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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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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이스게라는 1806년 로이스 가문이 통치하는 후작령으로 시작하여, 1848년 로이스 제계로 통합되었다. 1815년 독일 연방, 1866년 북독일 연방에 가입했으며, 1871년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다. 1919년 로이스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1920년 튀링겐주에 합병되었다. 로이스 가문은 남성 구성원에게 "하인리히"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출생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부여하는 독특한 명명법을 사용했다. 로이스게라는 튀링겐 지방 동부에 위치했으며, 수도는 게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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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게라
기본 정보
일반 명칭로이스-게라
로이스 융거러 리니에 공국 깃발
깃발
로이스-그라이츠 공국의 문장
문장
국가 표어Ich bau auf Gott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국가Heil unserm Fürsten, Heil! (우리 군주께 만세!)
독일 제국 내의 로이스-게라
독일 제국 내의 로이스-게라
튀링겐 내의 로이스-게라
튀링겐 내의 로이스-게라
정치
정치 체제공국
수도게라
역사
시작1806년
사건 시작4월 9일
종료1918년
사건 종료11월 11일
이전 국가로이스 백국
이후 국가로이스 인민주
인물
군주공작
초대 군주하인리히 42세
재임 기간1806년–1818년
마지막 군주하인리히 27세
마지막 재임 기간1913년–1918년
국무 장관국무 장관
초대 국무 장관구스타프 폰 슈트라우흐
초대 국무 장관 재임 기간1825년–1839년
마지막 국무 장관파울 루크데셸
마지막 국무 장관 재임 기간1918년
현재
현재 국가독일

2. 역사

1806년 로이스 가문이 통치하던 로이스-슐라이츠(Schleiz: 로이스-게라(Gera) 포함), 로이스-로벤슈타인(Lobenstein), 로이스-쾨스트리츠(Köstritz),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Ebersdorf)의 군주 작위가 모두 후작(候爵)으로 올라갔다. 1824년 로벤슈타인과 에베르스도르프가 합병되었고, 1848년에는 이들 영토가 모두 통합되어 로이스 제계(Jüngere Linie)가 성립되었다.

1815년 독일 연방, 1866년 북독일 연방을 거쳐 1871년 독일 제국의 영방(領邦)이 되었다. 1919년 로이스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1920년 튀링겐주에 합병되었다.

로이스 가문의 독특한 명명법은 이 가문의 역사와 계승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수 세기 동안 모든 남성 구성원은 "하인리히"라는 이름과 로마 숫자를 사용했다.[2] 이는 가문의 수장에게만 재위 번호를 부여하는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각 세기에 처음 태어난 아들을 기준으로 모든 남성 가족 구성원에게 새로운 번호 매기기 시퀀스를 사용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1927년 그라이츠의 하인리히 24세 공자가 사망하면서 로이스 엘더 라인(형계)는 단절되었고, 로이스 융거 라인(제계)의 하인리히 27세가 로이스 가문 전체의 수장이 되었다. 그의 아들 하인리히 45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실종되었고, 쾨스트리츠의 하인리히 4세 공자가 그 권리를 상속받았다.

19세기 후반부터 로이스 가문의 젊은 하위 계열 중 하나는 "플라우엔 백작" 칭호를 포함한다.[2] 하인리히 26세 로이스 공자(1857–1913)는 뷔르템베르크의 빅토리아 폰 퓌르스텐슈타인 백작부인(1863–1949)과 결혼했지만, 엄격한 결혼 규칙으로 인해 그들의 자녀는 "플라우엔 백작"으로 지정되었다.[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제국이 붕괴되면서 로이스의 통치 공자는 왕관을 잃었다. 1927년, 하인리히 26세의 아들인 플라우엔의 하인리히 해리 백작(1890–1951)은 삼촌인 하인리히 30세 공자(1864–1939)에게 입양되었고, "하인리히 해리 로이스 공자"로 인정받았다.[2]

1992년, 로이스 가문의 공작인 플라우엔 백작, 하인리히 루초 로이스 공자는 아바의 전 리드 싱어인 아니프리드 린스타드와 결혼했다. 그녀는 로이스 공주이자 플라우엔 백작부인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

2. 1. 로이스 가문의 분열과 통합

1806년에 로이스-슐라이츠(Schleiz: 로이스-게라(Gera) 포함), 로이스-로벤슈타인(Lobenstein), 로이스-쾨스트리츠(Köstritz),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Ebersdorf)의 군주 작위가 모두 로이스 가문이 통치하는 후작(候爵)으로 올라갔다.[2] 1824년 로벤슈타인과 에베르스도르프가 합병하였고, 1848년에 위의 모든 영토들이 통합하여 로이스 제계(Jüngere Linie)가 성립하였다.[4]

16세기에 분열된 로이스 가문의 막내 혈통(동생 계열 로이스 가문)은 로이스-게라 가문Reuß-Gerade을 종가로 하여 로이스-슈라이츠 가문Reuß-Schleizde, 로이스-로벤슈타인 가문Reuß-Lobensteinde,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 가문Reuß-Ebersdorfde, 로이스-쾨스트리츠 가문Reuß-Köstritzde 등으로 분가했다.

1790년에 로이스-로벤슈타인 가문이 제국 제후에 서열되었고, 1806년에는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 가문, 로이스-슈라이츠 가문도 제국 제후의 지위를 얻었다. 1802년, 동생 계열 로이스 가문의 종가인 로이스-게라 가문이 단절되었고, 그 유산은 로이스-슈라이츠, 로이스-로벤슈타인,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3개 제후국에 의해 계승되었다.

동생 계열 3개 제후국은 (형 계열 로이스 가문의 로이스-그라이츠 후국과 함께) 1807년에 라인 동맹에 참가, 1815년에는 독일 동맹에 참가했다. 1824년에 로이스-로벤슈타인 후국은 단절되었고, 유산은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 후작 하인리히 72세가 계승했다.

2. 2. 독일 제국 편입과 멸망

1815년 독일 연방, 1866년 북독일 연방을 거쳐 1871년 독일 제국의 영방(領邦)이 되었다. 1919년 로이스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1920년 튀링겐주에 합병되었다.[2]

1848년 혁명 당시 로이스-뢰벤슈타인-에버스도르프 후작 하인리히 72세가 퇴위하면서 주권을 로이스-슐라이츠 후작 하인리히 62세에게 양도했다. 하인리히 62세는 로이스 젊은선 제후가의 영토를 통합, 게라를 수도로 하는 로이스 젊은선 후국(로이스-게라 후국)을 세우고 근대 헌법 제정과 입헌 의회 소집 등 개혁을 단행했다.

하인리히 67세는 1866년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고 북독일 연방에 가입했다. 1871년 하인리히 14세 때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다.

1902년, 동족의 인접국 로이스-그라이츠 후국을 계승한 하인리히 24세는 심신 장애로 인해 하인리히 14세가 섭정을 맡았고, 이후 하인리히 27세에게 계승되었다.

1918년 독일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붕괴되고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후국은 소멸했다. 형선, 젊은선 양 로이스 후국 영역에는 로이스 인민주(Volksstaat Reuß, 수도: 게라)가 성립되었지만, 1920년 튀링겐 주에 통합되었다.

2. 3. 로이스 가문의 명명법과 계승

로이스 가문의 남성 구성원에게는 고유한 명명 및 번호 매기기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수 세기 동안 모든 남성 구성원은 "하인리히"라는 이름과 그 뒤에 붙는 로마 숫자를 사용했다.[2] 대부분의 왕족 및 귀족 가문은 가문의 수장에게만 재위 번호를 부여하고, 이는 그들의 재위 순서에 따라 매겨지지만, 로이스 제계("로이스, J.L.")는 각 세기에 처음 태어난 아들을 기준으로 모든 남성 가족 구성원에 대한 새로운 번호 매기기 시퀀스를 사용했다. 단일 핵가족 내의 남성 자녀가 순차적인 번호를 가질 필요는 없었는데, 이는 대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공통 번호 매기기 시스템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슐라이츠의 하인리히 67세 공자의 아들들은 출생 순서대로 하인리히 5세, 하인리히 8세, 하인리히 11세, 하인리히 14세, 하인리히 16세로 명명되었으며, 그들의 남계 친족들은 그들 사이의 숫자를 출생 순서에 따라 가졌다. 이러한 명명 시스템으로 인해, 로이스 제계의 특정 수장은 다른 유럽의 지배 가문 중 가장 높은 숫자를 이름에 부여받았다. "제계"의 지정은 1930년에 폐지되었는데, 엘더 가문("로이스, A.L.")은 마지막 남성 구성원인 하인리히 24세가 1918년에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1927년에 미혼으로 사망하면서 멸족되었다.[2]

1927년 그라이츠의 하인리히 24세 공자가 사망했고 그의 작위는 하인리히 27세에게로 넘어갔으며, 그는 로이스 1세 공자가 되었고 이듬해 사망했다. 그의 상속자 하인리히 45세는 1945년 8월 에베르스도르프에서 소련 군대에 체포되어 실종되었다. 1962년 1월 5일 그는 부재중 사망 선고를 받았고 쾨스트리츠의 하인리히 4세 공자가 그의 권리를 상속받았다.

1806년에 로이스-슐라이츠(Schleiz: 로이스-게라[Gera] 포함), 로이스-로벤슈타인(Lobenstein), 로이스-쾨스트리츠(Köstritz),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Ebersdorf)의 군주의 작위가 모두 로이스 가문이 통치하는 후작(候爵)으로 올라갔다. 1824년 로벤슈타인과 에베르스도르프가 합병하였고, 1848년에 위의 모든 영토들이 통합하여 로이스 제계(Jüngere Linie)가 성립하였다.

로이스 제계의 역대 군주는 다음과 같다.

이름에 붙은 서수가 즉위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것이 특징인데, 이는 남자에게 모두 "하인리히"라는 이름을 붙이는 로이스 가문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1927년 형계 로이스 가문의 하인리히 24세가 사망했기 때문에, 하인리히 27세가 로이스 가문 전체의 가장이 되어 명목상의 로이스 변경백 칭호를 칭했다. 하인리히 27세의 아들 하인리히 45세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 점령군에게 납치되어 소식이 끊겼다. 하인리히 45세에게는 친자가 없어,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로이스-케스트리츠 가문 당주인 하인리히 4세가 로이스 가문의 가장이 되었다.

3. 지리

튀링겐 제후국 내 로이스-게라 후국 (1900년)


로이스-게라 후국은 튀링겐 지방 동부에 위치했던 영방으로, 수도는 바이스 엘스터 강변의 도시 게라였다. 독일 제국 아래 튀링겐 제후국으로 총칭되는 영방군 중 하나이며, 로이스 가문이 군주였던 두 개의 후국 중 하나(다른 하나는 로이스-그라이츠 후국)이다.

튀링겐 지방은 역사적 경위로 인해 각국이 크고 작은 월경지를 소유하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로이스-게라 후국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수도 게라를 포함한 영역보다 남쪽(현재의 그라이츠 군에서 잘레-올라 군에 걸쳐)에 넓게 뻗어 있는 월경지가 더 넓은 면적을 차지했다. 슐라이츠Schleiz|슐라이츠de, 바트 로벤슈타인Bad Lobenstein|바트 로벤슈타인de, 에베르스도르프Ebersdorf (Saalburg-Ebersdorf)|에베르스도르프de와 같은 가문의 오래된 거점들도 월경지에 포함되었다.

독일 제국 시대, 게라를 포함한 영역은 동쪽과 서쪽으로 작센-알텐부르크 공국의 영토에 끼여 있었고, 남쪽으로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의 영토와 접했으며, 북쪽으로는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Provinz Sachsen|작센 주de와 접하고 있었다.

월경지는 동족인 로이스-그라이츠 후국 (형제 로이스 후국)의 영역과 얽혀 있었고, 남쪽으로는 작센 왕국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1905년, 로이스 주니어 라인 공국은 면적이 827km2였고, 인구는 145,000명이었으며, 게라가 수도였다.[2]

4. 주요 인물

로이스 가문은 19세기 후반부터 "플라우엔 백작" 칭호를 사용하는 젊은 하위 계열을 가졌다. 1885년 하인리히 26세 로이스 공자가 뷔르템베르크의 빅토리아 폰 퓌르스텐슈타인 백작부인과 결혼했을 때, 로이스 왕가의 엄격한 결혼 규칙 때문에 그들의 자녀는 왕가의 공작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2] 대신, 그들은 "플라우엔 백작"으로 지정되었지만, 로이스 왕위 계승 서열에는 남았다.[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제국이 붕괴되면서 로이스 공자는 왕위를 잃었다. 1927년, 하인리히 26세의 아들 플라우엔의 하인리히 해리 백작은 자녀가 없는 삼촌 하인리히 30세 공자에게 입양되어 "하인리히 해리 로이스 공자"로 인정받았다.[2]

1992년, 플라우엔 백작 하인리히 루초 로이스 공자는 아바의 전 리드 싱어 아니프리드 린스타드와 결혼했다. 그녀는 로이스 공주이자 플라우엔 백작부인 칭호를 가졌으며, 1999년 남편 사후 과부 공주와 백작부인이 되었다. 현재 스위스에 거주하며, 영국인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다.

1999년 이후 로이스 가문은 플라우엔의 하인리히 루초 로이스 공자를 공식 칭호로 인정했지만, 왕가 가입이나 전통적 존칭 사용 권리는 부여하지 않았다.[2]

4. 1. 로이스-게라 공

로이스 가문은 남성 구성원에게 고유한 명명 및 번호 체계를 적용하는데, 수 세기 동안 모든 남성은 "하인리히"라는 이름과 로마 숫자를 사용했다.[2] 대부분의 왕족 및 귀족 가문은 가문의 수장에게만 재위 번호를 부여하고, 이는 재위 순서에 따라 매겨지지만, 로이스 একত্র 가문("로이스, J.L.")은 각 세기에 처음 태어난 아들을 기준으로 모든 남성 가족 구성원에 대한 새로운 번호 매기기 시퀀스를 사용했다. 단일 핵가족 내의 남성 자녀가 순차적인 번호를 가질 필요는 없었는데, 이는 대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공통 번호 매기기 시스템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슐라이츠의 하인리히 67세 공자의 아들들은 출생 순서대로 하인리히 5세, 하인리히 8세, 하인리히 11세, 하인리히 14세, 하인리히 16세로 명명되었으며, 그들의 남계 친족들은 그들 사이의 숫자를 출생 순서에 따라 가졌다. 이러한 명명 시스템으로 인해, 로이스 주니어 가문의 특정 수장은 다른 유럽의 지배 가문 중 가장 높은 숫자를 이름에 부여받았다. "주니어 가문"의 지정은 1930년에 폐지되었는데, 엘더 가문("로이스, A.L.")은 마지막 남성 구성원인 그라이츠의 하인리히 24세 공자가 1918년에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1927년에 미혼으로 사망하면서 멸족되었다.[2]

1927년 그라이츠의 하인리히 24세 공자가 사망했고 그의 작위는 하인리히 27세에게로 넘어갔으며, 그는 로이스 1세 공자가 되었고 이듬해 사망했다. 그의 상속자 하인리히 45세는 1945년 8월 에베르스도르프에서 소련 군대에 체포되어 실종되었다. 1962년 1월 5일 그는 부재중 사망 선고를 받았고 쾨스트리츠의 하인리히 4세 공자가 그의 권리를 상속받았다.

하인리히 27세의 딸 빅토리아 페오도라와 아돌프 프리드리히 폰 메클렌부르크 공작의 결혼식(1917년). 거관 Osterstein 성. Schloss Osterstein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일부를 제외하고 파괴되었다.


이름에 붙은 서수가 즉위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것이 특징인데, 이는 남자에게 모두 "하인리히"라는 이름을 붙이는 로이스 가문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로이스 가문#「하인리히」의 이름과 서수 참조).

형계 로이스 가문의 하인리히 24세가 1927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하인리히 27세가 로이스 가문 전체의 가장이 되어 명목상의 로이스 변경백 칭호를 칭했다. 하인리히 27세의 아들 하인리히 45세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 점령군에게 납치되어 소식이 끊겼다. 하인리히 45세에게는 친자가 없어,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로이스-케스트리츠 가문 당주인 하인리히 4세가 로이스 가문의 가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45세는 로이스-케스트리츠 가문 분파의 하인리히 1세를 양자 (개인 재산의 상속인)로 삼았으며, 조카 Duchess Woizlawa Feodora of Mecklenburg|보이츨라바 페오도라 추 메클렌부르크de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하인리히 45세의 재산은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점령군에 의해 접수되었다.

4. 2. 기타 주요 인물

로이스 가문은 남성 구성원에게 '하인리히'라는 이름과 로마 숫자를 붙이는 독특한 명명 체계를 따랐다.[2] 20세기 초, 이러한 전통으로 인해 "주니어 가문"의 특정 수장은 다른 유럽 가문보다 높은 숫자를 이름에 사용했다. 1930년에 "주니어 가문" 지정은 폐지되었고, "엘더 가문"은 1927년 마지막 남성 구성원인 그라이츠의 하인리히 24세 공자가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2]

1927년 그라이츠의 하인리히 24세 공자 사후, 하인리히 27세가 로이스 1세 공자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45세는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실종, 1962년 부재중 사망 선고를 받았고, 쾨스트리츠의 하인리히 4세 공자가 권리를 상속받았다.

19세기 후반, 로이스 가문의 젊은 하위 계열은 "플라우엔 백작" 칭호를 사용했다. 하인리히 26세 로이스 공자가 뷔르템베르크의 빅토리아 폰 퓌르스텐슈타인 백작부인과 결혼했을 때, 왕가의 엄격한 결혼 규칙으로 인해 그들의 자녀는 "플라우엔 백작"으로 불렸지만, 로이스 왕위 계승 서열에는 남았다.[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제국 붕괴로 로이스 공자는 왕위를 잃었다. 1927년, 하인리히 26세의 아들 플라우엔의 하인리히 해리 백작은 삼촌에게 입양되어 "하인리히 해리 로이스 공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후손들도 로이스 가문에 의해 공작으로 인정받았다.[2]

1992년, 플라우엔 백작 하인리히 루초 로이스 공자는 그룹 아바의 전 리드 싱어 아니프리드 린스타드와 결혼했다. 그녀는 로이스 공주이자 플라우엔 백작부인 칭호를 가졌으며, 1999년 남편 사후 과부 공주와 백작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현재 스위스에 거주하며, 영국인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다.

1999년 이후, 로이스 가문은 플라우엔의 하인리히 루초 로이스 공자를 공식 칭호로 인정했지만, 왕가 가입이나 전통적 존칭 사용 권리는 부여하지 않았다.[2] 독일 법에 따라 이 칭호는 성의 일부로만 허용되었다.

로이스 변경백 작위를 칭한 로이스 가문의 역대 당주는 다음과 같다.

이름재위 기간
하인리히 62세1848년 ~ 1854년
하인리히 67세1854년 ~ 1867년
하인리히 14세1867년 ~ 1913년
하인리히 27세1913년 ~ 1918년



이들의 이름에 붙은 숫자는 즉위 순서가 아닌, 로이스 가문의 독특한 전통에 따른 것이다(로이스 가문#「하인리히」의 이름과 서수 참조).

형계 로이스 가문의 하인리히 24세가 1927년 사망하며, 하인리히 27세가 로이스 가문 전체의 가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27세의 아들 하인리히 45세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군에 납치되어 실종되었다. 하인리히 45세는 친자가 없어, 하인리히 4세가 로이스 가문의 가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45세는 로이스-케스트리츠 가문 분파의 하인리히 1세를 양자로 삼았고, 조카 Duchess Woizlawa Feodora of Mecklenburg|보이츨라바 페오도라 추 메클렌부르크 공녀de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하인리히 45세의 재산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점령군에 의해 몰수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National Anthem https://www.royal.uk[...] The Royal Family 2016-06-04
[2] 서적 Genealogisches Handbuch des Adels, Fürstliche Häuser, Band XVI. C.A. Starke Verlag
[3] 웹사이트 Le Camus Pierre Alexandre, comte de Furstenstein https://web.archive.[...] 2019-02-08
[4] 문서 ロイス=エーベルスドルフ家から出た[[アウグステ・ロイス・ツー・エーベルスドルフ|アウグステ]](1757年 - 1831年)は、ザクセン=コーブルク=ザールフェルト公[[フランツ (ザクセン=コーブルク=ザールフェルト公)|フランツ]]に嫁ぎ、その子孫はとしてヨーロッパ各国の王家に広がった([[ザクセン=コーブルク=ゴータ家]]参照)。アウグステは、ベルギーの[[レオポルド1世 (ベルギー王)|レオポルド1世]]の母、イギリスの[[ヴィクトリア (イギリス女王)|ヴィクトリア女王]]の母方祖母にあたる。
[5] 문서 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는 영토가 있던 국가
[6] 문서 1863년 이후 안할트에 합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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