세기 초 로마 군단의 철수와 함께 막을 내렸지만, 로마 시대의 유산은 이후 브리타니아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3. 1. 정치와 행정
로마의 브리타니아 속주 통치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37] 총독은 군단장이나 그에 준하는 군사 경험을 가진 인물이 임명되었으며,[37] 카물로두눔(현재 콜체스터)과 같은 도시는 로마 예비역 병사들을 위한 식민 도시로 건설되었다. 속주 방위와 내부 감시를 위해 콘월의 이스카 두므노니오룸(엑서터), 웨일스 남부의 이스카 실룸(카얼레온), 북부의 에보라쿰(요크), 웨일스 북부의 데바(체스터) 등에 군단 기지가 설치되었다. 행정적으로는 로마에 복속된 각 부족을 기반으로 civitas|키위타스la라는 로마식 행정 단위를 설정하고 세금을 부과했다. 로마에 순응하는 부족의 권리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며, 이케니족, 아트레바테스족, 레그니족처럼 로마에 협력한 부족은 일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기도 했으나, 왕위 계승이 중단되면 로마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들 지역을 속주 영토로 강제 편입시켰다. 부디카가 이끈 대규모 반란 역시 이러한 이케니족 병합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34][35]
브리타니아에는 많은 로마 군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황제는 신뢰할 수 있는 고위 인물을 총독으로 임명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 페르티낙스, 고르디아누스 1세 등 훗날 황제가 된 인물들이 브리타니아 총독이나 사령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총독은 때로 로마 중앙 정부에 위협이 되기도 했다. 193년 다섯 황제의 해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황제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당시 브리타니아 총독이었다. 알비누스는 세 개의 군단을 지휘하며 강력한 권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나, 196년 갈리아의 루그두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세베루스에게 패배하고 자살했다.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브리타니아 총독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속주를 브리타니아 수페리오르(상 브리타니아)와 브리타니아 인페리오르(하 브리타니아)의 두 개로 분할했다. 이 조치는 약 한 세기 동안 브리타니아에서 총독에 의한 대규모 반란 시도를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카라우시우스의 반란(286년-296년) 이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브리타니아의 행정 체계를 다시 개편했다. 312년경 실시된 개혁으로 브리타니아 전체를 관할하는 교구(Diocese of Britannia)가 설치되었고, 이 교구는 다시 네 개의 속주, 즉 브리타니아 I, 브리타니아 II, 막시마 카이사리엔시스, 플라비아 카이사리엔시스로 나뉘었다.[41] 이 교구는 런디니움(Londinium, 현재 런던)에 본부를 둔 비카리우스(Vicarius)가 통치했다.[41] 각 속주는 초기에 praeses|프라에세스la라는 기수 계급의 주지사가 다스렸다.
이 시기에는 행정권과 군사 지휘권이 분리되는 중요한 변화도 있었다. 314년경까지 속주 주지사는 군 지휘권을 상실했고, 군사적 책임은 새로 설치된 Dux Britanniarum|둑스 브리타니아룸la에게 넘어갔다. 둑스는 주로 북부 국경 지역인 하드리아누스 장벽 일대의 군대를 지휘했으며, 지리적 거리 때문에 상당한 자율성을 가졌다.[42] 비카리우스는 속주 주지사들의 활동을 감독하고 조정하며, 재무 및 황실 재산 관리를 감시하고, 군대의 지역 부사령관 역할도 수행했다.
4세기 후반에는 발렌티아(Valentia)라는 다섯 번째 속주가 추가되었다. 역사가 암미아누스에 따르면, 발렌티아는 369년 테오도시우스 백작이 대 음모라 불리는 브리타니아의 대규모 반란과 침입을 진압한 후 설치되었다.[43] 암미아누스는 이를 "이전에 사라졌던 속주의 재건"이라고 언급했는데,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발렌티아가 이전에 다른 이름으로 존재했던 속주일 가능성(예: 베스파시아나)[44]을 제기하거나, 하드리아누스 장벽 너머의 버려진 영토에 새로 설치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5세기 기록에 따르면, 막시마 카이사리엔시스와 발렌티아의 주지사는 더 높은 집정관 계급(Consularis|콘술라리스la)이었다.
이들 속주의 정확한 경계와 수도 위치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314년 아를 공의회에 참석한 브리타니아 주교들의 명단이 중요한 단서가 되지만, 기록 자체에 오류가 있어 해석이 분분하다.[45] 예를 들어, 명단에는 에보라쿰(요크)의 주교 외에 런던 출신 주교가 두 명(de civitate Londinensila와 de civitate colonia Londinensiumla)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필사 오류로 보고 콜체스터, 링컨, 카얼레온 등 다른 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수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46][47][48][50][51][52][53][54] 현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교구 행정 중심지였던 런디니움(런던)을 막시마 카이사리엔시스의 수도로, 웨일스와 서부 지역을 포함하는 브리타니아 프리마의 수도는 코리니움 도부노룸(시렌체스터)으로, 막시마 북쪽의 플라비아 카이사리엔시스 수도는 린둠 콜로니아(링컨)으로, 가장 북쪽의 브리타니아 세쿤다 수도는 에보라쿰(요크)으로 추정한다. 발렌티아의 위치는 여전히 불확실하여, 체스터 주변, 하드리아누스 장벽 근처의 루구발리움(칼라일) 주변, 또는 두 장벽 사이 지역 등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3. 2. 경제와 사회
로마 시대 브리타니아의 경제는 광업, 농업,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과의 활발한 무역을 통해 유지되었다. 사회적으로는 로마식 도시와 빌라(Villa)가 건설되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변화를 겪었다.
=== 광업 ===
브리타니아는 금, 은, 납, 철, 주석 등 광물 자원이 풍부하여 로마인들에게 중요한 지역이었다. 로마인들은 새로운 기술과 대규모 산업 생산 방식을 도입하여 기존의 광업을 혁신했다. 특히 수력 채굴 방식은 표토를 제거하여 광맥을 찾거나 사광상을 채굴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를 위해 여러 개의 수도교가 건설되었으며, 웨일스의 돌라우코시 금광 유적은 당시의 발달된 기술 수준을 잘 보여준다.[77] 돌라우코시 금광은 기원후 75년경 로마 군대에 의해 처음 개발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민간 운영자에게 넘어갔다. 노천 채굴이 어려워지자 광맥을 따라 터널을 뚫는 방식이 사용되었다.[77] 위얼드의 제철 지역, 멘딥힐스의 납과 은 광산, 콘월의 주석 광산 등은 로마 정부로부터 운영권을 임대한 민간 기업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물 자원 확보는 로마가 브리타니아를 침략한 주요 동기 중 하나였을 수 있지만, 광산 개발은 해당 지역이 로마의 통제하에 들어간 이후 본격화되었다.[78]
=== 농업과 수공업 ===
4세기 저지대 브리타니아의 농업은 크게 번성하여 대륙으로 곡물을 수출할 정도였다. 이러한 농업 생산력의 증가는 300년에서 350년 사이에 로마식 빌라 건설과 장식이 활발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브리타니아의 도시들은 로마식 토기와 같은 상품의 소비 중심지이자 유통 거점 역할을 했다. 슈롭셔의 웍세터(비로코니움 코르노비오룸) 유적에서는 2세기 화재 당시 배수구에 버려진 상품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갈리아 남부에서 생산된 붉은 광택의 테라 시길라타la(사미안 웨어)와 웨스트 미들랜즈 지역에서 생산된 도자기들이 함께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양식이 인기를 얻었으나, 농촌의 장인들은 여전히 철기 시대 라 텐 예술 전통에 기반한 물품을 생산했다. 3세기에 이르면 브리타니아의 경제는 다양화되고 안정되었으며, 상업 활동은 로마화되지 않은 북부 지역까지 확장되었다.[79]
=== 무역 ===
로마 시대 브리타니아와 대륙 간의 무역은 주로 남부 북해와 동쪽 영국 해협, 특히 도버 해협을 통해 이루어졌다. 대서양 항로를 통한 교역은 제한적이었다.[65][66][67] 브리타니아의 가장 중요한 항구는 론디니움(현재의 런던)과 리치보로(루투피아이)였으며, 대륙에서는 불로뉴(게소리아쿰)와 셸트강 어귀의 돔부르크, 콜린스플라트 등이 주요 교역 상대 항구였다.[65][66] 로마 후기에는 색슨 해안 요새들이 방어 기능과 더불어 무역에서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5][68]
브리타니아로 수입된 주요 품목은 로마 동전, 토기(특히 갈리아산 테라 시길라타), 남부 스페인산 올리브 오일, 갈리아산 포도주, 서부 지중해와 브르타뉴산 소금에 절인 생선, 남부 스페인산 절인 올리브, 라인강 중류 지역 마이엔산 현무암 맷돌, 유리 제품 등이었다.[65][66][69][70][71][72] 반면 브리타니아에서는 금, 은, 납, 철, 구리 등의 금속과 농산물, 굴, 소금 등을 수출했으며, 상당량의 화폐가 대륙으로 재수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65][70][71][73]
이러한 무역은 민간 상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정부가 브리타니아 주둔군과 관리들을 지원하기 위한 물품 보급 및 조세 징수 과정에서도 이루어졌다.[65][73] 특히 3세기 중반까지는 약 5만 3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브리타니아로 보내지는 물품의 양이 섬에서 나가는 양보다 훨씬 많았다.[65][73]
브리타니아의 대륙 무역은 1세기 후반에 정점을 찍은 후 점차 감소했는데, 이는 브리타니아 내부 경제 발전으로 지역 상품 의존도가 높아지고, 로마 정부가 비용 절감을 위해 장거리 수입을 줄였기 때문으로 분석된다.[70][72][73][74] 특히 서기 165년 이후 2세기 후반에 무역량이 크게 감소했다는 증거가 있는데, 이는 당시 로마 제국 전역을 휩쓴 안토니누스 역병과 마르코만니 전쟁의 경제적 여파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65]
하지만 3세기 중반 이후에는 상황이 다시 변했다. 비록 로마 시대 초기에 비해 수입품의 종류와 양은 줄었지만, 대륙에서 주조된 많은 양의 화폐가 브리타니아로 유입되었고, 4세기 중반에는 브리타니아산 곡물이 대량으로 대륙에 수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65][71][75][76] 이는 3세기 중반 이후 브리타니아 주둔군의 규모가 크게 줄어들고(수출 여력 증가), 라인강 너머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북부 갈리아의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브리타니아 농산물이 북서부 대륙의 군대와 도시를 지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65][71][75]
=== 경제의 변화와 쇠퇴 ===
5세기 초 브리타니아 경제가 광범위하게 침체되었다는 것이 미하일 로스토프체프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기존의 견해였으나, 최근 고고학적 증거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며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도시의 집들은 더 호화로워졌지만 수는 줄었고, 방어 시설을 제외한 새로운 공공 건물 건설은 중단되었으며 일부 기존 건물은 폐기되었다. 도시 내 농경 활동을 시사하는 '흑색토' 퇴적물이 넓게 형성되기도 했다.[60] 3세기 후반 실체스터(칼레바 아트레바툼)의 바실리카가 산업 용도로 전환된 것은 로마 브리타니아 도시화 해체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간주된다.[61]
일부 유적지의 폐기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늦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많은 건물이 용도 변경되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다. 야만인의 공격이 증가했지만 주로 도시보다는 취약한 시골 마을을 표적으로 삼았다. 체드워스, 러틀랜드의 그레이트 캐스터턴, 글로스터셔의 허클코트와 같은 일부 빌라에서는 이 시기에도 새로운 모자이크 바닥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경제적 어려움이 제한적이고 부분적이었음을 시사한다. 5세기에 버려지기 전에 많은 빌라가 어느 정도 쇠퇴했지만, 성 파트릭의 기록은 빌라가 적어도 430년까지 계속 점유되었음을 시사한다. 베룰라미움(세인트 올번스)과 시렌체스터(코리니움) 같은 일부 도시 중심지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고, 캔터베리, 시렌체스터, 웍세터, 윈체스터, 글로스터 등 일부 도시는 5세기와 6세기까지도 주변 농장들과 함께 경제 활동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생활은 전반적으로 4세기 4분기에 활기를 잃었다. 378년에서 388년 사이에 주조된 동전은 매우 드물게 발견되는데, 이는 경제 침체, 군인 수 감소, 급여 지급 문제, 또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찬탈(383-387년) 기간 동안의 불안정한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 390년대에 화폐 유통이 다시 증가했지만 이전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402년 이후 구리 동전은 매우 드물어졌고, 매장된 은화와 금화는 화폐가 여전히 존재했음을 보여주지만, 430년경에는 화폐가 교환 수단으로서 기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량 생산되던 도자기도 비슷한 시기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부유층은 금속이나 유리 용기를 계속 사용했지만, 빈민층은 소박한 회색 토기나 가죽 또는 나무 용기에 의존했다.
=== 도시와 농촌 사회 ===
로마 지배 하에 브리타니아에는 많은 도시와 정착지가 세워졌다. 로마식 도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civitatesla(공공 도시)로, 격자형 계획에 따라 건설되었으며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공공 건물들을 갖추었다. 콜체스터(카물로두눔), 링컨(린둠 콜로니아), 글로스터(글레붐), 요크(에보라쿰)와 같은 coloniaela(식민 도시)와 베룰라미움과 같은 municipiala(자치 도시)가 여기에 속한다.[89] 다른 하나는 vicila(소도시)로, 훨씬 수가 많았으며 군사 기지 주변이나 교통 요지에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어 비정형적인 구조를 가졌다. 일부 비쿠스는 규모가 상당히 컸지만, 성벽과 같은 방어 시설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90]
콜체스터가 브리타니아의 첫 수도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곧 상업 중심지인 론디니움(런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4세기 후반에는 공공 건물 건설이 중단되고 일부는 사유지로 바뀌는 등 도시가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농촌 지역에서는 3세기 후반부터 빌라(대규모 농장 저택) 근처에 작은 마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마을들은 빌라 소유주와 소규모 농부들이 전문 도구나 서비스를 구할 수 있는 장소였을 것이다. 4세기 농업의 번영은 빌라 건축과 장식의 발전을 이끌었다.
=== 인구 구성 ===
2세기 말 로마 브리타니아의 인구는 약 28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추산된다. 4세기 말에는 약 36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이 중 약 12만 5천 명은 로마 군대와 그 가족들이었다.[81] 4세기 말 도시 인구는 약 24만 명으로 추산되며[81], 수도 론디니움(런던)의 인구는 약 6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82] 런던은 로마 제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 브리타니아 원주민, 유럽 대륙, 중동, 북아프리카 출신 주민들이 함께 사는 다문화적인 도시였다.[83] 다른 로마-브리타니아 도시들 역시 브리타니아 원주민 외에 유럽 대륙, 시리아, 동지중해, 북아프리카 등 다양한 지역 출신 이주민들로 인해 문화적 다양성을 보였다.[84][85] 2012년 연구에 따르면 로마 시대 유적지의 약 45%에서 최소 한 명 이상의 북아프리카 출신 인물이 확인되었다.[86][87]
3. 3. 문화와 종교
브리타니아 토착 켈트족의 사제 계급인 드루이드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금지되었으며,[92] 61년에는 앵글시(모나 섬)에서 로마인들에 의해 그들의 신성한 숲이 파괴되었다.[94] 로마 지배 하에서도 브리튼인들은 안카스타와 같은 토착 켈트 신들을 계속 숭배했으며, 종종 로마 신들과 혼합하여 숭배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넷틀햄에서는 마르스 리고네메토스라는 신격이 숭배되었다.
토착 신앙이 로마 시대에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숫자 3의 중요성, 머리나 샘과 같은 수원의 신성시 등 특정 유럽 의례적 특징은 고고학 기록에 남아 있다. 하지만 서머싯주 배스의 목욕탕에서 발견된 봉헌물을 보면 로마 정복 전후로 변화가 나타나, 토착 신앙의 연속성이 부분적이었음을 시사한다. 로마 황제 숭배는 특히 군사 시설에서 널리 행해졌으며, 카물로두눔(콜체스터)에 클라우디우스를 위한 로마 신전을 건립한 것은 부디카 반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3세기에 이르러 서머싯의 파건힐 로마 신전은 5세기까지 평화롭게 존재할 수 있었다. 이교도 종교 의례는 사제들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브리타니아에서는 웨스트 스토우와 윌링엄 펜에서 발견된 사제 복장 봉헌물(체인 크라운 등)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95]
미트라교와 같은 동방 종교들도 로마 점령 말기에 인기를 얻었다. 런던 미트라 신전의 존재는 군인들 사이에서 신비 종교가 유행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미트라 신전은 하드리아누스 장벽 근처의 빈도발라(루드체스터 미트라 신전)나 로마 시대 웨일스의 세곤티움(카에르나르폰 미트라 신전)과 같은 군사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기독교가 브리타니아에 언제 어떻게 전래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2세기 맘무키움(현재의 맨체스터)에서 발견된 "단어 사각형"은[97] PATER NOSTER의 아나그램으로 해석되어 초기 기독교의 증거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논쟁이 있다.[98] 브리타니아 기독교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은 서기 200년경 테르툴리아누스의 글로, 그는 "로마인들에게 접근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브리튼인들의 거주지"를 언급했다.[99]
기독교 공동체의 고고학적 증거는 3세기와 4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링컨과 실체스터에는 작은 목조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클링엄과 색슨 해안 요새인 리치보로에서는 세례반이 발견되었다. 이클링엄에서 발견된 납 세례반은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같은 장소에서 로마 시대 기독교인 묘지도 확인되었다. 콜체스터 외곽에서도 4세기 로마 시대 교회와 관련된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워터 뉴턴 보물은 4세기 초 기독교 은제 교회 용품이며, 루링스톤과 힌턴 세인트 메리의 로마 빌라에서는 각각 기독교 벽화와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다. 동서 방향으로 매장되고 묘지품이 없는 파운드버리의 대규모 4세기 묘지는 초기 기독교 매장지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당시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매장 방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브리타니아 교회는 교구 제도를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314년 갈리아에서 열린 아를 공의회에는 브리타니아에서 세 명의 주교가 참석했는데, 요크의 에보리우스, 런던의 레스티투투스, 그리고 아마도 링컨 주교였을 아델피우스가 그들이다.[100] 초기 교회 건물의 유물은 찾기 어려우나,[100] 링컨의 포럼 안뜰에 있던 교회와 로마 베룰라미움 외곽에 있던 세인트 올번의 martyrium|마르티리움la은 예외적이다.[88] 브리타니아 최초의 저명한 기독교 순교자인 올번은 4세기 초(일부 학자는 3세기 중반으로 추정)에 순교했으며, 이스카 아우구스타의 성 율리우스와 아론도 순교자로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로마 제국에서 합법화되었고,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선포했다. 5세기까지 기독교는 브리타니아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한편, 브리타니아 출신 수도승 펠라기우스(서기 354년경~420/440년경)는 로마에서 가르침을 펼치며 펠라기우스파를 창시했는데, 이는 후에 교회 당국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서기 363년경으로 추정되는 납 판에 새겨진 편지가 한때 브리타니아의 초기 기독교 증거로 여겨졌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는 고문서 해독 오류에 기반한 것으로, 실제로는 기독교와 관련 없는 이교도 의식에 대한 내용이다.[101]
4. 로마 지배의 쇠퇴와 종말
4세기 말엽, 브리타니아에 대한 로마의 지배는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 인해 점점 더 큰 압박을 받았다. 효과적인 방어를 위한 병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며, 군 내부의 불만은 407년 콘스탄티누스 3세를 황제로 추대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가 남은 병력의 상당 부분을 이끌고 갈리아로 건너가면서 브리타니아의 로마 군사력은 사실상 공백 상태가 되었다.
409년 역사가 조시무스는 브리튼 원주민들이 로마의 민정을 축출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브르타뉴 지역 아르모리카의 반란과 연관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410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브리튼 도시들에 보낸 편지는 전통적으로 브리튼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고 자치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어 왔으나, 실제로는 이탈리아 남부의 브루티움이나 볼로냐에 보낸 것일 수도 있다는 연구도 있다.[62]
로마 제국의 군사 및 행정력이 사라지면서, 브리타니아의 행정과 사법은 각 지역 공동체의 손에 넘겨졌다. 로마 시대의 관습과 제도를 일부 유지하려는 시도 속에서, 브리튼 전역에 걸쳐 지역 군벌들이 점차 등장했다. 역사가 스튜어트 레이콕은 이러한 전환 과정을 분석하며, 로마 이전 시대의 부족 구조가 로마 이후의 토착 왕국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이 있었음을 강조했다.[63]
이러한 권력 공백과 혼란 속에서 브리튼 섬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픽트족, 스코티 등의 기존 위협에 더해, 색슨족을 비롯한 게르만 부족들이 점차 이주해오면서 이후 브리타니아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4. 1. 4세기의 위기
193년 클라우디우스 알비누스가 로마 황제 자리를 놓고 세베루스와 다투었으나 패배한 후, 세베루스는 브리타니아 속주를 상 브리타니아(Britannia Superior)와 하 브리타니아(Britannia Inferior) 두 개로 분할하였다. 이 조치는 약 한 세기 동안 브리타니아 내의 반란을 억제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그러나 3세기 말, 카라우시우스가 286년부터 297년까지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북부에서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국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이 반란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이후 그는 브리타니아를 막시마 카이사리엔시스(Maxima Caesariensis), 브리타니아 프리마(Britannia Prima), 플라비아 카이사리엔시스(Flavia Caesariensis), 브리타니아 세쿤다(Britannia Secunda) 등 4개의 속주로 다시 세분화하여 행정 구역을 재편했다. 이러한 조치는 속주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였으나, 동시에 4세기에 브리타니아가 겪게 될 지속적인 외부 세력의 압박과 내부 불안정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4. 2. 로마 군단의 철수와 그 이후
4세기 말, 브리타니아에 대한 로마의 지배는 서쪽의 아일랜드인과 동쪽의 앵글로색슨인 등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 점점 더 큰 압박을 받았다. 효과적인 방어를 위한 병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며, 내부적으로도 반란이 잇따르면서 로마의 영향력은 점차 위축되었다.

결정적으로 407년, 군대는 콘스탄티누스 3세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갈리아로 건너가 황제 자리를 노렸으나 결국 호노리우스에게 패배했다. 이 사건으로 브리타니아에는 로마 군대가 거의 남지 않게 되었고, 사실상 로마의 지배는 종말을 고했다. 당시 서로마 제국은 이미 이탈리아와 갈리아에 침입한 게르만족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라벤나의 서로마 정부는 멀리 떨어진 브리타니아를 유지할 여력이 없었다.
408년에는 색슨족의 침입이 있었으나, 브리튼인들이 스스로 이를 격퇴한 것으로 보인다. 409년 역사가 조시무스는 브리튼 원주민들이 로마의 민정을 축출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브르타뉴 지역의 아르모리카 반란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 410년, 황제 호노리우스는 브리타니아의 도시들에 보낸 편지를 통해 방어와 자치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지시한 것으로 전통적으로 해석된다. (다만 이 편지가 실제로는 이탈리아 남부의 브루티움이나 볼로냐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62]
로마의 군사 및 행정력이 사라지자, 브리타니아의 행정과 사법은 각 지역 공동체에 맡겨졌다. 로마 시대의 관습과 제도를 일부 유지하려는 시도 속에서, 브리튼 전역에 걸쳐 지역 군벌들이 점차 등장했다. 역사가 스튜어트 레이콕은 이러한 과정을 분석하며 로마 이전 시대의 부족 구조가 로마 이후의 토착 왕국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강조했다.[63] 고대부터 존재했던 브리튼인의 부족제가 부활하여 각자 왕을 섬기는 부족 국가들이 난립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경제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5세기 초 경제가 광범위하게 침체했다는 기존의 견해와 달리, 고고학적 증거들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도시의 집들은 더 호화로워졌지만 그 수는 줄었고, 방어 시설을 제외한 새로운 공공건물 건설은 중단되었으며 일부 기존 건물은 폐기되었다. 도시 내에서 농경 활동이 증가했음을 보여주는 흑색토 퇴적물이 발견되기도 했다.[60] 실체스터의 바실리카가 3세기 후반 산업용으로 전환된 것은 로마 브리타니아 도시화 해체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61]
일부 로마 빌라들은 5세기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체드워스, 러틀랜드의 그레이트 캐스터턴, 글로스터셔의 허클코트 등지에서는 이 시기에 새로운 모자이크 바닥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는 경제적 어려움이 전면적이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성 패트릭의 기록에 따르면 빌라들은 적어도 430년까지는 점유되었다. 베룰라미움이나 시렌체스터 같은 곳에서는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기도 했다. 캔터베리, 시렌체스터, 워록스터, 윈체스터, 글로스터와 같은 일부 도시 중심지는 5세기와 6세기에도 주변 농장과 함께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도시 생활은 4세기 말부터 활기를 잃었다. 378년에서 388년 사이에 주조된 동전은 매우 드물며, 이는 경제 침체, 군인 수 감소, 급여 지급 문제, 또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찬탈(383-87년) 기간 동안의 불안정한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 390년대에 화폐 유통이 잠시 증가했지만 이전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402년 이후 구리 동전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430년경에는 화폐가 교환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량 생산되던 도자기도 비슷한 시기에 사라졌다. 부유층은 금속이나 유리 용기를 사용했지만, 일반인들은 조잡한 토기나 가죽, 나무 용기에 의존하게 되었다.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 브리타니아는 게르만계 앵글로색슨인의 본격적인 침입에 직면했다. 브리튼 전통에 따르면, 군벌 지도자 보르티게른이 픽트족과 스코티족에 맞서기 위해 색슨족 용병을 초청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게르만족의 이주는 이미 그 이전부터 소규모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 용병은 곧 반란을 일으켰고, 브리타니아는 오랜 전쟁에 휩싸였다. 결국 600년경에는 브리타니아 저지대 대부분이 색슨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브리튼인들이 브르타뉴(이 지역 이름의 유래가 됨), 갈리시아, 그리고 아일랜드 등으로 피난했다.
서로마 시대 브리튼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446년의 '브리튼의 신음'이다. 이는 색슨족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서로마 제국의 장군 아에티우스에게 보낸 구원 요청이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 또 다른 중요한 전환점은 577년의 디오르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배스, 시렌체스터, 글로스터 등 주요 도시들이 함락되었고, 색슨족은 서쪽 해안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브리타니아는 소위 '암흑 시대'로 접어들었다. 한편, 후대의 중세 전설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정복에 저항한 영웅으로 묘사되는 아서 왕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이 그 역사적 실존 가능성을 낮게 본다.[64]
5. 로마 지배의 유산
로마가 브리타니아를 점령했던 시기, 로마인들은 광범위한 도로망을 건설했다. 이 도로들은 로마 시대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부분이 남아있다. 또한 로마인들은 상수도 시설과 하수 처리 및 폐수 처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런던(론디니움), 맨체스터(마무키움), 요크(에보라쿰)와 같이 오늘날 영국의 주요 도시들 중 다수가 로마인들에 의해 세워졌지만, 로마인들이 떠난 직후 원래의 로마 정착지는 대부분 버려졌다.
서로마 제국의 다른 많은 지역들과는 달리, 현재 영국의 주요 언어는 로망스어 계열이나 로마 지배 이전 주민들의 언어에서 직접 유래하지 않았다. 로마 침략 당시 브리튼 섬의 언어는 공통 브리토닉어였으며, 이 언어는 로마인들이 철수한 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이후 공통 브리토닉어는 여러 지역 언어로 분화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컴브리아어, 콘월어, 브르타뉴어, 웨일스어 등이 있다. 이 언어들을 연구한 결과, 공통 브리토닉어에는 약 800개 정도의 라틴어 단어가 흡수된 것으로 나타났다(브리토닉어족 참조). 현재 영국의 주요 언어인 영어는 로마 시대 이후인 5세기경부터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게르만 부족들의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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