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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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키 기요시는 일본의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1897년에 태어나 1945년에 사망했다. 교토 제국대학에서 니시다 기타로에게 사사받았으며, 유럽 유학을 통해 하이데거, 리케르트 등 당대 저명한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에는 호세이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파스칼 연구, 마르크스주의 연구 등을 통해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구상력의 논리'를 주요 저서로 남겼으며, 쇼와 연구회에 참여하여 협동주의를 주창하기도 했다.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옥사하였으며, 20세기 전반 일본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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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키 기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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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미키 기요시 |
| 출생일 | 1897년 1월 5일 |
| 출생지 | 일본 효고현 이보군 히라이촌 |
| 사망일 | 1945년 9월 26일 |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나카노구 도요타마 형무소 |
| 학력 | |
| 모교 | 교토 제국대학 |
| 지도 교수 | 니시다 기타로 |
| 경력 | |
| 소속 기관 | 호세이 대학 |
| 군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제10보병사단 |
| 복무 기간 | 1920년, 1942년 |
| 사상 | |
| 주요 관심사 | 전통 인본주의 역사 철학 철학적 인간학 변증법적 유물론 |
| 학파 | 교토 학파 후기 헤겔주의 |
| 영향 | 니시다 파스칼 칸트 슐라이어마허 마르크스 리케르트 딜타이 하르트만 하이데거 가다머 뢰비트 |
| 주요 사상 | 파스칼에 있어서의 인간 인간학의 마르크스적 형태 구상력의 논리 사회적 신체 |
| 영향을 준 인물 | 마스다 게이사부로 카라키 준조 쿠노 오사무 미야가와 토루 |
2. 생애
미키 기요시는 1897년(메이지 30년) 1월 5일 효고현이보군히라이촌 고가미(후의 다쓰노시, 현 · 다쓰노시 이사이정)에서 아버지 미키 에이키치(三木英吉), 어머니 신(しん)의 장남으로서 태어났다. 생가는 농업을 본업으로 하였고, 키요시의 조부 때부터 미곡상을 경영하였기 때문에 마을의 "미야(米屋, 쌀가게)"로 알려져 있었으며, 자산가 계급에 속하는 집안이었다. 후에 네 명의 남동생과 세 명의 여동생이 태어났다. 동생 중 한 명은 중국 문학자인 미키 카츠미이다.
1903년(메이지 36년) 히라이촌의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마을의 자산가 자제였고 학업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매우 귀여움을 받았다. 구제 다쓰노 중학교에 1909년(메이지 42년) 4월에 입학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도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구제 다쓰노 중학교에 국어 교사로 부임해 온 테라다 키지로로부터 자연과 인생』을 부교재로 받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서를 많이 읽고 문학에 열중하게 되었다.
1914년 3월에 졸업했다. 제일고등학교[15]에서 교토제국대학으로 진학하여 니시다 기타로에게 사사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니시다뿐만 아니라 도호쿠제국대학에서 전임해 온 타나베 하지메나 사유다 키이치로 등으로부터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또한, 타니가와 테츠조, 하야시 타츠오, 오다 히데토 등과 교우 관계를 맺었고, 그들의 영향으로 많은 와카를 지었다. 특히 타니가와 테츠조와는 친분이 있었고, 시를 지으면 항상 타니가와에게 보여주고 비평을 받았다. 나가타 모조의 딸 타키코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타키코는 타니가와의 아내가 되었다. 1920년 4월에 유예되었던 징병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제2 乙종이었다. 같은 해, 졸업 논문으로 『비판철학과 역사철학(칸트 철학에 대한 일별)』[16]
을 정리하고 대학 졸업[17] 후 대학원에 진학[18]하면서, 제삼고등학교 (구제), 룡가대학(제삼고등학교가 아니라 오타니대학이라는 설도 있다[19])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1년 4월 교육 소집되어 석 달 동안 히메지의 보병 제10연대에서 군대 생활을 보냈다.
1922년에는 하다노 세이이치의 추천과 이와나미 시게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독일로 유학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하인리히 리켈트의 세미나에 참가하여 역사철학을 연구했다. 1923년 가을에는 마르부르크 대학교로 옮겨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사사했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강의에도 출석했다. 하이데거의 조수 카를 레비트의 영향으로 프리드리히 니체와 쇠렌 키르케고르의 실존철학에 대한 관심을 깊게 했다. 1924년 8월에는 파리로 옮겨, 대학에 자리를 두지 않고 프랑스어 일상 회화 공부를 했다. 이 기간 파스칼 연구를 시작했다.


1925년 귀국하여, 이듬해 6월에는 처녀작 『파스칼에 있어서의 인간 연구』를 발표했다. 같은 달, 어머니 신이 사망했다.
1927년에는 호세이 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주임교수가 되었다. 미키는 모교인 교토제국대학 취직을 희망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타니자와 에이이치와 아라카와 이쿠오는 여성 문제 때문에 학계로부터 퇴출당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이는, 교토시 도자기 시험장 초대 장장 후지에 나가요시의 미망인 후사와의 대학원 시절 교제가 문제시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후사의 집은 학생들이 모이는 일종의 살롱이 되어 있었고, 고학생의 지원을 잘 하고 있었다[20]。한편, 에이노 모토쓰나는
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같은 해 12월 창간된 이와나미 문고와도 깊은 관계가 있으며, 권말의 공약인 『[http://www.aozora.gr.jp/cards/001119/card42753.html 독서하는 자에게 바침]』의 초고는 미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1928년 3월 히가시바타 키미코와 결혼했다. 같은 해, 고바야시 이사무가 이와나미 서점에서 쫓겨났을 때, 이를 돕기 위해 만철로부터 의뢰받은 강연을 위한 여비 1500엔을 모두 주었다. 고바야시는 자신의 자본에 이 1500엔을 더하여 철탑서원을 세웠다. 이 이름을 지은 것은 고다 로한이다.
같은 1928년 10월 하니 고로 등과 함께 잡지 『신흥과학의 기치 아래』를 만들어 단순한 당파적인 교조에 머물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적인 전개도 꾀했지만, 1930년, 일본 공산당에 자금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전향을 했다. 호세이 대학을 사직했다. 이때의 유죄 판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교직에 종사할 수 없게 된 미키는, 활동의 장을 문필 활동으로 옮겨갔다.
1930년 10월에 외동딸 요우코가 태어났다(후에 도쿄대학 문학부의 최초 여성 교관 나가즈미 요우코(근세 통교 무역사 전공의 교수)가 된다. 키요시의 아내 키미코는 히가시바타 세이이치의 여동생이지만, 요우코의 유년기인 1936년 8월에 사망했다.
그 후, 저널리즘으로 활동하는 나날이 계속되었지만, 1930년대 후반에는, 고토 류노스케 등 코노에 후미마로의 친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쇼와 연구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그 철학적 기초 작업을 담당했다. 미키는 그때, '''협동주의'''라는 일종의 다문화주의적인 입장을 내걸었다. 이것은 군부, 특히 육군의 독주에 의해 경직되는 일중 관계에 대한 일본 측으로부터의 새로운 정책으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해군으로부터 기대를 모았지만, 중국 측으로부터의 지적인 응답도 없고, 현실적인 힘을 가지지 못한 채 단기간에 퇴색했다. 미키가 투옥된 것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므로 전후에 생존했다면, 그것만으로 전후 좌익의 영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치안유지법으로 투옥되어 있는 기간에, 프로레타리아 과학연구소 철학 연구부 주임을 해임되었으므로, 생존했다면 발목을 잡았을 가능성도 있다.
전후 간행의 『미키 키요시 저작집』에는, 미키가 쇼와 연구회에서 정리한 『신일본의 사상 원리』『신일본의 사상 원리 속편 』은 미수록이다. 후에 간행한 『미키 키요시 전집 제17권』에 『신일본의 사상 원리』『신일본의 사상 원리 』 양쪽이 수록되어 있다.
토오야마 시게키, 이마이 세이이치, 후지와라 아키라 공저 『쇼와사(구판)』(이와나미 신서, 1959년)에는, 쇼와 연구회의 혁신 멤버로서, 미와 코스케, 로우잔 마사미치, 카사 신타로 등 5명의 이름을 들고 있으면서, 미키의 이름만은 들고 있지 않다. 개정된 『쇼와사(신판)』에는, 아리마 요리나가, 카자미 아키라, 미와 코스케, 로우잔 마사미치, 카사 신타로, 사사 히로오와 함께 미키의 이름도 들고 있다.
전시 체제하에서는 자유로운 언론 활동에는 종래보다 철저한 탄압이 가해지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이성과 휴머니즘을 관철하기 위해, 체제의 내부로부터 체제의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 개량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 입장에서, 쇼와 연구회에 협력하게 되었다. 미키가 쇼와 연구회의 문화 연구회에 참가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지나 사변에 의해 세계에서 일본의 지위가 크게 바뀐 것에 대해, 쇼와 연구회 내에 세계 정책 연구회가 발족한다. 이 연구회는 각계의 권위자로부터 히어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미키가 1937년(쇼와 12년) 11월 중앙공론에 발표한 『일본의 현실』이 사카이의 눈에 띄어, 쇼와 연구회에서 미키가 『지나 사변의 세계적 의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미키가 쇼와 연구회 안에 사상·문화에 관한 연구회의 설립을 제안했다. 미키의 제안은 쇼와 연구회에 받아들여져 문화 연구회가 설립되고, 위원장이 될 것을 사카이로부터 요구받아 미키가 수락하고 쇼와 연구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미키가 쇼와 연구회에 참가한 시기에 대해서는, 늦어도 1937년 6월이라는 설도 있다. 미키는 문화 연구회에서 많은 항목에 대해, 위원의 보고 및 토론의 결과를 정리하여 종합 보고서로서 『신일본의 사상 원리』라는 팜플렛을 작성하고 1939년 1월에 발행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 팜플렛은 중국어로도 번역되었다. 이 성과를 받아 문화 연구회에서는, 『신일본의 사상 원리』의 속편이 되는 『신일본의 사상 원리 속편 』을 같은 해 9월에 정리했다.
총력전 체제에 대한 저항과 관여라는 양의적인 태도는, 동시대의 전향 지식인이 안고 있는 이중성이지만, 미키는 그 전형이었다. 이미 군부와 황도 우익에 의해 마르크스주의는 물론, 자유주의자도 또한, 자립적인 사회적 활동의 여지를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한 정치적으로 매우 숨 막히는 상황에 있어서, 총력전 체제의 효율화, 합리화는, 한편으로는, 체제파의 주류에 대한 어떤 종류의 비판적인 의견 표명을 가능하게 하는 마지막 가능성으로 보이고 있었다. 미키는 쇼와 연구회가 대정익찬회에 흡수되어 해산하게 되는 것에 대해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쇼와 연구회는 군부나 보수 세력에 의해 적대시되어, 본의 아니게 해산을 강요당했기 때문에, 마침내 그 흐름은 대정익찬회의 안에 흡수되어 간다. 그것에 의해, 총력전 동원의 합리성에 맡겨, 어떤 사회 개혁을 달성한다는 지식인의 당초의 기대는, 단순한 전쟁 협력으로 변질되어 간다. 1939년 11월, 고바야시 이토와 재혼한다. 1940년에는 막내 동생 켄이 중국에서 전사한다. 1943년에 아이오이의 어머니 생가인 마스이가에 시집간 여동생 하루미가 병사한다. 1944년 3월 22일에 아내 이토가 사망했다.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에 걸쳐서는, 어학 능력을 살려 유럽의 최첨단의 지적 성과를 도입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더 큰 이론적 틀 안에서 이해해 보려는 『구상력의 논리』를 꾀하고 있었지만, 미완으로 끝났다. 더욱 마지막에는 신란의 사상에 다시 매료되어 있다.
1945년, 치안유지법 위반[21]
의 피의자 타카쿠라 테루가 탈주했을 때 미키의 소개처인 사이타마현와시미야정을 방문했다。거기서 옷과 돈을 준 것을 이유로 검찰 구류 처분을 받고도쿄 구치소에 보내지고, 같은 해 6월 토요타마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이 형무소는 위생 상태가 열악했기 때문에, 미키는 거기서 옴을 앓고, 그것에 기인하는 신장병의 악화로, 종전 후 9월 26일에 독방의 침상에서 굴러 떨어져 사망한 것을 발견되었다. 。종전으로부터 한 달 남짓이 경과하고 있었다. 유해를 담은 관은 이틀 후, 누노카와 각자에몬이 빌린 짐수레를 이용하여 히가시바타 세이이치에게 인계되어 고엔지의 미키의 자택으로 운반되었다[22]
。
나카지마 켄조가 미키의 통곡의 당일에, 경시청에의 구인으로부터 7월 하순까지 바로 옆 감방에 있어 자세히 상황을 본 젊은이로부터 들은 이야기로서 기록하고 있는 곳에 따르면, 옴 환자의 사용했던 담요를 소독하지 않고 미키에게 사용시켰기 때문에 옴에 걸렸다는.
같은 형무소에 있던 나카무라 무네히코가 간수로부터 들은 곳에 따르면, 미키의 죄명은 하찮은 경범죄였기 때문에, 검사도 형무소도 여기서 죽게 되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종전 후는 곧바로 내보낼 의향이었지만, 아내에게 선행되어 가족이 없고, 신병 인수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석방이 난항했다. 그러는 사이에 옴이 악화되어, 맹렬한 가려움으로 뒹굴며 항상 침상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간수로부터도 방치되어 전신이 오물투성이가 되어, 악취 속에서 죽어갔다는.
미키의 통곡 자리에서, 미키와 오자키 히데미, 토사카 준과 친분이 있던 마쓰모토 신이치가 "정치범 즉시 석방을 연합군에 탄원하자"고 제안했지만, 그 제안이 갑작스럽고, 또 장소도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준비한 탄원서 초안을 꺼낼 수 없었다.
전술의 나카무라는, 미키와 동료수감자였던 가미야마 시게오도 나카니시 이사오도, 미키의 가까운 방에 있어, 혁명은 가깝다고 호언하면서도, 그에게는, 아무런 손을 내밀지 않았다. 곧 데려갔으면 살았을 것을, 동지나 제자들도 데려가러 간식을 주러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죽었고, 그들이 죽게 내버려둔 것과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는 용서할 수 없다, 등이라고 분개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GHQ는 미키의 옥사를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23]
。사령부는 내무성에 상황 설명을 요구했지만 종전시의 기밀문서 소각 때문에 없어져, 다시 정리되었다[24]。
패전으로부터 이미 한 달 남짓 경과하고 있으면서, 정치범이 옥중에서 가혹한 억압을 받고 있는 실태가 판명되어, 점령군 당국을 놀라게 했다. 구체제의 파탄에 대해, 당시 일본의 지배층이 얼마나 자각이 희박했는가에 대한 실례이다. 이 건을 계기로 치안유지법의 급거 폐지가 결정되었다。애초에 미키가 옥중에 갇혀 있던 것을 친한 친구들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던 것도 당시의 구금 제도의 실태를 나타내고 있다.
미키 키요시의 법명은 진실원 석청심(眞實院釋清心)이다. 참고로 장서(藏書)는 호세이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아버지 에이키치(미키 키요시의 조부인 키요스케의 사후, 이름을 이어 키요스케라고 칭했다)는 1956년에 사망했다.
1997년, 다쓰노시로부터 명예 시민의 칭호가 주어졌다[13]。
2. 1. 유년기와 교육
미키 기요시는 1897년 효고현 히라이무라(현재의 다쓰노시)에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4] 1909년 구제 다쓰노 중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후 제일고등학교[15]를 거쳐 교토제국대학으로 진학하여 니시다 기타로에게 사사했다.[14][15][16][17][18] 대학 재학 중에는 다나베 하지메 등에게서 학문적 영향을 받았으며, 타니가와 테츠조 등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14] 특히 타니가와 테츠조와는 친분이 깊었다.[14]1920년 교토 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5] 대학원에 진학하여, 류코쿠 대학과 오타니 대학에서 강사로 일했다.[5] 1921년에는 교육 소집으로 3개월간 군대 생활을 하였다.[14] 1922년 독일로 유학하여 하이델베르크에서 하인리히 리케르트에게 역사철학을 배웠고,[5]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교로 옮겨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사사했다.[5] 1924년에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블레즈 파스칼을 연구했다.[5]

2. 2. 유럽 유학
미키 기요시는 1922년 독일로 유학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하인리히 리케르트에게 역사철학을 배웠다.[5]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체제 하에서 경제가 궁핍했고, 프랑스의 루르 점령으로 인해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일본인 유학생들이 독일에 체류하고 있었으며, 미키는 하니 고로, 아베 지로, 아마노 테이유, 쿠키 슈조 등 15명이 넘는 유학생들과 교류했다.[3] 또한, 게오르크 지멜 밑에서 배우고 헝가리 혁명에 참가했던 카를 만하임, 헬만 그로크너, 에른스트 호프만, 오이겐 헤리겔 등과 교류했다.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교로 옮겨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배웠다.[5] 미키는 하이데거의 조교였던 카를 레비트의 영향으로 프리드리히 니체와 쇠렌 키르케고르의 실존철학에 대한 관심을 깊게 했다. 1924년에는 프랑스 파리로 이동하여 블레즈 파스칼을 연구했다.[5]
2. 3. 귀국 후 학문 활동
미키 기요시는 1925년 일본으로 귀국하여 《파스칼에 있어서의 인간 연구》(パスカルに於ける人間の研究일본어)를 저술했다.[3] 1927년 호세이 대학 철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으나,[6][7] 교토 대학의 고위직 임용은 거부되었다.[3] 1928년에는 도바타 키미코(戸畑喜美子)와 결혼했다.[3]1930년 1월, 일본공산당에 자금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6개월 간 구속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교수직을 사임하였다.[8] 같은 해 11월, 장녀가 태어난 지 3개월 후, 징역 1년을 선고받았지만 집행유예를 받았다.[3] 이후 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8] 주류 학계 밖에서 활동하며 광범위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대중적인 글을 썼다.[9] 학문의 자유의 확고한 지지자가 되었으며,[3] 그의 저서 중 하나 이상이 정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기도 하였다.[3] 1936년 그의 첫 번째 아내가 사망했다.[3]
2. 4. 쇼와 연구회와 정치 참여
미키 기요시는 1937년 쇼와 연구회의 문화 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9] 중앙공론 11월호에 발표한 「일본의 현실」이 쇼와 연구회의 사카이 사부로의 눈에 띄어, 쇼와 연구회 세계정책연구회에서 "중일전쟁의 세계사적 의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강연에서 미키는 이번 전쟁이 '''동아의 통일'''과 '''자본주의의 시정'''이라는 의의를 가진다고 주장했다.'동아의 통일'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 중심의 세계에서 동양이라는 것이 부각되어, 일본이 중일전쟁을 통해 대륙에 일본 문화를 가져와 새로운 동양 문화를 형성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쇼와 연구회는 일본이 중심이 되어 '동아의 통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자본주의의 시정'은 자유주의가 막다른 길에 이르고 공산주의가 대두했지만, 독일에서의 공산주의 실패를 전환점으로 파시즘이 대두한 가운데, 일본의 사명은 자유주의, 파시즘을 정립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근본적인 이념을 가지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미키는 동아 협동체론에서 일관되게 세계사적인 과제를 맡고 있었으며, 쇼와 연구회와 미키가 목표로 했던 근대화는 자본주의적인 근대화가 아니라 협동주의적인 사회였다.
고노에 후미마로의 신체제 운동의 브레인트러스트였던 쇼와 연구회에서[9] '협동주의'라는 일종의 다문화주의적인 입장을 내걸었다. 대동아 공영권을 구상했지만, 일본 제국 육군이 그 이념을 악용하여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대한 공격적인 확장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을 보고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9] 1940년 쇼와 연구회가 해체된 후 미키는 고립되고 낙담했다.[9] 1939년에는 고바야시 이토코와 재혼했다.
2. 5. 체포와 죽음
1945년, 미키 기요시는 정치범 다카쿠라 데루를 숨겨준 혐의로 체포되었다.[7] 스가모 형무소에 구속되었다가 도요타마 형무소로 옮겨졌으며,[7] 1945년 9월 26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40일 후 신장염으로 옥중에서 사망했다.[7][21] 그의 죽음은 수감자 학대의 결과로 추정되며,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큰 슬픔을 불러일으켰다.[7] 연합군 점령은 정치범 석방을 압박했다.[23]미키의 죄명은 경범죄였기 때문에, 검찰과 형무소는 종전 후 곧바로 석방할 의향이었지만, 가족이 없어 신병 인수자가 없었기 때문에 석방이 늦어졌다.[22] 그러는 사이 옴이 악화되어, 맹렬한 가려움으로 뒹굴며 항상 침상에서 떨어졌고, 전신이 오물투성이가 되어 악취 속에서 죽어갔다고 전해진다.[22]
미키의 옥사는 GHQ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23] 이 사건을 계기로 치안유지법의 폐지가 결정되었다.[24]
3. 사상
사토 노부에(佐藤信惠)는 미키 기요시가 니시다 기타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블레즈 파스칼의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며, 독자적이고 종합적인(syncretic) 접근 방식을 취했다고 평가한다.[4] 무라모토 쇼지(村本昭二)는 미키를 "일본 인본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이자 일본 사상가가 쓴 "실존주의 전통과 명시적으로 관련된 책을 처음으로 저술한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1926년 저서 『파스칼에 있어서의 인간 존재 연구』를 언급한다.[6] 미키 자신은 "좋은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상주의자이거나 인본주의자이다"라고 썼다.[6]
미키는 전통을 인간 행위에 의한 능동적이고 지속적인 전달로 보았으며, 헤겔주의자들과 보수적 전통주의자들의 내재적 진화론과 대조된다.[11] 1940년 에세이 "전통에 관하여"(On Tradition)에서 그는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전통의 초월성과 우리의 능동적인 태도를 모두 강조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11] 이를 통해 그는 실천과 전통의 통합을 강조한다.
미키의 사상은 말과 침묵의 철학, 자연과 역사, 주어와 객체, 로고스와 파토스, 과정과 순간, 유기체론과 변증법, 내재성과 초월성 등과 같이 대립되는 특정 개념의 본질을 강조했다.[4] 그의 철학은 변증법 또는 상상력의 논리를 대립되는 것들 사이의 화해 과정으로 보았으며, 이 과정의 주요 기관은 유형이나 형태를 창조하는 상상력이었다.[4]
1920년대 후반 일본에서 성장하는 노동 운동에 대한 반응으로 미키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세 권의 책, 「현대의식과 유물사관」(Modern Consciousness and the Materialist View of History, 1928), 「사회과학의 예비적 관념」(Preliminary Idea of Social Science, 1929), 「형식의 관념론적 이론」(Idealist Theory of Form, 1931)을 출판했다.[4] 이 기간 동안 미키는 특히 1930년 체포된 이후 자신의 철학을 마르크스주의와 구분하려고 노력했으며, 마르크스주의를 정치 이데올로기로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4] 그는 한때 프롤레타리아 과학 연구소의 회원이였지만 추방되었다.[7] 나카타 스테펜센(Kenn Nakata Steffensen)은 미키의 작품을 파시스트적이거나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으며,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민족주의, 관념론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다고 주장한다.[10]
미키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초기 철학을 본질적으로 기독교 개인주의의 전통에 속하는 것으로,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근본적으로 반 그리스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그의 하이데거 해석은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넓은 범주에 속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미키의 지적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12]
3. 1. 주요 사상적 배경
미키 기요시는 니시다 기타로의 '절대무' 개념과 '장소의 논리'를 철학적 기반으로 삼았다.[4] 신칸트학파, 특히 하인리히 리케르트의 역사철학은 미키의 초기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4] 그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영향으로 실존주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는 블레즈 파스칼 연구와 '구상력의 논리'에 반영되었다.[6]사토 노부에(佐藤信惠)는 미키 기요시가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블레즈 파스칼의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며, 독자적이고 종합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고 평가한다. 무라모토 쇼지(村本昭二)는 미키를 "일본 인본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이자 일본 사상가가 쓴 "실존주의 전통과 명시적으로 관련된 책을 처음으로 저술한 인물"로 평가한다.[6]
미키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연구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철학에 통합하려 했다.[4] 1920년대 후반 일본에서 성장하는 노동 운동에 대한 반응으로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출판했다.[4] 그러나 1930년 체포 이후, 미키는 자신의 철학을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구분하려 노력했다.[4] 그는 프로레타리아 과학 연구소(プロレタリア科学研究所)의 회원이였으나, 후에 추방당했다.[7]
미키는 말과 침묵의 철학, 자연과 역사, 주어와 객체, 로고스와 파토스, 과정과 순간, 유기체론과 변증법, 내재성과 초월성 등과 같이 대립되는 특정 개념의 본질을 강조했다.[4] 그의 철학은 변증법 또는 상상력의 논리를 대립되는 것들 사이의 화해 과정으로 보았으며, 이 과정의 주요 기관은 유형이나 형태를 창조하는 상상력이었다.[4]
미키는 하이데거의 초기 철학을 본질적으로 기독교 개인주의의 전통에 속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또한 독일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그의 지적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12]
3. 2. 파스칼 연구
미키 기요시는 1926년 《파스칼에 있어서의 인간 연구》(パスカルにおける人間の研究)를 출판하였는데,[6] 이 책은 그의 초기 대표작이다. 미키는 이 책에서 파스칼의 사상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안과 한계를 탐구했다.[6] 특히 파스칼의 '내기' 개념을 통해 인간의 실존적 선택과 신앙의 문제를 다루었다. 무라모토 쇼지(村本昭二)는 미키를 "일본 인본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이자 일본 사상가가 쓴 "실존주의 전통과 명시적으로 관련된 책을 처음으로 저술한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1926년 저서 『파스칼에 있어서의 인간 존재 연구』를 언급한다.[6]미키는 1924년 8월 파리를 방문하여 파스칼 연구를 시작했다. 1925년 2월, 첫 번째 논문인 「파스칼과 생의 존재론적 해석」을 완성하여 일본으로 보냈고, 같은 해 5월 잡지 『사상(思想)』 제43호에 게재되었다. 이후 「애정에 관한 논고 - 파스칼 수기(覚書) -」(8월, 제46호), 「파스칼의 방법」(11월, 제49호), 「도박(賭)」(12월, 제50호)을 발표했다. 「세 가지 질서」는 게재되지 않았고, 귀국 후 「종교에 있어서 생의 해석」을 추가하여 1926년 6월 《파스칼에 있어서의 인간 연구》를 출판했다.
3. 3. 마르크스주의 연구
미키 기요시는 1928년 『유물사관과 현대의 의식』(唯物史観と現代の意識)[4]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관련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이 책에서 미키는 「인간학의 마르크스적 형태」, 「마르크스주의와 유물론」, 「실용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철학」, 「헤겔과 마르크스」의 4편의 논문을 통해 유물사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인간학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하려 했다.[4]미키는 1927년에 첫 마르크스주의 논문인 『인간학의 마르크스적 형태』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인간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였으며, 후쿠모토 카즈오에 대한 비판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프래그머티즘과 마르크시즘의 철학』에서는 이론 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후쿠모토의 지도자와 대중을 분리하는 사상을 비판하였다.
1929년에는 『사회과학의 예비 개념』(社会科学の予備概念)을, 1931년에는 『관념형태론』(観念形態論)을 출판하며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이어갔다.[4] 그는 한때 프롤레타리아 과학 연구소 회원이었다.[7] 그러나 1930년 체포 이후, 자신의 철학을 마르크스주의와 구분하려 노력하며,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4] 미키의 마르크스주의 연구는 어디까지나 연구였을 뿐, 미키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1930년 미키는 일본 공산당에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역사학자 하토리 유소에 의해 관념론으로 비판받았고, 미키는 마르크스 연구자로서의 권위를 잃게 되었다.
미키의 저작들은 당시 시대 상황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나카타 스테펜센은 미키의 작품을 파시스트적이거나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으며,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민족주의, 관념론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다고 주장한다.[10]
3. 4. 구상력의 논리
미키 기요시의 《구상력의 논리》(1939-1948)는 그의 대표작으로, 인간이 '구상력'을 통해 세계와 맺는 관계를 탐구한 미완의 저작이다. 이 책은 "신화", "제도", "기술", "경험"의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37년부터 1943년까지 약 7년에 걸쳐 연구 노트 형식으로 쓰여진 논문집이다. 미키는 인간 행위가 항상 합리적, 이성적인 것만은 아니며, 비합리적인 정념(情念)이나 파토스에 이끌려 행해지는 경우가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화에도 합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인 것이 포함되며, 비합리적이기에 더욱 강고하다는 것을 밝히려 했다.
미키는 로고스와 파토스의 통일,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등 상반되는 것들의 통일을 구상력(構想力)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 제1장 "신화": 인간 행위를 감정, 정념, 충동 등이 단순히 표출된 것이 아니라, "상(像)"을 만들어내는, 즉 형태 없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활동으로 분석한다. 이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구상력이라고 보았다. 신화는 파토스적인 것이 지성에 의해 "형상화(形像化)"됨으로써 만들어진다고 분석한다.
- 제2장 "제도": "신화"에서 단순한 이미지나 상이었던 "형태"를 객관적인 형태(form)로 파악한다. 제도는 역사 속에서 탄생하는 동시에 객관적인 힘을 가지며,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하나가 된 것을 보여준다. 제도는 본능을 구현한 것이 아니라 "본능을 대체하는 것", 즉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구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fiction)이면서 힘을 가진다고 보았다.
- 제3장 "기술": 제도의 "습관" 개념을 바탕으로, 기술의 본질을 새로운 "형태"를 창조, 즉 "발명"하는 점에 있다고 보았다. 기술의 근저에도 파토스적인 것이 작용하며, 기계적인 반복 작업이 아닌 "구상력"을 통해 새로운 형태가 발명된다고 주장한다.
- 제4장 "경험": 《구상력의 논리》의 약 절반을 차지하며, 앞선 세 장과는 달리 꾸준하고 구심적인 사색을 바탕으로 기술되었다. 데이비드 흄과 임마누엘 칸트의 경험론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역사를 만드는) 행위"의 입장에서 경험을 "객관적 세계에서의 사건"이라는 객관적 의미로 파악한다. 경험을 "독립되어 있는 것들이 관계, 만남을 맺는 것"이자 "주체와 환경과의 상호 규정적인 동적 행위적 관계이며, 역사 세계에서의 역사적 사건"으로 정의했다.
미키는 "경험" 장을 마지막으로 "언어" 문제를 다룰 예정이었으나, 이는 미완으로 남았다.
3. 5. 협동주의
미키 기요시는 쇼와 연구회(昭和研究会) 활동 시기에 '협동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연대의 조화를 추구하며,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중국의 근대화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자유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삼자의 대립 속에서 일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1937년 중앙공론 11월호에 발표한 「일본의 현실」이 쇼와 연구회의 사카이 사부로(酒井三郎)의 눈에 띄어, 미키는 쇼와 연구회 세계정책연구회에서 "중일전쟁의 세계사적 의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미키는 중일전쟁이 "동아의 통일"과 "자본주의의 시정"이라는 세계사적 의의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동아의 통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중심의 세계에서 동양이 부각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개념이다. 미키는 중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대륙에 일본 문화를 가져와 새로운 동양 문화를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보았다. 쇼와 연구회는 일본이 중심이 되어 "동아의 통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자본주의의 시정"은 자유주의의 한계와 공산주의의 대두, 그리고 독일에서의 공산주의 실패 이후 파시즘의 등장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제시되었다. 미키는 일본이 자유주의와 파시즘을 지양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근본적인 이념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키는 대동아 공영권 구상에 참여했지만, 제국주의적 팽창에는 반대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활동이 태평양 전쟁을 향한 철학적 의미 부여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3. 6. 신란 연구
미키 기요시는 말년에 신란의 사상에 심취하여 《신란》(1946, 유고)을 집필했다.[27] 《신란》은 미키 기요시가 1944년 9월 사이타마현 와시노미야정에 소개(疎開)한 이후 집필을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나,[26] 다니카와 데쓰조는 1939년경부터 집필했을 것이라 주장한다.[26] 이 원고는 미키 사후에 발견되었으며, 1946년 1월 가라키 준조에 의해 정리되어 잡지 《전망》 창간호에 일부가 게재되었다.[26]《신란》은 원래 미정고였으나, 가라키 준조가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유고의 단편에 나타난 신란론의 전체 구상은 다음과 같다.[26]
8번 항목이 빠진 것은 3번의 후반부 "종교의 논리적 구조(교행신증)"를 독립시키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26]
이 중 비교적 정리된 형태로 남은 것은 "1. 인간성의 자각", "2. 역사의 자각", "3. 종교의식의 전개(삼원전입) 종교의 논리적 구조(교행신증)", "4. 진리론", "9. 사회적 생활" 부분이다. 나머지는 신란의 저작에서 발췌한 내용과 단편적인 메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26]
미키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신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미정고를 정리한 가라키 준조는 《신란》을 미키의 철학적 연구와는 분리된 "신앙 고백"으로 이해하는 반면, 아라카와 이쿠오는 철학적 연구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27]
제1장 '인간성의 자각'에서는 신란이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면서도 경험을 초월하여 종교적 진리를 말하고 있음을 서술한다. 미키는 자신의 철학 용어인 "초월적 내재성"과 "내재적 초월성"을 사용하여, 신란이 현실에 입각하여 체험을 중시함으로써 인간미를 더하고 불교를 인간에게 가깝게 만들었다는 통념을 비판한다.[26] 즉, 신란의 사상은 종교가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이며, 주관적 심리가 아닌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객관적 내용은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 진심이 통하는 진리라고 논한다.
이어서 신란이 말하는 '참회'와 '후회'의 차이를 설명한다. 후회는 자신이라는 입장이 있고 후회하는 자는 아직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 반면, 참회는 후회에 있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제거하는 데서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신과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절대적인 것에 맡길 때, 자기 말조차 자신이 아닌 타자로부터 오는 것이 되며, 자신은 말하는 쪽이 아니라 듣는 쪽이 된다. 자기를 비움으로써 들려오는 진실의 말이 바로 참회라고 설명한다.[26]
다음으로, 미키는 신란의 무상과 죄악감에 대해 논한다. 신란이 무상에 대해 적게 말한 것은 무상감에 머무르지 않고 죄악감으로 심화시켰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무상감은 자칫 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신란은 무상감에서 죄악감으로 사색을 심화시켜 미적 무상사상에서 종교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또한 신란은 이 세상을 무상한 것으로 보고 출세간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범부 혹은 죄를 짓는 악인으로 여기는 죄악감을 가지고 현세에 머무르는 현실주의자라고 정의한다.[26]
그는 또한 '''기(機)'''[28][29]에 대해 "''기(機)는 자각된 인간 존재이다. 이러한 자각적 존재를 실존이라 부른다면, 기(機)는 인간의 실존과 다름없다.''"(미키 기요시 전집 8권 262페이지 10행째부터 12행째에서 인용(三木 1985d, p. 262, ll. 10-11))라고 짧게 언급하는데, 이는 일정 부분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미(微)', '관(関)', '기(機)' 세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려다 '기(機)'에서 중단되어 깊이 있는 고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6]
제2장 '역사의 자각'에서는 인간성의 자각과 역사의 자각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하에 신란의 역사관을 논한다. 신란의 역사관은 말법 사상에 기반하며, 현재를 말법으로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찰하여 역사를 이해했다고 설명한다. 신란이 살았던 시대는 정치적 혼란과 전란, 종교계의 타락이 만연했던 현실이었으며, 신란의 정상말사관(正像末史觀)[30]은 역사 현실 분석뿐 아니라 역사를 초월한 관점에서 수립된 역사관이라고 지적한다.
말법의 시대는 무계(無戒)의 시대이다.[26] 무계 시대에 필요한 부처의 가르침은 타력의 정토교이며, 자력의 성도교에서 정토교로의 역사적 전환이 발생한다고 신란은 확신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정토교는 말법 시대에만 해당하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나 헤겔 등의 개념과의 차이를 논하려다 중단되었다.[26]
제3장 '종교의식의 전개(삼원전입)'에서는 아미타불이 이끄는 삼원전입의 제19원, 제20원, 제19원으로의 전이를 《교행신증》의 해설을 해석하여 종교적 의미를 도출하려 했으나 중단되었다.[26]
제4장 '진리론'과 제9장 '사회적 생활'은 초고 상태로 남아 있다.[26]
4. 저서
미키 기요시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으며, 그의 사상은 철학, 문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주요 저서로는 『파스칼에 있어서의 인간 연구』(1926), 『유물사관과 현대의 의식』(1928), 『역사철학』(1932), 『구상력의 논리』(1939-48), 『철학입문』(1940), 『인생론 노트』(1941) 등이 있다.
- 『고독에 대하여』[32]
- 『파스칼에 있어서의 인간 연구』(パスカルにおける人間の研究) (도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1926).
- 『유물사관과 현대의 의식』(唯物史観と現代の意識) (도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1928).
- 『사회과학의 예비 개념』(社会科学の予備概念) (도쿄: 텟토쇼인(鉄塔書院), 1929).
- 『역사관념론의 여러 문제』(史的観念論の諸問題) (도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1929).
- 『관념형태론』(観念形態論) (도쿄: 텟토쇼인(鉄塔書院), 1931).
- 『역사철학』(歴史哲学) (도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1932).
- 『위기 속에서의 인간의 입장』(危機における人間の立場) (도쿄: 텟토쇼인(鉄塔書院), 1933).
- 『인간학적 문학론』(人間学的文学論) (도쿄: 카이조샤(改造社), 1934).
-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アリストテレス形而上学) (도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1935).
- 『시대와 도덕』(時代と道徳) (도쿄: 사쿠힌샤(作品社), 1936).
- 『아리스토텔레스』(アリストテレス) (도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1938).
- 『소크라테스』(ソクラテス) (도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1939).
- 『현대의 기록』(現代の記録) (도쿄: 사쿠힌샤(作品社), 1939).
- 『구상력의 논리 제1권』(構想力の論理 第一) (도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1939).
- 『철학 입문』(哲学入門) (도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1940).
- 『철학 노트 제1권』(哲学ノート) (도쿄: 가와데 쇼보(河出書房), 1941).
- 『학문과 인생』(学問と人生) (도쿄: 추오 코론샤(中央公論社), 1942).
- 『철학 노트 제2권』(続哲学ノート) (도쿄: 가와데 쇼보(河出書房), 1942).
- 『독서와 인생』(読書と人生) (도쿄: 오야마 쇼텐(小山書店), 1942).
- 『기술철학』(技術哲学) (도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1942).
- 『문학사 방법론』(文学史方法論) (도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1946).
- 『인생론 노트』(人生論ノート) (오사카: 소겐샤(創元社), 1947).
- 『지식 철학』(知識哲学) (도쿄: 오야마 쇼텐(小山書店), 1948).
- 『구상력의 논리 제2권』(構想力の論理 第二) (도쿄: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1948).
- 『철학과 인생』(哲学と人生) (도쿄: 가와데 쇼보(河出書房), 1950).
그의 저작들은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에서 출판된 『미키 기요시 전집』(三木清全集, 1966-86) 전 20권에 수록되어 있다.
번역서로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1930), 르네 데카르트의 『성찰』(1949) 등이 있다.
5. 평가와 영향
다케우치 요(竹内洋)는 쇼와 연구회에 모인 미키 기요시를 포함한 지식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쇼와 연구회에 모인 지식인들 앞에는 군부 등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군부와 타협하거나, 군부의 의향을 선수 치고 앞장서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마일즈 플레처(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교수)는 쇼와 연구회에 참가한 미키 기요시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와자야마(蠟山)나 가사(笠), 미키(三木) 등 쇼와 연구회의 지도자들은 전전기에 일어난 사건의 단순한 희생자도 아니었고, 저항자도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에 그들 지식인들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기에, 개혁 전략을 실행하는 데 유리한 선택으로 국가를 향했던 것이다. 개혁의 필요성과 필요한 변화의 형태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에 따라, 그들은 일본의 의회 제도와 개인주의라는 가치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 지식인들은 경제의 국가 통제를 강화하고, 아시아의 맹주가 된다는 일본인의 사명감을 긍정했다. 돌이켜 보면 쇼와 전전기는 어두운 시대였지만, 그들에게는 찬란한 새로운 사회라는 희망을 주는 시대였던 것이다."
아카마쓰 쓰네히로(赤松常弘)는 미키 기요시의 사상 변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확실히 미키는 시대의 사상적 동향에 민감했다. 그의 저술에는 유럽과 미국에서 들여온 최신 간행물의 인용이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항상 시대의 최첨단에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의 주장을 가지지 않은, 무절제한 신참이 아니었다. 그의 사색의 틀에 몇 번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 변화나 전환을 통해, 또는 그 변화나 전환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적 사색에는 일관된 것이 있었다."
가라키 준조(唐木順三)는 미키 기요시의 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고립된 각 단위가 각각의 밑바탕에 최후의 무(無)를 마주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구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해체의 극한에서만 연대의 장소가 있다. 무로부터의 형성을 말하는 이면에는, 무를 인간의 조건의 조건으로 하는 무서운 절망이 있다. 이것이 현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미키 기요시는 바로 이 현대를 감각과 사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미키 기요시의 면목이다."
5. 1. 긍정적 평가
미키 기요시는 20세기 전반 일본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서양 철학의 수용과 일본적 사상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사상은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신칸트학파 등 다양한 철학적 조류를 융합하여 독창적인 체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구상력의 논리'는 인간의 창조성과 역사성을 탐구하는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아카마쓰 쓰네히로(赤松常弘)는 미키의 사상 변천에 대해 "확실히 미키는 시대의 사상적 동향에 민감했다. 그의 저술에는 유럽과 미국에서 들여온 최신 간행물의 인용이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항상 시대의 최첨단에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의 주장을 가지지 않은, 무절제한 신참이 아니었다. 그의 사색의 틀에 몇 번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 변화나 전환을 통해, 또는 그 변화나 전환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적 사색에는 일관된 것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카라키 준조(唐木順三)는 미키의 사상에 대해 "고립된 각 단위가 각각의 밑바탕에 최후의 무(無)를 마주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구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해체의 극한에서만 연대의 장소가 있다. 무로부터의 형성을 말하는 이면에는, 무를 인간의 조건의 조건으로 하는 무서운 절망이 있다. 이것이 현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미키 기요시는 바로 이 현대를 감각과 사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미키 기요시의 면목이다."라고 평가했다.
마일즈 플레처(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교수)는 쇼와 연구회에 참가한 미키 등에 대해 "와자야마(蠟山)나 가사(笠), 미키(三木) 등 쇼와 연구회의 지도자들은 전전기에 일어난 사건의 단순한 희생자도 아니었고, 저항자도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에 그들 지식인들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기에, 개혁 전략을 실행하는 데 유리한 선택으로 국가를 향했던 것이다. 개혁의 필요성과 필요한 변화의 형태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에 따라, 그들은 일본의 의회 제도와 개인주의라는 가치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 지식인들은 경제의 국가 통제를 강화하고, 아시아의 맹주가 된다는 일본인의 사명감을 긍정했다. 돌이켜 보면 쇼와 전전기는 어두운 시대였지만, 그들에게는 찬란한 새로운 사회라는 희망을 주는 시대였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5. 2. 비판적 평가
미키 기요시는 쇼와 연구회에 참여하여 군부에 타협하거나, 대동아 공영권 구상에 협력한 점은 비판받기도 한다. 그의 사상은 시대의 사상적 동향에 민감하고, 고립된 각 단위가 무(無)를 마주하는 극한에서 연대를 추구하는 현대성을 보여주지만,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현실 정치와 유리되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5. 3. 한국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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