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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프라스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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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프라스토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과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자 리케이온의 학장을 역임했다. 그는 레스보스 섬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티르타무스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뛰어난 언변을 칭찬하며 "테오프라스토스"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펼쳤다. 특히 식물학 분야에서 『식물지』와 『식물 원인론』을 저술하여 식물 분류의 기초를 다졌으며, 기상학, 윤리학, 논리학 등 다방면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분실된 것이 많지만, 현존하는 저작들을 통해 그의 학문적 깊이와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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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프라스토스
기본 정보
테오프라스토스의 조각상, 팔레르모 식물원
테오프라스토스의 조각상, 팔레르모 식물원
이름테오프라스토스
그리스어 이름Θεόφραστος
그리스어 로마자 표기Theophrastos
로마자 표기 (이전)Tyrtamos
출생기원전 371년경
출생지에레소스
사망기원전 287년경 (83세 또는 84세)
사망지아테네
학파소요학파
주요 관심사윤리학
문법학
역사
논리학
형이상학
자연사
물리학
식물학
주요 사상선언적 삼단논법과 가설적 삼단논법
전건 긍정후건 부정
영향
영향을 준 인물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영향을 받은 인물람프사코스의 스트라톤,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 소요학파
주요 저서
식물사grc
식물의 원인grc

2. 생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 그리고 람프사쿠스의 스트라톤(Strato of Lampsacus). 카를 라알(Carl Rahl)이 아테네 대학교(University of Athens) 현관에 그린 프레스코화의 일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2세기 후반~3세기)의 『그리스 철학자전』(Βίοι καὶ γνῶμαι τῶν ἐν φιλοσοφίᾳ εὐδοκιμησάντων,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학설)에 따르면, 테오프라스토스는 레스보스 섬의 에레소스(Eresos)에서 세탁업자 멜란테스의 아들로 태어났다.[5] 그는 먼저 고향에서 동향인 아르키포스에게 배우고, 젊은 나이에 아테네로 유학 왔다. 플라톤이 설립한 학교 아카데메이아에서 수학하고, 플라톤 사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까워져 함께 연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테오프라스토스에게 자신의 서재와 필사 원고를 유증하고 리케이온의 차기 학장으로 지명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리케이온 순회학파를 35년간 운영하며 성장·번영시켰다. 예리한 비평안과 유려한 화법으로 매력적인 강의를 펼쳤고, 다정한 성품 덕분에 아테네 시민들과 학자, 학생들에게 친근하게 여겨졌다. 85세에 테오프라스토스가 죽자 많은 아테네 사람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의 뒤를 이어 학장 자리는 람프사코스의 스트라톤(Strato of Lampsacus)이 계승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그의 서자 니코마코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Nicomachus (son of Aristotle))의 후견인이 사망한 후, 그를 길렀다. 아리스티포스(기원전 435년경 - 기원전 355년경)는 저서 『옛 사람들의 쾌락』에서 테오프라스토스가 니코마코스와 애인 관계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참고로, 테오프라스토스라는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어준 별명이며, 그의 언변 능력과 논의의 명쾌함을 인정하여 지어졌다.(“신(테오스)처럼 말하는 사람(프라스토스)”이라는 뜻)[66] 원래 이름은 티르타마스였다.[65]

2. 1. 유년기와 교육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는 레스보스 섬(Lesbos Island)의 에레소스(Eresos) 출신으로, 본명은 티르타무스(Tyrtamus, Τύρταμος)였다.[65] 그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그의 유려한 말솜씨를 칭찬하며 "테오프라스토스"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어로 "신의 표현"을 의미한다.[7][66]

테오프라스토스는 레스보스 섬에서 알키푸스(Alcippus)에게 철학을 배운 후 아테네로 건너가 플라톤(Plato)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플라톤 사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교류하며, 그가 아테네를 떠나 망명 생활을 할 때 동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Mytilene)로 이주한 것도 테오프라스토스의 권유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레스보스 섬에서 동물을,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을 연구하며 자연과학 연구를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자 테오프라스토스도 함께 마케도니아(Macedonia)로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35년경, 두 사람은 아테네로 돌아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리케이온(Lyceum)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사후 반(反)마케도니아 정서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를 떠나자, 테오프라스토스는 리케이온 학파(Peripatetic school)의 학장(scholarch)이 되었으며,[5] 아리스토텔레스 사후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서재와 저서 원고를 물려받고 리케이온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8]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 니코마쿠스(Nicomachus (son of Aristotle))의 후견인이 되었다. 아리스티포스(Aristippus)는 테오프라스토스와 니코마코스가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한다.

테오프라스토스는 35년 동안 리케이온 학파를 이끌면서 학파를 크게 번성시켰다.[10] 그는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우리는 막 살기 시작할 때 죽는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9]

2. 2. 아리스토텔레스와의 관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ërtius)의 『저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견해』는 테오프라스토스에 관한 전기적 정보 대부분을 제공한다.[5] 그는 레스보스 섬(Lesbos Island)의 에레소스(Eresos) 출신으로,[6] 본명은 티르타무스(Tyrtamus, Τύρταμος)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그의 유려한 말솜씨를 가리켜 "테오프라스토스"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7]("테오프라스토스"는 고대 그리스어 Θεός '신'과 φράζειν '표현하다'에서 유래, 즉 신성한 표현).[66][65]

테오프라스토스는 레스보스 섬에서 알키푸스(Alcippus)에게 철학을 배운 후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Plato)에게서 수학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친구가 되었고, 기원전 348/7년 플라톤 사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를 떠났을 때 동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45/4년 아리스토텔레스가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Mytilene)로 이주한 것은 테오프라스토스의 권유 때문일 가능성이 크며, 이때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 연구,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 연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43/2년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자 테오프라스토스도 마케도니아(Macedonia)로 함께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35년경,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Lyceum)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사후 반마케도니아 정서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를 떠나자, 테오프라스토스는 리케이온 학파(Peripatetic school)의 학장(scholarch)으로 남았으며,[8] 35년간 학파를 이끌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언에서 테오프라스토스를 자신의 자녀들과 서자 니코마코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의 후견인으로 삼고,[8] 자신의 서재와 저서 원고를 그에게 남겼다.[8] 아리스티포스(기원전 435년경 - 기원전 355년경)는 저서 『옛 사람들의 쾌락』에서 테오프라스토스가 니코마코스와 애인 관계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리케이온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며, 로도스의 에우데무스(Eudemus of Rhodes)도 이 직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아리스토크세누스(Aristoxenu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선택에 분개했다고 한다.

테오프라스토스는 35년 동안 리케이온 학파를 이끌었고, 디오게네스에 따르면 85세에 사망했다.[9] 그의 지도 아래 학파는 크게 번영하여 한때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었다고 하며, 희극 시인 메난드로스(Menander)도 그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필리포스 2세(Philip II of Macedon), 카산드로스(Cassander),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y I of Egypt)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불경죄 혐의가 기각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10] 그는 국장을 치렀고, "아테네 시민 전체가 그를 크게 존경하며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10] 그는 람프사쿠스의 스트라톤(Strato of Lampsacus)에게 리케이온 학장직을 물려주었다.

2. 3. 리케이온 학장 시절

테오프라스토스는 기원전 335년경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아테네로 이주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리케이온(Lyceum)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후 그곳에서 함께 활동했다.[5] 알렉산더 대왕 사후 반(反)마케도니아 정서로 인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를 떠나자, 테오프라스토스는 리케이온 학파(Peripatetic school)의 학장(scholarch)으로 남게 되었다.[5] 기원전 322/1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망한 후에도 테오프라스토스는 계속 그 직책을 35년간 유지했다.[8]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언에서 자신의 서재와 저서 원고를 테오프라스토스에게 남겼고,[8] 리케이온의 후계자로 지명했다.[8]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 니코마쿠스(Nicomachus (son of Aristotle))의 후견인으로도 그를 임명하였다.[8] 아리스티포스(Aristippus)는 저서 『옛 사람들의 쾌락』에서 테오프라스토스가 니코마코스와 애인 관계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리케이온 학파를 이끄는 동안, 그의 지도 아래 학파는 크게 번영하여 한때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10] 그는 필리포스 2세,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y I of Egypt)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그에 대한 불경죄 혐의가 기각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10] 그는 "우리는 막 살기 시작할 때 죽는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9]

테오프라스토스는 85세에 사망할 때까지 리케이온 학파를 이끌었으며, 사망 시 그의 정원과 집, 회랑을 영구적인 교육 장소로 리케이온에 남겼다. 그의 장례식에는 아테네 시민 전체가 참석하여 그를 크게 존경하였다.[10] 테오프라스토스의 뒤를 이어 람프사쿠스의 스트라톤(Strato of Lampsacus)이 리케이온 학장직을 계승했다.

2. 4. 죽음과 유산

테오프라스토스는 85세에 사망했으며, "우리는 막 살기 시작할 때 죽는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9] 아테네 시민 전체가 장례식에 참여할 정도로 존경받았다.[10] 그의 지도 아래 리케이온 학파는 크게 번영했으며, 한때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정원과 집, 회랑을 영구적인 교육 장소로 남겼다. 희극 시인 메난드로스(Menander)는 그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필리포스 2세(Philip II of Macedon), 카산드로스(Cassander),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y I of Egypt)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불경죄 혐의에서 완전히 기각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10]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언에서 그를 자신의 자녀들과 친밀했던 니코마쿠스(Nicomachus (son of Aristotle))의 후견인으로 삼았고, 자신의 서재와 저서 원고를 그에게 남겼다.[8] 또한 리케이온의 후계자로 테오프라스토스를 지명했다.[8] 로도스의 에우데무스(Eudemus of Rhodes)도 이 직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아리스토크세누스(Aristoxenu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선택에 분개했다고 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ërtius)의 『그리스 철학자전』(Βίοι καὶ γνῶμαι τῶν ἐν φιλοσοφίᾳ εὐδοκιμησάντων)은 테오프라스토스에 관한 전기적 정보 대부분을 제공하는데, 이 책은 테오프라스토스 사후 400년 이상 지나서 쓰여졌다.[5] 테오프라스토스는 레스보스 섬(Lesbos Island)의 에레소스(Eresos) 출신으로,[6] 본명은 티르타무스(Tyrtamus, Τύρταμος)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유려한 말솜씨를 가리켜 "테오프라스토스"(“신(테오스)처럼 말하는 사람(프라스토스)”이라는 뜻)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7][66] 그는 람프사쿠스의 스트라톤(Strato of Lampsacus)에게 리케이온 학장직을 물려주었다.

3. 학문적 업적

테오프라스토스의 ''식물지(Historia plantarum)'', 1549년판


디오게네스의 목록에 따르면 테오프라스토스의 저술은 당시의 지식 전반에 걸쳐 있었으며, 227편의 저술이 언급되어 있다. 그의 저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같은 주제를 다룬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세부 사항에서 보충적인 내용을 담았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저술 대부분은 분실 저작이다. 따라서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와 두 번째 ''분석론''(Ἀναλυτικῶν προτέρωνgrc 및 Ἀναλυτικῶν ὑστέρωνgrc)을 저술했다. 그는 또한 ''주제''(Ἀνηγμένων τόπωνgrc, Τοπικῶνgrc 및 Τὰ πρὸ τῶν τόπωνgrc)에 관한 책, ''삼단논법 분석''(Περὶ ἀναλύσεως συλλογισμῶνgrc 및 Περὶ συλλογισμῶν λύσεωςgrc), ''궤변론''(Σοφισμάτωνgrc) 및 ''긍정과 부정''(Περὶ καταφάσεως καὶ ἀποφάσεωςgrc)에 관한 책뿐만 아니라 ''자연철학''(Περὶ φύσεωςgrc, Περὶ φυσικῶνgrc, Φυσικῶνgrc 등), ''천체''(Περὶ οὐρανοῦgrc) 및 ''기상 현상''(Τῆς μεταρσιολεσχίαςgrc 및 Μεταρσιολογικῶνgrc)에 관한 책도 저술했다.

1644년판 ''식물 연구(Enquiry into Plants)''(즉, ''식물지(Historia Plantarum)'')의 프런티스피스


게다가 테오프라스토스는 ''온난과 한랭''(Περὶ θερμοῦ καὶ ψυχροῦgrc), ''물''(Περὶ ὕδατοςgrc), ''불''(Περὶ πυρóςgrc), ''바다''(Περὶ θαλάττηςgrc), ''응고와 용융''(Περὶ πήξεων καὶ τήξεωνgrc)에 관한 저술과 유기적, 정신적 삶의 다양한 현상, 그리고 ''영혼''(Περὶ ψυχῆςgrc), ''경험''(Περὶ ἐμπειρίαςgrc) 및 ''감각 인식에 관하여''(또는 ''감각에 관하여''; Περὶ αἰσθήσεωνgrc)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마찬가지로, 초기 그리스 철학자 아낙시메네스, 아낙사고라스, 엠페도클레스, 아르켈라오스,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 데모크리토스에 관한 테오프라스토스의 단행본이 심플리키우스에 의해 이용되었다는 언급을 찾을 수 있으며, 크세노크라테스, 아카데미아 학파에 반대하는 논고, 그리고 플라톤의 정치 이론 개요도 있다.

그는 플루타르코스의 리쿠르고스, 솔론, 아리스티데스, 페리클레스,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리산드로스, 아게실라오스, 그리고 데모스테네스의 전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역사를 연구했다. 이 전기들은 아마도 ''전기''(Περὶ βίωνgrc)에 관한 저술에서 가져온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된 노력은 자연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제목 외에는 단편만 남아 있는 개별 주제에 관한 여러 논문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인 ''돌에 관하여'', ''식물 연구'', 그리고 ''식물의 원인에 관하여''(아래 참조)가 완전한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정치에서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자취를 따랐던 것 같다. ''국가''(Πολιτικῶνgrc 및 Πολιτικοῦgrc)에 관한 그의 저서 외에도, ''교육''(Περὶ παιδείας βασιλέωςgrc 및 Περὶ παιδείαςgrc), ''왕권''(Περὶ βασιλείαςgrc, Περὶ παιδείας βασιλέωςgrc 및 Πρὸς Κάσανδρον περὶ βασιλείαςgrc), ''최상의 국가''(Περὶ τῆς ἀρίστης πολιτείαςgrc), ''정치적 도덕''(Πολιτικῶν ἐθῶνgrc), 그리고 특히 ''법률''(Νόμων κατὰ στοιχεῖονgrc, Νόμων ἐπιτομῆςgrc 및 Περὶ νόμωνgrc)에 관한 그의 저술이 인용된다. 여러 야만인뿐만 아니라 그리스 국가의 법률을 요약한 그의 저술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개요에 대한 동반자를 위한 것이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과 유사했을 것이다.[11] 그는 또한 웅변술과 시에 관해서도 저술했다.[12] 테오프라스토스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윤리학적 저술에서, 그리고 운동, 영혼, 그리고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더 멀어졌다.

이러한 저술 외에도 테오프라스토스는 여러 문제들을 모아 놓은 책들을 썼는데, 그 중 일부는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는 ''문제들''에 포함되었다.[13] 그리고 주석,[14] 부분적으로 대화[15] 형식으로 쓰여진 것으로, 아마도 ''에로티코스''(Ἐρωτικόςgrc),[16] ''메가클레스''(Μεγακλῆςgrc), ''칼리스테네스''(Καλλισθένηςgrc),[17] 그리고 ''메가리코스''(Μεγαρικόςgrc)와 편지, 부분적으로 수학 과학과 그 역사에 관한 책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의 기존 저술 중 많은 것들은 단편적인 형태로만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강의를 위한 메모 또는 강의 내용을 적어 놓은 메모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그의 번역가인 아서 F. 호트는 말한다. "문학적 매력은 없으며, 문장은 대부분 압축적이고 매우 생략적이어서 때로는 불명확할 정도이다". 이러한 단편과 발췌본의 텍스트는 종종 매우 손상되어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의 저술이 스케프시스의 넬레우스와 그의 후손들의 지하실에 방치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18]

테오프라스토스는 동문이자 제자인 로도스의 에우데모스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발전시키고 교정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개량했다. 그들은 양상 개념을 연구하여 가능성을 우연성과 구분하는 등 가능성의 개념을 명확히 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픽스에 약간 다른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는데, 이는 후대의 테미스티오스, 키케로를 거쳐 보에티우스에 의한 토픽 (논리학) 개념 확립의 시초가 된다(예: 토픽 (논리학) 참조).

그의 관심은 거의 모든 학문 영역에 미쳤으며, 과학에 통일적인 개념을 추구했다. 동시에 철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주요 과학 분야를 구분하는 이론적 기준을 마련했다.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으며, 뤼케이온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고, 과학의 보급에도 공헌했다.[65]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로 여겨지며, 대체로 그의 철학적 가르침을 지켰지만,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세계의 본질을 밝히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계를 목적론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비판했으며, "최초의 원동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설에도 동의하지 않았다.[65] 그러나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평가로는,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창조적인 정신은 없었지만, 연구 대상을 세세하게 관찰하고 그 차이를 지적하거나, 사실과 맞지 않는 이론의 약점을 찾아내는 데 능했다고 여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의 틀 안에서 체계의 개별 부분을 확정하고 전체를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 평가가 정확한지 여부는 그의 광범위한 연구를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철학과 논리학

테오프라스토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의를 얼마나 따랐는지, 또는 그것들을 더 정확하게 정의했는지, 다른 형태로 개념화했는지, 그리고 그 위에 어떤 추가적인 사고 구조를 배치했는지는 그의 저술 대부분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결정될 수 있다.[18] 그의 많은 견해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of Aphrodisias)와 키리키아의 심플리키우스(Simplicius of Cilicia)와 같은 후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재구성되어야 한다.[28]

누렘베르크 연대기(Nuremberg Chronicle)에 묘사된 테오프라스토스


테오프라스토스는 그의 저서 『어휘의 요소들』에서 주요 품사와 종속 품사를 구분하고, 직유적 표현(kuria lexis/κυρία λέξιςgrc)과 은유적 표현을 구분하며, 담화의 감정(pathe/πάθηgrc)을 다루는 등 문법의 토대 위에 논리학과 수사학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29] 그는 또한 담화의 이중적 지시(schisis/σχίσιςgrc)를 사물(pragmata/πράγματαgrc)과 청중으로 구분하고, 시와 수사학을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했다.[30]

그는 판단의 통일성,[31] 여러 종류의 부정,[32] 무조건적 필요성과 조건적 필요성의 차이에 대해 장황하게 논했다.[33] 그는 삼단논법에 대한 그의 이론에서 보편적 긍정 판단의 환위에 대한 증명을 제시했고, 삼단논법의 모드 설정 및 배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여기저기서 의견을 달리했다.[34] 부분적으로는 증명 방식에서,[35] 부분적으로는 혼합 이론, 즉 전제의 양상이 결론의 양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론에서 그랬다.[36] 그리고 두 개의 별개의 저술에서 그는 논증을 삼단논법 형식으로 환원하는 것과 논증을 분석하는 것에 대해 다루었다.[37] 또한 가정적 결론에 대해서도 다루었다.[38] 증명 이론에 대해서는 갈레노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과 함께 테오프라스토스의 제2 분석론을 그 이론에 대한 최고의 논문으로 인용한다.[39]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여러 단행본에서 그것을 과학의 일반 이론으로 확장하려고 시도한 것 같다. 그의 『주제들』에서 인용된 명제, 즉 "대립되는 원리들 자체가 대립되며 동일한 상위 속에서 유추될 수 없다"는 명제도 이에 속할 것이다.[40] 그 외에도 테오프라스토스의 『주제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 약간 다른 몇 가지 점이 인용된다.[41] 이 논문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모호한 단어나 개념에 대한 논문으로,[42]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5권에 해당한다.[18]

9장으로 구성된 논문인 《메타피지카》(시대착오적인 그리스어 제목: Θεοφράστου τῶν μετὰ τὰ φυσικάgrc)[22]는 (또한 《원리에 관하여》로 알려져 있음) 우제너(Usener)가 그의 판본에서 더 큰 저작의 단편으로 간주했지만, 로스(Ross)와 포비스(Fobes)가 그들의 판본에서 이 논문은 완전하다고 주장했으며(p. X), 이러한 견해는 현재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헤르미푸스와 안드로니쿠스에게서 이 저작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저자의 저작으로 돌릴 이유는 없다. 특히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가 이미 이것을 언급했기 때문이다.[18]

## 식물학

테오프라스토스의 가장 중요한 저술은 두 권의 방대한 식물학 논문인 『식물에 대한 탐구』(그리스어: Περὶ φυτῶν ἱστορίαgrc, 일반적으로 Historia Plantarumla으로 알려짐)와 『식물의 원인에 관하여』(그리스어: Περὶ αἰτιῶν φυτικῶνgrc, 라틴어: De causis plantarumla)이다. 이 저술들은 고대와 중세 시대에 식물학 분야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 식물계의 최초의 체계화를 이루었다.[19]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일부 학자들은, 린네를 비롯하여 그를 "식물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식물에 대한 탐구』는 식물의 발생 방식, 서식지, 크기, 실용적인 용도에 따라 식물을 분류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19] 1권에서는 식물의 각 부분, 2권에서는 식물의 번식과 파종 시기 및 방법을 다룬다. 3, 4, 5권은 나무의 종류, 서식지, 실용적 응용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6권은 관목과 가시 식물을 다룬다. 7권은 초본을, 8권은 식용 종자를 생산하는 식물을, 9권은 유용한 수액, 검, 수지 등을 생산하는 식물을 다룬다.[19]

『식물의 원인에 관하여』는 식물의 성장, 생식력에 대한 영향, 파종 및 수확 시기, 토양 준비 방법, 퇴비 사용, 도구 사용,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식물의 냄새, 맛, 성질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19] 약용보다는 식물의 경제적 용도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약용에 대한 언급도 간혹 있다.[19]

이 저술들은 식물의 기능과 성질에 대한 귀중한 관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19] 테오프라스토스는 발아 과정을 관찰하고 기후가 식물에 미치는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리스 식물에 대한 많은 정보는 그가 그리스 전역을 여행하고 자신의 식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저술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랐던 사람들이 가져온 아시아 식물에 대한 보고서에서도 이익을 얻었다. 목화, 뱅갈보리수나무, 후추, 계피, 몰약, 유향과 같은 식물에 대한 설명이 그 예시이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을 교목 또는 수목, 관목, 아관목, 초본으로 4분류하고,[67] 식물에 관한 많은 중요한 개념과 전문 용어를 만들었다.[66] 또한, 계통수 또는 수형도와 유사한 체계적인 배열을 도입하여 식물을 과, 속, 종과 같은 그룹으로 분류하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분류법의 기초가 되는 방법을 확립했다.[65]

『식물지』는 역사상 식물학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이며, 500여 종의 기록을 남긴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농학, 임학, 약학의 응용 과학서이자 실용서이며, 현장 조사의 중요성을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66] 『식물지』는 9권, 『식물 원인론』은 6권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식물지』는 1483년 테오도로스 가자에 의해 라틴어 번역본으로 처음 출판되었고,[66] 그리스어 원본은 1495~98년 알두스 마누티우스 출판사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테오프라스토스와 함께 서양 식물학·약초학에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고대 로마의 의사 디오스코리데스(40년경~90년)의 『약물지』가 있다. 디오스코리데스는 『약물지』를 저술했지만, 『식물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67]

## 기상학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지만, 기상학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적이고 연역적인 사고방식 대신 경험을 중시했다.[68] 『자연사(Περὶ φυσικῶν ἱστοριῶν)』의 일부 단편들에는 '불', '바람', 그리고 '물', '바람', '폭풍'의 징후에 대한 내용이 남아있다.[21]

테오프라스토스는 「기상의 전조에 관하여(De Signis Tempestatum)」와 「바람에 관하여(De Ventis)」라는 저서를 남겼다.[68] 「기상의 전조에 관하여」에는 날씨의 전조를 비, 바람, 폭풍, 맑은 날씨, 주기적인 기상 현상에 대해 각각 80편, 45편, 50편, 24편, 7편에 걸쳐 제시했다.[68] 예를 들어 "비의 징후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가장 명확한 것은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다. 해 뜨기 전에 하늘이 붉게 물든 모습일 때이다. 그날이 아니더라도 보통 3일 이내에 비를 의미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요한 고틀로브 슈나이더 (1818–21)와 프리드리히 비머 (1842–62)의 판본, 그리고 헤르만 우제너의 『테오프라스토스 자료집(Analecta Theophrastea)』에는 여러 개의 더 작은 과학적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 기타 학문 분야

테오프라스토스의 관심은 거의 모든 학문 영역에 미쳤으며, 과학에 통일적인 개념을 추구했다. 그는 철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주요 과학 분야를 구분하는 이론적 기준을 마련했으며,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뤼케이온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고 과학 보급에도 공헌했다.[65]

그의 저서 ''등장인물''(Ἠθικοὶ χαρακτῆρεςgrc)에는 30개의 간략한 윤리적 유형 개요가 담겨 있으며, 인물 묘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된 시도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조셉 홀, 토마스 오버버리 경, 존 얼 주교, 장 드 라 브뤼예르 등 많은 모방자를 낳았으며, 조지 엘리엇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감각에 관한 논고 (Περὶ αἰσθήσεωνgrc)와 그 대상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며, 6세기에 프리스키아누스가 이 저술에 대한 주석을 썼다.[19] 이와 관련하여 '냄새', '피로', '현기증', '땀', '실신', '마비', '꿀'에 관한 단편들이 언급된다.[18]

『자연사(Περὶ φυσικῶν ἱστοριῶν)』의 일부 단편들이 남아 있으며, '불', '바람', '물', '바람', '폭풍'의 징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다.[21]

《메타피지카》(시대착오적인 그리스어 제목: Θεοφράστου τῶν μετὰ τὰ φυσικάgrc)[22]는 9장으로 구성된 논문으로,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가 이미 언급한 바 있다.[18]

테오프라스토스는 『돌에 관하여』(Περὶ λίθων)에서 열을 가했을 때의 반응에 따라 암석과 보석을 분류하고, 호박자철석처럼 인력을 가진 광물들을 공통된 특성에 따라 세분화했다.[23][24][25] 그는 대리석, 석탄, 다양한 광석, 부석 등을 설명하고, 에메랄드, 자수정, 오닉스, 자스퍼 등의 귀중한 보석과 청금석으로 추정되는 "사파이어"를 다루었다.[23] 또한 진주, 산호, 화석화된 잔해, 유리 제조, 황토, 석고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23] 그는 키프로스구리 광산, 라우리온의 은광, 금광 등을 언급했으며, 별도의 저서 『광업에 관하여』를 저술했지만 실전되었다. 플리니우스는 『자연사』에서 테오프라스토스의 『돌에 관하여』를 언급하며 많은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동문이자 제자인 로도스의 에우데모스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발전시키고 교정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개량했다. 그들은 양상 개념을 연구하여 가능성을 우연성과 구분하는 등 가능성의 개념을 명확히 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픽스에 약간 다른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는데, 이는 후대의 토픽 (논리학) 개념 확립의 시초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로 여겨지며, 대체로 그의 철학적 가르침을 지켰지만,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세계의 본질을 밝히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계를 목적론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비판했으며, "최초의 원동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설에도 동의하지 않았다.[65] 그러나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3. 1. 철학과 논리학

테오프라스토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의를 얼마나 따랐는지, 또는 그것들을 더 정확하게 정의했는지, 다른 형태로 개념화했는지, 그리고 그 위에 어떤 추가적인 사고 구조를 배치했는지는 그의 저술 대부분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결정될 수 있다.[18] 그의 많은 견해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of Aphrodisias)와 키리키아의 심플리키우스(Simplicius of Cilicia)와 같은 후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재구성되어야 한다.[28]

테오프라스토스는 그의 저서 『어휘의 요소들』에서 주요 품사와 종속 품사를 구분하고, 직유적 표현(kuria lexis/κυρία λέξιςgrc)과 은유적 표현을 구분하며, 담화의 감정(pathe/πάθηgrc)을 다루는 등 문법의 토대 위에 논리학과 수사학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29] 그는 또한 담화의 이중적 지시(schisis/σχίσιςgrc)를 사물(pragmata/πράγματαgrc)과 청중으로 구분하고, 시와 수사학을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했다.[30]

그는 판단의 통일성,[31] 여러 종류의 부정,[32] 무조건적 필요성과 조건적 필요성의 차이에 대해 장황하게 논했다.[33] 그는 삼단논법에 대한 그의 이론에서 보편적 긍정 판단의 환위에 대한 증명을 제시했고, 삼단논법의 모드 설정 및 배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여기저기서 의견을 달리했다.[34] 부분적으로는 증명 방식에서,[35] 부분적으로는 혼합 이론, 즉 전제의 양상이 결론의 양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론에서 그랬다.[36] 그리고 두 개의 별개의 저술에서 그는 논증을 삼단논법 형식으로 환원하는 것과 논증을 분석하는 것에 대해 다루었다.[37] 또한 가정적 결론에 대해서도 다루었다.[38] 증명 이론에 대해서는 갈레노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과 함께 테오프라스토스의 제2 분석론을 그 이론에 대한 최고의 논문으로 인용한다.[39]

그는 여러 단행본에서 그것을 과학의 일반 이론으로 확장하려고 시도한 것 같다. 그의 『주제들』에서 인용된 명제, 즉 "대립되는 원리들 자체가 대립되며 동일한 상위 속에서 유추될 수 없다"는 명제도 이에 속할 것이다.[40] 그 외에도 테오프라스토스의 『주제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 약간 다른 몇 가지 점이 인용된다.[41] 이 논문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모호한 단어나 개념에 대한 논문으로,[42]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5권에 해당한다.[18]

9장으로 구성된 논문인 《메타피지카》(시대착오적인 그리스어 제목: Θεοφράστου τῶν μετὰ τὰ φυσικάgrc)[22]는 (또한 《원리에 관하여》로 알려져 있음) 우제너(Usener)가 그의 판본에서 더 큰 저작의 단편으로 간주했지만, 로스(Ross)와 포비스(Fobes)가 그들의 판본에서 이 논문은 완전하다고 주장했으며(p. X), 이러한 견해는 현재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헤르미푸스와 안드로니쿠스에게서 이 저작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저자의 저작으로 돌릴 이유는 없다. 특히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가 이미 이것을 언급했기 때문이다.[18]

3. 2. 식물학

테오프라스토스의 가장 중요한 저술은 두 권의 방대한 식물학 논문인 『식물에 대한 탐구』(그리스어: Περὶ φυτῶν ἱστορίαgrc, 일반적으로 Historia Plantarumla으로 알려짐)와 『식물의 원인에 관하여』(그리스어: Περὶ αἰτιῶν φυτικῶνgrc, 라틴어: De causis plantarumla)이다. 이 저술들은 고대와 중세 시대에 식물학 분야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 식물계의 최초의 체계화를 이루었다.[19]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일부 학자들은, 린네를 비롯하여 그를 "식물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식물에 대한 탐구』는 식물의 발생 방식, 서식지, 크기, 실용적인 용도에 따라 식물을 분류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19] 1권에서는 식물의 각 부분, 2권에서는 식물의 번식과 파종 시기 및 방법을 다룬다. 3, 4, 5권은 나무의 종류, 서식지, 실용적 응용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6권은 관목과 가시 식물을 다룬다. 7권은 초본을, 8권은 식용 종자를 생산하는 식물을, 9권은 유용한 수액, 검, 수지 등을 생산하는 식물을 다룬다.[19]

『식물의 원인에 관하여』는 식물의 성장, 생식력에 대한 영향, 파종 및 수확 시기, 토양 준비 방법, 퇴비 사용, 도구 사용,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식물의 냄새, 맛, 성질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19] 약용보다는 식물의 경제적 용도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약용에 대한 언급도 간혹 있다.[19]

이 저술들은 식물의 기능과 성질에 대한 귀중한 관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19] 테오프라스토스는 발아 과정을 관찰하고 기후가 식물에 미치는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리스 식물에 대한 많은 정보는 그가 그리스 전역을 여행하고 자신의 식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저술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랐던 사람들이 가져온 아시아 식물에 대한 보고서에서도 이익을 얻었다. 목화, 뱅갈보리수나무, 후추, 계피, 몰약, 유향과 같은 식물에 대한 설명이 그 예시이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을 교목 또는 수목, 관목, 아관목, 초본으로 4분류하고,[67] 식물에 관한 많은 중요한 개념과 전문 용어를 만들었다.[66] 또한, 계통수 또는 수형도와 유사한 체계적인 배열을 도입하여 식물을 과, 속, 종과 같은 그룹으로 분류하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분류법의 기초가 되는 방법을 확립했다.[65]

『식물지』는 역사상 식물학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이며, 500여 종의 기록을 남긴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농학, 임학, 약학의 응용 과학서이자 실용서이며, 현장 조사의 중요성을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66] 『식물지』는 9권, 『식물 원인론』은 6권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식물지』는 1483년 테오도로스 가자에 의해 라틴어 번역본으로 처음 출판되었고,[66] 그리스어 원본은 1495~98년 알두스 마누티우스 출판사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테오프라스토스와 함께 서양 식물학·약초학에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고대 로마의 의사 디오스코리데스(40년경~90년)의 『약물지』가 있다. 디오스코리데스는 『약물지』를 저술했지만, 『식물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67]

3. 3. 기상학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지만, 기상학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적이고 연역적인 사고방식 대신 경험을 중시했다.[68] 『자연사(Περὶ φυσικῶν ἱστοριῶν)』의 일부 단편들에는 '불', '바람', 그리고 '물', '바람', '폭풍'의 징후에 대한 내용이 남아있다.[21]

테오프라스토스는 「기상의 전조에 관하여(De Signis Tempestatum)」와 「바람에 관하여(De Ventis)」라는 저서를 남겼다.[68] 「기상의 전조에 관하여」에는 날씨의 전조를 비, 바람, 폭풍, 맑은 날씨, 주기적인 기상 현상에 대해 각각 80편, 45편, 50편, 24편, 7편에 걸쳐 제시했다.[68] 예를 들어 "비의 징후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가장 명확한 것은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다. 해 뜨기 전에 하늘이 붉게 물든 모습일 때이다. 그날이 아니더라도 보통 3일 이내에 비를 의미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요한 고틀로브 슈나이더 (1818–21)와 프리드리히 비머 (1842–62)의 판본, 그리고 헤르만 우제너의 『테오프라스토스 자료집(Analecta Theophrastea)』에는 여러 개의 더 작은 과학적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 4. 기타 학문 분야

테오프라스토스의 관심은 거의 모든 학문 영역에 미쳤으며, 과학에 통일적인 개념을 추구했다. 그는 철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주요 과학 분야를 구분하는 이론적 기준을 마련했으며,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뤼케이온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고 과학 보급에도 공헌했다.[65]

그의 저서 ''등장인물''(Ἠθικοὶ χαρακτῆρεςgrc)에는 30개의 간략한 윤리적 유형 개요가 담겨 있으며, 인물 묘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된 시도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조셉 홀, 토마스 오버버리 경, 존 얼 주교, 장 드 라 브뤼예르 등 많은 모방자를 낳았으며, 조지 엘리엇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감각에 관한 논고 (Περὶ αἰσθήσεωνgrc)와 그 대상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며, 6세기에 프리스키아누스가 이 저술에 대한 주석을 썼다.[19] 이와 관련하여 '냄새', '피로', '현기증', '땀', '실신', '마비', '꿀'에 관한 단편들이 언급된다.[18]

『자연사(Περὶ φυσικῶν ἱστοριῶν)』의 일부 단편들이 남아 있으며, '불', '바람', '물', '바람', '폭풍'의 징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다.[21]

《메타피지카》(시대착오적인 그리스어 제목: Θεοφράστου τῶν μετὰ τὰ φυσικάgrc)[22]는 9장으로 구성된 논문으로,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가 이미 언급한 바 있다.[18]

테오프라스토스는 『돌에 관하여』(Περὶ λίθων)에서 열을 가했을 때의 반응에 따라 암석과 보석을 분류하고, 호박자철석처럼 인력을 가진 광물들을 공통된 특성에 따라 세분화했다.[23][24][25] 그는 대리석, 석탄, 다양한 광석, 부석 등을 설명하고, 에메랄드, 자수정, 오닉스, 자스퍼 등의 귀중한 보석과 청금석으로 추정되는 "사파이어"를 다루었다.[23] 또한 진주, 산호, 화석화된 잔해, 유리 제조, 황토, 석고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23] 그는 키프로스구리 광산, 라우리온의 은광, 금광 등을 언급했으며, 별도의 저서 『광업에 관하여』를 저술했지만 실전되었다. 플리니우스는 『자연사』에서 테오프라스토스의 『돌에 관하여』를 언급하며 많은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동문이자 제자인 로도스의 에우데모스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발전시키고 교정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개량했다. 그들은 양상 개념을 연구하여 가능성을 우연성과 구분하는 등 가능성의 개념을 명확히 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픽스에 약간 다른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는데, 이는 후대의 토픽 (논리학) 개념 확립의 시초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로 여겨지며, 대체로 그의 철학적 가르침을 지켰지만,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세계의 본질을 밝히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계를 목적론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비판했으며, "최초의 원동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설에도 동의하지 않았다.[65] 그러나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4. 주요 저서

테오프라스토스의 저술은 당시의 지식 전반에 걸쳐 있었으며, 디오게네스의 목록에 따르면 227편의 저술이 언급되어 있다. 그의 저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같은 주제를 다룬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세부 사항에서 보충적인 내용을 담았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저술 대부분은 분실 저작이다.[11]

Opera omnia, 1613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분석론'', ''주제'', ''삼단논법 분석'', ''궤변론'', ''긍정과 부정''에 관한 책뿐만 아니라 ''자연철학'', ''천체'', ''기상 현상''에 관한 책도 저술했다.

또한 ''온난과 한랭'', ''물'', ''불'', ''바다'', ''응고와 용융''에 관한 저술과 유기적, 정신적 삶의 다양한 현상, 그리고 ''영혼'', ''경험'', ''감각 인식에 관하여''(또는 ''감각에 관하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 아낙시메네스, 아낙사고라스, 엠페도클레스, 아르켈라오스,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 데모크리토스, 크세노크라테스, 아카데미아 학파에 반대하는 논고, 플라톤의 정치 이론 개요도 있다.

플루타르코스의 리쿠르고스, 솔론, 아리스티데스, 페리클레스,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리산드로스, 아게실라오스, 데모스테네스의 전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역사를 연구했으며, 이는 ''전기''(Περὶ βίωνgrc)에서 가져온 것일 것이다.

자연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을 계승하여 ''돌에 관하여'', ''식물 연구'', 그리고 ''식물의 원인에 관하여''가 완전한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다. 정치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자취를 따랐던 것 같으며, ''국가''(Πολιτικῶνgrc 및 Πολιτικοῦgrc)에 관한 저서 외에도, ''교육'', ''왕권'', ''최상의 국가'', ''정치적 도덕'', ''법률''[11]에 관한 저술이 인용된다. 여러 야만인뿐만 아니라 그리스 국가의 법률을 요약한 저술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개요에 대한 동반자를 위한 것이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과 유사했을 것이다.[11] 웅변술과 시에 관해서도 저술했다.[12] 윤리학적 저술, 운동, 영혼, 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더 멀어졌다.

이러한 저술 외에도 테오프라스토스는 여러 문제들을 모아 놓은 책들을 썼으며, 그 중 일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는 ''문제들''에 포함되었다.[13] 주석,[14] 대화[15] 형식으로 쓰여진 것으로, ''에로티코스''(Ἐρωτικόςgrc),[16] ''메가클레스''(Μεγακλῆςgrc), ''칼리스테네스''(Καλλισθένηςgrc),[17] ''메가리코스''(Μεγαρικόςgrc)와 편지, 수학 과학과 그 역사에 관한 책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저술 중 많은 것들은 단편적인 형태로만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강의를 위한 메모 또는 강의 내용을 적어 놓은 메모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번역가인 아서 F. 호트는 말한다. "문학적 매력은 없으며, 문장은 대부분 압축적이고 매우 생략적이어서 때로는 불명확할 정도이다". 이러한 단편과 발췌본의 텍스트는 종종 매우 손상되어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의 저술이 스케프시스의 넬레우스와 그의 후손들의 지하실에 방치되었다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18]

다음 저술들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현존한다.[70]

  • ''식물지''(9권)
  • ''식물원인론''(6권)
  • ''성격론''(『인간군상』이라고도 함. ): 테오프라스토스 사후에 편집된 스케치 모음집이다.
  • ''자연학자들의 학설''(『자연학자학설집』이라고도 함. ): 현재는 단편만 전해지지만,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H. 디일스에 따르면, 후세의 학설사의 공통 조상에 해당한다고 한다.[71]
  • ''형이상학 단편''( ): 단편이 아니라 소논문으로 여겨진다.
  • ''석론''(라틴어: De lapidibus, ): 암석과 광물에 관한 책.
  • ''바람에 관하여''
  • ''기상의 징후에 관하여''
  • ''불에 관하여''
  • ''냄새에 관하여''
  • ''감각과 감각되는 것에 관하여''


5. 영향과 평가



철학자 유형의 수염 난 머리를 한 대리석 헤르마 조각상은 명문이 명확히 새겨져 있음에도 순전히 관습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신원 미상의 초상 조각상은 르네상스 이후 로마에서는 쉽게 팔리지 않았다.[60] 이 흉상은 이전에 Palazzo Massimi에 있는 Pietro Massimi 후작의 소장품에 있었으며, 판화가 제작될 당시에는 L. Massimi 후작의 소유였다. 현재는 로마의 빌라 알바니에 소장되어 있다(목록번호 1034). 비문이 새겨진 이 흉상은 판화[60]와 사진으로 자주 묘사되었다. 이 흉상의 사진은 1916년 로브 고전 문헌 시리즈 ''테오프라스토스: 식물 연구'' 1권의 프런티스피스를 장식한다. 앙드레 테베는 그의 도상집 Les vraies Pourtrats et vies des Hommes Illustres프랑스어 (파리, 1584)에서[61] 이 흉상을 표절한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를 묘사하면서, 키프로스의 그리스인의 도서관에서 그것을 얻었고 안티오크 폐허에서 확인하는 흉상을 보았다는 날조된 이야기로 그의 사기를 뒷받침했다.[62]

2014년 발매된 ''파이어플라이'' 그래픽 노블인 ''세레니티: 바람결에 흩날리는 잎''에 테오프라스투스라는 이름의 세계가 등장한다.

테오도르 가이젤(Theodor Geisel)은 자신의 필명이자 또 다른 자아인 수스 박사(Dr. Seuss)의 이름으로 "테오프라스투스"를 사용했다.[63]

2001년에는 테오프라스투스라는 이름의 보드 게임이 출시되었다. 플레이어들은 일련의 연금술 실험을 통해 테오프라스투스의 제자가 되기 위해 경쟁한다.[64]

6. 한국 사회에 대한 기여

참조

[1] 웹사이트 History of Logic: Theophrastus of Eresus http://www.britannic[...]
[2] 웹사이트 Ancient Logic: Forerunners of Modus Ponens and Modus Tollens http://plato.stanfor[...]
[3] 서적 Ancient Botany Routledge
[4] 서적 Plants as Persons: A Philosophical Botany
[5]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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