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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냐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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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냐노 전투는 1515년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스위스 용병을 주력으로 하는 스위스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으며, 스위스의 무적 팔랑크스 전술의 종말을 알리고, 프랑스 군사력의 우위를 입증했다. 프랑스는 밀라노를 장악하고 롬바르디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으며, 스위스는 밀라노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고 이후 프랑스와의 영구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전투는 군사 기술과 전술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용병 제도의 한계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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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냐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프랑수아 1세가 그의 군대에게 스위스군 추격을 멈추라고 명령함, [[알렉상드르 에바리스트 프라고나르]]의 낭만주의 19세기 작품 ([[베르사유궁]], [[전쟁의 방]])
프랑수아 1세가 그의 군대에게 스위스군 추격을 멈추라고 명령함, 알렉상드르 에바리스트 프라고나르의 낭만주의 19세기 작품 (베르사유궁, 전쟁의 방)
분쟁캉브레 동맹 전쟁
날짜1515년 9월 13일–14일
장소현재의 이탈리아 밀라노 남동쪽 멜레냐노 근처
결과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의 승리
영토프랑스가 밀라노를 점령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Royal flag of France.svg|21px]] 프랑스 왕국
[[파일:Flag of Republic of Venice (1659-1675).svg|21px]] 베네치아 공화국
교전국 2[[파일:Early Swiss cross.svg|21px]] 구스위스 연방
[[파일:Flag of the Duchy of Milan (1450).svg|21px]] 밀라노 공국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프랑수아 1세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
루이 드 라 트레무아유
샤를 3세 드 부르봉
지휘관 2마르크스 뢰이스트
막시밀리안 스포르차스포르차는 전투에 참전했으며, 스위스의 명목상 고용주로서, 그들의 지휘관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는 매우 의심스럽지만 그는 실제로 지휘를 했다.
마테우스 시너 추기경
병력 규모
병력 1프랑스: 30,000명 및 72문
베네치아 증원군: 10,000명 (거의 투입되지 않음)
병력 222,200명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5,000명 사망
미상 부상자
사상자 210,000명 사망
미상 부상자
연관된 전쟁

2. 배경

마리냐노 원정에서 수년간 스위스가 성공을 거둔 동안,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는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스위스는 노바라 전투 (1513년)에서 승리를 거두고 밀라노 공국을 장악,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아들이자 밀라노를 독립적으로 통치한 마지막 스포르차 가 공작 마시밀리아노를 공작 자리에 앉혔다.[6]

마리냐노 전투의 서막은 프랑수아 1세가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경로인 콜 다르젠티에르를 넘어 새로 포장한 도로에 대포 부품 (72개의 대형 대포)들을 끌고 가며 알프스를 통과한 것이었다.[7] 이는 당시 시대 가장 앞선 군사 기술 중 하나이자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것과 동급으로 여겨졌다. 빌라프란카에서 자크 드 라 팔리스[8]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신성 동맹군의 후방에 위치한 교황군 사령관 프로스페로 콜론나를 과감한 기병대 공격으로 기습을 가하여 사로잡았다 (피에르 테라유 바야르가 이 작전의 전문적인 지식들을 제공했다). 콜론나와 그의 수행원들을 제외하고도, 프랑스군은 600 마리의 말을 포함하여 습격에서 많은 전리품을 차지했다.

콜론나의 생포와 피에몬테 평야에서 프랑스의 기습적인 출현은 신성 동맹 측을 충격에 빠트렸다. 교황과 스위스는 모두 프랑수아와 협상 조건을 모색했고, 나폴리에서 오던 스페인 동맹군은 사건 전개를 기다리며 멈추었다. 주요 스위스군은 밀라노로 퇴각했고, 전쟁에 지치고 수 년간 성공적인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을 챙기고 고향으로 돌아가길 열망하던 대부분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촉구했다.

스위스 측에서 밀라노를 프랑스에 돌려주기로 결정에 도달했지만, 스위스 칸톤에서 새롭게 도착한 호전적이던 병력들은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가길 바라지 않았기에 합의를 취소해버렸다. 불화가 스위스군을 휩쓸 때 마테우스 시너 시옹의 추기경이자 프랑수아의 최대의 적이 9월 13일 스위스군에 열렬한 연설을 하며 자극시켰다.[12] 시너는 승리를 거두면 엄청난 이득이 있을거라 언급하며, 국민적 자부심에 호소하며, 즉각적인 전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2. 1. 스위스 용병의 명성과 한계

2. 2. 프랑스의 군사적 혁신

3. 전투의 경과

스위스군은 평범한 평야 위에 있는 조금 전소한 마을인 마리냐노에서 프랑수아의 군대와 마주쳤다. 조약을 체결했기에, 프랑스군은 교전을 예상하지 않았다. 프랑수아 1세가 그의 텐트에서 새로운 감옷을 입으려하고 있을 때, 정찰병이 스위스군의 진격 소식을 보고했다. 프랑스군은 재빠르게 행동에 나서, 세 가지 대형을 형성했다.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와 원수 지안 자코모 트리불치오의 공동 지휘하에 프랑스 선봉대는 산 줄리아노(San Giuliano) 근처의 두 개의 낮은 언덕을 점령했다.[9] 이 부대는 좌측에 (토공사와 파비세 방패로 보호받는) 석궁병, 중앙에 대규모의 란츠크네흐트 보병 대형, 그리고 우측에 포병을 호위하는 아르케뷰지어로 구성되었다. 포병은 부대의 남동쪽과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배치되었다. 2km 후방에는 프랑수아 1세가 직접 기병대와 겔더른 흑색 부대(Black Band of Gueldern)로 알려진 네덜란드에서 모집한 6,000명의 란츠크네흐트 부대를 이끌었다.[9] 마지막으로, 중앙 부대 후방 1km 지점에 있는 후위대는 국왕의 매형인 알랑송 공작 샤를 4세가 이끌었다. 창병, 아르케뷰스, 기병의 조화로운 구성을 갖춘 프랑스군과 달리 스위스군은 거의 전적으로 창 보병으로 구성되었고, 12문도 안 되는 포병을 보유했다.[10] 프랑수아 1세의 중앙 대형의 앞은 악명높은 검은 군단이 지키고 있는 72개의 야전 거대 포열이였다. 또한 왕의 대형에는 바야르의 기사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창기병들인 그의 부대가 있었다.

마리냐노 전투(1515년)에서 영광과 명예, 그리고 돈을 위해 싸우는 스위스 용병과 독일 란츠크네흐트들. 르네상스 시대 군대의 대부분은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우르스 그라프(Urs Graf)가 그린 마리냐노 전투도. 그 자신도 스위스 용병 출신으로, 이 전투에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몰이 가까워지자, 스위스군은 밀집한 창병 대형으로 구성된 세 개의 부대로 프랑스군에 접근했다. 그들에게는 포병이나 기병이 없었고 적들이 먼저 그들을 공격하기전에 빠르게 적들에게 달려드는 과거의 방식만을 배웠다. 마리냐노에서의 교전은 스위스 선봉 팔랑크스 대형이 가운데에 위치한 왕의 대형 앞에 위치한 포대에 파이크를 아래로 내리며 돌진하는 “헛된 희망”을 갖고 붙으면서 시작되었다. 스위스군의 첫 공격이 란츠크네흐트 수비대를 뒤로 물러서게 하고 몇 개의 대포를 탈취하며 성공했을때, 그들의 진격 속도는 프랑스군의 포격을 효과적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우익의 부르봉의 기병대가 측면을 역습하여 돌격대를 스위스 선봉대의 보호 아래로 몰아냈다. 추격하던 프랑스 기병들은 큰 손실을 입은 후 1km나 후퇴해야 했다.[11]

3. 1. 초반 전투

스위스군은 평범한 평야 위에 있는 조금 전소한 마을인 마리냐노에서 프랑수아의 군대와 마주쳤다. 조약을 체결했기에, 프랑스군은 교전을 예상하지 않았다. 프랑수아 1세가 그의 텐트에서 새로운 감옷을 입으려하고 있을 때, 정찰병이 스위스군의 진격 소식을 보고했다. 프랑스군은 재빠르게 행동에 나서, 세 가지 대형을 형성했다.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와 원수 지안 자코모 트리불치오의 공동 지휘하에 프랑스 선봉대는 산 줄리아노(San Giuliano) 근처의 두 개의 낮은 언덕을 점령했다.[9] 이 부대는 좌측에 (토공사와 파비세 방패로 보호받는) 석궁병, 중앙에 대규모의 란츠크네흐트 보병 대형, 그리고 우측에 포병을 호위하는 아르케뷰지어로 구성되었다. 포병은 부대의 남동쪽과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배치되었다. 2km 후방에는 프랑수아 1세가 직접 기병대와 겔더른 흑색 부대(Black Band of Gueldern)로 알려진 네덜란드에서 모집한 6,000명의 란츠크네흐트 부대를 이끌었다.[9] 마지막으로, 중앙 부대 후방 1km 지점에 있는 후위대는 국왕의 매형인 알랑송 공작 샤를 4세가 이끌었다. 창병, 아르케뷰스, 기병의 조화로운 구성을 갖춘 프랑스군과 달리 스위스군은 거의 전적으로 창 보병으로 구성되었고, 12문도 안 되는 포병을 보유했다.[10] 프랑수아 1세의 중앙 대형의 앞은 악명높은 검은 군단이 지키고 있는 72개의 야전 거대 포열이였다. 또한 왕의 대형에는 바야르의 기사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창기병들인 그의 부대가 있었다.

일몰이 가까워지자, 스위스군은 밀집한 창병 대형으로 구성된 세 개의 부대로 프랑스군에 접근했다. 그들에게는 포병이나 기병이 없었고 적들이 먼저 그들을 공격하기전에 빠르게 적들에게 달려드는 과거의 방식만을 배웠다. 마리냐노에서의 교전은 스위스 선봉 팔랑크스 대형이 가운데에 위치한 왕의 대형 앞에 위치한 포대에 파이크를 아래로 내리며 돌진하는 “헛된 희망”을 갖고 붙으면서 시작되었다. 스위스군의 첫 공격이 란츠크네흐트 수비대를 뒤로 물러서게 하고 몇 개의 대포를 탈취하며 성공했을때, 그들의 진격 속도는 프랑스군의 포격을 효과적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우익의 부르봉의 기병대가 측면을 역습하여 돌격대를 스위스 선봉대의 보호 아래로 몰아냈다. 추격하던 프랑스 기병들은 큰 손실을 입은 후 1km나 후퇴해야 했다.[11]

연기와 밤의 도래로 전투는 혼란스러워졌고, 달빛 아래 혼란 속에서 승패는 불투명해졌다.[11] 왕이 자주 직접 이끌었고, 그의 옆에서 바야르가 함께한 용맹한 프랑스 기병대의 돌진이 가끔 성공했다가 일시적으로 스위스군에 다시 밀려나고는 했다. 선두의 프랑스 지휘관 중 대다수가 필사적으로 밤에 교전을 하다가 부상을 입거나 전사를 했는데, 이중에는 62개의 부상을 입은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의 아들 탈몽 (Tallemont) 공작이 있다. 검은 군단이 반격을 가해 스위스군을 밀어냈지만, 차례대로 반격을 당한 것 뿐이였다. 바야르는 적들 사이 어둠 속에서 고립되어 있단 로렌 공작을 구하기 위해 스위스의 팔랑크스 진형을 뚫고 가야만 했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는 교전이 멈췄고, 양 측은 서로 돌아가 진형을 가다듬었다. 밤 동안 일부 스위스 병사들과 심지어는 전체 부대가 다음 날 다시 싸우기보다는 전장에서 빠져나갔다. 남은 병사들은 결의에 차 있었고, 전투는 다음날 아침 다시 시작되었다.[11]

프랑스의 가운데 대형에서 포대가 다시 조립되었다. 그들과 반대로 스위스군은 거대한 팔랑크스 진형을 다시 갖추었다. 저녁 전에 용기를 얻은 스위스군은 다시 한번 창을 내려 프랑스 포병에 돌진을 가했다. 이때에 포대는 그들에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수 많은 대포가 쏘아져 천천히 진군하던 스위스군에게 깊이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기세가 꺾이지 않은 스위스군은 계속에서 프랑스 병력 쪽에 접근하여 앞으로 밀어냈지. 다시 수비하던 란츠크네흐트가 밀려나갔지만; 수 많은 대포의 사격으로 스위스군이 더 앞으로 진격해오는걸 막았다. 이때는 바야르가 이끄는 또다른 프랑스 기병대가 돌진하여 공격해오던 스위스군이 이 지점을 포기하게 하였다.

포병에 의해 난처했지만 아직까지 용감했던 스위스군은 알랑송 공작의 왼쪽 날개 쪽을 공격하는데 집중했다. 조금의 전진을 해낸 후에, 이 공격 역시도 다시 밀려나갔다. 나중에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프랑수아 1세는 완고한 스위스군에게 프랑스 장다름들이 퍼부은 “30번의 용감한 돌격”을 자랑하였다.

3. 2. 야간 전투

밤이 되면서 전투는 혼란스러워졌다. 달빛 아래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가 직접 이끌고 바야르가 함께한 프랑스 기병대의 용맹한 돌격은 스위스군을 일시적으로 밀어냈지만, 스위스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의 아들 탈몽 공작을 포함한 많은 프랑스 고위 지휘관들이 야간 전투에서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다. 62개의 부상을 입은 탈몽 공작은 결국 사망했다. 흑색 부대가 반격하여 스위스군을 밀어냈지만, 다시 반격을 당했다. 바야르는 어둠 속에서 적들 사이에 고립된 로렌 공작을 구하기 위해 스위스 방진을 뚫어야 했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는 교전이 멈췄고, 양 측은 서로 돌아가 진형을 가다듬었다.

3. 3. 프랑스의 승리



1515년 마리냐노에서 전사한 파비아 총독 솔리오의 로돌푸스 롱구스


새벽에 재개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포병과 기병을 재정비하여 스위스군에 맞섰다. 전날 저녁 스위스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용기를 얻은 스위스군은 다시 프랑스 포병대를 향해 돌격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수많은 대포를 쏘아 스위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군은 굴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접근하여 압박했지만,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으로 인해 결국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스위스군은 알랑송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했지만, 이 역시 격퇴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프랑스 장다름들이 스위스군에게 "30번의 용감한 돌격"을 감행했다고 자랑했다.

아침 중반,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 동맹군이 도착하면서 전세가 프랑스군에게 유리하게 기울었다. 각 방면에서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은 스위스군은 결국 후퇴했다.

이 전투는 프랑수아 1세의 결정적인 승리였다. 과거 스위스군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주 승리했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 그리고 베네치아 지원군의 도착으로 인해 패배했다. 스위스군의 규율 부족과 비효율적인 지휘 체계 또한 패배의 원인 중 하나였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나는 카이사르만이 정복했던 이들을 정복했다”가 새겨진 프랑수아의 메달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주조가 되었다.[21] 이 전투를 가장 가치있는 승리라고 여기던 프랑수아는 옛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서보다 베야르 슈발리에에 의해 이 전장에서 기사 작위 수여를 받겠다고 요청했다. 지난 40년간 모든 전투에 참가한 베테랑 원수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는 이 전투를 “거인들의 전투”라 칭찬하고, 그가 이 전투 이전 생애 동안 겪은 모든 전투가 “아이들의 장난”이였다고 비교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마리냐노 전투는 이전까지 무적이던 스위스의 팔랑크스 전술에 대한 프랑스의 청동 대포와 장다름 기병의 우월성을 성립했다. 그러나 마리냐노에서 프랑스의 성공은 분열된 반도의 대립과 프랑수아 1세에 맞선 유럽 세력의 균형이 형성됐다. 그동안에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와 더불어 롬바르디아 지역 지배에 대한 전략적 핵심인 스포르체스코 성을 차지했다. 막시밀리아노 스포르차(밀라노 공작)와 그의 스위스 용병들 및 시옹의 추기경은 후퇴했다가, 프랑스의 공병들이 건물 기초에 폭탄을 설치하자 항복하였다. 프랑스는 밀라노를 되찾았고, 마시밀리아노는 프랑스가 챙겨준 30,000 두캇의 돈을 갖고 사치스러운 추방을 당했다.[22]

퇴각하는 스위스군은 벨린초나와 인접한 계곡을 관리할 후위를 두면서 상 롬바르디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했다.

마리냐노 전투는 단 한번으로 밀라노에 대한 스위스의 야심을 종료시켜버렸고, 스위스 연방은 밀라노나 프랑스를 상대로 다시는 전쟁을 걸지 않았다. 정확히는 구스위스 연방은 1525년 이후로 모든 나라에게 전쟁을 걸지 않았으며, (1536년에 베른 주가 단돈으로 벌인 보 정복과는 별개로), 스위스의 군대가 다시는 외부의 나라에 공격을 가하는 행위는 없었다. 스위스 역사학에서는 마리냐노에서 “교훈을 얻었다”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유럽 종교전쟁 내내 내부의 적대적 감정으로 가득한 스위스 연방을 두 개의 세력으로 나눈 1520년대 스위스 종교개혁이 만들어낸 분열과 더불어, 1515년과 1525년 사이 10년 동안에 스의스 용병대의 다수의 쓰라린 패배에 (비코카, 세시아, 파비아) 면에서도 효과적이였다.

라티에르 화가로 추정되는 화가의 마리냐노 전투 묘사


페르디난트 호들러가 1900년에 그린 프레스코화 ''마리냐노 후퇴''를 위해 1898년경에 스케치한 죽어가는 스위스 병사

4. 1. 프랑스의 승리 요인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의 승리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우선, 프랑스군은 청동 대포장다름 기병을 결합한 새로운 전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이전까지 무적이라 여겨졌던 스위스 팔랑크스 전술을 무력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2][14]

또한, 효율적인 지휘 체계 역시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특히, 베테랑 원수인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는 이 전투를 "거인들의 전투"라 칭하며, 이전의 모든 전투는 "아이들의 장난"에 불과했다고 평가할 정도로 뛰어난 지휘력을 보여주었다.[21] 프랑수아 1세는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며 "카이사르만이 정복했던 자들을 내가 정복했다"라는 문구를 새긴 메달을 제작하기도 했다.[13] 그는 또한 슈발리에 바야르에게서 기사 작위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이러한 요인들 덕분에 프랑스는 밀라노 공국을 점령하고 스포르체스코 성을 차지하여 롬바르디아 지역 지배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22][14]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와 그의 스위스 용병들은 퇴각했고, 프랑스 공병들이 성의 기초에 폭탄을 설치하자 항복했다.[22][14]

4. 2. 스위스의 패배 요인

스위스군의 패배는 내부적인 분열, 비효율적인 지휘 체계, 그리고 변화하는 전술에 대한 적응 부족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마리냐노 전투는 밀라노에 대한 스위스의 야심을 종식시켰고, 스위스 연방은 이후 프랑스나 밀라노를 상대로 다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스위스 역사학에서는 마리냐노 전투에서 "교훈을 얻었다"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1520년대 스위스 종교개혁으로 인한 연방의 분열과 더불어, 1515년과 1525년 사이 스위스 용병대가 비코카 전투, 세시아, 파비아 전투 등에서 연이어 패배한 것도 스위스 정책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퇴각하는 스위스군은 벨린초나와 인접한 계곡을 관리할 후위를 두면서 상 롬바르디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했다.

4. 3. 영구 평화 조약

1516년 11월 29일 프리부르에서 스위스 연방과 동맹국(장크트갈렌 수도원, 삼동맹, 발레, 묄루즈) 그리고 프랑스의 왕이자 밀라노 공작인 프랑수아 1세 사이에 "영구 평화 조약"(Ewiger Frieden, Paix perpétuelle)이 체결되었다.[23][15] 이 조약으로 스위스 연방은 밀라노 보호령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고, 프랑스는 연방에 70만 골드 크라운을 보상금으로 지불했다.[23][15] 양측은 서로의 적에게 지원하지 않기로 합의했고(기존 조약은 예외), 미래 분쟁 발생 시 중재 절차를 마련하기로 했다.[23][15] 프랑스는 스위스가 벨린초나를 제외한 알프스 이남 지역을 양보하면 30만 크라운을 추가 지불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되었다.[23][15] 이 조약은 밀라노와 리옹에서 스위스에 무역 특권을 부여했다.[23][15] 오솔라 계곡만이 밀라노에 반환되었고, 나머지 알프스 이남 지역은 1803년부터 티치노 주의 일부가 되었다.[23]

이 "영구 평화 조약"은 프랑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1798년 프랑스의 스위스 침공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 기간에 깨지게 되었다.[23] 평화 조약은 이후 3세기 동안 프랑스와 스위스 연방 간의 긴밀한 관계를 맺게 하였고, 동시에 스위스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멀어졌다.[23] 1521년에는 프랑스와 복무 협약(Soldbündnis)을 체결하여 스위스 용병 연대가 프랑스 군대의 정규군으로 편입되었다 (가르드 스위스 참조).[23] 이 협약은 3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4개의 스위스 연대가 참여하기도 했다.[23] 스위스 시민의 외국군 복무는 1848년 스위스 연방 정부 형성으로 금지되었다.[23]

5. 역사적 의의 및 평가

마리냐노 전투는 군사 기술과 전술의 변화, 그리고 강대국 간의 세력 관계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18] 용병 제도의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18] 특히, 한국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의병들의 활약과 중앙집권적인 군사 지휘 체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 전투를 기념하는 것으로는 피에르 봉탕이 생드니 대성당에 있는 프랑수아 1세의 무덤을 장식한 마리냐노 전투의 박육조가 있다.[18] 앙투안 카롱이 퐁텐블로를 위해 그린 회화는 현재 오타와의 캐나다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18] 클레망 잔캥의 가장 유명한 음악 구성 샹송 La guerre도 이 전투를 기념한다.[18]

스위스의 영웅 한스 베어 (Hans Bär)는 바젤 시청의 탑에 있는 프레스코화에 나타나있다.[18] 장 다에트빌러가 1939년 작곡한 행진곡 마리냥(프랑스어로 마리냐노)은 스위스 발레주 공식 오케스트라 찬가이다.[18]

5. 1. 한국사와의 연관성

5. 2.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참조

[1] 문서
[2] 서적 A Global Chronology of Conflict: From the Ancient World to the Modern Middle East ABC-CLIO 2009
[3] 서적 The Age of Wars of Religion, 1000-1650: An Encyclopedia of Global Warfare and Civilization 2006
[4] 서적 2006
[5] 서적 2006
[6] 서적 A Companion to the Swiss Reformation Brill 2016
[7] 서적 War: Antiquity and Its Legacy Ancients and moderns series https://books.google[...] I.B.Tauris
[8] 서적 Storia d'Italia
[9] 학술지 A blow to Swiss ambitions: The Battle of Marignano, 13-14 September 1515 https://www.jstor.or[...] 2012
[10] 학술지 2012
[11] 학술지 2012
[12] 서적 One Million Mercenaries: Swiss Soldiers in the Armies of the World L. Cooper 1993
[13] 잡지 La Place de la Concorde Suisse-I http://archives.newy[...] 2013-07-22
[14] 웹아카이브 Canada's Digital Collections http://collections.i[...]
[15] HLS Ewiger Frieden / Paix perpétuelle 2010
[16] 서적 The History of the Popes, from the close of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Kegan, Paul, Trench, Trubner 1908
[17] 서적 Concordat entre Léon X, souverain pontife, et François 1er, roi de France https://books.google[...] P. Gueffier 1804
[18] 웹사이트 Marignan devient l'hymne officiel valaisan https://www.24heures[...] 2016-04-27
[19] 문서
[20] 웹아카이브 Note biografiche di Capitani di Guerra e di Condottieri di Ventura operanti in Italia nel 1330–1550 http://www.condottie[...]
[21] 뉴스 La Place de la Concorde Suisse-I http://archives.newy[...] 1983-10-31
[22] 웹아카이브 Canada's Digital Collections http://collections.i[...]
[23] HLS Ewiger Frieden / Paix perpétuelle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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