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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몬드 월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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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이몬드 월번은 미국의 배우로, 1900년대 초 연극 배우로 경력을 시작하여 영화와 연극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12년 브로드웨이 데뷔 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가 복귀하여 1920년대에 명성을 얻었다. 영화에서는 1934년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출연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코믹하고 과장된 캐릭터로 약 10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헨리" 시리즈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으며, 1955년 영화 《스포일러스》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74세에 은퇴를 번복하고 뮤지컬에 출연했으며, 1969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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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몬드 월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Third Finger, Left Hand'' 트레일러 속 레이먼드 월번
Third Finger, Left Hand 트레일러 (1940년)
본명레이먼드 월번
출생일1887년 9월 9일
출생지인디애나주 플리머스 , 미국
사망일1969년 7월 26일 (향년 81세)
사망지미국 뉴욕 뉴욕 시
직업배우
활동 기간1913년 – 1958년
배우자거트루드 스타인먼 (?-1953년; 그녀의 사망)
제인 데이비스 (1955년-1969년; 그의 사망)

2. 생애와 경력

인디애나주 플리머스에서 태어난 월번은 고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를 따라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로 이주하여 연극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클랜드의 리버티 극장 부설 연기 학교에서 공부한 후 18세에 무대에 데뷔했으며, 스톡 공연을 통해 경험을 쌓았다. 1912년에는 "The Greyhound"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처음 섰다.

그의 초기 경력은 제1차 세계 대전미국 육군 중포병으로 프랑스에서 복무(1917-1918)하면서 잠시 중단되었다. 군 복무 후 브로드웨이와 스톡 공연으로 복귀하여 1920년대에 걸쳐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1924년 영국 런던에서 공연된 "The Show-Off"를 통해 특유의 과장되고 허풍스러운 코믹 연기 스타일을 선보였고, 이는 그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본격적인 영화 활동은 1934년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출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약 100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얼간이나 과장된 속물 캐릭터로 잘 알려졌다. 때로는 악역을 맡기도 했으며, 프랭크 카프라나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같은 유명 코미디 감독들의 작품에 여러 차례 출연하여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코미디 영화 시리즈인 '헨리' 시리즈의 주연을 맡아 활약하기도 했다. 1955년 영화 《스포일러스》를 마지막으로 잠시 은퇴했으나, 1960년대에 다시 활동을 재개하여 브로드웨이 뮤지컬 《A Funny Thing Happened on the Way to the Forum》(1962)과 연극 《A Very Rich Woman》(1965) 등에 출연했다.[1][2] 그는 오랜 경력 동안 미국 전역과 해외를 오가며 무대 활동을 이어갔다.[1]

월번은 1969년 뉴욕에서 81세의 나이로 오랜 투병 끝에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연극 활동

인디애나주 플리머스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와 함께 1900년대 초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로 이주했으며, 어머니의 직업을 따라 연극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오클랜드의 주요 극단인 리버티 극장 부설 연기 학교에서 연기를 배웠고, 18세에 "맥베스"에서 두 번째 마녀 역할을 맡으며 전문 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스톡 공연에서 활동하며 여러 지역을 순회 공연한 경험을 쌓았다. 1912년에는 "The Greyhound"라는 작품으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처음으로 출연했다.

그의 연기 경력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 당시 루스 채터턴이 주연을 맡은 연극 "Come Out of the Kitchen"에 캐스팅된 직후였으나, 1917년부터 1918년까지 미국 육군 중포병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월번은 다시 브로드웨이와 스톡 공연 활동을 재개하며 1920년대 동안 배우로서의 명성을 점차 쌓아갔다.[1][2] 1924년에는 영국 런던에서 공연된 연극 "The Show-Off"에서 오브리 파이퍼 역을 맡아 런던 무대에 데뷔했다. 이 역할을 통해 그는 특유의 과장되고 허풍스러운 연기 스타일을 확립했으며, 이는 이후 그의 무대와 영화 경력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되었다.[1]

2. 2. 영화 경력

월번은 무성 영화 시대에 몇 차례 특별 출연한 경험이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 것은 1929년 루스 채터턴 주연의 영화 《The Laughing Lady》에서 그녀의 불성실한 남편 역을 맡으면서부터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영화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으며, 1933년 연극 《The Pursuit of Happiness》의 성공 이후 5년 만인 1934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계 활동을 재개했다.

1934년 로버트 도나트 주연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 당글라스 남작 역을 맡으며 영화계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꾸준히 영화에 출연하며 컬럼비아 픽처스의 주요 캐릭터 배우로 자리 잡았다.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약 100편에 달하는 영화가 있으며, 주로 코믹하고 과장된 속물이나 얼간이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으로 잘 알려졌다. 때로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당글라스 남작처럼 악역을 소화하기도 했다.

특히 코미디 영화의 거장인 프랭크 카프라와 프레스턴 스터지스 감독의 작품에 여러 차례 출연하여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과는 《브로드웨이 빌》(1934)에서 경마장 도박꾼 페티그루 대령 역, 《천금을 마다한 사나이》(1936)에서 게리 쿠퍼가 연기한 주인공의 허세 부리는 집사 역, 스펜서 트레이시와 캐서린 헵번 주연의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온》(1948)에서 기회주의적인 알렉산더 판사 역을 맡았다. 또한 카프라 감독이 《브로드웨이 빌》을 뮤지컬로 리메이크한 《라이딩 하이》(1950)에서는 빙 크로스비와 함께 출연하며 페티그루 대령 역을 다시 한번 연기했다.

프레스턴 스터지스 감독의 작품에서는 《크리스마스 인 줄라이》(1940)에서 냉소적이고 젠체하는 맥스포드 박사 역, 고전 코미디 영화 《정복 영웅의 환영》(1944)에서는 바람둥이 시장 에버렛 노블 역, 해롤드 로이드 주연의 《해롤드 디들벅의 원죄》(1947)에서는 로이드를 해고하는 상사 역을 맡아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헨리' 시리즈 영화의 주연을 맡아 코믹 연기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1949년 첫 작품인 《Henry, the Rainmaker》에서 가장인 헨리 라담 역을 맡았으며, 이 시리즈는 1951년 《Father Takes the Air》까지 총 다섯 편이 제작되었다. 이 시리즈에서 바바라 브라운은 그의 아내 역을, 게리 그레이는 아들 데이비드 역을 맡아 호흡을 맞췄다.

월번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은 1955년에 개봉한 서부극 《스포일러스》였으며, 이 작품을 끝으로 사실상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2. 3. 은퇴 이후

첫 번째 부인 거트루드(애칭 트루디)가 사망한 후 거의 은퇴 상태였으나, 가족의 친구였던 제인 데이비스와 재혼하며 다시 행복을 찾았다.

1962년, 74세의 나이에 해롤드 프린스의 권유로 은퇴를 번복하고 제로 모스텔과 함께 코미디 뮤지컬 《A Funny Thing Happened on the Way to the Forum》에 합류하여 노쇠한 로마 시민 역을 연기했다. 그는 이 쇼에 18개월 동안 출연했다. 이후 1965년에는 루스 고든과 함께 연극 《A Very Rich Woman》에 출연했는데, 이는 그의 마지막 브로드웨이 작품이 되었다.[1][2]

월번은 1969년, 81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오랜 지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3. 출연 작품

레이몬드 월번은 연극 배우로 경력을 시작하여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스톡 극장과 브로드웨이, 영국 런던 등지에서 활동했다. 1912년 브로드웨이에 데뷔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잠시 경력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이후 다시 무대로 복귀하여 명성을 쌓았다.[1][2]

1930년대부터는 영화 배우로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약 100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했다. 주로 과장되고 허풍스러운 인물 연기로 알려졌으며, 프랭크 카프라나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같은 유명 감독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다. 후기에는 코미디 영화 시리즈의 주연을 맡기도 했으며, 1955년 영화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줄였다가 1960년대에 다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기도 했다.[1] 그의 마지막 브로드웨이 출연작은 1965년이었다.[1][2]

3. 1. 영화

월번은 로버트 도나트가 주연을 맡은 ''몬테크리스토 백작''(1934)이 개봉된 1934년에 이르러서야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거의 100편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는 전형적인 얼간이와 과장된 속물 역할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1934년 영화 버전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 당글라스 남작을 연기했을 때와 같이 악당이 될 수도 있었으며,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프랭크 카프라와 같은 유명한 코미디 감독들이 그를 선호하여 여러 번 출연했다.

무성 영화에서 몇 개의 특별한 역할을 제외하고, 월번은 1929년 루스 채터턴을 지원하는 역할(다시)을 맡아 그녀의 불성실한 남편 역을 맡은 ''웃는 레이디''(1929)를 찍을 때까지 영화에 진지하게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5년 후 ''The Pursuit of Happiness''(1933)에서의 무대 성공 이후 다시 영화로 돌아왔다. 1934년부터 그는 영화에 계속 출연했으며 컬럼비아의 주요 캐릭터 배우였다. 프랭크 카프라의 작품에서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브로드웨이 빌''(1934)의 경마장 도박꾼 페티그루 대령, 게리 쿠퍼의 허세를 부리는 집사 ''미스터 디즈는 시내에 간다''(1936), 스펜서 트레이시/캐서린 헵번 주연의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온''(1948)의 기회주의적인 알렉산더 판사가 있다. 그는 또한 빙 크로스비와 함께 브로드웨이 빌을 뮤지컬로 리메이크한 카프라의 작품 ''라이딩 하이''(1950)에서 페티그루 대령의 사기꾼 역할을 재현했다. 프레스턴 스터지스가 선호하는 월번은 ''7월의 크리스마스''(1940)에서 냉소적이고 젠체하는 맥스포드 박사로, 고전적인 ''정복 영웅의 환영''(1944)에서 바람둥이 시장 노블로, 해롤드 로이드를 해고하는 보스로 ''해롤드 디들벅의 원죄''(1947)(일명 매드 웬즈데이)에서 빛을 발했다.

전후 시대에, 이제 덩치 큰 월번은 자신의 "헨리" 시리즈의 경쾌한 코미디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자신의 재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그는 데뷔작 ''헨리, 레인메이커''(1949)에서 가부장 헨리 라담을 연기하며 월터 캐틀렛의 콜턴 시장 캐릭터의 익살스러운 행동을 따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역의 바바라 브라운과 아들 데이비드 역의 어린 게리 그레이가 시리즈 전체에 출연했다. 그는 ''파더 테익스 더 에어''(1951)를 마지막으로 다섯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월번의 마지막 영화는 서부 영화 ''스포일러스''(1955)였다.

연도제목역할
1916The Man Hunt (단편)스태드웰 대위
1916타란툴라사운더스
1916스칼렛 러너 (연재물)존 브라운
1916Our Other Lives (단편)
1929웃는 레이디헥터 리
1934위대한 유혹헨리 모건
1934디펜스 레스트오스틴
1934몬테크리스토 백작당글라스
1934레이디 바이 초이스프론트 오말리
1934질투
1934브로드웨이 빌페티그루 대령
1934Mills of the Gods윌라드 헤이스팅스
1935소사이어티 닥터웨이버리 박사
1935데스 플라이즈 이스트에반스
1935아윌 러브 유 올웨이즈찰리
1935작은 세상줄리어스 클러머혼
1935웰컴 홈길테지
1935레드헤즈 온 퍼레이드어거스투스 트윌
1935그녀는 그녀의 보스와 결혼했다프랭클린
1935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파티 손님 (출연 미상)
1935땡스 어 밀리언컬리먼 판사
1935론 울프 리턴즈젠킨스
1936위대한 지그펠드세이지
1936미스터 디즈는 시내에 간다월터, 집사
1936앱솔루트 콰이어트프루덴 주지사
1936더 킹 스텝스 아웃폰 켐펜 대령
1936쓰리 와이즈 가이즈닥 브라운
1936그들은 택시에서 만났다로저 클리프턴 씨
1936크레이그의 아내빌리 비크마이어
1936미스터 신데렐라피터 랜돌프
1936본 투 댄스딩비 대위
1937브리징 홈클린트 에반스
1937렛츠 겟 메리드B.B. 해링턴
1937씬 아이스도르니 삼촌
1937잇 캔트 라스트 포에버포더길 박사
1937하이, 와이드, 앤 핸섬닥 와터슨
1937브로드웨이 멜로디 오브 1938허먼 휘플
1937그리니치 빌리지에서의 살인상원의원
1938스타트 치어링딘 워싱턴
1938배틀 오브 브로드웨이호머 C. 번디
1938프로페서 비웨어제임스 G. 파크하우스 마셜 판사
1938게이트웨이벤자민 맥넛 씨
1938스위트하트올랜도
1939렛 프리덤 링언더우드
1939잇 쿠드 해픈 투 유J. 헤든 퀠리
1939디 언더-펍레이턴 씨
1939이터널리 유어스할리 빙엄 씨
1939바브드 와이어 펜스가 있는 천국B. 타운센드 타이어 교
1940다크 커맨드버크너 판사
1940감옥의 백만장자브루스 밴더
1940플로잉 골드앨러리 Q. 와일드캣 찰머스
1940서드 핑거, 레프트 핸드셔우드 씨
19407월의 크리스마스맥스포드 박사
1940샌프란시스코 독스앤디 트레이시 제독
1941배철러 대디조지 스미스
1941푸딩 헤드해럴드 몽고메리 시니어
1941키스 더 보이즈 굿바이톱 럼슨
1941컨펌 오어 디나이H. 사이러스 스튜이베선트
1941라이즈 앤 샤인베이컨 대령
1941루이지애나 퍼처스데이비스 대령, 일명 폴라 베어
1942더 맨 인 더 트렁크짐 치버스
1943레이디 바디가드에이버리 제이미슨
1943딕시 더건J.J. 로슨
1943더 데스페라도스캐머런 판사
1943딕시쿡 씨
1943렛츠 페이스 잇줄리안 왓슨
1944앤드 더 엔젤스 싱팝 엔젤
1944정복 영웅의 환영에버렛 J. 노블 시장
1944비소와 오래된 레이스야구 경기 드럼 연주자 (출연 미상)
1944맨해튼의 음악칼 로베르티 교수
1944헤븐리 데이즈팝햄 씨
1945Honeymoon Abroad롤리 맥
1945아윌 텔 더 월드H.I. 베일리
1945더 치터스윌리 크로퍼드
1946할리우드의 조식리처드 카트라이트
1946러버 컴 백J.P. 윈스럽
1946랑데부 위드 애니에버렛 손다이크
1946플레인스맨 앤 더 레이디윈터스 판사
1946제럴딘의 사건아모스 하트웰
1947해롤드 디들벅의 원죄E.J. 와글베리
1948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온알렉산더 판사
1949헨리, 레인메이커헨리 레이섬
1949리브 잇 투 헨리헨리 레이섬
1949레드, 핫 앤 블루알렉스 라이언 크릭
1950키 투 더 시티빌리 버틀러 시장
1950라이딩 하이페티그루 교수
1950파더 메이크스 굿헨리 레이섬
1950파더스 와일드 게임헨리 레이섬
1950숏 그래스맥케나 박사
1951파더 테익스 더 에어헨리 레이섬
1951익스큐즈 마이 더스트프레드 하스켈 시장
1951골든 걸코르넬리우스
1952그녀는 노라고 말할 수 없었다호바트 판사
1955스포일러스스키너 씨


3. 2. 연극

인디애나주 플리머스에서 태어난 월번은 고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와 함께 1900년대 초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로 이주했다. 그는 어머니의 직업을 따라 연극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오클랜드의 주요 극단인 리버티 극장과 관련된 연기 학교에 입학했으며, 18세에 연극 맥베스에서 두 번째 마녀 역할을 맡으며 전문 무대에 데뷔했다.

스톡 극장에서 경험을 쌓고 여러 지역을 순회 공연한 후, 1912년에는 "The Greyhound"라는 작품으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처음으로 섰다. 이 작품은 당시 큰 인기를 끌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연기 경력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잠시 중단되었다. 1917년부터 1918년까지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프랑스에서 중포병으로 복무했기 때문이다. 이는 루스 채터턴이 주연을 맡은 연극 "Come Out of the Kitchen"에서 젊은 주역의 대체 배우로 캐스팅된 직후였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월번은 다시 브로드웨이와 스톡 극장으로 돌아와 연기 활동을 재개했고, 1920년대에 걸쳐 배우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1924년에는 영국 런던에서 연극 "The Show-Off"의 오브리 파이퍼 역으로 데뷔했다. 이 역할을 통해 그는 과장되고 허풍스러운 이미지를 굳혔으며, 이는 이후 그의 무대와 영화 연기에서 특징적인 모습이 되었다. 그의 코믹하면서도 허영심 많은 연기는 종종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역할을 했다.

월번은 오랜 경력 동안 미국 전역과 다른 나라의 무대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광범위한 순회 공연을 했다.[1]

1962년, 7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롤드 프린스의 권유로 은퇴를 번복하고 뮤지컬 "A Funny Thing Happened on the Way to the Forum"에 합류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노망난 로마 시민 역할을 맡아 18개월 동안 공연했다. 그의 마지막 브로드웨이 작품은 1965년 루스 고든과 함께 출연한 "A Very Rich Woman"이었다.[1][2]

참조

[1] 뉴스 Hollywood Mugs: Raymond Walburn -- A Hollywood Convert https://www.newspape[...] Star Tribune 1936-04-25
[2] 웹사이트 Raymond Walburn https://www.ibdb.com[...] The Broadway League 201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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