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티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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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온티오스는 695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폐위시키고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에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세바스토폴리스 전투 패배 후 투옥되었다가 헬라스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 황제가 된 후, 레온티오스는 카르타고를 잃는 등 군사적 실패를 겪었고, 698년 티베리우스 3세에게 폐위되어 투옥되었다. 705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복위하면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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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온티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레온티오스 |
| 로마자 표기 | Leóntios |
| 칭호 | 로마인의 황제 |
| 즉위명 | 레오 |
| 통치 | |
| 재위 기간 | 695년 – 698년 |
| 이전 통치자 | 유스티니아누스 2세 |
| 다음 통치자 | 티베리우스 3세 |
| 개인 정보 | |
| 출생지 | 이사우리아 |
| 사망일 | 대략 706년 2월 15일 |
| 사망 장소 | 콘스탄티노폴리스 |
| 아버지 | 라자루스 (?) |
2. 초기 생애와 경력
레온티오스는 이수리아 출신으로, 아마도 아르메니아인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크리스티안 세티파니는 레온티오스가 황제 포카스와 장군 프리스쿠스의 직계 후손인 어떤 라자로스의 아들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세티파니는 파트리키오스 타라시우스를 레온티오스의 아들로 특정한다. 그는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에 의해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으며, 아마도 682년경에 ''파트리키오스'' 작위를 받았다.
686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레온티오스를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의 우마이야 영토를 침공하도록 보냈고, 이후 메디아와 코카서스 알바니아로 진군하여 약탈했다. 레온티오스의 성공적인 원정으로 인해 우마이야 칼리프 압드 알-말리크 이븐 마르완은 688년에 평화를 요청했고, 아르메니아, 이베리아, 키프로스의 우마이야 영토에서 세금의 일부를 바치고, 콘스탄티누스 4세 시대에 서명된 조약을 갱신하여 매주 금 1,000개, 말 1마리, 노예 1명을 공물로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695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레온티오스를 석방하고 헬라스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했다.
2. 1. 유스티니아누스 2세와의 갈등
레온티오스는 귀족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는데, 이들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소작농으로부터 토지를 획득하는 것을 제한하는 정책에 반대했고, 농민들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세금 정책에 반대했으며, 청색당 (히포드롬 파벌 중 하나)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칼리니쿠스 1세도 지지했다. 692년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이 패배한 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레온티오스를 투옥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레온티오스가 황제 자리를 노린다고 의심했을 가능성이 있다.3. 황제 즉위
695년, 레온티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코가 잘리는 형벌을 받고 케르손으로 추방되었다.[1]
4. 치세
레온티오스는 즉위 후 '레오'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중도적인 통치를 펼쳤다. 비잔틴 군대의 활동을 제한하고 제국 내 통합에 주력했다.[1] 그는 네오리온 항구 정비 사업을 실시했는데, 이로 인해 4개월간 전염병이 발생했다.[1]
4. 1. 카르타고 상실과 폐위
696년, 우마이야 왕조가 비잔틴 제국의 아프리카 총독령을 침공하여 697년 카르타고를 점령했다.[1] 레온티오스는 요한을 보내 도시를 탈환하게 했으나, 우마이야 왕조의 증원군에 의해 실패했다.[1] 698년, 키비라에오트의 ''드로웅가리오스''(중간 계급 지휘관)인 압시마르(티베리우스 3세)가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1] 레온티오스는 폐위되어 코가 잘리고 달마투 수도원에 유폐되었다.[1]5. 죽음
705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복위하면서 티베리우스 3세와 함께 공개 처형되었다. 레온티오스와 티베리우스 3세의 시신은 바다에 던져졌다가 나중에 수습되어 프로테 섬의 교회에 매장되었다.
6. 평가
레온티오스는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폭정에 맞서 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한 황제로 평가받는다. 그는 중도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698년 카르타고 전투에서 패배하여 우마이야 왕조에게 카르타고를 빼앗기는 등 군사적 실패를 겪었다. 이로 인해 티베리우스 3세를 옹립한 반란군에 의해 폐위되었고, 결국 705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복위하면서 처형되었다.[1] 그의 죽음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20년간의 무정부 시대'라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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