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모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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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 모타 전투는 1513년 10월 7일 이탈리아 비첸차 외곽에서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과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전투는 스페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승리는 신성 동맹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막는 데 실패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전투 이후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마리냐노 전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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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모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전투 | 라 모타 전투 |
부분 | 캉브레 동맹 전쟁 |
![]() | |
날짜 | 1513년 10월 7일 |
장소 |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토 스키오(현재의 이탈리아) |
결과 | 스페인과 제국군의 승리 |
교전 세력 1 | 베네치아 공화국 |
교전 세력 2 |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
지휘관 1 |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 알레산드로 프레고소 안토니오 피오 콘스탄초 피오 |
지휘관 2 | 라몬 데 카르도나 페르난도 다발로스 프로스페로 콜로나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 |
병력 1 | 보병 10,000명 기병 3,000명 대포 24문 |
병력 2 | 스페인 보병 4,000명 제국 란츠크네흐트 3,500명 스페인 기병 1,000명 대포 32문 |
사상자 1 | 4,500명 이상 |
사상자 2 | 미상 (소수) |
2. 배경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은 예상치 못하게 프랑스의 지원 없이 베네토 지역으로 퇴각했고,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에 가깝게 추적당했다.[8] 스페인군은 파도바를 점령할 수 없었고,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깊숙이 들어가 9월에는 베네치아 시를 눈앞에 두었다.[8] 스페인의 나폴리 부왕 라몬 데 카르도나는 베네치아에 포격을 하였으나 거의 피해가 없었으며, 그때는 석호를 지나갈 배들이 없었기에 롬바르디아로 향했다.[8] 달비아노는 수백 명의 병사들과 베네치아 귀족 자원병, 대포와 그밖에 지원 등을 얻은 후, 스페인군이 베네토 지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의도로 주도권을 갖고 카르도나의 군대를 추적했다.[6]
2. 1. 캉브레 동맹 전쟁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은 예상치 못하게 프랑스의 지원 없이 베네토 지역으로 퇴각했고,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에 가깝게 추적당했다.[8][3] 스페인군은 파도바를 점령할 수 없었고,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깊숙이 들어가 9월에는 베네치아 시를 눈앞에 두었다.[8][3] 스페인의 나폴리 부왕 라몬 데 카르도나는 베네치아에 포격을 하였으나 거의 피해가 없었으며, 그때는 석호를 지나갈 배들이 없었기에 롬바르디아로 향했다.[8][3] 달비아노는 수백 명의 병사들과 베네치아 귀족 자원병, 대포와 그밖에 지원 등을 얻은 후, 스페인군이 베네토 지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의도로 주도권을 갖고 카르도나의 군대를 추적했다.[6][1]2. 2. 베네치아의 고립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지휘하는 베네치아군은 예상치 못하게 프랑스의 지원없이 베네토 지역으로 퇴각했고,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에 가깝게 추적당하였다.[8] 스페인군은 파도바를 점령할 수 없었고,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에 깊숙히 들어가 9월에는 베네치아 시를 눈앞에 두었다.[8] 스페인의 나폴리 부왕 라몬 데 카르도나는 베네치아에 포격을 하였으나 거의 피해가 없었으며, 그때는 석호를 지나갈 배들이 없었기에 롬바르디아로 향했다.[8] 달비아노는 수백 명의 병사들과 베네치아 귀족 자원병, 대포와 그밖에 지원 등을 얻은 후, 스페인군이 베네토 지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의도로 주도권을 갖고 카르도나의 군대를 추적했다.[6]3. 전투의 전개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은 1513년 10월 7일 이탈리아 북동부 도시 비첸차 외곽에서 카르도나의 군대와 마주쳤다. 페르난도 다발로스와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가 지휘하는 7,000명의 스페인과 독일 보병들은 진형을 잘 잡고 교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베네치아군을 상대로 강력한 돌격을 개시하여 4,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6][7] 이는 베네치아군에게 심각한 충격을 주었고, 결국 베네치아군이 퇴각하면서 달비아노 군대 전체가 흩어지게 되었다.[8]
두 지휘관의 병력들은 1513년 나머지 기간과 1514년 전체 동안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에서 유격전을 계속 벌였다.[6]
3. 1. 양측 군대의 대치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은 프랑스의 지원 없이 베네토 지역으로 퇴각했고,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이들을 추격했다.[8] 스페인군은 파도바를 점령하지 못하고 베네치아 영토 깊숙이 들어와 9월에는 베네치아 시를 눈앞에 두었다.[8] 라몬 데 카르도나는 베네치아에 포격을 가했으나 큰 피해는 없었고, 석호를 통과할 배가 없어 롬바르디아로 향했다.[8] 달비아노는 병사, 베네치아 귀족 자원병, 대포 등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군을 저지하고자 카르도나의 군대를 추격했다.[6]1513년 10월 7일, 베네치아군은 비첸차 외곽에서 카르도나의 군대와 대치했다. 페르난도 데 아발로스와 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가 이끄는 7,000명의 스페인 및 독일 보병은 유리한 위치에서 베네치아군을 공격하여 4,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1][2] 이 공격으로 베네치아군은 큰 타격을 입고 흩어졌다.[3]
두 지휘관의 병력은 1513년 나머지 기간과 1514년까지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계속했다.[1]
3. 2. 스페인군의 승리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은 1513년 10월 7일 이탈리아 북동부의 도시 비첸차 외각에서 카르도나의 군대와 마주쳤다. 페르난도 다발로스와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가 지휘하는 7,000명으로 구성된 스페인과 독일 보병들은 진형을 잘 잡았고 교전 준비가 되어 있어, 베네치아군을 상대로 강력한 돌격을 개시하여, 베네치아군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 (4,500명 이상)를 발생시켰다.[6][7] 이는 심각한 충격이었고 베네치아군이 퇴각하게 만들어 달비아노 군대 전체가 흩어지게 하였다.[8]
4. 전투의 여파
베네치아군은 라 모타 전투에서 스페인군에게 완패했지만, 신성 동맹은 이 승리를 잇지 못했다.[6] 1515년 1월 1일 루이 12세가 사망하고 프랑수아 1세가 왕위를 이었다. 밀라노 공작 작위를 받은 프랑수아 1세는 즉시 이탈리아 내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 스위스와 교황령 연합군은 알프스를 통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밀라노 북쪽으로 이동했지만, 프랑수아 1세는 주요 경로를 피하고 스튀라 계곡을 통해 진격했다.[9] 프랑스 선봉대는 빌라프랑카에서 밀라노 기병대를 기습하여 프로스페로 콜론나를 사로잡았다.[7] 이후, 프랑수아 1세의 주력군은 9월 13일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군과 맞붙었다.[10]
4. 1. 베네치아의 패배와 프리울리에서의 유격전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은 1513년 10월 7일 이탈리아 북동부 도시 비첸차 외곽에서 카르도나의 군대와 마주쳤다. 페르난도 다발로스와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가 지휘하는 7,000명 규모의 스페인과 독일 보병은 진형을 잘 갖추고 교전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이들은 베네치아군을 상대로 강력한 돌격을 개시하여 4,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6][7] 이는 베네치아군에게 심각한 충격을 주었고, 결국 베네치아군은 퇴각하며 달비아노 군대 전체가 흩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8]
두 지휘관의 병력은 1513년 나머지 기간과 1514년 내내 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에서 유격전을 계속 벌였다.[6]
4. 2. 프랑스의 개입과 마리냐노 전투
베네치아군은 스페인군에게 완패했지만, 신성 동맹은 이 승리를 잇지 못했다.[6] 1515년 1월 1일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죽고 프랑수아 1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대관식에서 밀라노 공작 작위를 받은 프랑수아 1세는 즉시 이탈리아 내 자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 스위스와 교황령 연합군은 그를 막기 위해 밀라노 북쪽으로 이동하여 알프스산맥을 통과하는 길을 막으려 했지만, 프랑수아 1세는 주요 길을 피하고 대신 스튀라 계곡을 통해 진격했다.[9] 프랑스 선봉대는 빌라프랑카에서 밀라노 기병대를 기습하여 프로스페로 콜론나를 사로잡았다.[7] 한편, 프랑수아 1세와 프랑스 주력군은 9월 13일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군과 맞붙었다.[10]5. 결과 및 역사적 의의
라 모타 전투에서 베네치아군이 스페인군에게 패배했지만, 신성 동맹은 이 승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1] 1515년 1월 1일 루이 12세가 사망하고 프랑수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밀라노 공작 칭호를 얻은 프랑수아 1세는 즉시 이탈리아 내 자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 스위스군과 교황군의 연합군은 그를 막기 위해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알프스 산길을 봉쇄하려 했지만, 프랑수아 1세는 주요 산길을 피하고 대신 스투라 계곡을 통해 진격했다.[4] 프랑스 선봉대는 빌라프랑카에서 밀라노 기병대를 기습하여 프로스페로 콜론나를 포로로 잡았고,[2] 프랑수아 1세와 프랑스 주력군은 9월 13일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군과 맞붙었다.[5]
5. 1. 캉브레 동맹의 와해
베네치아군은 스페인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지만, 신성 동맹은 이러한 승리를 이어나가지 못했다.[1] 1515년 1월 1일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사망하고 프랑수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밀라노 공작 칭호를 얻은 프랑수아 1세는 즉시 이탈리아 내 자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 스위스군과 교황군의 연합군은 그를 막기 위해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알프스 산길을 봉쇄하려 했지만, 프랑수아 1세는 주요 산길을 피하고 대신 스투라 계곡을 통해 진격했다.[4] 프랑스 선봉대는 빌라프랑카에서 밀라노 기병대를 기습하여 프로스페로 콜론나를 포로로 잡았다.[2] 한편, 프랑수아 1세와 프랑스 주력군은 9월 13일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군과 맞붙었다.[5]5. 2. 이탈리아 전쟁의 장기화
베네치아군은 스페인군에게 완패했지만, 신성 동맹은 이 승리를 이어가지 못했다.[6] 1515년 1월 1일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죽자 프랑수아 1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대관식에서 밀라노 공작 작위를 받은 프랑수아 1세는 즉시 이탈리아에 있는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 스위스와 교황령 연합군은 그에 맞서 알프스를 통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밀라노 북쪽으로 이동했지만, 프랑수아 1세는 주요 진로를 피하고 대신에 스튀라 계곡을 통해 진격했다.[9] 프랑스 선봉대는 빌라프란카에서 밀라노 기병대를 기습했고, 프로스페로 콜론나를 붙잡았다.[7] 한편 프랑수아 1세와 프랑스 주요 병력들은 9월 13일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군과 마주쳤다.[10]참조
[1]
서적
Norwich p. 429
[2]
서적
The Art of War in Italy (1494–1529)
[3]
서적
Norwich pp. 428–429
[4]
서적
Norwich p. 430
[5]
서적
Norwich p. 431
[6]
서적
Norwich p. 429
[7]
서적
The Art of War in Italy (1494–1529)
[8]
서적
Norwich pp. 428–429
[9]
서적
Norwich p. 430
[10]
서적
Norwich p.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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