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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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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리노 전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인 1706년 9월 7일에 벌어진 전투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오스트리아-사보이아 연합군에 패배했다. 1700년 스페인 왕위 계승 분쟁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사보이아 공국은 처음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1703년 대동맹에 가담하여 프랑스에 대항했다. 1705년 프랑스군은 토리노를 포위했고, 이듬해 오스트리아의 외젠 공과 사보이아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구원군을 이끌고 와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군의 패배로 피에몬테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프랑스 세력이 물러났고, 사보이아 공국은 몬페라토를 얻고 니스와 사보이를 되찾아 사르데냐 왕국으로 발전하며 이탈리아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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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랑스군이 칼치나토 인근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을 기습하여 승리했으나, 이후 패배로 이탈리아에서 철수하며 전황이 불리하게 바뀌는 계기가 된 전투가 칼치나토 전투이다.
토리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토리노 공방전
부분전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연합군 구원군이 프랑스군 전선을 돌파하여 토리노 포위를 풀다
날짜1706년 6월 2일 – 9월 7일
장소이탈리아 토리노
결과그랜드 얼라이언스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사보이아 공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프로이센 왕국
교전국 2프랑스 왕국
스페인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1 지휘관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외젠 드 사부아 공자
비리히 필리프 폰 다운
안할트-데사우 공 레오폴트 1세
프리드리히 1세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카를 알렉산더 (뷔르템베르크 공작)
교전국 2 지휘관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
루이 도뷔송 드 라 푀이야드
페르디낭 드 마르생
병력 규모
교전국 1 병력수비군: 15,000명
구원군: 30,000명
교전국 2 병력총 60,000명
사상자 및 피해
교전국 1 사상자포위전: 총 4,600명 (질병 포함)
구원 작전: 3,500–4,800명 사망 및 부상
교전국 2 사상자포위전: 총 10,000명 (질병 포함)
구원 작전: 7,000–9,000명
관련 전투
토리노 전투

2. 배경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사보이아 공국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 이는 사보이아 공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위험한 선택이었다. 만약 실패할 경우, 피에몬테사보이아는 지도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프랑스루이 14세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사보이아와 피에몬테를 침공하여 대응했다. 스페인군이 롬바르디아를 점령하면서 피에몬테는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사보이아 공국은 수사, 베르첼리, 치바소, 이브레아, 니차를 상실했고, 16세기에 요새화된 토리노만이 유일한 방어 거점으로 남았다.[1]

1705년 8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공격 준비를 갖추었으나, 지휘관 드 라 푀이야드는 병력 부족과 지원군 미비를 이유로 공격을 주저했다. 이 결정은 피에몬테가 주변 지역을 요새화하고 장기적인 공성전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면서 잘못된 판단으로 드러났다.[1]

북부 이탈리아의 전투는 스페인이 점령한 밀라노만토바 공국에 집중되었는데, 이 지역들은 오스트리아의 남쪽 국경 안보에 필수적이었다. 1701년 3월, 프랑스군은 두 도시를 점령했고,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그의 딸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자와 펠리페 5세의 결혼을 대가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1]

1705년, 외젠이 슈타렌베르크를 대신했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프랑스의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 방돔 공작에게 카사노 전투에서 패배하여 오글리오 강을 넘어 진격하지 못하고 롬바르디아주에 머물렀다. 그러나 1706년이 되자 외젠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방돔이 롬바르디아로 진격하여, 4월 19일칼치나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롬바르디아에서 몰아냈다. 외젠은 가르다 호 주변 산록에서 패잔병을 수용하여 5월부터 6월까지 군대 재편에 힘썼고, 독일에서의 원군 및 잉글랜드·네덜란드에서의 재정 지원을 기다리며 산록에서 전력을 축적했다.[1]

피야르 공작은 1705년 5월 14일부터 토리노를 포위했지만, 폰 다운 장군이 필사적으로 방어하여 버텼고,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나가서 기병대로 포위군을 교란시켰다. 피야르는 그쪽에 신경이 쏠려 추격했으나, 산으로 도망쳐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포위도 잘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요새 기술자 보방의 파견도 검토되었으나, 고령으로 인해 중단되었다.[1]

2. 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발발

1700년 11월, 자녀가 없던 스페인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11월 16일에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제국의 왕이 되었다. 스페인 제국은 본토 스페인 외에도 네덜란드령 스페인, 이탈리아의 대부분,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많은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1]

1701년, 영토 및 상업적 권리를 둘러싼 분쟁은 프랑스, 스페인과 대동맹 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대동맹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카를을 스페인 왕위 후보로 내세웠다.[1]

2. 2. 사보이아 공국의 입장 변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초기, 사보이아 공국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의 딸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자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와 결혼하기도 했다.[1]

그러나 1703년 10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대동맹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사보이아 공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당시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마치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이러한 상황에서 생존과 독립을 위해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2. 3.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공세

1703년 10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대동맹에 합류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더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1704년 드 라 휘야드 휘하의 프랑스군은 빌프랑슈와 알프스 북쪽 사보이아 백국 영토를 점령했다. 뱅돔은 피에몬테에서 동시 공세를 펼쳤고, 1705년토리노사보이아 공국이 통제하는 유일한 주요 도시였다.[1]

롬바르디아에서 황제군의 간섭을 막기 위해 뱅돔은 공세를 취해 4월 19일 칼치나토 전투에서 승리하고 오스트리아군을 트렌티노 계곡으로 몰아넣었다. 외젠 공은 에서 돌아와 신속하게 질서를 회복했고, 베로나 주변 3만 명의 황제군이 민초 강과 아디제 강 사이에 퍼져 있는 4만 명의 프랑스군과 대치했다.[1] 5월 12일 드 라 휘야드 휘하의 4만 8천 명 병력이 토리노 외곽에 도착했지만, 6월 19일까지 완전한 포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

3. 토리노 공성전 (1706년 5월 - 9월)

1706년 5월 14일,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이 토리노를 포위하면서 공성전이 시작되었다.[1] 당시 동맹군의 병력은 4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프랑스의 원수이자 공성전 전문가였던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은 도시를 우회하여 공격할 것을 제안했지만, 라 푀이야드는 참호를 파는 전략을 선택했다.

토리노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도시 방어에 참여했고, 비리코 다운 장군이 이끄는 방어군은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강하게 저항했다. 전투는 1706년 여름 내내 계속되었다.

7월 17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토리노를 떠나 외젠과 합류했다. 이후 비리히 필리프 폰 다운이 토리노 수비대 사령관을 맡았다. 피에트로 미카는 지하 갱도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다 폭사한 영웅으로, 그의 희생은 이탈리아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토리노의 방어 시설은 외곽 도시와 중심부의 요새로 나뉘어 있었고, 1696년 이후 보방(Vauban)의 설계로 지하 시설이 크게 강화되었다. 라 푀이야드는 작전 속도를 높이기 위해 도시 밖 300미터 지점에 포병 진지를 건설하고 요새를 포격했지만, 보방은 이러한 접근 방식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6월 17일 7,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도시를 탈출하여 외젠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프랑스 보급선을 공격했다. 그동안 라 푀이야드는 포위 작전을 계속했지만, 포격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프랑스군의 채굴 시도도 실패했다.

8월 15일, 외젠은 토리노로 진격을 시작하여 8월 29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합류했다.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프랑스군은 세 차례 공격을 가했지만 모두 격퇴되었고, 피에트로 미카는 8월 31일 프랑스군이 터널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뢰를 폭파하고 사망했다.[1] 프랑스군은 질병 등으로 10,000명, 수비대는 4,500명의 손실을 입었다.

3. 1. 프랑스군의 포위 전략

토리노 공성전 지도


1705년 5월 14일, 피야르 공작 루이 드 오비송 드 라 피야르(Louis d'Aubusson de La Feuillade)는 4만 명이 넘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토리노를 포위했다.[1] 공성전 전문가인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은 도시를 우회하여 공격할 것을 제안했지만, 라 푀이야드는 참호를 파는 전략을 선택했다.

당시 토리노의 방어 시설은 외곽 도시와 요새화된 요새로 나뉘어 있었다. 라 푀이야드는 작전 속도를 높이기 위해 도시 밖 300미터 지점에 포병 진지를 건설하고 요새에 대한 포격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보방(Vauban)이 제공한 설계에 따라 1696년 이후 크게 개선된 토리노 요새는 대부분 지하에 있었고, 대항 사파 작전에 사용되는 터널도 있었다. 보방은 그 거리에서 발사하면 벽의 상단 부분만 조준할 수 있고 바닥은 조준할 수 없어 토리노를 함락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1706년 6월 17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7,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도시를 탈출하여 오스트리아 장군 비리히 필리프 폰 다운(Wirich Philipp von Daun)에게 수비대 지휘를 맡겼다.

3. 2. 토리노 방어군의 저항



1706년 5월 14일,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토리노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도시 방어에 힘썼다.[1] 비리코 다운 장군이 이끄는 방어군은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강하게 저항했다.

피에트로 미카는 토리노를 지키기 위해 지하 갱도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다 폭사한 영웅으로, 그의 희생은 이탈리아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피에트로 미카, 안드레아 가스탈디(Andrea Gastaldi) 작, 1858년


토리노의 방어 시설은 외곽 도시와 중심부의 요새로 나뉘어 있었고, 1696년 이후 보방(Vauban)의 설계로 지하 시설이 크게 강화되었다.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프랑스군은 세 차례 공격을 가했지만, 모두 큰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피에트로 미카는 8월 31일 프랑스군이 요새 아래 터널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뢰를 폭파하고 사망했다.[1]

4. 토리노 전투 (1706년 9월 7일)

토리노 전투를 다룬 그림.


1706년 9월 2일, 사보이아 군 사령관들은 토리노와 그 주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수페르가(Superga) 언덕에서 전술적 상황을 분석했다. 방어군은 계속된 공격으로 지쳐 있었고, 연합군은 도시 북서쪽의 취약한 곳에 배치된 기병대를 포함한 오스트리아 지원군과 함께 공성군을 포위하기로 결정했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오스트리아군은 도라 리파리아(Dora Riparia)와 스투라 디 란초(Stura di Lanzo) 사이에 진영을 설치했다. 외젠은 "저들은 이미 반쯤은 격퇴당했다."라고 선언했다.[2]

9월 7일 오전 10시, 레오폴트 폰 안할트 데사우가 이끄는 프로이센 보병대의 공격으로 최종 공격이 시작되었다. 세 번의 공격 시도 끝에 프랑스군 우익을 붕괴시켰으나, 탄약이 떨어진 라 마린 연대는 더 이상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포위망을 형성한 오스트리아와 사보이아군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격퇴했고, 이들은 궤주하기 시작했다. 다운(Daun)이 도시 수비대에게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좌익 공격을 명하자, 이들은 완전히 무너져 도망치기 시작했고, 수백 명의 병력이 도라 리파리아 강에 빠져 익사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같은 날 오전 피네롤로(Pinerolo)를 향해 퇴각했다.[1]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외젠은 해방된 도시에 들어가 승리를 기념하는 테 데움(Te Deum)을 지원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수페르가 대성당을 지어 매년 9월 7일 테 데움이 열리게 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승리로 남쪽에서의 전투는 끝났다. 다음 해 툴롱(Toulon) 공방전이 실패한 이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중대한 군사적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토리노 주변에 여전히 3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여 합스부르크-사보이아 구원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방어선이 약 25km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고,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9월 5일, 사보이아-합스부르크군은 도라 리파리아(Dora Riparia) 강과 스투라 디 란초(Stura di Lanzo) 강 사이의 콜레뇨(Collegno)에 집결했다.

9월 7일, 외젠 왕자는 군대를 여덟 개의 열로 나누고, 각 열 사이에 포병을 위한 간격을 두었다. 작센고타의 요한이 우익을, 뷔르템베르크의 카를이 좌익을, 안할트데사우의 레오폴트가 중앙을 지휘했다. 전투는 포격전으로 시작되었지만, 합스부르크군의 포격은 프랑스군 참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오전 11시경 외젠 왕자는 총공격을 명령했다. 뷔르템베르크의 카를이 좌익에서 돌파했지만, 나머지 군대는 저지되었고, 다운(von Daun)이 이끄는 돌격으로 지원받은 레오폴트의 반복적인 공격이 결국 프랑스군의 후퇴를 강요했다.

오를레앙은 부상을 입었고, 마르생은 포로로 잡혀 다음 날 사망했다. 프랑스군 사상자는 7,000명에서 9,000명(3,200명에서 6,000명의 포로 포함)에 달했고, 연합군 사상자는 3,500명에서 4,800명에 달했다. 프랑스군은 토리노에서 철수하여 피네롤로(Pinerolo) 쪽으로 후퇴했으며,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같은 날 수도로 재입성했다.[2]

4. 1. 오스트리아-사보이아 연합군의 구원 작전

1703년부터 오스트리아 측과 비밀 협상을 진행하여 프랑스를 배신한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프랑스군에 사로잡힐 위기에 처했다. 1704년 오스트리아의 장군 구이도 폰 슈타렌베르크는 사령관 외젠 공으로부터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군의 지휘권을 위임받아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합류, 사보이아의 수도 토리노에서 프랑스군에 저항했으나 열세였다. 1705년 외젠이 슈타렌베르크를 대신했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카사노 전투에서 패배하여 롬바르디아주에 머물렀다.[1]

1706년 외젠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에서 대기하며 군대를 재편, 독일에서의 원군 및 잉글랜드·네덜란드에서의 재정 지원을 기다렸다. 준비를 갖춘 외젠은 구원 작전을 개시하여 6월 말 아디제 강을 따라 남하했다.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감시하며 아디제 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방돔 공은 외젠이 아디제 강을 따라 서쪽으로 진군하는 척하다가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외젠은 7월 6일 베네토주 로비고에서 아디제 강을 다시 건너고, 7월 17일에 포 강도 건너 남쪽 강둑을 따라 서진하여 방돔의 진지를 우회하여 토리노 구원을 향했다.[1]

프랑스군은 외젠의 구원을 믿지 않았고, 방돔은 7월 10일 육군 장관에게 낙관적인 전망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라미이 전투에서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에게 대패한 빌루아 공이 해임되자, 방돔은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네덜란드로 향하게 되고, 이탈리아 원정군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와 페르디낭 드 마르상이 지휘하게 되었다.[1]

두 사람은 아디제 강 진지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외젠의 토리노 구원을 의심하고 롬바르디아 방어를 계속했다. 프랑스군이 적극적으로 공격해 오지 않아 외젠은 서진을 계속했고, 동맹국으로부터 받은 군자금을 식량 구매에 사용하여 안전하게 진군했다. 8월 29일 외젠은 토리노 남쪽 카르마뇰라에서 기병대를 거느린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합류했고, 롬바르디아에 있던 필리프 2세 등은 오이겐의 의도를 겨우 이해하고 토리노 포위군과 합류했다.[1]

9월 2일 두 사보이아 군 사령관은 토리노와 그 주변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수페르가(Superga) 언덕에서 전술적 상황을 분석하였다. 외젠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에게 "그들은 이미 반쯤은 격퇴당했다."라고 선언했다.[2]

4. 2. 프랑스군의 대응과 전략적 혼란

1705년 카사노 전투에서 승리한 후, 프랑스의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 방돔 공작은 롬바르디아주에 머무르며 오글리오 강을 넘어 진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1706년 4월 19일 칼치나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롬바르디아에서 몰아냈다. 1706년 5월, 프랑스군 피야르 공작은 토리노를 포위했지만, 오스트리아군 빌리히 필립 로렌츠 폰 다운이 필사적으로 방어하여 함락되지 않았다.[1]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1706년 5월 23일 라미이 전투에서 빌루아 공작이 대패하자, 방돔을 네덜란드로 보내고,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를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페르디낭 드 마르생이 필리프 2세를 보좌했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뱅돔을 계승


필리프 2세와 마르생은 오이겐의 토리노 구원을 의심하여 롬바르디아 방어를 계속했다. 피야르와 대응책을 협의한 필리프 2세는 오이겐 공격을 주장했지만, 마르상의 반대로 방어에 들어갔다. 그러나 프랑스군 진지는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여름 더위로 강물이 말라 방어에 취약점이 드러났다. 9월 2일 오스트리아-사보이아 연합군은 스펠가라는 언덕을 프랑스군으로부터 탈환하여, 포위군의 북서부가 취약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이겐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에게 "그들은 반쯤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선언했다.[2]

4. 3. 전투의 전개와 결과



9월 7일, 외젠 왕자가 이끄는 오스트리아-사보이아 연합군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레오폴트 폰 안할트 데사우가 지휘하는 프로이센 보병대는 세 번의 공격 끝에 프랑스군 우익을 무너뜨렸다. 탄약이 떨어진 라 마린 연대는 더 이상 프로이센 보병대를 막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사보이아군은 포위망을 뚫고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궤주시켰다.

도시 수비대를 이끌던 다운(Daun)이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좌익을 공격하자,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완전히 무너져 살 길을 찾아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병력이 도라 리파리아 강에 빠져 익사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같은 날 오전 피네롤로(Pinerolo)를 향해 퇴각했다.[1]

이 전투에서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는 부상을 입었고, 마르생은 포로로 잡혀 다음 날 사망했다. 프랑스군 사상자는 7,000명에서 9,000명(3,200명에서 6,000명의 포로 포함)에 달했고, 연합군 사상자는 3,500명에서 4,800명에 달했다.[2] 프랑스군은 토리노에서 철수하여 포위 포격을 버리고 피네롤로(Pinerolo) 쪽으로 후퇴했으며,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같은 날 수도로 재입성했다.

승리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외젠은 해방된 도시에 입성하여 승리를 기념하는 테 데움(Te Deum)을 지원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수페르가 대성당을 지어 매년 9월 7일 테 데움을 열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외젠의 승리는 말버러 공작으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토리노에서는 승전을 기념하여 테 데움이 제창되었으며, 스페르가 성당이 건립되었다.[3] 반면, 마르생과 피야르의 소극적인 지휘는 프랑스에서 유행한 노래로 풍자되었고, 필리프 2세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는 아들에게 보낸 위로 편지에서 필리프 2세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쓰면서 은근히 두 사람을 비난했다.[3]

토리노 포위전 기간 중, 사보이아 군 소속 피에트로 미카는 지하 터널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폭탄을 이용해 저항하다 자폭했다. 이후 미카는 영웅으로 추앙받아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 도로, 함선 등이 만들어졌고, 토리노에서는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3]

5. 1. 이탈리아 전역의 변화

카스티글리오네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승리했지만, 전황을 뒤집지는 못했다.[3] 메다비 백작 휘하 롬바르디아의 프랑스 부대가 헤센 군단을 패퇴시켰으나, 전략적 위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피네롤로와 수사의 프랑스 수비대는 철수했고, 요새는 사보이아군이 재점령했다. 26일에 외젠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밀라노에 입성하여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3] 외젠은 오스트리아로부터 밀라노 총독으로 임명되었다.[3]

1707년 3월, 요제프 황제는 프랑스와 밀라노 조약을 체결하여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밀라노와 만토바 공국을 오스트리아에 넘겨주는 대가로 프랑스와 스페인군은 모든 장비를 가지고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그중 많은 수가 남부 프랑스로 보내져 7월 툴롱의 프랑스 해군 기지에 대한 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 1707년에 밀라노 요새에 틀어박힌 프랑스군을 항복시키고, 루이 14세와 협상하여 이탈리아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철수시켰다.[3]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포로로 잡을 수 있었던 프랑스군을 놓친 것에 대해 비난했지만, 저항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다운의 남이탈리아 나폴리 왕국 정복을 용이하게 만들었고,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게 되었다.[3] 4월, 요제프는 스페인이 지배하는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여 오스트리아가 2세기 만에 처음으로 이탈리아에서 패권을 장악하게 했다.

5. 2. 사보이아 공국의 발전

1708년, 사보이아 공국은 몬페라토 공국을 획득했다.[3] 그러나 니스사보이아 백국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프랑스에 의해 반환되지 않았다.[3]

사보이아 왕가는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한국사의 주요 왕조들과 비교해 볼 때,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하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고려조선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5. 3.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재조명

2006년 토리노 전투 30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연구가 발표되었는데, 그중 세리노 바도네의 ''레 아퀼레 에 이 질리; 우나 스토리아 마이 스크리타''(Le Aquile e i Gigli. Una storia mai scritta|레 아퀼레 에 이 질리. 우나 스토리아 마이 스크리타it)는 프로이센 보병대의 화력과 프랑스군의 병참 기기 부족이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패배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분석했다.[3] 이 연구는 전투를 역사적이 아닌 전통적인 군사 분석적 방법으로 접근한 최초의 분석으로 평가받는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이후, 피에트로 미카는 이탈리아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의 본보기로 재조명되었다. 그는 1938년 영화 ''피에트로 미카''의 주인공이 되었고, 2006년에는 그의 사망 300주년을 기념하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3] 토리노에서는 그의 전투와 그를 기념하는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토리노 포위전을 기념하는 투린의 연례 퍼레이드


2004년 빅토리오 베네토 광장 지하 주차장 건설 중 18세기 초 유골 22구가 발견되었는데, 2019년 연구에 따르면 이 유골들은 1706년 포위전 당시 사망자들일 가능성이 높다.[3]

토리노 전투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국민적 단결과 저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특히, 피에트로 미카의 희생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심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참조

[1] 서적 (제목 없음)
[2] 서적 (제목 없음)
[3] 서적 (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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