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창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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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창궁주는 고려 희종과 성평왕후의 셋째 딸로, 정확한 생몰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종의 왕비 안혜태후의 친동생이며, 개성 왕씨이다. 덕창궁주는 무신정권 시기 권력자 최충헌의 아들 최전과 혼인하였는데, 이는 왕실 적녀가 종실이 아닌 인물과 결혼한 드문 사례였다. 아버지 희종은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폐위되었으며, 최충헌의 사돈이 된 후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최우에 의해 강화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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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창궁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작위 | 궁주 (공주) |
배우자 | 최전(崔瑼 이명 崔珹) |
왕조 | 고려 |
아버지 | 희종 |
어머니 | 성평왕후 |
친척 | 명종(종조부), 신종(조부), 강종(당숙), 최충헌(시아버지) 등 다수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고려 |
사망지 | 고려 |
사망일 | 미상 |
국적 | 고려 |
2. 생애
덕창궁주는 고려 제21대 왕 희종과 성평왕후의 셋째 딸로, 생몰년은 명확하지 않다. 성은 왕, 본관은 개성이다. 고종의 왕비 안혜왕후의 친동생이다.[1]
아버지 희종은 무신정권 시기에 즉위한 왕으로, 재위 중 당대의 권력자이던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되고 유배되었다.[2]
덕창궁주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영가후로 봉해진 우봉 최씨 최전과 혼인했다는 기록만 있다.[3] 당시 고려의 공주들은 원칙적으로 종실과 혼인하였으나, 무신정권이 시작된 후 무신들은 신분 상승을 위해 공주와의 결혼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덕창궁주의 혼인은 최충헌이 추진하여 성사된 결혼으로, 당시 왕후 소생의 적녀 중 유일하게 종실이 아닌 사람과 결혼한 경우이다.[4]
한편 희종은 최충헌과 사돈을 맺으면서 목숨과 영화로운 삶을 보장받게 되었고, 1219년(고종 6년) 음력 3월에는 최충헌에 의해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1227년(고종 14년) 음력 3월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에 의해 강화도로 다시 유배를 떠나고, 결국 죽을 때까지 개경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5]
2. 1. 가계 및 가족 관계
덕창궁주는 고려 제21대 왕 희종과 성평왕후의 셋째 딸로, 생몰년은 명확하지 않다. 성은 왕, 본관은 개성이다. 고종의 왕비 안혜왕후의 친동생이다.[1]덕창궁주의 아버지 희종은 무신정권 시기에 즉위한 왕으로, 재위 중 당대의 권력자이던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되고 유배되었다.[2] 한편 덕창궁주의 어머니 성평왕후는 종실 영인후 왕진의 딸로, 어머니는 명종의 딸 연희궁주이다. 또 성평왕후의 친조모는 인종의 딸 창락궁주로, 덕창궁주는 선대의 왕들과 여러 갈래의 친족 관계로 얽혀 있다.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왕 | 희종 | 고려 제21대 왕 (재위: 1204년~1211년) |
모후 | 성평왕후 | ?~1247년 |
남매 | 창원공 지 | 1197년~1262년 |
남매 | 시령후 위 | 생몰년 미상 |
남매 | 경원공 조 | ?~1279년 |
남매 | 대선사 경지 | 생몰년 미상 |
남매 | 충명국사 각응 | 생몰년 미상 |
언니 | 안혜태후 | ?~1232년, 고종의 왕비 |
조카 | 원종 | 고려 제24대 왕 (재위: 1259년~1274년) |
언니 | 영창공주 | 생몰년 미상 |
동생 | 가순궁주 | 생몰년 미상 |
조카 | 경창궁주 | 원종의 제2비, 생몰년 미상 |
동생 | 정희궁주 | 생몰년 미상 |
시아버지 | 최충헌 | 1149년~1219년 |
남편 | 최전 | ?~1258년[6] |
2. 2. 공주 시절 및 혼인
덕창궁주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영가후로 봉해진 우봉 최씨 최전과 혼인했다는 기록만 있다[3]. 그러나 이 혼인은 당시 고려 왕실의 혼인에서 다소 특이한 양상을 띠는데, 덕창궁주는 당시 왕후 소생의 적녀 중 유일하게 종실이 아닌 사람과 결혼한 경우이다. 당시 고려의 공주들은 원칙적으로 종실과 혼인하였으나, 무신정권이 시작된 후 무신들은 신분 상승을 위해 공주와의 결혼을 추진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덕창궁주의 혼인도 이러한 노력의 산물로, 최전의 아버지인 최충헌이 추진하여 성사된 결혼이다[4].한편 최충헌이 폐위시킨 희종은 폐위 후 최충헌과 사돈이 되면서 그 목숨과 영화로운 삶을 보장받게 되고, 1219년(고종 6년) 음력 3월에는 최충헌에 의해 개경으로 환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희종은 1227년(고종 14년) 음력 3월 최충헌의 또 다른 아들인 최우에 의해 강화도로 다시 유배를 떠나고, 결국 죽을 때까지 개경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5]
참조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희종
https://terms.naver.[...]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성평왕후
https://terms.naver.[...]
[3]
서적
고려사 열전 권4 - 덕창궁주
[4]
두산백과
덕창궁주
https://terms.naver.[...]
[5]
서적
고려사로 고려를 읽다
21세기북스
2012-08-30
[6]
서적
고려사 세가 권24 - 고종 45년 2월 - 영가후 최전이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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