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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나르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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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나르쿠스는 고대 아테네의 연설문 작가로, 마케도니아의 정책을 지지하며 과두정치를 옹호했다. 그는 하르팔로스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인들을 고발하는 역할을 했으며, 데모스테네스, 아리스토게이톤, 필로클레스를 탄핵하는 연설을 남겼다. 데메트리우스 1세에 의해 망명했지만 테오프라스토스의 도움으로 아테네로 돌아와 기원전 291년경 사망했다. 현존하는 연설문으로는 《데모스테네스 탄핵 연설》, 《아리스토게이톤 탄핵 연설》, 《필로클레스 탄핵 연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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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나르쿠스

2. 생애

소스트라토스의 아들(혹은 《수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아들)인 디나르쿠스는 젊은 시절 아테네에 정착했으며, 25세가 되기 전부터 연설문 작가로 활동했다. 메토이코스 신분이었던 그는 테오프라스토스와 데메트리우스 팔레레우스에게 사사받아 유창한 문체를 익혔으나, 토론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1]

2. 1. 하르팔로스 사건

324년 아레오파고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도망간 재무관 하르팔로스에게서 9명이 뇌물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공공 검사 10명이 임명되었고, 디나르쿠스는 이들을 위해 《데모스테네스 탄핵 연설》, 《아리스토게이톤 탄핵 연설》, 《필로클레스 탄핵 연설》 등 현재까지 남아있는 세 편의 연설을 썼다.[1]

디나르쿠스는 마케도니아 통제 하의 아테네 과두정치를 지지했지만, 아테네 시민이 아니었다. 아이스키네스와 데마데스에게는 그러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하르팔로스 사건에서 데모스테네스는 다른 피고인들과 마찬가지로 무죄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가장 열정적인 애국자였던 히페레이데스는 디나르쿠스와 같은 편이었다.[1]

2. 2. 마케도니아 과두정치 지지

디나르쿠스는 마케도니아의 통제를 받는 아테네 과두정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아테네 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스키네스나 데마데스와는 달리 참정권이 없었다. 하르팔로스 사건에서 데모스테네스는 다른 피고인들과 마찬가지로 무죄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가장 열정적인 애국자였던 히페레이데스는 디나르쿠스와 같은 편이었다.[1]

2. 3. 망명과 귀환, 그리고 죽음

그의 옛 스승인 데메트리우스 팔레레우스의 섭정 아래에서 디나르쿠스는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317년부터 307년까지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번영했던 시기였다. 데메트리우스 폴리오르케테스에 의해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디나르쿠스는 사형을 선고받고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망명했다.[1]

약 292년, 친구 테오프라스토스 덕분에 그는 아티카로 돌아올 수 있었고, 과거 동료였던 프록세누스와 함께 시골에서 거주했다. 그는 이후 프록세누스가 자신에게서 돈과 은 식기를 훔쳤다는 이유로 그를 고소했다. 디나르쿠스는 기원전 291년경 아테네에서 사망했다.[1]

3. 현존하는 연설문

수이다스에 따르면 디나르쿠스는 160개의 연설문을 썼고, 디오니시우스는 그의 이름으로 된 85개의 현존하는 연설문 중 58개가 진본이라고 주장했다. 58개 중 28개는 공적인 사건에 관한 것이고, 30개는 사적인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현존하는 연설문은 다음과 같다.[1]


  • 데모스테네스 탄핵 연설
  • 아리스토게이톤 탄핵 연설
  • 필로클레스 탄핵 연설

3. 1. 《데모스테네스 탄핵 연설》

디나르쿠스는 데모스테네스를 탄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연설문을 작성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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