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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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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신정권은 고려 시대에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한 시기를 말한다. 1170년 정중부, 이의방 등이 일으킨 무신정변으로 시작되어 100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숭문천무 정책으로 인한 무신들의 차별, 사회 모순 심화, 의종의 실정 등이 배경이 되었다. 무신정권은 정중부, 이의방, 최충헌 등으로 이어지며, 중방, 교정도감, 정방 등의 통치 기구를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최씨 무신정권 시기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쇠퇴하였고, 1270년 임유무가 살해되면서 멸망했다. 무신정권은 사회 신분 질서를 동요시키고 농민과 천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문화적으로는 설화문학의 발달과 인쇄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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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호 (표준어)고려 (高麗)
국호 (한자)무신정권 (武臣政權)
국호 (로마자 표기)Musin Jeonggwon
정치 체제군사 독재 (이후 세습 독재)
존속 기간1170년 ~ 1270년/1273년
성립 계기무신정변
멸망 계기삼별초의 난
이전 국가고려
이후 국가고려
공용어중세 한국어, 한문 (문어)
민족한국인
종교불교, 유교, 도교, 무속
수도주요: 개경
임시 수도임시: 강화(1232년~1270년)
정치
국왕명종(1170년~1197년)
원종(1259년~1274년)
집권자이의방(1170년~1174년)
임유무(1270년)
역사
주요 사건무신정변 (1170년 10월 11일)
최씨 정권 (1196년~1258년)
몽골의 침입 (1232년~1258년)
주요 인물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김준
임연
경제
통화고려 동전
기타
현재 국가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 역사적 배경

고려 문벌귀족 사회는 문치주의를 바탕으로 무신들의 사회적 몰락을 가져왔다. 의종 대에는 무신에 대한 차별이 극심해져 최질, 김훈 등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다. 1170년 음력 8월 30일,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옹립, 많은 문신을 살해했다.[7]

김보당의 의종 복위 운동, 조위총의 난 등 무신에 대한 저항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후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관직 독점과 사전 확대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로써 문벌 귀족 중심의 고려 사회는 실력 위주의 무신 사회로 변화했다. 그러나 무신 정권 내부에서도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의방은 이고를 죽이고 정중부 아들 정균에게 살해되었으며, 정중부경대승에게 제거되었다. 경대승도방을 설치했으나 병사했고, 이의민이 권력을 잡았지만 최충헌, 최충수 형제에게 살해되었다.

인종 대에는 왕권 약화와 함께 개경 세력(김부식 대표), 왕족(이자겸 대표), 서경 세력(묘청 대표) 간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1][2]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 왕궁이 소실되자, 묘청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개경 세력과 대립했고, 이는 묘청의 난으로 이어졌다.[3][4][5][6]

2. 1. 문신 중심의 정치와 무신 차별

고려는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숭문천무(崇文賤武) 정책을 시행하여 무신들은 문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았다.[7] 군사 지휘권은 문신 출신 장군에게 주어졌으며,[7] 무신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소외되었다.[7]

958년 의 제도를 참고하여 도입된 과거 (관료 등용 시험)에서는 문과, 잡과 및 승려를 등급 매기는 승과가 있었을 뿐, 무인을 등용하는 무과는 없었다. 무반직이 되려면 세습적인 음서에 의한 임명이나 전쟁의 무공에 의한 발탁뿐이었다.[26] 이로 인해 "상문경무", 즉 무반에 대한 문반의 거만함과 멸시라는 풍조가 생겨났다.[26] 무신의 수장인 상장군, 대장군을 비롯한 무신은 합의 기관 "'''중방'''"을 거점으로 활동했지만, 항상 차별적인 대우를 받아왔다.[26]

의종은 사치와 유흥에 빠지고 환관의 전횡을 허용하는 등 정치 이완이 심해 국내에 불만이 축적되어 있었다.[29] 특히 의종이 토목 공사나 불교 의식 거행에 즈음하여 하급 무신 (현직 무반)과 군인들을 혹사한 반면, 문신과 환관을 노골적으로 우대했기 때문에 무신들의 불만은 절정에 달했다.[29]

2. 2. 사회 모순 심화와 민란 발생

고려는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숭문천무(崇文賤武) 정책으로 군인들을 차별했다. 958년 과거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무인을 위한 무과는 없었고, 무반직은 세습이나 무공에 의한 발탁으로만 가능했다.[26] 무신들은 합의 기관인 '''중방'''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항상 차별 대우를 받았다.[27]

12세기 만주에서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자, 고려는 금나라에 조공하며 관계를 개선했다. 그러나 1126년 왕실 외척 이자겸이 왕위를 노린 이자겸의 난이 발생했다.[29] 1135년에는 승려 묘청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를 획책하며 묘청의 난을 일으켜 국가가 혼란에 빠졌다.[29] 결국, 문신 김부식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무신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29]

인종 대에는 왕권이 약화되고 개경, 왕족, 서경 세력으로 나뉘어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왕궁이 소실되자,[1][2] 묘청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개경 세력과 대립했고, 이는 묘청의 난으로 이어졌다.[3][4][5][6] 이로 인해 문벌 귀족 세력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2. 3. 의종의 실정과 무신들의 불만 고조

의종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는 무신들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특히,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 조롱한 사건은 문신과 무신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8] 이는 무신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2세기에 들어 한반도 북쪽 만주 평원의 주역이 거란(요나라)에서 여진(금나라)으로 바뀌는 시기에, 고려 왕조는 군제를 개혁하고 여러 차례 침입을 시도했지만, 모두 여진에게 패했다.[28] 1128년 고려는 금나라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아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 시기, 1126년에 왕실의 외척 이자겸이 왕위를 노린 이자겸의 난이 발발했다. 1135년에는 승려 묘청개경(개성)에서 서경(평양)으로 천도를 획책했고, 이후 묘청의 난이 발생하여 왕조가 동요하고 수도 개경도 황폐해졌다.[29] 결국, 묘청의 난을 진압한 것은 문신 김부식이었고, 국가 비상시에 병권이 문신에게 쥐어져 있다는 것에 무신의 불만이 높아졌다.

1146년부터 왕위에 있었던 의종은 사치와 유흥에 빠지고, 환관의 전횡을 허용하는 등 정치 기강이 해이해져 국내에 불만이 쌓였다. 의종이 토목 공사와 불교 행사 때 하급 무신과 군인들을 혹사시키고, 문신과 환관을 우대한 것도 무신들의 불만을 키웠다.

3. 무신정변과 정권의 성립

1170년(의종 24년) 음력 8월 30일,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하였다.('''경인의 난''')[30] 정변 과정에서 많은 문신들이 살해되었고,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했다.[26]

1173년, 문신인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명분으로 무신 정권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무신 정권은 이를 진압하고 전 국왕 의종과 문신들을 제거하였다.('''계사의 난''')[31] 이후 조위총의 난 등 무신에 대한 저항이 있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이 두 사건으로 무신들의 권력 기반은 강화되었다.

무신정권 제1기(1170년 - 1196년)는 무신정권 확립기였다. 이 시기에는 무신정권 내의 권력 다툼이 잇따랐다. 정권 수립 직후 이고가 1171년에 왕위를 노리다가 이의방 등에게 살해당했다. 이의방이 무신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했지만, 정중부에 의해 살해당했다.[26] 정중부가 권력을 잡았지만, 부하인 경대승에 의해 살해당했다. 1183년에는 김광립, 이의민 등의 반란군이 경대승을 대신했다. 1196년최충헌·최충수 형제 등이 이의민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4. 무신정권의 전개

무신정변으로 문벌귀족 정치가 몰락하고, 무신들이 천대받던 상황이 의종 때 극에 달하며 1170년 정중부, 이의방 등이 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했다.[30] 이후 김보당의 의종 복위 운동, 조위총의 난 등 무신에 대한 항거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정치적, 경제적 실력을 차지했다.[26]

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 중심에서 실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무신 사회로 변질되었고, 무신 사이에서도 잦은 권력 교체가 일어났다. 이의방은 이고를 죽이고 권세를 부렸으나 정중부의 아들에게 제거되었고, 정중부경대승에게, 경대승 사후 권력을 잡은 이의민최충헌 형제에게 살해되었다.[26]

20여 년간의 혼란을 수습하고 최충헌이 독재 정권을 수립, 문신 친화 정책을 펼치고 왕권을 존속시키면서도 왕위를 폐위, 옹립했다. 사원 세력과 농민, 노비의 난을 진압하여 최씨 정권의 기초를 마련했다.

최씨 정권은 고종과 함께 강화도로 옮겨 몽골에 대항했다.(→고려-몽골 전쟁) 최충헌으로부터 최우, 최항, 최의로 이어지는 동안 7차례 몽골과 전쟁을 치렀고, 지도력이 약화되었다. 문신들은 몽골과의 강화를 주장하며 외세를 이용해 무인 세력을 견제하려 했고, 결국 몽골과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가 일부 무신과 결탁하여 최씨 정권을 무너뜨렸다.[37]

류경과 최의의 수하였던 김준에게 최의가 살해되고, 1270년 개경 환도와 함께 고려는 몽골과 강화했다. 그러나 무신정권 내부 갈등으로 원종이 폐위되기도 했으나, 고려 태자가 원나라 황제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1270년 음력 5월 임유무가 사형당하며 무인정권은 완전히 소멸했다.[37]

무신정권은 권력 투쟁기, 최씨 집권기, 몽골 침입과 쇠퇴기로 나뉜다.

고려 무신정권 역대 일람표
권력자집정 시작종료 년도집정 기간국왕비고
1이의방1171년1174년3년의종
명종
정중부에 의해 살해됨
2정중부1174년1179년5년경대승에 의해 살해됨
3경대승1179년1183년4년병사
4이의민1183년1196년13년최충헌 등에 의해 살해됨
5최충헌1196년1219년23년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최씨에 의한 교정별감 세습 시작
6최우1219년1249년30년고종몽골의 침략이 시작되어 강화도로 천도
7최항1249년1257년8년병사
8최의1257년1258년1년유경, 김준 등에 의해 살해, 최씨 정권 붕괴
9김준1260년1268년8년원종임연에 의해 살해됨
10임연1268년1270년2년병사
11임유무1270년1270년1년송송례, 홍규 등에 의해 살해됨


4. 1. 권력 투쟁기 (1170년 ~ 1196년)

1170년 무신정변이 성공한 이후, 무신들은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하였으며, 많은 문신들을 살해했다.[30] 이후 김보당이 의종 복위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조위총의 난 등 무신에 대한 항거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관직을 독점하며 정치적, 경제적 실력을 차지했다.

고려 사회는 문벌 귀족 중심에서 실력 유무가 정권 장악을 결정하는 무신 사회로 변질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신들 사이에서도 잦은 권력 교체가 일어났다. 이의방은 이고를 죽이고 딸을 태자비로 삼아 권세를 부렸으나,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제거되었다.[26]

정중부는 홀로 득세하며 방자한 행동을 일삼다가 경대승에게 살해되었다. 경대승은 신변 보호를 위해 도방을 설치했으나 병으로 사망하고, 이의민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이의민 역시 최충헌, 최충수 형제에게 살해되었다.[26]

이처럼 2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정권이 교체되면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고, 이는 민란을 더욱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고려 무신정권 역대 권력자 (1170년 ~ 1196년)
권력자집정 시작종료 년도집정 기간비고
1이의방1171년1174년3년정중부에 의해 살해됨
2정중부1174년1179년5년경대승에 의해 살해됨
3경대승1179년1183년4년병사
4이의민1183년1196년13년최충헌 등에 의해 살해됨


4. 2. 최씨 집권기 (1196년 ~ 1258년)

최충헌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이후 4대 60여 년간 최씨 무신정권이 이어졌다.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정치 권력을 집중시키고, 문신들을 등용하여 통치 기반을 강화했다. 최우는 자신의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고, 삼별초를 조직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39]

최씨 무신정권(최씨정권)은 62년간 4대로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가 집권한 시기이다.

고려 무신정권 역대 권력자
권력자집정 시작종료 년도집정 기간국왕비고
5최충헌1196년1219년23년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최씨에 의한 교정별감 세습 시작
6최우1219년1249년30년고종몽골의 침략이 시작되어 강화도로 천도
7최항1249년1257년8년고종병사
8최의1257년1258년1년고종유경, 김준 등에 의해 살해, 최씨 정권 붕괴


4. 3. 몽골 침입과 쇠퇴기 (1231년 ~ 1270년)

1231년부터 몽골의 침입이 시작되어 최우를 비롯한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전하였으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37] 몽골과의 장기적인 전쟁은 고려 사회에 큰 부담을 주었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문신들은 몽골과의 강화를 주장하며 무신 세력을 견제하였고, 결국 김준, 류경 등이 최의를 제거하고 무신정권을 무너뜨렸다.[37]

1270년 개경 환도와 함께 고려는 몽골과 강화하였고, 무신정권은 완전히 종식되었다.[37] 그러나 무신정권 내부에서 갈등이 생겨 반발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원종이 폐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 태자가 원나라 황제에게 원군을 요청함으로써 1270년 음력 5월 임유무는 사형당하고 무인정권은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최씨 정권이 무너진 이후, 무신정권은 다시 권력 투쟁기를 맞이한다. 1268년 김준임연에게 암살당하고, 임연쿠빌라이를 알현하고 귀국한 원종을 폐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병사하였다. 임유무가 정권을 계승하였으나, 1270년 몽골의 지원을 받은 세력에 의해 살해되면서 100년간 이어진 무신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37]

몽골 침입과 쇠퇴기 무신정권 일람표
권력자집정 시작종료집정 기간국왕비고
6최우1219년1249년30년고종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도 천도
7최항1249년1257년8년병사
8최의1257년1258년1년유경, 김준에게 살해, 최씨 정권 붕괴
9김준1260년1268년8년원종임연에게 살해됨
10임연1268년1270년2년병사
11임유무1270년1270년1년송송례, 홍규에게 살해됨


5. 무신정권의 통치 기구

무신정권은 여러 통치 기구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정책을 실행했다. 주요 통치 기구로는 중방, 교정도감, 정방, 도방, 삼별초 등이 있었다.

무신정변 직후,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중방은 본래 무신들의 회의 기구였으나, 정변 이후 정치, 경제적 실권을 모두 차지하는 핵심 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최충헌 집권 이후 그 기능은 약화되었다.

최충헌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교정도감은 국가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최고 권력 기구였으며, 교정별감이 실권을 장악했다. 최충헌 사후에는 '영공'이라는 별칭이 무신정권 수장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되기도 했다.

최우는 자신의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담당하게 했다. 정방은 문신들을 등용하는 창구 역할을 하면서, 문신 세력이 성장하는 기반을 제공했다.

경대승은 신변 보호를 위해 사병 조직인 도방을 설치했다. 도방은 최충헌 대에 이르러 더욱 확대되어 최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최우 때 조직된 삼별초는 야별초에서 비롯되었으며,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되었다. 삼별초는 치안 유지와 대몽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무신정권 붕괴 이후에도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몽골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

5. 1. 중방 (重房)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관직을 독점했으며, 토지를 확대하여 정치적, 경제적 실력을 차지했다.[47] 중방은 무신들의 최고 합의 기구로, 무신정권 초기에는 주요 권력 기관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최충헌 집권 이후에는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48]

5. 2. 교정도감 (敎定都監)

최충헌1196년 권력을 잡은 후 설치한 최고 권력 기구이다. 교정별감(敎定別監)이 실권을 장악했으며, 국가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였다.

초기 최충헌 시대에는 "교정별감"이 무신정권 수장의 자리를 차지하며 창설되어 계승되었다. 다만 교정별감은 여러 도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최충헌은 1206년 희종으로부터 중서령 진강공의 칭호를 받고 사퇴했지만, 이후 "령공"으로 불렸다. 이 "령공"은 무신정권 수장의 별칭으로 정착되었다.

최우 때에는 최우의 사저에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 처리 기관으로 활용하면서, 문신 세력이 대두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5. 3. 정방 (政房)

최우가 자신의 사저에 설치한 인사 행정 기관이다.[15] 최우는 정방을 통해 문신들을 등용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15] 이는 문신 세력이 성장하는 기반을 제공하였다.[15]

5. 4. 도방 (都房)

경대승이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설치한 사병 조직이다.[4] 무신정변 이후 무인들은 각자 문객과 집안의 종을 무장시켜 사병으로 삼았는데, 경대승의 도방은 이를 조직화한 것이었다.[4] 정중부를 살해하고 권력을 잡은 경대승은 무신들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도방을 설치했으나, 경대승이 병으로 사망하면서 도방은 잠시 해체되었다.[4]

이후 최충헌이 권력을 잡으면서 도방은 다시 부활했다.[4] 최충헌은 경대승의 도방을 모방하여 사병을 6교대로 나누어 자신의 집을 지키게 했고, 나중에는 이를 36번으로 확대했다.[4] 이로 인해 용맹한 자들은 모두 최씨 정권의 사병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4] 도방은 최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으며, 권력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5. 5. 삼별초 (三別抄)

최우가 자신의 신변 보호와 치안 유지를 위해 조직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되었다.[47] 야별초는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고,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한 이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하여 삼별초가 되었다.[47]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정예 군사 조직으로서 치안 유지와 대몽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무신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도 개경 환도에 반대하며 강화도에서 봉기하였고, 이후 진도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몽골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48] 이는 고려 무인의 기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49]

6. 무신정권 시기의 사회 변화

의종 때 문벌귀족 중심 정치로 무신의 사회적 몰락과 정치적, 경제적 열세가 심화되었다. 1170년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문벌 귀족 중심의 고려 사회는 실력 위주의 무신 사회로 변질되었다.[38]

이후 무신들 사이에서 빈번한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이의방은 이고를 제거하고 권세를 부리다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제거되었고, 정중부는 경대승에게 살해되었다. 경대승 사후 이의민이 권력을 잡았으나 최충헌, 최충수 형제에게 제거되었다.

최충헌은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정권을 안정시켰다. 문신 친화 정책을 펼치고 왕권을 존속시키면서도 왕위를 폐위, 옹립하는 등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사원 세력을 제거하고 농민과 노비의 난을 진압하여 최씨 정권의 기반을 다졌다.

최우, 최항, 최의로 이어지는 최씨 정권은 고종과 함께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골에 대항했다(대몽항쟁, 고려-몽골 전쟁). 7차례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으로 지도력이 약화된 틈을 타, 몽골과의 강화를 주장하는 문신들이 외세를 이용하여 무인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결국 1270년 개경 환도와 함께 고려는 몽골과 강화했다.

6. 1. 신분제의 동요

무신정권은 문반 우위의 고려 관료 조직을 타파하고 실력 중심의 풍조를 만들었다. 문벌 귀족에 의해 신분 질서가 고정된 상황에서 억압받던 무인과 서민의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38]

이의민은 아버지가 상인, 어머니는 사비였고, 최충수의 어머니는 사비였으며, 김준은 아버지가 사노, 자신은 최씨의 노예였다.[40] 이들은 왕위 계승에 개입하여 무신정권기 즉위한 7명의 왕 중 4명을 옹립하고 4명을 폐위했다.[41]

이러한 하극상 분위기, 사회 모순 심화, 중앙 정부 혼란으로 국내 각지에서 관민 유망·도산이 잇따랐고, 이는 반란으로 이어졌다.[38] 무신정권 초기에는 1172년 서북계 소요, 1173년 김보당의 난, 1174년 개성 승려들의 충돌과 조위총의 난, 1176년 망이·망소이의 난 등 반란이 연이어 발생했다.[42]

1193년에는 김사미와 효심이 연계한 남적의 대반란이 경상도 일대에서 발생했다. 최충헌 집권 후 1198년에는 만적의 난이 일어났다. 1199년 남적이 동해 연안 반란 세력과 연계하고, 1200년부터 1202년까지 동경(경주) 중심 반란이 이어지는 등 고려 남부에서 반란이 많았다.[43]

1210년대에는 1217년 평양 소동, 1218년 의주 한순의 반란이 서북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몽골 침공 시기에는 홍복원이 몽골에 항복하기도 했다.

6. 2. 농민과 천민의 저항

무신 집권자들의 토지 겸병과 과도한 세금 징수는 농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이는 잦은 민란으로 이어졌다.[38] 농민들은 경제적 파탄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권세가들의 토지 겸병과 수탈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봉기는 대표적인 민란 중 하나였다.[42] 망이·망소이는 관군의 회유로 일시 항복했으나, 다음 해 다시 봉기하여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며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결국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의해 진압되었다.

1193년에는 경상도 지역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주도한 민란이 발생했다.[43] 이들은 경주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경상도 일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최충헌이 파견한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198년에는 만적이 개경에서 사노들을 모아 반란을 모의했다.[43] 이들은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천민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더 나아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이러한 하층민의 봉기는 가혹한 수탈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일부에서는 정권과 체제에 대한 저항 양상도 나타났다. 특히 종속 구역민이나 천민층의 봉기는 제도적 부담에 대한 저항으로, 체제에 대한 저항 성격이 강했다. 최씨 정권은 강력한 토벌로 이러한 봉기를 억제했지만, 변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7. 무신정권 시기의 문화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일부 문인들은 출세를 단념하고 초야에 은거하며 음주와 시가를 즐기는 경향을 보였다.

이인로, 임춘 등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중국의 죽림칠현에 빗대어 스스로를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고 자처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규보, 최자와 같이 최씨 무신 정권하에서 새로운 출세의 길을 모색하는 문인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정치적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두 부류의 문인들은 서로 얽혀서 하나의 문학적 세계를 이룩하였고, 그 속에서 신화, 전설, 일화, 시화(詩話) 등을 소재로 한 ‘설화문학’이 발달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기술 분야에서 목판 인쇄술과 금속 활자 인쇄술이 처음 등장하였다. 또한 의학이 크게 진보하였다.

8. 고려 무신정권과 일본 막부의 비교

고려 무신정권은 1170년 정중부, 이의방 등이 일으킨 무신정변으로 시작되어 1270년 개경 환도까지 약 100년간 존속했다. 이 시기 고려는 문신 중심의 문벌귀족 사회에서 무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사회로 변화했다.

일본의 경우, 12세기 후반에서 19세기 말까지 여러 무가 정권, 즉 막부(幕府)가 존재했다. 이 중 가마쿠라 막부는 고려 무신정권과 비슷한 시기에 성립되어 여러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인다.

고려 무신정권은 일본 막부와 달리 수도를 거점으로 하였으며 국왕과 문신들이 만들어낸 기존의 국가조직 안에서 패권을 획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와 비교해 볼 때 재지성(在地性)은 약하며 토지를 매개로 사병을 조직하는 제도는 정비되지 않았다.[13]

고려 무신정권 계층의 유동성은 일본 막부에 비해 활발[17]하였으며, 세계 정세의 변화와 원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13세기에 무너졌지만 일본 막부는 19세기 말까지 유지[16]되었다.

8. 1. 공통점

무신정권은 인접국인 일본에 동시기에 성립했던 헤이시 정권(12세기 후반)이나 가마쿠라 막부(12세기 말 ~ 14세기 초) 등의 무가 정권과 비교되기도 한다.

무신정권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또한, 무신 정권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진다.[13]

무신 정권의 공통점
항목내용
군사 제도 담당국가의 군사 제도를 담당했다.
군사 관직 임명군사 제도 관련 관직은 국왕이 임명하여 정통성이 있었으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세습이 가능했다.
발생 원인모두 같은 시기에 발생했으며, 문신이나 귀족무신을 차별하여 발생했다.
결과무신의 반란으로 문신이나 귀족 수십 명의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거나 유형당했다.
권력 구조명분상이나 형식상으로 2인자였으며, 상황에 따라 군주를 교체하여 조정 권력이 약화되고 무신 정권 권력이 강화되었다.
경제적 특징부(富)가 한때 이들에게 쏠린 적이 있었다.



일본의 무가 정권의 수장은 초기에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된 후에는 이 직책이 무가의 수장의 상징으로 계승되었다. 다만 조정 관직으로서의 장군직은 반드시 지속적으로 임명된 것은 아니었으며, 무사들의 의식 속에서는 오히려 가마쿠라 막부의 장인 "가마쿠라도노"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무신정권에서도 초기의 이의방 등은 대장군 위위경이 되었지만 안정되지 않았고, 최충헌 시대의 "교정별감"이 무신정권 수장의 자리를 차지하며 창설되어 계승되었다. 다만 교정별감은 수많은 도감 중 하나일 뿐이며, 세이이타이쇼군과 같은 특이성은 갖지 않았다. 최충헌은 1206년에 희종으로부터 중서령 진강공 칭호를 받고 사퇴했지만, 이후 "령공"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령공"은 "가마쿠라도노"와 마찬가지로 교정별감이라는 공적인 관직과는 별개로, 무신정권 수장의 별칭으로 정착되었다.

8. 2. 차이점

고려 무신정권은 일본의 막부와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 중앙 집권 vs 지방 분권: 고려 무신정권은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적인 권력을 행사한 반면, 일본 막부는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했다.[13] 고려 무신정권은 국왕과 문신들이 만든 기존 국가 조직 안에서 권력을 획득했기 때문에, 지방 세력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14]
  • 존속 기간: 고려 무신정권은 몽골의 침입으로 100년 만에 멸망했지만,[15] 일본 막부는 19세기까지 존속했다.[16]
  • 신분 유동성: 고려 무신정권 시기에는 신분 유동성이 활발했다.[17] 능력이 있으면 신분에 관계없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반면, 일본 막부는 신분 질서가 비교적 고정적이었다.

9. 무신정권 역대 집권자

명종이의방, 정중부와 함께 연립정권을 형성했으나, 실질적인 집권은 하지 못했다. 의종을 폐위시켰다.1대
연립정권이의방1170년1174년4년이고, 정중부와 함께 연립정권을 형성했다. 의종을 폐위시켰다.2대
연립정권정중부1174년1179년5년중방명종이고, 이의방과 함께 연립정권을 형성했다.3대경대승1179년1183년4년연립정권(조원정)1184년1187년3년이의민, 두경승과 함께 연립정권을 형성했다.
1187년 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사형당했다.연립정권(두경승)1184년1196년12년이의민, 조원정과 함께 연립정권을 형성했다.4대
연립정권이의민1184년1196년12년조원정, 두경승과 함께 연립정권을 형성했다.5대최충헌1196년1219년23년교정도감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명종, 희종을 폐위시켰다.6대최우1219년1249년30년교정도감
정방고종최충헌의 아들이다.7대최항1249년1257년8년최우의 아들이다.8대최의1257년1258년1년최항의 아들이다.문인실권(류경)1258년1258년8개월무신정권 기간 중 유일하게 문인이 실권을 잡았다.
문인이기에 일반적으로 무신정권 계보에서는 제외된다.9대김준1258년1268년10년고종
원종10대임연1268년1270년1년 3개월원종
영종영종은 1269년 6월부터 11월까지 약 5개월 간 왕위에
있었으나, 몽골의 압력으로 폐위되었다.11대임유무1270년1270년3개월원종임연의 아들이다.


참조

[1] 웹사이트 Yi Cha-gyŏm and Ch'ŏk Chung-gyŏng Set Palace on Fire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 웹사이트 Yi Cha-gyŏm and Ch'ŏk Chun-gyŏng Set Palace on Fire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3] 웹사이트 King Listens To Myocheong And Visits Sŏgyŏng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4] 웹사이트 Myocheong et al. Revolts In Sŏgyŏng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5] 웹사이트 Kim Bu-sik Is Appointed Scholar-General And Ordered To Strike Myocheong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6] 웹사이트 People Of Sŏgyŏng Kill Myocheong And Surrender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7] 웹사이트 Frequent Travels of the King Have Chŏng Chung-bu et al. Contemplate Treason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8] 웹사이트 Chŏng Chung-bu Harbors Enmity Toward Kim Ton-jung, Son Of Kim Bu-sik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9] 웹사이트 Military Revolts At Bohyeonwon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0] 웹사이트 Chŏng Chung-bu et al. Kill Eunuchs And Move King To Military Supply Office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1] 웹사이트 King Is Exiled To Geoje And Crown Prince Is Exiled To Jindo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2] 웹사이트 Military Puts Wang Ho On The Throne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3] 웹사이트 Crown Prince Arrives At Capital With Mongol Emissary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4] 웹사이트 Kublai Ascends The Throne As Emperor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5] 웹사이트 Crown Prince Is Crowned And Receives Bodhisattva Precepts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6] 웹사이트 Im Yŏn Deposes King And Enthrones Wang Chang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7] 웹사이트 Crown Prince Wang Sim Goes To Mongolia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8] 웹사이트 Crown Prince Hears Of King's Dethronement And Returns To Mongolia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19] 웹사이트 King Wonjong Is Reinstated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 웹사이트 King Wonjong Goes To Mongolia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1] 웹사이트 King Wonjong Visits Kublai Khan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2] 웹사이트 King Wonjong Asks Kublai's Permission To Marry His Son To Mongol Princess; Kublai Defers Discussion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3] 서적 Empire's Twilight: Northeast Asia Under the Mongol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12-31
[24] 웹사이트 Crown Prince Marries Princess Of Mongolia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5] 웹사이트 Office of Eastern Conquest Proposes Allowing Officials To Ride Horses https://db.history.g[...]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6] 문서 姜2001、88-89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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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문서 『朝鮮史』137-138頁。
[30] 문서 『朝鮮史』138-139頁。姜2001、132-133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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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문서 長井1994。
[33] 문서 姜2001、136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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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서적 日本中世国制史論 吉川弘文館 2018
[36] 서적 (제목 정보 없음)
[37] 서적 조선사
[38] 서적 (제목 정보 없음)
[39] 서적 (제목 정보 없음)
[40] 서적 조선사
[41] 서적 조선사
[42] 서적 조선사
[43] 서적 조선사
[44] 서적 조선사
[45] 서적 (제목 정보 없음)
[46] 서적 (제목 정보 없음)
[47] 서적 (제목 정보 없음)
[48] 서적 (제목 정보 없음)
[49] 문서 (제목 정보 없음)
[50] 서적 (제목 정보 없음)
[51] 서적 (제목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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