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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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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852년 조슈 번의 번사 우타다 마사스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후에 데라우치 간에몬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군 경력을 쌓아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에 참전했으며, 육군대신, 육군사관학교장, 참모본부 차장 등을 역임했다. 1910년에는 대한제국 통감, 초대 조선총독을 거쳐 1916년에는 제18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원수로 승진했다. 데라우치는 조선총독으로 재임하며 무단 통치를 펼치고 토지조사사업, 일본화 교육을 추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일 동맹에 따라 참전했다. 그는 꼼꼼한 성격으로 평가받았으나, 급하고 사람을 잘 나무라는 면모도 보였으며, 쌀 소동으로 인해 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아들 데라우치 히사이치도 육군 원수가 되어 부자 원수 사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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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초상
이름데라우치 마사타케
원어 이름寺内 正毅
출생일1852년 2월 5일
출생지야마구치, 조슈 번, 일본
사망일1919년 11월 3일
사망지도쿄, 일본
서명TerauchiM kao.png
작위백작
배우자데라우치 타키 (1862–1920)
자녀데라우치 히사이치
경력
소속 정당무소속
충성일본 제국
군대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71–1910년
계급원수
참전 전투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수상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
공일급금치훈장
바스 훈장 (명예 기사 대십자)
관직
직책내각총리대신
군주다이쇼
임기 시작1916년 10월 9일
임기 종료1918년 9월 29일
이전 수상오쿠마 시게노부
다음 수상하라 다카시
조선 총독
직책조선총독
군주메이지
다이쇼
임기 시작1910년 5월 30일
임기 종료1916년 10월 9일
이전 총독소네 아라스케 (통감)
다음 총독하세가와 요시미치
육군 대신
직책육군대신
내각 총리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임기 시작1902년 3월 27일
임기 종료1911년 8월 30일
이전 대신고다마 겐타로
다음 대신이시모토 신로쿠
추가 관직
외무대신제2차 가쓰라 내각 및 데라우치 내각
외무대신 임기 시작1908년 7월 14일 - 1908년 8월 27일 (육군대신 겸임)
1916년 10월 9일
외무대신 임기 종료1916년 11월 21일 (총리 겸임)
대장대신데라우치 내각
대장대신 임기 시작1916년 10월 9일
대장대신 임기 종료1916년 12월 16일 (총리 겸임)
한국 통감한국 통감
통감 임기 시작1910년 5월 30일
통감 임기 종료1910년 10월 1일

2. 생애

1852년 일본 스오국 요시키군 히라카와촌(현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에서 조슈번번사인 宇多田正輔|우타다 마사스케일본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3] 처음 이름은 宇多田 寿三郎|우타다 토시사부로일본어였으나, 외가 친척인 寺内勘右衛門|데라우치 간에몬일본어의 양자가 되어 데라우치 성을 쓰게 되었다.

젊은 시절 기헤이타이(奇兵隊)에 입대하여 보신 전쟁에 참전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 육군에 들어가 군인의 길을 걸었다. 1877년 세이난 전쟁 중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오른팔에 부상을 입어 평생 불편을 겪었으나, 이후 군 행정 및 교육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프랑스 유학 및 주재 무관 근무 후 귀국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참모본부 제1국장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청일 전쟁 때는 대본영에서 운수통신장관을 맡아 병참을 책임졌고, 이후 육군 3대 요직 중 하나인 교육총감, 육군참모차장을 거쳤다. 1901년 제1차 가쓰라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어 러일 전쟁의 승리에 기여했으며,[24] 이후 여러 내각에서 육군대신직을 유지했다. 이러한 공로로 1906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고 1907년 자작위를 받았다.

1910년에는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여 약 6년간 식민지 조선에 대한 무단 통치를 시행했다.

1916년 원수 칭호를 받았고, 같은 해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그의 내각은 정당 기반이 없는 관료 중심의 초연내각(超然内閣)이었으며, 당시 그의 외모와 내각의 성격을 비꼬아 빌리켄 내각이라 불리기도 했다. 총리 재임 중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중국에 대한 니시하라 차관 제공, 미국과의 이시이-랜싱 협정 체결, 러시아 혁명 간섭을 위한 시베리아 출병 등 팽창주의적 대외 정책을 강행했다.[24][63]

그러나 1918년 시베리아 출병 등으로 인한 쌀값 폭등은 쌀 소동이라는 전국적인 민중 봉기를 촉발시켰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같은 해 9월 총리직에서 사임했으며,[64] 이듬해인 1919년 11월 3일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했다.[25]

2. 1. 어린 시절

데라우치는 1852년 일본 스오국 요시키군 히라카와촌(현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에서 조슈번번사인 宇多田正輔|우타다 마사스케일본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3] 출생 당시 이름은 '''宇多田 寿三郎|우타다 토시사부로일본어'''였다. 이후 어머니의 남동생인 寺内勘右衛門|데라우치 간에몬일본어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2. 2. 군 경력

스오국(현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 히라이 마을에서 장주번 무사 우타다 마사스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우타다 토시사부로였으나 외가 친척인 테라우치 가문에 입양되어 성을 바꾸었다.[23] 젊은 시절 기헤이타이(奇兵隊)에 입대하여 보신 전쟁에 참전했으며, 특히 하코다테 전투에서 활약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교토에서 프랑스식 군사학을 배웠고, 1871년 신설된 일본 제국 육군에 들어가 육군 도야마 학교를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873년에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877년 세이난 전쟁의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오른손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되었으나, 이는 그의 군 경력에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이후 실전 지휘보다는 군 행정과 교육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1882년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의 수행원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었고, 이듬해 주재 무관으로 임명되어 1886년까지 체류했다. 귀국 후 육군대신 관방 부장, 육군사관학교장, 제1사단 참모장, 육군참모본부 제1국장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1894년 청일 전쟁 발발 시에는 대본영에서 군대와 보급품 이동을 총괄하는 운수통신장관을 맡았다. 전쟁 후 보병 제3여단장을 거쳐 1898년 육군 3대 요직 중 하나인 교육총감으로 승진했다. 1900년에는 육군참모차장이 되었고, 의화단 운동 당시 중국에 파견되어 일본군을 지휘했다.

1901년 제1차 가쓰라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어 러일 전쟁의 승리에 기여했으며,[24] 이후 제1차 사이온지 내각과 제2차 가쓰라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24] 1906년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고 남만주 철도 설립위원장을 맡았으며, 1907년에는 여러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위를 받았다.

2. 2. 1. 초기 군 경력

1868년, 어순대(御楯隊) 또는 기헤이타이(奇兵隊) 소속으로 보신 전쟁에 참전하여 하코다테 전투 등에서 막부군과 싸웠다.[23]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교토에서 프랑스식 군사학을 배웠고, 1870년 메이지 천황의 친위대에 들어가 도쿄로 이동했다. 1871년 새로 창설된 일본 제국 육군에 들어가 육군 도야마 학교를 졸업한 뒤 1872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며 실력을 인정받아 야마다 아키요시 등의 추천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세이난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최대 격전지였던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총탄에 맞아 오른팔에 큰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으로 평생 오른손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 주로 군 행정 및 군사 교육 분야에서 경력을 쌓게 되었다.

1882년,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의 수행원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고, 이듬해 주 프랑스 주재 무관으로 임명되어 1886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렀다. 귀국 후에는 육군대신 관방 부장, 188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장, 1891년 일본 제국 육군 제1사단 참모장, 1892년 육군참모본부 제1국장(작전 담당)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대본영에서 일본 제국 육군의 병참과 수송을 총괄하는 운수통신장관(運輸通信長官)을 맡아 전쟁 수행을 지원했다.

2. 2. 2.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1882년 프랑스에 유학하는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어 주재 무관으로 근무했으며, 1886년 귀국 후 육군대신 관방 부장을 거쳐 188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장, 1891년 제1사단 참모장, 1892년 참모본부 제1국장 등 군의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대본영에서 군대의 이동과 보급을 총괄하는 운수통신장관(運輸通信長官)을 맡아 병참의 최고 책임을 수행했다. 전쟁 이후 1896년에는 보병 제3여단장에 임명되었다.

1898년 육군 교육총감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육군대신, 참모총장과 함께 육군의 3대 요직 중 하나로 꼽혔다. 1900년에는 육군참모차장으로 취임하였고, 의화단의 난 당시에는 직접 중국으로 파견되어 일본군을 감독하기도 했다.

1901년 제1차 가쓰라 내각이 성립되면서 육군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는 러일 전쟁 기간 동안 병참 지원을 담당하며 일본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다.[24] 1904년 3월 17일 다시 육군 교육총감에 임명되어 육군대신과 교육총감을 겸임하였다.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에서의 군공을 인정받아 1907년 9월 자작위를 수여받았고, 군 계급은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1906년에는 일본의 만주 침략 발판 마련을 위해 설립된 남만주 철도의 설립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1908년 7월 14일 출범한 제1차 사이온지 내각과 제2차 가쓰라 내각에서도 육군대신으로 유임되었다.[24] 같은 해 하야시 다다스 외무대신 사임 후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아 약 1개월간 외무대신을 겸직했으며, 8월 27일 고무라 주타로가 후임 외무대신으로 결정되면서 겸직에서 물러났다.

2. 3. 내각총리대신

제1차 가쓰라 내각제1차 사이온지 내각, 제2차 가쓰라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하며 러일 전쟁의 승리에 기여했고,[24]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서의 군공을 인정받아 1907년 자작위를 받았다.

1916년 6월 24일에는 원수 칭호를 받았으며,[24] 같은 해 10월 19일 조선총독직에서 물러나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이는 조선 총독으로서의 경력을 인정받은 결과이기도 했다. 총리 취임과 동시에 잠시 외무대신대장대신 직을 겸임하기도 했다.

데라우치는 경력직 민간 정치인들을 불신하여 내각을 주로 경력 관료들로 구성했다. 당시 그의 머리 모양이 빌리켄 인형과 닮았고, 내각이 정당에 기반하지 않은 초연내각(超然内閣)이었기에, 이를 '비리켄(非立憲, 히릿켄 - 비입헌)'과 연결시켜 빌리켄 내각이라고 야유하기도 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데라우치는 팽창주의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했다. 중국에 대한 니시하라 차관 제공, 미국과의 이시이-랜싱 협정 체결, 제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 지원 및 독일 조차지 점령, 러시아 혁명에 개입하기 위한 시베리아 출병 등을 단행했다.[24][63]

그러나 1918년 시베리아 출병 강행 등으로 쌀값이 폭등하여 1918년 쌀 소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같은 해 9월 21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내각 총사퇴 후 병세가 악화되어 이듬해인 1919년 11월 3일 심장비대증으로 사망했다.[25] 향년 68세였다. 묘소는 그의 출생지인 야마구치시 宮野|미야노일본어에 있으며, 아들 테라이 준이치의 묘도 함께 있다. 그는 생전에 조선 관련 서적 등을 기증하여 사설 도서관인 寺内桜圃文庫|데라우치 오우호 분코일본어를 설립했는데, 이 문고의 서적은 전후 야마구치 현립 대학으로 이관되었고, 일부 조선 관련 서적은 한국의 경남대학교로 옮겨졌다.[26][27]

그가 받은 훈장으로는 욱일장(1등급)과 금치훈장(1등급) 등이 있다.

2. 3. 1. 총리대신 초기

1916년 6월 24일, 데라우치는 원수 칭호를 받았다.[24] 같은 해 10월 19일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는데, 이는 조선 총독으로서의 경력을 인정받은 결과이기도 했다. 총리 취임과 동시에 외무대신대장대신 직을 겸임했다. 외무대신은 1916년 10월 9일부터 11월 모토노 이치로가 후임으로 임명될 때까지 약 1개월간 겸직했으며, 대장대신은 12월 16일 쇼다 가즈에(勝田主計)가 임명될 때까지 겸직했다.

그의 내각은 데라우치 본인이 경력직 민간 정치인들을 불신했기 때문에 주로 경력 관료들로 구성되었다. 당시 데라우치의 머리 모양이 빌리켄 인형과 닮았고, 내각 구성이 정당에 기반하지 않은 초연내각(超然内閣)이었기에, 이를 '비리켄(非立憲, 히릿켄 - 비입헌)'과 연결시켜 빌리켄 내각이라고 야유하기도 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데라우치는 팽창주의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영일 동맹에 근거하여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조차하고 있던 산둥반도와 독일령 남양 군도의 섬들을 점령하였다.[24] 또한 영국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일본 제국 해군 함선을 남태평양, 인도양, 지중해로 파견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단기서 군벌 정부를 지원하는 대가로 산둥성 일부에 대한 일본의 권익과 만주에서의 이권 확대를 약속받은 니시하라 차관을 제공했으며, 미국과는 중국 내 일본의 특권을 상호 인정한 이시이-랜싱 협정을 체결했다. 1918년에는 러시아 혁명에 간섭하기 위해 연합국의 일원으로 시베리아 출병을 선포했다.

2. 3. 2. 시베리아 출병 정책

데라우치는 1916년 10월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그는 경력직 민간 정치인들을 불신하여 자신의 내각을 경력직 관료들로만 구성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데라우치는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63]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데라우치 내각은 이에 개입하여 반혁명 세력인 백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시베리아 출병(시베리아 개입)으로 이어졌는데, 볼셰비키의 적군에 맞서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견한 사건이다.[63] 데라우치는 1918년 8월 2일 시베리아 출병을 공식 선포했다.

이러한 군사적 개입과 더불어, 데라우치는 중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니시하라 가메조를 통해 중국 군벌 돤치루이에게 막대한 정부 자금을 차관으로 제공(니시하라 차관)하고,[63] 이를 통해 산둥성 일부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과 만주에서의 권익 증대를 확보하고자 했다. 또한 미국과의 랜싱-이시이 협정을 통해 중국 내 일본의 특권을 인정받았다.

한편, 데라우치 내각은 영일 동맹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 측을 지원하는 의무도 이행했다. 일본 제국 해군 함선을 남태평양, 인도양, 지중해 등으로 파견하고, 독일의 조차지였던 교주만 조차지와 남양 군도의 식민지를 점령했다.

식민지 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내각에 척식국을 설치했으며, 외무성을 거치지 않고 총리가 직접 외교 노선을 결정하는 방식을 선호했다.[63] 그러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국내 비판이 거세지자, 데라우치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여 신문 기사를 검열하고 신문사를 탄압했다. 이로 인해 50개 이상의 신문이 발행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63]

2. 4. 해임과 최후

총리대신 재직 중 시베리아 출병을 강행하는 등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로 인해 값이 폭등하고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1918년 8월 3일, 도야마현에서 시작된 쌀 폭동은 인플레이션을 견디지 못한 민중들의 봉기로, 순식간에 전국 1도 3부 38현으로 확산되었다. 데라우치 내각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강경하게 진압했으나, 이는 오히려 거센 전국적 비난에 직면했다.[64] 그의 내각은 데라우치의 머리 모양이 당시 유행하던 빌리켄 인형과 닮았다는 점과 초연내각(超然内閣)을 비꼬아 '비리켄(非立憲, 빌리켄과 발음 유사) 내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마저 등을 돌리자 정치적 기반을 잃은 데라우치는 결국 1918년 9월 21일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9월 29일 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났다.[64]

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약 1년 뒤인 1919년 11월 3일[25], 내각 말기부터 앓고 있던 심장비대증으로 히라이 적십자 병원에서 사망했다.[25][64] 향년 68세였다.[25] 그의 묘소는 출생지인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 미야노에 있으며, 아들 데라우치 히사이치의 묘도 함께 있다.[26]

한편, 데라우치는 자신의 고향인 미야노에 조선 관련 서적 등을 기증하여 사설 도서관인 '데라우치 문고(寺内文庫)'를 설립했다. 이 장서는 전후 야마구치 현립 대학으로 이관되었으며, 그중 조선 관련 서적 일부는 한국의 경남대학교로 다시 옮겨졌다.[26] 데라우치 문고의 원래 건물은 2011년 기준으로 야마구치 현립 대학 인근에 남아있다.[27]

3. 정책 및 업적

데라우치 마사타케(좌)와 고다마 겐타로(우) 장군


데라우치는 1901년, 초대 가쓰라 다로 내각 시절에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에 러일 전쟁(1904~1905)이 일어났으며, 일본의 승리 후 화족 작위인 남작에 서임되었다. 1906년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07년, 그가 참전했던 네 번의 전쟁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그의 작위는 자작으로 승격되었다.

그는 1908년 7월부터 1911년 8월까지 제1차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제2차 가쓰라 내각에서 육군대신직을 계속 수행했다.

3. 1. 군사 정책

1868년, 어순대(御楯隊) 대원으로 보신 전쟁에 참전하여 하코다테 고료카쿠에서 옛 막부군과 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 창설된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야마다 아키요시의 추천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1877년 세이난 전쟁에 참전했으나, 다바루자카(田原坂) 전투에서 오른팔에 칼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이 부상으로 평생 오른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 주로 후방 보직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882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의 수행원으로 프랑스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귀국 후 군의 주요 보직을 거쳤으며, 1887년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청일 전쟁 발발 시에는 일본군의 병참 총책임을 맡는 운수통신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제1사단 참모장, 일본군 사령부 제1국 국장 등을 지냈다.

1898년 육군 교육총감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육군대신, 참모총장과 함께 육군의 3대 요직 중 하나였다. 이후 일본 제국 육군 참모부 차장, 일본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했으며, 1900년 4월 25일에는 일본군 육군참모차장이 되었다. 1901년 제1차 가쓰라 다로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어 러일 전쟁 당시 병참 지원을 담당했고,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1904년 3월 17일 다시 육군 교육총감에 임명되어 육군대신과 교육총감을 겸임했다. 보신 전쟁, 세이난 전쟁,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1907년 자작위를 수여받고 군에서는 대장으로 승진했다. 또한 일본의 만주 지배를 위해 구상된 철도 회사인 남만주 철도의 설립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02년 제1차 가쓰라 내각육군대신으로 임명되었으며, 1908년 7월 14일 제1차 사이온지 내각제2차 가쓰라 내각에서도 육군대신에 유임되었다. 당시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가 사임한 후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아 약 1개월간 외무대신을 겸직하기도 했으나, 8월 27일 고무라 주타로가 후임으로 결정되면서 외무대신직에서 물러났다. 여러 전쟁에 참전했지만 정치적 의사 표현이 거의 없어 야심이 없는 인물로 여겨졌고, 이러한 점이 여러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한국통감으로 내정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가 된 이후에도 군국주의적 정책을 이어갔다.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개입하여 반혁명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원정군을 파견하는 시베리아 출병을 주도했다. 또한 니시하라 가메조를 통해 중국 군벌 돤치루이에게 정부 자금 1.27억[63]이라는 거액의 차관(니시하라 차관)을 제공하여 중국 내정에 간섭했다. 식민지 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내각에 척식국을 설치하고, 외무성을 거치지 않고 총리가 독자적으로 외교 노선을 결정하는 방식을 취했다. 시베리아 출병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언론을 통제하여 신문 기사를 검열하고 신문사를 탄압했으며, 이로 인해 50개 이상의 신문이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다.[63]

3. 2. 식민지 정책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자, 후임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가 사임하였다. 이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910년 5월, 육군대신을 겸직하며 제3대 대한제국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곧바로 한일 병합을 강행하여 같은 해 8월 조약을 체결했고, 10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초대 조선총독 자리에 올랐다. 총독으로서 데라우치는 천황에게 직접 보고하며 입법, 행정, 사법권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았고, 조선 주둔 일본 제국 육군에 대한 군사 지휘권까지 행사했다.

총독 부임 후 데라우치는 식민 통치 기반을 다지고 조선인을 일본 제국에 동화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헌병에게 경찰 임무까지 맡기는 헌병경찰제도를 창설하여 한반도 전역에 삼엄한 무단 통치를 실시했으며, 이는 한국 민중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권 확립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신고 절차가 복잡하고 기한이 짧아 수많은 농민들의 토지를 총독부 소유로 편입시킨 뒤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통해 일본인이나 친일파에게 헐값으로 넘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로 인해 다수의 한국 농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만주, 연해주 등지로 이주해야만 했다. 교육 분야에서도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동화 교육에 치중하여, 학교 교육 과정에서 일본어와 일본 역사를 강조했다.

이러한 데라우치의 식민 정책들은 표면적으로는 근대화와 효율성을 내세웠지만, 본질적으로는 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고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그의 이러한 '통치 공로'를 인정하여 1911년 그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3. 2. 1. 무단 통치

조선총독부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제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사임하자 데라우치는 1910년 5월 30일 육군대신을 겸하며 제3대 대한제국 통감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8월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고, 10월 1일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초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총독은 일본 천황에게 직속되어 위임된 범위 내에서 입법, 행정, 사법권과 조선 방비를 위한 군사권까지 행사하는 등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데라우치는 헌병이 경찰 업무를 겸하는 헌병경찰제도를 창시하여 삼엄한 통치를 펼쳤는데, 이는 후에 무단 통치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강압적인 통치는 한국인들의 거센 반감을 샀다. 교육 분야에서는 조선인을 일본의 황국신민으로 동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일본어와 일본 역사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를 다수 설립하였다. 표면적으로는 교육 기회 확대로 보일 수 있으나, 근본적인 목표는 식민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했다. 토지 소유 제도의 근대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이 역시 식민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토지 측량을 통해 소유권을 문서 기준으로 재확립하면서, 기한 내 신고하지 못하거나 전통적인 경작권만 있고 법적 소유 증명이 없는 농민들의 토지를 대거 몰수했다. 이렇게 몰수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을 통해 친일파나 일본인 지주들에게 헐값으로 넘겨졌다. 이로 인해 많은 한국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해외로 이주해야 했으며, 일본의 경제적 침탈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식민 통치 '공로'로 1911년 4월 백작 작위를 받았다. 1912년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인 이자벨 앤더슨은 데라우치 통치하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했으나[2], 이는 식민 지배자의 시각에서 본 피상적인 평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앤더슨이 언급한 연간 지출 1200만달러[3](2023년 기준 약 3.7310000000000003억달러 상당[3]) 역시 식민지 경영과 수탈을 위한 투자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1916년 10월 16일 총독직에서 물러나고, 같은 해 10월 19일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자리를 옮겼다.

3. 2. 2. 토지조사사업

데라우치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대한제국의 토지 소유 제도를 근대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 목적은 식민지 통치를 효율화하고 토지를 수탈하는 데 있었다. 이 사업은 토지 소유권을 명확히 한다는 취지로 시작되었지만, 기한 내에 신고하지 못하거나 오랫동안 소유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증명 서류가 없는 많은 농민들의 토지를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몰수하는 결과를 낳았다.

새롭게 설치된 토지조사국은 토지측량을 실시하여 문서(소유권 증서, 지적도 등)를 기반으로 소유권을 재확립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관습적 경작권만 가지고 있던 대다수 농민과 하층민들은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토지를 빼앗겼다. 몰수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헐값으로 넘겨졌고, 이는 다시 친일파나 일본인 지주들에게 불하되었다.

결과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은 표면적으로 토지 소유 및 세금 제도를 정비하는 효과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한국 농민들을 토지에서 내쫓고 생계 기반을 파괴했으며,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한국 민중의 일본 행정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는 크게 증폭되었다.

3. 2. 3. 교육 정책

데라우치는 일본화 교육을 통해 조선 민족을 이른바 "황국신민"으로 동화시키고, 이를 통해 식민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려 하였다. 이는 조선인을 위한 정책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식민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 우선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 전역에 수천 개의 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학교 설립은 결과적으로 조선의 문맹률을 낮추고 전반적인 교육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일부 기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교육 과정의 핵심은 일본어와 일본 역사 교육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는 조선인을 일본 제국에 충성하는 신민으로 만들려는 명백한 동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3. 3. 외교 정책

1916년 10월,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총리에 취임하며 외무대신과 재무대신을 겸직했다. 그는 경력직 민간 정치인들을 불신하여 자신의 내각을 주로 경력직 관료들로 구성했다.[62]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데라우치는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외무성을 통한 정식 경로보다는 총리 독자적인 판단으로 외교 노선을 결정하는 방식을 선호했으며,[63] 식민지 경영을 위해 내각에 척식국을 설치하기도 했다.[63]

주요 외교 활동으로는 중국 군벌 돤치루이에게 정부 자금 1.27억을 차관으로 제공한 니시하라 차관 사건이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산둥성 일부에 대한 영유권 주장과 만주에서의 이권 확대를 확보했다.[63] 또한 미국과의 랜싱-이시이 협정을 통해 중국 내 일본의 특권을 인정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일 동맹에 따라 영국을 지원하였다. 대일본제국 해군 함대를 남태평양, 인도양, 지중해에 파견했으며, 독일 제국의 조차지였던 교주만 조차지와 태평양 식민지(남양 군도)를 장악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데라우치 내각은 이에 개입하여 반혁명 세력인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개입에 참여했다. 시베리아 개입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데라우치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여 관련 기사를 검열하고 신문사를 탄압했다. 이로 인해 50개 이상의 신문이 발행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63]

1918년 쌀 소동으로 인한 사회 불안이 커지자 데라우치는 결국 1918년 9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4. 평가

데라우치 마사타케에 대한 평가는 그의 공적인 역할 수행과 개인적인 성격에 대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4. 1. 긍정적 평가

꼼꼼하고 체계적인 업무 처리와 관리 능력이 뛰어났다는 평가가 있다. 다만 성격이 급하고 남을 잘 나무랐다는 지적도 함께 따른다. 기타코시 야스나가는 데라우치의 전기에 남긴 추도문에서 그가 감정을 숨기거나 사람을 능숙하게 다루는 데 서툴렀다고 평가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에는 학생 관리에 매우 철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퇴근 후에도 자택에서 망원경으로 학생들의 행동을 감시했으며,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이 직접 쓴 사관학교 현판에 녹이 슨 것을 보고 "황실에 대한 불경이며 육군의 수치"라며 교장을 크게 질책할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엄격함을 보였다. 이 때문에 당시 "청소부", "돋보기 꼬치"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육군대신으로 재직하던 1902년(메이지 35년) 하치만타 설중행군 조난 사건이 발생하자, 전국의 장교들로부터 기부금을 모아 이듬해 생존자인 고토 부사노스케 오장(伍長)의 동상을 세우고 직접 비문을 작성하는 등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서남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오른손 사용이 불편해진 이후, 경례를 왼손으로 했다. 이는 '좌경례'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재무관 시절 오스만 제국을 방문했을 때, 이슬람교 문화에서 불경하게 여겨질 수 있는 왼손으로 압둘 하미드 2세 술탄에게 악수를 청했다. 술탄은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데라우치의 부상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의 용기를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총리 재임 시절 "빌리켄 재상"이라는 다소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렸지만, 정작 본인은 이 별명을 싫어하지 않아 빌리켄상을 3개나 구입하기도 했다.[58]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에 이완용과 함께 조인한 후 만찬 자리에서 "'''고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살아있다면 오늘 밤 달을 어찌 볼까'''"(小早川加藤小西が世にあらば今宵の月を如何に見るらむ일본어)라는 시를 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언급된 인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정권의 주요 무장들이다. 이 시에 대해 일본 공산당 기관지 『신문 아카하타』는 2007년 12월 22일 자 기사에서 "메이지 시대 정치가와 군인들이 한일 병합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전쟁의 연장선상으로 보았다"고 비판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고마쓰 미도리(小松 緑)는 저서 『조선병합지이면(朝鮮併合之裏面)』에서 이 시를 소개하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젤라 전투에서 폰토스를 단기간에 제압한 것에 비유하여 한일 병합이 무력이 아닌 외교력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고마쓰는 데라우치의 시를 외교적 성과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했다.

장남인 데라우치 주이치 역시 군인의 길을 걸어 원수, 육군대장까지 승진했다. 일본군 역사상 황족을 제외하고 아버지와 아들 2대가 원수에 오른 유일한 사례이다.

4. 2. 부정적 평가

업무 처리는 꼼꼼하고 체계적이었으나, 성격이 급하고 남을 잘 나무랐다는 평가가 있다. 기타코시 야스나가는 데라우치의 전기에 남긴 추도문에서 "울 때 웃고 화낼 때 기뻐하는 일은 백(伯: 데라우치의 호)에게는 할 수 없었다. 나쁘게 말하면 사람을 조종하는 일이 서툴렀다"라고 적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에는 학생들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관리하여 "청소부", "돋보기 꼬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퇴근 후에도 관사에서 망원경으로 학생들의 행동을 감시했으며,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이 쓴 사관학교 현판이 녹슬자 "그러한 태만한 정신은 황실에 대한 불경이며 육군의 수치다"라며 교장을 심하게 질책했다고 전해진다.

육군대신 재직 중이던 1902년(메이지 35년)에 발생한 하치만타 설중행군 조난 사건에서는 전국의 장교들로부터 기부금을 모아 사건 다음 해에 생존자인 고토 부사노스케 伍長의 동상을 세우고 비문을 휘호했다.

남서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오른손에 후유증을 남긴 이후, 거수 경례를 왼손으로 했다(속칭 '''좌경례'''라고 불린다). 주재무관 시절 오스만 제국의 압둘 하미드 2세를 알현했을 때, 이슬람교에서 불결하다고 여기는 왼손으로 악수를 했기 때문에 술탄은 당황했지만, 나중에 그것이 전상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해하고 그의 용감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외모 때문에 "빌리켄 재상"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정작 본인은 이 별명을 마음에 들어 해 빌리켄상을 3개나 구입했다고 한다.[58]

장남인 주이치도 원수 육군대장이 되었다. 일본군 역사상, 황족을 제외하고 부자 2대가 원수에 서임된 유일한 사례이다.

4. 2. 1. 한국에서의 평가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1910년 5월 소네 아라스케의 뒤를 이어 제3대이자 마지막 대한제국 통감으로 부임했다. 통감으로서 같은 해 8월 대한제국 병합 조약 체결을 강행하여 초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총독으로서 천황에게 직접 보고하며 입법, 행정, 사법 전반에 걸친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다.

그의 통치는 한국인 대다수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으며, 데라우치는 이를 억누르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적인 통치, 즉 무단 통치를 실시했다.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헌병이 경찰 역할을 겸하는 헌병 경찰 제도를 창시하여 한국 사회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으며, 이는 후에 무단 통치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데라우치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문화적 유대를 내세워 한국인을 일본에 완전히 동화시키려 했으며, 이를 위해 조선 전역에 수천 개의 학교를 세웠다. 표면적으로는 문맹률 감소와 교육 수준 향상에 기여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 교육 과정은 일본어와 일본 역사 교육에 집중되어 조선인을 일본 제국의 충성스러운 신민, 이른바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이는 조선인을 위한 교육 정책이라기보다는 식민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의 토지 소유 제도를 근대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이 역시 식민 통치를 효율화하고 경제적 수탈을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새로운 토지조사국은 토지측량을 실시하여 문서(소유권 증서, 지적도 등)를 기준으로 소유권을 재확립했다. 이 과정에서 기한 내 신고하지 못하거나, 대대로 소유했으나 법적 증명 서류가 없었던 수많은 농민(주로 하층민과 전통적인 구두상의 "경작권"만 가졌던 이들)은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빼앗겼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모든 사유지의 약 2/3에 달하는 막대한 토지가 조선총독부에 몰수되었다. 총독부는 이 토지들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겨 친일파나 일본인 지주들에게 헐값으로 불하했다. 이 사업은 토지 소유 및 세금 구조 개혁이라는 명목상의 성공을 거두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수많은 한국 농민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일본의 식민 지배 기반을 더욱 강화하고 한국인들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를 극도로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12년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인 이자벨 앤더슨은 그의 저서 『The Spell of Japan』(1914)에서 데라우치 통치 하의 변화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일본 총독 데라우치 백작은 매우 강력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며, 그의 통치 아래 한국에서는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토착민과 정복자 사이에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분명 놀랍다. 정부가 재편되었고, 법원이 설립되었으며, 법률이 개정되었고, 무역 여건이 개선되었으며 상업이 증가했다. 실험장 설립을 통해 농업이 장려되었고, 내륙에서 해안까지 철도가 건설되었으며, 항구가 준설되었고 등대가 세워졌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출은 연간 1200만달러에 달했다"고 기록했다.[2] (이는 2023년 기준 약 3.7310000000000003억달러에 해당한다.[3])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식민 통치자의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이면에 존재했던 한국 민중의 고통과 희생, 그리고 강압적인 통치 현실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데라우치 자신은 1910년 8월 22일 한국 병합 조약 조인식 후 만찬에서 "코바야카와 가토 코니시가 세상에 있다면 오늘밤의 달을 어떻게 볼까"라는 시를 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언급된 인물들은 모두 도요토미 정권 시절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무장들이다. 이는 데라우치를 비롯한 당시 일본의 정치가와 군인들이 한국 병합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전쟁의 연장선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비판받는다. 다만, 이 시를 소개한 고마쓰 미도리는 그의 저서 『조선병합지이면』에서 이를 무력이 아닌 외교력으로 병합을 달성한 데라우치 자신을 자랑하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데라우치는 1916년 10월 16일 총독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10월 19일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5. 논란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그의 정치 및 군사 활동 기간 동안 여러 논란의 중심에 섰다. 특히 조선에서의 무단 통치 방식과 일본 내에서의 비헌정적 행보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는 그에게 '빌리켄'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또한, 총리 재임 시절 시베리아 출병 강행과 경제 정책 실패는 1918년 쌀 소동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고, 결국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5. 1. 빌리켄 별명

조선에서 무단 통치를 자행했던 데라우치는 총리가 되어서도 헌정을 무시하는 행위를 일삼아 ‘빌리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데라우치의 대머리가 빌리켄 인형과 비슷했고, ‘비입헌’(非笠憲)의 일본어 발음 ‘히릿켄’과도 비슷했기 때문이다.[62] "빌리켄 재상"이라고 조롱받았지만, 데라우치 자신은 이 애칭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이며, 빌리켄상을 3개나 구입했다고 한다.[58]

5. 2. 쌀 소동 책임론

총리대신으로 재직하며 시베리아 출병을 감행하는 등, 특히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의 권익 확대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공동 출병 요구 등이 겹치며 쌀값이 폭등했고, 철, 석탄, 종이 등 다른 생필품 가격 역시 매점매석으로 인해 급등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1918년 8월 3일, 도야마현에서 물가 상승을 견디지 못한 민중들이 봉기하면서 쌀 소동이 시작되었다. 이 소요는 빠르게 전국 1도 3부 38현으로 확산되었다. 데라우치 내각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강경하게 진압했으나, 이는 오히려 전국적인 비난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마저 등을 돌리자, 데라우치는 정치적 기반을 잃고 결국 1918년 9월 29일 쌀 소동의 책임을 지고 총리대신 직에서 사퇴했다.[64]

6. 가계

테라우치가는 데와 국 토자 씨의 측류로, 무쓰 국 나가마에 군 테라우치무라에 정착하면서 테라우치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55] 이후 스오 국의 오우치 씨를 섬겼고, 그 뒤에는 모리 씨를 섬기는 가계가 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가족 관계'''
구분이름비고
전처타니(タニ)오다 준켄(小田隼見)의 차녀. 1남 4녀 출산 후 사망.
후처타키(タキ)하세가와 사다오(長谷川貞雄)의 장녀. 1남 출산.
장남데라우치 히사이치(寺内寿一)육군 원수. 남방군 총사령관. 아버지 사후 백작위 계승.
차남데라우치 다케오(寺内毅雄)육군 보병 대위. 사후 소좌로 특진. 1929년 병사했으며, 아내 아야코(나카가와 겐조(中川健藏)의 딸)도 같은 날 사망했다.
장녀사와코(澤子)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의 장남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 백작과 결혼.
사녀스에(須恵)후쿠하 하야토(福羽逸人)의 아들 후쿠하 마키(福羽真城)와 결혼.



장남 데라우치 히사이치는 아버지의 백작위를 계승했으며,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남방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육군 원수 계급까지 올랐는데, 데라우치 부자는 일본군 내에서 부자(父子)가 모두 육군 원수를 지낸 드문 사례 중 하나이다.

증조카손으로는 가수 우타다 히카루(宇多田ヒカル)가 있다.[59] 우타다 히카루는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형의 후손으로, 히카루의 할아버지 우타다 지후(宇多田二夫)는 데라우치 히사이치의 사촌이다.

7. 기타

야마구치현청사 동북쪽 야산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묘소 주변에는 다른 묘소들이 들어섰고, 야산 앞에는 야마구치 현립 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야산 입구에서 그의 묘소까지 여러 개의 석등이 놓여 있다.

그가 사망한 후, 아들 히사이치백작 작위를 계승했다. 히사이치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남방총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육군 원수의 지위에 올랐다. 데라우치 부자는 일본군 역사상 부자(父子)가 모두 육군 원수를 역임한 드문 사례 중 하나이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군인 및 조선 총독으로 활동했던 시기의 기록 일부를 담은 비망록을 남겼다.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2] 웹사이트 The Spell of Japan http://www.gutenberg[...] (Gutenberg)
[3] 웹사이트 CPI Inflation Calculator https://www.in2013do[...]
[4] 간행물 官報 1907-09-23
[5] 간행물 官報 1911-04-22
[6] 간행물 官報 1892-11-30
[7] 간행물 官報 1895-08-21
[8] 간행물 官報 1895-08-21
[9] 간행물 官報 1899-05-10
[10] 간행물 官報 1921-04-19
[11] 간행물 官報 1901-10-15
[12] 간행물 官報 1907-01-28
[13] 간행물 官報 1907-01-28
[14] 간행물 官報 1886-02-09
[15] 간행물 官報 1891-10-09
[16] 간행물 官報 1897-06-24
[17] 간행물 官報 1891-06-24
[18] 간행물 官報 1891-06-24
[19] 간행물 London Gazette 1906-05-15
[20] 간행물 官報 1891-06-24
[21] 기타 読みは「まさたけ」が一般的だが、「まさたか」(「陸海軍将官人事総覧 陸軍篇」)、「まさかた」(「歴代陸軍大将全覧(明治編)」)など異なる読み方がある。
[22] 웹사이트 寺内正毅 https://kotobank.jp/[...]
[23] 웹사이트 山口県が生んだ 七人の宰相展 https://www.city.hag[...]
[24] 서적 光と影
[25]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26] 웹사이트 寺内文庫 http://kohjizen.ypu.[...]
[27] 웹사이트 宮野の宰相、寺内正毅ゆかりの地をめぐる徒歩ツアー企画 http://www.yamaguchi[...]
[28] 아카이브 元帥陸軍大将伯爵寺内正毅ヲ大勲位ニ叙シ菊花大綬章授賜ノ件 https://digitalarchi[...]
[29] 간행물 官報 1885-01-31
[30] 간행물 官報 1890-01-25
[31] 간행물 官報 1894-10-11
[32] 간행물 官報 1898-11-01
[33] 간행물 官報 1902-04-12
[34] 간행물 官報 1904-04-21
[35] 간행물 官報 1907-05-11
[3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2-06-01
[3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9-10-21
[3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9-12-06
[3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2-11-30
[4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5-08-21
[41] 간행물 辞令 官報 1896-04-01
[4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9-05-10
[4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1-12-28
[4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7-01-28
[45] 간행물 授爵敍任及辞令 官報 1907-09-23
[46] 간행물 授爵・叙任及辞令 官報 1911-04-22
[47] 간행물 辞令 官報 1913-04-09
[48] 간행물 辞令 官報 1916-12-13
[4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6-07-15
[5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6-06-26
[51] 웹사이트 中野文庫 - 大勲位菊花章頸飾・大勲位菊花大綬章受章者一覧 http://www.geocities[...]
[52] 간행물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 NDLDC 1914-07-01
[5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6-02-09
[5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1-10-09
[5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4-10-20
[5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6-05-05
[5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7-06-24
[58] 서적 東京風俗三十帖 1998
[59] 웹사이트 https://www.townnews[...]
[60] 뉴스 비난浴び다 寺内正毅상의 후임 "평화의 군상" (동상은 힘들어 10선 6) 일본경제신문 2013-12-20
[61] 기타
[62] 서적 일본 총리 열전 다락원
[63] 서적 일본 총리 열전 다락원
[64] 서적 일본 총리 열전 다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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