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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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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렌체 공화국은 1115년 토스카나 변경백국에서 독립하여 건국되었으며, 12세기부터 교역 확대를 통해 번영을 누렸다. 13세기에 공화정으로 전환되었으나 구엘프와 기벨린, 백당과 흑당 간의 파벌 싸움이 격화되었고, 14세기에는 흑사병과 치옴피의 난 등의 혼란을 겪었다. 15세기에는 메디치 가문이 등장하여 르네상스를 지원하며 번성했으나, 메디치 가문의 통치에 반발한 시민들의 봉기로 메디치 가문이 추방되기도 했다. 16세기에는 메디치 가문이 복귀하고, 1532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피렌체 공작으로 임명되면서 공화국은 멸망하고 피렌체 공국으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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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공화국
지도
1548년 피렌체 공화국
1548년 피렌체 공화국
기본 정보
로마자 표기Repubblika fiorentina
일반 명칭피렌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데모님피렌체인
존속 기간1115년–1569년
수도피렌체
정치와 정부
정치 체제(1115–1494; 1498–1532)
신권 정치 체제 하의 공화국 (1494–98)
최고 지도자 칭호곤팔로니에레
최초 지도자자노 델라 벨라
최초 지도자 재임 기간1293–1295
사실상의 첫 번째 통치자코시모 데 메디치
사실상의 첫 번째 통치자 재임 기간1434–1464
마지막 지도자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마지막 지도자 재임 기간1530–1532
공작 칭호피렌체 공작
첫 번째 공작알레산드로
첫 번째 공작 재임 기간1532–1537
두 번째 공작코시모 1세
두 번째 공작 재임 기간1537–1569
의회원로 평의회
두 번째 의회집정관 평의회
역사
첫 건국1115년
신성 로마 제국의 힘으로 후작령 복원1185–1197
치옴피의 난1378년
피사 공화국 합병1406년
메디치 가문 설립1434년
피렌체 공화국 공작 칭호 창설1532년
시에나 공화국 점령1555년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승격1569년
이전 국가
1115년토스카나 변경백국
1254년피스토이아 코뮌
1361년볼테라 영주권
1384년아레초 코뮌
1406년피사 공화국
다음 국가
1569년토스카나 대공국
언어
공용어라틴어
이탈리아어
통화
통화플로린 (1252년부터)
현재
현재 국가이탈리아
국기
피렌체 공화국 국기
상단: 국기
피렌체 공화국 민간기
하단: 민간기, 1251년 구엘프 채택
문장
1251년까지 기벨린이 사용한 문장
1251년까지 기벨린이 사용한 문장
1251년 이후 피렌체 문장
1251년 구엘프가 채택한 문장

2. 역사적 배경

피렌체 시는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건설되었다. 서기 846년부터는 토스카나 변경백국의 일부였다. 1115년 토스카나 변경백국을 다스리던 토스카나의 마틸데가 사망하면서 피렌체의 자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피렌체가 변경백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공화국 또는 과두정 형태의 자치 정부를 형성한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마틸다의 후계자인 라보도(Rabodo, 재위 1116~1119년)가 피렌체와의 분쟁 중 사망한 1119년이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2]

피렌체 공화국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언급은 1138년에 나타난다. 당시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들은 토스카나 변경백이었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0세에 맞서 연합을 형성했는데, 이때 피렌체 공화국이 언급되었다. 이 시기 피렌체를 포함한 토스카나 지역은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다.[27][2]

피렌체 대학교의 엔리코 파이니의 연구에 따르면, 1000년에서 1100년 사이에 아미데이 가문, 아르딩히 가문, 브루넬레스키 가문, 부온델몬티 가문, 카폰사키 가문, 도나티 가문, 피판티 가문, 몬탈리아리의 게르다르디니 가문, 구이디 가문, 네를리 가문, 포르첼리 가문, 사케티 가문, 스콜라리 가문, 우베르티 가문, 비스도미니 가문 등 약 15개의 오래된 귀족 가문들이 피렌체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6] 이들 가문은 이후 피렌체 공화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2. 1. 초기 역사 (12세기 ~ 13세기)

1115년 토스카나 변경백국을 다스리던 마틸다 디 카노사가 사망하자, 피렌체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자치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피렌체가 토스카나 변경백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공화국을 형성한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마틸다의 후계자인 라보도(Rabodo)가 피렌체와의 분쟁 중 사망한 1119년이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2] 일반적으로 마틸다가 사망한 1115년을 피렌체 공화국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피렌체 공화국에 대한 최초의 공식 언급은 1138년으로,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가 당시 토스카나 변경백이었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0세에 맞서 연합했을 때이다.[2]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독립한 피렌체는 해외 무역을 통해 빠르게 번영했다.[15] 이는 도시의 인구 증가로 이어졌고, 많은 교회와 궁전(팔라초)들이 건설되었다.[2] 이러한 번영은 118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면서 잠시 중단되었고, 토스카나 변경백이 피렌체와 주변 지역을 다시 장악했다. 그러나 1197년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자 피렌체 시민들은 다시 독립을 선언하고 힘을 키워나갔으며, 마틸다 시대에 건설된 성벽을 확장하기도 했다.[2][16] 이 시기 피렌체에는 아미데이, 아르딩기, 브루넬레스키, 부온델몬티, 카폰사키, 도나티, 피판티, 게라르디니, 구이디, 네를리, 포르첼리, 사케티, 스콜라리, 우베르티, 비스도미니 등 여러 귀족 가문들이 존재했다.[6][29]

13세기에도 피렌체의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3만 명에 이르렀고, 이는 활발한 무역과 상호작용하며 도시 발전을 이끌었다. 건축 활동도 활발하여 여러 개의 새로운 다리와 교회가 건설되었으며, 특히 1294년에는 피렌체 대성당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건축물들은 피렌체 고딕 건축의 훌륭한 사례로 평가받는다.[2]

정치적으로 피렌체는 13세기 내내 불안정한 상태였다. 1216년부터 도시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17] 기벨린은 주로 귀족 세력을 기반으로 했고, 구엘프는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1244년부터는 기벨린 세력이 안티오크의 프리드리히의 통치 아래 도시를 지배했지만, 1250년 구엘프 세력에 의해 축출되었다.[7] 이후 구엘프 세력은 '프리모 포폴로'(Primo Popoloit, 제1차 평민 정부)라 불리는 시대를 열며 피렌체의 번영을 이끌었다.[18] 이 시기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1252년 새로운 금화인 플로린의 발행이었다. 플로린은 금 함량이 일정하고 신뢰도가 높아 피렌체 국경을 넘어 유럽과 근동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는 주요 통화가 되었다.[7] 같은 해 팔라초 델 포폴로도 건설되었다.[7]

그러나 구엘프 세력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시에나에게 참패하면서 구엘프는 권력을 잃었고, 기벨린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기벨린은 구엘프가 이룬 많은 성과를 되돌리고 수백 개의 탑, 주택, 궁전을 철거하는 등 강압적인 통치를 펼쳤다.[7] 하지만 기벨린의 통치 기반은 취약했고, 결국 중재를 위해 교황 클레멘스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은 구엘프를 지지했고, 이에 힘입어 구엘프 세력은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7] 이후 피렌체의 구엘프 세력은 다시 백당(Bianchi)과 흑당(Neri)으로 분열되어 갈등을 겪기도 했다.[17]

13세기 후반 피렌체 경제는 정점에 달했다. 이러한 성공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설계한 유명한 베키오 궁전 건설로 상징된다. 1292년에는 피렌체 시의 행정 구역이 정비되었고, 도시에는 번영하는 상인 계급이 지은 호화로운 궁전과 타운하우스들이 들어섰다.[2][17] 1293년에는 피렌체 공화국의 헌법 역할을 하게 되는 정의의 조례가 제정되었다.[8][19] 1298년, 당시 유럽 은행업의 중심지였던 시에나의 주요 은행 가문인 본시뇨리(Bonsignori) 가문이 파산하면서, 피렌체는 유럽 금융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30][20]

2. 2. 14세기: 경제 발전과 흑사병,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등장

1304년, 구엘프와 기벨린 사이의 계속되는 갈등 속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이 화재는 오르토산미켈레(Orto-san-Michele) 근처에서 시작되어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빠르게 번졌으며, 상점, 창고, 주택, 궁전 등 1,900채 이상의 건물이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혔다.[21] 이 사건은 많은 가문에 경제적 타격을 주었다.

화재 이후 피렌체는 점차 경제를 회복하였다. 특히 1298년 시에나의 주요 은행 가문이었던 본시뇨리(Bonsignori) 가문이 파산하면서, 피렌체는 유럽 은행업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30] 바르디, 페루치, 아차이올리 가문과 같은 새로운 은행 가문들이 부상하여 국제적인 금융 활동을 주도했다. 이 시기 피렌체 공화국의 플로린 금화는 신뢰할 수 있는 금 함량 덕분에 유럽 전역에서 주요 교역 화폐로 사용되었다.

피렌체 플로린의 앞면과 뒷면


그러나 1340년대에 이르러 유럽 전역에 걸친 경제 침체로 인해 피렌체의 주요 은행들이 파산하는 위기를 맞았다. 이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일부 채무(약 13,000 플로린)를 상환하지 않은 사건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광범위한 경기 불황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피렌체의 문화는 꽃을 피웠다.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와 같은 위대한 작가들이 등장하여 라틴어가 아닌 토스카나 방언으로 작품을 쓰면서 이탈리아어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31][21][22]

1347년, 동방에서 시작된 흑사병메시나를 통해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피렌체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이 전염병은 유럽 인구의 상당수를 감소시키며[32] 기존의 사회 질서, 특히 봉건 제도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던 1378년, 불만을 품은 양모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치옴피의 난이 일어났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혁명적인 정부(코무네)를 세우기도 했으나, 1382년 부유한 상인과 귀족 세력에 의해 결국 진압되었다.[33]

이러한 혼란 속에서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1397년,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메디치 은행을 설립했다.[34] 이 은행은 이후 크게 성장하여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반이 되었다.[35]

2. 3. 15세기: 르네상스와 메디치 가문의 통치

15세기는 피렌체에는 성공적인 시기였다. 1422년 조약에 따라 밀라노 공국과의 관계가 설정되었으나,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밀라노는 조약을 무시하고 피렌체 국경 도시들을 점령했다.[36] 피렌체는 밀라노와 전쟁을 벌였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움으로 1427년 승리하여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으로부터 유리한 조약을 얻어냈다.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부채(약 420만 플로린)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에스티모''(Estimo) 세금 제도를 시민 전체 재산을 기반으로 하는 ''카스타토''(Catasto) 제도로 변경했다.[37] 이 시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피렌체 대성당의 유명한 돔을 완성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큰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 코시모 데 메디치


르네상스코시모 데 메디치가 사실상(데 팍토, de facto) 피렌체를 통치하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인문주의 학자 니콜로 니콜리는 1397년 마누엘 크리솔라스를 피렌체 대학교의 첫 그리스어 교수로 초빙하며 고전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다.[38] 니콜리는 고대 필사본 수집가였으며, 1437년 사망 후 그의 수집품은 코시모에게 기증되었다.[39] 니콜리의 뒤를 이은 포조 브라촐리니 역시 유럽 전역을 돌며 고대 로마 필사본을 수집하고 자신의 저술 활동도 활발히 펼쳤으며, 말년에는 피렌체의 장관을 지냈다.[40]

1439년 피렌체에서는 동서 교회의 분열로 갈라진 동방 정교회로마 가톨릭교회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공의회가 열렸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에 직면한 비잔티움 제국 황제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의 군사적 지원 요청에 응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했다.[41] 공의회는 피렌체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고, 1439년 7월 두 교회는 타협안에 합의하며 교황은 비잔티움에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요한네스 8세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간 후, 그리스인들이 타협안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황제는 로마 교황청과의 조약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다. 서방의 지원이 무산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었다.[42]

코시모 데 메디치는 예술과 학문을 열정적으로 후원하여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 미켈로초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고용했으며, 이들의 활동에 60만 플로린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43] 정치적으로는 1430년대와 1440년대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두 차례 침략을 막아냈으며, 이는 경쟁 가문인 알비치 가문의 추방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44] 1450년, 코시모의 동맹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를 장악하고 공작이 되면서 피렌체는 밀라노와 강력한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코시모는 여러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며 메디치 가문의 권력을 공고히 했고,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로 자리매김했으며 1464년 사망했다.[45]

1494년 피렌체 공화국과 주변국 지도


코시모의 장남인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통풍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통풍 걸린 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피렌체 정계는 불안정했다. 아버지 시대에 쌓인 메디치 은행의 부채, 특히 귀족 루카 피티에게 진 빚 문제가 불거졌다.[47] 루카 피티는 피에로에 대항해 무장 반란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48] 1466년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뒤를 잇자, 피렌체는 중요한 동맹을 잃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페라라 공작의 지원을 받은 반대파가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피렌체 시민들의 외면으로 실패했다.[49] 공모자들은 망명길에 올랐다.[50] 1467년에는 베네치아가 피렌체 영토를 침공했으나, 우르비노의 군주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가 이끄는 용병군의 활약으로 격퇴되었다. 피에로는 1469년 겨울에 사망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


피에로의 아들 로렌초 데 메디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피렌체를 통치하며 르네상스 시대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그는 위대한 예술 후원자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 수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했으며[51], 뛰어난 예술 작품 제작을 의뢰하고 보석 수집을 즐겼다. 그의 아내 클라리체 오르시니와의 사이에서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되는 조반니와 피렌체 계승자인 피에로 2세 데 메디치 등 여러 자녀를 두었다.

1478년, 파치 가문이 주도한 파치 음모사건으로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암살당했다.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은 공모자들을 즉결 처형했다. 공모에 가담했던 피사 대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역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던 교황 식스토 4세는 격분하여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고 로렌초의 체포를 시도했으나[52], 피렌체 시민들과 성직자들은 교황에 맞서 로렌초를 지지했다. 이로 인해 피렌체는 교황령과 2년간 전쟁을 치렀다.[53] 로렌초는 1492년에 사망했고, 아들 피에로가 뒤를 이었다.

피에로 2세 데 메디치는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나폴리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피렌체로 진격해 온 프랑스군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이에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은 봉기하여 메디치 가문을 추방했다.[24][25] 메디치 가문은 18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해야 했으며, 피에로 자신은 1503년 프랑스군과 함께 후퇴하던 중 강에서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메디치 가문이 추방된 후, 페라라 출신의 도미니코회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피렌체를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다.[54] 그는 1480년대 피렌체에 와서 열정적인 설교와 예언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사보나롤라 정부는 민주적인 개혁을 일부 시행하여 메디치 가문에 의해 추방되었던 망명자들이 돌아올 수 있게 했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피렌체를 엄격한 신정 국가("하느님의 도시")로 만드는 것이었다.[54] 피렌체 시민들은 사치스러운 복장을 금지당했고, 많은 여성들이 수녀가 될 것을 서약했다.[55] 사보나롤라는 가발, 향수, 그림, 고대 필사본 등 세속적인 '허영심'으로 간주되는 물품들을 모아 불태우는 허영의 소각을 단행하며 악명을 떨쳤다.[56][11]

사보나롤라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도덕함을 비판하며 교회 개혁을 외치다가 1497년 말 파문당했다. 같은 해, 피렌체는 1494년 샤를 8세의 침공 이후 사실상 독립 상태였던 피사를 다시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57] 전쟁 실패와 식량 부족, 전염병 발생 등으로 민심이 악화되자, 피렌체인들은 사보나롤라에게 책임을 물었다. 결국 그는 1498년 5월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58]

사보나롤라 실각 이후 피렌체는 혼란에 빠졌다가, 종신 국정 책임자(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된 피에로 소데리니의 통치 아래 안정을 되찾았다.[59] 이 시기 피렌체는 비교적 부패가 적고 민주적인 모습을 보였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제안에 따라 전통적인 용병 대신 시민으로 구성된 상비군 제도를 도입했으며, 1509년에는 마침내 피사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60]

그러나 캉브레 동맹전쟁(1508~1516) 중 피렌체는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1511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요청으로 피사 공의회를 개최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교황과 스페인이 주도한 신성 동맹군의 침공을 받았다. 피렌체 인근 도시 프라토가 함락된 후 1512년 9월, 소데리니는 실각했다. 교황 특사로 임명된 조반니 데 메디치(훗날 교황 레오 10세) 추기경이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피렌체에 입성하여 통치권을 장악했다.[61] 이로써 메디치 가문은 1494년 추방된 지 18년 만에 피렌체 통치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2. 4. 16세기: 메디치 가문의 복귀와 공화국의 종말

1498년 사보나롤라가 권좌에서 물러난 후 피렌체는 혼란을 겪었으며, 1502년 피에로 소데리니가 종신 곤팔로니에레(수상)로 선출되어 도시를 이끌었다.[59] 소데리니의 통치 아래 피렌체는 비교적 민주적인 모습을 보였고 부정부패도 적었다. 이 시기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제안으로 전통적인 용병 대신 상비군(국민군) 제도가 도입되었고,[60] 1509년에는 오랜 숙적이었던 피사를 다시 정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60][9]

그러나 캉브레 동맹 전쟁(1508~16) 중 피렌체는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1511년 프랑스 루이 12세의 요청으로 피사 공의회를 개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신성동맹군(스페인군)의 침공을 받았다. 피렌체 인근 도시 프라토가 함락되자 1512년 9월 소데리니는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교황 특사로 임명된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훗날 교황 레오 10세)이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에 입성하여 통치권을 장악했다.[61] 이로써 1494년 추방되었던 메디치 가문은 18년 만에 피렌체의 통치권을 되찾았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1513년 초, 교황 율리오 2세가 사망하자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콘클라베 참석을 위해 로마로 향했고, 그곳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레오 10세가 되었다. 이는 사실상 교황령과 피렌체 공화국의 동군연합 상태를 의미했다.[62] 레오 10세는 피렌체를 직접 통치하는 대신 대리인을 임명했다. 처음에는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임명했으나,[63] 1516년 줄리아노가 사망하자 조카 로렌초 2세 데 메디치가 그 자리를 계승했다.[63][64][12] 로렌초 2세는 훗날 프랑스 왕비가 되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아버지였으나, 딸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19년 매독으로 사망했다.[13] 그의 통치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었으며, 정부 운영 방식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기도 했다.[12]

레오 10세와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


로렌초 2세 사후에는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레오 10세의 사촌)이 피렌체를 다스렸다. 그는 1523년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될 때까지 피렌체를 비교적 성공적이고 검소하게 통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2] 클레멘스 7세는 교황이 된 후, 자신의 친척으로 알려진 이폴리토 데 메디치(줄리아노의 사생아)와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로렌초 2세 또는 클레멘스 7세 본인의 사생아로 추정)를 파세리니 추기경의 후견 아래 피렌체 통치자로 임명했다.[65] 그러나 파세리니 추기경의 섭정은 시민들의 불만을 샀다.[14]

1527년 5월, 코냐크 동맹 전쟁신성 로마 제국 군대가 로마 약탈을 감행하여 도시는 파괴되고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투옥되었다.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의 몰락은 피렌체 내 메디치 세력의 약화를 초래했고, 이 틈을 타 반(反)메디치 세력이 봉기하여 메디치 가문을 다시 한번 피렌체에서 추방했다.[26] 새로운 공화정부는 청교도적인 성격을 띠며 예수 그리스도를 "피렌체의 왕"으로 선포하고 엄격한 근본주의적 제한법들을 제정하기도 했다.[66]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복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529년,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 황제와 바르셀로나 조약을 체결하여 화해했다. 이 조약에 따라 카를 5세는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복귀를 돕는 대가로 교황으로부터 황제 대관식을 인정받았다. 황제군은 피렌체를 침공했고, 11개월간의 격렬한 피렌체 공성전 끝에 1530년 8월, 피렌체 공화국은 결국 항복했다.[26]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공화국이 항복하자 카를 5세는 피렌체의 정부 형태를 결정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하고, 1530년 8월 12일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 공화국의 세습 통치자(''capo'')로 임명했다.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의 친척인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의 통치자로 내세웠다. 1532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는 카를 5세에 의해 초대 피렌체 공작으로 임명되면서 피렌체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하고 세습 군주정인 피렌체 공국이 수립되었다.[67] 이 조치에 대해 피렌체 시민들의 불만은 극심했고 일부에서는 반란 시도도 있었으나,[67] 황제군의 주둔 하에 메디치 가문의 권력은 공고해졌다. 알레산드로는 1537년 암살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1569년 토스카나 대공으로 승격되어 토스카나 대공국 시대를 열었다. 메디치 가문은 1737년 가문의 대가 끊길 때까지 토스카나를 통치하게 된다.

3. 정부

피렌체는 9명으로 구성된 시뇨리아(Signoria)라고 불리는 의회의 지배를 받았다. 시뇨리아의 대표는 곤팔로니에레(Gonfaloniere)로, 시뇨리아의 일원이었으며 2개월마다 추첨으로 선출되었다. 시뇨리아 위원이 되기 위한 자격 요건은 까다로웠는데, 재정적으로 부유하고 파산이나 세금 미납 기록이 없어야 했으며, 30세 이상이어야 했고, 피렌체의 주요 7개 길드(상인, 은행가, 이중직 길드, 재판관 등) 중 하나의 회원이었다.[68] 추첨은 종종 사전에 결정되어 영향력 있는 가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추첨 대상자 명단은 5년마다 갱신되었다.[69]

정부의 주요 기관은 tre maggiori|트레 마조리it로 불렸으며, 여기에는 12명의 선량한 사람들(Buonomini|부오노미니it), 곤팔로니에레의 기수들(Gonfalonieri di Compagnia|곤팔로니에리 디 콤파냐it), 그리고 시뇨리아가 포함되었다. 처음 두 기관은 법안을 논의하고 비준할 권한은 있었지만, 직접 법안을 제출할 수는 없었다. 곤팔로니에레의 임기는 본래 2개월이었으나, 1498년 사보나롤라가 몰락한 이후에는 베네치아 총독처럼 종신직으로 변경되었다. 시뇨리아는 매일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에서 회의를 열었다. 전쟁위원회와 같은 다양한 위원회들이 정부의 특정 업무를 담당했다. 행정적으로 피렌체는 4개의 지역(quartieri|콰르티에리it)으로 나뉘었고, 각 지역은 다시 4개의 하위 구역(gonfaloni|곤팔로니it)으로 세분화되었다. 이는 주로 지역 민병대를 효율적으로 소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메디치가 문장


선출직을 맡으려면 과거에 선출직을 역임했던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으면서 점차 과두정치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메디치 가문코시모 데 메디치루카 공화국과의 전쟁 실패 후 잠시 망명(1433년)했다가 시민들의 지지로 복귀한 이후, 1434년부터 1494년까지, 그리고 다시 1512년부터 1527년까지 사실상 세습적으로 피렌체를 지배했다. 코시모는 자신을 망명시켰던 알비치 가문을 추방하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

1530년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피렌체 공화국의 공작"으로 임명된 후, 1532년 4월 클레멘스 7세는 피렌체의 통치 위원회인 Balía|발리아it를 설득하여 새로운 헌법을 작성하게 했다. 이 헌법은 공식적으로 세습 군주제를 수립했으며, 오랜 역사의 시뇨리아와 곤팔로니에레 직책을 폐지하고 다음 세 개의 기관으로 대체했다.

기관구성 및 임기주요 권한
Consigliere|콘시글리에레it공작이 수장, 4명으로 구성 (3개월 임기)공작 보좌 및 자문
Senato|상원it발리아가 선출한 48명으로 구성재정, 안보, 외교 정책 결정, 전쟁 및 공공 안전 위원회, 주요 지역 총독 및 대사 임명
Consiglio dei Duecento|200인 의회it200명으로 구성 (종신직)청원 법정 역할



이로써 피렌체 공화국은 막을 내리고 피렌체 공국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4. 메디치 가문

1378년 치옴피의 난 이후 혼란을 겪던 피렌체에서 1397년 10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며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34] 이 은행은 17세기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 시대까지 존속했다.[35]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아버지로부터 은행을 물려받고 피렌체 정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토스카나의 이웃 루카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정적이었던 알비치 가문에 의해 1433년 추방당했다.[37] 그러나 베네치아 망명 1년도 채 되지 않아, 피렌체 시민들의 민주적 투표로 추방이 철회되었고, 코시모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피렌체로 돌아와 알비치 가문을 추방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코시모는 공식적인 직위 없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실상의'(de facto) 통치자였지만, 그의 시대에 피렌체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코시모는 인문주의자 니콜로 니콜리와 포조 브라촐리니 등을 지원했으며, 특히 니콜리가 사망한 후 그의 방대한 고대 필사본 컬렉션을 기증받았다.[39] 또한 마누엘 크리솔라스를 피렌체 대학교의 첫 그리스어 교수로 초빙하는 등 학문 발전에도 기여했다.[38] 1439년에는 동서 교회의 분열을 봉합하기 위한 피렌체 공의회를 유치하여 피렌체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이 공의회는 동방 정교회로마 가톨릭교회의 일시적인 통합을 이끌어냈으나, 비잔티움 제국 내부의 반발로 최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41][42] 코시모는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 미켈로초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코시모는 이들 예술 위원회에 600,000 플로린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3] 정치적으로는 밀라노 공국의 침입을 막아내고,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작이 되는 것을 지원하며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코시모는 1464년 사망할 때까지 피렌체에 대한 메디치 가문의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45]

코시모의 장남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는 '통풍 걸린 자'(il Gottoso)라는 별명처럼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의 통치 기간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아버지 시대의 막대한 채무 문제와 귀족 루카 피티의 반란 시도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47][48] 또한 밀라노의 동맹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사망하고(1466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피렌체를 침공(1467년)하는 등 외교적 위기도 맞았다.[49][50] 피에로는 1469년 사망했다.

피에로의 아들 로렌초 데 메디치(별명 '일 마니피코', Il Magnifico, 위대한 자)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로렌초는 뛰어난 외교술과 정치력으로 피렌체를 안정시키고, 르네상스의 위대한 후원자로서 명성을 떨쳤다.[51]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을 지원하며 피렌체 문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1478년, 경쟁 가문인 파치 가문이 교황 식스토 4세의 암묵적인 지원 아래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암살하려 한 파치 음모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동생 줄리아노는 살해당했지만 로렌초는 목숨을 건졌고,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은 공모자들을 즉결 처형했다. 이 과정에서 피사의 대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까지 처형되자 교황 식스토 4세는 피렌체 전체를 파문하고 로렌초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52] 피렌체 시민들과 성직자들이 교황에 맞서 로렌초를 지지하면서, 피렌체는 2년간 교황령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53] 로렌초는 1492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피에로 2세 데 메디치(불행한 피에로)가 뒤를 이었다.

레오 10세(중앙)와 그의 사촌이자 훗날 클레멘스 7세가 되는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좌)


로렌초 사후 피렌체는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1494년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 1512년 9월, 로렌초의 차남이자 추기경이었던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를 점령하면서 피에로 소데리니의 공화정 정부를 무너뜨리고 메디치 가문의 통치를 복원했다.

피렌체를 탈환한 직후,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로마에서 열린 교황 선거에 참여하여 교황 레오 10세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교황령과 피렌체는 사실상 한 명의 통치자 아래 놓이게 되었다. 레오 10세는 직접 피렌치를 통치하지 않고, 처음에는 동생 네무르 공작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1513년부터는 조카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2세 데 메디치를 대리 통치자로 임명했다.[12] 로렌초 2세의 통치는 공화정의 전통을 무시하고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 피렌체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12] 그는 1519년, 훗날 프랑스 왕비가 되는 딸 카트린 드 메디치가 태어나기 직전 매독으로 사망했다.[13]

로렌초 2세 사후, 레오 10세의 사촌인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이 피렌체를 통치했다. 그는 1523년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될 때까지 피렌체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다스렸다는 평가를 받는다.[12] 클레멘스 7세는 교황이 된 후, 이폴리토 데 메디치(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사생아)와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일반적으로 로렌초 2세의 사생아로 여겨지나, 일부에서는 클레멘스 7세의 아들이라는 주장도 있다)를 실비오 파세리니 추기경의 후견 아래 피렌체 통치자로 내세웠으나, 이 섭정 통치는 큰 반감을 샀다.[14]

1527년, 신성 로마 제국카를 5세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사코 디 로마)이 발생하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투옥되자, 피렌체의 공화파는 이 기회를 틈타 다시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엄격한 청교도주의적 분위기가 도시를 휩쓸었다. 하지만 클레멘스 7세는 1529년 카를 5세와 바르셀로나 조약을 맺어, 황제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를 침공했다. 오랜 포위 공격 끝에 메디치 가문은 다시 피렌체로 복귀했다.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의 친척인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의 통치자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피렌체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알레산드로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황제군의 힘에 의존했다. 1532년, 알레산드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의해 세습 피렌체 공작으로 임명되면서 피렌체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고 공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황제군은 여전히 피렌체에 주둔하며 그의 통치를 뒷받침했다. 1535년, 파치 가문을 포함한 반(反)메디치 세력이 카를 5세에게 알레산드로의 폐위를 청원했으나, 자신의 딸 파르마의 마르가레타와 알레산드로를 결혼시킨 카를 5세는 이를 거절했다. 알레산드로는 1537년 1월 1일, 그의 먼 친척인 로렌치노 데 메디치에게 암살당했다.

토스카나 대공이 되는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알레산드로에게 적법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피렌체 당국은 메디치 가문의 방계 혈족인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를 새로운 공작으로 선출했다. 코시모 1세는 즉위 직후 망명 중이던 스트로치 가문의 침입을 몬테무를로 전투에서 격퇴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 그는 피렌체의 행정 시스템을 개혁하고 관료제를 정비했으며, 1542년에는 피렌체에 주둔하던 황제군을 철수시켰다. 코시모 1세는 엘바 섬 일부를 확보하여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항구 도시 리보르노를 개발하는 등 영토 확장과 경제 발전에 힘썼다. 그는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1554년 마르치아노 전투에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시에나 공화국을 격파했다. 1557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시에나 영토를 코시모 1세에게 세습 영지로 하사했다. 1560년 메디치 가문은 피티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고, 코시모 1세는 건축가 조르조 바사리에게 우피치 미술관 건설을 의뢰하는 등 메디치 가문의 예술 후원 전통을 이어나갔다. 그의 통치 아래 피렌체 공국은 점차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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