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타이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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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 타이머즈는 1988년 결성된 일본의 밴드로, RC 석세션의 이마와노 키요시로가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멤버들은 토목 공사 인부 복장을 하고, 더 타이거스의 패러디 밴드 설정을 유지했다. 1988년, RC 석세션의 앨범 발매 중단에 항의하며 게릴라 라이브를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에는 FM도쿄를 비판하는 노래를 생방송으로 불러 파문을 일으켰으며, 이후 활동 중단과 재개를 거쳐 2009년 리더 이마와노의 사망으로 활동을 종료했다. 더 타이머즈는 표현의 자유와 검열에 대한 저항,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음악으로 평가받는다.
RC 석세션의 앨범 『COVERS』와 싱글 「러브 미 텐더」가 반원전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6] 당시 소속사 도시바 EMI로부터 발매가 중지된 사건[7]이 밴드 결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결정에 반발한 이마와노 키요시로는 다른 멤버들의 미온적인 반응 속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모색했고, 자신의 운전수 겸 매니저였던 미야케 신지 등과 함께 더 타이머즈를 결성했다.[8]
2. 멤버
예명 닮은 인물 (소속 밴드) 제리 (ZERRY) 이마와노 키요시로 (RC 석세션) 토피 (TOPPI) 미야케 신지 (모조 클럽) 보비 (BOBBY) 카와카미 타케시 (힐빌리 밥스) 파아 (PAH) 스기야마 쇼지마루 (모조 클럽)
멤버들은 각자 유명 밴드의 "아무개와 닮은 인물"이라는 설정으로 활동했지만, 실제로는 해당 인물 본인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이다.[1][2][3]
밴드명과 멤버들의 예명은 더 타이거스와 그 멤버들을 패러디한 것이다. 멤버 전원이 토목공사 현장 인부였다고 자칭하며, 무대 의상으로 토목 작업용 헬멧, ドカジャン|도카쟌일본어 (작업복 점퍼), 핫피, 니커보커, 지카타비 등을 착용했다.[4] 리더 제리의 경우 헬멧에 어지럽게 붙인 스티커(게바헬)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은 신좌파 학생운동가를 패러디한 것이기도 하다.[5]
2. 1. 제리 (ZERRY)
리드 보컬, 기타, 하모니카를 담당한다. RC 석세션의 이마와노 키요시로와 닮은 인물이라는 설정이다.[1][2][3] 선글라스와 토목 작업용 헬멧, 수건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것이 특징이다.[4] 헬멧에 어지럽게 붙은 스티커(게바헬)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은 신좌파 학생운동가를 패러디한 것이기도 하다.[5]
2. 2. 토피 (TOPPI)
기타와 백 보컬을 담당한다. 모조 클럽의 미야케 신지와 닮은 인물이라는 설정이며, 외형적으로는 선글라스만 착용한다.
더 타이거스의 패러디 밴드로서, 토피(TOPPI)라는 예명 역시 더 타이거스의 멤버를 연상하도록 지어졌다. 멤버 전원이 토목공사 현장 인부였다고 자칭하며, 토목작업용 헬멧, ドカジャン|도카쟌일본어(노가다 점퍼), 핫피, 니커보커, 지카타비 등의 복장을 한다.[4] 이러한 "닮은 인물" 설정은 활동 당시의 공식적인 입장이었지만, 실제로는 미야케 신지 본인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이다.[1][2][3]
2. 3. 보비 (BOBBY)
콘트라베이스를 담당한다. 힐빌리 밥스의 카와카미 타케시와 닮은 인물이라는 설정이다. 다른 일부 멤버들과 달리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
2. 4. 파아 (PAH)
드럼을 담당한다. 모조 클럽의 스기야마 쇼지마루와 닮은 인물이라는 설정이다. 보비 (BOBBY)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 활동했다.
더 타이머즈 멤버들은 모두 "아무개와 닮은 인물"이라는 설정을 내세웠지만,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1][2][3] 실제로는 파아가 스기야마 쇼지마루 본인이라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3. 결성 배경 및 활동
더 타이머즈는 1988년 8월 3일, 후지큐 하이랜드에서 열린 앤 루이스의 라이브 공연에 예고 없이 난입하며 데뷔했다. 이어 8월 6일에는 히로시마 평화 콘서트 무대에 여러 차례 기습적으로 올라가 발매 중지된 RC 석세션의 곡과 자작곡 등을 연주하며[9] 방송 검열과 기성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이러한 파격적인 등장은 NHK 위성 방송을 통해 생중계되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여러 대학 축제에 출연하며 게릴라성 공연을 이어갔다.[9]
1989년에는 첫 싱글 「데이드림 빌리버」를 발매하여 오리콘 차트 주간 2위에 오르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첫 정규 앨범 『TIMERS』와 두 번째 싱글 「로큰인의」를 연이어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연말에는 마쿠하리 멧세에서 열린 대규모 록 페스티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3. 1. 결성 배경
1988년, RC 석세션이 발매하려던 앨범 『COVERS』와 싱글 「러브 미 텐더」에 반원전 관련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이유로[6] 당시 소속 레이블이었던 도시바 EMI로부터 발매 중지 통보를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7] 이 음반들은 이후 8월 15일 키티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어 오리콘 1위를 기록했지만, FM도쿄(현재의 TOKYO FM)와 그 계열 지방 방송국들에서는 방송 송출을 자체적으로 검열하는 등 논란이 있었다.[7]
이러한 상황에 분노한 이마와노 키요시로는 소속사의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게릴라 라이브 공연을 기획했다. 하지만 RC 석세션의 다른 멤버들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마와노는 멤버들의 충분한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 사건은 이마와노가 새로운 밴드인 더 타이머즈를 결성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운전기사 겸 매니저로 일하던 미야케 신지를 영입했고, 미야케와 함께 밴드 활동을 하던 카와카미 타케시와 스기야마 쇼지마루가 합류하면서 더 타이머즈가 결성되었다.[8]
3. 2. 초기 활동 (1988~1989)
1988년, RC 석세션이 발매하려던 싱글 「러브 미 텐더」와 커버 앨범 『COVERS』가 반원전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6] 소속사 도시바 EMI로부터 발매가 중지되는 일이 있었다.[7] 이 앨범은 8월 15일 키티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어 오리콘 1위를 차지했지만, TOKYO FM 등 일부 방송국에서는 방송을 자체적으로 내보내지 않았다.[7] 이에 반발한 이마와노 키요시로는 게릴라 라이브를 계획했으나 다른 RC 멤버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이는 더 타이머즈 결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마와노는 자신의 운전수 겸 매니저였던 미야케 신지를 비롯해, 미야케와 함께 밴드를 하던 카와카미 후토시, 스기야마 쇼지(모치다 마사루)를 멤버로 영입했다.[8]
더 타이머즈는 1988년 8월 3일, 후지큐 하이랜드에서 열린 앤 루이스의 라이브 공연에 예고 없이 등장하며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이는 곧이어 있을 히로시마 평화 콘서트 난입을 위한 리허설 성격이었다. 복면을 쓰고 등장했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당시 연주 속도가 너무 빨라진 것에 대해 멤버들이 사과하자, 리더 '제리'(이마와노)는 "밴드니까 같이 달리면 된다"고 답했고, '보비'(카와카미)는 이 말을 듣고 평생 그를 따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9]
같은 해 8월 6일, 히로시마 평화 콘서트에서는 다른 밴드의 공연 준비 시간 틈틈이 무대에 올라, 행사 프로듀서 야마모토 코타로를 향해 "위선자"라고 외치거나 "로큰인의" 같은 자작곡과 발매 중지되었던 RC 석세션의 「러브 미 텐더」, 「서머타임 블루스」 등을 연주했다. 이 모습은 NHK 위성 제1방송(BS1)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그해 11월에는 여러 대학 축제에 출연했으며, 하루에 세 곳의 대학에 나타나기도 했다. 요코하마 국립대학 공연에서는 부상자가 발생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9]
1989년 1월에는 '팔레스타인 독립기념 파티'에 출연했다. 이전 해부터 녹음해 온 데모 테이프를 리더 '제리'가 직접 관계자들에게 유출하며 앨범 제작을 시작했다. 8월 5일에는 전년도에 이어 히로시마 평화 콘서트 무대에 섰는데, 이번에는 정식 초청을 받은 출연이었다. 10월 11일, 첫 싱글 「데이드림 빌리버」를 발매하여 오리콘 차트 주간 2위를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 11월 8일에는 첫 정규 앨범 『TIMERS』를, 12월 13일에는 두 번째 싱글 「로큰인의」를 발매했다. 12월 31일부터 다음 해 1월 1일까지는 마쿠하리 멧세 이벤트홀에서 열린 라이브 이벤트 '로큰롤 밴드 스탠드'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3. 3. FM도쿄 노래 사건 (1989)
1989년 10월 13일, 더 타이머즈는 후지테레비의 음악 프로그램 ‘히트스튜디오 R&N’에 생방송으로 출연했다.[10] 당초 예정된 곡 순서는 「타이머즈의 테마」 → 「위선자」 → 「데이드림 빌리버」 → 「고구마」 → 「타이머즈의 테마 엔딩버전」이었으나, 두 번째 곡 「위선자」 순서에서 밴드는 예고 없이 미발표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곡은 로큰롤 풍의 경쾌한 리듬이었지만, 가사는 FM도쿄와 FM센다이를 직접 언급하며 매우 과격한 욕설과 비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는 방송사의 검열 행태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10]
문제의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일본어 원문 | 한국어 번역 |
---|---|
생방송 중 돌발 상황에 사회자 후루타치 이치로와 카나구시쿠 긴코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고, 게스트로 출연한 나가이 마리코와 이토 타케시는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되었다. 논란의 곡 연주가 끝난 후, 타이머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정되어 있던 「데이드림 빌리버」와 나머지 곡들을 연주했다.
연주 후 토크 시간에 사회자 후루타치는 카메라를 향해 "방송상 부적절한 발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과드리고 정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타이머즈 멤버들에게 "두 번째 곡은 리허설과 완전히 달랐네요"라고 언급하여 이번 사태가 방송사나 제작진의 의도와는 무관함을 간접적으로 밝혔다. 이 과정에서 멤버 제리(이마와노 키요시로)는 여성 사회자 카나구시쿠 긴코에게 갑자기 뒤에서 껴안는 행동을 하여 성희롱 논란을 더했다.
이 사건은 생방송이었기 때문에 많은 시청자에게 그대로 노출되었고, 다음 날 신문 등 언론을 통해 크게 보도되며 화제가 되었다. 일부 지방 방송국에서는 녹화 방송 시 타이머즈 출연 부분을 과거 방송분으로 대체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3] FM도쿄는 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타이머즈와 같은 음반사(도시바 EMI) 소속이었던 마츠토야 유미의 새 앨범 『LOVE WARS』를 일절 방송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후지테레비는 더 타이머즈에게 3년간 출연 금지 처분을 내렸다.[3]
사건 이후 제리는 "사실 방송국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혼날 줄 알았는데 프로듀서가 싱글벙글하더라고요. 불만이 쇄도한 게 오히려 반향이 있었다고…"라고 회고했다.[11] 드러머 파아(스기야마 쇼지)는 2014년 인터뷰에서 당시 심정에 대해 "의외로 자연스럽달까. 그렇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했으나,[3] 2017년에는 "드럼을 치면서 현장이 뒤집히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드럼 치면서 웃을 뻔 했다"고 다른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9] 베이시스트 토피(미요시 하루미) 역시 "연주하면서 텔레비전 카메라 너머로 여러 사람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6]
3. 4. 활동 중단 및 재개
1988년부터 1989년까지 활동을 마친 후, 리더 제리(이마와노)는 "결국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분노로 무언가 노래해 보았자 허망할 뿐"이라며 실망감을 표현하고 활동을 중단했다.[12]1994년, 후쿠오카시에서 다음 해에 열릴 유니버시아드 개최를 기념하는 콘서트에 자이츠 카즈오, 미나미 코세츠, 나카니시 케이조 등과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후쿠오카시는 극심한 가뭄(1994년 일본 갈수)을 겪고 있었고, 5일 뒤 단수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오후 9시 전 타이머즈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 스태프가 "후쿠오카시 갈수대책본부로부터 연락입니다. 에가와댐 문제 발생으로 완전 단수에 들어가므로 콘서트도 중지합니다"라는 안내 방송을 내보냈다. 이로 인해 동요한 관객들이 급히 자리를 뜨는 소동이 벌어졌다.
타이머즈는 본래 라이브 공연에서 "사정으로 인해 타이머즈 출연이 중지되었다"는 안내 방송 후, "마음대로 중지시키지 마라"며 난입하는 식의 연출을 자주 사용했다. 하지만 당시 후쿠오카의 가뭄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에 이 연출은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타이머즈는 전국 언론과 방송, 스포츠 신문 등으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3] 후쿠오카 시청의 강력한 항의로 소속사와 타이머즈 멤버들은 연명으로 사과문을 제출했다. 그러나 한 달 뒤, 타이머즈는 오사카 콘서트에서 "후쿠오카시가 스태프를 위협해 타이머즈의 이름을 빌려 사과문을 썼다"는 내용의 노래를 발표하여 다시 한번 후쿠오카시를 격분시켰다. 이후 이마와노는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사과해서 끝나는 것이라면」이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13][14]
1995년 4월 8일, 타이머즈의 마지막 싱글이 된 「작별은 하지 않아」가 발매되었다. 이는 같은 해 1월에 발생한 고베 대지진 이재민들을 응원하기 위한 자선 싱글로, 수록된 모든 곡이 지진을 주제로 했다. 싱글 판매 수익금은 이즈미야 시게루가 운영하는 이즈미야 기금을 통해 재해 지역에 기부되었다.
2005년 3월 2일부터 5일까지 시부야 파르코에서 열린 프리미엄 라이브를 통해 부활을 발표했다.
2009년, 리더 제리(이마와노)가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016년 9월 9일, 음원과 영상을 담은 CD 2장과 DVD 1장으로 구성된 『더 타이머즈 스페셜 에디션』을 11월 23일에 발매한다고 발표했다.
4. 사회적 영향 및 평가
더 타이머즈는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인 음악과 퍼포먼스, 직설적인 사회 비판 메시지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후지테레비 생방송 도중 벌인 돌발적인 행동은 표현의 자유와 방송 검열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밴드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들은 단순히 논란을 일으키는 것을 넘어, 사회 부조리와 권위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통해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때로는 과격한 방식으로 사회적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이러한 활동은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한 고베 대지진 피해자를 위한 자선 싱글을 발매하는 등 사회 문제에 직접 참여하며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더 타이머즈의 활동은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켰지만,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밴드로서 일본 대중음악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그들의 음악과 행보는 이후 세대의 아티스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표현의 자유와 사회 참여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4. 1. 표현의 자유와 검열에 대한 저항
1989년 10월 13일, 더 타이머즈는 후지테레비의 음악 프로그램 ‘히트스튜디오 R&N’에 출연했다. 예정된 곡은 「타이머즈의 테마」, 「위선자」, 「데이드림 빌리버」, 「고구마」, 「타이머즈의 테마 엔딩버전」 순서였다. 그러나 두 번째 곡 「위선자」 순서에서 밴드는 예고 없이 미발표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곡은 FM도쿄와 FM센다이를 직접 언급하며 거친 표현으로 비난하는 내용이었다.[10]일본어 가사 |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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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 중 이 돌발 상황에 사회자 후루타치 이치로와 카나구시쿠 긴코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고, 게스트였던 나가이 마리코와 이토 타케시는 웃음을 터뜨렸다. 문제의 곡 연주가 끝난 뒤, 타이머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예정되었던 「데이드림 빌리버」와 다음 곡들을 이어서 연주했다.
연주 후 토크 시간에 후루타치는 카메라를 향해 “방송상 부적절한 발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과드리고 정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타이머즈 멤버들에게 “두 번째 곡은 리허설과 완전히 달랐네요”라고 언급하여 방송사 측의 책임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밝혔다. 이 과정에서 멤버 제리(ZERRY)는 카나구시쿠 긴코에게 갑자기 백허그를 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생방송이었기 때문에 많은 시청자에게 그대로 노출되었고, 이후 신문 등 언론을 통해 크게 화제가 되었다. 일부 지방 방송국에서는 녹화 방송 시 해당 부분을 편집하거나 과거 방송분으로 대체하기도 했다.[3] FM도쿄는 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음반사(도시바 EMI) 소속 가수인 마츠토야 유미의 새 앨범 『LOVE WARS』 관련 내용을 일절 방송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후지테레비는 더 타이머즈에게 3년간 출연 금지 조치를 내렸다.[3]
훗날 제리(ZERRY)는 이 행위에 대해서 “사실 방송국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혼날 줄 알았는데 프로듀서가 싱글벙글하더라고요. 불만이 쇄도한 게 오히려 반향이 있었다고…”라고 회고했다.[11] 파(PAH)는 2014년 당시 심경을 묻는 질문에 “의외로 자연스러웠달까. 그렇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했으나,[3] 2017년에는 “드럼을 치면서 현장이 뒤집히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드럼 치면서 웃을 뻔 했다”고 말했다.[9] 토피(TOPPI) 역시 “연주하면서 텔레비전 카메라 너머로 여러 사람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6]
4. 2. 사회 비판적 메시지와 풍자
1988년부터 1989년까지의 활동 이후, 리더 제리(이마와노 키요시로)는 "결국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분노로 무언가 노래해 보았자 허망할 뿐"이라며 사회 변화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하고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12] 이는 당시 사회 시스템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 시각과 좌절감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타이머즈의 사회 비판적 성향과 풍자는 1994년 후쿠오카시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콘서트는 이듬해 유니버시아드 개최를 기념하는 행사였으나, 당시 후쿠오카시는 극심한 가뭄으로 닷새 뒤 단수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타이머즈의 공연 직전, 스태프는 "후쿠오카시 갈수대책본부로부터 연락입니다. 에가와댐 문제 발생으로 완전단수에 들어가므로 콘서트를 중지합니다"라는 안내방송을 내보냈다. 이는 타이머즈 공연에서 종종 사용되던 "사정상 출연이 중지되었다"는 안내 후 멤버들이 "마음대로 중지시키지 마라"며 난입하는 패턴의 연출이었으나, 가뭄이라는 심각한 현실 문제와 맞물려 큰 파장을 일으켰다. 많은 관객이 안내방송을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급히 귀가했으며, 이 사건으로 타이머즈는 언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3]
후쿠오카 시청의 강력한 항의에 소속사와 타이머즈 멤버들은 연명으로 사과문을 제출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오사카 콘서트에서 타이머즈는 "사과문은 후쿠오카시가 스태프를 위협해 타이머즈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이라는 내용의 노래를 발표하며 다시 한번 후쿠오카시를 자극했다. 이후 이마와노는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사과해서 끝나는 것이라면」이라는 곡을 발표하며 상황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냈다.[13][14]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권위에 대한 조롱과 사회적 통념에 도전하는 타이머즈 특유의 풍자 정신을 보여준다.
한편, 타이머즈는 사회 문제에 직접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95년 1월 발생한 고베 대지진 이후, 같은 해 4월 8일에는 이재민을 응원하기 위한 자선 싱글 「작별은 하지 않아」를 발매했다. 이 싱글은 타이머즈의 마지막 싱글이 되었으며, 수록된 모든 곡은 지진을 주제로 만들어졌다. 싱글 판매로 얻은 인세는 이즈미야 시게루가 운영하는 이즈미야 기금을 통해 재해 지역에 기부되었다. 이는 사회적 재난 앞에서 연대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는 그들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활동이었다.
참조
[1]
뉴스
『THE TIMERS スペシャル・エディション』に収録されるライナーノーツの一部が公開!
https://www.universa[...]
ユニバーサル・ミュージック・ジャパン
2016-11-10
[2]
웹사이트
BIOGRAPHY
http://miyake-shinji[...]
[3]
뉴스
【インタビュー】大王丸「“FM東京事件”は本当にタイマーズの4人だけしか知らなかったんですよ」- BARKS公式サイト
https://www.barks.jp[...]
[4]
뉴스
ヘルメットにニッカポッカ、THE TIMERSの衣装展示が決定
https://natalie.mu/m[...]
音楽ナタリー
2016-11-16
[5]
간행물
ROCK JET VOL.68
[6]
뉴스
没後7年 今「忌野清志郎」が求められる理由
https://dot.asahi.co[...]
2016-04-28
[7]
웹사이트
ポップス再前線>FM東京、腐ったラジオ
https://merurido.jp/[...]
2017-03-05
[8]
간행물
ROCK JET VOL.68
[9]
서적
ROCK JET VOL.68
シンコーミュージック・エンタテイメント
[10]
Youtube
https://www.youtube.[...]
[11]
간행물
永遠のバンドマン ボスのお騒がせ事件簿
ミュージックマガジン増刊
[12]
서적
Mr.OUTSIDE わたしがロックをえがく時
大栄出版
[13]
간행물
永遠のバンドマン
ミュージック・マガジン増刊
[14]
잡지
マルコポー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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