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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마라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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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마라투스는 기원전 7세기에 활동한 도리아인 귀족으로, 반역 혐의로 인해 고대 코린토스를 떠나 에트루리아의 타르퀴니이에 정착했다. 그는 그리스 문화를 이탈리아에 전파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로마 왕정 및 공화정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데마라투스의 아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로마의 다섯 번째 왕이 되었고, 손자 아룬스는 로마 공화정의 초기 집정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버지가 되었다. 데마라투스는 로마의 타르퀴니아 씨족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로마의 주요 가문과 연결되어 로마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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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마라투스
기본 정보
데마라투스 흉상
데마라투스 흉상
출생고린토스
사망이탈리아
활동 시기기원전 7세기 ~ 기원전 6세기
직업귀족
상인
가문
아버지아리스톤
아들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기타
관련 인물고린토스의 키프셀로스
에트루리아
로마

2. 생애

데마라투스는 기원전 7세기 중반, 그리스 코린티아의 유력 귀족 가문인 바키아다이 가문 출신이었다. 기원전 655년 피난처를 찾아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갔다.

그의 아들 아룬스는 아버지 데마라투스보다 먼저 죽었는데, 임신한 아내를 남겼다. 데마라투스는 미래의 손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상속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손주의 이름은 가난 때문에 에게리우스(필요한 이)였으며, 루카레티아의 남편이자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버지였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그의 손자와 아들이 올림피아를 방문하고 그곳에 헌신한 첫 외국인이었다.

2. 1. 코린트에서의 삶과 망명

데마라투스는 도리아인 귀족이자 고대 코린트의 바키아다이 가문의 일원이었다. 기원전 655년경, 코린티아에서 발생한 정치적 혼란을 피해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당시 코린트는 참주 킵셀로스가 집권하면서 기존 귀족 세력이 억압받는 상황이었다. 그는 반역 혐의에 직면하여 에트루리아 문명의 도시인 타르퀴니이에 정착하여 에트루리아 귀족 여성과 결혼했다. 그들은 두 아들 루키우스와 아룬스를 두었다.[2][3][4][1]

전통에 따르면 데마라투스는 그리스 문화를 이탈리아 본토에 소개했으며, 코린트에서 도공을 데려왔다. 그리스 도공들은 타르퀴니이와 그 항구인 그라비스카에서 일했다. 대 플리니우스와 타키투스는 데마라투스가 에트루리아인에게 문자를 가져왔다고 보고했다.[5][6] 스트라본은 그가 타르퀴니이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보고했지만, 다른 출처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으며, 외국인의 아들인 그의 아들 루키우스가 정치 권력을 얻기 위해 로마로 이주해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7][1]

2. 2. 에트루리아 정착과 문화 전파

그는 코린티아의 귀족 가문인 바치스가 출신으로, 기원전 655년 이탈리아로 건너와 에트루리아 도시 타르퀴니이에 정착했다. 데마라투스는 타르퀴니이에서 에트루리아 귀족 여성과 결혼하여 두 아들 루쿠모와 아룬스를 낳았다.[2][3][4][1]

데마라투스는 이탈리아로 이주할 때 상당한 재산을 가져왔으며,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 도자기를 전파했다. 특히 코린토스에서 도공들을 데려와 이탈리아 서부 지역의 그리스 도자기 발전에 기여했다. 이들은 타르퀴니이와 그 항구인 그라비스카에서 활동했다. 대 플리니우스와 타키투스는 데마라투스가 에트루리아인에게 문자를 전파했다고 기록했다.[5][6]

3. 후손과 로마 역사에 끼친 영향

데마라투스는 타르퀴니아 씨족의 시조였으며, 그의 후손들은 혈통이나 결혼을 통해 로마의 마지막 세 왕과 최초의 두 로마 집정관을 포함하는 등 로마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 특히, 로마 공화국 수립에 관련된 양측 지도자들 다수가 데마라투스의 후손이었다.[1]

3. 1. 아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데마라투스에게는 루키우스와 아룬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아룬스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는데, 데마라투스는 아룬스의 아내가 자신의 손자를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남은 아들 루키우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다.[2][3][1]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는 아버지처럼 에트루리아 귀족 여성과 결혼했지만, 외국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타르퀴니이에서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없었다. 그는 아내 타나킬의 권유로 로마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는 외국인도 지위와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다. 로마에서 루키우스는 안쿠스 마르키우스 왕의 총애를 받았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8][9][10] 그는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의 도시 기반 시설을 확충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로마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3. 2. 손자 아룬스 타르퀴니우스 (에게리우스)

데마라투스의 아들 아룬스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는데, 아룬스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2][3][4][1] 데마라투스는 손자가 태어날 것을 알지 못한 채, 남은 아들 루키우스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다. 데마라투스의 손자이자 아룬스의 아들인 아룬스는 할아버지의 재산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게 태어났고, 이 때문에 "가난한 자"를 의미하는 '에게리우스'라고 불렸다.[2][3][1]

에게리우스는 라틴 도시 콜라티아의 로마 수비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11][12]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버지였다.[1][2][3] 콜라티누스는 로마 공화국 수립 당시 초대 로마 집정관 중 한 명이었다.[29][30]

3. 3. 로마 왕정과 공화정 초기

데마라투스는 두 아들 루키우스와 아룬스를 두었다.[2][3][4][1] 아룬스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고, 데마라투스는 아룬스의 아내가 자신의 손자를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 결국 데마라투스는 남은 아들 루키우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다.[2][3][1]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룬스라고 이름 지어진 이 아이는 할아버지의 재산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게 태어났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의미하는 '에게리우스'라고 불렸다.[2][3][1]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는 아버지처럼 에트루리아 귀족 여성과 결혼했지만, 외국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타르퀴니이에서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없었다. 그는 아내 타나킬의 권유로 로마로 이주하여 안쿠스 마르키우스 왕의 총애를 받았고, 왕위를 계승하였다.[8][9][10] 그는 라틴 도시 콜라티아를 정복한 후, 조카 아룬스를 로마 수비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11][12]

타르퀸의 딸은 로마의 여섯 번째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와 결혼했다.[13][14] 툴리우스는 늙은 타르퀸의 아들 또는 손자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에게 폐위되었다.[15][16]

로마 공화국 수립의 지도자들 중 다수는 데마라투스의 후손이었다.[1] 왕의 아내도 데마라투스의 후손이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늙은 타르퀸의 딸이라고 전해진다. 왕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의 루크레티아 강간은 로마 귀족들이 왕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이끌었다.[17][18][19] 아룬스 타르퀴니우스와 로마 집정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로마 공화국의 첫 번째 대규모 전투에서 서로를 죽였다.[20][21]

최초의 두 집정관은 각각 데마라투스의 후손이었다. 브루투스의 어머니는 왕의 누이였고,[27][28] 그의 동료는 에게리우스의 아들이자 루크레티아의 남편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였다.[29][30] 브루투스는 아룬스 타르퀴니우스의 손에 죽기 전에, 동료에게 사임하고 망명할 것을 강요했는데, 이는 타르퀴니아 씨족은 로마에서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31][32]

3. 4. 로마 주요 가문과의 연관

데마라투스는 타르퀴니아 씨족의 조상이었으며, 혈통이나 결혼을 통해 그의 후손들은 로마의 마지막 세 왕과 최초의 두 로마 집정관을 포함했다.[1] 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세 개의 중요한 로마 씨족으로는 유니아 씨족, 마밀리아 씨족, 툴리아 씨족이 있다.[1]

로마 공화국 수립에 관련된 양측 지도자들 다수가 데마라투스의 후손이었다.[1] 왕과 왕비(늙은 타르퀸의 딸)는 물론, 그들의 세 아들(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 아룬스 타르퀴니우스, 티투스 타르퀴니우스)도 사건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의 루크레티아 강간은 로마 귀족들의 반란을 일으켰고,[17][18][19] 아룬스 타르퀴니우스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실바 아르시아 전투에서 서로를 죽였으며,[20][21] 티투스 타르퀴니우스는 레길루스 호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거나 전사했을 수도 있다.[22][23] 당시 로마에 대항한 라틴 군대는 투스쿨룸의 독재자이자 타르퀸의 사위인 옥타비우스 마밀리우스가 지휘했다.[24][25][26]

최초의 두 집정관 역시 데마라투스의 후손이었다. 브루투스의 어머니는 왕의 누이였고,[27][28] 그의 동료 집정관은 에게리우스의 아들이자 루크레티아의 남편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였다.[29][30] 브루투스는 아룬스 타르퀴니우스에게 죽기 전, 콜라티누스에게 사임과 망명을 강요했는데, 이는 타르퀴니아 씨족이 로마에서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31][32]

4. 평가와 의의

데마라투스는 코린티아 출신 귀족으로, 기원전 655년경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에트루리아 문명의 도시 타르퀴니이에 정착했다.[2][3][4][1] 그는 그리스 문화를 이탈리아에 전파하고, 그의 후손들이 로마의 정치, 사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이야기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문화 교류와 정치 변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이탈리아로 가져와 그리스 문화와 도자기를 전파했으며, 코린토스에서 도공들을 데려와 이탈리아 서부 지역에서 그리스 도자기 발전에 기여했다.[5][6]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그의 아들이나 손자는 올림피아를 방문하여 헌신한 첫 외국인이었다.

4. 1. 비판적 시각

일부 역사학자들은 데마라투스에 대한 기록이 과장되었거나 신화적인 요소가 섞여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그가 에트루리아에 문자를 전파했다는 대 플리니우스와 타키투스의 주장은[5][6] 고고학적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스트라본은 그가 타르퀴니이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보고했지만,[1][7] 다른 출처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으며, 외국인의 아들인 그의 아들 루키우스가 정치 권력을 얻기 위해 로마로 이주해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 데마라투스의 후손인 타르퀴니우스 가문은 왕정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고 민중을 억압한 세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

참조

[1]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2] 서적 History of Rome
[3] 서적 Roman Antiquities
[4] 서적 De Republica
[5] 서적 Historia Naturalis
[6] 서적 Annales
[7] 서적 Strabo
[8] 서적 Livy
[9] 서적 Dionysius
[10] 서적 De Republica
[11] 서적 Livy
[12] 서적 Dionysius
[13] 서적 Livy
[14] 서적 Dionysius
[15] 서적 Livy
[16] 서적 Dionysius
[17] 서적 Livy
[18] 서적 Dionysius
[19] 서적 De Republica
[20] 서적 Livy
[21] 서적 Dionysius
[22] 서적 Livy
[23] 서적 Dionysius
[24] 서적 Livy
[25] 서적 Livy
[26] 서적 Dionysius
[27] 서적 Livy
[28] 서적 Dionysius
[29] 서적 Livy
[30] 서적 Dionysius
[31] 서적 Livy
[32] 서적 Dionys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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