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아쓰모리
1. 개요
도쿠가와 아쓰모리는 미토번주 도쿠가와 요시아츠의 차남으로,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받아 백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미국 유학 후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소송 사건에 휘말려 작위를 반납하고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1924년에 사망했으며, 슬하에 여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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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도쿠가와가 -
도쿠가와 요시토시
일본 제국 육군 군인이자 항공 기술의 선구자인 도쿠가와 요시토시는 일본인 최초로 조종사 면허를 취득하고 일본 최초 동력 비행에 기여하며 육군 항공대 발전에 공헌하여 "비행의 할아버지"로 불리며 항공병단장까지 역임하는 등 일본 항공 분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일본 제국의 외교관 -
스에마쓰 겐초
이토 히로부미의 사위인 스에마쓰 겐초는 일본 제국 의회 의원, 통신 대신, 내무 대신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러일 전쟁 시기 일본의 입장을 옹호한 외교관이었으며, 겐지 이야기를 영어로 번역하여 일본 문학을 세계에 알린 학자이다. -
일본 제국의 외교관 -
도미타 데쓰노스케
도미타 데쓰노스케는 센다이번 출신으로, 에도와 미국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이와쿠라 사절단을 수행한 외교관이자 일본은행 초대 부총재, 제2대 총재를 역임하며 중앙은행 체제 구축에 기여했으며, 귀족원 칙선의원, 도쿄부 지사, 실업가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
미토 도쿠가와가 -
도쿠가와 요리후사
도쿠가와 요리후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1번째 아들이자 미토 번의 초대 번주로서, 미토 도쿠가와 가문을 창설하고 고산케의 기슈 도쿠가와 가문과 관계를 맺었으며, 쇼군 이에미쓰의 신임을 받아 부장군이라 불렸으나 미토 번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는 제한적이었다. -
미토 도쿠가와가 -
도쿠가와 쓰나에다
도쿠가와 쓰나에다는 에도 시대 미토 번의 3대 번주로, 선대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양자였으나, 재정난 속에서 개혁을 추진하다 농민 반발로 실패했고, 노가쿠에 심취했으며 쇼군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2. 생애
도쿠가와 요시아츠의 차남으로 미토번 상옥저(고이시카와)에서 태어났으며, 형으로는 미토 도쿠가와 가문을 이은 아츠요시가 있다. 출생 후 미토로 옮겨져 번교인 고도칸에서 교육을 받았다.
1870년(메이지 3년) 2월 24일, 숙부 아키타케가 미토 가문을 이으면서 당주 자리가 비어있던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받아 종오위에 서임되고 가록 2500석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10일 메이지 천황을 가까이서 모시는 차시종에 취임했다. 1871년(메이지 4년) 1월 19일, 성을 시미즈로 고쳤으며, 2월 25일 차시종을 사임하고 영국 유학을 허가받았다. 그러나 5월에 미국으로 유학지를 변경하여 컬럼비아 대학교 법과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877년 7월 12일 귀국하여 다시 도쿠가와 성을 사용했다. 1879년 2월, 외무성에 들어가 베이징 공사관에서 근무했으나, 1880년 7월 귀국하여 12월에 사임했다. 1884년 7월 7일, 화족령에 의해 백작 작위를 받았다. 1889년 7월에는 귀족원 설치를 대비해 결성된 백작회에서 간사로 활동했다.
1892년(메이지 25년) 8월, 경제적 어려움으로 융자를 받았으나 소송으로 이어졌다. 1899년(메이지 32년) 1월 26일, 화족으로서의 예우가 정지되었고, 4월 20일에는 작위를 반납했다. 이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1924년(다이쇼 13년) 10월 19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1. 유년기 및 교육 (1856년 ~ 1877년)
미토번주 도쿠가와 요시아츠의 차남으로 미토번 상옥저(고이시카와)에서 태어났다. 형으로는 미토 도쿠가와 가문을 이은 아츠요시가 있다. 출생 후 미토로 옮겨져 번교인 고도칸에서 교육을 받았다.
1870년(메이지 3년) 2월 24일, 숙부인 아키타케가 미토 가문을 잇게 된 이후 당주가 부재했던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받아 종오위에 서임되고 가록 2500석을 받았다.
또한 "가이슈 일기"에 따르면, 같은 해 1월경 가쓰 가이슈 등이 시미즈 가문의 상속에 대해 논의할 때, 아쓰모리 외에 쓰야마 마츠다이라 가문의 마츠다이라 나리타미·야스타미 부자가 후보로 거론되었다.
1870년(메이지 3년) 11월 10일, 차시종에 취임하여 메이지 천황을 측근에서 보좌했다. 1871년(메이지 4년) 1월 19일, 성을 시미즈로 고쳤다. 같은 해 2월 25일, 차시종을 사임하고 영국 유학을 허가받았으나, 같은 해 5월 미국으로 유학하여 컬럼비아 대학교 법과에서 법률 전문 과정을 공부했다. 동기로는 하토야마 카즈오와 에기 타카토, 카미무치 토모츠네, 소마 나가타네, 메가타 타네타로 등이 있다.
2.2. 외교관 및 귀족원 의원 시절 (1877년 ~ 1892년)
1877년 7월 12일 귀국하여, 같은 해에 다시 도쿠가와 성을 사용했다. 저택은 원래 하야시키였던 도쿄 니시와세다(현재의 간센엔)에 마련했다. 1879년 2월, 외무성 고용 담당관이 되어 베이징 공사관에서 근무했다. 1880년 7월 귀국했고, 같은 해 12월 고용 담당관직을 사임했다. 1884년 7월 7일, 화족령에 의해 백작 작위를 받았다. 1889년 7월, 귀족원 설치를 염두에 두고 결성된 백작회에서 마쓰우라 아키라 등과 함께 간사로 취임했다.
2.3. 소송 사건 및 말년 (1892년 ~ 1924년)
1892년(메이지 25년) 8월, 가계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융자를 받았지만, 소송 사건으로 발전했다. 이듬해 패소하여 수만 엔에 달하는 부채를 떠안게 되었으나, 도쿠가와 일족의 지원으로 부채를 정리했다. 하지만 1898년(메이지 31년) 다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채권자에게 소송을 당했다. 더 이상 도쿠가와 일족은 경제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련의 사건은 신문에도 보도되었기 때문에 1899년(메이지 32년) 1월 26일, 화족으로서의 예우가 정지되었다.
같은 해 4월 20일, 화족의 체면을 유지할 수 없다며 작위를 반납했다. 그 후, 1902년까지 항소하는 등 다투었지만, 최종적으로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1924년(다이쇼 13년) 10월 19일, 사망했다. 향년 69세.
3.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도쿠가와 요시아츠 | |
| 어머니 | 미즈타니 키요코 | |
| 부인 | 도쿠가와 토요코 | 오가사와라 타다모토의 딸 |
| 자녀 | 이름 | 비고 |
| 장녀 | 요시코 | (1882년 - 1962년), 자작 쿠츠키 츠나요시의 아내 |
| 장남 | 요시토시 | (1884년 - 1963년), 가독을 이음. 1928년, 육군 항공 병과 분야 확립에 공로가 있어 새롭게 남작을 수여받음. |
| 차녀 | 사다코 | (1885년 - 1952년), 후작·하치스카 모치아키의 양녀, 요시이 자작가(구 타카츠카사 마츠다이라 가문) 분가·요시이 노부테루의 아내. |
| 삼녀 | 야스코 | (1888년 - 1959년), 목사 모리 아키라 (모리 아리노리 삼남)의 아내. 철학자 모리 아리마사는 아키라와 야스코의 아들. |
| 차남 | 마모루 | (1890년 - 1961년) |
| 삼남 | 카와카미 아키라 | (1891년 - 1949년) |
| 사녀 | 스즈코 | (1891년 - 1976년), 목사 오하라 쥬조의 아내 |
| 사남 | 히카루 | (1892년 - 1960년) |
| 오녀 | 시게코 | (1893년 - ?) |
| 오남 | 야마다 유 | (1895년 - 1949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