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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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나는 1657년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죽음 이후 시작된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혼란기이다. 흐멜니츠키의 사망 이후 우크라이나는 여러 세력 간의 권력 다툼과 외부 강대국의 개입으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 시기를 겪었다. 이 시기에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폴란드로 분할되었으며, 좌안과 우안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정책을 추구했다. 루이나는 우크라이나 코사크 국가 건설 시도의 실패로 이어졌으며, 사회경제적 황폐화와 인구 이동을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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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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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기간 | 1659년 6월 29일 – 1686년 5월 16일 |
위치 | 우크라이나 |
결과 | 영원평화조약: 내전에 개입한 강대국들이 우크라이나를 분할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우안 우크라이나 | 파블로 테테리아 미하일로 하넨코 유리 흐멜니츠키 |
오스만 헤트만 | 페트로 도로셴코 유리 흐멜니츠키 게오르게 두카 |
좌안 우크라이나 | 이반 브루호베츠키 데미안 므노호흐리슈니 이반 사모일로비치 |
기타 정보 | |
관련 전투 | 좌안 봉기 폴란드-코사크-타타르 전쟁 (1666–1671) 포드하이체 전투 (1667) 칼니크 전투 |
영토 변화 | 영원평화조약에 따른 분할 |
상세 내용 | 좌안 우크라이나, 키이우, 자포리자 지역은 러시아 통제 하에 들어감 우안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통제 하에 있다가 일부는 오스만 통제 하에 들어감 |
2. 배경
루이나는 1657년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죽음 이후 시작되었다. 흐멜니츠키는 흐멜니츠키 봉기 (1648–1657)와 페레야슬라프 조약(1654)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수 세기 동안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사망했을 당시, 코사크 국가는 약 250000km2의 영토와 약 120만에서 15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는 남아있는 비(非) 가톨릭 귀족, ''스타르시나'' 또는 더 부유한 코사크 장교, 코사크의 대다수와 무기를 들지 않은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토지의 17%를 소유했고, 지역 귀족은 33%를 소유했으며, 나머지 50%는 폴란드인으로부터 몰수된 것이었으나 누가 차지할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우크라이나는 자연적인 국경도 없고, 국가의 전통도 없었으며, 코사크의 자유 또는 무정부 상태에 헌신하는 인구를 가진 변방 사회였다.
몰수된 토지는 분쟁이 발생하면 쉽게 주인이 바뀔 수 있었다. 더 가난한 코사크 대다수와 준 귀족 지위를 열망하는 더 부유한 집단 사이에는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 국가는 약했고 보호자가 필요했지만, 지역 강대국 중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 땅을 되찾고 싶어했고, 모스크바-러시아의 전제정치는 코사크의 자유 이상과 잘 맞지 않았다. 크림 칸국은 슬라브족 노예 사냥에 집중했고, 오스만 제국의 튀르크인들은 우크라이나 국경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스웨덴 제국의 영토는 이 기간 동안 여전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돈 코사크와 칼미크족은 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2. 1. 흐멜니츠키 봉기와 코자크 헤트만국의 성립
루인(Руїна)은 1657년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죽음 이후 시작되었다. 흐멜니츠키는 흐멜니츠키 봉기(1648–1657)와 페레야슬라프 조약(1654)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수 세기 동안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 인물이다. 그는 카리스마 있고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으며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눈에 띄는 인물 중 하나였지만, 명확한 계승 규칙을 확립하지 않았다. 그의 유언은 아들 유리를 새로운 헤트만으로 지명했으나, 유리 흐멜니츠키(1641–1685)는 젊고 경험이 부족하여 아버지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갖추지 못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사망했을 당시 코사크 국가는 약 250000km2의 영토와 약 120만에서 15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는 남아있는 비(非) 가톨릭 귀족, ''스타르시나'' 또는 더 부유한 코사크 장교, 대다수의 코사크와 무기를 들지 않은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토지의 17%를 소유했고, 지역 귀족은 33%를 소유했으며, 나머지 50%는 폴란드인으로부터 몰수된 것이었으나 누가 차지할지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우크라이나는 자연적인 국경도 없고, 국가의 전통도 없었으며, 코사크의 자유 또는 무정부 상태에 헌신하는 인구를 가진 변방 사회였다.
몰수된 토지는 분쟁이 발생하면 쉽게 주인이 바뀔 수 있었다. 더 가난한 코사크 대다수와 준(準) 귀족 지위를 열망하는 더 부유한 집단 사이에는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 국가는 약했고 보호자가 필요했지만, 지역 강대국 중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 땅을 되찾고 싶어했고, 모스크바-러시아의 전제정치는 코사크의 자유 이상과 잘 맞지 않았다. 크림 칸국은 슬라브족 노예 사냥에 집중했고, 오스만 제국의 튀르크인들은 우크라이나 국경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스웨덴 제국의 영토는 이 기간 동안 여전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돈 코사크와 칼미크족은 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매우 복잡했다.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다.
- 일관된 정책을 추구할 수 있는 단일한 지도자를 찾지 못한 것
- 자체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외부 세력과의 끊임없는 동맹 전환
- 더 부유한 코사크와 더 가난한 코사크 간의 갈등
- 동족(同族) 모스크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정교회의 영향
2. 2. 페레야슬라프 조약과 러시아의 개입
루이나는 1657년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죽음 이후 시작되었다. 흐멜니츠키는 흐멜니츠키 봉기(1648–1657)와 페레야슬라프 조약(1654)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수 세기 동안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는 카리스마 있고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지만, 명확한 계승 규칙을 확립하지 않았고, 그의 유언은 아들 유리를 새로운 헤트만으로 지명했다. 유리 흐멜니츠키(1641–1685)는 젊고 경험이 부족하여 아버지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갖추지 못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사망했을 때, 코사크 국가는 약 250000km2의 영토와 약 120만에서 15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는 남아있는 비 카톨릭 귀족, ''스타르시나'' 또는 더 부유한 코사크 장교, 코사크의 대다수와 무기를 들지 않은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토지의 17%를 소유했고, 지역 귀족은 33%를 소유했으며, 나머지 50%는 폴란드인으로부터 몰수된 것이었으며, 누가 차지할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연적인 국경도 없고, 국가의 전통도 없고, 코사크의 자유 또는 무정부 상태에 헌신하는 인구를 가진 변방 사회를 이루었다.
몰수된 토지는 분쟁이 발생하면 쉽게 주인이 바뀔 수 있었다. 더 가난한 코사크의 대다수와 준 귀족 지위를 열망하는 더 부유한 집단 사이에는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 국가는 약했고 보호자가 필요했지만, 지역 강대국 중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 땅을 되찾고 싶어했고, 모스크바-러시아의 전제정치는 코사크의 자유 이상과 잘 맞지 않았으며, 크림 칸국은 슬라브족 노예 사냥에 집중했고, 오스만 제국은 우크라이나 국경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스웨덴 제국의 영토는 이 기간 동안 여전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돈 코사크와 칼미크족은 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2. 3. 흐멜니츠키 사후 권력 투쟁
루이나는 1657년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죽음 이후 시작되었다. 흐멜니츠키는 흐멜니츠키 봉기 (1648–1657)와 페레야슬라프 조약(1654)을 통해 우크라이나를 수 세기 동안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했다. 흐멜니츠키는 카리스마 있고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눈에 띄는 인물 중 하나였지만, 그는 명확한 계승 규칙을 확립하지 않았고, 그의 유언은 아들 유리를 새로운 헤트만으로 지명했다. 유리 흐멜니츠키(1641–1685)는 젊고 경험이 부족하여 통치하려는 시도(1657, 1659–1663, 1677–1681, 1685)에서 보여주듯이 아버지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분명히 갖추지 못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사망했을 때, 코사크 국가는 약 250000km2의 영토와 약 120만에서 15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는 남아있는 비 카톨릭 귀족, ''스타르시나'' 또는 더 부유한 코사크 장교, 코사크의 대다수와 무기를 들지 않은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토지의 17%를 소유했고, 지역 귀족은 33%를 소유했다. 나머지 50%는 폴란드인으로부터 몰수된 것이었으며, 누가 차지할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연적인 국경도 없고, 국가의 전통도 없고, 코사크의 자유 또는 무정부 상태에 헌신하는 인구를 가진 변방 사회를 이루었다.
몰수된 토지는 분쟁이 발생하면 쉽게 주인이 바뀔 수 있었다. 더 가난한 코사크의 대다수와 준 귀족 지위를 열망하는 더 부유한 집단 사이에는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 국가는 약했고 보호자가 필요했지만, 지역 강대국 중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 땅을 되찾고 싶어했고, 모스크바-러시아의 전제정치는 코사크의 자유 이상과 잘 맞지 않았으며, 크림 칸국은 슬라브족 노예 사냥에 집중했고, 오스만 제국의 터키인들은 우크라이나 국경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스웨덴 제국의 영토는 이 기간 동안 여전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돈 코사크와 칼미크족은 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매우 복잡해졌다.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다.
- 일관된 정책을 추구할 수 있는 단일한 지도자를 찾지 못한 것
- 자체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외부 세력과의 끊임없는 동맹 전환
- 더 부유한 코사크와 더 가난한 코사크 간의 갈등
- 동족 모스크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정교회의 영향
3. 좌안과 우안의 분열 (1663-1681)
1648년 흐멜니츠키 봉기 이후, 코사크들은 크림 칸국, 러시아 차르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생존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좌안과 우안으로 분열되었다.
- 이반 비호프스키 (1657-1659 재임): 흐멜니츠키 사후, 비호프스키는 폴란드와 하디아흐 조약을 체결하여 우크라이나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구성원으로 만들려 했으나, 이는 코노토프 전투에서 러시아의 패배를 야기하고, 결국 실패했다.
- 유리 흐멜니츠키 (1659-1663 재임): 어린 나이에 헤트만이 된 유리 흐멜니츠키는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서 갈등하다 1663년 헤트만 직위를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 파블로 테테리아 (1663-1665 재임): 우안을 점유했던 테테리아는 친폴란드 정책을 펼쳤으나, 폴란드에 대한 반란과 지지 상실로 인해 폴란드로 도망갔다.
- 페트로 도로셴코 (1665-1676 재임): 도로셴코는 우크라이나 재통합을 위해 튀르크와 동맹을 맺고, 러시아-튀르크 전쟁 (1676–1681)에서 튀르크를 지원했으나, 비기독교 세력과의 연대로 인해 지지를 잃고 러시아로 망명했다.
- 유리 흐멜니츠키 (1678-1681, 오스만 제국에 의해 임명): 튀르크는 유리를 헤트만으로 임명했으나, 곧 폐위시켰다.
1667년 러시아와 폴란드는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코사크 영토를 분할했다. 이 조약으로 우크라이나는 좌안과 우안으로 분열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세력들의 개입으로 혼란이 지속되었다.
3. 1. 좌안 헤트만국의 친러 정책
이반 브류호베츠키는 거의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존했다. 1665년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1665년 모스크바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 세금 징수원과 군인들의 입국이 허용되었고, 러시아인이 교회의 수장이 되어야 했으며, 헤트만 선거에는 러시아 대표가 참석하고 헤트만은 임명 확인을 위해 모스크바에 가야 했다. 그러나 군인과 세금 징수원은 저항을 유발했고 교회는 모스크바의 영향력에 저항했다. 안드루소보 휴전 (1667)은 코사크의 이익에 대한 러시아의 배신으로 보였으며, 일련의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브류호베츠키는 1668년 봄, 폭도들에게 맞아 죽었다.1668년, 페트로 도로셴코가 통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을 선포하고, 데미안 므노고흐리쉬니를 좌안의 섭정 헤트만으로 임명했다. 므노고흐리쉬니는 러시아의 압력으로 러시아의 지배권을 받아들였다. 모스크바가 요구를 완화하고 므노고흐리쉬니가 지역 이익을 보호하면서 안정적인 관계가 발전했다. 그는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어느 정도 진전을 보였지만 스타르쉬나(고위층)를 통제할 수 없었다. 이들 중 일부는 그를 차르에게 고발했고 차르는 그를 체포하여 고문한 후 시베리아로 유배했다.

1672년 이반 사모일로비치가 헤트만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제한된 권한에 동의했다. 그는 스타르쉬나 평의회의 동의 없이 스타르쉬나를 재판하거나 외교 관계를 수행할 수 없었으며, 헤트만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고용된 군대를 해산했다. 1674년과 1676년, 그는 러시아 동맹국과 함께 치히린에서 도로셴코를 포위했고, 1676년 도로셴코는 항복했다. 폴란드와 러시아는 1686년 영구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다시 우안에 대한 폴란드 통치를 인정하고 자포로지예에서 폴란드인을 제거했는데, 이는 사모일로비치에게 큰 실망이었다. 1687년, 러시아군과 코사크는 1687년과 1689년 크림 원정을 시작했지만 실패했고, 사모일로비치는 비난을 받고 해임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반 마제파가 헤트만으로 선출되면서 사실상 루인이 종식되었고, 좌안의 역사는 러시아의 일부인 헤트만령과 합쳐졌다. 대북방 전쟁이 1700년에 시작되면서 러시아의 요구는 과도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1708년 마제파는 스웨덴의 칼 12세와 동맹을 맺었다. 폴타바 전투에서 칼, 마제파, 그리고 그를 따랐던 코사크들은 패배하여 투르크로 유배되었다.
3. 2. 우안 헤트만국의 반러, 친폴란드, 친튀르크 정책
이반 비호프스키는 부유한 코사크(‘스타르시나’)를 기반으로 폴란드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이는 민주적인 코사크였던 마르틴 푸슈카르와 야키우 바라바시의 반란을 일으켰고, 1658년 6월 진압되어 약 5만 명의 사상자를 낸 내전으로 이어졌다. 1658년 9월, 비호프스키는 폴란드와 하디아흐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은 우크라이나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 번째 구성원으로 만들려 했지만,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이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고, 1659년 6월 29일 코노토프 전투에서 러시아는 패배했다. 여러 친모스크바 대령들의 반란에 직면한 비호프스키는 1659년 10월 사임하고 폴란드로 은퇴했다.파블로 테테리아는 친폴란드 정책을 강력하게 따랐다. 그의 좌안 침공이 실패하자, 폴란드에 대항하여 발생한 수많은 반란들을 처리하기 위해 돌아왔다. 폴란드 동맹들의 행태는 그가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지지마저 잃게 만들었고, 결국 사임하고 폴란드로 도망갔다.
페트로 도로셴코는 튀르크로 돌아섰다(폴란드-코사크-타타르 전쟁 (1666–1671)). 1667년 가을, 오스만-코사크 군대가 갈리치아를 침공하여 국왕에게 도로셴코에게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느슨한 오스만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러시아-튀르크 전쟁 (1676–1681) 동안 러시아에 대항하여 튀르크를 지원했다. 이러한 비기독교인과의 연루는 그가 남은 지지마저 잃게 만들었다.
1678년, 튀르크는 포로였던 유리 크멜니츠키를 헤트만으로 임명했다. 그는 치히린의 두 번째 작전에 참여했고, 1681년 튀르크에 의해 폐위되었다.
3. 3. 안드루소보 조약과 우크라이나 분할
1667년, 러시아와 폴란드는 코사크와 상의 없이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하여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코사크 영토를 분할했다. 인구가 희박한 남부 지역(자포로지예)은 러시아-폴란드 공동 관리(Condominium (international law))가 될 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 강을 기준으로 좌안과 우안으로 나뉘게 되었다.페트로 도로셴코는 우크라이나의 재통합을 목표로 하였으나,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인해 튀르크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폴란드-코사크-타타르 전쟁 (1666–1671)) 1667년 가을, 오스만-코사크 군대는 갈리치아를 침공하여 국왕에게 도로셴코에게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느슨한 오스만 종주권을 받아들여 좌안을 침공했고, 이반 브류호베츠키를 제거한 후 1668년 통합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크림은 또 다른 라이벌 헤트만을 지지했고, 폴란드는 미하일로 하넨코를 지지하며 우안을 침공했다.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데미안 모노호리쉬니를 좌안의 지배자로 임명했고, 좌안은 곧 러시아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672년 도로셴코는 튀르크가 포돌리아를 합병하는 것을 도왔다. 러시아-튀르크 전쟁 (1676–1681) 동안 그는 러시아에 대항하여 튀르크를 지원했으나, 비기독교인과의 연루는 그가 남은 지지마저 잃게 만들었다. 1676년 9월 19일, 도로셴코는 좌안의 이반 사모일로비치에게 권력을 넘기고 러시아로 망명했다.
1678년, 튀르크는 유리 흐멜니츠키를 헤트만으로 임명했지만, 1681년 그를 폐위시켰다. 우안은 심각하게 인구가 감소했고, 많은 사람들이 좌안이나 슬로보다 우크라이나로 도망갔다. 이후 폴란드 통치가 점차 회복되었고, 국가는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1686년, 폴란드와 러시아는 1686년 영구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우안에 대한 폴란드 통치를 재확인하고 자포로지예에서 폴란드인을 제거했다.
4. 러시아의 좌안 헤트만국 지배 강화 (1681-1687)
1661년부터 1687년까지 러시아는 좌안 헤트만국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 이 시기 동안 여러 헤트만들이 등장하여 러시아와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 야킴 솜코 (1660-1663): 1660년 좌안 코사크는 폴란드 동맹 때문에 유리 흐멜니츠키를 폐위시키고 야킴 솜코를 섭정 헤트만으로 임명했다. 유리는 드니프로강 우안을 점령하여 사실상 나라를 분할했다. 솜코는 상류층을 선호하여 이반 브류호베츠키 휘하의 자포로지예의 반대를 샀으며, 모스크바의 지지도 잃었다. 1663년의 초르나 라다에서 그는 브류호베츠키로 대체되어 처형되었다.
- 이반 브류호베츠키 (1663-1668): 이반 브류호베츠키는 거의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존했다. 1665년 모스크바로 가서 1665년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 세금 징수원과 군인들의 입국이 허용되었고, 러시아인이 교회의 수장이 되어야 했으며, 헤트만 선거에는 러시아 대표가 참석하고 헤트만은 임명 확인을 위해 모스크바에 가야 했다. 군인과 세금 징수원은 저항을 유발했고 교회는 모스크바의 영향력에 저항했다. 안드루소보 휴전 (1667)은 코사크의 이익에 대한 러시아의 배신으로 보였다. 일련의 반란이 일어났고, 1668년 봄, 페트로 도로셴코의 군대가 드니프로 강을 건너자 브류호베츠키는 폭도들에게 맞아 죽었다.
- 데미안 므노고흐리쉬니 (1668-1672): 1668년 6월 9일 페트로 도로셴코는 자신이 통일된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이라고 선포했다. 1669년 폴란드는 경쟁 헤트만인 미하일로 카넨코를 세우고 우안을 침공했다. 침공에 맞서기 위해 도로셴코는 데미안 므노고흐리쉬니를 좌안의 섭정 헤트만으로 임명했다. 도로셴코가 쇠퇴하면서 러시아의 압력으로 그는 러시아의 지배권을 받아들였다. 모스크바가 요구를 완화하고 므노고흐리쉬니가 지역 이익을 보호하면서 안정적인 관계가 발전했다. 그는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어느 정도 진전을 보였지만 스타르쉬나(코사크 귀족)를 통제할 수 없었다. 이들 중 일부는 그를 차르에게 고발했고 차르는 그를 체포하여 고문한 후 시베리아로 유배했다.
이반 사모일로비치와 이반 마제파 시대에 대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조.
4. 1. 사모일로비치와 마제파 시대
야킴 솜코는 1660년 좌안 코사크에 의해 섭정 헤트만으로 임명되었으나, 상류층을 우선시하는 정책으로 자포로지예의 반발을 샀고, 1663년 초르나 라다에서 이반 브류호베츠키로 교체되어 처형되었다.이반 브류호베츠키는 러시아에 의존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1665년 1665년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는 코사크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안드루소보 휴전 (1667) 이후 반란이 일어났다. 1668년 브류호베츠키는 폭도들에게 맞아 죽었다.
1668년 페트로 도로셴코는 통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을 선포했으나, 폴란드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데미안 므노고흐리쉬니를 좌안의 섭정 헤트만으로 임명했다. 므노고흐리쉬니는 러시아의 지배권을 받아들이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스타르쉬나(코사크 귀족)의 반발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반 사모일로비치는 제한된 권한을 가진 헤트만으로 선출되었으며, 페트로 도로셴코를 몰아내고 통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을 선언했다. 그러나 1686년 영구 평화 조약으로 폴란드의 우안 통치가 인정되면서 큰 실망을 겪었고, 1687년과 1689년 크림 원정 실패의 책임을 지고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반 마제파가 헤트만으로 선출되면서 루인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대북방 전쟁 중 러시아의 과도한 요구에 반발한 마제파는 1708년 스웨덴의 칼 12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폴타바 전투에서 패배하여 투르크로 유배되었다.
5. 루인의 결과
루이나 시기는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혼란과 분열, 외세의 개입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코사크 국가 건설 실패: 루테니아 코사크들은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계속했지만, 내부 분열과 외부 세력(폴란드, 러시아, 오스만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했다.
- 우크라이나 분할: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과 1686년 영구 평화 조약을 통해 우크라이나는 드니프로 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폴란드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 분할은 이후 우크라이나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 폴란드의 쇠퇴: 폴란드는 드니프로 강 좌안 지역을 상실하면서 국력이 약화되었다.
- 러시아의 확장: 러시아는 남쪽과 남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 인구 이동: 황폐화된 드니프로 강 우안 지역에서 많은 루테니아인들이 드니프로 강 좌안과 슬로보다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다. 이는 좌안과 슬로보다 우크라이나 지역의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 오스만 제국의 일시적 확장: 페트로 도로셴코가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튀르크는 일시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5. 1. 우크라이나의 분할과 쇠퇴
1663년 야킴 솜코가 이반 브류호베츠키로 대체되어 처형되면서, 파블로 테테리아는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 강 우안(오른쪽 강둑)을 점령했다. 그는 친폴란드 정책을 펼쳤으나, 좌안 침공 실패와 폴란드에 대한 반란으로 지지 기반을 잃고 사임했다.페트로 도로셴코는 우크라이나 재통합을 목표로 1665년부터 1676년까지 헤트만 직을 수행했다. 그는 코사크 회의를 열고 용병단을 창설했으며,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으로 코사크 영토가 분할되자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1668년 통합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을 선언했으나, 크림과 폴란드의 지원을 받는 경쟁자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데미안 므노호리쉬니를 좌안의 지배자로 임명했으나, 좌안은 곧 러시아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672년 튀르크의 포돌리아 합병을 도왔고, 러시아-튀르크 전쟁 (1676–1681)에서 튀르크를 지원했으나, 비기독교인과의 연루로 지지를 잃고 1676년 이반 사모일로비치에게 권력을 넘겼다.
1678년, 튀르크는 유리 크멜니츠키를 헤트만으로 임명했으나, 1681년 그를 폐위했다. 우안은 인구가 감소했고, 많은 이들이 좌안이나 슬로보다 우크라이나로 도망갔다.
1660년 좌안 코사크는 야킴 솜코를 섭정 헤트만으로 임명했으나, 그는 상류층을 선호하여 1663년의 초르나 라다에서 이반 브류호베츠키로 대체되었다. 브류호베츠키는 러시아에 의존했으며, 1665년 1665년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안드루소보 휴전 (1667) 이후 반란이 일어났고, 1668년 브류호베츠키는 살해되었다.
데미안 므노호리쉬니는 1668년부터 1672년까지 좌안의 섭정 헤트만으로, 러시아의 지배권을 받아들이고 지역 이익을 보호하며 안정적인 관계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스타르시나를 통제하지 못하고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반 사모일로비치는 1672년부터 1687년까지 헤트만으로, 제한된 권한에 동의했다. 1676년 페트로 도로셴코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통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을 선언했으나, 튀르크에 의해 드니프로 강 건너편으로 밀려났다. 1686년 영구 평화 조약으로 실망했으며, 1687년 크림 원정 실패로 해임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반 마제파가 1687년 헤트만으로 선출되면서 루인은 사실상 종식되었고, 좌안은 러시아의 일부인 헤트만령과 합쳐졌다. 대북방 전쟁 중 마제파는 스웨덴의 칼 12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폴타바 전투에서 패배하여 튀르크로 유배되었다.
이 시기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 루테니아 코사크 국가 건설 시도는 실패했다.
- 우크라이나는 드니프로 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폴란드로 분할되었다.
- 폴란드는 드니프로 강 좌안을 잃고 쇠약해졌다.
- 러시아는 남쪽과 남서쪽으로 약간 확장되었다.
- 황폐해진 드니프로 강 우안으로부터 드니프로 강 좌안과 슬로보다 우크라이나로 루테니아 인구의 대규모 이동이 발생하여 농민 농업 지역이 증가했다.
- 튀르크는 잠시 우크라이나로 세력을 확장했다(도로셴코는 1699년경까지).
5. 2.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
이반 브류호베츠키는 1663년부터 1668년까지 헤트만으로 재임하면서 러시아에 크게 의존했다. 1665년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1665년 모스크바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 세금 징수원과 군인들의 입국이 허용되었고, 러시아인이 교회의 수장이 되어야 했으며, 헤트만 선거에는 러시아 대표가 참석하고 헤트만은 임명 확인을 위해 모스크바에 가야 했다. 군인과 세금 징수원의 활동은 백성들의 저항을 유발했고, 교회는 모스크바의 영향력에 저항했다. 안드루소보 휴전(1667)은 코사크의 이익에 대한 러시아의 배신으로 여겨져 일련의 반란이 일어났다. 1668년 봄, 페트로 도로셴코의 군대가 드니프로 강을 건너자 브류호베츠키는 폭도들에게 맞아 죽었다.1668년, 도로셴코가 통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을 선포하고 폴란드가 미하일로 카넨코를 헤트만으로 내세워 우안을 침공하자, 도로셴코는 데미안 므노고흐리쉬니를 좌안의 섭정 헤트만으로 임명했다. 므노고흐리쉬니는 러시아의 지배권을 받아들였고, 모스크바가 요구를 완화하고 므노고흐리쉬니가 지역 이익을 보호하면서 안정적인 관계가 발전했다. 그는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어느 정도 진전을 보였지만, 스타르쉬나(고위층)를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차르에게 고발당해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반 사모일로비치는 1672년부터 1687년까지 헤트만으로 재임하면서 제한된 권한에 동의했다. 그는 스타르쉬나 평의회의 동의 없이 스타르쉬나를 재판하거나 외교 관계를 수행할 수 없었고, 헤트만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고용된 군대를 해산했다. 1674년과 1676년, 그는 러시아 동맹국과 함께 치히린에서 도로셴코를 포위했고, 1676년 도로셴코는 사모일로비치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2년 안에 투르크인들이 그를 드니프로 강 건너편으로 몰아냈다. 1686년 영구 평화 조약에서 폴란드와 러시아는 다시 우안에 대한 폴란드 통치를 인정하고 자포로지예에서 폴란드인을 제거했는데, 이는 사모일로비치에게 큰 실망이었다. 1687년, 러시아군과 코사크의 1687년과 1689년 크림 원정이 실패하자 사모일로비치는 비난을 받고 해임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반 마제파가 1687년부터 1709년까지 헤트만으로 선출되면서 루인은 사실상 종식되었고, 좌안의 역사는 러시아의 일부인 헤트만령과 합쳐졌다. 대북방 전쟁이 시작되면서 러시아의 요구는 과도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1708년 마제파는 스웨덴의 칼 12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폴타바 전투에서 칼 12세와 마제파, 그리고 그를 따랐던 코사크들은 패배하여 투르크로 유배되었다.
5. 3. 사회경제적 황폐화
1663년 '검은 평의회'에서 야킴 솜코가 이반 브류호베츠키로 교체되어 처형되면서, 우크라이나 좌안은 혼란에 빠졌다. 브류호베츠키는 러시아에 크게 의존했다. 1665년,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1665년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 세금 징수원과 군인들의 입국이 허용되었고, 러시아인이 교회의 수장이 되어야 했으며, 헤트만 선거에는 러시아 대표가 참석하고 헤트만은 임명 확인을 위해 모스크바에 가야 했다. 그러나 군인과 세금 징수원의 활동은 저항을 유발했고, 교회는 모스크바의 영향력에 저항했다.1667년 안드루소보 휴전은 코사크의 이익에 대한 러시아의 배신으로 여겨져 반란이 일어났다. 1668년 봄, 페트로 도로셴코의 군대가 드니프로 강을 건너자, 브류호베츠키는 폭도들에게 맞아 죽었다.
1668년 6월 9일, 도로셴코는 통일된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임을 선언했다. 1669년 폴란드는 경쟁 헤트만인 미하일로 카넨코를 세우고 우안을 침공했다. 이에 맞서기 위해 도로셴코는 데미안 므노고흐리쉬니를 좌안의 섭정 헤트만으로 임명했다. 도로셴코가 쇠퇴하면서 러시아의 압력으로 므노고흐리쉬니는 러시아의 지배권을 받아들였다. 모스크바가 요구를 완화하고 므노고흐리쉬니가 지역 이익을 보호하면서 안정적인 관계가 발전했다. 그는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어느 정도 진전을 보였지만, 스타르시나(코사크 장교 계층)를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스타르시나의 모함으로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1672년 이반 사모일로비치가 헤트만으로 선출되었으나, 제한된 권한에 동의해야 했다. 그는 스타르시나 평의회의 동의 없이 스타르시나를 재판하거나 외교 관계를 수행할 수 없었고, 헤트만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고용된 군대를 해산해야 했다. 1674년과 1676년, 그는 러시아 동맹국과 함께 치히린에서 도로셴코를 포위했다. 1676년 9월 19일, 도로셴코는 사모일로비치에게 항복했고, 사모일로비치는 통일된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2년 안에 튀르크가 사모일로비치를 드니프로 강 건너편으로 몰아냈다. 1686년 폴란드와 러시아는 1686년 영구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우안에 대한 폴란드 통치를 재확인하고 자포로지예에서 폴란드인을 제거했는데, 이는 사모일로비치에게 큰 실망이었다. 1687년, 10만 명의 러시아군과 5만 명의 코사크가 1687년과 1689년 크림 원정을 시작했지만 실패했고, 사모일로비치는 비난을 받고 해임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이 시기 동안 우안은 인구가 크게 감소했고, 많은 사람들이 좌안이나 슬로보다 우크라이나로 도망갔다. 폴란드 통치는 점차 회복되었고, 국가는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6. 주요 조약 및 협정
- 1648년: 우크라이나 코사크는 크림 칸국과 동맹을 맺었다.
- 1648년: 자모슈치 휴전: 단기적인 타협이었다.
- 1649년: 즈보리우 조약: 4만 명의 등록 코사크를 인정하고, 중앙 우크라이나에 폴란드 군인이나 유대인을 두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 1651년: 빌라 체르키바 조약: 2만 명의 등록 코사크를 인정하고, 유대인과 귀족의 귀환을 허용하는 내용이었으며, 부분적으로 시행되었다.
-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 코사크와 러시아의 동맹 조약으로, 러시아-폴란드 전쟁 (1654–1667)을 일으켰다.
- 1658년: 하디아치 조약: 1654년에 거부되었던 조약으로, 우크라이나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 번째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3만 명의 등록 코사크를 허용하는 내용이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 1659년: 페레야슬라프 조항: 러시아와 다시 동맹을 맺었다.
- 1660년: 추드노프 조약: 폴란드와 다시 동맹을 맺었다.
- 1667년: 안드루소보 휴전: 우크라이나가 드네프르 강을 따라 분할되었고, 키예프는 러시아에, 자포로지예는 공동 통치령이 되었다. 코사크는 협의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이 조약으로 러시아-폴란드 전쟁이 종결되었다. 13년 후 만료될 예정이었다.
- 1672년: 부차치 조약: 폴란드-오스만 전쟁 (1672–1676) 중에 체결된 조약으로, 포돌리아는 터키에 넘어갔고, 드로셴코는 터키 봉신으로서 우안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 1676년: 주라브노 조약: 1672년 조약을 확인했으나 폴란드에 더 유리한 내용이었으며, 터키 전쟁을 종결시켰다.
- 1686년: 영구 평화 조약 (1686): 1667년 조약을 확인했으며, 자포로지예는 러시아에 귀속되었다.
-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폴란드가 포돌리아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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