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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1세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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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 1세는 1494년 앙굴렘 백작 샤를 드 오를레앙과 사부아의 루이즈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515년부터 1547년까지 프랑스의 왕으로 재위했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프랑스에 도입하여 예술을 후원하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예술가들을 초청했다. 또한, 북미 대륙 탐험을 지원하고, 관료 정치를 개혁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종교 개혁 시기에는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했으며, 군사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와 대립하며 이탈리아 전쟁을 지속했다. 프랑수아 1세는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어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했으며, 1547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앙리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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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1세 (프랑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530년 장 클루에가 그린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
프랑수아 1세, 1527~1530년 경
계승프랑스의 군주
스타일(더 보기)
통치 기간1515년 1월 1일 – 1547년 3월 31일
대관식1515년 1월 25일
대관식 장소프랑스
선임자루이 12세
후임자앙리 2세
계승 1밀라노 공작
통치 기간 11515년 10월 11일 – 1521년 11월 20일
선임자 1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
후임자 1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
출생명프랑수아 도를레앙
출생일1494년 9월 12일
출생지코냐크 샤토 드 코냐크, 프랑스
사망일1547년 3월 31일
사망지프랑스 랑부예 성
매장일1547년 5월 23일
매장지프랑스 생드니 대성당
배우자클로드 드 프랑스 (1514년 결혼, 1524년 사망)
엘레오노르 드 오트리슈 (1530년 결혼)
자녀루이즈 드 발루아
샤를로트 드 발루아
프랑수아 3세 드 브르타뉴 공작
앙리 2세
마들렌, 스코틀랜드 여왕
샤를, 오를레앙 공작
마르그리트, 사보이 공작부인
가문발루아-앙굴렘 가문
아버지샤를, 앙굴렘 백작
어머니루이즈 드 사보이
서명
종교가톨릭교
별칭아버지이자 문예 부흥의 복원가 (프랑스어: le Père et Restaurateur des Lettres)
큰 코 프랑수아 (프랑스어: François au Grand Nez)
그랑 콜라 (프랑스어: Grand Colas)
기사 왕 (프랑스어: Roi-Chevalier)
프랑스어 표기
프랑스어프랑수아 1세 (프랑스어: François Ier)
고대 프랑스어프랑수아 (프랑스어: Françoys)

2. 어린 시절

프랑수아 1세는 1494년 9월 12일, 샤랑트주 코냑의 코냑 성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앙굴렘 백작 샤를 드 오를레앙이고 어머니는 사부아의 루이즈이며,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증손자였다.[1] 위로는 누나 마르그리트가 있었다.[49] 당시 프랑스 왕위는 그의 사촌인 샤를 8세가, 다음 계승권은 샤를 8세의 사촌이자 프랑수아의 아버지의 사촌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가지고 있었기에 프랑수아의 가문이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1496년, 프랑수아는 1살 3개월의 나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앙굴렘 백작위를 계승했다.[54] 1498년, 샤를 8세가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루이 12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12세에게도 남자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살리카법에 따라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인 4살의 프랑수아가 프랑스 왕위의 추정 상속인으로 지정되었고,[1] 발루아 공작 칭호를 받았다.

프랑수아가 교육받던 시기는 선왕 샤를 8세와 루이 1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탈리아 전쟁 등을 통해 이탈리아와의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프랑스에 새로운 사상, 특히 르네상스의 영향이 확산되던 때였다. 프랑수아의 어머니 사부아의 루이즈는 르네상스 예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이는 아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프랑수아는 라틴어 문법 교사 데물렝, 크리스토프 드 롱게일 등에게 교육을 받았는데, 이들은 프랑수아에게 당시의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가르치려 노력했다. 비록 프랑수아가 완전한 인문주의자 교육을 받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전의 프랑스 왕들보다 인문주의적 소양을 더 많이 함양하게 되었다.

1505년, 건강이 악화된 루이 12세는 자신의 딸이자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녀인 클로드 드 프랑스와 프랑수아의 결혼을 추진하여 귀족 회의를 통해 약혼시켰다. 클로드의 어머니 브르타뉴의 안이 사망한 후, 1514년 5월 18일 프랑수아와 클로드는 결혼하였다.[55] 이 결혼으로 프랑수아는 아내와 함께 공동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3. 재위 기간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이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군주로 평가받으며, 그의 치세 동안 예술과 문예가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의 끊임없는 경쟁으로 점철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의 강력한 세력에 맞서기 위해 때로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협력하려 했고, 심지어 기독교 세계의 숙적인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 이러한 대 카를 5세 정책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국의 존립을 위협하던 카를 5세의 구상을 좌절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가톨릭 양대 강국의 적대 관계는 종교 개혁의 확산을 용이하게 했고, 오스만 제국이 빈을 포위하고 헝가리 왕국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국내적으로 프랑수아 1세의 통치는 종교 개혁의 급속한 확산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점차 개신교에 대한 탄압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었다. 또한, 전쟁 비용 조달과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해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며[51], 왕실 재산과 징세권을 담보로 연금형 장기 국채를 발행하는 새로운 재정 조달 방식을 고안하기도 했다.[52] 이러한 개혁들은 다음 왕인 앙리 2세에게 계승되었다.

프랑수아 1세의 통치는 후대에도 영향을 미쳐, 빅토르 위고의 희곡 왕은 즐긴다(Le Roi s'amuse)(이후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원작이 됨)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문학 작품에서 그의 시대가 언급되기도 한다.

3. 1. 예술의 후원자

1515년에 그려진 프랑수아 1세


프랑수아 1세가 즉위했을 당시 프랑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던 시기였다. 그는 르네상스 예술의 열정적인 후원자로서, 당대의 뛰어난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프랑스로 초청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프랑수아 1세의 설득으로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냈으며, 이때 '모나리자'(프랑스에서는 La Joconde|라 조콩드프랑스어로 알려짐)를 포함한 자신의 걸작들을 가져왔다. 이 작품들은 다 빈치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프랑스에 남게 되었다.

1818년 앵그르가 그린, 1519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마지막 숨결을 맞이하는 프랑수아 1세


이 외에도 화가 안드레아 델 사르토, 로소 피오렌티노, 줄리오 로마노, 프리마티초, 금세공인 벤베누토 첼리니, 그리고 건축가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 등 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 왕실 궁전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데 기여했다.[2]

프랑수아 1세는 또한 이탈리아에 요원들을 파견하여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라파엘로와 같은 이탈리아 거장들의 예술품을 수집하고 프랑스로 들여왔다. 이들 중개상은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을 프랑스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울 정도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왕위에 오를 당시 프랑스 왕궁에는 주목할 만한 그림이나 조각상이 거의 없었으나, 프랑수아 1세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풍부한 왕실 컬렉션이 구축되었다.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준 높은 왕실 예술품 컬렉션의 상당 부분은 바로 프랑수아 1세의 통치 기간에 마련된 것이다. 이처럼 그는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군주로 평가받으며, 그의 치세 동안 프랑스의 미술과 문예는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의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숭배했던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3. 2. 다빈치와의 만남

1515년 9월,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하여 7년 넘게 이어진 캉브레 동맹 전쟁(1508~1516)을 종결시키기 위해 이탈리아 볼로냐로 향했다. 같은 해 12월, 종전 협약을 위해 교황 레오 10세와 회동한 자리에서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만났다.[75][76][77] 선왕 루이 12세를 통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프랑수아 1세는 그를 프랑스로 초청하였다.

국왕의 초대를 받은 다빈치는 1516년 프랑스행을 결정하고 그해 여름,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와 함께 앙부아즈에 도착했다. 프랑수아 1세는 앙부아즈에서 가까운 클로 뤼세에 저택을 마련해 주었다. 이때 다빈치는 3점의 그림(모나리자, 성 안나와 성 모자, 세례자 요한)을 가져갔으며, 프랑스에서 <성 안나와 성 모자>와 <모나리자>를 완성하였다.

프랑수아 1세는 가끔 다빈치를 찾아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빈치는 로모랑탱에 큰 성을 건축하고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만들자고 제안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다빈치는 여러 방면에 대한 오랜 연구를 정리하고 운하도를 설계하였다. 1519년 5월 2일 다빈치는 프랑스에서 사망했으며 생 플로랑탱 교회에 묻혔다.[75]

프랑수아 1세가 왕위에 오른 1515년은 르네상스가 프랑스에 도래한 시기였고, 그는 열정적인 예술 후원자가 되었다. 프랑수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당대의 위대한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다 빈치는 말년에 프랑스를 고향으로 삼도록 설득되었고,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지만, '모나리자'(프랑스에서는 La Joconde|라 조콩드fra로 알려짐)를 포함한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을 가져왔으며, 이 작품들은 그의 사후에도 프랑스에 남았다.[2]

3. 3. 문학 진흥

1515년의 프랑수아 1세


프랑수아 1세는 문인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궁정인''에서는 전쟁에 몰두한 프랑스에 문화를 가져올 큰 희망으로 묘사된다. 그는 당대의 많은 주요 작가들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시를 짓기도 했다.

프랑수아 1세는 왕립 도서관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문주의자 기욤 뷔데를 수석 사서로 임명하고 도서관 소장품 확충에 나섰다. 이탈리아에 요원을 보내 희귀 서적과 필사본을 수집하게 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립 도서관의 규모는 크게 확장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이 구입한 책을 직접 읽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3] 또한 그는 전 세계의 학자들이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여 지식 보급에 기여하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1537년에는 몽펠리에 칙령에 서명하여, 프랑스에서 판매되는 모든 책의 사본을 왕립 도서관에 납본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는 도서관 장서 확보에 크게 기여했다.

프랑수아 1세의 누이인 나바라의 마르그리트 역시 뛰어난 작가였으며, 고전 단편 소설집인 ''엡타메롱''을 저술했다.

3. 4. 건축

프랑수아 1세는 인상적인 건축가로서 새로운 건축물 건설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했다. 그는 선왕들이 시작했던 앙부아즈 성의 작업을 이어갔으며, 블루아 성의 개보수를 시작했다. 또한 통치 초기에 장대한 샹보르 성 건축을 시작했는데, 이 성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을 가능성이 있다.

프랑수아 1세의 샹보르 성은 뚜렷한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프랑수아 1세는 루브르 성을 재건축하여 음울한 중세식 요새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건물의 설계를 통제하기 위해 파리에 새로운 시청(Hôtel de Ville) 건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부아 드 불로뉴에 마드리드 성 건설을 지시했으며, 생제르맹 성의 재건축도 명했다.

그의 가장 큰 건축 계획은 퐁텐블로 궁전의 재건축과 확장이었다. 완공된 퐁텐블로 궁전은 프랑수아 1세가 가장 선호하는 거주지였으며, 그의 공식적인 애첩인 안 드 피셀르 되이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프랑수아 1세의 계획에 따라 궁전 내외부는 호화롭게 장식되었는데, 예를 들어 야외 정원에는 포도주가 물과 섞여 나오는 분수가 설치되기도 했다.

3. 5. 북미 대륙 탐험

1524년 조반니 다 베라차노의 항해


스페인 제국포르투갈 제국신대륙을 분할한 것에 반발하여, 프랑수아 1세는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와의 교류를 증진시키고자 했다. 특히 1481년 6월 교황 식스토 4세교황 칙서 Aeterni regisla를 통해 아프리카와 인도에 대한 포르투갈의 독점적 권리를 인정한 것과, 1494년 6월 7일 포르투갈카스티야 왕국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새롭게 발견된 땅을 양분한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프랑수아 1세는 "태양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빛나는 것처럼 나를 위해서도 빛난다. 나는 아담의 유언 중에서 내가 세상의 몫을 거부해야 하는 조항을 꼭 보고 싶다"고 선언하며 기존 질서에 도전했다.[15] 이는 카를 5세 치하의 합스부르크 제국이 신세계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는 것에 대한 견제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프랑수아 1세는 1517년 르아브르 항구를 건설했다. 기존의 옹플뢰르와 아르플뢰르 항구가 토사 퇴적으로 기능이 저하되자 새로운 항구 건설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르아브르는 초기에 왕의 이름을 따 '프란시스코폴리스'로 명명되었으나, 이 이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1524년, 프랑수아 1세는 리옹 시민들이 자금을 지원한 조반니 다 베라차노의 북아메리카 탐험을 후원했다. 베라차노는 이 탐험에서 현재의 뉴욕 시 지역을 방문하여 '뉴앙굴렘'이라 이름 붙였고, 뉴펀들랜드섬프랑스 왕령임을 선포했다. 베라차노가 1524년 7월 8일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낸 보고서는 ''첼레르 코덱스''로 알려져 있다.[16]

1531년, 베르트랑 도르네상은 브라질 페르남부쿠에 프랑스 무역 기지를 건설하려 시도했다.

1534년 4월, 프랑수아 1세는 자크 카르티에를 탐험대장으로 임명하여 "금과 기타 부가 많다고 하는 섬과 땅"을 찾도록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으로 파견했다.[78] 카르티에는 2척의 배에 60명의 선원을 태우고 생말로를 출발하여 10월 10일 뉴펀들랜드섬에 도착했다. 이후 벨아일 해협을 항해하며 마들렌 제도와 프린스에드워드 섬을 발견했다. 또한 존 캐벗이 1497년에 발견했던 캐나다 해안에[79] 상륙하여 십자가를 세우고 프랑스 왕령임을 선언했다.

1535년, 카르티에는 다시 대서양을 건너 현재의 퀘벡에 해당하는 스타다코나에 상륙했으며, 몬트리올 부근까지 탐험을 이어갔다. 1541년, 프랑수아 1세는 장 프랑수아 로베르발에게 캐나다 정착과 "성 가톨릭 신앙" 전파를 명했으며, 카르티에는 1541년과 1544년에 다시 북미 대륙 탐험에 나섰다.

그러나 총 4차례에 걸친 카르티에의 탐험은 혹독한 추위와 괴혈병과 같은 질병으로 많은 선원들의 희생만 낳았을 뿐,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의 북미 탐험은 이후 약 60년간 중단되었다.[8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탐험은 훗날 1604년 사뮈엘 드 샹플랭이 다시 북미 탐험을 재개하고 퀘벡을 건설하여[81] 프랑스의 캐나다 식민 지배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6. 관료 정치 개혁

1539년 8월의 빌레르코트레 칙령은 공식 문서에 프랑스어 사용을 규정했다.


프랑수아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중앙 집권 체제(절대 왕정)를 확립하고, 전쟁 비용 조달 및 예술 발전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 운영을 효율화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에 따라 세수 증대를 포함한 일련의 행정 및 관료 개혁이 추진되었으며[51], 이러한 개혁은 다음 왕인 앙리 2세 시대에도 이어졌다.

프랑수아 1세는 지식과 행정 분야에서 라틴어의 독점적 지위를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를 시행했다. 1530년, 그는 프랑스어를 왕국의 공식 언어로 사용하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같은 해 인문주의자 기욤 뷔데의 제안을 받아들여 콜레주 로얄을 설립했다. 이 기관에서는 학생들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람어를 배울 수 있었고, 1539년부터는 기욤 포스텔의 지도 아래 아랍어 교육도 이루어졌다.[26]

특히 1539년 빌레르코트레 성에서 반포된 빌레르코트레 칙령은 중요한 개혁이었다.[27] 이 칙령은 왕국의 모든 행정 문서와 법률 기록에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를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모든 교구의 성직자에게 의무적으로 신자들의 출생, 결혼, 사망 기록을 작성하고 보관하도록 하여 호적 등기 제도를 마련했는데, 이는 유럽에서 혈통 정보를 포함한 체계적인 인구 통계 기록의 시초가 되었다.

재정 분야에서도 개혁이 이루어졌다. 의회의 지원 없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왕실 직할 재산과 징세권을 담보로 하는 연금형 장기 국채 발행 방식이 고안되었다. 이 국채는 파리 시청과 리옹의 은행 컨소시엄을 통해 발행되었으며, 이자율은 당시 국왕의 신용도를 반영하여 연 10%에 달했다.[52]

3. 7. 종교 정책

프랑수아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서유럽에서는 기독교 세계의 큰 분열이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로마 가톨릭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시작된 종교 개혁의 물결은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쳐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형성되었다.

1545년 메린돌 학살


처음에 프랑수아 1세는 새로운 종교 운동에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루터의 신학에 관심을 가진 그의 누이 나바르의 마르그리트의 영향[29]과, 많은 독일 제후들이 그의 경쟁자인 카를 5세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정치적 이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관용 속에서도 1523년 모베르 광장에서 일부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28]

그러나 1534년 10월 17일 밤에 발생한 '벽보 사건'(또는 플래카드 사건) 이후 프랑수아 1세의 태도는 급격히 변했다. 개신교도들이 파리 시내와 여러 주요 도시, 심지어 왕의 침실 문에까지 가톨릭 미사를 부정하는 내용의 격문을 붙인 사건이었다. 이 격문은 개신교 목사 앙투안 마르코르트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들을 격분시켰고, 프랑수아 1세 역시 이 운동을 자신에 대한 음모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프로테스탄티즘 신봉자들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다. 개신교도들은 투옥되거나 처형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 전체가 파괴되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1540년 이후 에티엔 돌레와 같은 인물들이 고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30] 인쇄물에 대한 검열이 시행되었으며, 장 칼뱅과 같은 주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가들은 국외로 망명해야만 했다. 이러한 박해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고 수만 명이 집을 잃었다.

개신교에 대한 박해는 1540년 퐁텐블로 칙령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박해는 계속되어, 1545년에는 프랑수아 1세의 명령으로 메린돌 학살이 일어나 루터 이전부터 존재했던 왈도파 신자들이 대거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3. 8. 군사 활동

마리냐노 전투에서의 프랑수아 1세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는 1538년 니스 휴전에서 평화를 맺었다. 프랑수아 1세는 실제로 카를 5세를 직접 만나는 것을 거부했고, 조약은 별도의 방에서 서명되었다.


프랑수아 1세의 마리냐노 전투 모습


파비아 전투를 묘사한 태피스트리의 세부 사항


프랑수아 1세의 치세 동안 군사 분야에서의 성공은 제한적이었다. 즉위 직후인 1515년 9월, 그는 직접 3만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마리냐노 전투에서 당시 무패를 자랑하던 스위스 용병 군대를 격파하며 군사적 명성을 얻었고, 이 승리 덕분에 이탈리아의 밀라노 공국을 점령할 수 있었다.[7] 이 전투는 그의 군사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성공이었으나, 동시에 그가 거둔 유일한 대규모 승리이기도 했다.

프랑수아 1세의 군사 활동 대부분은 그의 숙적이자 경쟁자였던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와의 대결에 집중되었다.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일 뿐만 아니라 스페인,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 주변의 여러 영토를 개인적으로 통치하고 있었기에 프랑수아에게 큰 위협이었다. 프랑수아는 이러한 위협에 맞서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동맹을 맺고자 1520년 금란의 들판에서 화려한 회담을 가졌으나, 양국의 이해관계 충돌로 결국 동맹은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프랑수아는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에서 황제가 되려 했으나 카를 5세에게 패배했다.

이탈리아를 둘러싼 전쟁은 계속되었다. 4년 전쟁 중이던 1521년 11월, 프랑수아는 신성 로마 제국군의 공세와 밀라노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밀라노를 포기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샤를 3세 드 부르봉 공작이 프랑수아의 모후와의 상속 분쟁 끝에 카를 5세에게 투항하여 내부의 적이 되기도 했다.

결정적인 패배는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찾아왔다. 이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는 체사레 헤르콜라니에게 말이 부상당하고, 샤를 드 라누아를 비롯한 스페인 사람 후안 데 우르비에타, 디에고 다빌라, 알론소 피타 등에게 사로잡히는 치욕을 겪었다.[82] 그는 포로 신세로 마드리드로 압송되었다. 프랑수아는 마드리드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모든 것을 잃었으나, 명예와 목숨은 건졌다"고 썼다고 전해진다.[9]

프랑스는 국왕의 석방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모후 루이즈 드 사부아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술레이만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 유럽 기독교 세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83][84][85][86] 결국 프랑수아 1세는 1526년 1월 14일, 밀라노, 플랑드르, 부르고뉴에 대한 권리 포기[10][11] 및 카를 5세의 누이 엘레오노르와의 결혼 등을 조건으로 하는 마드리드 조약에 서명하고 1526년 3월 17일 풀려났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 프랑수아와 앙리(훗날 앙리 2세)를 대신 인질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로 돌아온 직후, 프랑수아는 조약이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하며 이행을 거부했다.[87]

이후 프랑수아는 카를 5세에 대한 견제를 계속했다. 1526년 5월,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교황 클레멘스 7세, 베네치아 공화국 등과 함께 코냐크 동맹을 결성하고 코냐크 동맹 전쟁 (1526–1530)에 참여했으나[12]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529년 캄브레 조약(일명 '귀부인들의 평화')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인질로 잡혀있던 두 아들이 풀려나고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프랑수아는 군사력 강화를 위해 1534년 7월 24일, 스페인 테르시오를 모델로 한 7개 보병 군단(Légions) 창설 칙령을 발표했다. 각 군단은 6,000명으로 구성되었고, 총 42,000명 중 12,000명이 아르크부스 사수로 편성되어 화약 무기의 중요성을 반영했다. 이들은 국가 상비군으로 운영되었으며, 병사들은 급여를 받고 세금 감면 혜택을 누렸으나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13]

카를 5세와의 경쟁은 계속되어 이탈리아 전쟁 (1536–1538)으로 이어졌다. 프랑수아는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헤센 방백 필리프 1세와도 비밀 동맹(1534)을 맺는 등 다각적인 외교를 펼쳤다. 이 전쟁은 니스 휴전(1538)으로 잠시 중단되었으나, 다시 이탈리아 전쟁 (1542–1546)으로 재개되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수아는 오스만 해군과 연합하여 1543년 니스를 공격하기도 했다. 결국 재정난과 독일 내 슈말칼덴 동맹과의 갈등에 직면한 카를 5세와 크레피 조약(1544)을 맺으며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14]

결론적으로 이탈리아 전쟁은 프랑수아 1세의 치세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사건이었으며, 그는 '기사왕'으로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의 대 카를 5세 정책은 프랑스 왕국을 유지하는 데는 기여했으나,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용이하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3. 9. 오스만 제국과의 동맹

프랑수아 1세(왼쪽)와 술레이만 1세 (오른쪽)는 프랑스-오스만 동맹을 시작했다. 둘 다 티치아노가 1530년경에 개별적으로 그렸다.


카를 5세 치하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력, 특히 신세계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는 것에 맞서기 위해, 프랑수아 1세는 오스만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프랑스의 지중해 무역 발전을 도모하고 전략적 군사 동맹을 구축하고자 했다.

프랑수아 1세 시기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공식 관계를 수립했으며, 기욤 포스텔의 지도 아래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아랍어 교육을 시작한 최초의 유럽 국가가 되었다.[20]

유럽 외교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프랑수아는 오스만 제국과 이해관계를 맺고 이를 프랑스-오스만 동맹으로 발전시켰다. 프랑수아의 주요 목표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할 동맹을 찾는 것이었다.[21] 프랑수아가 내세운 명분은 오스만 영토 내 기독교인 보호였다. 이 동맹은 "기독교와 비기독교 제국 간의 최초의 비이념적 외교 동맹"으로 평가받지만,[22] 당시 기독교 세계에서는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23] "불경한 동맹" 또는 "프랑스 플뢰르 드 리스와 오스만 별과 초승달의 신성 모독적인 결합"으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이해관계에 부합했기 때문에 동맹은 수년간 지속되었다.[24]

두 강대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여 협력했으며, 1543년에는 니스 공방전에서 합동 해상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프랑수아 1세의 대 카를 5세 정책은 성공과 실패가 공존했지만, 오스만과의 동맹을 통해 프랑스 왕국의 존립을 위협하려던 카를 5세의 구상을 좌절시키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이처럼 가톨릭 주요 강국인 프랑스와 합스부르크의 적대 관계는 서유럽 기독교 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일어난 종교 개혁의 확산을 용이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이 제1차 빈 포위를 감행하고 헝가리 왕국의 거의 전 영토를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수아 1세는 이슬람 세계와의 관계 확장을 모색하여, 1533년 피에르 드 피통 대령을 모로코에 대사로 파견함으로써 공식적인 프랑스-모로코 관계를 시작했다.[25] 같은 해 8월 13일, 와타시드 왕조의 페스 통치자 아부 알-아바스 아흐마드 이븐 무하마드는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의 접근을 환영하고 프랑스 상인들의 자유로운 항해와 보호를 허가했다.

4. 죽음

프랑수아 1세는 1547년 3월 31일,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앙리 2세의 28번째 생일에 랑부예 성에서 사망했다. 그는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처음 생각했던 왕관의 무게에 대해 불평하며 죽었다"고 전해진다.[31] 그는 브르타뉴 공작 부인 클로드 드 프랑스와 함께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뒤는 아들 앙리 2세가 이었다.

프랑수아 1세의 무덤과 그의 아내, 어머니의 무덤은 1793년 10월 20일 프랑스 혁명 절정기인 공포 정치 동안 다른 프랑스 왕과 왕족들의 무덤들과 함께 훼손되었다.

빅토르 위고1832년에 프랑수아 1세를 소재로 한 희곡 Le roi s'amuse|르 루아 사뮈즈프랑스어(왕은 즐긴다)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왕의 광대 트리블레의 복수극을 다루었으나, 특권 계급 비판 내용 때문에 초연 다음 날 상연 금지되었다가 1882년에야 다시 상연되었다. 이 희곡은 주세페 베르디에 의해 오페라화되어 1851년에 『리골레토』로 초연되었다. 또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서문에서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경쟁에 대한 책이 언급된다.

5. 평가

프랑수아 1세의 대형 컬버린. 그의 문장과 좌우명이 새겨져 있다. 1830년 알제에서 회수된 오스만 동맹에 대한 선물. 군사 박물관.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내에서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그의 즉위 500주년(1994년)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는데, 이는 대중적, 학문적 기억 속에서 그가 건설한 수많은 성, 예술품 수집, 학자 및 예술가 후원 등의 업적이 간과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파비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혀 프랑스에 불명예를 안긴 '플레이보이' 군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는 역사가 쥘 미슐레에 의해 상당 부분 형성되었다.[32]

프랑수아의 개인 문장은 전설 속의 도롱뇽이었고, 그의 라틴어 좌우명은 Nutrisco et extinguo|누트리스코 에트 엑스팅구오la("나는 [좋은 것을] 기르고 [나쁜 것을] 멸한다")였다. 그는 긴 코 때문에 François du Grand Nez|프랑수아 뒤 그랑 네프랑스어('큰 코의 프랑수아')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구어체로는 Grand Colas|그랑 콜라프랑스어 또는 Bonhomme Colas|보놈 콜라프랑스어로도 불렸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용맹함으로 인해 le Roi-Chevalier|르 루아 슈발리에프랑스어('기사왕') 또는 le Roi-Guerrier|르 루아 게리에프랑스어('전사왕')으로 칭송받기도 했다.[33]

영국의 역사가 글렌 리처드슨은 프랑수아 1세를 다음과 같이 성공적인 군주로 평가한다.

:그는 통치뿐만 아니라 지배한 왕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위대한 전사 왕이 되기 위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데 있어 전쟁의 중요성과 높은 국제적 위상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전투에서 용감했지만, 성급한 면이 있어 성공과 재앙을 모두 겪었다. 국내적으로 프랑수아는 왕실의 특권을 최대한 행사했다. 그는 과세 및 기타 문제에 대해 이익 집단과 힘든 협상을 벌였으며, 종종 협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왕실의 권력을 강화하고 좁은 개인 집행부에 의사 결정을 집중시켰지만, 광범위한 관직, 선물 및 자신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를 사용하여 그의 통치에 의존하는 귀족 계급 사이에서 선택적 개인적 친밀감을 구축했다 .... 프랑수아 시대에 프랑스 궁정은 16세기 동안 그 명성과 국제적 영향력의 절정에 있었다. 그의 사후 수 세기에 걸쳐 의견이 상당히 다양했지만, 프랑스, 르네상스에 대한 그의 문화적 유산은 엄청났으며, 그는 가장 위대한 왕 중 하나로 명성을 굳혀야 한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를 상징하는 국왕으로, 그의 치세 동안 프랑스의 미술과 문예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군사 및 외교적으로도 프랑스 역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프랑수아 1세는 강력한 라이벌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경쟁했으며, 이 때문에 두 강대국 사이에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려 했던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외교적 행보에 영향을 받았다. 카를 5세에 대한 프랑수아의 정책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프랑스 왕국을 위협하는 카를 5세의 구상을 좌절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가톨릭 세계의 두 주요 강대국이 적대 관계로 돌아선 것은 서유럽 기독교 세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는 당시 확산되던 종교 개혁의 세력 확장을 용이하게 했으며, 특히 오스만 제국이 빈을 포위하고 헝가리 왕국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국내적으로 프랑수아 1세의 통치는 종교 개혁의 급속한 확산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중앙 집권 체제(절대 왕정)를 강화하고 전쟁 비용을 조달하며 예술을 진흥시키기 위해 국가 운영 시스템을 정비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에 따라 그는 특히 세수 증대를 목표로 하는 일련의 행정 개혁을 단행했으며[51], 이러한 개혁은 그의 아들인 앙리 2세에게 계승되었다.

프랑수아 시대에는 의회의 승인 없이도 자금을 조달하는 새로운 방법이 고안되었다. 이는 국왕의 직할 재산과 징세권을 담보로 연금형 장기 국채를 발행하는 방식이었다. 담보는 파리 시청과 리옹의 은행 컨소시엄에 위탁되었고, 여기서 발생하는 수입이 우선적으로 국채 상환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당시 국왕의 신용도가 낮았기 때문에, 발행된 국채의 이자율은 연 10%에 달했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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