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비츠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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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비츠 조약은 1699년 오스만 제국과 신성 동맹(오스트리아, 폴란드-리투아니아,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슬라보니아를 오스트리아에, 모레아와 달마티아를 베네치아에, 포돌리아를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할양하며 유럽에서의 팽창을 멈추고 영토를 상실했다. 또한, 1700년에는 러시아와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하여 아조프를 러시아에 할양했다. 이 조약들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 합스부르크 제국의 성장, 러시아의 남하 정책,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 회복 등 유럽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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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비츠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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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이름 | 카를로비츠 조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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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 대튀르크 전쟁 (1683–1697) |
초안 작성 시작일 | 1698년 11월 16일 |
서명일 | 1699년 1월 26일 |
서명 장소 | 스렘스키카를로브치, 군사 변경, 합스부르크 군주국 (현재 세르비아 스렘스키카를로브치) |
서명자 | 라미 메흐메트 파샤 (레이스 울-쿠타브) 알렉산더 마브로코르다토스 (포르테의 드라그만) 킨스키 백작 외팅겐 백작 레오폴트 슐릭 추 바사노 운트 바이스키르헨 카를로 루치니 스타니스와프 마와호프스키 (포즈난 주지사) 프로코피 보즈니친 |
당사국 | 네덜란드 공화국 (중재자) 잉글랜드 왕국 (중재자) 오스만 제국 신성 로마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 러시아 차르국 (휴전) |
사용 언어 | 라틴어 (신성 로마 제국 및 오스만 제국) 오스만 튀르크어 (베네치아 공화국 및 오스만 제국) |
추가 정보 | |
관련 조약 | 콘스탄티노플 조약 (1700년) |
2. 체결 배경
1683년 제2차 빈 포위 공격 실패 이후, 오스만 제국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의 주도로 결성된 신성 동맹의 반격에 직면했다. 신성 동맹에는 오스트리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베네치아 공화국이 참여했으며, 1686년에는 러시아도 합류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2]
신성 동맹군은 1686년 부다(Buda) 탈환과 1687년 모하치 전투 승리 등 여러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다.
2. 1. 오스만 제국의 팽창과 좌절
17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은 퀴프륄뤼 가문의 지휘 아래 유럽에서 역사상 최대 영토를 확보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683년 제2차 빈 포위 공격의 실패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제동을 걸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휘관이었던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빈 포위 실패의 책임을 지고 베오그라드에서 처형되었으며, 이는 오스만 군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이러한 상황에서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의 호소로 신성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에는 교황령, 오스트리아, 폴란드, 베네치아가 참여했으며, 이후 러시아도 합류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장기전(대튀르크 전쟁)에 돌입했다. 여러 전선에서 전투를 치러야 했던 오스만 제국은 각지에서 영토를 잃고 유럽에서의 세력이 크게 후퇴하였다.
전쟁 후반에는 전선이 교착되었고, 젠타 전투 등의 전투가 있었지만, 거의 전투가 없이 강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협상은 난항을 겪었지만,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를 제외한 여러 국가들과 1699년 헝가리 남부의 카를로비츠에서 카를로비츠 조약을 체결하였고, 러시아와는 이듬해인 1700년 수도 이스탄불에서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식시켰다.
2. 2. 신성 동맹의 결성과 반격
1683년 제2차 빈 포위 공격을 계기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의 주도로 오스트리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베네치아 공화국이 참여하는 신성 동맹이 결성되었다.[2] 1686년에는 러시아도 합류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신성 동맹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공세를 펼쳐 여러 지역에서 승리했다. 특히 1686년 부다(Buda) 탈환과 1687년 모하치 전투에서의 승리는 오스만 제국에 큰 타격을 주었다.
2. 3. 전황의 교착과 강화 협상
전쟁 후반에는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졌으나, 젠타 전투 등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면서 강화 협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를 제외한 신성 동맹 국가들과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체결했다.[1] 러시아와는 1700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마무리했다.[1]3. 조약의 주요 내용
카를로비츠 조약은 1699년 1월 26일, 오스만 제국과 신성 동맹 국가들(오스트리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베네치아 공화국,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점유 상태 원칙la'에 따라 각국의 영토 소유를 확정했다.[1]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가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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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군주국) | 오스만 제국령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공국, 슬라보니아를 할양받았다.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명목상 독립을 유지했지만, 오스트리아 총독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1] |
베네치아 공화국 | 달마티아와 모레아 (펠로폰네소스반도)를 획득했다.[1] (단, 모레아는 20년 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에 반환[1])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 포돌리아를 반환받았다.[1] (1672년 부차치 조약으로 상실했던 영토 회복) |
러시아 차르국 | 아조프를 할양받았다. (1700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통해 확정[1]) |
이 외에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포로 석방, 몰도바에서 부다 타타르의 이주, 타타르 습격의 종식, 도망자 인도(코사크는 연합에게, 몰도바인은 오스만 제국에게), 조공 지불 중단 등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1]
오스만 제국은 베오그라드, 테메슈바르 바나트(현재의 티미쇼아라)와 함께 발라키아와 몰도바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했다.[1]
3. 1. 카를로비츠 조약 (1699년)
오스만 제국은 1699년 1월 26일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다음과 같은 영토를 할양하거나 반환했다.- 오스트리아에는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슬라보니아를 할양했다.[1]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 확장을 의미하며, 동유럽의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헝가리의 대부분 지역과 슬라보니아가 오스트리아로 넘어가게 되었다.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명목상 독립을 유지했지만, 오스트리아 총독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1]
- 베네치아 공화국에는 달마티아와 모레아(펠로폰네소스반도)를 할양했다.[1] 베네치아는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함으로써 동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모레아는 20년 후 파사로비츠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에 반환되었다.[1]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는 포돌리아를 반환했다.[1] 이는 1672년 부차치 조약으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한 것이다. 폴란드는 포돌리아를 회복하는 대가로 몰도바에서 점령한 요새들을 반환해야 했다. 또한 포로 석방, 몰도바에서 부다 타타르의 이주, 타타르 습격의 종식, 도망자의 인도, 조공 지불 중단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1]
3. 2. 콘스탄티노플 조약 (1700년)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합의된 휴전에 따라 1년 동안 러시아와 협상이 진행되었고, 1700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술탄은 아조프 지역을 표트르 1세에게 할양했다.[1]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아조프를 할양받은 러시아는 흑해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표트르 대제는 아조프를 발판 삼아 흑해 함대를 건설하고, 오스만 제국과의 세력 경쟁을 본격화했다.하지만, 러시아는 11년 후 프루트 강 전역과 1711년 프루트 조약 실패 후 이 영토를 반환해야 했다.[1] 카를로비츠 조약에서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에 3년간의 휴전만 합의되었을 뿐이며, 러시아 외교를 주도했던 표도르 고로빈에 의해 최종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체결되었다.[4]
4. 조약의 영향
오스만 제국과 신성 동맹(신성 로마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베네치아 공화국, 러시아 차르) 간의 2개월간 회담 끝에 1699년 1월 26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1]
베네치아는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포함하는 모레아와 달마티아 대부분을 얻었지만, 모레아는 20년 이내에 파사로비츠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에 반환되었다.[1] 오스만 제국은 베오그라드, 테메슈바르 바나트와 함께 왈라키아와 몰도바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했다. 성묘 교회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3]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새로운 국경을 설정하기 위해 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일부 지역은 1703년까지 분쟁이 있었다.[1] 합스부르크 위원 루이지 페르디난도 마르실리의 노력으로 크로아티아와 비하치 국경은 1700년 중반까지, 테메슈바르 국경은 1701년 초까지 합의되어, 최초로 물리적 랜드마크로 구분된 국경이 만들어졌다.[1]
4. 1. 오스만 제국의 쇠퇴
점유 상태 원칙에 따라,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서 3세기 반 동안의 팽창을 멈추고 처음으로 상당한 영토를 상실했다.[1] 이후 1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국경은 변동했지만, 메흐메드 2세, 셀림 1세, 술레이만 1세 통치 시기(15세기~16세기)와 같은 대규모 영토 확장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1700년대 중반 이후 오스만 제국의 국경은 사바 강 남쪽과 발칸 반도로 크게 한정되었고, 19세기 초에는 더 남쪽으로 밀려났다.4. 2. 합스부르크 제국의 성장
점유 상태 원칙la에 따라, 이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에그리 에얄레트, 바라트 에얄레트, 부딘 에얄레트의 대부분, 테메슈바르 에얄레트의 북부, 그리고 보스니아 에얄레트의 일부를 획득했다.[1] 이는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의 대부분에 해당한다.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명목상 독립을 유지했지만, 오스트리아 총독의 직접 통치를 받았다.[1]카를로비츠에서 헝가리 영토 약 155398.51km2를 획득하고, 18년 후 파사로비츠 조약에 의해 테메슈바르 바나트를 획득함으로써,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최대 규모로 확장되어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지역 패권국으로 확립했다.[1]
4. 3. 러시아의 남하 정책
Пётр I|표트르 1세ru 치하의 러시아 차르국은 1700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통해 아조프 지역을 획득하면서 흑해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1] 이는 오스만 제국과의 지속적인 갈등을 야기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결국 러시아는 11년 후 프루트 강 전역과 프루트 조약의 실패로 이 영토를 반환해야 했다.4. 4.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 회복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카미아네츠-포딜스키 요새가 파괴되지 않은 채 포돌리아를 회복했다. 이는 1672년 부차치 조약에서 잃었던 지역을 27년 만에 되찾은 것이었다.[1] 그 대가로 연합은 몰도바에서 점령한 요새들을 돌려주었다. 이 조약은 포로 석방, 몰도바에서 부다 타타르의 이주, 타타르 습격의 종식, 도망자 인도(코사크는 연합에게, 몰도바인은 오스만 제국에게), 연합의 조공 지불 중단 등을 포함했다.[1]참조
[1]
백과사전
Treaty of Karlowitz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2]
서적
A History of Eastern Europe: Crisis and Change
Routledge
[3]
서적
Geschichte der europäischen Staaten (Geschichte des östreichischen Kaiserstaates, Band 4)
https://books.google[...]
F. Perthes
[4]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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