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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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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미예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1706년 5월 23일에 현재 벨기에의 라밀리즈 인근에서 벌어졌다. 말버러 공작이 이끄는 동맹군이 빌레루아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는 동맹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프랑스군의 막대한 사상자 발생과 플랑드르 지역의 주요 도시 함락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전쟁의 주도권을 잃고 평화를 모색하게 되었지만, 동맹군의 내분으로 인해 전쟁은 더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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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체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라미예 전투
얀 반 휴흐텐부르흐의 라미예 전투 그림
날짜1706년 5월 23일
장소벨기에, 라미예
결과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네덜란드 공화국
잉글랜드 왕국
덴마크-노르웨이
교전국 2프랑스 왕국
바이에른 선제후국
스페인
지휘관 및 지도자
연합군말버러 공작 존 처칠
오버커크 경 헨리 드 나사우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프빌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병력 규모
연합군보병 62,000명, 대포 90문, 박격포 20문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보병 60,000명, 대포 62문
사상자 및 피해
연합군전사 1,066명, 부상 2,597명, 총 3,663–5,000명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사망/부상 13,000–15,000명, 포로 7,000 - 15,000명, 총 13,000명 - 20,000명

2. 배경

1704년 블레넘에서의 재난에 가까운 패배 이후, 프랑스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92] 말버러 공작은 모젤 계곡을 통한 프랑스 침입을 시도하여 루이 14세로 하여금 평화 조약을 맺게 하려 했으나, 이 계획은 적군과 아군의 실수로 인해 좌절되었다.[92]

말버러공작의 동맹자인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에서 다른 도박으로 인해 군대가 거의 배치되지 않은 자신들의 국경을 의식하여, 말버러 공작이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였다.[92] 더 중요한 요소는 바덴의 변경백이 다음 공격에 말버러 공작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의 외젠 공을 지원하기 위해 라인으로부터의 갑작스런 기습과 전해의 셸렌베르크의 강습으로부터 입은 다리 부상이 재발하여 바덴의 루이공의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93] 게다가 말버러 공작은 5월 황제 레오폴드 1세의 죽음에 이은 요제프 1세의 계승 역시 처리해야 했다.[93]

프랑스왕의 회복과 그의 장군들의 노력은 말버러 공작의 고민들을 가증시켰다.[94] 빌레루아 원수는 뫼즈강을 따라 네덜란드의 장군인 오버크리크를 압박하였고, 리에주를 압박하기 위해 7월 10일에는 뫼즈강의 위이를 점령하였다. 모젤에서 빌라르 원수의 우세에 의해 결정적인 보급 문제를 겪게 된 동맹군 장군은 7월 16일 전역을 취소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95] "얼마나 말버러 공의 망신일 것인가?" 빌레루아는 환성을 지르며 말했다. "아무 성과도 없이 무익한 원정을 치렀으니."[95] 말버러 공작이 북쪽으로 출발함과 동시에 빌라르 원수는 라인강으로 진군을 시작했고, 프랑스군은 이제 모젤 계곡에서 플랑드르에 있는 빌레루이의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했다.[96]

동맹군은 엘릭스하임의 성공으로 모젤 전역의 실패를 조금은 보상했다. 그리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브라반트 선을 건넜다.(위이 역시 7월 11일 탈환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게으름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찬스를 잃어버렸다.[97] 1705년은 군사적인 실패를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 비엔나, 베를린, 하노버에서의 외교적 성과로 조금 보상한 말버러 공작에게 허무한 해로 증명되었고, 이에 그는 대동맹의 지원을 증강하고 다음해에 벌어지는 전역에 대해여 즉각적인 지원을 받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98]

1706년 1월 11일, 말버러 공작은 외교 순방을 마치고 런던에 도착했지만, 이미 다음 전역을 위한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99] 첫 번째 선택은 그의 군대를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북이탈리아로 이동시켜 사보이아를 구원하고 프랑스군을 격파하기 위해 외젠 공자와 합류하는 것이었다.[99] 그러나 말버러 공작이 선호하는 것은 마르생이 최근 점령한 모젤 강으로 돌아가 프랑스 심장부로 다시 진격하는 작전이었다.[100]

동맹군 총사령관 말버러 공작 1세 존 처칠 (1650–1722) by 고드프리 넬러.


4월 14일, 말버러 공작은 네덜란드 공화국에 상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4월 19일 칼치나토에서 방돔 원수가 황제군을 격파하고, 알자스에서는 빌라르 원수가 바덴 변경백을 헤게나우(Haguenau)에서 급습하여 함락시키는 등 프랑스군이 공세를 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02][14] 이러한 움직임에 네덜란드는 이탈리아로 병력을 이동하려는 말버러 공작의 계획을 거절했다.[103] 결국, 말버러 공작은 저지대(현재의 베네룩스 3국)에서 전역을 준비하였다.[103]

2. 1. 1705년 전역의 상황

1704년 블레넘에서의 재난에 가까운 패배 이후, 프랑스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92] 말버러 공작은 모젤 계곡을 통한 프랑스 침입을 시도하여 루이 14세로 하여금 평화 조약을 맺게 하려 했으나, 이 계획은 적군과 아군의 실수로 인해 좌절되었다.[92]

말버러공작의 동맹자인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에서 다른 도박으로 인해 군대가 거의 배치되지 않은 자신들의 국경을 의식하여, 말버러 공작이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였다.[92] 더 중요한 요소는 바덴의 변경백이 다음 공격에 말버러 공작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의 외젠 공을 지원하기 위해 라인으로부터의 갑작스런 기습과 전해의 셸렌베르크의 강습으로부터 입은 다리 부상이 재발하여 바덴의 루이공의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93] 게다가 말버러 공작은 5월 황제 레오폴드 1세의 죽음에 이은 요제프 1세의 계승 역시 처리해야 했다.[93]

프랑스왕의 회복과 그의 장군들의 노력은 말버러 공작의 고민들을 가증시켰다.[94] 빌레루아 원수는 뫼즈강을 따라 네덜란드의 장군인 오버크리크를 압박하였고, 리에주를 압박하기 위해 7월 10일에는 뫼즈강의 위이를 점령하였다. 모젤에서 빌라르 원수의 우세에 의해 결정적인 보급 문제를 겪게 된 동맹군 장군은 7월 16일 전역을 취소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95] "얼마나 말버러 공의 망신일 것인가?" 빌레루아는 환성을 지르며 말했다. "아무 성과도 없이 무익한 원정을 치렀으니."[95] 말버러 공작이 북쪽으로 출발함과 동시에 빌라르 원수는 라인강으로 진군을 시작했고, 프랑스군은 이제 모젤 계곡에서 플랑드르에 있는 빌레루이의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했다.[96]

동맹군은 엘릭스하임의 성공으로 모젤 전역의 실패를 조금은 보상했다. 그리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브라반트 선을 건넜다.(위이 역시 7월 11일 탈환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게으름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찬스를 잃어버렸다.[97] 1705년은 군사적인 실패를 뒤셀도르프, 프랑크푸르트, 비엔나, 베를린, 하노버에서의 외교적 성과로 조금 보상한 말버러 공작에게 허무한 해로 증명되었고, 이에 그는 대동맹의 지원을 증강하고 다음해에 벌어지는 전역에 대해여 즉각적인 지원을 받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98]

2. 2. 1706년 전역의 시작

1706년 1월 11일, 말버러 공작은 외교 순방을 마치고 런던에 도착했지만, 이미 다음 전역을 위한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99] 첫 번째 선택은 그의 군대를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북이탈리아로 이동시켜 사보이아를 구원하고 프랑스군을 격파하기 위해 외젠 공자와 합류하는 것이었다.[99] 그러나 말버러 공작이 선호하는 것은 마르생이 최근 점령한 모젤 강으로 돌아가 프랑스 심장부로 다시 진격하는 작전이었다.[100]

4월 14일, 말버러 공작은 네덜란드 공화국에 상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4월 19일 칼치나토에서 방돔 원수가 황제군을 격파하고, 알자스에서는 빌라르 원수가 바덴 변경백을 헤게나우(Haguenau)에서 급습하여 함락시키는 등 프랑스군이 공세를 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02][14] 이러한 움직임에 네덜란드는 이탈리아로 병력을 이동하려는 말버러 공작의 계획을 거절했다.[103] 결국, 말버러 공작은 저지대(현재의 베네룩스 3국)에서 전역을 준비하였다.[10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저지대 지도. 라밀리즈 마을은 뫼즈 강의 지류인 메앙 강 근처에 있다.


5월 9일 말버러 공작은 헤이그를 출발하여, 5월 17일 마스트리흐트 근처 통거런에 네덜란드와 영국군을 집결시켰다.[14] 하지만 하노버, 헤세, 덴마크 군은 지원을 거부했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주주총회와의 분쟁으로 군대를 라인 강 뒤편에 주둔시켰다.[14][18]

마이클 달(Michael Dahl)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존 처칠, 말보로 공작 1세'' (1650–1722)


루이 14세는 현장에서 승리하여 동맹국들에게 그의 자원이 고갈되지 않았음을 확신시키려 했다.[19] 이탈리아와 라인 강을 따라 거둔 승리에 이어, 루이 14세는 플랑드르에서도 유사한 결과를 기대했다.[20] 5월 18일, 빌레루아는 뢰번에서 70개 대대, 132개 기병대, 62문의 대포를 이끌고 디일 강을 건너 적과 싸우려 했다.[21]

양측 모두 충돌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22] 프랑스군은 티넨으로 이동하여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도앵으로 향했는데, 이 행군은 빌레루아의 군대를 라밀리즈와 타비에르의 작은 마을 근처 메앙 강과 쁘띠 게트 강 사이의 좁은 지역으로 이끌었다.[22] 말보로는 빌레루아가 조도앵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빌레루아는 이미 라밀리즈 근처에 진을 치려는 의도로 생트 앙드레 산 정상에 접근하고 있었다.[22]

다음 날 오전 1시, 말보로는 그의 사령관인 캐도건을 선발대와 함께 파견하여 정찰하도록 했다.[24] 오전 8시경, 캐도건 부대는 프랑스 후사르 부대와 짧은 총격전을 벌인 후 전진했다.[24] 안개가 잠시 걷히자 캐도건은 약 6km 떨어진 곳에 빌레루아 선발대의 정돈된 대열을 발견했다. 두 시간 후, 말보로는 오버커크 원수 등과 함께 캐도건에게 와서 서쪽 지평선에서 약 6km 전선을 따라 전투를 위해 배치되고 있는 프랑스 군대의 대열을 식별할 수 있었다.[24]

3. 전투

5월 9일 헤이그를 떠난 말버러 공작은 6일 후 영국에서 그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맹자인 고돌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무엇인가 중요한 어떤 것을 할 희망이 없네. 만약 프랑스가 내가 그들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확신하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는 한 말일세."라고 토로했다.[104] 5월 17일 말버러 공작은 마스트리히트 근처 통게렌(Tongeren)에 네덜란드-영국 동맹군을 집결시켰다. 하노버인, 헤센인, 덴마크인은 일찍 지원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늦추는 다양한 이유를 찾거나 만들거나, 말했다.[102] 말버러 공작은 덴마크 군대의 사령관인 뷔르템베르크 공작에게 "저는 전하께서 기병들을 이끌고 저희와 일찍 합류하기 위해 빠르게 행군하실것을 바라는 이런 전언을 드립니다."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썼다.[105] 프로이센의 왕은 비엔나에서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그의 군대를 라인강의 뒤편에 주둔하고 있었고, 헤이그에 있는 네덜란드 국회의 문제는 여전히 안 풀리고 있었다. [106]

생-시몽 공작 루이 드 루브루아(Louis de Rouvroy duc de Saint-Simon)에 따르면 5월 18일, 빌레루아는 루바인(Louvain)을 떠나 70개의 보병 대대와 132개의 기병 대대, 62문의 포로 구성된 총 60,000명이 넘는 군세를 이끌고 딜레(Dyle)강을 건너 전투를 벌일 적을 찾기 시작했다.[107]

양측 모두 어느 순간 전투가 벌어지고 어디서 전투가 일어날 지 예상치 못했다.[108] 프랑스군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아 저도이겐(Judoigne)을 향하기 전에는 틸레몽(Tirlemont)으로 움직였다. 이러한 행군은 빌레루아의 군대로 하여금 라미예와 타비에르(Taviers)의 작은 마을 근처에 있는 메하인(Mehaigne)과 페티테 키테(Petite Gheete)강 사이의 마른 땅의 좁은 균열지대로 향하게 하였다. 빌레루아는 5월 22일에도 여전히 동맹군이 코르스와렌(Corswaren) 근처에서 그들을 따라잡으려는 덴마크 기병대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하루 동안 쭉 행군을 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이에 말버러 공작은 빌레루아가 실제로는 라미예 근처의 진영을 설치할 준비를 하면서 생 안드레(St. André)산의 고원으로 접근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이 아직도 저도이겐에 있다고 예측하고 있었다[108]

다음날 1시, 말버러 공작은 그의 병참사령관 케도건을 급파하여 빌레루아가 진군하고 있는 같은 마른 땅으로 정찰을 하도록 하였는데, 이 지역은 전년의 전역으로 공작이 잘 알던 곳이었다. 2시간 후에 말버러 공작은 74개의 보병대대 123개의 기병대대, 90문의 포와 20대의 박격포로 구성된 총 62,000명의 대군세를 이끌고 케도건을 따랐다.[109] 8시경, 케도건이 메르도르프(Merdorp)를 막 지난 후에, 그의 군대는 잔드레노윌레(Jandrenouille)의 고원 외각지대에서 마초를 모으던 프랑스 경기병(후사르)대의 일부와 마주치게 되었다. 얼마간의 총격전 교환 이후, 프랑스군은 퇴각했고, 동맹군 용기병(드라군)대는 정면으로 진군했다. 안개 속에서의 짧은 탐색을 통해 케도건은 빌레루아의 잘 정렬한 정찰부대가 6km 밖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령장교가 말버러공작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급파되었다. 2시간 후에 네덜란드 야전 사령관 오버크리크, 다니엘 도프(Daniel Dopff) 그리고 다른 동맹군 장교들과 함께 있던 말버러 공작은 케도건이 있는 곳까지 말을 달려서, 서쪽 지평선과 함께 프랑스의 대군세가 6.4km밖에서 전쟁을 위해 전열을 준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109]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 프랑스 원수 (1644–1730) 알렉상드르-프랑수아 카미나드 작. 람일리 전투는 빌레루아의 마지막 지휘였다.


라미예의 전장은 블레넘의 전장과 비슷한데, 이곳에는 나무와 잡목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광대한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다.[110] 빌레루아의 우익은 메하인 강이 그들의 외각을 보호해주는 타비에르와 프랑퀴니(Franquenée) 마을에서 쉬고 있었다. 약 2km정도 되는 광대한 넓은 평원이 타비에르와 라미예 사이에 펼쳐져 있었다. 중앙에는 라미예 그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북쪽과 남쪽이 멀리서 보이는 고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프랑스군의 우익은 부서진 마을과 경사를 깊게 달리는 페티테 키테의 강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강물의 프랑스 측은 아우트 에글리스(Autre-Église)의 북쪽 너머에 있고 빌레루아의 우익에 자리 잡은 오프스(Offus)의 마을로 뻗었다. 페티테 키테의 서쪽은 생 안드레의 고원으로 향했다. 잔들레누일레의 고원에 있는 두 번째 평원은 동맹군이 집결해 있었는데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110]

1706년 5월 23일 오전 11시경, 말버러 공작은 군대에 표준 전투 대형을 취하도록 명령했다.[111] 최우익에는 영국 보병대대와 기병대대가 풀츠(Foulz)를 향해 제우체(Jeuche)강 근처에 2열로 배치되어 수비를 강화했다. 중앙에는 네덜란드, 독일, 프로테스탄트 스위스, 스코틀랜드 보병대(약 30,000명)가 오푸스와 라미예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배치되었다. 말버러 공작은 라미예 앞에 24파운드짜리 30문의 강력한 포병대를 배치하고, 오센(oxen) 부대를 동원하여 이 위치에 배치했다. 추가 포병대는 페티테 기테(Petite Gete)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배치되었다. 좌익에는 타비에르와 라미예 사이의 넓은 평원이 있었는데, 말보로 공작은 이곳에서 결정적인 교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111][27] 이곳에는 오버크리크가 69개의 네덜란드, 덴마크 기병대로 구성된 기병대대가 네덜란드의 19개 보병대대와 2개의 포병부대의 지원을 받으며 배치되었다.[112][28]

1706년 5월 23일 라미예 전투에서 최초 배치. 남쪽의 타비에르와 라미예 사이에 양쪽 지휘관은 기병대의 대부분을 배치했다. 말버러는 이곳을 돌파구로 삼으려 한다.


조제프 비비엥이 그린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1662–1726)


한편, 빌레루아 공작 역시 군대를 배치했다. 우익의 타비에르에는 프란퀴니(Franquenée)에 소규모 부대를 배치하고, 그레데르 수이세 연대(Greder Suisse Régiment)의 2개 보병대대를 배치했다. 이 위치는 메하인 강의 늪지대에 의해 보호되어 동맹군의 우회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113][29] 타비에르와 라미예 사이의 개방된 지역에는 드 구이스카르(de Guiscard) 휘하의 82개 기병대대를 배치하고, 프랑스, 스위스, 바이에른 보병으로 구성된 프랑스 보병대의 지원을 받게 했다. 라미예와 오푸스, 오트레 에글리스(Autre-Eglise)의 산등성이를 따라 빌레루아는 왈룬(Walloon)과 바이에른 보병대를 바이에른의 선제후 휘하의 바이에른과 왈룬의 50개 기병대대를 생 안드레(Saint-André) 산 위의 고원 뒤에 배치하여 지원하게 하였다. 라미예와 오푸스, 오트레 에클리스의 길은 바리케이트가 쳐졌고, 벽은 머스킷 총안을 갖춘 방어선으로 보호되었다.[114][30] 빌레루아는 또 라미예 근교에 강력한 포병대를 배치하였다. 이 포병대는(전년의 엘릭스하임에서 봤던 세 개의 같은 종류의 것) 동맹군 보병대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잔드레노윌레(Jandrenouille) 고원에의 접근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군의 배치에 몇 가지 중대한 약점을 발견하였다.[115][31] 전술적으로 빌레루아가 우익의 타비에르와 좌익의 오트레-에글리스 지역을 차지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으나, 지나치게 부대를 확장하여 배치하였다.[116][32] 게다가 이 배치는 동맹군에 대하여 오목한 모양이었는데, 말버러 공작에게 프랑스 초승달 진영 뿔들 사이를 좀 더 끌어들일 수 있는 촘촘한 전열을 구성할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동맹군이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면, 좀 더 집중적이고 강하게 공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덧붙여, 말버러 공작의 배치는 그의 적보다 더 쉽게 전위를 넘어 이동할 수 있었고, 이러한 전술적 이점은 점심쯤에 전개되는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16][32] 빌레루아는 잔드레뉠레의 고원을 점령했을 때(동맹군의 외원을 위협하며) 동맹군의 우익을 점령하는 선택도 있었으나,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 사령관의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산등성이를 따라 방어적인 전투를 벌일 것이라고 예상하였다.[117][33]

13시경 포병대는 행동을 개시했다.[118] 얼마 후 연합군의 두 기둥이 전선 양쪽 끝에서 출발하여 프랑코-바이에른 군의 측면을 공격했다.[34] 남쪽에서는 벨트뮬러(Wertmüller) 대령의 지휘 아래 네덜란드 부대의 4개 대대(프리지아 근위대 2개 대대와 슬랑겐부르크, 샐리시 대대)가 야포 2문과 함께 프랑켄네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했습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마을의 소규모 스위스 수비대는 후방 대대의 지원 없이 곧 타비에르 마을 쪽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타비에르는 프랑코-바이에른군의 위치에 있어 특히 중요했다. 그곳은 평야에 있는 기스카르 장군의 기병대의 지원받지 못하는 측면을 보호하는 동시에 프랑스 보병이 진격하는 네덜란드와 덴마크 기병대의 측면을 위협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35] 그러나 후퇴하는 스위스군이 그 마을에서 동료들과 합류하자마자 네덜란드 근위대는 공격을 재개했다. 골목길과 오두막 사이의 전투는 격렬한 총검과 곤봉 난투극으로 변했지만, 네덜란드군의 화력 우세가 곧 효과를 발휘했다. 근처 평야에 서 있던 노련한 프랑스 장교 콜로니 대령은 이렇게 회상했다. "이 마을은 전투의 시작이었고, 그곳에서의 전투는 나머지 전투 전체를 합친 것만큼이나 치명적이었습니다."[36] 15시경 스위스군은 마을에서 쫓겨나 저 너머 습지로 밀려났다.

빌레루아의 우익은 혼란에 빠졌고, 개방된 상태에 공격받기까지 쉽게 되었다.[37] 상황을 알게 된 기스카르는 후방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용기병 14개 기병대의 즉각적인 공격을 명령했다. 그레데르 스위스 연대의 다른 두 개 대대도 파견되었지만, 공격은 부족하게 조정되어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영국-네덜란드 사령관들은 타비에르에 네덜란드 용기병들을 해체시켜 보냈고, 그들은 근위대와 야포와 함께 진격하는 프랑스군에게 집중적인 소총 사격과 포탄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연대를 이끌던 도비니 대령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38]

오크니 백작 1세 조지 해밀턴 (1666–1737) by Martin Maingaud. 그는 직접 영국 보병대를 지휘하여 오푸스와 오트레-에글리스를 공격했다.


프랑스군의 대열이 흔들리자, 이제 양쪽 마을에서 적의 사격을 받지 않게 된뷔르템베르크의 덴마크 기병대의 선두 기병대도 공격에 투입되어 프랑코-스위스 보병과 용기병의 노출된 측면을 공격했다.[39] 람일리 남쪽 그의 위치에서 콜로니는 그의 그레나디어 루주 연대와 그들과 함께 여단을 편성한 쾰른 근위대와 함께 마을에 대한 흔들리는 반격을 지원하기 위해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내 군대가 도착하자마자 우리보다 먼저 온 용기병과 스위스군이 완전히 도주하며 내 대대 위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나의 병사들도 뒤돌아서 그들과 함께 도망쳤다."[38] 콜로니는 일부 그레나디어와 프랑스 용기병과 그레데르 스위스 대대의 잔여 병력을 수습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주변적인 작전이었고 빌레루아의 우측 측면에 취약한 지원만 제공했다.[40]

타비에르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오크니 백작은 쁘띠 지트 강을 건너 연합군 우익에 위치한 오퓌스와 오트레글리즈 마을의 방어선을 향해 영국군 제1선을 과감하게 공격했다. 빌레루아는 적군의 진격을 불안하게 지켜보며, 5월 6일 루이 14세로부터 받은 "영국군의 첫 번째 충격을 받게 될 전선 부분에 특별히 주의하십시오."라는 조언을 명심하고 있었다.[34] 이 조언에 따라 프랑스 사령관은 중앙에서 대대를 옮겨 좌익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이미 약화된 우익에서 더 많은 보병을 끌어와 이들을 대체했다.[39]

영국 대대가 쁘띠 지트 계곡의 완만한 경사면을 내려와 진흙탕 개울을 헤치며 진격하자, 오퓌스 주변에서 전진해 온 라 기슈(de la Guiche) 소장의 훈련된 발롱(Walloon) 보병이 그들을 맞이했다. 집중적인 사격으로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발롱 보병은 질서정연하게 고지선으로 후퇴했다. 영국군은 개울 너머 건조한 지면에서 대열을 재정비하는 데 시간을 보낸 후, 고지 위의 오두막과 방어선을 향해 진격했다.[41] 그러나 영국군의 강력한 공격은 마을 방어선을 돌파하고 몽 생드레(Mont St André) 고원으로 진출할 위협이 되었다. 이는 고원에서 선발대 이동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선제후의 바이에른과 발롱 기병대의 사정권에 연합군 보병이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했다.[42]

헨리 룸리(Henry Lumley)의 영국 기병대가 쁘띠 지트 주변의 습지대를 건너는 데 성공했지만, 말보로에게 충분한 기병 지원은 불가능하며 연합군 우익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43] 따라서 공작은 오퓌스와 오트레글리즈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켰다. 오크니가 철수 명령에 따르도록 하기 위해, 말보로는 직접 사령부 감찰관을 파견했다. 오크니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캐도건은 명령을 고집했고, 마지못해 오크니는 군대가 잔드르누이(Jandrenouille) 고원 가장자리의 원래 위치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9]

1706년 람일리 전투의 군마. 작자 미상


한편, 람일리에 대한 네덜란드군의 공격은 속도를 내고 있었다. 말보로 공작의 동생이자 보병대장인 찰스 처칠은 4개의 보병 여단에게 마을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공격은 숄텐과 스파레 소장이 지휘하는 12개 대대의 네덜란드 보병, 슐렌부르크 백작 휘하의 2개 사단의 작센 군, 2대 아가일 공작이 이끄는 네덜란드군 소속 스코틀랜드 여단, 그리고 소규모 프로테스탄트 스위스 여단으로 구성되었다.[45] 람일리에 있던 20개 대대의 프랑스와 바이에른군은, 야생 거위의 비행에서 아일랜드를 떠나 클레어 용기병에 합류하여 보병으로 싸우고 영국 제3 보병 연대로부터 군기를 빼앗은 아일랜드인들과 마페이 후작 휘하의 콜로뉴와 바이에른 근위대 소규모 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처음에는 공격자들을 격렬하게 몰아내고 큰 손실을 입혔다.[46]

숄텐과 스파레가 주춤하는 것을 본 말보로 공작은 이제 오키니 휘하의 2선 영국과 덴마크 대대(오퓨스와 오트르-에글리즈 공격에 사용되지 않은)에게 남쪽으로 람일리 방향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약간의 지형의 굴곡으로 관측에서 차폐된 그들의 지휘관인 반 팔란트 준장은 적에게 그들이 여전히 초기 위치에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 연대 군기를 고원 가장자리에 그대로 두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페티트 게트 반대편에 있는 연합군의 실제 전력과 의도를 알지 못하는 프랑스군은, 말보로 공작이 자신의 모든 병력을 람일리와 남쪽의 평야에 집중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편, 빌레로이 장군은 여전히 더 많은 보병 예비대를 좌익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프랑스 지휘관이 연합군 배치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47]

오버커크 백작, 헨리크 폰 나소


15시 30분경, 오버크리크는 람일리에 대한 보병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기병 중대를 평야로 진격시켰다. 틸리 백작과 옴페슈 중장, 도베르뉴, 오스트프리슬란트, 도프 등이 이끄는 48개 중대의 네덜란드 기병과 21개 중대의 덴마크 기병은 (말을 조기에 지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적을 향해 꾸준히 전진한 후, 돌격의 기세를 얻기 위해 속보로 전환했다.[48] 전투 후에 글을 쓴 푀키에르 후작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4열로 전진했다… 그들이 접근하면서 그들은 두 번째와 네 번째 열을 첫 번째와 세 번째 열의 간격으로 진출시켰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향해 진격할 때, 그들은 어떤 중간 공간도 없이 하나의 전선만을 형성했다."[49]

초기 충돌은 네덜란드와 덴마크 기병 중대에게 유리했다. 좌익을 강화하기 위해 보병을 빼앗긴 빌레로이 장군의 행동으로 인한 수적 열세는 오버커크의 기병이 프랑스 기병의 첫 번째 선을 어수선하게 두 번째 선으로 몰아낼 수 있게 했다. 이 선도 심한 압박을 받아 세 번째 선의 기병과 평야에 남아 있는 소수의 대대로 밀려났다.[50] 그러나 이 프랑스 기병들은 루이 14세 군대 중 최고였으며, ''왕가 가정'',[51] 바이에른 퀴라시에 정예 중대 4개의 지원을 받았다. 드 기스카르의 능숙한 지휘 아래, 프랑스 기병은 재정비하여 성공적인 지역 반격으로 연합군 기병 중대를 몰아냈다.[52] 오버커크의 우익, 람일리 근처에서 그의 10개 중대가 갑자기 대열을 이탈하여 후방으로 흩어져 질서를 회복하려고 했고, 람일리에 대한 연합군 공격의 좌익을 위험하게 노출시켰다. 보병 지원 부족에도 불구하고, 드 기스카르는 연합군을 두 동강으로 나누려고 기병을 전진시켰다.

람일리 전투


중앙에 위기가 닥쳤지만, 유리한 위치에 있던 말보로 공작은 즉시 상황을 인지했다.[43] 연합군 사령관은 이제 우익 기병을 중앙으로 증원하기 위해 소집했고, 오키니를 지원하는 것은 영국 기병 중대만 남았다. 전투 연기와 유리한 지형의 조합 덕분에 그의 재배치는 50개의 미사용 기병 중대를 전혀 이동시키려 하지 않은 빌레로이 장군에게 눈에 띄지 않았다.[43] 말보로 공작은 신선한 증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혼란에 빠진 네덜란드 기병 일부를 재정비하며 난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개입은 거의 그의 몰락으로 이어질 뻔했다. 공작을 알아본 여러 프랑스 기병이 그의 일행을 향해 쇄도했다. 말보로 공작의 말이 넘어졌고 공작은 떨어졌다."밀로드 말보로는 떨어졌다"라고 오키니는 나중에 썼다.[53] 이것은 전투의 중대한 순간이었다. 한 목격자는 "머레이 소장은… 그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고 길을 막아서고 있던 적을 저지하기 위해 서둘러 두 개의 스위스 대대를 이끌고 진군했다"고 회상했다.[54] 다행히 말보로 공작의 새로 임명된 부관인 리처드 몰즈워스가 구출을 위해 돌격해 공작을 그의 말에 태워 탈출했고, 머레이의 훈련된 대대가 추격하는 프랑스 기병을 물리쳤다.[54]

다이아몬드 10 카드: 전장에서 목이 떨어져 나간 대령.


잠시 후, 말보로 공작의 마구간장인 브링필드(또는 빙필드) 대령이 또 다른 공작의 예비마를 이끌고 왔지만, 그를 말에 태우는 것을 돕는 동안 불행한 브링필드는 길을 잃은 대포알에 맞아 머리가 잘려 나갔다. 한 기록에 따르면 대포알은 총사령관의 다리 사이를 지나 불운한 대령에게 맞았고, 그의 몸통은 말보로 공작의 발치에 떨어졌다그 순간은 나중에 당시의 선정적인 카드 게임에 묘사되었다.[5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은 지나갔고, 오버커크와 틸리는 혼란에 빠진 기병 중대들 사이에 질서를 회복하고 다시 공격하도록 명령하여 공작이 우익에서 내려오는 기병 증원군의 배치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빌레로이 장군은 이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55]

오후 4시 30분경, 양군은 남쪽 습지에서의 소규모 충돌에서부터 평원에서의 대규모 기병전, 중앙부 라밀리에서의 치열한 싸움, 그리고 북쪽 오퓨스와 오트르에글리즈의 오두막 주변에서 오크니와 드 라 기슈가 쁘띠 지트 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곳까지 약 6km에 달하는 전선 전체에 걸쳐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었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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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기병대간의 격돌.


이동한 기병대의 도착은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균형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쳐가고 사상자도 늘어나면서 평원에서 싸우고 있는 기스카르 기병대의 수적 열세가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했다.[57] 프랑퀴니와 타비에르를 재점령하지 못한 후, 기스카르의 우익은 위험하게 노출되었고, 전열 오른쪽에 치명적인 틈이 생겼다. 뷔르템베르크의 덴마크 기병대는 이 틈을 이용하여 전진하여 돌격하여, 네덜란드군을 저지하는 데 거의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왕립 근위대의 측면을 돌파했다. 사실상 아무런 저항 없이 전진한 21개 덴마크 기병대는 오토몽드의 무덤 주변의 프랑스군 뒤편에 재편성하여, 몽 생드레 고원을 가로질러 북쪽을 향해 빌레로이 군대의 노출된 측면을 향했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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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기병전에 대한 마지막 연합군 증원부대가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 말버러 공작의 좌익 우세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고, 그의 신속한 작전 계획이 전장을 장악했다. 너무 늦었지만, 빌레루아는 사용하지 않은 50개의 기병대를 재배치하려고 했지만, 오퓨스에서 몽 생드레까지 이어지는 남쪽을 향한 전열 형성을 위한 필사적인 시도는 초기 배치 후 부주의하게 남겨진 프랑스 진영의 수하물과 천막 사이에서 실패했다.[59] 연합군 사령관은 이제 수적으로 열세인 프랑스와 바이에른 기병대에 대해 기병대의 전진을 명령했다. 적절한 보병 지원 없이 기스카르의 우익은 더 이상 공격을 견딜 수 없었고, 말을 북쪽으로 돌려 완전히 혼란 속에 붕괴되어 도망쳤다.[60] 라밀리 뒤편에서 빌레루아가 급히 모으고 있던 기병대조차도 공격을 견딜 수 없었다.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던 아일랜드인 피터 드레이크 대위는 "우리는 후퇴하면서 40야드도 가지 못했습니다. '도망쳐라'라는 말이 군대의 대부분, 아니면 전체 군대에 퍼지면서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라고 회상했다.[61]

혼란이 커질대로 커진 프랑스-바이에른 군대는 지휘관을 따라 퇴각하기 시작한다.


라밀리에서 북쪽에서 내려온 영국군으로 강화된 연합군 보병은 마침내 돌파했다. 피카르디 연대는 자리를 지켰지만, 보스윅 대령의 스코틀랜드-네덜란드 연대와 영국 증원군 사이에 끼였다. 보스윅은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던 아일랜드인 클레어 자작 찰스 오브라이언과 함께 전사했다.[62] 마페이 후작은 바이에른과 쾰른 근위대와 함께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지만 헛수고였다. 남쪽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기병대의 돌격을 알아차리고 나중에 그는 "... 나는 그 기병대 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서 장교에게 지시를 내렸지만, 내 말을 들어주는 대신 즉시 포위되어 항복을 요구받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63]

북쪽과 서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크니는 그의 영국군을 다시 페티트 지트 강 너머로 돌려 보내 오푸스를 다시 공격하게 했는데, 혼란 속에서 드 라 기슈의 보병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64] 보병대의 오른쪽에는 존 헤이 경의 스코츠 그레이스도 강을 건너 아우트레에글리즈 내에서 로이 연대를 공격했다. 존 디인은 "우리 용기병들은 마을로 진격하여... 적들을 끔찍하게 학살

3. 1. 초기 배치

1706년 5월 23일 오전 11시경, 말버러 공작은 군대에 표준 전투 대형을 취하도록 명령했다.[111] 최우익에는 영국 보병대대와 기병대대가 풀츠(Foulz)를 향해 제우체(Jeuche)강 근처에 2열로 배치되어 수비를 강화했다. 중앙에는 네덜란드, 독일, 프로테스탄트 스위스, 스코틀랜드 보병대(약 30,000명)가 오푸스와 라미예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배치되었다. 말버러 공작은 라미예 앞에 24파운드짜리 30문의 강력한 포병대를 배치하고, 오센(oxen) 부대를 동원하여 이 위치에 배치했다. 추가 포병대는 페티테 기테(Petite Gete)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배치되었다. 좌익에는 타비에르와 라미예 사이의 넓은 평원이 있었는데, 말보로 공작은 이곳에서 결정적인 교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111][27] 이곳에는 오버크리크가 69개의 네덜란드, 덴마크 기병대로 구성된 기병대대가 네덜란드의 19개 보병대대와 2개의 포병부대의 지원을 받으며 배치되었다.[112][28]

한편, 빌레루아 공작 역시 군대를 배치했다. 우익의 타비에르에는 프란퀴니(Franquenée)에 소규모 부대를 배치하고, 그레데르 수이세 연대(Greder Suisse Régiment)의 2개 보병대대를 배치했다. 이 위치는 메하인 강의 늪지대에 의해 보호되어 동맹군의 우회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113][29] 타비에르와 라미예 사이의 개방된 지역에는 드 구이스카르(de Guiscard) 휘하의 82개 기병대대를 배치하고, 프랑스, 스위스, 바이에른 보병으로 구성된 프랑스 보병대의 지원을 받게 했다. 라미예와 오푸스, 오트레 에글리스(Autre-Eglise)의 산등성이를 따라 빌레루아는 왈룬(Walloon)과 바이에른 보병대를 바이에른의 선제후 휘하의 바이에른과 왈룬의 50개 기병대대를 생 안드레(Saint-André) 산 위의 고원 뒤에 배치하여 지원하게 하였다. 라미예와 오푸스, 오트레 에클리스의 길은 바리케이트가 쳐졌고, 벽은 머스킷 총안을 갖춘 방어선으로 보호되었다.[114][30] 빌레루아는 또 라미예 근교에 강력한 포병대를 배치하였다. 이 포병대는(전년의 엘릭스하임에서 봤던 세 개의 같은 종류의 것) 동맹군 보병대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잔드레노윌레(Jandrenouille) 고원에의 접근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군의 배치에 몇 가지 중대한 약점을 발견하였다.[115][31] 전술적으로 빌레루아가 우익의 타비에르와 좌익의 오트레-에글리스 지역을 차지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으나, 지나치게 부대를 확장하여 배치하였다.[116][32] 게다가 이 배치는 동맹군에 대하여 오목한 모양이었는데, 말버러 공작에게 프랑스 초승달 진영 뿔들 사이를 좀 더 끌어들일 수 있는 촘촘한 전열을 구성할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동맹군이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면, 좀 더 집중적이고 강하게 공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덧붙여, 말버러 공작의 배치는 그의 적보다 더 쉽게 전위를 넘어 이동할 수 있었고, 이러한 전술적 이점은 점심쯤에 전개되는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16][32] 빌레루아는 잔드레뉠레의 고원을 점령했을 때(동맹군의 외원을 위협하며) 동맹군의 우익을 점령하는 선택도 있었으나,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 사령관의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산등성이를 따라 방어적인 전투를 벌일 것이라고 예상하였다.[117][33]

3. 2. 전개

5월 9일 헤이그를 떠난 말버러 공작은 6일 후 영국에서 그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맹자인 고돌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무엇인가 중요한 어떤 것을 할 희망이 없네. 만약 프랑스가 내가 그들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확신하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는 한 말일세."라고 토로했다.[104] 5월 17일 말버러 공작은 마스트리히트 근처 통게렌(Tongeren)에 네덜란드-영국 동맹군을 집결시켰다. 하노버인, 헤센인, 덴마크인은 일찍 지원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늦추는 다양한 이유를 찾거나 만들거나, 말했다.[102] 말버러 공작은 덴마크 군대의 사령관인 뷔르템베르크 공작에게 "저는 전하께서 기병들을 이끌고 저희와 일찍 합류하기 위해 빠르게 행군하실것을 바라는 이런 전언을 드립니다."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썼다.[105] 프로이센의 왕은 비엔나에서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그의 군대를 라인강의 뒤편에 주둔하고 있었고, 헤이그에 있는 네덜란드 국회의 문제는 여전히 안 풀리고 있었다. [106]

생-시몽 공작 루이 드 루브루아(Louis de Rouvroy duc de Saint-Simon)에 따르면 5월 18일, 빌레루아는 루바인(Louvain)을 떠나 70개의 보병 대대와 132개의 기병 대대, 62문의 포로 구성된 총 60,000명이 넘는 군세를 이끌고 딜레(Dyle)강을 건너 전투를 벌일 적을 찾기 시작했다.[107]

양측 모두 어느 순간 전투가 벌어지고 어디서 전투가 일어날 지 예상치 못했다.[108] 프랑스군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아 저도이겐(Judoigne)을 향하기 전에는 틸레몽(Tirlemont)으로 움직였다. 이러한 행군은 빌레루아의 군대로 하여금 라미예와 타비에르(Taviers)의 작은 마을 근처에 있는 메하인(Mehaigne)과 페티테 키테(Petite Gheete)강 사이의 마른 땅의 좁은 균열지대로 향하게 하였다. 빌레루아는 5월 22일에도 여전히 동맹군이 코르스와렌(Corswaren) 근처에서 그들을 따라잡으려는 덴마크 기병대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하루 동안 쭉 행군을 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이에 말버러 공작은 빌레루아가 실제로는 라미예 근처의 진영을 설치할 준비를 하면서 생 안드레(St. André)산의 고원으로 접근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이 아직도 저도이겐에 있다고 예측하고 있었다[108]

다음날 1시, 말버러 공작은 그의 병참사령관 케도건을 급파하여 빌레루아가 진군하고 있는 같은 마른 땅으로 정찰을 하도록 하였는데, 이 지역은 전년의 전역으로 공작이 잘 알던 곳이었다. 2시간 후에 말버러 공작은 74개의 보병대대 123개의 기병대대, 90문의 포와 20대의 박격포로 구성된 총 62,000명의 대군세를 이끌고 케도건을 따랐다.[109] 8시경, 케도건이 메르도르프(Merdorp)를 막 지난 후에, 그의 군대는 잔드레노윌레(Jandrenouille)의 고원 외각지대에서 마초를 모으던 프랑스 경기병(후사르)대의 일부와 마주치게 되었다. 얼마간의 총격전 교환 이후, 프랑스군은 퇴각했고, 동맹군 용기병(드라군)대는 정면으로 진군했다. 안개 속에서의 짧은 탐색을 통해 케도건은 빌레루아의 잘 정렬한 정찰부대가 6km 밖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령장교가 말버러공작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급파되었다. 2시간 후에 네덜란드 야전 사령관 오버크리크, 다니엘 도프(Daniel Dopff) 그리고 다른 동맹군 장교들과 함께 있던 말버러 공작은 케도건이 있는 곳까지 말을 달려서, 서쪽 지평선과 함께 프랑스의 대군세가 6.4km밖에서 전쟁을 위해 전열을 준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109]

라미예의 전장은 블레넘의 전장과 비슷한데, 이곳에는 나무와 잡목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광대한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다.[110] 빌레루아의 우익은 메하인 강이 그들의 외각을 보호해주는 타비에르와 프랑퀴니(Franquenée) 마을에서 쉬고 있었다. 약 2km정도 되는 광대한 넓은 평원이 타비에르와 라미예 사이에 펼쳐져 있었다. 중앙에는 라미예 그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북쪽과 남쪽이 멀리서 보이는 고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프랑스군의 우익은 부서진 마을과 경사를 깊게 달리는 페티테 키테의 강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강물의 프랑스 측은 아우트 에글리스(Autre-Église)의 북쪽 너머에 있고 빌레루아의 우익에 자리 잡은 오프스(Offus)의 마을로 뻗었다. 페티테 키테의 서쪽은 생 안드레의 고원으로 향했다. 잔들레누일레의 고원에 있는 두 번째 평원은 동맹군이 집결해 있었는데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110]

13시경 포병대는 행동을 개시했다.[118] 얼마 후 연합군의 두 기둥이 전선 양쪽 끝에서 출발하여 프랑코-바이에른 군의 측면을 공격했다.[34] 남쪽에서는 벨트뮬러(Wertmüller) 대령의 지휘 아래 네덜란드 부대의 4개 대대(프리지아 근위대 2개 대대와 슬랑겐부르크, 샐리시 대대)가 야포 2문과 함께 프랑켄네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했습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마을의 소규모 스위스 수비대는 후방 대대의 지원 없이 곧 타비에르 마을 쪽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타비에르는 프랑코-바이에른군의 위치에 있어 특히 중요했다. 그곳은 평야에 있는 기스카르 장군의 기병대의 지원받지 못하는 측면을 보호하는 동시에 프랑스 보병이 진격하는 네덜란드와 덴마크 기병대의 측면을 위협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35] 그러나 후퇴하는 스위스군이 그 마을에서 동료들과 합류하자마자 네덜란드 근위대는 공격을 재개했다. 골목길과 오두막 사이의 전투는 격렬한 총검과 곤봉 난투극으로 변했지만, 네덜란드군의 화력 우세가 곧 효과를 발휘했다. 근처 평야에 서 있던 노련한 프랑스 장교 콜로니 대령은 이렇게 회상했다. "이 마을은 전투의 시작이었고, 그곳에서의 전투는 나머지 전투 전체를 합친 것만큼이나 치명적이었습니다."[36] 15시경 스위스군은 마을에서 쫓겨나 저 너머 습지로 밀려났다.

빌레루아의 우익은 혼란에 빠졌고, 개방된 상태에 공격받기까지 쉽게 되었다.[37] 상황을 알게 된 기스카르는 후방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용기병 14개 기병대의 즉각적인 공격을 명령했다. 그레데르 스위스 연대의 다른 두 개 대대도 파견되었지만, 공격은 부족하게 조정되어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영국-네덜란드 사령관들은 타비에르에 네덜란드 용기병들을 해체시켜 보냈고, 그들은 근위대와 야포와 함께 진격하는 프랑스군에게 집중적인 소총 사격과 포탄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연대를 이끌던 도비니 대령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38]

프랑스군의 대열이 흔들리자, 이제 양쪽 마을에서 적의 사격을 받지 않게 된뷔르템베르크의 덴마크 기병대의 선두 기병대도 공격에 투입되어 프랑코-스위스 보병과 용기병의 노출된 측면을 공격했다.[39] 람일리 남쪽 그의 위치에서 콜로니는 그의 그레나디어 루주 연대와 그들과 함께 여단을 편성한 쾰른 근위대와 함께 마을에 대한 흔들리는 반격을 지원하기 위해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내 군대가 도착하자마자 우리보다 먼저 온 용기병과 스위스군이 완전히 도주하며 내 대대 위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나의 병사들도 뒤돌아서 그들과 함께 도망쳤다."[38] 콜로니는 일부 그레나디어와 프랑스 용기병과 그레데르 스위스 대대의 잔여 병력을 수습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주변적인 작전이었고 빌레루아의 우측 측면에 취약한 지원만 제공했다.[40]

타비에르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오크니 백작은 쁘띠 지트 강을 건너 연합군 우익에 위치한 오퓌스와 오트레글리즈 마을의 방어선을 향해 영국군 제1선을 과감하게 공격했다. 빌레루아는 적군의 진격을 불안하게 지켜보며, 5월 6일 루이 14세로부터 받은 "영국군의 첫 번째 충격을 받게 될 전선 부분에 특별히 주의하십시오."라는 조언을 명심하고 있었다.[34] 이 조언에 따라 프랑스 사령관은 중앙에서 대대를 옮겨 좌익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이미 약화된 우익에서 더 많은 보병을 끌어와 이들을 대체했다.[39]

영국 대대가 쁘띠 지트 계곡의 완만한 경사면을 내려와 진흙탕 개울을 헤치며 진격하자, 오퓌스 주변에서 전진해 온 라 기슈(de la Guiche) 소장의 훈련된 발롱(Walloon) 보병이 그들을 맞이했다. 집중적인 사격으로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발롱 보병은 질서정연하게 고지선으로 후퇴했다. 영국군은 개울 너머 건조한 지면에서 대열을 재정비하는 데 시간을 보낸 후, 고지 위의 오두막과 방어선을 향해 진격했다.[41] 그러나 영국군의 강력한 공격은 마을 방어선을 돌파하고 몽 생드레(Mont St André) 고원으로 진출할 위협이 되었다. 이는 고원에서 선발대 이동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선제후의 바이에른과 발롱 기병대의 사정권에 연합군 보병이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했다.[42]

헨리 룸리(Henry Lumley)의 영국 기병대가 쁘띠 지트 주변의 습지대를 건너는 데 성공했지만, 말보로에게 충분한 기병 지원은 불가능하며 연합군 우익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43] 따라서 공작은 오퓌스와 오트레글리즈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켰다. 오크니가 철수 명령에 따르도록 하기 위해, 말보로는 직접 사령부 감찰관을 파견했다. 오크니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캐도건은 명령을 고집했고, 마지못해 오크니는 군대가 잔드르누이(Jandrenouille) 고원 가장자리의 원래 위치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9]

한편, 람일리에 대한 네덜란드군의 공격은 속도를 내고 있었다. 말보로 공작의 동생이자 보병대장인 찰스 처칠은 4개의 보병 여단에게 마을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공격은 숄텐과 스파레 소장이 지휘하는 12개 대대의 네덜란드 보병, 슐렌부르크 백작 휘하의 2개 사단의 작센 군, 2대 아가일 공작이 이끄는 네덜란드군 소속 스코틀랜드 여단, 그리고 소규모 프로테스탄트 스위스 여단으로 구성되었다.[45] 람일리에 있던 20개 대대의 프랑스와 바이에른군은, 야생 거위의 비행에서 아일랜드를 떠나 클레어 용기병에 합류하여 보병으로 싸우고 영국 제3 보병 연대로부터 군기를 빼앗은 아일랜드인들과 마페이 후작 휘하의 콜로뉴와 바이에른 근위대 소규모 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처음에는 공격자들을 격렬하게 몰아내고 큰 손실을 입혔다.[46]

숄텐과 스파레가 주춤하는 것을 본 말보로 공작은 이제 오키니 휘하의 2선 영국과 덴마크 대대(오퓨스와 오트르-에글리즈 공격에 사용되지 않은)에게 남쪽으로 람일리 방향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약간의 지형의 굴곡으로 관측에서 차폐된 그들의 지휘관인 반 팔란트 준장은 적에게 그들이 여전히 초기 위치에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 연대 군기를 고원 가장자리에 그대로 두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페티트 게트 반대편에 있는 연합군의 실제 전력과 의도를 알지 못하는 프랑스군은, 말보로 공작이 자신의 모든 병력을 람일리와 남쪽의 평야에 집중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편, 빌레로이 장군은 여전히 더 많은 보병 예비대를 좌익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프랑스 지휘관이 연합군 배치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47]

15시 30분경, 오버크리크는 람일리에 대한 보병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기병 중대를 평야로 진격시켰다. 틸리 백작과 옴페슈 중장, 도베르뉴, 오스트프리슬란트, 도프 등이 이끄는 48개 중대의 네덜란드 기병과 21개 중대의 덴마크 기병은 (말을 조기에 지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적을 향해 꾸준히 전진한 후, 돌격의 기세를 얻기 위해 속보로 전환했다.[48] 전투 후에 글을 쓴 푀키에르 후작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4열로 전진했다… 그들이 접근하면서 그들은 두 번째와 네 번째 열을 첫 번째와 세 번째 열의 간격으로 진출시켰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향해 진격할 때, 그들은 어떤 중간 공간도 없이 하나의 전선만을 형성했다."[49]

초기 충돌은 네덜란드와 덴마크 기병 중대에게 유리했다. 좌익을 강화하기 위해 보병을 빼앗긴 빌레로이 장군의 행동으로 인한 수적 열세는 오버커크의 기병이 프랑스 기병의 첫 번째 선을 어수선하게 두 번째 선으로 몰아낼 수 있게 했다. 이 선도 심한 압박을 받아 세 번째 선의 기병과 평야에 남아 있는 소수의 대대로 밀려났다.[50] 그러나 이 프랑스 기병들은 루이 14세 군대 중 최고였으며, ''왕가 가정'',[51] 바이에른 퀴라시에 정예 중대 4개의 지원을 받았다. 드 기스카르의 능숙한 지휘 아래, 프랑스 기병은 재정비하여 성공적인 지역 반격으로 연합군 기병 중대를 몰아냈다.[52] 오버커크의 우익, 람일리 근처에서 그의 10개 중대가 갑자기 대열을 이탈하여 후방으로 흩어져 질서를 회복하려고 했고, 람일리에 대한 연합군 공격의 좌익을 위험하게 노출시켰다. 보병 지원 부족에도 불구하고, 드 기스카르는 연합군을 두 동강으로 나누려고 기병을 전진시켰다.

중앙에 위기가 닥쳤지만, 유리한 위치에 있던 말보로 공작은 즉시 상황을 인지했다.[43] 연합군 사령관은 이제 우익 기병을 중앙으로 증원하기 위해 소집했고, 오키니를 지원하는 것은 영국 기병 중대만 남았다. 전투 연기와 유리한 지형의 조합 덕분에 그의 재배치는 50개의 미사용 기병 중대를 전혀 이동시키려 하지 않은 빌레로이 장군에게 눈에 띄지 않았다.[43] 말보로 공작은 신선한 증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혼란에 빠진 네덜란드 기병 일부를 재정비하며 난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개입은 거의 그의 몰락으로 이어질 뻔했다. 공작을 알아본 여러 프랑스 기병이 그의 일행을 향해 쇄도했다. 말보로 공작의 말이 넘어졌고 공작은 떨어졌다."밀로드 말보로는 떨어졌다"라고 오키니는 나중에 썼다.[53] 이것은 전투의 중대한 순간이었다. 한 목격자는 "머레이 소장은… 그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고 길을 막아서고 있던 적을 저지하기 위해 서둘러 두 개의 스위스 대대를 이끌고 진군했다"고 회상했다.[54] 다행히 말보로 공작의 새로 임명된 부관인 리처드 몰즈워스가 구출을 위해 돌격해 공작을 그의 말에 태워 탈출했고, 머레이의 훈련된 대대가 추격하는 프랑스 기병을 물리쳤다.[54]

잠시 후, 말보로 공작의 마구간장인 브링필드(또는 빙필드) 대령이 또 다른 공작의 예비마를 이끌고 왔지만, 그를 말에 태우는 것을 돕는 동안 불행한 브링필드는 길을 잃은 대포알에 맞아 머리가 잘려 나갔다. 한 기록에 따르면 대포알은 총사령관의 다리 사이를 지나 불운한 대령에게 맞았고, 그의 몸통은 말보로 공작의 발치에 떨어졌다그 순간은 나중에 당시의 선정적인 카드 게임에 묘사되었다.[5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은 지나갔고, 오버커크와 틸리는 혼란에 빠진 기병 중대들 사이에 질서를 회복하고 다시 공격하도록 명령하여 공작이 우익에서 내려오는 기병 증원군의 배치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빌레로이 장군은 이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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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과 서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크니는 그의 영국군을 다시 페티트 지트 강 너머로 돌려 보내 오푸스를 다시 공격하게 했는데, 혼란 속에서 드 라 기슈의 보병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64] 보병대의 오른쪽에는 존 헤이 경의 스코츠 그레이스도 강을 건너 아우트레에글리즈 내에서 로이 연대를 공격했다. 존 디인은 "우리 용기병들은 마을로 진격하여... 적들을 끔찍하게 학살했다"고 썼다.[64] 바이에른 기병척탄병과 선제후 근위대는 철수하여 빌레루아와 선제후를 보호하는 방패를 형성했지만, 럼리의 기병대에 의해 흩어졌다. 격전장을 탈출하는 난민들 속에 갇힌 프랑스와 바이에른 사령관들은 코르넬리우스 우드 장군에게 포획될 뻔했지만, 우드 장군은 그들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바이에른 중장 두 명을 체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65]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드 라 콜로니 여단의 잔여 병력은 반대 방향으로 프랑스가 점령한 나무르(Namur) 요새를 향해 이동했다.[66]

후퇴는 궤멸로 변했다.[67] 각 연합군 사령관들은 추격전에서 자신의 부대를 전진시켜 패배한 적에게 회복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곧 연합군 보병은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었지만, 기병들은 딜레(Dyle) 강의 도하 지점을 향해 밤이 깊어지는 가운데로 향했다.[68] 그러나 마침내 말보로는 자정 직후 멜데르트 근처, 전장에서 19km 떨어진 곳에서 추격을 중단시켰다.[68]

3. 3. 돌파

오후 4시 30분경, 양군은 남쪽 습지에서의 소규모 충돌에서부터 평원에서의 대규모 기병전, 중앙부 라밀리에서의 치열한 싸움, 그리고 북쪽 오퓨스와 오트르에글리즈의 오두막 주변에서 오크니와 드 라 기슈가 쁘띠 지트 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곳까지 약 6km에 달하는 전선 전체에 걸쳐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었다.[56]

이동한 기병대의 도착은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균형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쳐가고 사상자도 늘어나면서 평원에서 싸우고 있는 기스카르 기병대의 수적 열세가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했다.[57] 프랑퀴니와 타비에르를 재점령하지 못한 후, 기스카르의 우익은 위험하게 노출되었고, 전열 오른쪽에 치명적인 틈이 생겼다. 뷔르템베르크의 덴마크 기병대는 이 틈을 이용하여 전진하여 돌격하여, 네덜란드군을 저지하는 데 거의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왕립 근위대의 측면을 돌파했다. 사실상 아무런 저항 없이 전진한 21개 덴마크 기병대는 오토몽드의 무덤 주변의 프랑스군 뒤편에 재편성하여, 몽 생드레 고원을 가로질러 북쪽을 향해 빌레로이 군대의 노출된 측면을 향했다.[58]



남쪽 기병전에 대한 마지막 연합군 증원부대가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 말버러 공작의 좌익 우세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고, 그의 신속한 작전 계획이 전장을 장악했다. 너무 늦었지만, 빌레루아는 사용하지 않은 50개의 기병대를 재배치하려고 했지만, 오퓨스에서 몽 생드레까지 이어지는 남쪽을 향한 전열 형성을 위한 필사적인 시도는 초기 배치 후 부주의하게 남겨진 프랑스 진영의 수하물과 천막 사이에서 실패했다.[59] 연합군 사령관은 이제 수적으로 열세인 프랑스와 바이에른 기병대에 대해 기병대의 전진을 명령했다. 적절한 보병 지원 없이 기스카르의 우익은 더 이상 공격을 견딜 수 없었고, 말을 북쪽으로 돌려 완전히 혼란 속에 붕괴되어 도망쳤다.[60] 라밀리 뒤편에서 빌레루아가 급히 모으고 있던 기병대조차도 공격을 견딜 수 없었다.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던 아일랜드인 피터 드레이크 대위는 "우리는 후퇴하면서 40야드도 가지 못했습니다. '도망쳐라'라는 말이 군대의 대부분, 아니면 전체 군대에 퍼지면서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라고 회상했다.[61]

라밀리에서 북쪽에서 내려온 영국군으로 강화된 연합군 보병은 마침내 돌파했다. 피카르디 연대는 자리를 지켰지만, 보스윅 대령의 스코틀랜드-네덜란드 연대와 영국 증원군 사이에 끼였다. 보스윅은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던 아일랜드인 클레어 자작 찰스 오브라이언과 함께 전사했다.[62] 마페이 후작은 바이에른과 쾰른 근위대와 함께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지만 헛수고였다. 남쪽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기병대의 돌격을 알아차리고 나중에 그는 "... 나는 그 기병대 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서 장교에게 지시를 내렸지만, 내 말을 들어주는 대신 즉시 포위되어 항복을 요구받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63]

4. 결과

이제 완파당한 빌레루아의 부대는 무엇이 남았는가? 사상자의 불균형은 루이 14세의 군대에게 충분한 재난으로 인식되었다(더 보기). 더하여 프랑스 군대의 수백명이 탈영했고, 그들의 대부분이 군기아래 다시는 집결하지 않았다. 빌레루아는 또한 52개의 대포 대부분을 잃었고, 그의 보급용 폰툰교 마차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151] 빌라르(Villars) 원수의 말에 따르면 라미예에서의 프랑스의 패배는 "가장 부끄럽고 굴욕적인 궤주"였다.[152]

여러 도시들이 동맹군에게 함락되었다. 루뱅(Louvain)이 1706년 5월 25일 함락되었다. 3일 후에 동맹군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수도 브뤼셀에 들어갔다. 말버러공작은 라미예에서의 승리를 통해 무수한 기회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이제부터 전에는 가지지 못했던 모든 여름을 갖게 되었소." 브뤼셀에서 말버러 공작은 로버트 할리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이는 신의 축복이므로 나는 이 기회를 최대한 사용할 것이오."[153] 말린(Malines), 리르(Lierre), 겐트(Ghent), 알로스트(Alost), (Damme), 오우데나르데(Oudenaarde), 브뤼헤(Bruges) 그리고 6월 6일에는 앤트워프(Antwerp)가 말버러 공작의 승리한 군대에 의해 결과적으로 함락되었다.[149] 빌레루아는 패배의 과정에서 도움도 없이 체포되었다. 루이 14세가 이 재난을 알았을 때 그는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방돔(Vendôme) 원수를 플랑드르를 함락시키게 하기 위해 소환했다. 그러나 방돔이 지휘하게 된 병력은 전에 비해 너무 약해졌다.

1706년 라미예 전역으로 동맹이 획득한 지역. (각주: 항복한 날짜는 여러 출처에 의거한 것이기에 약간 다를 수 있다)


동맹군의 승리 소식은 프로이센, 헤센, 하노버의 파견단들에게 알려지고, 이는 많이 망설이던 그들의 군주로 하여금 궤주하는 프랑스와 바이에른 군대를 추격하는 데 열정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이는" 말버러공작은 따분하게 서술하길 "나는 우리의 지난 승리로 이것을 얻게 되었다.[154] 오버크리크가 7월 4일 오스텐더(Ostende)의 수비대를 격파하고, 보급과 연락을 위해 영국 해협과의 직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동맹군은 강력하게 저항하는 덴데몬드(Dendermonde)의 지배자 발리 후작(Marquis de Valée)를 몰아내기에는 준비가 부족했다. 케도건과 찰스 처칠이 공격을 감행한 후에야 도시가 함락되었다.[155]

방돔은 8월 4일 플랑드르의 지휘권을 공식적으로 인수했다.[156] 방돔의 패배한 전임자 빌레루아는 다시는 최고 지휘권을 얻지 못한 채 한탄하길 "나는 내 행복한 날들이 오직 나의 죽음을 예비한 것이었다고 예상하지 못했다."[157] 그러나, 루이 14세는 그를 용서하고는 친절한 말로 그의 옛친구를 맞았다. "원수, 우리의 시대에 우리는 좋은 행운이 없었을 뿐이오."[158] 이때 말버러 공작은 상당한 피해를 입을 끝에 8월 22일 메닌(Menin)의 강력한 요새를 점령했다. 덴데몬드는 1706년 마지막에 함락되었는데, 결국 9월 6일 8월 2일 함락된 아스(Ath)의 뒤를 이어 함락되었다.[159] 이때 말버러 공작은 라미예 전역을 끝내고 뫼즈강의 서쪽, 삼브르의 북쪽으로, 즉 스페인령 네덜란드 너머 프랑스로 진입하는 것을 거절했다. 이것은 영국의 공작이 얻은 작전상의 승리 중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157]

이러는 동안, 라인 강의 북부에서 빌라르는 그가 보병대대를 지원 보낸 플랑드르에서 프랑스 군대가 붕괴한 이후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란다우(Landau)를 재탈환할 가능성은 없었다.[160] 동맹군에게 북 이탈리아에서 7월 4일 외젠 공작이 피에몬테(Piedmontese)의 수도인 투린(Turin)이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게 함락되기 전에 그들을 격파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오직 스페인에서 골웨이 경(Galway)이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퇴각하고, 펠리페 4세(Philip V)로 하여금 8월 4일 마드리드로 돌아갈 수 있게 한 것만이 루이 14세에게 좋은 소식이었을 뿐이었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상황은 심각하게 바뀌었고, 루이 14세는 프랑스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기에 이르렀다. 앤 여왕은 또한 라미예의 전역은 하나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평화의 전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신에게 감사할 것이오."[161] 그러나 대동맹은 승리로 인해 대담해져, 지혜와 평화에 대한 의지도 결여하게 되었다. 프랑스가 누구의 눈에도 알 수 있을 법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도, 전쟁은 다음해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공세를 대신하는 대신에 동맹은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이는 루이 14세로 하여금 라미예와 투린의 패배로부터 회복할 기회를 주었다.[162]

4. 1. 전투의 영향

라미예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상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소 1만 2천 명에서 최대 3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70] 수많은 병사들이 탈영했으며, 빌레루아는 52문의 대포와 대부분의 보급 마차를 잃었다.[151][70] 빌라르 원수는 이 패배를 "가장 부끄럽고 굴욕적인 궤주"라고 묘사했다.[152][71]

전투 이후, 루뱅(1706년 5월 25일), 브뤼셀(5월 28일)을 포함한 여러 도시들이 연합군에 함락되었다.[149] 메헬렌, 리르, 헨트, 알스트, , 오우데나르데, 브뤼헤, 앤트워프(6월 6일) 등도 연이어 함락되었다.[149] 말버러 공작은 이 승리를 통해 "모든 여름"을 얻었다고 표현하며,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겠다고 다짐했다.[153]

람일리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군기를 받는 말보로 공작. 화가: H. 듀프레


1706년 독일 전쟁 선전 메달. 앞면에는 로마 전사로 묘사된 루이 14세가 앤 여왕(Minerva로 묘사됨)에 의해 제압당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File:Battle_of_Ramillies_&_Seizure_of_12_Flanders_Towns_in_the_War_of_the_Spanish_Succession._Medal_1706._Reverse.jpg|thumb|left|뒷면에는 연합군이 점령한 플랑드르 12개 도시(브뤼셀, 메헬렌, 리르, 안트베르펜, 뵈르네, 알스트, 아트, 오우데나르데, 브뤼헤, 겐트, 담메, 뢰번])가 나타나 있다.

동맹군의 승리는 프로이센, 헤센, 하노버 등의 군주들이 프랑스군 추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154] 오스텐더 점령으로 영국 해협과의 직통로가 열렸으나, 덴데몬데는 강력한 저항으로 함락이 지연되었다.[155]

방돔이 8월 4일 플랑드르의 지휘권을 인수했으나,[156] 빌레루아는 다시는 최고 지휘권을 얻지 못했다.[157] 루이 14세는 빌레루아를 위로하며 "우리의 시대에 우리는 좋은 행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말했다.[158] 메닌(8월 22일), 덴데몬데, 아스(9월 6일)가 차례로 함락되었다.[159] 말버러 공작은 스페인령 네덜란드 대부분을 점령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프랑스를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했다.[157]

라인 강 북부에서 빌라르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160] 투린 전투(7월 4일)에서 오이겐 공이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스페인에서는 펠리페 4세가 마드리드로 복귀했으나, 전반적으로 상황은 프랑스에 불리하게 돌아갔다.[89]

루이 14세는 전쟁을 끝낼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앤 여왕 역시 평화의 가능성을 언급했다.[161] 그러나 대동맹은 승리에 도취되어 평화 협상에 소극적이었고, 이는 프랑스에게 회복할 기회를 주었다.[162]

4. 2. 전후 처리

프랑스군의 정확한 사상자 수는 계산되지 않았으나, 프랑스-바이에른 군의 붕괴는 명백했다.[91] 여러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피해는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쳐 8,000명에서 15,000명, 포로는 7,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정된다.[70] 빌레루아 원수는 52문의 대포와 공병 폰툰 부대 전체를 잃었다.[70] 빌라르 원수는 람일리 전투에서의 프랑스군 패배를 "가장 수치스럽고, 굴욕적이며, 파괴적인 궤멸"이라고 평가했다.[71]

[[File:Battle_of_Ramillies_&_Seizure_of_12_Flanders_Towns_in_the_War_of_the_Spanish_Succession._Medal_1706._Reverse.jpg|thumb|left|뒷면에는 연합군이 점령한 플랑드르 12개 도시(브뤼셀, 메헬렌, 리르, 안트베르펜, 뵈르네, 알스트, 아트, 오우데나르데, 브뤼헤, 겐트, 담메, 뢰번])가 나타나 있다.

뢰번은 1706년 5월 25일에 함락되었고, 사흘 후 연합군은 브뤼셀에 입성했다. 메헬렌, 리르, 겐트, 알스트, 담메, 오우데나르데, 브뤼헤, 안트베르펜 등 여러 도시들이 함락되었고, 이들 도시는 카를 대공을 통치자로 선포했다.[73] 루이 14세는 이 소식을 듣고 뱅돔 원수를 이탈리아 북부에서 소환하여 플랑드르 지휘권을 맡겼다.[73]

연합군의 승전 소식에 프로이센, 헤센, 하노버 병력들이 추격에 적극 참여했다.[74] 오스텐데 항구 점령으로 영국 해협과의 통신 및 보급 경로가 확보되었으나, 덴더몬데에서는 큰 진전이 없었다.[75] 뱅돔은 8월 4일에 플랑드르 지휘권을 인수했고,[76] 빌레루아는 다시는 주요 지휘권을 맡지 못했다.[77] 메낭 포위전은 8월 22일에 종료되었고, 덴더몬데는 9월 6일에 함락되었으며, 아트는 10월 2일에 함락되었다.[79] 람일리 전투의 결과로 프랑스군은 뫼즈 강 서쪽과 삼브르 강 북쪽의 스페인령 네덜란드 대부분을 상실했다.[77]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처리 문제를 두고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는 대립했다.[80] 오스트리아는 카를 3세를 대신하여 재정복한 지역을 직접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네덜란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역 통치권과 평화 이후 강력한 장벽 요새 주둔을 요구했다.[80] 말보로 공작은 네덜란드를 지지하며 중재에 나섰고, 황제의 총독직 제안을 거절했다.[81] 결국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전쟁 기간 동안 영토를 통제하고, 이후 네덜란드 장벽의 범위를 결정한 후 카를 3세에게 넘겨주기로 합의했다.[82]

라인강 상류에서는 빌라르가 방어 태세를 취했고,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토리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격파되었다.[89] 루이 14세는 전쟁을 끝내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앤 여왕은 평화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84] 그러나 연합군의 내분으로 인해 루이 14세는 토리노와 람일리에서 입은 패배를 일부 만회할 수 있었다.[85]

5. 역사적 의의

5. 1. 한국의 관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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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unspeci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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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문서 All dates in the article are in the Gregorian calendar (unless otherwise stated). The Julian calendar as used in England in 1706 differed by eleven days. Thus, the battle of Ramillies was fought on 23 May (Gregorian calendar) or 12 May (Julian calendar).
[91] 문서 All statistics taken from Falk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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