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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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카스는 602년부터 610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마우리키우스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지만, 무능한 통치와 대외 문제로 인해 폭군으로 여겨진다. 포카스는 국내에서 친족을 고위직에 임명하고 반대파를 숙청했으며,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침략, 사산 제국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610년 헤라클리우스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처형되었으며, 그의 치세는 비잔틴 제국과 현대 역사가 모두에게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로마 교황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수염을 다시 유행시키는 등 문화적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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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스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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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동로마 황제 |
재위 기간 | 602년 11월 23일 – 610년 10월 5일 |
선임자 | 마우리키우스와 테오도시우스 |
후임자 | 헤라클리우스 |
출생일 | 547년 |
출생지 | 트라키아 또는 카파도키아 |
사망일 | 610년 10월 5일 (63세) |
사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
배우자 | 레온티아 |
자녀 | 도멘치아 |
어머니 | 도멘치아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이름 | |
로마자 표기 | Focas |
그리스어 | Φωκάς (Phōkás) |
2. 생애
포카스는 547년경에 태어났으며, 황제가 되었을 때 55세였다고 전해진다.[5] 그의 가족은 트라코-로마인[6] 또는 카파도키아인[7]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로마 제국의 왕위를 찬탈하기 전 포카스의 삶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황제 마우리키우스 휘하에서 낮은 계급의 장교(백인대장)로 복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라키아 지방 출신으로, 도나우강 국경에 주둔하는 군의 하사관이었다.
602년, 황제 마우리키우스에 대한 반란이 비잔틴 제국 군대에서 일어났다. 군대는 포카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표로 보냈고, 그는 그곳에서 스스로 황제를 선언했다.[8] 602년 11월 23일, 포카스는 키리아쿠스 총대주교에 의해 성 요한 세례자 성당 (헤브도몬)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틀 뒤인 11월 25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9]
당시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군대의 미움을 샀고, 군대는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아들 테오도시우스와 티베리우스와 함께 도시를 탈출했으나, 곧 체포되어 일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마우리키우스의 아내와 딸들은 네아 메타노이아 수도원에 수감된 후 살해되었다.[10] 이후 포카스는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포카스는 찬탈자였고, 다음 황제인 헤라클레이오스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폭군으로 여겨진다. 콘스탄티노플과 안티오키아 등 제국 내 각지에서 포카스에 불만을 품은 시민(서커스 당파)들에 의한 폭동이 발생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포카스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나타났다.[1]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은 비잔틴 제국의 발칸 반도 지역으로 수많은 공격을 감행했고, 사산 제국은 제국의 동부 지역 침공을 시작했다.[10] 포카스 황제 재위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의 지속적인 침략에 시달렸으나, 제국 정부는 다른 지역 문제로 인해 이탈리아 지원에 거의 자원을 투입하지 못했다. 그레고리오 1세는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자 그를 자유의 회복자로 칭송했다.
608년경, 카르타고 총독 헤라클레이오스가 포카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610년 10월, 수도는 항복했다. 포카스는 교회로 도망쳤지만 끌려 나와 처형되었고, 그의 일족도 몰살당했다. 이후 소(小) 헤라클레이오스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헤라클레이오스 왕조의 성립).
2. 1. 초기 생애와 출신
Φωκᾶς|포카스grc는 547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황제가 되었을 때 55세였다고 전해진다.[5] 그의 가족은 트라코-로마인[6] 또는 카파도키아인[7]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로마 제국의 왕위를 찬탈하기 전 포카스의 삶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황제 마우리키우스 휘하에서 낮은 계급의 장교(백인대장)로 복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라키아 지방 출신이다. 도나우강 국경에 주둔하는 군의 하사관이었다.2. 2. 황제 즉위 과정 (602년)
602년, 비잔틴 제국 군대는 황제 마우리키우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주로 겨울에 다뉴브강 북쪽에서 계속 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과 임금 삭감에 대한 피로감과 분노 때문이었다. 군대는 포카스를 군단의 대변인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냈고, 그는 그곳에서 스스로 황제를 선언했다.[8] 602년 11월 23일, 포카스는 키리아쿠스 총대주교에 의해 성 요한 세례자 성당의 헤브도몬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이틀 뒤인 11월 25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9]당시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군대의 미움을 샀으며, 도나우강 북쪽 기슭에서 겨울을 나라는 명령에 군대가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아들인 테오도시우스와 티베리우스와 함께 도시를 탈출했으나, 곧 체포되어 일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마우리키우스의 아내와 딸들은 네아 메타노이아 수도원에 수감된 후 살해되었다.[10]
그 후 포카스가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즉위했다.
2. 3. 치세 (602년 ~ 610년)
포카스는 찬탈자였고, 다음 황제인 헤라클레이오스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폭군으로 여겨진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의원인 귀족들과 원래 관계가 없었고, 정치 기반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반대파들을 차례로 살해했다. 콘스탄티노플과 안티오키아 등 제국 내 각지에서 포카스에 불만을 품은 시민(서커스 당파)들에 의한 폭동이 발생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포카스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나타났다.[1]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은 비잔틴 제국의 발칸 반도 지역으로 수많은 공격을 감행했고, 사산 제국은 제국의 동부 지역 침공을 시작했다.[10] 아바르족은 테살로니카 북쪽의 발칸 반도 모든 지역을 점령하여, 기독교 도시의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비잔틴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의 위협 때문에 대부분의 병력을 동부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사산 페르시아는 591년에 마우리키우스와 맺은 조약으로 이전에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찬탈하고 살해한 후, 페르시아는 603년에 제국을 침략했다. 사산 왕조는 동부 지역을 빠르게 점령했고, 이로 인해 ''동방 군사령관'' 나르세스는 그들에게 투항했다. 포카스는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약속으로 콘스탄티노플로 초대하여 도착하자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 607년까지 사산 왕조는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소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하여 보스포루스 해협까지 진출했다. 610년 그의 통치가 끝날 무렵, 페르시아인들은 이미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제노비아를 점령했다. 당시 기록들은 점령된 주민들에게 페르시아인들이 매우 잔인했다고 묘사한다.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원조로 즉위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호스로 2세는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를 목적으로 동로마 원정군을 일으켰다. 이에 포카스는 형제 코멘티올로스를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통설과는 달리, 페르시아군과의 싸움은 609년까지는 일진일퇴의 상태였음이 최근 증명되었다. 다만, 도나우 국경선은 아바르족에 의해 돌파되었다.
포카스 황제 재위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의 지속적인 침략에 시달렸으나, 제국 정부는 다른 지역 문제로 인해 이탈리아 지원에 거의 자원을 투입하지 못했다. 그레고리오 1세는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자 그를 자유의 회복자로 칭송했다. 그레고리오는 포카스를 경건하고 자비로운 군주라 칭하며, 그의 아내 레온티아 황후를 풀케리아에 비유했다. 603년 5월, 황제 부부의 초상화가 로마에 도착하자 교황은 팔라티노 언덕 황궁의 성 카이사리우스 예배당에 초상화를 안치하도록 명령했다.[10] 606년 사비니아노 교황이 사망한 후 새로운 교황 임명을 위해서는 황제의 승인이 필요했으나, 포카스가 내부의 적들을 제거하는 데 몰두하면서 1년 동안 승인이 지연되었다.[10] 607년 포카스는 마침내 승인했고, 보니파시오 3세가 교황이 되었다. 포카스는 로마를 "모든 교회의 수장"이라고 선언했다.[10] 얼마 후, 포카스는 기념 기둥 위에 자신의 금박 동상을 세웠는데, 이는 포카스 기둥으로 알려져 있다. 포카스 통치 기간 로마에 세워진 유일한 공공 건축물은 608년에 완공된 포카스 동상이었다.[10]
2. 3. 1. 국내 통치
포카스는 국가나 군대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1] 그는 황제가 되기 전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콘스탄티노플 엘리트 대부분을 불신하여, 자주 자신의 친족들을 고위 군직에 임명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임명했다.- 603년 그의 형제 도멘지올루스를 ''마기스터 오피키오룸''으로 임명.
- 604년 그의 조카 도멘지올루스를 동부 속주를 지휘하는 ''마기스터 밀리툼 페르 오리엔템''으로 임명.
- 610년경 그의 형제 코멘티올루스를 ''마기스터 밀리툼 페르 오리엔템''으로 임명.
이 세 사람은 헤라클리우스에게 살해될 때까지 포카스에게 충성을 다했다.[2] 포카스의 혈연 남성 친족 3명 모두 고위직에 임명되었으며, 그 중 2명은 군직에, 1명은 행정직에 임명되었다. 또한 포카스는 603년 자신의 딸 도멘티아와의 결혼을 통해 사위가 된 프리스쿠스를 엑스큐비토르의 대장인 ''코메스 엑스큐비토룸''으로 임명했다.[3]
포카스는 찬탈자였고, 다음 황제인 헤라클레이오스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에 폭군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포카스는 군부와 일부에게만 평가받았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의원인 귀족들과 원래 관계가 없었고, 정치 기반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반대파들을 차례로 살해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안티오키아 등 제국 내 각지에서 포카스에 불만을 품은 시민(서커스 당파)들에 의한 폭동이 발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포카스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2. 3. 2. 대외 관계 및 전쟁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은 비잔틴 제국의 발칸 반도 지역으로 수많은 공격을 감행했고, 사산 제국은 제국의 동부 지역 침공을 시작했다.[10]아바르족은 테살로니카 북쪽의 발칸 반도 모든 지역을 점령했다. 기독교 도시의 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비잔틴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의 위협 때문에 대부분의 병력을 동부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사산 페르시아는 591년에 마우리키우스와 맺은 조약으로 이전에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찬탈하고 살해한 후, 페르시아는 603년에 제국을 침략했다. 사산 왕조는 동부 지역을 빠르게 점령했고, 이로 인해 ''동방 군사령관'' 나르세스는 그들에게 투항했다. 포카스는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약속으로 콘스탄티노플로 초대하여 도착하자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 607년까지 사산 왕조는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소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하여 보스포루스 해협까지 진출했다.
610년 그의 통치가 끝날 무렵, 페르시아인들은 이미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제노비아를 점령했다. 당시 기록들은 점령된 주민들에게 페르시아인들이 매우 잔인했다고 묘사한다.
과거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원조로 즉위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호스로 2세는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를 목적으로 동로마 원정군을 일으켰다. 이에 포카스는 형제 코멘티올로스를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통설과는 달리, 페르시아군과의 싸움은 609년까지는 일진일퇴의 상태였음이 최근 증명되었다. 다만, 도나우 국경선은 아바르족에 의해 돌파되었다.
2. 3. 3. 이탈리아 정책
포카스 황제 재위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이탈리아는 롬바르드족의 지속적인 침략에 시달렸으나, 제국 정부는 다른 지역 문제로 인해 이탈리아 지원에 거의 자원을 투입하지 못했다. 포카스 통치 기간 로마에 세워진 유일한 공공 건축물은 608년에 완공된 포카스 동상이었다.[10]그레고리오 1세는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자 그를 자유의 회복자로 칭송했다. 그레고리오는 포카스를 경건하고 자비로운 군주라 칭하며, 그의 아내 레온티아 황후를 풀케리아에 비유했다. 603년 5월, 황제 부부의 초상화가 로마에 도착하자 교황은 팔라티노 언덕 황궁의 성 카이사리우스 예배당에 초상화를 안치하도록 명령했다.[10]
606년 사비니아노 교황이 사망한 후 새로운 교황 임명을 위해서는 황제의 승인이 필요했으나, 포카스가 내부의 적들을 제거하는 데 몰두하면서 1년 동안 승인이 지연되었다.[10] 607년 포카스는 마침내 승인했고, 보니파시오 3세가 교황이 되었다. 포카스는 로마를 "모든 교회의 수장"이라고 선언했다.[10] 얼마 후, 포카스는 기념 기둥 위에 자신의 금박 동상을 세웠는데, 이는 포카스 기둥으로 알려져 있다.
2. 4. 몰락과 죽음 (610년)
헤라클리우스 장로는 코메스 엑스쿠비토룸으로 임명된 프리스쿠스에게 608년 포카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라고 요청했고, 프리스쿠스는 포카스에게 충성하지 않았기에 요청을 받아들였다.[11] 헤라클리우스 장로는 콘스탄티노플로의 곡물 공급을 차단하고 대규모 군대와 해군을 소집하여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609년 헤라클리우스 장로는 침공을 시작했으며, 조카인 니케타스가 육로로 군대를 수도로 진격시키고, 그의 아들인 헤라클리우스가 테살로니카를 해상으로 침공한 후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610년 10월 3일 헤라클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외곽에 도착했고, 10월 5일에 도시를 점령했다. 헤라클리우스는 같은 날 황제로 선포되었고, 재빨리 포카스를 처형했다.[11]
608년경, 카르타고 총독 헤라클레이오스가 포카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총독 헤라클레이오스의 동명의 아들인 소(小) 헤라클레이오스가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하는 한편, 소 헤라클레이오스의 사촌이자 총독의 조카인 니케타스가 이끄는 별동대는 609년에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로 인해 시리아의 군대가 이집트로 급파되었고, 시리아 국경선은 텅 비게 되었다. 페르시아 군이 제국 영토로 본격적인 침입을 시작한 것은 이 이후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서커스파와 포카스의 사위인 프리스쿠스 등의 원로원 의원들이 소 헤라클레이오스와 내통했기 때문에, 610년 10월에 수도는 항복했다. 포카스는 교회로 도망쳤지만 끌려 나와 처형되었고, 그의 일족도 몰살당했다. 이후 소 헤라클레이오스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헤라클레이오스 왕조의 성립).
3. 유산 및 평가
포카스는 비잔티움 제국 사람들과 현대 역사가들 모두에게 악당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포카스 치세에 관해 알려진 가장 초기의 자료 중 일부는 헤라클리우스 치세에 쓰여졌다. 남아있는 기록들은 신뢰할 만한 중립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작가들은 헤라클리우스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그를 악마화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12]
문화적 측면에서, 포카스의 치세는 콘스탄티누스 1세 (재위 Constantinus I|콘스탄티누스 1세la, 306년~337년)에 의해 정해진 제국의 패션 변화로 특징지어진다.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모든 후계자들은 배교자 율리아누스 (재위 361년~363년)를 제외하고 수염이 없었다. 포카스는 다시 수염 착용을 도입했다. 이 패션은 비잔티움 제국 멸망까지 지속되었다.[13]
607년 2월 19일, 포카스 황제는 보니파시오 3세를 로마의 새로운 주교로 임명했고, 포카스는 로마 정부의 황제 칙령을 발표하여 보니파시오 3세를 "모든 교회의 수장"이자 "전 세계 주교"로 인정했다. 포카스는 "전 세계 주교"라는 칭호를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에서 로마 교구로 이전했다. 보니파시오는 포카스로부터 "사도 베드로의 자리는 모든 교회의 수장이 되어야 한다"는 칙령을 얻었고, "전 세계 주교"라는 칭호가 오직 로마 주교에게만 속하도록 보장했다. 이 행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키리아쿠스가 스스로를 "전 세계 주교"로 세우려는 시도를 효과적으로 종식시켰다.[14]
포카스의 칙령은 교황을 "모든 교회의 수장"이라고 칭하면서 교황 수위권과 교황의 지상권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다. 일부 개신교 역사주의자 논평가들은 포카스의 칙령(보통 606년으로 간주됨)이 종말론적 중요성을 가진다고 보았다.[15] 예를 들어, 에드워드 비숍 엘리엇은 그의 저서 ''요한 계시록 시간표''에서 요한 계시록 11장 3절의 1260일을 606년과 이탈리아 통일 (1866년) 사이의 기간으로 보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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