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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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685년 16세의 나이로 비잔티움 제국의 황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첫 번째 재위 기간 동안 우마이야 왕조와의 평화 조약을 갱신하고 슬라브족을 이주시키는 등 유능한 군주로 평가받았으나, 과도한 세금 징수와 귀족과의 갈등으로 인해 695년 쿠데타로 폐위되어 코가 잘린 채 추방되었다. 이후 망명 생활 중 불가리아의 지원을 받아 705년 복위했으나, 공포 정치를 펼치며 국방력을 약화시켰다. 711년 반란으로 처형당했으며, 그의 두 번째 통치는 실패한 전쟁과 잔혹한 탄압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퀴니섹스트 공의회를 개최하고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시도하는 등 종교 정책을 펼쳤으며, 비잔티움 제국이 중세적 특징을 보이도록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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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노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유스티니아노스 2세 |
로마자 표기 | Iūstinianos II ho Rinotmētos |
그리스어 | Ιουστινιανός Βʹ ὁ Ρινότμητος |
라틴어 | Iustinianus |
별칭 | ὁ Ῥινότμητος (코가 잘린 자) |
통치 정보 | |
직위 | 동로마 황제 |
재위 기간 (1차) | 685년 7월 10일 – 695년 |
재위 유형 (1차) | 1차 재위 |
이전 통치자 | 콘스탄티누스 4세 |
다음 통치자 | 레온티오스 |
재위 기간 (2차) | 705년 8월 21일 – 711년 11월 4일 |
재위 유형 (2차) | 2차 재위 |
이전 통치자 (2차) | 티베리우스 3세 |
다음 통치자 (2차) | 필리피코스 |
공동 황제 | 티베리우스 (706–711) |
공동 황제 유형 | 공동 황제 |
대관식 | 대관식 |
개인 정보 | |
출생 | 668년 또는 669년 |
출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
사망 | 711년 11월 4일 (42세) |
사망 장소 | 옵시키온, 다마트리스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에우도키아, 테오도라 |
자녀 | 아나스타시아, 티베리우스 |
아버지 | 콘스탄티누스 4세 |
어머니 | 아나스타시아 |
왕조 | 헤라클리우스 왕조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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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2. 1. 첫 번째 재위 (685년 ~ 695년)
콘스탄티노스 4세와 아나스타시아 황후의 아들인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685년 16세의 나이로 제위를 계승했다.[2][7] 초기에는 비교적 유능한 군주로서, 688년 무아위야 1세와의 평화 조약을 갱신하고 우마이야 왕조로부터 더 많은 연공을 받기로 합의했다. 키프로스,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지의 세금 공동 징수권을 확보하여 키프로스는 이후 약 300년간 자치를 누리게 되었다.[6][11]688년에서 689년 사이, 유스티니아노스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원정하여 수많은 슬라브족을 에게해 일대로 이주시키고 소아시아에도 이주민을 늘렸다.[6] 스크라비니아 원정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키 사이의 스트리몬 강 유역에 거주하는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에 대한 군사 행동을 벌였고, 포로로 잡은 슬라브족을 소아시아 반도로 이주시켜 군대로 조직했다. 그러나 귀환 도중 불가르족의 습격을 받아 간신히 도주했다.
691년 이슬람과의 전쟁이 재개되자, 소아시아에 이주했던 많은 슬라브족이 이슬람 편으로 돌아서면서 비잔티움군은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대패하고 아르메니아를 빼앗겼다.[12][13]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노스는 옵시키온과 그 주변의 슬라브족을 학살하여 좌절감을 해소했다고 한다.[14][15]
691년에서 692년 사이, 황제는 퀴니섹스 공의회(트룰로 공의회)를 개최하여 102가지 항목의 교회법 조항을 제정했다.[16] 이는 제국의 성직자와 속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통일된 행위 기준을 세우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교황 세르기우스 1세는 로마 교회의 관행과 다른 조항들에 대해 승인을 거부했고, 황제는 라벤나 총독에게 교황 체포를 명했으나 로마 시민들의 반대로 실패했다.[46]
유스티니아노스는 제국의 테마 조직 발전에 기여하여, 남부 그리스에 헬라스 테마를 창설하고 주요 테마의 수장을 고위 행정관으로 임명했다.[6] 또한 농민 자유 보유자의 권리를 보호하려 했으나, 이는 제국 내 대토지 소유주들과의 갈등을 야기했다.[6]

그의 토지 정책은 귀족들을 위협했고, 과도한 세금 징발은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없었다.[6] 황제는 대리인 스테판과 테오도토스를 통해 호화로운 취향과 값비싼 건물 건설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6][7] 이러한 상황은 종교적 불만, 귀족과의 갈등, 재정착 정책에 대한 불만과 함께 신하들을 반란으로 몰아넣었다.[16] 695년, 헬라스의 ''스트라테고스''인 레온티우스가 서커스 당파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로 선포되었다.[6][7] 유스티니아노스는 폐위되었고, 코가 잘린 채 크림 반도의 헤르손으로 추방되었다.[6][45]
2. 2. 추방과 망명 (695년 ~ 705년)
695년 유스티니아노스는 잔혹한 성격과 중과세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45] 재정 담당 관리들은 무자비한 착취를 일삼았고, 레온티오스가 새로운 황제로 선포되면서 반란이 일어났다. 레온티오스는 유스티니아노스의 목숨은 살려주었으나, 코와 혀를 자르고 크림반도의 케르손으로 영구 유배했다(''리노트미토스''라는 별명은 이때 얻었다).[45]유스티니아노스는 망명 중에도 왕좌를 되찾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지지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19] 702년 또는 703년 케르손에서 탈출하여 하자르의 카간인 부시르의 도움을 받았다.[8] 부시르는 그를 열렬히 환영하며 그의 여동생을 아내로 주었고,[19] 유스티니아노스는 그녀의 이름을 테오도라로 개명했다.[20] 그들은 아조프해 입구에 있는 파나고리아 마을에 집을 얻었다.
흑해 북쪽 해안을 항해하는 동안 폭풍을 만나기도 했지만, 불가리아의 테르벨에게 접근하여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22] 705년 봄, 15,000명의 불가르 및 슬라브 기병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앞에 나타났다.[19] 3일 동안 성문을 열어달라고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자, 수로를 통해 침투하여 자정 쿠데타로 도시를 장악했다.[23] 8월 21일,[3] 유스티니아노스는 왕좌를 되찾았다. 그의 라이벌 레온티우스와 티베리우스를 히포드롬에서 사슬에 묶인 채로 끌고 와 조롱하는 대중 앞에서 목에 발을 올려 굴복의 상징적인 몸짓을 취한 후 참수형을 명령했다.[25]
2. 3. 두 번째 재위 (705년 ~ 711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복위 후, 레온티오스와 티베리오스 3세를 비롯한 반역자들을 모두 체포해 끔찍하게 고문한 뒤 처형했다.[27] 또한 자신을 도와 제위를 되찾게 해준 불가르족의 칸을 부제(''Caesar'')의 자리에 앉혀 제국 신민들을 경악시켰다.[27]이때부터 공포 정치가 시작되어, 수많은 사람이 고문당하고 처형되었으며, 유능한 장군들까지 처형되어 국방력이 약화되었다.[27] 709년에는 뜬금없이 라벤나를 공격하여 대규모 시민 봉기가 일어났고, 황제는 완전히 신임을 잃었다.[27] 그는 징벌 원정을 709년에 라벤나로 파견했다.[28] 이 원정은 황제에 대한 불복종의 징표이자 혁명적 감정으로 여겨진 라벤나에 대한 서방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이끌어졌다.[29]

국내의 공포 정치와는 대조적으로, 대외적으로는 북방의 이민족 및 이슬람과 우호 관계를 다졌다.[47] 서방 교회와도 화해 정책을 펴서 퀴니섹스툼 공의회 문제를 매듭 지으려 했다.[47] 교황 요한 7세에게 퀴니섹스트 공의회 결정을 인정하라고 명령했다.[28] 교황 콘스탄티누스는 710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교황의 손에서 성체를 받은 후, 로마 교회의 모든 특권을 갱신했다. 퀴니섹스트 공의회에 대해 그들 사이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대부분의 법규를 승인한 것으로 보인다.[30]

711년 초, 크림반도의 케르손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으나, 함대가 흑해에서 난파되어 많은 병사가 죽었다.[47] 케르손은 하자르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 바르다니스가 필리피코스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황제에 즉위했다.[47]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수도를 떠나는 실수를 저질렀고, 11월 4일 붙잡혀 처형당했다.[2] 필리피코스는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여섯 살 난 아들 티베리오스도 블라케르나이 성당에서 처형하여,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혈통을 완전히 끊었다.[33]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두 번째 통치는 불가리아와 칼리파국과의 실패한 전쟁, 그리고 국내 반대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특징지어진다.[27] 708년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이전에 그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수여했던 불가리아의 칸 테르벨을 상대로 돌아서서 불가리아를 침략했는데, 이는 705년에 테르벨이 지지한 대가로 그에게 양도된 영토를 되찾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25] 황제는 패배하여 안키알루스에서 포위되었고 퇴각해야 했다.[25] 불가리아와 비잔티움 간의 평화는 즉시 회복되었다. 이 패배 이후 소아시아에서 아랍의 승리가 이어졌으며,[7] 킬리키아의 도시들이 적의 손에 넘어갔고, 적은 709~711년에 카파도키아까지 침투했다.[27]
3. 종교 정책
3. 1. 퀴니섹스트 공의회 (트룰로 공의회)
이슬람과의 전선이 안정되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691년에서 692년에 걸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궁전 "투르로(달팽이)의 방"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제6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보충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고대 그리스적인 신앙 및 관습의 금지, 성상 숭배 승인 등이 결정되었다.회의에서는 102가지 항목의 교회법 조항을 제정하여 제국 내 성직자와 속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통일된 행위 기준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교황 세르기우스 1세는 이 회의의 의결에 반대했고,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로마 시민 등의 강력한 반대로 실패했다. 이 사건은 동서 교회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3. 2.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첫 번째 재위 기간 동안 691년-69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궁전 "투르로(달팽이)의 방"에서 교회 회의(투르로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이는 부친 콘스탄티누스 4세가 개최한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고대 그리스적인 신앙 및 관습 금지, 성상 숭배 승인 등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교황 세르기우스 1세는 이 회의의 의결에 반대했고,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교황을 체포하려 했으나 로마 시민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두 번째 재위 기간에는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추진하여, 교황 요한 7세와 교황 콘스탄티노에게 사절을 보내 퀴니섹스트 공의회 조항을 조정하려 노력했다. 711년 교황 콘스탄티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방문을 통해 종교 회의를 개최하고 타협을 통해 퀴니섹스트 공의회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4. 유산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통치는 비잔티움 제국이 고대 로마의 전통에서 벗어나 중세의 특징을 보이기 시작한 변화의 시기를 보여준다.[34] 이는 주화에서 드러나는데, 1세기 동안 황제 주화에서 사라졌던 전통적인 로로스가 재도입되었고, 집정관 직책이 황제 직책과 통합되어 황제가 실질적, 법적으로 국가 원수가 되었다.[34] 집정관 직책은 황제 레오 6세에 의해 공식 폐지될 때까지 존속했지만,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이미 그 지위를 사실상 종식시켰다.[35]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독재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위상을 개선하는 데 성공한 유능하고 통찰력 있는 통치자였다.[24] 독실한 통치자였던 그는 자신의 주화에 그리스도의 도상을 사용한 최초의 황제였으며,[2] 제국 내 이교도 축제와 관습을 금지하려 했다.[6]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본받아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는데, 황궁 확장인 ''트리클리노스'', ''아우구스테움''의 장식용 분수, 페트리온의 새로운 성모 교회 등이 그 예이다.[37]
정교회에서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 대한 존경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10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낙사리온에는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기념이 있으나, 어느 유스티니아노스 황제인지는 명시되지 않았다.[38] 현대 주석에서는 유스티니아노스 1세가 이단으로 사망했으므로 유스티니아노스 2세라고 주장하지만, 정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39] 성 니코데모스 아기오리테는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나쁜 삶을 살았고 회개했다는 언급이 없으므로 성인으로 기념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기념해야 한다고 제안한다.[40] 현대 영어 번역본과 일부 그리스 시낙사리온은 8월 2일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나열하거나, 둘 다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명시한 그리스 시낙사리온도 존재한다.[41][42]
5. 평가
5. 1. 긍정적 평가
5. 2. 부정적 평가
5. 3. 종합적 평가
6. 기타
6. 1. 대중문화
해리 터틀도브가 H. N. 터틀타웁이라는 필명으로 1998년에 집필한 소설 "유스티니아누스"는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생애를 허구화한 작품이다.[43] 이 소설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와 평생을 함께 한 가상의 인물인 군인 미케스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43] 소설에서 터틀도브는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망명 중에 손상된 코를 고치기 위해 떠돌이 인도 성형외과 의사에게 성형 수술을 받았다고 추측한다.[4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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