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언론보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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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일본언론보국회는 1942년 12월에 설립되어 1945년 8월에 해산된 일본의 언론 통제 단체이다. 이 단체는 고노에 신체제 운동의 일환으로 평론가 협회를 개편하여 설립되었으며, 정보국의 통제를 받으며 일본의 세계관 확립과 대동아 신질서 건설을 목표로 활동했다. 회장에는 도쿠토미 소호가 추대되었으며, 기관지 '언론보국'을 발행하고 다양한 출판물을 통해 사상전을 전개했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해산되었으며, 임원들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초국가주의 단체로 지정되어 공직 추방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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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일본언론보국회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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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칭 | 언론보국회 |
| 영문 명칭 | The Greater Japan Journalism Patriotic Association |
| 국적 | 일본 제국 |
| 창립 | 1942년 4월 |
| 해산 | 1945년 9월 |
| 종류 | 통제 단체 |
| 본부 소재지 | 일본 |
| 상세 정보 | |
| 목적 | 언론 통제 |
| 관련 인물 | 도쿠토미 소호, 고노 히토시 |
| 해체 | |
| 해체일 | 1945년 9월 |
| 해체 사유 | 연합군 점령 하의 해산 명령 |
2. 연혁
1942년 12월 23일, 대일본언론보국회는 창립 총회를 개최하고, 1943년 1월 25일 사단법인 설립 인가를 받았다.[1] 일본문학보국회 회장이었던 도쿠토미 소호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가노코기 가즈노부가 전무 이사, 쓰쿠이 다쓰오(총무 부장), 노무라 시게오미(조사 부장), 이자와 히로시(기획 부장)가 상무 이사로 취임했다.[1] 정보국은 두 단체를 통합할 것을 상정했기 때문에 도쿠토미 소호는 일본문학보국회와 대일본언론보국회의 회장을 겸임했다.[1]
정관에서는 "국체의 본의에 의거하여 성전 완수를 위해 회원 상호의 연성을 도모하고 일본 세계관을 확립하여 대동아 신질서 건설의 원리와 구상을 천명하여 대성하고 나아가 황국 내외의 사상전에 헌신하는 것"을 목적으로 규정했다.[1]
총회 결의는 정보국의 인가가 없으면 효력이 없었고, 회장은 정보국 총재의 추천, 임원은 정보국 총재의 승인이 필요했다.[1] 이처럼 정보국의 통제가 강하게 작용했다. 기요자와 기요시, 바바 쓰네고, 미키 기요시 등 자유주의적이라고 여겨진 인사들은 입회 권유를 받지 못했으며, 다나베 하지메처럼 입회를 권유받았지만 거부한 경우도 있었다.[1]
여성 임원으로는 이사에 이치카와 후사에, 참여에 야마타카 시게리, 평의원에 다케우치 시게요와 가와사키 나츠가 있었다.[1]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으로 존립 의의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대일본언론보국회는 정보국에 사단법인 해산 인가 신청서를 제출했고, 8월 21일 해산이 인가되었다. 정관상으로는 해산을 위해 총회에서 출석 회원의 과반수 표결이 필요했지만(제14조), 사무국은 "시국 절박"을 이유로 총회를 열지 않고 해산 신청을 했다. 8월 25일 자로 사무총장 시시가키 가즈노부 명의로 나온 신문 광고 "대일본언론보국회 회원 제현에게 고함"을 통해 회원들에게 해산 사실을 알렸다.[2]
1946년 1월 4일,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대일본언론보국회를 초국가주의 단체로 지정하여 해산 대상으로 정하고, 임원들은 공직 추방 대상이 되었다.[2]
2. 1. 전사(前史)
1940년(쇼와 15년)에 설립된 "일본 평론가 협회"가 대일본언론보국회의 전신이다.1939년(쇼와 14년) 2월 22일, 평론가들의 시국 협력 단체로 바바 츠네고를 회장으로 하는 "평론가 협회"가 설립되었다. 이 협회는 백 수십 명의 회원을 모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무실해졌다. 이듬해 1940년 10월 5일, 고노에 신체제 운동의 일환으로 무로후시 다카노부 등이 주도하여 평론가 협회를 개편하고 "일본 평론가 협회"를 설립했다. 이 단체의 실질적인 중심은 무로후시와 이사 히데오, 츠쿠이 타츠오였다.[1] 참가자의 폭은 넓어, 1941년(쇼와 16년) 3월에는 약 280명에 달했다. 제2회 총회에서 스기모리 코지로를 회장으로 선출했다.[2]
1942년(쇼와 17년) 4월 익찬 선거를 계기로, 대정익찬회 문화부를 중심으로 문화인 전체를 조직하여 하나의 정치력으로 결집하려는 계획이 나타났다. 이에 가담하려 했던 무로후시 다카노부 등과 반대했던 츠쿠이 타츠오 등 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또한, 같은 해 5월에 일본 문학 보국회가 설립되면서 평론가 사이에서도 동종의 단체를 조직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같은 해 7월부터 일본 평론가 협회 간부들과 정보국의 카와즈라 류조 제5부장, 이노우에 시로 제5부 제3과장과의 접촉이 시작되었고, 8월 30일에는 『도쿄 신문』에서 "대일본 사상 보국회" 설립 구상이 보도되었다. 이는 평론 활동 관계자를 망라하여 참가시키려는 것이었다.[3]
한편, 이자와 히로시(전 『도쿄 니치니치 신문』 논설위원), 노무라 시게오미(전 도지샤 대학 조교수), 사이토 타다시(군사 외교 평론가) 등의 그룹은 "사상전"을 지도하기 위한 소수 회원 단체 설립을 획책, 1942년 8월 24일 "대동아 사상 협회" 구상을 작성했다.
이 "대일본 사상 보국회" 구상과 "대동아 사상 협회" 구상이 정보국의 지도하에 통합되어 대일본 언론 보국회 구상이 되었다. 협회 설립에 있어서 일본 평론가 협회 계열의 움직임은 배제되었고(특히 무로후시 다카노부와 이사 히데오는 지명되어 배척되었다), 정보국과 "사상전" 그룹이 중심이 되었다. 협회 명칭에 대해서는 "평론"이 "역사적 연상상 재미없다", "학술 사상 보국회"가 "인민 전선"이라는 이유로 기각되어 "대일본 언론 보국회"라는 명칭이 채택되었다.
2. 2. 설립
1942년 12월 23일 창립 총회를 개최하고, 1943년 1월 25일 사단법인 설립 인가를 받았다.[1] 회장에는 일본문학보국회 회장이었던 도쿠토미 소호가 추대되었고, 전무 이사에는 가노코기 가즈노부, 상무 이사에는 쓰쿠이 다쓰오(총무 부장), 노무라 시게오미(조사 부장), 이자와 히로시(기획 부장)가 취임했다.[1] 도쿠토미 소호가 일본문학보국회와 대일본언론보국회의 회장을 겸임한 것은 정보국이 두 단체를 통합할 것을 상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정관에서는 "국체의 본의에 의거하여 성전 완수를 위해 회원 상호의 연성을 도모하고 일본 세계관을 확립하여 대동아 신질서 건설의 원리와 구상을 천명하여 대성하고 나아가 황국 내외의 사상전에 헌신하는 것"을 목적으로 규정했다.[1]
총회 결의는 정보국의 인가가 없으면 효력이 없었고, 회장은 정보국 총재의 추천, 임원은 정보국 총재의 승인이 필요했다.[1] 정보국의 통제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자유주의적이라고 여겨진 기요자와 기요시, 바바 쓰네고, 미키 기요시 등은 입회 권유를 받지 못했으며, 다나베 하지메처럼 입회를 권유받았지만 거부한 경우도 있었다.[1]
여성 임원으로는 이사에 이치카와 후사에, 참여에 야마타카 시게리, 평의원에 다케우치 시게요와 가와사키 나츠가 있었다.[1]
2. 3. 활동
1943년 3월 말 회원 수는 847명이었고, 1944년 3월 말에는 969명이었다.[1] 1943년 7월 21일, 하니 모토코 등 9명의 여성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부인 회원 간담회가 열렸지만, 이후 다시 개최되지 않았다.[2]1943년 8월 30일, 제7회 이사회에서 쓰쿠이 다쓰오가 상무이사 겸 총무부장에서 물러나고, 사이토 다다시가 후임으로 취임했다.[3] 이 무렵부터 우익 세력이 니시다 철학, 교토 학파, 『중앙공론』, 『개조』 등을 공격하면서, 언론보국회는 점차 언론 억압에 가담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언론계의 반발을 샀다. 1943년 10월 1일에는 기관지 『언론보국』을 창간하여 사상 통제를 강화했다. 창간 당시 발행 부수는 2000부였으며, 1944년 5월호까지 7000부를 유지하다가 6월호부터 14000부로 늘었지만, 페이지 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1944년에 들어서면서 언론보국회는 언론계와 더욱 대립하게 되었다. 노무라 시게토미 조사부장은 『중앙공론』, 『개조』, 『문예춘추』, 『일본 평론』 등 4개 잡지를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잡지사와 신문사는 언론보국회를 "사상 폭력단"이라고 비난했다. 도조 내각이 무너지고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이 들어서면서 오가타 다케토라 정보국 총재가 언론 통제 완화 정책을 펼치자, 언론보국회는 정권과도 대립하게 되었다.
1944년 7월 7일, 제15회 이사회에서 가노코기 가즈노부가 이사장 겸 사무총장으로 승격되었다. 10월 2일 제17회 이사회에서 노무라 시게토미가 상무이사직에서 물러났고, 같은 달 말 제18회 이사회에서 모리모토 다다시가 후임으로 취임했다. 이는 언론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1945년 초, 일부 간부들은 군부 쿠데타 계획에 가담하기도 했다. 1945년 1월 19일, 아타미에서 열린 긴급 이사회에서 도쿠토미 소호는 '황국 확신의 10개 조'를 제안했고, 이는 1월 20일 가노코기 이사장을 통해 고이소 구니아키 수상에게 전달되었다. 5월 4일에는 스즈키 간타로 수상에게 비상대권 발동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1945년 5월 25일, 야마노테 대공습으로 언론보국회 사무소가 소실되면서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었다.
2. 4. 해산과 공직 추방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으로 존립 의의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정보국에 사단법인 해산 인가 신청서를 제출했고, 8월 21일 해산이 인가되었다. 정관상으로는 해산을 위해 총회에서 출석 회원의 과반수 표결이 필요했지만(제14조), 사무국은 "시국 절박"을 이유로 총회를 열지 않고 해산 신청을 했다. 8월 25일 자로 사무총장 시시가키 가즈노부 명의로 나온 신문 광고 "대일본언론보국회 회원 제현에게 고함"을 통해 회원들에게 해산 사실을 알렸다.[2]1946년 1월 4일,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대일본언론보국회를 초국가주의 단체로 지정하여 해산 대상으로 정했다.[2] 또한, 임원들은 공직 추방 대상이 되었다. 일반적인 학자·문필가 추방에는 G항("기타 군국주의자 및 극단적 국가주의자")이 적용되었지만, 대일본언론보국회 임원에게는 C항("극단적인 국가주의적 단체, 폭력주의적 단체 또는 비밀 애국 단체의 유력 분자")이 적용되었다.[2] 이는 민정국이 대일본언론보국회를 "강력한 사상 단체로서의 실체를 가지고 사상전을 수행하기 위한 지도적 영향력을 실제로 행사하는 존재"로 간주했기 때문이다.[2]
이후, 추방이 해제되어 언론계에 복귀한 사람도 있다.
3. 조직
대일본언론보국회는 도쿠토미 이치로를 회장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정관에 따르면, 대일본언론보국회는 '국체의 본의에 의거하여 성전 완수를 위해' 회원 상호 간의 연성을 도모하고 일본 세계관을 확립하여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원리와 구상을 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정보국의 지도 하에 다음과 같은 사업을 수행했다.
- 회원 상호 간의 사상적 연성
- 대동아공영권의 원리와 구상에 관한 공동 연구
- 황국 국내외의 사상 동향에 관한 조사 연구
- 황국의 내외에 대한 언론 활동
- 일반 언론 활동의 지도 육성
- 황국 국내외에 대한 계몽 선전 자료의 수집 제작
- 대동아 각 지역에서의 언론 활동과의 연계
- 관계 관청과의 연락 및 제 단체 등과의 제휴
- 기타 본 회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업
정회원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회장이 선정했으며, 정기 총회는 매년 1회, 임시 총회는 필요에 따라 소집되었다. 총회 결의는 출석 회원 과반수로 결정되었고, 가부 동수일 경우에는 의장이 재결하였다. 회장은 정보국 총재가 추천한 자를 임명했으며, 이사 및 감사는 회원 중에서 회장이 선임했다. 이사 및 감사의 선임 및 해임 등은 정보국 총재의 승인을 거쳐야 했다.
3. 1. 임원
| 직책 | 이름 |
|---|---|
| 회장 | 도쿠토미 이치로 |
| 전무 이사 | 카노코기 요리노부 |
| 상무 이사 | 쓰쿠이 타츠오, 노무라 시게오미, 이자와 히로시 |
| 이사 | 아키야마 켄조, 이나하라 카츠지, 이치카와 후사에, 오노 세이이치로, 오구시 토요오, 오쿠마 노부유키, 오시마 유타카, 카다 타다오미, 코마키 사네시게, 코사카 마사아키, 타카야마 이와오, 사이토 류, 사이토 타다, 사이토 쿄, 사토 미치지, 신메이 마사미치, 소사 타네지, 토미치카 키요시, 나카노 토미오, 하시즈메 아키오, 후지타 토쿠타로, 후루카와 타케시, 호즈미 시치로, 야마자키 야스즈미 |
| 감사 | 스미다 쇼이치, 후나타카 나카, 모리시타 쿠니오 |
3. 2. 정관 (일부 발췌)
; 제2장 목적 및 사업: 제3조
國體|국체일본어의 본의에 의거하여 聖戰|성전일본어 완수를 위해 회원 상호 간의 연성을 도모하고 일본 세계관을 확립하여 대동아 신질서 건설의 원리와 구상을 천명, 대성하며 나아가 황국 국내외의 사상전에 헌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제4조
본 회는 전 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보국 지도 하에 다음의 사업을 행한다.
# 회원 상호 간의 사상적 연성
# 대동아 신질서의 원리와 구상에 관한 공동 연구
# 황국 국내외의 사상 동향에 관한 조사 연구
# 황국의 내외에 대한 언론 활동
# 일반 언론 활동의 지도 육성
# 황국 국내외에 대한 계몽 선전 자료의 수집 제작
# 대동아 각 지역에서의 언론 활동과의 연계
# 관계 관청과의 연락 및 제 단체 등과의 제휴
# 기타 본 회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업
본 회는 그 사업과 관련하여 필요할 때에는 정부에 의견을 진술한다.
; 제3장 회원
: 제6조
정회원은 본 회의 목적 달성에 헌신하려는 자 중에서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회장이 이를 선정한다.
; 제4장 총회
: 제12조
정기 총회는 매년 1회, 임시 총회는 이사회에서 그 필요를 인정할 때 또는 회원 과반수로부터 그 청구를 받았을 때 이를 소집한다. 총회를 열고자 할 때에는 회의의 목적이 되는 사항, 회의의 일시 및 장소를 명기한 소집장을 회의일로부터 적어도 10일 전에 발송해야 한다.
: 제14조
총회의 결의는 출석 회원 과반수로 결정한다. 가부 동수일 경우에는 의장의 재결에 따른다.
회원의 표결권은 각 1표로 한다. 위임에 의한 표결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관의 변경 및 해산의 결의에 대해서도 전 2항을 적용한다.
: 제15조
총회의 결의는 주무 관청의 인가를 거치지 않으면 그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다.
; 제5장 임원
: 제17조
회장은 정보국 총재가 추천한 자를 임명한다.
회장은 이사로서 본 회를 대표하고 회무를 통괄한다.
회장은 총회, 이사회 및 평의원회를 소집하고 의장으로서 그 의사를 통괄한다.
: 제18조
이사 및 감사는 회원 중에서 회장이 이를 선임한다.
: 제23조
이사 및 감사의 선임 및 해임, 사무국장 및 사무국 부장의 보직 및 해산은 정보국 총재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4. 출판물
- 대일본언론보국회 편, 《세계관의 싸움》, 동맹통신사 출판부 (일본 사상전 총서 제1집), 1943년 9월
- 대일본언론보국회 편, 《사상전의 근본》, 동맹통신사 출판부 (일본 사상전 총서 제2집), 1943년 9월
- 대일본언론보국회 편, 《국가와 문화》, 동맹통신사 출판부 (일본 사상전 총서 제3집), 1943년 9월
- 대일본언론보국회 편, 《사상전 대학 강좌》, 시대사, 1944년 1월
- 대일본언론보국회 편, 《대동아공동선언》, 동맹통신사, 1944년 4월
- 《언론보국》 (기관지, 1943년 10월 ~ 1945년 5월)
참조
[1]
백과사전
日本大百科全書, 世界大百科事典, 国史大辞典
小学館, 平凡社, 吉川弘文館
[2]
서적
日本文学報国会
1993
[3]
서적
일본의 역사 25 태평양 전쟁
주오 공론신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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