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도비코 디 캄포프레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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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도비코 디 캄포프레고소는 제노바 공화국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인본주의 교육을 받고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세 차례 제노바 공화국의 도제를 역임했으나, 가문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통치가 불안정했다. 1478년에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에 의해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지배에서 도시를 해방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프랑스 니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489년에 사망했다.

로도비코 디 캄포프레고소 - [인물]에 관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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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448년 12월 16일, 병으로 사망한 형 잔노 1세 디 캄포프레고소의 뒤를 이어 제노바도제로 선출되었다. 그의 첫 번째 도제 임기 동안에는 피날레 후국과의 분쟁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1450년 9월, 사촌인 피에트로 디 캄포프레고소에게 도제 자리를 양위하고 사르차나 인근의 사르차넬로 요새로 물러났다.

1461년 7월, 또 다른 사촌 스피네타 디 캄포프레고소의 뒤를 이어 다시 도제 자리에 올랐으며, 카스텔레토 요새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시 제노바 대주교였던 사촌 파올로 디 캄포프레고소와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1462년 5월 14일 도제직에서 사임하였으며, 같은 날 파올로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같은 해 6월 8일, 로도비코는 다시 도제 자리에 올랐으나, 끊임없는 불화는 파올로 디 캄포프레고소가 그를 카스텔레토에서 체포하여 도제 자리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며 두 번째 사임으로 이어졌다.

1468년 로도비코는 사르차나피렌체 공화국에 양도했으며, 이는 이후 소유권을 두고 피렌체와 제노바 간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휘하의 해군 사령관이 되었다. 1478년에는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지배로부터 제노바를 해방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 7척의 갤리선 함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생애 마지막은 니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489년에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 및 가문

바르톨로메오 디 캄포프레고소와 카테리나 오르델라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제로 잔노 1세 디 캄포프레고소가 있다. 캄포프레고소 가문은 제노바의 유력 가문 중 하나였다. 그는 인본주의자 바르톨로메오 이바니 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훗날 이바니는 로도비코의 아들들도 가르쳤다.

그의 첫 군사 지휘 경험은 1437년에 이루어졌다. 당시 도제였던 숙부 톰마소 디 캄포프레고소가 그를 리비에라 디 포넨테와 하부 피에몬테 지역으로 보내 델 카레토 후작들과 싸우게 하면서였다. 이후 그는 제노바 공화국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후스파와 왈도파를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447년 형 잔노가 도제로 선출되자, 로도비코는 나폴리에 있는 알폰소 5세 데 아라곤의 궁정과 로마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로마에서는 같은 리구리아 출신인 교황 니콜라오 5세코르시카 섬을 제노바에 완전히 복속시킨 후, 교황의 승인을 받아 그를 코르시카의 영주로 임명했다. 교황은 또한 그에게 키프로스 영지를 주었으며, 로도비코는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1448년, 그는 병든 형을 돕기 위해 제노바로 돌아왔다.

2.2. 교육

그는 인문주의자 바르톨로메오 이바니(Bartolomeo Ivani) 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바르톨로메오 이바니는 나중에 그의 아들들도 가르쳤다.

2.3. 초기 군사 경력

로도비코 디 캄포프레고소의 첫 군사 경력은 1437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제노바도제였던 숙부 톰마소 디 캄포프레고소는 그를 이탈리아 리비에라(리비에라 디 포넨테)와 하부 피에몬테 지역으로 파견하여 델 카레토 후작 가문과의 전투를 지휘하게 했다. 이후 그는 제노바 공화국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당시 이단으로 여겨지던 후스파발도파(왈도파) 세력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3. 도제 역임

로도비코 디 캄포프레고소는 그의 형 잔노 1세 디 캄포프레고소가 사망한 1448년 12월 16일에 처음으로 제노바 공화국도제로 선출되었다. 첫 임기 동안 그는 피날레 후국과의 오랜 분쟁을 종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450년 9월, 그는 사촌인 피에트로 캄포프레고소에게 도제 자리를 양위하고 사르차나 인근의 사르차넬로(Sarzanello) 요새로 물러났다.

이후 로도비코는 1461년 7월에 다시 도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사촌 스피네타 디 캄포프레고소의 뒤를 이었으며, 카스텔레토 요새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 임기는 가문 내 권력 다툼으로 얼룩졌다. 특히 당시 제노바 대주교였던 친척 파올로와의 극심한 갈등 끝에 1462년 5월 14일 도제직을 사임해야 했다.

같은 해 6월 8일, 로도비코는 파올로를 몰아내고 세 번째로 도제 자리에 복귀했으나, 파올로와의 끊임없는 불화는 계속되었다. 결국 파올로는 로도비코를 카스텔레토 요새에서 체포하고 강제로 도제 자리를 다시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로도비코의 도제 임기는 가문 내의 복잡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여러 차례 중단되는 불안정한 양상을 보였다.

3.1. 첫 번째 도제 역임 (1448년)

1447년 형 지아노제노바도제로 선출되자, 로도비코는 나폴리에 있는 알폰소 5세 데 아라곤의 궁정과 로마에서 외교직을 수행했다. 로마에서는 리구리아 출신이기도 했던 교황 니콜라오 5세로부터 코르시카 섬의 영주로 임명받았다. 이는 코르시카가 교황의 승인을 얻어 제노바에 완전히 복속된 후의 일이었다. 교황은 또한 로도비코가 한동안 머물렀던 키프로스의 영주권도 부여했다.

1448년, 로도비코는 병든 형을 돕기 위해 제노바로 돌아왔다. 같은 해 12월 16일 형이 사망하자, 로도비코가 도제로 선출되었다. 그의 첫 번째 도제 임기 동안, 그는 피날레 후작령과의 분쟁을 성공적으로 종결시켰다.

3.2. 두 번째 도제 역임 (1461년)

1450년 9월, 사촌인 피에트로 캄포프레고소를 위해 첫 번째 도제 자리에서 물러난 로도비코는 사르차나 인근의 사르차넬로(Sarzanello) 요새로 이주했다. 이후 1461년 7월, 그는 또 다른 사촌 스피네타 디 캄포프레고소의 뒤를 이어 다시 제노바 공화국도제로 선출되었고, 카스텔레토 요새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제노바는 캄포프레고소 가문을 포함한 유력 가문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극심했다. 로도비코 역시 이러한 가문 내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특히 그의 친척이자 제노바 대주교이기도 했던 파올로와 심각한 대립 관계에 놓였다. 이 갈등으로 로도비코는 1462년 5월 14일 도제 자리에서 물러났고, 같은 날 파올로가 그 뒤를 이었다.

같은 해 6월 8일, 로도비코는 파올로를 몰아내고 다시 도제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가문 내의 끊임없는 불화는 계속되었고, 결국 파올로는 카스텔레토 요새에서 로도비코를 체포하여 강제로 도제 자리를 다시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로도비코의 두 번째 도제 임기는 가문 내 분쟁 속에서 짧게 끝났다.

3.3. 세 번째 도제 역임 (1462년)

1462년 6월 8일, 로도비코는 다시 사촌 파올로를 대신하여 도제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파올로와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인해 결국 다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두 번째 사임). 이후 파올로는 카스텔레토에서 로도비코를 체포하고 도제직 포기를 강요했고, 로도비코는 카스텔레토 요새마저 파올로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4. 망명과 말년

로도비코 디 캄포프레고소는 도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여러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을 니스에서 망명자로 보내며 여생을 마감했고, 1489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4.1. 사르차나 양도

1468년 로도비코는 사르차나피렌체 공화국에 양도하였으며, 이 결정은 이후 사르차나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피렌체와 제노바 사이에 여러 해 동안 분쟁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4.2. 아라곤 해군 사령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밑에서 해군 사령관(제독)으로 임명되었다. 1478년, 그는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지배하에 있던 제노바를 해방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 7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돌아왔다.

4.3. 망명과 사망

그는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의 제독이 되어 1478년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지배로부터 도시를 해방시키기 위해 일곱 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제노바로 돌아왔다. 그는 니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고, 1489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