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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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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르디스는 최소 3500년 이상 사람이 거주했던 고대 도시로, 뤼디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즘 시대,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시대를 거치며 번영했다. 기원전 7세기에 뤼디아의 수도가 되었고, 페르시아 시대에는 왕의 길 종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마 시대에는 아시아 속주의 일부로 번성했으며,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하여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 사르디스는 지진, 전쟁, 정복 등 숱한 역경을 겪었으며, 1402년 티무르의 침략으로 쇠퇴했다. 현재는 터키 마니사 주 살리흘리 근처에 위치하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뤼디아 시대, 헬레니즘 시대, 로마 시대의 유적과 함께 사르디스 회당이 발견되어 유대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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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디스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사르디스
원어 이름
다른 이름사르데스
위치사르트, 마니사주, 터키
지역리디아
유형취락
건설 시기기원전 1500년경 정착, 기원전 600년경 주요 도시
폐허 시기서기 1402년경
문화세하 왕국
리디아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비잔티움
발굴 시기1910년–1914년, 1922년, 1958년-현재
고고학자하워드 크로스비 버틀러
G.M.A. Hanfmann
크로포드 H. 그린월트 주니어
Nicholas Cahill
상태폐허
소유권공공 소유
접근성
웹사이트사르디스 발굴 프로젝트
이미지
사르디스의 그리스식 김나시움
사르디스의 그리스 김나시움
사르디스의 ギュムナシオン
사르디스의 ギュムナシオン
언어별 명칭
리디아어()

2. 역사

사르디스는 최소 기원전 15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오랜 역사 동안 번영과 쇠퇴를 반복했다. 헤로도토스헤라클레스의 아들들이 이 도시를 건설했다는 전설을 전하며, 기원전 1220년 아그론부터 기원전 716년 칸다울레스까지 505년 동안 헤라클레이다이 왕조가 통치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기원전 716년 기게스부터 기원전 546년 크로이소스까지 메르므나데스 왕조가 이어졌다.[11] "사르디스"라는 이름은 고대 시대 시인 삽포의 작품에서 처음 등장하며, 스트라보는 도시의 원래 이름이 "히데"였다고 주장한다.[1]

사르디스는 고대 리디아의 수도이자 아케메네스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프로콘술의 총독부가 있었으며, 후기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시대 리디아 속주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사르디스의 기독교회는 『요한계시록』에서 서한의 수신처로 언급되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하나이다.

사르디스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내륙에서 에게해 연안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도로의 중간에 위치했으며, 헤르무스 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를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사르디스는 기원전 7세기에 김메리아인,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인과 이오니아인, 기원전 3세기 말에는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점령당했다. 키루스 2세에게 정복된 후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에서 시작되는 왕의 길의 종착역이 되었다. 이오니아 반란에서는 이오니아인에 의해 불타 버렸고,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정복될 때까지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었다.

17년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에 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재건되었다. 동로마 제국 말기까지 소아시아 서부의 대도시 중 하나였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동로마의 수도가 되면서 새로운 교통망에서 벗어나 중요성이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95년에는 뤼디아 속주 수도 대주교좌가 되었으며, 10세기에는 트라케시온관구에서 에페소스와 스미르나(이즈미르)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도시로 언급되었다.

1071년 이후 셀주크 왕조의 침입으로 고통받았지만, 1118년 필로카레스 장군의 활약과 콤네누스 왕조의 중흥으로 동로마 영토로 남았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니케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지만, 소아시아 전체에 대한 지배가 소홀해져 결국 무슬림 전사 집단인 가지(en)의 아미르들에게 빼앗겼다. 1306년 조약으로 카이스테르 강 계곡과 사르디스의 요새가 그들에게 넘겨졌고, 1402년 티무르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고 파괴될 때까지 쇠퇴했다.

2. 1. 초기 정착

사르디스는 기원전 1500년 이전에 건설되었으나, 초기 정착지의 규모와 성격은 발굴된 부분이 적어 알 수 없다. 신석기 시대 초기에 거주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문맥에서 벗어나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초기 청동기 시대의 묘지는 마르마라 호에서 11km(7마일)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1][3]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 유적지는 세하 강 유역의 영토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수도는 인근 카이막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히타이트 문서에 따르면, 세하는 원래 히타이트 왕 무르실리 2세가 정복하고 분할한 아르자와 왕국의 일부였다. 이후 세하는 히타이트의 속국이 되어 미케네 그리스인과의 중요한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세하 사람들과 후기 리디아인들 사이의 관계는 불분명하며, 이 지역에서 문화적 연속성과 단절의 증거가 모두 존재한다.[3] "사르디스"라는 용어나 그 이전 이름인 "하이데"(고대 그리스어로, 히타이트어 이름 "우다"를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음)는 히타이트 문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1]

2. 2. 리디아 시대

기원전 7세기, 사르디스는 리디아의 수도가 되었다.[1] 크로이소스와 같은 왕들은 이곳에서 동쪽의 할리스 강까지 이르는 제국을 다스렸다.[1] 도시 자체는 시외 지역을 포함하여 108헥타르를 차지했으며, 두께 20미터의 성벽으로 보호되었다.[1] 아크로폴리스는 자연적으로 고르지 않은 산비탈을 다듬기 위해 흰색의 정형석(ashlar)으로 계단식(terrace)으로 조성되었다. 방문객들은 빈 테페의 세 개의 거대한 무덤(tumuli)을 통해 멀리서도 이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1]

도시의 배치와 조직은 현재 부분적으로만 알려져 있다. 북쪽/북서쪽에는 주거, 상업 및 산업 지역이 있는 대규모 시외 지역이 있었다. 정착지는 팍톨루스 강(Pactolus Stream)까지 확장되었으며, 고고학자들은 충적 금속이 처리되었던 작업 시설의 유적을 발견했다.[1]

현장 주변의 다실 주택은 헤로도토스가 설명한 야석과 진흙 벽돌 건축물과 일치한다. 대부분의 주택은 점토와 짚으로 지붕을 덮었지만, 부유한 주민들은 공공 건물과 마찬가지로 기와 지붕을 사용했다. 주택에는 종종 식별 가능한 안마당과 음식 준비 공간이 있지만, 완전한 주택이 발굴된 적이 없어 사르디스 주택의 내부 구조에 대한 일반화는 거의 할 수 없다.[1]

리디온(lydion)은 화장품에 사용되는 일상적인 도자기 형태였다.


종교 유적에는 큐벨레에게 봉헌되었을 수 있는 소박한 제단이 있는데, 거기서 발견된 도자기 조각에는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다.[1] 다른 곳에서는 아르테미스에게 봉헌된 것으로 보이는 신전이 발견되었는데, 그 유적에는 사자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1] 시외 지역에서는 제물로 묻힌 식기류가 속세의 예배를 증명한다.[1]

리디아 시대 사르디스에 관한 문헌 자료에는 플리니우스가 진흙 벽돌 건물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 건물은 크로이소스의 궁전이었으며 그의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했다고 한다.[1]

사르디스의 물질 문화는 대체로 아나톨리아와 에게해 양식을 독특하게 비튼 것이다. 이 도시의 장인들은 글립틱 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는 인장과 보석류가 포함된다. 그들의 도자기는 에게해와 아나톨리아의 도자기 양식을 혼합했으며, 여기에는 "리디온(lydion)" 형태와 줄무늬 유약 및 대리석 유약으로 알려진 독특한 기법이 포함된다. 사르디스 도자기의 서사적 장면은 드물다. 수입된 그리스 도자기는 당대 그리스 작가들이 언급한 리디아인들의 "헬레니즘적 태도"를 증명한다. 그리스 작가들은 리디아인들의 음악과 직물에 감명을 받았지만, 이러한 리디아 문화의 측면은 고고학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1]

리디아 제국의 사르디스와 다른 도시들을 보여주는 지도. 음영은 크로이소스 왕 시대인 기원전 6세기 중반의 리디아를 나타내고, 붉은 선은 기원전 7세기 초 리디아의 초기 영토를 보여준다.


헤로도토스는 그 도시가 헤라클레스의 아들들, 즉 헤라클레이다이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전설을 전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헤라클레이다이들은 기원전 1220년 아그론부터 기원전 716년 칸다울레스까지 505년 동안 통치했다. 그 후에는 기원전 716년 기게스로 시작하여 기원전 546년 크로이소스로 끝나는 메르므나데스 왕조가 이어졌다.[11]

"사르디스"라는 이름은 고대 시대 시인 삽포의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다. 스트라보는 도시의 원래 이름이 "히데"였다고 주장한다.[1]

사르디스는 기원전 7세기에 김메리아인,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인과 이오니아인, 기원전 3세기 말에는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점령당하는 고난을 겪었다.

2. 3. 페르시아 시대

기원전 547년, 키루스 2세가 사르디스를 정복하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4] 프테리아 전투와 티브라 전투에서 크로이소스가 이끄는 리디아 군대를 물리친 페르시아 군대는 사르디스까지 진격하여 짧은 포위 공격 끝에 도시를 함락시켰다.[5][1] 이 사건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으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당시 파괴의 흔적이 발견된다.[3]

도시 요새는 큰 화재로 불탔고, 불길은 주변 주거 지역으로 번졌다. 건물 내부의 목조 구조물과 물건들은 숯으로 변했고, 진흙 벽돌은 무너져 내려 유적이 보존되었다.[3] 잔해 속에서는 격렬한 전투의 흔적과 함께 리디아 병사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3]

사르디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에서 시작되는 왕의 길의 종착역이 되어 동서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오니아 반란 당시에는 이오니아인들에게 점령되어 도시가 불타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1] 사르디스는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정복될 때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2. 4.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사르디스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식 건축물인 프리타네이온, 체육관, 극장, 경마장, 아르테미스 신전 등이 건설되었다.[1]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까지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도 사르디스는 아시아 속주의 주요 도시로서 번영을 유지했다. 그러나 기원 17년 대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었지만, 티베리우스 황제의 지원으로 재건되었다.[3]

2. 5. 동로마 제국 시대와 그 이후

사르디스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으며, 신약 성서의 요한계시록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하나로 언급된다.[10]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는 사르디스 사람들이 시작한 것을 끝내지 못하고 실질적인 것보다 허상에 매달렸다고 언급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속주들을 수도와 연결하는 새로운 도로망이 발전했다. 그러나 사르디스는 주요 교통로에서 멀어지면서 중요성을 일부 잃었다.

비잔티움-사산 전쟁 중인 615년, 사르디스는 페르시아의 샤힌의 소아시아 침공에서 약탈당한 도시 중 하나였다. 동로마 제국이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사르디스가 입은 피해는 완전히 복구되지 못했다.

사르디스는 명목상의 최고 지위는 유지했고, 295년에 설립된 리디아 속주의 대주교의 자리는 계속되었다. 10세기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토스가 제시한 트라케시온 테마 도시 목록에서 에페소스스미르나 다음으로 세 번째로 열거되었다. 그러나 그 후 4세기 동안 이 지역의 중요성을 유지한 시필룸 위의 마그네시아와 필라델피아 속주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사르디스는 7세기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1] 1078년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1097년 비잔티움 장군 요한 두카스에 의해 재정복되었고, 1204년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었을 때 니케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1261년 동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자 사르디스와 그 주변 지역은 가지 에미르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306년 조약에 따라 카이스테르 강 유역과 사르디스 성채의 요새가 그들에게 넘겨졌다. 도시는 1402년 티무르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될 때까지 쇠퇴를 거듭했다.

3. 지리

사르디스는 게디즈 강(고대 헤르무스 강) 계곡 중앙, 강에서 남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했다. 아크로폴리스는 가파른 보즈 산(탐몰루스 산)에 건설되었으며, 하층 도시는 팍톨루스 강 지역까지 뻗어 있었다.[1]

오늘날 이 유적지는 터키 마니사 주 살리흘리 근처 사르트(Sart)라는 마을 옆에 있으며, 앙카라 - 이즈미르 고속도로와 가깝다(이즈미르에서 약 72km). 유적지는 연중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공중목욕탕-체육관 단지, 회당 및 동로마 제국 시대 상점 등의 주목할 만한 유적이 있다.[1]

4. 고고학적 발굴

19세기까지 사르디스는 폐허가 되어 주로 로마 시대 유적만이 눈에 띄었다. 초기 발굴자로는 영국의 탐험가 조지 데니스(George Dennis)가 있는데, 그는 파우스티나 대제(Faustina the Elder)의 거대한 대리석 두상을 발굴했다. 아르테미스 신전 구역에서 발견된 이 두상은 황제 부부에게 헌정된 거대한 조각상 한 쌍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2]

최초의 대규모 고고학 발굴은 1910년부터 1914년까지 하워드 크로스비 버틀러(Howard Crosby Butler)가 지휘하는 프린스턴 대학교 팀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들은 아르테미스 신전과 1,000개가 넘는 리디아 무덤을 발굴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터키 독립 전쟁으로 발굴 작업이 중단되었지만, 1922년에 잠시 재개되었다. 버틀러 발굴에서 남은 일부 유물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에 추가되었다.

1958년, G.M.A. 한프만(G.M.A. Hanfmann)과 헨리 데트와일러(Henry Detweiler)가 이끄는 새로운 탐사대, 즉 사르디스 고고학 탐사(Archaeological Exploration of Sardis)가 하버드 대학교코넬 대학교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한프만은 도시와 그 지역을 광범위하게 발굴하여 주요 로마식 목욕탕-체육관 건물, 회당, 후기 로마 시대의 주택과 상점, 순금과 순은으로 전환하기 위한 리디아의 일렉트럼 가공 산업 지역, 리디아 거주 지역, 빈테페의 고분 무덤 등을 발굴하고 복원했다.[13]

1960년대에는 사르디스 북서쪽에 있는 상당한 규모의 집회장(현재 사르디스 회당)이 확인되면서 사르디스의 유대인 공동체의 지역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증되었다. 비문, 메노라, 그리고 다양한 유물로 장식된 이 유적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회당으로서의 기능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접한 주거 지역과 상업 지역의 발굴을 통해 유대인 생활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도 발견되었다.[14]

1976년부터 2007년까지는 크로포드 H. 그리니월트 주니어(Crawford H. Greenewalt, Jr.)의 지휘 아래 발굴이 계속되었다.[15] 2008년부터는 위스콘신-매디슨 대학교 교수인 니콜라스 케일(Nicholas Cahill)이 발굴을 지휘하고 있다.[16]

사르디스 유적에서 발견된 중요한 유물 중 일부는 마니사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후기 로마 시대의 모자이크와 조각상, 기원전 6세기 중반의 투구, 그리고 여러 시대의 도자기 등이 포함된다.

1958년 이후로 사르디스에서는 매년 하버드 대학교와 코넬 대학교가 후원하는 고고학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조사를 통해 지금까지 알려진 유적 중 가장 인상적인 디아스포라 시대의 회당이 발굴되었으며, 많은 모자이크 바닥뿐만 아니라 80개 이상의 그리스어 비문과 7개의 히브리어 비문이 출토되었다. 사르디스 회당의 발견으로 로마 제국 말기 유대교에 대한 기존의 가설이 뒤집혔다.

5. 사르디스 회당

1958년부터 하버드 대학교와 코넬 대학교가 후원한 고고학 조사를 통해 사르디스 회당이 발굴되었다. 이 회당은 디아스포라 시대 회당 중 가장 인상적인 유적으로 평가받는다.[14] 발굴 결과 80개 이상의 그리스어 비문과 7개의 히브리어 비문, 다양한 모자이크 바닥이 출토되었다.

사르디스 회당의 발견은 로마 제국 말기 유대교에 대한 기존 가설을 뒤집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발견은 아프로디시아스에서 발견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비문과 함께, 로마 시민으로서 유대인들의 생활 적응, 공동체의 규모와 중요성, 그리고 소아시아 유대인 사회의 지속적인 활력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회당은 공중 목욕탕과 체육관 복합 시설 부지의 일부였으며, 이 시설은 450년에서 500년 동안 사용되었다. 2세기 중반에는 회당이 있던 곳이 옷을 갈아입거나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 복합 시설은 616년에 사산 왕조에 의해 파괴되었다.[14]

6. 한국과의 관계 (추가 제안)

사르디스는 현재 한국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하나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한국 기독교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6. 1. 역사적 관점

사르디스는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기원전 472년)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일리아스』에서는 '하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후대에 사르디스 또는 그 아크로폴리스의 옛 이름으로 여겨졌다. 기원전 8세기 뤼디아 왕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사르디스는 기원전 7세기 김메리아인,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인과 이오니아인, 기원전 3세기 말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점령당했다. 페르시아 지배 시대에는 왕의 길의 종착역이었고, 이오니아 반란 때 소실되기도 했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 때까지 페르시아 지배를 받았다.

17년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어 소아시아 서부 대도시 중 하나로 남았다. 뤼디아 왕국 시절 공예, 특히 모직물과 깔개 제작, 염색이 발달했다. 팍토로스 강에서 사금이 생산되었고, 무역과 상업으로 큰 부를 쌓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동로마 수도가 되면서 새로운 교통망에서 벗어나 중요성이 감소했지만, 295년 뤼디아 속주 수도 대주교좌가 되었다. 10세기 콘스탄티노스 7세가 설정한 트라케시온 관구 도시 중 에페소스와 스뮤르나(이즈미르)에 이어 세 번째였다. 그러나 마그네시아(마니사)와 필라델피아(알라셰히르)에 위협받았다.

1071년 이후 셀주크 왕조 침입을 받았으나 1118년 필로카레스 장군 활약으로 회복, 콤네누스 왕조와 룸 셀주크 왕조 쇠퇴로 동로마 영토로 남았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이후 니케아 제국 지배를 받았다.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지만, 소아시아 지배력 약화로 1306년 가지(en) 아미르들에게 카이스테르 강(쿠추크 멘데레스 강) 계곡과 함께 넘겨졌다. 1402년 티무르 군대에 점령되어 파괴되었다.

6. 2. 종교적 관점

사르디스는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하나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국 기독교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사르디스 교회의 사례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과 쇠퇴, 그리고 신앙의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6. 3. 문화적 관점

사르디스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들은 고대 리디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1958년부터 하버드 대학교코넬 대학교의 후원으로 진행된 고고학 조사를 통해 디아스포라 시대의 회당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유적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다. 이 회당에서는 80개 이상의 그리스어 비문과 7개의 히브리어 비문, 그리고 많은 모자이크 바닥이 출토되었다.[1] 이는 시리아의 두라-에우로포스에 있는 회당 유적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1]

사르디스 회당의 발견은 로마 제국 말기 유대교에 대한 기존의 가설을 뒤집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아프로디시아스에서 발견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비문과 함께, 이 유적은 유대인들이 로마 시민으로서의 삶에 적응하고, 공동체의 규모와 중요성을 유지하며, 소아시아 유대인 사회가 지속적으로 활력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1]

이 회당은 공중 목욕탕과 짐나지움(체육관) 복합 시설 부지의 일부였으며, 450년에서 500년 동안 사용되었다.[1] 2세기 중반 초기에는 회당이 있던 곳이 옷을 갈아입거나 휴식을 취하는 데 사용되었다.[1] 이 복합 시설은 616년에 사산 왕조에 의해 파괴되었다.[1]

참조

[1] 백과사전 Sardis: A First Millenium B.C.E. Capital In Western Anatolia Oxford University Press
[2] 백과사전 Sardis: A First Millenium B.C.E. Capital In Western Anatolia Oxford University Press
[3] 백과사전 Lydia before the Lydians https://sardisexpedi[...]
[4] 서적 From Cyrus to Alexander: A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https://books.google[...] Eisenbrauns 2002-01-01
[5] 백과사전 The Persian Sack of Sardis http://sardisexpedit[...]
[6] 백과사전 Introduction https://sardisexpedi[...]
[7] 백과사전 The City of Sardis https://www.sardisex[...]
[8] 백과사전 Lydian Jewelry https://sardisexpedi[...]
[9] 문서 The Annals 2.47 s:The Annals (Tacitu[...]
[10] 성경
[11] 학술지 On the Lydian Dynasty which preceded the Mermnadæ 1844-01-01
[12] 웹사이트 Research collection online https://www.britishm[...] British Museum
[13] 서적 Sardis from Prehistoric to Roman Times: Results of the Archaeological Exploration of Sardis, 1958-1975 Harvard University Press 1983-01-01
[14] 학술지 A menorah plaque from the center of Sardis https://www.cambridg[...] 2015-01-01
[15] 서적 Love for Lydia: A Sardis Anniversary Volume Presented to Crawford H. Greenewalt, Jr Harvard University Press 2008-01-01
[16] 웹사이트 Archaeological Exploration of Sardis, Harvard Art Museums http://www.harvardar[...] 2013-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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