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나리유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도쿠가와 나리유키는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이자 키슈번의 11대 번주이다. 그는 시미즈 도쿠가와가를 잇다가 이복동생의 요절로 인해 키슈번주가 되었으며, 선대 번주들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악화된 번 재정을 극복해야 했다. 나리유키는 21년 11개월 동안 키슈번주로 재임했으며, 후사 없이 사망하여 이복동생 도쿠가와 나리카츠가 번주직을 계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자녀 - 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요시는 에도 막부의 12대 쇼군으로, 덴포 개혁을 추진했으나 실패하고, 서양 세력의 압박이 거세지는 격동기를 겪었으며, 사후에는 쇄국 정책이 끝나게 되었다. -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자녀 - 도쿠가와 나리카쓰
에도 시대 후기,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과 기슈 도쿠가와 가문을 모두 계승한 도쿠가와 나리카쓰는 와카야마 번주로 재임 중 와카야마성 천수각 소실 등 다사다난한 시기를 보내다 30세에 사망했다. - 시미즈 도쿠가와가 당주 - 도쿠가와 아키타케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로, 파리 만국 박람회에 일본 대표단을 이끌고 유럽을 순방하며 외교 활동을 펼쳤고, 메이지 유신 이후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가 되었으며, 육군 소위로 복무하다가 은퇴 후 사망했다. - 시미즈 도쿠가와가 당주 - 도쿠가와 시게요시
도쿠가와 시게요시는 에도 막부 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차남이자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의 초대 당주였으나, 쇼군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나 정치적으로 소외된 채 곤다이나곤에 임명되었지만 후사 없이 사망하여 이에시게의 혈통이 단절되었다. - 기슈번주 - 아사노 나가아키라
아사노 나가아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긴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형의 사망 후 기이 기슈번을 상속받고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아키 히로시마번의 번주가 되었다. - 기슈번주 - 아사노 요시나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아사노 요시나가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 아사노 나가마사의 아들이며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등에 참전했고, 세키가하라 전투 후 와카야마 번주가 되었으며 도요토미 가문 몰락 후 암살설이 돌기도 했다.
2. 친족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7남으로, 어머니는 측실 묘소인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요시는 이복형이며,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조카였다. 정실은 키슈번 10대 번주 도쿠가와 하루토미의 딸 가쿠쥬인(토요히메)이며, 측실은 지츠죠인을 포함해 3명이 있었다.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나리유키의 아들이지만, 나리유키가 이에모치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여 부자간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동복누나 미네히메는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노부의 정실이었다.
도쿠가와 나리유키는 처음에는 이복형 아쓰노스케가 요절하여 공석이 된 시미즈 도쿠가와가를 이었다. 그러나 키슈번 10대 번주 도쿠가와 하루토미의 사위였던 이복동생 토라치요가 요절하자, 하루토미의 5녀 토요히메와 결혼하여 하루토미의 사위가 됨으로써 키슈번을 상속받았다.[1]
3. 생애
나리유키는 선대 번주들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해 악화된 번 재정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와카야마시 역사』에 따르면, 장인 도쿠가와 하루토미가 정치 실권을 쥐고 있어, 나리유키 측근과 하루토미 측근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1]
나리유키는 후사 없이 사망하였고, 마쓰다이라 요리사토, 미즈노 타다나카 등이 후계자를 옹립하려 했으나, 결국 이복동생 도쿠가와 나리카츠가 번주직을 계승하였다. 키슈 번주로서의 재임 기간은 21년 11개월이었으며, 그동안 에도 참부 8회, 키슈 귀국 8회를 하였고, 키슈에 거주한 기간은 총 6년 4개월이었다.[1]
3. 1. 시미즈 도쿠가와 가 당주 시절
분카 13년(1816년) 시미즈가 당주 시절 주요 가신은 다음과 같다.
3. 2. 키슈 번주 시절
나리유키는 이복형 아쓰노스케가 요절하여 공석이 된 시미즈 도쿠가와가를 이었다. 그러나 키슈번 10대 번주 하루토미의 사위였던 이복동생 토라치요가 요절하자, 하루토미의 5녀 토요히메와 결혼하여 하루토미의 사위가 되어 키슈번주가 되었다. 시게노리, 하루토미 두 사람의 은거를 감수하고 있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번의 재정은 기울어져 버렸다. 또한, 『와카야마시 역사』에 의하면, 하루토미가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야마타카 이와미노카미 등 나리유키 측근과 야마나카 토시노부 등 하루토미 측근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생겼다.[1]요시토미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여 다른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하루토미는 마쓰다이라 요리사토를, 츠케가로 미즈노 타다나카는 쇼군 이에요시의 12남이자 자신의 조카 (여동생 오코토의 소생)인 타즈루와카를 옹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복동생 나리카츠가 가독을 상속하였다. 키슈번주로서의 치세는 21년 11개월이며, 그 동안 에도 참부는 8회, 키슈 귀국 8회, 키슈 거주 기간은 총 6년 4개월이었다.[1]
분세이 11년 당시 와카야마번주 시기의 주요 가신은 다음과 같다.
4. 연보
- 1801년(교와 원년) 9월 9일 : 나리유키 출생. 아명은 키쿠치요(菊千代).[1]
- 1805년(분카 2년) 11월 28일 : 시미즈 도쿠가와가 당주가 됨.[1]
- 1810년(분카 7년) 12월 1일 : 3만 석을 하사받고, 같은 달 5일에 시미즈 저택으로 이주.[1]
- 1815년(분카 12년) 2월 9일 : 원복을 하고, 아버지인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편휘를 받아 나리유키(斉順)로 개명. 종3위 좌근위권중장 겸 식부경에 임관.[1]
- 1819년(분세이 2년) 11월 15일 : 참의에 보임.[1]
- 1828년(분세이 11년) 2월 18일 : 종2위 곤다이나곤으로 승진.[1]
- 1837년(덴포 8년) 8월 23일 : 정2위 곤다이나곤에 유임(여원).[1]
- 1846년(고카 3년) 5월 8일 : 46세(만 44세)로 사망. 법호는 현룡원전이품전아상공양원휘대거사(顕龍院殿二品前亜相恭譲圓輝大居士). 난키 도쿠가와가 보다이지인 초호지 (와카야마현 카이난시 시모츠쵸)에 묻힘.[1]
5. 계보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7남으로, 어머니는 이에나리의 측실 묘소인이다. 도쿠가와 이에요시(12대 쇼군)의 이복동생이며, 도쿠가와 이에사다(13대 쇼군)는 조카뻘이다. 정실은 키슈번 10대 번주 도쿠가와 하루토미의 5녀 토요히메이고, 측실은 지츠죠인을 포함해 3명이 있었다. 키슈번 13대 번주이자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이에모치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에모치는 친아버지인 나리유키를 만난 적이 없다.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노부의 정실 미네히메는 동복누나이다.
6. 가신
도쿠가와 나리유키의 가신으로는 시미즈 가문 시절과 와카야마 번주 시절로 나뉜다. 시미즈 가문 시절에는 미즈노 다다토쿠, 오카무라 나오타카 등이 가로를 맡았고, 와카야마 번주 시절에는 안도 나오히로, 미즈노 쓰시마노카미, 미우라 쇼겐 등이 가로 등을 맡았다.
6. 1. 시미즈가 시기
6. 2. 와카야마번주 시기
분세이 11년(1828년) 당시 와카야마번주 시기의 주요 가신 목록이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