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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케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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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츠케가로는 번주를 보좌하고 쇼군의 명령을 받아 번주를 감시하며 막부의 정책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고산케의 츠케가로는 쇼군으로부터 친번 번주의 육성 및 통치, 막부와의 조정을 명받았으나, 에도 막부 시대에 츠케가로들은 다이묘에 준하는 영지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낮은 대우를 받았다. 이에 츠케가로 가문들은 막부에 후다이 다이묘와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도 츠케가로 제도가 존재했으며, 막부 직속 가신이 츠케가로로 임명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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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케가로
츠케가로 정보
정의에도 시대에 다이묘에 부속된 가신 중에서도 특별한 가문
역할다이묘의 가독 상속 시 보좌
다이묘가 어릴 경우 후견
영내 통치 보좌
봉록일반 가신보다 높은 봉록 지급
거주지다이묘의 거성 근처 또는 영내 요충지
판별 기준가문의 격식
다이묘 가문과의 관계
과거 공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
역사
기원센고쿠 시대의 요리아이 제도에서 유래
에도 시대다이묘의 가신단 재편 과정에서 확립
막부의 통제 강화 정책에 따라 제도화
메이지 시대폐번치현 이후 츠케가로 제도 폐지
츠케가로의 종류
후다이 츠케가로에도 막부 성립 이전부터 섬겨온 가문
도자마 츠케가로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섬기게 된 가문
분가 츠케가로다이묘 가문의 분가에서 독립한 가문
주요 츠케가로 가문
오와리번나루세 가문
히라노 가문
미토번나카야마 가문
후쿠이번혼다 가문
히로시마번아사노 나가아키라 시대의 8가문
구마모토번야치 가문
사이토 가문
가와지리 가문
참고 문헌
서적《에도 번한총람》
《간세이 중수 제가보》

2. 츠케가로의 임무와 역할

쇼군의 일족에서 다이묘로 발탁된 인물은 고유한 가신이 없었기 때문에 번정을 담당하는 가로는 모두 쇼군가에서 붙여졌다. 츠케가로는 정무와 군사를 보좌하고 번주를 양육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에도 막부의 의향을 따르는 것도 기대되었다. 따라서 신분상으로는 번주의 가신이라기보다는 쇼군 직속의 감시역(お目付け役)이라는 성격이 강했다.[1]

시대가 바뀌면서 번마다, 츠케가로 가문마다 생각의 차이가 생겨났다. 번주에게 충실히 봉사하며 쇼군가와 대항하려 하거나, 반대로 배신(陪臣) 신분에서 벗어나려 번주와 대항하거나, 재정 지원을 대가로 고산케 출신의 후계 번주를 맞아 막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등, 정책과 주도권을 둘러싸고 번 내에서 파벌 항쟁을 벌이는 인물도 있었다.[1]

초대 츠케가로는 각각 쇼군으로부터 신판 번주의 육성 및 통치, 막부와의 조정을 명받았으며, 사명감을 가지고 츠케가로를 맡았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정비되면서 츠케가로 5가문 체제가 갖추어진 후, 5가문은 다이묘격의 소령을 지녔으면서도 배신(陪臣)으로 가문 격이 낮았기 때문에, 연대하여 막부에 후다이 다이묘 수준의 대우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1] 원래 직참막신(直参幕臣)과 친번배신(親藩陪臣)이라는 입장 차이에서 저항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1]

예를 들어, 이에야스오와리 요시나오기슈 요리노부의 츠케가로로 마쓰다이라 야스시게나가이 나오카쓰를 생각하여 내의를 전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이에야스를 계속 섬기기를 희망하였다.[1] 요리노부의 츠케가로가 된 미즈노 시게나카도 한 번은 사퇴했고, 아들 시게요시는 더 명확하게 거부 의사를 표명하여, 2천 석의 직참으로 히데타다, 이에미츠를 섬긴 채 아버지의 유적을 계승하여 츠케가로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1] 시게나카겐나 7년(1621년) 11월 12일에 사망한 후 약 2년간 뒤를 잇지 못하고, 동생 마사카츠에게 3만 5천 석을 물려주길 희망하였으나, 히데타다이에미츠의 설득으로 겐나 9년(1623년) 6월에 가독을 이었다.[1]

일반적인 정무지로서 츠케가로들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취했다.[1]


  • 오와리 가문의 나루세 씨와 다케코시 씨는 에도나고야로 나뉘어 매년 9월에 교대했다.
  • 기슈 가문의 안도 씨는 기슈에 주재했고, 미즈노 씨는 에도에 주재했다.
  • 미토 가문의 나카야마 씨는 번주와 함께 에도에 머무르며 정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2. 1. 고산케의 츠케가로

쇼군의 일족에서 다이묘로 발탁된 인물은 고유한 가신이 없었기 때문에 번정을 담당하는 가로는 모두 쇼군가에서 임명되었으며, 이들을 츠케가로라고 불렀다. 츠케가로는 정무와 군사 보좌, 번주 양육, 에도 막부의 의향을 따르는 임무를 맡았다. 신분상으로는 번주의 가신이라기보다 쇼군 직속 감시역(お目付け役)의 성격이 강했다.[1]

시간이 지나면서 츠케가로는 번주에게 충성하며 쇼군가와 대립하거나, 배신(陪臣) 신분에서 벗어나려 번주와 대립하거나, 재정 지원을 대가로 고산케 출신 후계 번주를 맞아 막부의 입지를 강화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나루세가 · 다케노코시가, 키이 도쿠가와가의 안도가 · 미즈노가, 미토 도쿠가와가의 나카야마가 등 5개 가문은 고산케의 정책을 좌우했다.[1]

게이오 4년(1868년) 1월 24일, 신정부는 고산케의 츠케가로 5가문을 독립 다이묘로 추대했다. 이들은 메이지 17년(1885년) 화족령으로 모두 남작이 되었다. 다른 다이묘 가문은 자작이 되었는데, 이는 메이지 이후 당상공가 또는 제후 다이묘에 발탁되어 화족이 된 자는 일률적으로 남작으로 한다는 내규에 따른 것이며, 츠케가로 가문을 차별한 것은 아니었다.[1]

초대 츠케가로는 쇼군으로부터 친번 번주의 육성 및 통치, 막부와의 조정을 명받았지만, 에도 막부가 정비되면서 츠케가로 5가 체제가 갖춰진 후에는 다이묘급의 소령을 가지면서도 가문 격이 낮았기 때문에, 막부에 후다이 다이묘와 같은 대우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1]

2. 1. 1.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

히라이와 치카요시게이초 12년(1607년) 윤4월 26일부터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츠케가로가 되었으나, 게이초 16년(1612년) 12월 그믐날 사망하여 후계자가 없어 단절되었다.[1] 나루세 마사나리겐나 2년(1616년)부터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츠케가로가 되었다.[1] 게이오 4년(1868년) 1월 24일, 메이지 정부로부터 9대 마사미츠가 독립 다이묘로서 인정받았다.[1]

다케노코시 마사노부는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이부형제로서, 겐나 5년(1619년)부터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츠케가로가 되었다.[1] 게이오 4년(1868년) 1월 24일, 메이지 정부로부터 10대 마사모토가 독립 다이묘로서 인정받았다.[1]

와타나베 모리츠나는 도쿠가와16신장 중 한 명으로서, 게이초 18년(1613년)부터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츠케가로가 되었다.[1] 오사카 전투에서 첫 출진인 요시나오를 후견했다.[1]

이시카와 미츠타다는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이부형제로서, 게이초 17년(1612년)부터 츠케가로가 되었다.[1] 증손자 마사아키 대에서부터 이시코(石河)씨로 성을 고쳤다.[1]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츠케가로
가문고쿠다카
히라이와씨오와리 이누야마번12만 3천석
나루세씨오와리 이누야마번3만 5천석
타케노코시씨미노 이마오번3만 8천석
와타나베씨미카와 테라베성1만 4천석
이시코씨미노 코마즈카1만석


2. 1. 2. 기이 도쿠가와 가문

기슈 요리노부를 보좌한 츠케가로는 다음과 같다.[1]

가문석고역할
안도 씨기이 타나베 3만 8,000석초대 안도 나오쓰구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슨푸 성주였던 요리노부를 보좌했다. 오사카 전투에서 요리노부 군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이후 도토미 가케가와 성주가 되었다. 겐나 5년(1619년) 요리노부의 기슈 번 전봉에 따라 타나베 성 3만 8,000석을 받았다. 안도 가문은 주로 기슈에 머물며 번정을 담당했다.
미즈노 씨기이 신구 3만 5,000석막신(오반가시라)이었던 미즈노 시게히사는 요리노부의 후견인으로, 하마마쓰 성 2만 5,000석을 받았다. 겐나 5년(1619년) 기슈 번 전봉 후 신구 성 3만 5,000석을 받았다. 2대 미즈노 시게요시는 막신이 되려 했으나, 도쿠가와 히데타다 등의 설득으로 가독을 상속했다. 미즈노 가문은 주로 에도에 머물며 막부와의 정치를 담당했다.
미우라 씨기이 기시 1만 6,300석요리노부의 생모 요주인의 형인 미우라 타메하루는 아와 사토미 씨 가신이었으나, 사토미 씨 개역 후 이에야스에게 등용되었다. 요리노부의 미토 번주, 슨푸 번 시대에도 영지를 받았고, 기슈 번 성립 시 기이 국 나가 군 기시 장 1만 5,000석을 받아 기시 성을 축성했다. 미우라 가는 막부 직신화를 거부하고 기슈 번주 가문에서 양자를 들였다.
구노 씨이세 타마루 1만 석구노 무네나리는 요리노부가 슨푸 번주가 되자 그 지배하에 들어갔고, 기슈 번 전봉 시에도 수반되었다. 다마루 성 입성 기록을 통해 다른 기슈 번 츠케가로와 동시에 기슈 번에 소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세 국 내 타마루 영지를 지배했다.


2. 1. 3. 미토 도쿠가와 가문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츠케가로는 다음과 같다.

  • 미즈노 분나가 : 도쿠가와 요리후사의 츠케가로가 되었으나, 겐와 9년(1623년)에 사망하여 후사가 없어 제봉되었다.[1]
  • 나카야마 씨 : 도쿠가와 요리후사의 츠케가로가 되었다. 히타치 마쓰오카 번에서 2만 5,000석을 받았다. 게이오 4년(1868년) 1월 24일, 메이지 정부에 의해 14대 나카야마 노부아키가 독립 다이묘로 인정받았다.[1]

3. 츠케가로의 지위와 대우 개선 운동

초대 츠케가로는 쇼군으로부터 신판 번주의 육성과 통치, 막부와의 조정 등을 명받아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정비되면서 츠케가로 5가문 체제가 갖추어진 후, 이들은 다이묘격의 영지를 소유했음에도 배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낮은 대우를 받았다.[1] 이에 5가문은 연대하여 막부에 후다이 다이묘와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원래 직참막신(直参幕臣)과 친번배신(親藩陪臣)이라는 입장 차이 때문에 츠케가로 임명에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오와리 요시나오키슈 요리노부의 츠케가로로 마쓰다이라 야스시게나가이 나오카쓰를 고려했으나, 두 사람 모두 이에야스를 계속 섬기기를 원했다. 미즈노 시게나카요리노부의 츠케가로 임명을 한 차례 사퇴했고, 그의 아들 미즈노 시게요시는 더욱 명확하게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1]

막부에 츠케가로의 대우 개선을 처음 요구한 것은 미토의 나카야마가 제10대 당주 노부타카였다. 그는 미토 제5대 번주의 친아들이자 제6대 번주의 친동생으로, 에도 성에서의 대우 개선을 막부에 청원했다. 분카 13년(1816년) 1월, 노중 미즈노 타다나리에게 하삭오절구의 단독 등성 및 장군 어전을 진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전까지 배신으로서 번주 수행 시에만 등성이 허용되었던 대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2]

노부타카 이후 다른 츠케가로들도 연대하여 후다이 다이묘와 같은 대우를 요구했다. 특히 안도 나오쓰구나루세 마사나리는 에도 시대 초기에 오고쇼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스루가 정권에 참여하여 막부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에, 후손들의 츠케가로 가격 상승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2]

분세이 8년(1825년) 3월 8일 미토번 가로들의 통달에 따르면, 나루세·안도 두 가문이 먼저 단독 등성에 성공하고, 나카야마가와 다른 츠케가로도 뒤를 이었다. 안도 나오히로는 닛코 오쿠노인에 있는 안도 나오쓰구의 석비를 후다이 다이묘의 석비 열에 재건하고자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나루세·다케코시·나카야마의 석비가 후다이 다이묘의 석비 열에 있는 것을 근거로 계속 진정했다.

독립 다이묘가 장군 교체 시 제출하는 서약을 츠케가로도 제출하고 싶다는 5가 연대의 가격 향상 운동은 미토 번주 나리아키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에도 성 내에 독자적인 츠메마(詰間)를 보유하려는 개선 요구는 분세이 7년(1824년) 안도 나오카 이후 직접 간청되었고, 가에이 6년(1853년) 5월에는 노중 아베 마사히로에게 미즈노 타다히로가 구체적인 장소를 지정하여 가리노마(仮間)를 츠메마로 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기슈번의 미즈노 타다히로는 번정을 장악하고 정략결혼으로 막부에 접근하여 기슈번 출신 장군을 취임시키고, 장군가로부터 양자를 받아들여 권력을 강화했다. 그는 5가 연대 운동보다 더 두드러지게 기슈번의 미즈노·안도 두 가문에 기쿠노마(菊間) 석을 주도록 막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5가의 발걸음을 흐트러뜨리고 반발을 초래했으며, 장군의 측실은 다이묘의 자녀 중에서 맞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막부 입장에서도 오산케를 통제하는 기능을 기대했던 츠케가로가 독립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였다.[3]

4. 에도 저택

고산케의 츠케가로 가문들은 에도 초기 게이초 때부터 주군인 고산케와는 별도로 에도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1] 각 주군의 저택 근처에 저택을 마련하고 있었으며, 기본적으로 지방에서 정무를 맡고 있던 기슈 안도가 이외의 츠케가로 저택은 시대가 지나면서 부지를 넓혀갔다.

일반적인 정무 형태는 다음과 같았다.


  • 오와리 가문의 나루세씨와 다케코시씨는 에도와 나고야로 나뉘어 매년 9월에 교대했다.[1]
  • 기슈 가문의 안도씨는 기슈 지방에 주재했고, 미즈노씨는 에도에 주재했다.
  • 미토 가문의 나카야마씨는 번주와 함께 에도에 머무르며 정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5. 츠케가로 제도의 변화와 폐지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는 고산케의 츠케가로 5가문을 독립 다이묘로 인정했다. 이는 츠케가로 제도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들 가문은 1884년 화족령에 따라 남작 작위를 받았다. 다른 다이묘 가문은 자작이 되었는데, 이는 메이지 이후에 도조 공가 또는 제후 다이묘로 임명되어 화족에 오른 자는 일률적으로 남작으로 한다는 내규에 따른 것으로, 구 츠케가로 가문을 차별 대우한 것은 아니었다.

6. 도쿠가와 막부 이전의 츠케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친족을 다이묘로 임명하면서 유력 가신을 츠케가로로 붙여 보좌하게 한 사례가 있다.[1]

대상숙로 (개역 사건 이전 전출)숙로 (개역 사건 시)가로
도요토미 히데쓰구(히데요시의 후계자, 총 100만 석)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단바 국 가메야마령 10만 석 (7세) → 지쿠젠 국 30만 7천 석)colspan="2" |


7. 막부 직속 가신에서 츠케가로가 된 사례

원래 막부 직속 가신이었으나, 특정 다이묘 가문에 츠케가로로 배속된 사례는 다음과 같다.


  • 혼다 도미마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가 에치젠 번에 봉해졌을 때 가로로 따라가 후추 3만 9,000석을 받았다.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대에도 집정, 보좌를 맡아 오사카 전투에서 활약했다. 다다나오가 유배된 후, 마쓰다이라 다다마사에게 배속되어 후추 4만 6,300석을 받았다. 막부로부터 다이묘 대우를 받았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다케후 소동을 거쳐 화족에 편입, 남작이 되었다.[1]
  • 혼다 나리시게: 막신으로 5,000석을 먹다가 마쓰다이라 다다나오의 가로가 되어 오사카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마루오카 번 4만 석을 받고 마루오카 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다다나오가 개역된 후, 독립 다이묘가 되어 마루오카 번 4.63만 석의 후다이 다이묘가 되었다.[1]
  • 이이 나오마사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경우: 원래 가신단이 부족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시로 직신들이 배속되었는데, 이들을 "오쓰키닌(御付人)"이라 칭한다. 이들은 가로 등 요직을 맡았지만, 도쿠가와 가문 직신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1]
  • 이이 가문: 이이노야 삼인중은 이이 가문을 떠났지만, 키마타 씨와 사이고 씨는 이이 가문의 직신이 되어 가로로 섬겼다. 무쿠하라 씨는 가문이 끊어졌다가 부활했지만, 가로직에는 취임하지 않았다. 가와테 씨는 가문이 단절되었다가 막말에 부활했다.[1]
  • 사카키바라 가문: 나카네 씨, 하라다 씨, 무라카미 씨는 "삼가로"로 불리며 가로로 섬겼다. 이들은 막부로부터 각각 1,000석의 부치를 받아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 이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들의 도쿠가와 가문 직신 복귀 요청을 형식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1]

참조

[1] 서적 小山2006年
[2] 논문 徳川一門付家老の成立過程と駿府政権 1999-03
[3] 논문 紀伊徳川家付家老水野忠央と将軍継嗣問題 精文堂出版 2011
[4] 논문 田沼意次の政権独占をめぐって 慶應義塾大学 1972-04
[5] 서적 譜代大名の創出と幕藩体制 吉川弘文館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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