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마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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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반 마제파는 1639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루테니아-리투아니아 귀족 출신으로, 폴란드 궁정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687년 좌안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 차르국과의 관계 악화로 대북방 전쟁에서 스웨덴을 지지하며 독립을 추구했으나,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여 사망했다. 마제파는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러시아에서는 반역자로 여겨지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삶은 문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현대 우크라이나에서는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우크라이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서유럽에서 교육을 받고 폴란드 궁정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카자크 사회에서 활동하다 1687년 좌안 우크라이나의 헤ть만으로 선출되었다.[12]
2. 생애
초기에는 러시아 차르국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점차 관계가 악화되자 대북방 전쟁 중 스웨덴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일설에 따르면, 마제파는 술에 취한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1세에게 모욕을 당한 뒤 반란을 결심했으며, 자신의 야심을 위해 스웨덴 국왕 칼 12세를 러시아 원정으로 끌어들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708년 10월, 마제파는 약 3,000명의 카자크 병력을 이끌고 스웨덴군에 합류하려 했으나, 표트르 1세는 마제파의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러시아군을 보내 코사크 병력을 기습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고, 헤ть만 국가의 수도였던 바투린을 함락시켰다. 마제파는 간신히 탈출하여 칼 12세의 본대에 합류했다.
1709년 6월, 마제파가 속한 스웨덴군은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전투에서 패배한 마제파는 칼 12세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영향 아래 있던 몰다비아의 벤데르로 도주했으나, 그곳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다.
독립된 카자크 국가를 세우려 했던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 보흐단 흐멜니츠키와 더불어 우크라이나의 중요한 역사적 영웅으로 여겨진다. 그의 극적인 삶은 후대에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조지 바이런, 빅토르 위고, 알렉산드르 푸시킨 등이 그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프란츠 리스트는 교향시 《마제파》를,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오페라 《마제파》를 작곡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이반 마제파는 1639년 3월 30일[2]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키예프 보이보드십(현재 우크라이나 빌라 체르크바 군)에 속했던 빌라 체르크바 근처 마제핀치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 루테니아-리투아니아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Степан-Адам Мазепа|스테판 아담 마제파uk(?-1666)는 빌라 체르크바의 코사크 아타만(1654)을 지냈으며[8], 폴란드 왕국에 봉사하면서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일으킨 흐멜니츠키 봉기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 마리나 모키예프스카(1624~1707)는 보흐단 흐멜니츠키와 함께 싸운 코사크 장교 가문 출신이었다.[6]
마제파는 어릴 때 키예프 아카데미에서 수사학을 공부한 것으로 추정되며[8], 사밀로 벨리치코에 따르면 바르샤바의 예수회 대학에서 철학 과정을 이수했다고 한다.[8]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폴란드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1656년부터 1659년까지 마제파를 네덜란드 공화국의 데번터로 보내 포병술을 공부하게 했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서유럽을 여행했다.[9]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659년부터 폴란드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의 시종으로 일했으며[7], 같은 해부터 1663년까지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우크라이나에 사절로 파견되었다.[9] 1663년 마제파는 폴란드 궁정을 떠나 고향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2. 2. 폴란드 궁정 생활과 스캔들
1659년, 이반 마제파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의 궁정에 시종으로 들어가 봉사하기 시작했다.[7] 그는 키예프 아카데미에서 수사학을 공부했으며,[8] 사밀로 벨리치코에 따르면 바르샤바의 예수회 대학에서 철학 과정을 마쳤다고 한다.[8]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얀 2세는 마제파를 1656년에서 1659년 사이에 네덜란드 공화국의 데번터로 보내 포병술을 배우게 했고, 이 기간 동안 그는 서유럽을 여행했다고 전해진다.[9] 1659년부터 마제파는 국왕의 명을 받아 여러 차례 우크라이나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9]
폴란드 왕실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랴흐'(Lyakh)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는데,[10] 이는 훗날 러시아 제국이 그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데 이용했다.
외교 사절 임무 중 마제파는 폴란드 귀족 얀 크리조스톰 파섹과 갈등을 겪었다. 마제파는 파섹을 반왕실 세력으로 의심하여 체포하려 했으나, 파섹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했고 오히려 마제파가 왕의 신뢰를 잃었다고 한다.
파섹은 자신의 회고록(1690년-1695년 작성)에서 마제파가 1663년 폴란드를 떠나게 된 경위에 대해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파섹에 따르면, 마제파는 볼리니아에 사는 이웃 귀족의 아내 팔보브스카(Falbowska) 부인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11] 불륜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분노하여 마제파를 발가벗겨 말에 묶은 뒤 황야로 내쫓았고, 말이 지쳐 쓰러진 후에야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으나 심하게 다쳐 하인들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11] 마제파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을 수 있는 파섹이 이야기를 과장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익명의 ''아우구스트 2세 치세에 대한 회고록''이나 프랑스 외교관 보낙 후작의 기록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마제파의 바람둥이 기질과 관련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스캔들 이야기는 볼테르가 그의 저서 ''샤를 12세의 역사''에서 언급하면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낭만주의 시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바이런 경의 시 '마제파', 빅토르 위고의 시 '마제파',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서사시 '폴타바', 율리우시 스와츠키의 희곡 등 여러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또한 오라스 베르네, 외젠 들라크루아, 테오도르 샤세리오, 테오도르 제리코와 같은 화가들도 이 이야기를 주제로 그림을 남겼다.[11][9]
파섹의 기록과는 달리, 마제파는 불륜 스캔들 이후에도 한동안 폴란드 왕실에 남아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1663년 2월에는 코사크 헤트만 파벨 테테라에게 헤트만의 상징인 곤봉을 전달하는 사절로 파견되었고,[8] 1663년에서 1664년 사이에는 좌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러시아에 대한 국왕의 원정에도 참여했다.[8] 그는 1665년에도 여전히 궁정에 있었으며, 얀 2세 카지미에시 국왕이 퇴위한 1668년까지 폴란드 궁정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8] 정확히 언제 폴란드 궁정을 떠나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1660년대 후반부터는 우크라이나에서의 활동 기록이 나타난다.
2. 3. 우크라이나 복귀와 헤ть만 선출
1663년 폴란드 궁정을 떠나 고향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아버지 스테판 마제파가 사망한 후(약 1665년), 그는 체르니히우의 술병사 작위를 물려받았다.[9]
1669년부터 1673년까지는 우안 우크라이나의 코사크 헤ть만이었던 페트로 도로셴코 휘하에서 복무했다. 특히 1672년 도로셴코의 할리치나 원정 중에는 기병대 지휘관으로 헤ть만 친위대에서 활동했으며, 폴란드, 크림, 오스만 제국으로 파견되는 외교 사절단의 서기관으로도 일했다.[9]
1674년 크림으로 가던 중 자포리자의 코시 오타만 이반 시르코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후 도로셴코의 경쟁자였던 헤ть만 이반 사모일로비치에게 보내져 1674년부터 1681년까지 그의 "궁정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9] 이 기간 동안 마제파는 1677년부터 167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은 유리 흐멜니츠키가 우크라이나에서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했던 치히린 원정에 참여하기도 했다.[9]
젊고 교육받은 마제파는 코사크 사회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1682년부터 1686년까지 참모총장(헤네랄니 오사울)으로 복무하며 입지를 다졌다.
1687년, 마제파는 당시 헤ть만이었던 이반 사모일로비치가 러시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꾀하고 있다고 고발하여 그의 실각을 이끌어냈다. 이후 바실리 골리친의 지원을 받아 콜로막에서 열린 코사크 회의에서 좌안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헤ть만으로 선출되었다.[12] 헤ть만으로 선출된 직후, 마제파는 데미안 므노호흐리쉬니의 흐루키우 조약을 기반으로 한 콜로막 조약에 서명하여 러시아 차르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3. 정치 활동 및 업적
1687년 이반 마제파는 전임 헤트만 이반 사모일로비치가 러시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모의했다고 고발하여 그의 축출을 이끌어냈다. 이후 바실리 갈리친의 지원을 받아 콜로막에서 헤트만으로 선출되었다.[12] 동시에 마제파는 데미안 므노호흐리쉬니의 흐루키우 조약을 기반으로 한 콜로막 조약에 서명하며 헤트만으로서의 통치를 시작했다.
헤트만으로서 마제파는 우크라이나 내부의 안정과 문화 발전에 힘쓰는 한편,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우크라이나 코사크 헤트만국의 자치권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독자적인 정치 및 외교 노선을 추구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루어진 구체적인 내정 개혁과 문화 발전, 그리고 대외 관계 및 외교 정책의 변화는 이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3. 1. 내정 개혁과 문화 발전
헤트만이 된 이반 마제파는 점차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유럽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주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과 재산을 활용하여 우크라이나의 문화 및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마제파의 통치 아래 우크라이나 전역에는 우크라이나 바로크 양식의 교회가 다수 건립되었다. 또한 그는 학교와 인쇄소를 세워 교육 기회를 넓히고 지식 보급에 힘썼다. 특히 당시 우크라이나의 핵심 교육 기관이었던 키이우-모힐라 아카데미를 확장하여 학생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정책들은 우크라이나 문화와 학문의 부흥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3. 2. 대외 관계 및 외교 정책
1657년, 이반 마제파는 친폴란드 정책을 추진하던 헤트만 이반 비호프스키와 협력하며 외교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659년에는 폴란드 의회인 세임(Sejm)에 참석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갔으며, 자신의 아들을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국왕의 궁정에 보내기도 했다.[7]
이 시기 마제파는 폴란드 국왕의 신임을 받아 1659년부터 여러 차례 우크라이나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9] 폴란드 왕실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소문과 함께 폴란드화된 인물이라는 의미의 '랴흐'(Lyakh)[10]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러시아 제국 정부가 그의 명예를 깎아내리기 위해 이용한 비방이었다.
폴란드 궁정 시절, 마제파는 얀 크리조스톰 파섹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파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마제파가 볼리니아의 귀족 부인과 불륜을 저질렀고, 발각되자 벌거벗겨진 채 말에 묶여 야생에 버려졌다고 기록했다.[11] 이 이야기는 파섹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11] 당시 널리 퍼져 마제파의 바람둥이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볼테르, 빅토르 위고, 바이런 경 등 여러 작가와 오라스 베르네, 외젠 들라크루아 같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11][9]
파섹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마제파는 폴란드 왕실에서 계속 활동했다. 1663년 2월에는 코사크 헤트만 파벨 테테라에게 토마시 얀 카르체프스키가 수여한 헤트만 곤봉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고,[8] 1663년부터 1664년 사이에는 좌안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벌인 폴란드 왕실의 군사 원정에도 참여했다.[8] 그는 1668년 얀 2세 카지미에시 국왕이 퇴위할 때까지 폴란드 궁정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8]
1665년경 아버지가 사망하자 체르니히우의 술병사 직위를 계승했다.[9] 이후 1669년부터 1673년까지는 우안 우크라이나의 헤트만 페트로 도로셴코 밑에서 활동했다. 그는 도로셴코의 헤트만 친위대에서 기병대 지휘관으로 복무했으며, 특히 1672년 도로셴코의 할리치나 원정에 참여했다. 또한 도로셴코의 외교 사절로서 폴란드, 크림, 오스만 제국을 오가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다.[9]
1674년, 마제파의 정치적 입지에 변화가 생겼다. 크림으로 가던 중 코시 오타만 이반 시르코에게 포로로 잡혔고, 이후 도로셴코의 경쟁자이자 친러시아 성향의 헤트만이었던 이반 사모일로비치에게 보내졌다.[9] 그는 1674년부터 1681년까지 사모일로비치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코사크 사회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1682년부터 1686년까지 참모총장 격인 헤네랄니 오사울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1677년부터 1678년까지 벌어진 치히린 원정에도 참여했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은 유리 흐멜니츠키가 우크라이나에서 권력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전투였다.[9]
시간이 흘러 헤트만이 된 마제파는 우크라이나의 자치권 확대를 위해 노력했으나, 표트르 대제의 중앙집권화 정책과 충돌하게 되었다. 결국 마제파는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대북방 전쟁 중이던 스웨덴의 칼 12세와 손을 잡았다. 스웨덴은 조약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보장하기로 약속했다. 1709년, 스웨덴군과 러시아군은 결정적인 전투를 준비하며 기동했고, 마침내 6월 폴타바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전투는 러시아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우크라이나를 스웨덴의 보호 아래 독립시키려던 마제파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패배 후 마제파는 칼 12세와 함께 남쪽으로 도망쳐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었던 몰도바의 벤데리(티히나) 요새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는 현재 루마니아의 갈라치에 묻혔으나, 그의 무덤은 여러 차례 훼손되었고 1962년 교회가 철거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14]
3. 3. 대북방 전쟁과 스웨덴과의 동맹
18세기 초, 러시아 제국이 대북방 전쟁에서 상당한 영토를 잃자, 표트르 1세는 러시아군 개혁과 중앙집권화를 결정했다. 마제파의 견해로는 러시아 중앙 정부의 강화는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에 따라 우크라이나 코사크 헤트만국에 부여된 광범위한 자치권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자포로지아 코사크에 대한 통제권 강화 시도에는 이전 조약에서 합의된 지역의 적에 대항하여 자신의 땅을 방어하는 것 외에도 차르의 모든 전쟁에 참전하라는 요구가 포함되었다. 이제 코사크 군대는 리보니아와 리투아니아의 원정 전쟁에 참여하게 되어, 자신의 고향은 타타르족과 폴란드인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제대로 장비를 갖추지 못하고 현대 유럽군의 전술에 맞춰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코사크들은 큰 손실을 입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헤트만 자신은 러시아 군대의 장군들 중 한 명으로 그를 대체하라는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차르 페트르 1세와의 관계 악화의 결정적 계기는 1708년 코사크 헤트만 국가를 위협한 스웨덴 국왕 칼 12세의 동맹인 폴란드 국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방어하기 위한 어떠한 상당한 병력도 투입하지 않겠다는 페트르 1세의 거절이었다. 페트르 1세는 칼 12세가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여 병력을 아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제파의 견해로는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보호하지 않고 스스로 버려두었으므로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다. 스웨덴과 폴란드 군대가 우크라이나로 진격하자 마제파는 1708년 10월 28일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일설에 따르면 마제파는 술에 취한 러시아의 차르인 표트르 1세를 모욕한 적이 있었으며 러시아 차르국의 토지를 소유하는 야심을 품고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칼 12세를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헤트만을 따른 코사크는 3,000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차르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윌리엄 포흘리옵킨에 따르면, 바로 그때부터 칼 12세가 마제파에게 마제파가 이끄는 코사크 부대의 표장으로 스웨덴 군대의 깃발(황색과 청색)을 사용할 권리를 부여했으며, 이후 이 색깔은 우크라이나 국기가 되었다고 한다.[13]
마제파의 반역을 알게 된 러시아 군대는 코사크 헤트만 국가의 수도인 바투린을 약탈하고 파괴하여 방어 병력 대부분과 많은 일반 시민들을 살해했다. 러시아군은 사망한 코사크들을 십자가에 묶어 드니프로 강을 따라 흑해로 띄워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제파의 봉기는 정교회 성직자들이 차르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더욱 약화되었다.
마제파의 편에 서지 않은 코사크들은 1708년 11월 11일 새로운 헤트만인 이반 스코로파드스키를 선출했다. 더 이상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마제파의 새 동맹인 스웨덴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인구 대부분이 마제파 편에 서지 못했다. 놀랍게도 그가 얻은 유일한 상당한 지지는 과거 헤트만과 불화를 빚었지만, 차르에 비해 마제파와 그가 대표하는 귀족들을 더 적은 악으로 여겼던 자포로지야로부터 나왔다. 러시아의 잔혹한 학살은 자포로지야 코사크들의 마제파 지지 이후에 이어졌으며, 페트르 1세는 1709년 자포로지야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활동 중인 자포로지야 코사크를 처형하라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1709년 6월 마제파가 속한 스웨덴-코사크 연합군은 폴타바에서 일어난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에 패전하고 만다. 러시아의 초토화 작전으로 피폐해진 연합군은 러시아군 앞에서 궤멸되었다. 폴타바 전투에서 패전한 마제파는 칼 12세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몰도바 벤데르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게 된다.
4. 몰락과 죽음
1709년 6월에 벌어진 폴타바 전투에서의 패배는 이반 마제파에게 결정적인 몰락을 가져왔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승리함으로써, 우크라이나를 스웨덴의 영향력 아래 두어 독립을 이루려던 마제파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마제파는 칼 12세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몰도바의 벤데리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병을 얻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709년에 사망하였다.
4. 1. 폴타바 전투 이후
1709년 6월 벌어진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승리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스웨덴의 영향력 아래 두고 독립을 이루려던 이반 마제파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스웨덴은 앞서 조약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약속했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마제파는 칼 12세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던 몰도바의 벤데리(티히나)로 도망쳤다. 그는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1709년에 사망했다.
마제파는 현재 루마니아의 갈라치에 묻혔으나, 그의 무덤은 여러 차례 도굴되었고 1962년 성 게오르게 교회가 철거되면서 결국 사라졌다.[14]
5. 유산과 평가
이반 마제파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으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러시아 제국은 그가 표트르 1세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대북방 전쟁 중 스웨덴 편에 선 것을 페레야슬라우 조약 위반이자 반역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소비에트 연방 시대까지 이어져, 마제파는 오랫동안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공개적으로 비난받는 반역자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당시 마제파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로 치부되어 금기시되었다.[16][17]
반면, 우크라이나의 관점에서는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러시아 제국이 외부에 군사력을 집중하는 동안 카자크의 영토 방위를 소홀히 하고, 러시아 군대의 현지 활동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는 등 러시아 측이 먼저 조약을 위반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특히 많은 카자크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강제 동원되어 희생되었고, 표트르 1세가 카자크 군대를 고향에서 먼 곳으로 파견하려 했던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16][17]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마제파는 페레야슬라우 조약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 차르에 맞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추구한 인물로서 국가적 영웅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빅토르 유시첸코 대통령 재임 시절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져, 마제파가 독립 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우크라이나 르네상스 건축과 유럽 문화 전통을 부흥시킨 지도자로 강조되었다.[21] 그러나 이러한 재평가는 우크라이나 내 친러시아 세력의 반발과 러시아 정부의 지속적인 비판에 직면하며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18][19][20][27] 2009년 여론 조사에서도 마제파에 대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평가는 "독립 투사"(30%)와 "변절자"(28%)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였다.[20]
현대 우크라이나에서 마제파는 ₴10 지폐와 동전의 도안 인물로 사용되고 있으며,[20] 체르니히우,[23] 폴타바[30] 등 여러 도시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키이우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나, 일부 구간 명칭 변경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31][32] 루마니아 갈라치에서도 그의 이름을 딴 구역과 동상이 존재한다.[14]
마제파의 극적인 삶은 볼테르, 대니얼 디포, 조지 바이런, 빅토르 위고, 알렉산드르 푸시킨 등의 문학 작품과 프란츠 리스트,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음악 작품에 영감을 주며 카자크 영웅의 전설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5. 1. 우크라이나의 영웅 vs. 러시아의 배신자
이반 마제파는 우크라이나의 독립된 카자크 국가를 세우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보흐단 흐멜니츠키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대북방 전쟁 중 러시아 차르국을 배신하고 스웨덴 편에 선 결정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마제파가 러시아에 대한 충성을 버린 것은 표트르 1세 황제에 의해 페레야슬라우 조약을 위반한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러시아 제국이 해외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코사크의 고향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했고, 현지 러시아 군대의 행동에 대한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불만이 컸기 때문에 오히려 러시아 측이 먼저 조약을 파기했다는 주장도 있다. 많은 코사크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동원되어 사망했으며, 표트르 1세가 코사크 군대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배치하려 했다는 점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16][17]
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방 시대 내내 마제파는 수치스러운 반역자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를 파문했으며, 1869년까지 정교회 축일 예배 중 그의 이름은 푸가초프, 라진, 가짜 드미트리 1세 등과 함께 공개적으로 저주받는 반역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마제파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금기시되었고,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징후로 여겨졌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를 거치며 마제파를 다르게 평가하는 역사 연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 마제파는 페레야슬라우 조약 이후 러시아 차르에 맞선 첫 인물로서 우크라이나의 공식 역사 서술과 주류 언론에서 국민 영웅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우크라이나 내 친러시아 세력에 의해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18][19][20]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이반 마제파를 기리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해왔다.[27] 2009년 4월 리서치 & 브랜딩 그룹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인구의 30%는 마제파를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 28%는 "적의 편에 선 변절자"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20]
2009년 3월 20일, 마제파 탄생 370주년 기념행사에서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유시첸코는 마제파의 반역 신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시첸코는 마제파가 독립적인 우크라이나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건축이 번성하고 유럽 문화 전통을 회복했다고 평가했다.[21] 하지만 같은 날 크림반도의 심페로폴에서는 마제파 기념행사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18][19] 2009년 5월, 러시아 외무부는 우크라이나가 폴타바 전투 300주년을 기념하고 마제파 기념비를 세우려는 계획에 대해 "러시아와의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대립" 시도라고 비판했다.[20]
오늘날 마제파의 초상화는 ₴ 10 지폐와 동전에 사용되고 있다.[20] 2009년 8월에는 체르니히우의 디티네츠 공원에 게나디 예르쇼프[22]가 제작한 마제파 기념비가 공개되었으나, 개막식에서 반대자들과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23][27] 폴타바에도 마제파 기념비 건립이 추진되어[25], 여러 논의 끝에 2016년 5월 6일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열렸다.[29][30] 키이우의 페체르스크 수도원을 지나는 '이반 마제파 거리'는 2010년 일부 구간이 '라브르스카 거리'로 변경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31][32]
한편, 마제파의 극적인 삶은 조지 바이런, 빅토르 위고, 대니얼 디포, 알렉산드르 푸시킨 등의 문학 작품과 프란츠 리스트,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음악 작품에 영감을 주며 코사크 영웅의 전설적인 이미지 형성에 기여했다.
5. 2. 문화적 영향
이반 마제파의 극적인 삶은 후대에 많은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그는 볼테르, 대니얼 디포 등의 글을 통해 전설적인 코사크 영웅으로 그려졌으며, 다양한 문학, 음악, 미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문학마제파의 이야기는 여러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 조지 바이런: 시 『마제파』(1818)[38] - 젊은 시절 마제파가 겪었다는 일화를 바탕으로 한다.
- 알렉산드르 푸시킨: 서사시 『폴타바』(1828–1829)
- 빅토르 위고: 시 『Mazeppa|마제파프랑스어』(1829)
- 율리우시 스워와츠키: 희곡 『마제파』(1840)
- 타라스 셰브첸코, 콘드라티 릴레예프 등도 마제파를 소재로 삼았다.
음악문학 작품에 영감을 받은 음악 작품들도 작곡되었다.
- 프란츠 리스트: 빅토르 위고의 시에 영감을 받아 교향시 《마제파》(1851)와 초절기교 연습곡 4번을 작곡했다.
-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를 바탕으로 오페라 《마제파》(1881–1883)를 작곡했다.
- 클레망스 드 그랑드발: 오페라 ''마제파'' (1892)
- 마이클 윌리엄 밸프: 칸타타 ''The Page'' (1861)
- 카를로 페드로티: 오페라 ''마제파'' (1861)
영화
화폐 및 기념우크라이나에서는 독립 이후 마제파를 국가적 영웅으로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 그의 초상화는 우크라이나의 10 흐리우냐 지폐와 동전에 사용되고 있다.[20]
- 2009년 빅토르 유시첸코 대통령은 문화적 공로를 기리는 이반 마제파 훈장을 제정했다.[34]
- 우크라이나군의 제54기계화여단 (2020년)[35]과 우크라이나 해군의 아다급 코르벳 헤트만 이반 마제파 (2022년)[36]에 그의 이름이 명예 칭호로 부여되었다.
- 체르니히우(2009년)[23]와 폴타바(2016년)[30] 등지에 마제파 기념비가 세워졌다.
- 키이우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이반 마제파 거리'가 있으나, 2010년 일부 구간 명칭 변경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31][32]
- 루마니아 갈라치에는 마제파의 이름을 딴 구역(마제파 1, 2구역)과 동상이 있다.[14]
5. 3. 현대 우크라이나에서의 재조명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 시대 내내 이반 마제파는 표트르 1세를 배신하고 페레야슬라우 조약을 위반한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러시아 정교회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를 파문했으며, 1869년까지 그의 이름은 푸가초프, 라진, 가짜 드미트리 1세 등과 함께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저주받는 반역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소비에트 시대에도 이어져 마제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징후로 간주되어 금기시되었다.[16][17]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를 거치며 마제파를 다르게 평가하는 역사 연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 마제파는 페레야슬라우 조약 이후 러시아 차르에 맞선 첫 지도자로서 우크라이나의 공식 역사 서술과 주류 언론에서 국민 영웅으로 재조명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여전히 친러시아 세력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며,[18][19][20]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가 마제파를 기리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다.[27] 2009년 4월 리서치 & 브랜딩 그룹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국민의 30%는 마제파를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 28%는 "적의 편에 선 변절자"로 인식하는 등 여전히 상반된 평가가 존재했다.[20]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마제파에 대한 복권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유셴코 대통령은 2009년 3월 20일, 마제파 탄생 370주년을 맞아 열린 기념행사에서 마제파가 반역자라는 기존의 인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제파가 독립적인 우크라이나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그의 통치 아래 우크라이나 건축이 번성하고 유럽 문화 전통을 잇는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21] 하지만 같은 날 크림반도의 심페로폴에서는 마제파 기념행사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18][19] 2009년 5월 러시아 외무부는 우크라이나의 폴타바 전투 300주년 기념 및 마제파 기념비 건립 계획에 대해 "러시아와의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대립"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20]
현대 우크라이나에서 마제파는 ₴ 10 지폐와 동전의 도안 인물로 사용되고 있다.[20] 또한, 여러 도시에 그의 기념비 건립이 추진되었다. 2009년 8월, 조각가 게나디 예르쇼프[22]가 제작한 마제파 기념비가 체르니히우의 디티네츠 공원에 세워졌으나, 제막식 당시 마제파를 반대하는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23][27]
유셴코 대통령은 2009년 8월 폴타바에 마제파 기념비 건설 재개를 지시했고,[25] 2010년에는 키이우의 슬라바 광장에도 기념비를 세우도록 하는 법령을 발표했다.[26] 폴타바의 기념비는 여러 과정을 거쳐 2015년 10월 14일 폴타바로 운반되어 전시되었고,[29] 2016년 2월 25일 폴타바 시의회의 건립 결정[29]을 거쳐 2016년 5월 6일 페트로 포로셴코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열렸다.[30] 키이우 기념비 건립은 2010년 당시 시 정부가 예산 확보를 조건으로 준비 중이라고 밝혔으나,[27] 이후 구체적인 진척 상황은 불분명하다.
한편, 마제파와 관련된 지명 변경도 논란을 낳았다. 2010년 7월, 페체르스크 수도원을 지나는 키이우의 '이반 마제파 거리' 일부가 '라브르스카 거리'로 변경되자 이에 대한 항의가 제기되기도 했다.[31][32]
우크라이나 외에도 루마니아의 갈라치에서는 두 개의 중심 구역(마제파 1, 2구역) 명칭과 공원에 세워진 동상을 통해 마제파를 기념하고 있다.[14] 유셴코 대통령은 2009년 자신의 가계를 조사한 후 마제파 가문과의 연관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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