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항복
1. 개요
일본의 항복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1944년 사이판 섬 함락 이후 일본은 전쟁 지속에 어려움을 겪었고, 1945년에는 소련의 중재를 통한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이 대일 참전을 개시하면서 일본은 항복을 결심했다.
1945년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을 일본 정부가 묵살하자,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소련은 만주를 침공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8월 10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8월 15일 쇼와 천황의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9월 2일, 도쿄만에서 항복 문서 조인식이 거행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일본은 연합군의 점령 하에 놓였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했다.
| 날짜 | 1945년 9월 2일 |
|---|---|
| 장소 | 도쿄만 미주리 함상 |
| 결과 | 일본 제국의 항복, 연합군의 승리 |
| 서명자 |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제국)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
| 일본 측 | 히로히토 스즈키 간타로 도고 시게노리 우메즈 요시지로 |
|---|---|
| 연합군 측 | 해리 S. 트루먼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 장제스 |
| 이전 사건 | 포츠담 선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만주 침공 일본 본토 공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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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 본토 공습 마리아나 제도 가잔·류큐 열도 기아 작전 해군 포격 사가미만 사할린 쿠릴 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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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자 | 1945년 9월 2일 |
|---|---|
| 장소 | 도쿄만, 미주리 함상 |
| 서명국 | 미국 중화민국 영국 소련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
| 서명자 (일본) | 시게미쓰 마모루 |
| 서명자 (연합군) | 더글러스 맥아더 |
| 내용 | 일본 제국의 항복 연합군 점령하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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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항복 -
일본의 항복문서
일본의 항복문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체결한 공식 문서로, 미주리 함상에서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과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이 일본을 대표하여 서명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비롯한 연합국 대표들이 서명했으며, 포츠담 선언의 조항을 수용하고 이행할 것을 명시하여 일본의 군국주의 해체와 전후 질서 재편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일본의 항복 -
V-J Day in Times Square
V-J Day in Times Square는 1945년 8월 14일 일본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종식 당시 타임스 스퀘어에서 촬영된, 수병이 간호사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승리의 기쁨과 성폭력 정상화라는 상반된 시각으로 해석되며 다양한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
1945년 9월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모체로 일본 패망 직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아 발족한 단체로, 일제 타도와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전국적인 치안 유지와 행정 공백 해소에 기여했으나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해체되었다. -
1945년 9월 -
대일 전승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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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이 건국동맹을 모체로 일본 패망 직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아 발족한 단체로, 일제 타도와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전국적인 치안 유지와 행정 공백 해소에 기여했으나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해체되었다. -
1945년 8월 -
포츠담 회담
2. 포츠담 선언 수락까지의 경위
1944년 7월, 사이판 전투에서 사이판섬이 함락되자, 도조 히데키 내각은 총사퇴했다. 그러나 이후 내각도 전쟁을 계속했고, 전쟁 종결 움직임은 수면 아래에서 계속되었다.
고이소 내각은 본토 결전을 준비하며 비밀리에 평화 공작을 모색했다. 우가키 가즈시게를 중국 대륙에 파견해 장제스 정권과 평화 협상을 시도했고, 1945년 3월에는 왕징웨이 정권 고관 뮤우빈을 초청해 평화 중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 그를 불신해 고이소 구니아키 수상과 대립, 내각 불일치로 총사퇴했다.
1945년 2월, 고노에 후미마로 전 수상을 중심으로 한 그룹은 전쟁 장기화 시 "소련군 점령과 '일본 적화'" 위험성을 강조하며 쇼와 천황에게 전쟁 종결을 요구하는 "고노에 상소문"을 제출했다. 그러나 천황은 거부했고, 헌병대는 "요한센 그룹"을 체포했다. 군·정·관은 "국체 유지"를 주장하며 승산 없는 전쟁을 계속했다.
1945년 4월 7일 성립된 스즈키 간타로 내각의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은 소련을 중재자로 평화 협상을 시도했다. 도고는 요시프 스탈린이 일본을 "침략국"이라 칭한 것에서 연합국과 평화 협상 기회를 놓쳤다고 보았지만, 육군은 일소 중립 조약 종료 이전 만주 침공 회피를 위한 외교 협상을 원했다. 소련 중재 시 군부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과, 협상 결렬 시 일본의 외교적 고립이 명백해져 대본영도 항복 조건을 수용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1945년 5월,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도고는 소련 참전 방지 및 중립 확약 외교 협상 합의를 얻었다. 처음에는 전쟁 종결도 목적에 포함되었고, 소련 중재 대가로 남사할린, 쿠릴 열도 북쪽 절반, 만주 철도망 양여를 결정했었다. 그러나 아나미 고레치카 육상이 반대하여 위 2항목만 목적으로 했다. 도고는 히로타 고키 전 수상을 통해 야코프 말리크 주일 소련 대사와 회담했지만, 전쟁 종결 조건이나 "전쟁 종결 요청"임을 명시하지 않아 성과가 없었다.
1945년 6월 6일,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국체 유지와 황토 보위"를 위한 전쟁 완수 "향후 채를 베키 전쟁 지도의 기본 대강"이 채택, 어전 회의에서 결정되어 일본의 조기 전쟁 종결은 표면상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기도 고이치 내무대신, 도고,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은 소련 중재로 움직였다. 쇼와 천황은 기도 제안에 동의, 6월 22일 어전 회의에서 소련에 평화 중재를 신속히 실시하도록 정부 수뇌에게 요구했다.
히로타·말릭 회담은 진전이 없었다. 히로타는 평화 중재 조건으로 만주국 중립화를 제안했지만, 말릭은 "고려될 것"이라 답했다. 7월 7일, 천황은 도고에게 "친서 특사 파견"을 제안, 7월 12일, 고노에가 특사로 임명, 주소 일본 대사관을 통해 소련에 전달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유럽 승전 후 3개월 내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영미와 비밀 합의, 일본의 요청은 받을 생각이 없었다. 5~6월, 포르투갈, 스위스 재외 공관 육해군 주재 무관이 소련 대일 참전 정보를 일본에 보냈고, 아사이 이사무 중좌가 "시베리아 철도 소련 병력 극동 이동"을 관동군에 보고했지만, 군부와 외무성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거나 방치했다.
2.1. 소련의 역할
소련은 얄타 회담에서 대일 참전을 약속했다. 이를 위해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일본과의 협상을 질질 끌면서 소련의 중재를 통한 평화에 대한 헛된 희망을 심어주었다. 동시에 미국과 영국과의 관계에서 소련은 카이로 선언(얄타 회담에서 재확인됨)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 선언은 연합국이 일본과 별도의 또는 조건부 평화를 맺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일본은 모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해야 했다. 소련은 이러한 요구를 약화시키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반대하여 전쟁을 장기화했다. 이는 소련군을 서부 전선에서 극동으로 이동시키고 만주국, 몽강, 조선 북부, 사할린 남부, 쿠릴 열도를 정복하고, 홋카이도 (루모이 상륙을 시작으로)를 정복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1945년 7월, 소련은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포츠담 회담을 주최하고, 영국, 미국, 중화민국의 수뇌 회담에 의한 포츠담 선언에 동의한다. 그때, 소련에 대한 고노에의 평화 공작에 대해, 미영과 협의하여,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까지 일본 정부의 조회를 방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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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소련에 의한 평화 중재에 계속 기대를 걸었다.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은 최고 전쟁 지도 회의와 각의에서 "본 선언은 조건부 강화이며, 이것을 거부할 때는 매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스즈키 간타로 수상은 기자 회견에서 7월 28일에 "정부로서는 중대한 가치 있는 것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묵살하고, 단호히 전쟁 완수에 매진한다"고 말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에는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가 있었지만, 일본의 항복을 결정지은 것은 1945년 8월 9일 새벽의 소련의 대일 참전이었다. 일소 중립 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으로부터의 갑작스러운 조약 파기와 선전포고, 그리고 만주 침공에 의해 일본은 포츠담 선언의 무조건 수락에 의한 항복밖에 선택지가 없어졌다.
2.2. 미국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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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대규모의 최고 기밀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을 승인했다. 레슬리 R. 그로브스 주니어 소장의 지휘 아래 진행된 이 계획은 미국 전역의 수십 개 비밀 시설에서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했으며, 1945년 7월 16일 최초의 시제품 무기가 트리니티 핵실험에서 폭발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미국 계획가들은 폭탄 사용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독일을 상대로 사용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독일이 폭탄이 준비되기 전에 패배할 것이 분명해졌다. 1945년 4월과 5월, 그로브스는 표적 목록 작성 위원회를 구성했다. 주요 기준은 표적 도시가 재래식 폭격으로 피해를 입지 않아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표적 위원회 목록에는 히로시마, 요코하마, 고쿠라, 니가타 등 18개 일본 도시가 포함되었으나, 전쟁장관 헨리 L. 스티슨의 주장에 따라 교토는 제외되었다.
부통령 헨리 A. 월리스는 계획 초창기부터 참여했지만, 후임 해리 S. 트루먼은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 사망 후 대통령이 된 지 11일이 지나서야 스티슨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1945년 5월 2일, 트루먼은 자문 그룹인 임시 위원회 구성을 승인했다. 6월 1일, 위원회는 폭탄을 노동자들의 집으로 둘러싸인 전쟁 공장에 대해 가능한 한 빨리 사용하고, 경고나 시위는 하지 않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완성 후 사용은 이미 가정되어 있었기에 위원회 권한에는 폭탄 사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프랑크 보고서 형태의 항의가 있은 후, 위원회는 폭탄 사용을 재검토하여 실제 전장 배치 전에 "시위"를 해야 하는지 과학 패널에 질문했고, 6월 21일 과학 패널은 대안이 없다고 확인했다.
트루먼은 포츠담에서 트리니티 실험 성공 보고에 열광했고, 폭탄이 일본과 소련 모두에게 영향력을 준다고 믿었다. 1945년 6월 18일, 트루먼은 올림픽 작전을 논의했다. 조지 C. 마셜 장군은 소련군 참전을 지지하며 일본 항복을 이끌 것이라 믿었다. 존 J. 매클로이는 정치적 해결책을 제안하고 원자폭탄 투하 경고를 질문했다. 7월 3일 국무장관이 될 제임스 번스는 소련에 알리지 않고 경고 없이 가능한 한 빨리 사용하기를 원했다.
3. 결정적 계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화민국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다. 이에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같은 날 소련군도 만주국을 침공했다.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했고, 나가사키 원폭 투하 후에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더 많은 민간인 희생이 있을 것이라며, 일본의 항복만이 폭격을 멈추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원폭의 위력을 과소평가했지만, 미국은 두 번째 폭탄 투하를 통해 일본에 항복을 압박했다.
3.1. 원자폭탄 투하의 영향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화민국 정부 수뇌들이 모여 일본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지만, 일본 제국은 이를 묵살했다. 그 결과,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소련군도 8월 9일 만주국을 침공했다.
이 두 발의 원자폭탄은 일본 제국군이 점령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독립 운동을 야기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켰다. 8월 13일에는 호치민의 8월 혁명이 일어났고, 8월 14일 쇼와 천황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다.
하지만 원자폭탄 투하보다 소련의 침공이 일본의 항복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소련의 한반도 진입, 쿠릴 열도 상륙 작전 등은 일본에 큰 위협이었다.
3.2. 소련의 참전
소련의 참전은 일본의 항복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만주국을 침공했다. 이는 소일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다.
워드 윌슨은 포린 폴리시에서 소련의 만주 침공이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소련의 한반도 진입, 쿠릴 열도 상륙 작전, 홋카이도 상륙 작전 구상 등 일본 본토에 대한 직간접적인 군사적 공세는 일본군에게 매우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4. 포츠담 선언 체결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어 독립했고, 8월 17일에는 인도네시아에서 독립 선언이 나왔다. 8월 18일에는 만주국이 멸망했다.
9월 2일, 포츠담 선언이 체결 즉시 발효되었다.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9월 2일을 '대일 승전 기념일(VJ Day)'로 선언했다. 같은 날, 호치민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5. 일본의 항복 과정 (8월 10일-15일)
1945년 8월 10일, 천황회의에서 포츠담 선언 수락 여부를 놓고 논의가 있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쇼와 천황이 직접 평화를 원한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항복으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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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 의사를 동맹통신사를 통해 모스 통신으로 교전국에 직접 통지했고, 가세 준이치 주스위스 공사와 오카모토 스에마사 주스웨덴 공사를 통해 양국을 경유하여 연합국에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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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연합국은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에 대한 답변(번즈 답변)을 보냈다. 제임스 F. 번즈 국무장관의 공식적인 답변은 "항복 시부터, 천황 및 일본 정부의 국가 통치 권한은 항복 조항의 실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는 연합군 최고 사령관에 종속(subject to)한다"는 것이었다.
8월 14일, 쇼와 천황은 다시 한번 천황회의를 소집하여 포츠담 선언 수락을 최종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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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쇼와 천황은 옥음방송을 통해 일본 국민에게 항복을 발표했다.
5.1. 항복 결정 과정에서의 갈등
1945년, 일본 지도부는 전쟁이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인지했지만, 전쟁 종결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소위 "평화파"는 소련의 중재를 통한 협상을, 강경파는 연합군에 큰 피해를 강요하는 "결정적" 전투를 통해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려 했다.
일본 군부 내에서는 항복에 반대하는 세력이 컸다. 이들은 결호 작전을 통해 본토 방어를 강화하고, 가미카제 특공대 등을 동원하여 연합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려 했다. 일본은 역사상 성공적인 침략을 당하거나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항복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쇼와 천황은 전쟁 지속이 국가의 파괴와 더 큰 희생을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45년 6월, 천황은 기존 정책에 얽매이지 않고 전쟁 종결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연구할 것을 지시했다. 8월 10일 새벽, 천황은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천황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일부 군부 세력은 항복을 막기 위해 쿠데타를 시도했다. 궁성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8월 15일 새벽에 발생했지만, 곧 진압되었다. 같은 날 정오, 천황은 옥음방송을 통해 일본 국민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5.2. 옥음방송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표준시에 천황의 녹음된 전국 연설이 방송되었다. 이 연설에서 천황은 종전 칙령을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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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품질의 녹음과 천황이 칙령에서 사용한 고전 일본어로 인해 대부분의 청취자에게 녹음 내용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또한, 천황은 항복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녹음 직후 일본이 실제로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천황의 연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다양했다. 많은 일본인들은 단순히 연설을 듣고 최선을 다해 생활을 계속했지만, 일부 군 장교들은 항복보다 자살을 선택했다. 도쿄 황궁 앞에 작은 군중이 모여 울었지만, 존 도워(John Dower) 작가의 말처럼 그들이 흘린 눈물은 "고통, 후회, 슬픔, 그리고 속임수를 당했다는 분노, 갑작스러운 공허함과 목표 상실" 등 여러 감정을 반영했다.
5.3. 항복 이후의 저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발표에도 불구하고, 일부 일본군 병사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저항을 계속했다. 이들은 주로 천황의 항복 결정을 믿지 않거나, 항복을 불명예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조직적이지 못하고 산발적이었으며, 대부분의 일본군은 결국 항복했다.
8월 12일 늦은 밤, 하타나카 겐지 소좌를 비롯한 일부 육군 장교들은 포츠담 선언 수용을 막기 위해 쿠데타를 계획했다. 이들은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독자적으로 쿠데타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8월 14일 밤, 이들은 황궁을 점령하고 항복 연설 녹음을 막으려 했으나, 타나카 시즈이치 동부방면군 사령관의 설득으로 실패했다. 쿠데타 주동자였던 하타나카 소좌는 8월 15일 천황의 항복 방송 직전에 자결했다.
일본군은 각 지역에서 GHQ에 항복했다. 항복 장소는 1945년 9월 2일 항복 문서 조인 직후 GHQ에서 발령한 「일반명령 제1호」에 따라 지정되었다.
* 아오모리현에서는 9월 9일, 해군 대湊경비부 사령관 우가키 마토메, 육군 제50군 사령관 호시노 도시모토(星野利元) 등이 오미나토 만(大湊湾) 해상의 미국 군함 파미나트(Paminant) 함상에서 항복 명령서에 서명했다.
* 남서제도에서는 9월 7일, 제28사단 사령관 나야 도시오 중장 등이 오키나와 전투 항복 문서에 서명하여 오키나와 전투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6. 항복 문서 조인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 측 전권 대표단과 연합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항복 문서 조인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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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56분, 일본 측 전권 대표단이 미주리호 함상에 도착했다. 일본 측 대표단은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와 대본영 전권 참모총장 우메즈 미치타로 육군대장, 종전연락중앙사무국 국장 오카자키 카츠오, 참모본부 제1부장 미야자키 슈이치 육군 중장, 군령부 제1부장 토미오카 사다토시 해군 소장(군령부 총장 토요다 소무 해군대장은 불참), 대본영 육군부 참모 나가이 야쓰지 육군 소장, 해군성 출사 요코야마 이치로 해군 소장, 대본영 해군부 참모 시바 카츠오 해군 대좌, 대본영 육군부 참모 스기타 이치지 육군 대좌, 내각정보국 제3부장 가세 슌이치, 종전연락중앙사무국 제3부장 오타 사부로 등이었다.
이미 도착해 있던 연합국 측 전권 대표단에는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중화민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17개국 대표단과, 8월 8일 참전하여 15일 일본군의 휴전을 무시하고 만주와 에토로후섬 등에서 진군을 계속했던 소련 대표단도 "승전국"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9시 2분, 일본 측 전권 대표단이 대연합국 항복 문서에 조인한 후, 연합국 측 전권 대표단이 조인했다. 9시 25분,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항복 문서 조인식 종료를 선언하면서 1939년 9월 1일부터 7년간 이어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었다.
하지만 조인식 직후, 캐나다 대표가 서명란을 잘못 기재하여 4개국 대표의 서명란에 차이가 발견되어 항복 문서 수정이 이루어졌다. 일본용 문서에서 캐나다 대표 L. 코스그레이브 대좌가 프랑스 대표단 란에 서명했고, 프랑스 필립 르클레르 대장은 네덜란드 대표 란에, 네덜란드 콘라트 헬프리히 대장은 뉴질랜드 대표 란에, 뉴질랜드 레너드 이시트 소장은 란 밖에 서명하여 캐나다 대표 란이 공란이 되었다.
네덜란드 대표 헬프리히 대장은 일본 측 대표단 오카자키 카츠오에게 서명 실수를 지적했다. 맥아더 원수 참모장 리처드 서덜랜드 중장은 일본 측에 항복 문서를 그대로 수용하도록 설득했지만, 시게미쓰가 "불완전한 문서로는 추밀원의 조약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다"며 거부했다. 결국 서덜랜드 중장이 잘못된 4개국 서명란을 수정했고, 일본 측 대표단은 이를 수용하고 9시 30분에 퇴함했다.
7. 점령과 전후 처리
일본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한 점령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이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성립된 일본 제국의 붕괴를 의미했다. 천황 중심의 "일본 제국"에서 일본국 헌법과 미일 안보 조약을 기반으로 하는 "일본국"으로 변화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1945년 8월 30일 도쿄에 도착하여 연합군 인원의 일본인 폭행 금지, 일본 식량 섭취 금지, 일장기 및 "욱일기" 게양 제한 등의 법령을 공포했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서 일본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정식 항복이 이루어졌다. 시게미쓰 마모루가 일본 정부를 대표하여 서명하고, 우메즈 요시지로 대장이 제국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서명했다. 맥아더는 연합국을 대표하여 서명했고, 체스터 W. 니미츠 제독이 미국 대표로 서명했으며, 중국 대표 쉬융창 장군 등 다른 8개 연합국 대표들이 서명했다.
항복식에는 매슈 페리가 일본 개항을 강요했던 가나가와 조약 당시 사용했던 미국의 국기가 사용되었다. 항복 후 일본 전범 재판이 시작되었고, 극동 국제군사재판을 위한 법적 절차가 1946년 1월 19일에 발표되었다. 히로히토는 재판받지 않았고, 황실 가족 구성원도 기소되지 않았다.
GHQ는 전후 개혁을 추진했으며, 1946년 11월 3일 일본국 헌법이 공포되어 1947년 5월 3일 시행되었다. 일본의 항복 후, 연합군은 일본군 포로와 민간인에 대한 식량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면서 대부분의 연합국과 일본 간의 전쟁 상태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고, 일본과 소련은 1956년 소일 공동선언으로 평화를 맺었다.
7.1. 한반도의 분단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7.2. 기타 지역의 독립
일본의 항복으로 대동아공영권은 붕괴되었고, 일본이 점령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독립을 이루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마지막으로 알려진 잔류병인 나카무라 테루오가 1974년 12월에 은신처에서 나왔다.
8. 구 일본 제국의 영토 변화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어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 재확인으로 일본과 단절되었다.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다가 3년 후인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각각 독립했다.
일본이 점령했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프랑스로 반환되었다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독립했다. 호치민은 베트남으로 독립하려 했으나 연합군은 만장일치로 프랑스로 넘기는 주장을 하여 다시 프랑스로 넘어갔다. 1945년에 프랑스와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4년 간 전쟁 끝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제네바 협정으로 인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되어 미국이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남베트남을 강제 점령하여 결국 남베트남은 1954년이 돼서야 독립하였다.
타이완은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괴뢰 국가였던 만주국은 소련에 의해 멸망하였고, 만주는 중화민국에 편입되었다.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다가 1945년에 항복하자마자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선언했으나 네덜란드가 다시 이 곳을 식민지로 만들려 하자, 수카르노가 4년간 네덜란드와 전쟁하여 1949년이 돼서야 인도네시아로 독립하였다.
9. 일본의 주권 회복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하우스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일본을 포함한 49개국에 의해 조인되어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이 조약이 발효되면서 연합국군에 의한 일본 점령이 종료되었다.
강화 회의에 초청된 52개국 중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미국, 영국 등과의 의견 대립으로 조인을 거부했고, 인도, 미얀마, 유고슬라비아는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국공 내전 결과 타이완으로 망명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서독과 동독, 이탈리아는 초청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회의 참석을 주장했지만, 당시 조선반도는 일본 영토였고 많은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일본군과 만주군 병사로 참전했던 점(후일의 박정희 대통령 등), 그리고 임시정부를 승인받지 못한 것을 이유로 미국으로부터 초청을 거부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