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 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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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흥 백씨는 대흥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대흥 토성 중 하나이다. 시조는 고려 시대에 내순검군을 지낸 백임지이며, 직산 백씨의 시조 백가적의 후손이다. 주요 인물로는 백사유, 백문보, 백원발, 백세흥 등이 있으며,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3명, 무과 급제자 4명을 배출했다. 2015년에는 약 4,000명의 인구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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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 백씨 - 백문보
백문보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공민왕 때 등용되어 밀직제학을 역임했으며, 우왕의 스승이었고, 단군에 대해 언급하고 단기를 계산했으며, 청렴결백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안향의 문하 6군자와 교류하고 이색으로부터 바둑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시호는 충간이다.
대흥 백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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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 백씨 | |
기본 정보 | |
관향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
시조 | 백임지(白任至) |
인물 | 백사유, 백돈명, 백견, 백문보, 백현룡, 백세흥, 백호운, 백규, 백중각 |
년도 | 2015 |
인구 | 4,041명 |
나라 | 한국 |
2. 역사
대흥 백씨는 백임지를 시조로 하며, 조위총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고위 관직에 오른 인물이다. 1191년 사망 후 '경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고려사에 백임지 관련 기록이 있으며, 묘지명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
2. 1. 시조 및 기원
대흥 백씨(大興白氏)는 대흥 토성 (이·한·백) 중 하나다. 대흥 백씨의 선계는 상사직장동정(尙事直長同正)을 지낸 직산 백씨 백가적(白可績)이다. 백가적은 또한 남포 백씨의 선조인 신라 간관(諫官) 백중학(白仲鶴)과 백탁(白卓)의 후손이므로 남포 백씨와 대흥 백씨는 결국 동조(同祖)의 후손이다.시조 경렬공(景烈公) 백임지(白任至, 1131년 ~ 1191년)는 고려 문종 때 상사직장동정을 지낸 백가적의 5세손으로 고려 의종 때 내순검군(內巡檢軍)으로 왕을 시종한 공으로 대정(隊正)이 되었다. 조위총의 난에 공을 세우고 우군지병마사에 올랐다가 곧 대장군에 오르고 공을 세워 지형부사에 자금어대를 하사받고, 상장군을 거쳐 형부상서, 병부상서에 올랐다. 1188년에는 추밀원부사 공부상서를 거쳐 지추밀원사 이부상서 태자빈객에 올랐으며 1190년에 지문하성사 공부상서에 임명되었다. 1191년(고려 명종 21년) 2월 22일 61세로 서거하였는데 왕이 조문관을 보내어 애도하고 시호를 경렬(景烈)이라 내렸으며 3월 12일에 예장하였다. 고려사에 백임지 전기가 있고 묘지명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2. 본관 연혁
대흥은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大興面)이다.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임존성(任存城) 혹은 금주(今州)라 불렸다. 757년(경덕왕 16)에 임성군(任城郡)으로 개칭하여 웅주(熊州)의 관할로 하였고, 청무현(靑武縣, 靑陽)과 고산현(孤山縣)을 영현으로 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대흥군(大興郡)으로 바꾸고, 1018년(현종 9) 홍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대흥현(大興縣)이 되었고, 1682년(숙종 7) 대흥군으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 홍주부 대흥군이 되었다가 1896년 충청남도 관내로 되었다. 1914년 예산군, 덕산군과 함께 예산군으로 통합되었다.
3. 주요 인물
대흥 백씨의 주요 인물로는 백사유, 백문보, 백원발, 백세흥, 백호운, 백규, 백중각, 백의석, 백운학 등이 있다.[1]
3. 1. 고려
백사유(白思柔)는 973년(광종 24)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991년(성종 10)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993년과 995년, 두 차례에 걸쳐 예부시(禮部試)의 지공거(知貢擧)를 지냈다.[1]시조 경렬공 백임지(白任至, 1131년 ~ 1191년)는 고려 의종 때 내순검군(內巡檢軍)으로 왕을 시종한 공으로 대정(隊正)이 되었다. 조위총의 난에 공을 세우고 우군지병마사에 올랐다가 곧 대장군에 오르고 공을 세워 지형부사에 자금어대를 하사받고, 상장군을 거쳐 형부상서, 병부상서에 올랐다. 1188년(무신년)에는 추밀원부사 공부상서를 거쳐 지추밀원사 이부상서 태자빈객에 올랐으며, 1190년(경술년)에 지문하성사 공부상서에 임명되었다. 1191년(고려 명종 21년) 2월 22일 61세로 서거하였는데 왕이 조문관을 보내어 애도하고 시호를 경렬(景烈)이라 내렸으며 3월 12일에 예장하였다.[1]
백문보(白文寶, 1303년 ~ 1374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화부(和父), 호는 담암(淡庵),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우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직산군(稷山君)에 봉해졌다.[1]
3. 2. 조선
- 백원발(1597년 ~ 1671년): 조선 중기 유학자. 호는 양몽재(養蒙齋)이다. 1909년(융희 3) 후손 백조운(白肇運)이 백원발의 아들 백세흥의 『율은문집(栗隱文集)』과 함께 엮어 『원고세고(元皐世稿)』에 수록된 『양몽재일고(養蒙齋逸稿)』가 전한다.[1]
- 백세흥(1630년 ~ 1699년): 조선 중기 문신. 호는 율은(栗隱)이다. 1652년(효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75년(숙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겸성균관학유(奉常寺兼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다. 이후 해남현감·강진현감·평해현감 등을 역임하며 검약한 생활과 애민정신(愛民精神)으로 존경받았다. 저서로 『율은문집』이 있다.
- 백호운(1809년 ~ 1883년): 조선 후기 유학자. 호는 하포(霞浦)이다. 영해(寧海) 출신으로 퇴계학파 중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학단의 일원이다. 1836년(헌종 2) 향시에 합격했으나, 서울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느라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 집정 당시 과거제도와 붕당의 폐단을 지적하여 칭찬받았다. 저서로 『하포문집(霞浦文集)』이 있다.
- 백규(1844년 ~ 1897년): 조선 말기 학자. 호는 경암(敬庵) 또는 학우헌(鶴于軒)이다. 유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의 문인으로, 경학(經學)·성리학뿐만 아니라 선학(禪學)·음양(陰陽)·의복(醫卜) 등에도 밝았다. 이만도(李晩燾) 등과 교유하며 후진교육에 힘썼다. 저서로 『경암문집』이 있다.
- 백중각(1867년 ∼ 1936년): 조선 말기 유학자. 호는 천산재(天山齋)이다. 백문보의 후손이며, 유고로 『천산재일집(天山齋逸集)』이 전한다.
3. 3. 현대
- 백의석(1920년 ~ )은 대한삼락회 대구시지부 고문을 역임하였다.
- 백운학(1939년 ~ )은 영남대학교 사대 교육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4. 과거 급제자
대흥 백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 무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1]
5. 인구
연도 | 가구 | 인구 |
---|---|---|
1985년 | 278가구 | 1,200명 |
2000년 | 399가구 | 1,280명 |
2015년 | 4,041명 |
6. 항렬표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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口담(聃) | 사口(思) | 口옥(玉) | 거口(居) | 口원운(遠運) | 중口(重) | 口진(鎭) | 순口(淳) | 口운(雲) | 종口(種) | 口열(烈) | 口규(圭) | 口선(善) | 口(口) | 口(口) | 口(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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