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다티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다티스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의 지휘관으로, 기원전 494년 이오니아 반란에 대한 반격을 이끌었다. 그는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노예로 만들라는 명령을 받고 그리스 원정을 시작했다. 기원전 490년, 다티스는 여러 섬을 점령하고 카리스토스를 포위한 후 에레트리아를 함락시켰으며, 같은 해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지휘했다. 다티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설과 생존했다는 설이 있으며, 그의 아들들은 기병 장교로 복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케메네스 제국의 제독 - 메가바테스
    메가바테스는 아르타페르네스의 사촌이자 다리우스 1세의 친척으로, 이오니아 반란 진압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낙소스 공격을 시도했으나 아리스타고라스와의 갈등으로 실패한 후 행적이 묘연하다.
  • 아케메네스 제국의 제독 - 아르테미시아 1세
    아르테미시아 1세는 할리카르나소스의 사트라프 딸이자 남편 사후 왕위를 계승,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 함대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활약하며 헤로도토스로부터 지략과 용맹을 인정받고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 마라톤 전투 - 아이스킬로스
    아이슈킬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로서, 페르시아 전쟁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과 비극 형식의 혁신을 통해 그리스 비극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신과 인간의 관계, 정의와 복수 등을 탐구하며 후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 마라톤 전투 - 밀티아데스
    밀티아데스는 기원전 6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 아테나이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트라키아 헤르소네소스의 참주였으나 아테네로 귀환하여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지만 파로스 섬 공략 실패 후 민중 기만죄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사망했다.
다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티스가 스토아 포이킬레에서 마라톤 전투에서 칼리마코스와 싸우는 모습 (재구성)
다티스가 칼리마코스와 마라톤 전투에서 싸우는 모습 (스토아 포이킬레 재구성)
이름다티스
원어 이름*Dātiya-
출생 정보
출생지메디아, 아케메네스 제국
사망 정보
사망지알 수 없음
소속
충성아케메네스 제국
군 종류알 수 없음
계급알 수 없음
부대알 수 없음
지휘알 수 없음
참여 전투 및 공적
전투이오니아 반란
라데 해전
제1차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
에레트리아 공성전
마라톤 전투
가족 관계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알 수 없음
친척알 수 없음

2. 생애

다티스는 페르시아 전쟁 이전 이오니아 반란 당시 페르시아의 지휘관으로, 기원전 494년 이오니아에 대한 반격을 이끌었다.[2]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마르도니우스를 대신하여 지휘관이 되었으며,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노예로 만들고 그리스 노예들을 아케메네스 왕 앞에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를 위해 고대 그리스 동부 해안에 교두보를 구축하려 했다.

기원전 490년, 이오니아 해안에서 사모스로 항해한 후 이카리아 해를 지나 델로스와 낙소스 섬으로 이동했다.[3] 다티스가 도착하자 섬 주민들은 도망쳤으나, 다티스는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아폴론 제단에 많은 양의 향을 태웠다.[4]

다티스의 군대는 그리스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마을을 점령했으나, 카리스토스는 저항했다. 8만 명의 병력과 200척의 삼단 노선으로 도시를 포위하고 주변 작물을 파괴하여 결국 항복을 받아냈다.[4][5]

기원전 490년 에레트리아 포위 당시 에레트리아인들은 전략을 두고 갈등했다. 일부는 항복 후 게릴라전을, 일부는 페르시아에 항복을 원했다. 칼키스에서 온 4천 명의 아테네 식민지인들이 방어를 도왔으나, 다티스는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7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도시의 모든 신전은 사르디스 방화에 대한 보복으로 불태워졌으며, 아폴론 다프네포로스 신전도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4][6]

같은 해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에 대한 페르시아 공격 부대를 지휘했다. 크테시아스는 다티스가 마라톤에서 죽었고 아테네인들이 시신을 넘겨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헤로도토스는 다티스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7][8]

2. 1. 초기 활동

다티스는 페르시아 전쟁 이전 이오니아 반란 당시 페르시아의 지휘관이었다. 기원전 494년 이오니아에 대한 반격을 이끌었다.[2]

다티스는 아르타페르네스라는 또 다른 장교와 함께 마르도니우스라는 지휘관을 대신했다. 다티스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노예로 만들고 그리스 노예들을 아케메네스 왕 앞에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다티스는 고대 그리스 동부 해안에 교두보를 구축하려 했다.

기원전 490년, 다티스는 이오니아 해안에서 사모스로 항해한 다음 이카리아 해를 지나 델로스와 낙소스 섬으로 이동했다.[3] 다티스가 도착하자 섬 주민들은 도망쳤다. 다티스는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없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다티스는 아폴론 제단에 많은 양의 향을 태웠다.[4]

다티스의 군대는 그리스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마을을 점령했다. 카리스토스라는 한 마을은 다티스에 저항했다. 그래서 8만 명의 병력과 200척의 삼단 노선으로 도시를 포위했다. 그는 도시 주변의 작물을 파괴하여 포위를 시작했다. 결국 도시는 압도당해 항복했다.[4][5]

기원전 490년 다티스가 에레트리아를 포위하는 동안 에레트리아인들은 많은 상충되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에레트리아인들은 도시를 항복하고 그리스 산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기를 원했다. 일부 에레트리아인들은 페르시아에 도시를 항복시키기를 원했다. 4000명의 아테네 식민지인들이 칼키스에서 에레트리아 방어를 돕기 위해 도착했다. 다티스는 전투에서 에레트리아인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포위 7일째에 에레트리아인들은 항복했고, 도시의 모든 신전은 그리스인들이 이전에 사르디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해 불태워졌다.[4] 파괴된 신전 중 하나는 아폴론 다프네포로스 신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6]

다티스는 같은 해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에 대한 페르시아 공격 부대를 지휘했다. 크테시아스는 다티스가 마라톤에서 죽었고 아테네인들이 그의 시신을 넘겨주기를 거부했다고 말한다.[7] 그러나 이는 다티스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헤로도토스의 주장과 상반된다.[8]

2. 2. 그리스 원정

다티스는 페르시아 전쟁 이전 이오니아 반란 당시 페르시아의 지휘관이었다. 기원전 494년 이오니아에 대한 반격을 이끌었다.[2]

다티스는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마르도니우스를 대신하여 지휘관이 되었다. 다티스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노예로 만들고 그리스 노예들을 아케메네스 왕 앞에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다티스는 고대 그리스 동부 해안에 교두보를 구축하려 했다.

기원전 490년, 다티스는 이오니아 해안에서 사모스로 항해한 다음 이카리아 해를 지나 델로스와 낙소스 섬으로 이동했다.[3] 다티스가 도착하자 섬 주민들은 도망쳤다. 다티스는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없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다티스는 아폴론 제단에 많은 양의 향을 태웠다.[4]

다티스의 군대는 그리스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마을을 점령했다. 카리스토스라는 한 마을은 다티스에 저항했다. 그래서 8만 명의 병력과 200척의 삼단 노선으로 도시를 포위했다. 그는 도시 주변의 작물을 파괴하여 포위를 시작했다. 결국 도시는 압도당해 항복했다.[4][5]

기원전 490년 다티스가 에레트리아를 포위하는 동안 에레트리아인들은 많은 상충되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에레트리아인들은 도시를 항복하고 그리스 산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기를 원했다. 일부 에레트리아인들은 페르시아에 도시를 항복시키기를 원했다. 4천 명의 아테네 식민지인들이 칼키스에서 에레트리아 방어를 돕기 위해 도착했다. 다티스는 전투에서 에레트리아인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포위 7일째에 에레트리아인들은 항복했고, 도시의 모든 신전은 그리스인들이 이전에 사르디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복수를 위해 불태워졌다.[4] 파괴된 신전 중 하나는 아폴론 다프네포로스 신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6]

다티스는 같은 해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에 대한 페르시아 공격 부대를 지휘했다. 크테시아스는 다티스가 마라톤에서 죽었고 아테네인들이 그의 시신을 넘겨주기를 거부했다고 말한다.[7] 그러나 이는 다티스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헤로도토스의 주장과 상반된다.[8]

2. 3. 에레트리아 포위전

기원전 490년, 다티스가 에레트리아를 포위하는 동안 에레트리아인들은 여러 전략을 두고 갈등했다. 일부는 도시를 넘겨주고 그리스 산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려 했고, 일부는 페르시아에 항복하려 했다. 칼키스에서 온 4천 명의 아테네 식민지인들이 에레트리아 방어를 도우러 왔다.[4] 다티스는 전투에서 에레트리아인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포위 7일째에 에레트리아인들은 항복했고, 도시의 모든 신전은 그리스인들이 이전에 사르디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보복으로 불태워졌다.[4] 파괴된 신전 중 하나는 아폴론 다프네포로스 신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6]

2. 4. 마라톤 전투

다티스는 같은 해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에 대한 페르시아 공격 부대를 지휘했다. 크테시아스는 다티스가 마라톤에서 죽었고 아테네인들이 그의 시신을 넘겨주기를 거부했다고 말한다.[7] 그러나 이는 다티스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헤로도토스의 주장과 상반된다.[8]

3. 가족

다티스는 하르마미트레스와 티타에우스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그의 두 아들 모두 기병 장교가 되어 크세르크세스 1세 휘하에서 복무했다.[8]

참조

[1] 웹사이트 Welcome to Encyclopaedia Iranica http://www.iranicaon[...]
[2] 서적 The Greek and Persian Wars 499-386 BC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4-05-29
[3] 서적 Greek Hoplite Vs Persian Warrior: 499–479 BC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8-03-20
[4] 서적 The Greco-Persian Wars https://www.jstor.or[...]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5] 서적 On the War for Greek Freedom: Selections from The Histories https://books.google[...] Hackett Publishing Company, Incorporated
[6] 서적 Athens Burning: The Persian Invasion of Greece and the Evacuation of Attica https://books.googl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17-01-26
[7] 웹사이트 Excerpts of Ctesias' "Persica" https://www.livius.o[...]
[8] 서적 Histories
[9] 웹사이트 Excerpts of Ctesias' "Persica" http://www.livius.or[...]
[10] 서적 히스토리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