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전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탈리아 전쟁은 1494년부터 1559년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주요 국가들이 이탈리아 반도를 무대로 벌인 일련의 전쟁을 통칭한다. 1454년 로디 조약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평화가 깨지고,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제1차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6차례의 전쟁이 이어졌다. 이 전쟁들은 유럽의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으며, 스페인이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탈리아는 전쟁의 무대가 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군사 기술과 전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세기 - 유감동
조선 초 유귀수의 딸이자 최중기의 아내였던 유감동은 강간 후 이혼하고 기생이 되어 여러 남자와 간통한 혐의로 처벌받았으며, 이 사건은 조선 시대 간통죄 단속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 - 16세기 - 영국 왕립 해군
영국 왕립 해군은 1546년 헨리 8세에 의해 공식 창설되었고 이전부터 해군력을 보유했던 잉글랜드 왕국과 합병된 스코틀랜드 왕립 해군을 기원으로, 분쟁 예방, 해상 안보 제공, 국제적 파트너십 강화, 경제 보호, 인도적 지원 제공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전 세계 해양에서 활동하는 영국의 해군이다. - 16세기 - 상관 (교역소)
상관(교역소)은 유럽 상인들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설립한 조직으로, 무역, 외교, 창고, 관세, 보험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며 식민 지배의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 이탈리아 전쟁 - 코냐크 동맹 전쟁
코냐크 동맹 전쟁은 1526년부터 1530년까지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주도한 코냐크 동맹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이탈리아의 분열 심화, 교황권 쇠퇴,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 이탈리아 전쟁 - 이탈리아 전쟁 (1494년-1498년)
1494년부터 1498년까지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왕국을 차지하려 이탈리아를 침공하며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은 복잡한 정치적, 외교적 배경과 이탈리아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유럽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이탈리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분쟁 | 이탈리아 전쟁 |
| 날짜 | 1494년 9월 5일 ~ 1559년 4월 3일 |
| 장소 | 남유럽과 서유럽 |
| 결과 | 합스부르크 승리 스페인이 유럽 최강국의 반열에 오름 신성 로마 제국(하프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의 세력 확대 이탈리아 제후의 하프스부르크 가에 의한 통제 |
![]() | |
![]() | |
| 교전 세력 1 | |
| 국가 | [[파일:Flag of the Duchy of Milan (1450).svg|border|25x20px]] 밀라노 공국 [[파일:Flag of Florence.svg|border|25x20px]] 피렌체 공화국 [[파일:Emblem of the Papacy SE.svg|25x20px]] 교황령 [[파일:Arms of the house of Este (4).svg|border|25x20px]] [[파일:Bandera de Nápoles - Trastámara.svg|25x20px]] 나폴리 왕국 [[파일:Armoiries Espagne Catholique.svg|25x20px]] 카스티야・아라곤 [[파일:Early Swiss cross.svg|border|25x20px]] |
| 교전 세력 2 | |
| 국가 | 스페인 |
| 교전 세력 3 | |
| 국가 | |
| 지휘관 1 | |
| 지휘관 |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샤보 느무르 술레이만 1세 하이레딘 바르바로사 트리불치오 |
| 지휘관 2 | |
| 지휘관 | 막시밀리안 1세 페르난도 5세 카를 5세 페르디난트 1세 펠리페 2세 헨리 8세 메리 1세 알폰소 2세 페데리코 |
| 지휘관 3 | |
| 지휘관 | 우르비노 안드레아 그리티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루도비코 스포르차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 율리오 2세 클레멘스 7세 바오로 3세 |
| 기타 정보 | |
| 연관된 분쟁 | 프랑스-합스부르크 경쟁 영국-프랑스 전쟁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
| 결과 | 스페인이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 프레시디 국가에 대한 주권을 획득 로렌이 세 주교령을 프랑스에 양도 프랑스가 칼레를 잉글랜드로부터 획득 독립적인 사보이아 국가 재건립 피렌체가 시에나를 합병 |
2. 서막
1454년 롬바르디아 전쟁이 끝나고 로디 조약으로 이탈리아 동맹이 체결되면서, 피렌체의 코시모 데 메디치와 로렌초 데 메디치 시대에 이탈리아는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파치 음모와 페라라 전쟁과 같은 예외도 있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프랑스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배제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1492년 4월, 로렌초가 사망하면서 동맹은 약화되었고, 프랑스는 이탈리아 확장 정책을 추구했다.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1481년 앙주 백작 샤를 4세로부터 프로방스 백국을 상속받고 앙주 가문의 나폴리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의 아들 샤를 8세는 1486년 프로방스를 프랑스에 편입하고 마르세이유와 툴롱 항구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했다.
샤를 8세는 제1차 이탈리아 전쟁에 앞서 1492년 11월 잉글랜드의 헨리 7세와의 에타플 조약, 1493년 3월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의 바르셀로나 조약을 통해 다른 유럽 통치자들의 중립을 확보하려 했다. 특히 바르셀로나 조약을 통해 루시용과 세르다냐를 스페인에 반환하는 대신, 이탈리아에서 벌일 군사 행동에 대해 스페인이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받았다.
3. 전쟁의 전개

==== 제1차 이탈리아 전쟁 (1494년-1498년) ====
샤를 8세는 앙주 가문의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명분으로 1494년 이탈리아를 침공했다.[26] 스위스 용병을 포함한 25,000명의 프랑스군은 십자군 원정의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명분으로 나폴리를 정복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교황령,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등이 참여한 베네치아 동맹의 결성으로 프랑스군은 본국과 차단되었다.[1]
프랑스 군은 1495년 6월 28일 세미나라 전투에서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2세와 스페인 장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지휘하는 나폴리-스페인 동맹군을 완파하였다. 하지만 베네치아 동맹군에 의해 프랑스와 나폴리 사이가 차단되어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1495년 7월 6일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고 대부분의 보급품을 남겨둔채 프랑스로 퇴각했다.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지만, 동맹군이 더 많은 사상자를 내고 프랑스군의 퇴각을 저지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견은 프랑스의 승리에 기울었다.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2세는 샤를 8세가 프랑스로 물러난 후 전투를 통해 프랑스 수비군을 나폴리에서 몰아냈다. 밀라노의 섭정이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프랑스를 배신하고 1499년까지 그의 왕좌를 유지하였으나, 샤를의 뒤를 계승한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롬바르디아를 침공해 밀라노에서 사로잡혔다.
이 전쟁은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프랑스의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부추긴 데서 시작되었다. 그의 명분은 나폴리 왕위 계승에 대한 발루아-앙주 가문의 주장이었다. 1494년 9월, 샤를 8세는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는데, 그는 나폴리를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십자군 원정의 거점으로 사용하고자 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했다. 10월,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사망함에 따라 루도비코는 공식적으로 밀라노 공작이 되었다.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를 거의 무방비 상태로 통과하여 11월 8일 피사, 11월 17일 피렌체, 12월 31일 로마에 진입했다.
1495년 2월, 프랑스군은 나폴리 왕국에 있는 몬테 산 조반니 캄파노에 도착하여 나폴리 수비대와 협상을 벌이기 위해 사절을 파견했지만, 사절들은 살해당했고 훼손된 시체가 프랑스군 진영으로 돌아왔다. 2월 9일, 분노한 포위군은 포격으로 성벽을 돌파한 후 성을 급습하여 내부의 모든 사람을 살해했다. "나폴리 약탈"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이탈리아 내부에서 프랑스의 권력에 대한 우려와 함께 광범위한 분노가 일어났다.
==== 제2차 이탈리아 전쟁 (1499년-1504년) ====
프랑스의 샤를 8세가 1498년에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한 루이 12세는 밀라노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1499년 롬바르디아를 침공했다. 루이 12세는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권력을 찬탈했으며, 비스콘티 가문의 마지막 공작인 필리포가 1447년 후계없이 사망한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사위의 자격으로 통치권을 계승하였으나 필리포의 유일한 후손인 비앙카(프란체스코의 부인)는 사생아였기에 정통성이 없다고 보았다. 반면 루이 12세는 할머니 발렌티나(1371~1408)를 통해 혈통을 물려받았으므로 정통성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침공하기 이전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세력 사이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피렌체를 견제하기 위해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피사를 지원하고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를 끌어들였다. 피렌체와 피사의 전쟁으로 대프랑스 동맹이 분열되는 것을 우려한 막시밀리안은 1496년 이 전쟁에 개입하였지만, 이는 오히려 피렌체가 프랑스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루이 12세는 북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이어 샤를 8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까지 정복하려고 하였다. 미리 신성로마제국, 영국, 스페인 등과 우호적 조약을 맺어둔 루이는 1499년 7월 27000명의 군대(1만명의 기병과 5천명의 스위스 용병 포함)를 이탈리아로 파견하여, 공성전 끝에 10월 6일 밀라노를 정복하였다. 나폴리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피렌체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으므로, 1500년 6월 프랑스군은 피렌체를 지원하여 피사를 침공하였으나 피사인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후퇴하였다.
1500년 11월 루이는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와 나폴리 분할에 대한 협정에 합의하고, 밀라노에서 남쪽으로 진군했다. 연합한 프랑스와 스페인 군대는 1502년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고 지배했으나 분할에 대한 조건이 바뀌면서 의견차이가 생겼고, 루이 12세와 페르난도 2세는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스페인의 장군 코르도바는 1494년의 1차 전쟁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였던 스페인군을 개혁하였고 1503년 4월 체리뇰라 전투(Battle of Cerignola)와 12월 가릴리아노 전투(Battle of Garigliano)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였다. 결국 루이 12세는 나폴리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나폴리는 스페인 총독 코르도바 장군의 지배에 들어갔다.
==== 캉브레 동맹 전쟁 (1508년-1516년) ====
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1508년 12월 캉브레 동맹을 결성했다.[2] 이 동맹에는 프랑스, 교황령,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이 참가했다.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는 베네치아의 프리울리 공략에 분노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베네치아가 프랑스의 밀라노 지배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으며,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왕도 베네치아가 남부 이탈리아의 아드리아해 연안 도시들을 점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었다.
동맹군은 1509년 5월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 군대를 크게 격파했으나, 같은 해 9월 파도바 공성전에서는 베네치아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점령에 실패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대규모 용병군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되자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1510년, 교황 율리오 2세는 프랑스의 루이 12세를 베네치아 이상의 위협으로 여기게 되었고,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었다. 1511년 교황은 프랑스에 대한 신성 동맹을 선언하였고, 이 동맹에는 잉글랜드,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이 참가하면서 급속히 커졌다.
느무르 공작 가스통 드 푸아가 지휘하는 프랑스 군대는 1512년 라벤나 전투 (1512년)에서 스페인 군대에 승리했지만, 푸아가 전사하고 스위스가 밀라노를 점령하면서 프랑스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 밀라노를 점령한 스위스는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를 공작에 복위시켰다.
1513년 베네치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롬바르디아를 분할하는 데 동의했다. 루이 12세는 밀라노 침공을 시도했으나, 1513년 6월 노바라 전투 (1513년)에서 스위스 용병에게 패배했다.
1513년 2월 교황 율리오 2세가 사망한후, 레오 10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즉위 하였다.[2] 1515년 1월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죽고 프랑수아 1세 (프랑스)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였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을 이끌고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군을 격파하고 밀라노를 탈환했다. 이 전투 이후 교황 레오 10세와 스페인이 밀라노를 포기하면서 신성 동맹은 무너져 내렸다. 1516년 8월 누아용 조약 및 브뤼셀 조약에 의해 북 이탈리아 전체가 프랑스와 베네치아에 항복했다.
==== 제3차 이탈리아 전쟁 (1521년-1526년) ====
1519년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면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영토에 둘러싸이게 되어 국가적 위협을 느꼈다.[27] 이에 프랑수아 1세 (프랑스)는 전쟁을 일으켰으나,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응하기 위해 레오 10세는 황제 편에 섰고, 잉글랜드의 헨리 8세도 참전하여 프랑스는 베네치아 공화국 외에 동맹이 없는 상황에 놓였다.[27]
카를 5세는 1521년 프랑스로부터 밀라노를 빼앗아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에게 돌려주었다. 프랑스군은 스페인의 아쿼버스 전술에 고전하며, 1522년 4월 비코카 전투에서 패배하여 롬바르디아를 상실했다. 이후 1524년 4월 세시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한후, 1524년 10월 프랑수아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롬바르디아를 침공하였지만,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서 완패하고 그 자신도 포로로 잡혔다.[27]
프랑스는 왕을 석방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대제와 동맹을 맺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28][29][30][31]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1526년 마드리드 조약을 통해 밀라노, 플랑드르, 부르고뉴를 모두 포기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 코냐크 동맹 전쟁 (1526년-1530년) ====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1526년 5월 22일 코냐크 동맹을 결성했다.[8] 동맹에는 교황령, 프랑스 왕국[9], 잉글랜드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이 참여했다. 동맹군은 로디를 점령하는 등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제국군이 로마를 약탈하는 등[8] 전세가 역전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마드리드 조약을 파기하고 코냐크 동맹에 가담하였으나, 프랑스 군은 롬바르디아를 떠났다.[8] 캉브레 조약으로 프랑스는 동맹에서 이탈했고, 베네치아 역시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1529년에는 제1차 빈 포위전이 발발하기도 했다.
피렌체는 1529년 제국군에 포위되어 10개월간 농성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메디치 가문이 복귀했다.[8] 이는 피렌체 공화국의 종말과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의 통치 시작을 알렸다.
1530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에게 대관식을 거행했고, 이탈리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우위가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프랑스와의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프랑수아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와 동맹을 맺는 등[8]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 제4차 이탈리아 전쟁 (1536년-1538년) ====
1535년 11월, 후계자 없이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사망하자 카를 5세는 그의 아들 펠리페를 밀라노 공작에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와 제노바, 아스티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며, 1536년 3월, 24,000명의 보병과 3,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프랑스군을 사보이아 공국으로 진군시켜 샹베리를 함락시키고, 4월에는 토리노를 점령했다. 그러나, 밀라노 점령에는 실패했다. 아스티의 친프랑스 세력은 황제군 주둔지를 축출했다.
이에 카를 5세는 프로방스를 침공, 엑상프로방스를 점령했으나, 프랑스군이 마르세유로 향하는 길을 막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아비뇽 공격도 포기한 채 스페인으로 퇴각했다.
카를 5세가 프로방스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피에몬테의 프랑스군은 남부 롬바르디아의 이탈리아 군사 귀족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노바로 향했다. 프랑수아 1세는 1536년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연말에 마르세유에 도착한 프랑스-오스만 연합 함대는 제노바를 위협했다. 그러나 제노바의 수비가 강화되어 프랑스군은 피에몬테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는 데 그쳤고, 바르바로스 하이렛딘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해군은 이탈리아 해안 도시를 공략했지만 프랑스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양면전쟁을 원치 않았던 카를 5세는 평화를 찾게 되었고, 1538년 6월 니스 조약으로 전쟁은 끝났다. 토리노는 프랑스에 남게 되었지만, 이탈리아의 지도에 중요한 변화는 없었다. 교황 바오로 3세의 중재로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후 교황령, 스페인,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몰타 기사단 등이 참여한 신성 동맹이 결성되어 오스만 해군을 격퇴하려 했으나, 1538년 9월 프레베자 해전에서 패배했다.
==== 제5차 이탈리아 전쟁 (1542년-1546년) ====
1538년 휴전은 밀라노를 여전히 주장하는 프랑수아 1세와 마드리드 조약과 캉브레 조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카를 5세 사이의 근본적인 긴장을 해소하지 못했다.[10] 1540년 카를 5세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를 밀라노 공작으로 임명하면서 프랑스로의 반환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붕괴되었다.[9][10] 1541년 카를 5세는 오스만 제국의 항구 알제리에 대한 재앙적인 공격을 감행했고, 이는 그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고 술레이만 1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재개하게 되었다.[10]
1541년 8월 21일 오스만 군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헝가리 부다(Buda) 점령했다.[32] 9월 8일 제노바에서 이 소식을 접한 카를 5세는 분노하며 복수를 위해 알제 원정을 추진하였다.[33] 원정준비가 지연되어 10월 중순이 넘어서자 안드레아 도리아는 출정을 반대했지만 카를 5세의 고집을 꺽을 수 없었다.[34] 악천후 속에 강행된 무리한 원정은 선박 침몰등 엄청난 피해속에 대실패로 끝났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를 꺽고 밀라노 공작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여[35] 오스만과 동맹을 맺은후 1542년 7월 선전포고를 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프랑수아 1세는 1542년 7월 12일 다시 한번 신성 로마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1542년-1546년 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했다.[10] 밀라노는 다시 한번 전쟁의 구실이 되었다.[9] 8월에 프랑스군은 스페인 국경의 페르피냥과 아르투아, 플랑드르, 그리고 1477년 이전 발루아 가문의 영지였던 룩셈부르크를 공격했다. 제국군의 저항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고, 이러한 공격의 대부분은 쉽게 격퇴되었다.
1543년 6월 오스만 해군 사령관 바르바로사 하이레딘은 함대를 이끌고 마르세유로 이동하여 프랑스 해군과 합동 작전을 펼쳤다.[36] 프랑스-오스만 함대는 1543년 8월 당시 카를 5세의 영지였던 니스를 점령하고 성을 공성전 끝에 함락시켰다. 하지만 방어를 푸는 데는 1달이 걸렸다.
기독교와 이슬람 군대가 기독교 도시를 공격하는 것은 충격적인 일로 여겨졌는데, 특히 프랑수아 1세가 바르바로사가 프랑스 항구 툴롱을 겨울 기지로 사용하도록 허용했을 때 더욱 그러했다.[11]
앙기앙 백작 프랑수아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1544년 4월 14일 세레솔레 전투에서 제국군을 패퇴시켰지만,[11] 롬바르디아의 다른 지역에서 진전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전략적 가치는 제한적이었다.[12] 6월 세라발레에서 알폰소 다발로스가 피렌체 망명자 피에로 스트로치가 이끄는 용병 부대를 앙기앙 백작과 합류하는 길에 패퇴시키면서 제국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1543년 헨리 8세는 카를 5세와 동맹을 맺고 플랑드르에서 그의 공세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프랑스 본토에서는 헨리 8세가 1544년 7월 14일 칼레에 상륙했고,[13] 이미 진군하고 있던 잉글랜드군과 합류하여 곧 부롱뉴 포위전이 7월 19일에 시작되었다. 9월 10일 영국군은 불로뉴를 함락시켰고, 제국군은 파리에서 60km 이내로 진격했다. 그러나 재정이 고갈되고 지중해의 오스만 해군의 강력함에 우려하여, 카를 5세는 9월 14일 프랑수아 1세와 크레피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1542년의 상황으로 복귀시켰다. 이 합의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1546년까지 계속하고 불로뉴를 점유한 헨리 8세는 제외되었다.[14]
1545년 9월까지 전쟁은 완전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어느 나라도 병력과 자금 부족에 시달렸고,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실패했다.[15] 결국, 끝까지 버틴 헨리 8세도 꺾이고, 1546년 6월 7일, 아르드르 조약이 프랑스 대표와 잉글랜드 대표 사이에 서명되었다.[16]
==== 제6차 이탈리아 전쟁 (1551년-1559년) ====
프랑스의 앙리 2세는 합스부르크를 제치고 유럽의 정치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자 1551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9] 로렌에 대한 초기 공격이 성공했지만, 1554년 8월 2일 마르차노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패배했다.[37] 1556년 카를 5세의 은퇴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페르디난트 1세로 분열되었다.[17]
전쟁의 초점은 플랑드르로 이동했고, 펠리페 2세는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공작과 연합해 1557년 8월 10일 생캉탱에서 프랑스군을 패배시켰다.[18] 1557년 잉글랜드가 참전한 가운데, 프랑스는 1558년 1월 칼레를 점령했다.[19] 프랑스 군대는 스페인 소유의 저지대를 약탈했다.
앙리 2세는 국내 문제로 1559년 4월 3일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고,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으며 사보이아 공국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에게 반환했다.[21]
3. 1. 제1차 이탈리아 전쟁 (1494년-1498년)
샤를 8세는 앙주 가문의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명분으로 1494년 이탈리아를 침공했다.[26] 스위스 용병을 포함한 25,000명의 프랑스군은 십자군 원정의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명분으로 나폴리를 정복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교황령,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등이 참여한 베네치아 동맹의 결성으로 프랑스군은 본국과 차단되었다.[1]
프랑스 군은 1495년 6월 28일 세미나라 전투에서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2세와 스페인 장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지휘하는 나폴리-스페인 동맹군을 완파하였다. 하지만 베네치아 동맹군에 의해 프랑스와 나폴리 사이가 차단되어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1495년 7월 6일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고 대부분의 보급품을 남겨둔채 프랑스로 퇴각했다.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지만, 동맹군이 더 많은 사상자를 내고 프랑스군의 퇴각을 저지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견은 프랑스의 승리에 기울었다.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2세는 샤를 8세가 프랑스로 물러난 후 전투를 통해 프랑스 수비군을 나폴리에서 몰아냈다. 밀라노의 섭정이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프랑스를 배신하고 1499년까지 그의 왕좌를 유지하였으나, 샤를의 뒤를 계승한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롬바르디아를 침공해 밀라노에서 사로잡혔다.
이 전쟁은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프랑스의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부추긴 데서 시작되었다. 그의 명분은 나폴리 왕위 계승에 대한 발루아-앙주 가문의 주장이었다. 1494년 9월, 샤를 8세는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는데, 그는 나폴리를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십자군 원정의 거점으로 사용하고자 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했다. 10월,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사망함에 따라 루도비코는 공식적으로 밀라노 공작이 되었다.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를 거의 무방비 상태로 통과하여 11월 8일 피사, 11월 17일 피렌체, 12월 31일 로마에 진입했다.
1495년 2월, 프랑스군은 나폴리 왕국에 있는 몬테 산 조반니 캄파노에 도착하여 나폴리 수비대와 협상을 벌이기 위해 사절을 파견했지만, 사절들은 살해당했고 훼손된 시체가 프랑스군 진영으로 돌아왔다. 2월 9일, 분노한 포위군은 포격으로 성벽을 돌파한 후 성을 급습하여 내부의 모든 사람을 살해했다. "나폴리 약탈"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이탈리아 내부에서 프랑스의 권력에 대한 우려와 함께 광범위한 분노가 일어났다.
3. 2. 제2차 이탈리아 전쟁 (1499년-150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1498년에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한 루이 12세는 밀라노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1499년 롬바르디아를 침공했다. 루이 12세는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권력을 찬탈했으며, 비스콘티 가문의 마지막 공작인 필리포가 1447년 후계없이 사망한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사위의 자격으로 통치권을 계승하였으나 필리포의 유일한 후손인 비앙카(프란체스코의 부인)는 사생아였기에 정통성이 없다고 보았다. 반면 루이 12세는 할머니 발렌티나(1371~1408)를 통해 혈통을 물려받았으므로 정통성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침공하기 이전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세력 사이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피렌체를 견제하기 위해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피사를 지원하고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를 끌어들였다. 피렌체와 피사의 전쟁으로 대프랑스 동맹이 분열되는 것을 우려한 막시밀리안은 1496년 이 전쟁에 개입하였지만, 이는 오히려 피렌체가 프랑스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루이 12세는 북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이어 샤를 8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까지 정복하려고 하였다. 미리 신성로마제국, 영국, 스페인 등과 우호적 조약을 맺어둔 루이는 1499년 7월 27000명의 군대(1만명의 기병과 5천명의 스위스 용병 포함)를 이탈리아로 파견하여, 공성전 끝에 10월 6일 밀라노를 정복하였다. 나폴리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피렌체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으므로, 1500년 6월 프랑스군은 피렌체를 지원하여 피사를 침공하였으나 피사인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후퇴하였다.
1500년 11월 루이는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와 나폴리 분할에 대한 협정에 합의하고, 밀라노에서 남쪽으로 진군했다. 연합한 프랑스와 스페인 군대는 1502년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고 지배했으나 분할에 대한 조건이 바뀌면서 의견차이가 생겼고, 루이 12세와 페르난도 2세는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스페인의 장군 코르도바는 1494년의 1차 전쟁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였던 스페인군을 개혁하였고 1503년 4월 체리뇰라 전투(Battle of Cerignola)와 12월 가릴리아노 전투(Battle of Garigliano)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였다. 결국 루이 12세는 나폴리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나폴리는 스페인 총독 코르도바 장군의 지배에 들어갔다.
3. 3. 캉브레 동맹 전쟁 (1508년-1516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1508년 12월 캉브레 동맹을 결성했다.[2] 이 동맹에는 프랑스, 교황령,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이 참가했다.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는 베네치아의 프리울리 공략에 분노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베네치아가 프랑스의 밀라노 지배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으며,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왕도 베네치아가 남부 이탈리아의 아드리아해 연안 도시들을 점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었다.
동맹군은 1509년 5월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 군대를 크게 격파했으나, 같은 해 9월 파도바 공성전에서는 베네치아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점령에 실패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대규모 용병군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되자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1510년, 교황 율리오 2세는 프랑스의 루이 12세를 베네치아 이상의 위협으로 여기게 되었고,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었다. 1511년 교황은 프랑스에 대한 신성 동맹을 선언하였고, 이 동맹에는 잉글랜드,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이 참가하면서 급속히 커졌다.
느무르 공작 가스통 드 푸아가 지휘하는 프랑스 군대는 1512년 라벤나 전투 (1512년)에서 스페인 군대에 승리했지만, 푸아가 전사하고 스위스가 밀라노를 점령하면서 프랑스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 밀라노를 점령한 스위스는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를 공작에 복위시켰다.
1513년 베네치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롬바르디아를 분할하는 데 동의했다. 루이 12세는 밀라노 침공을 시도했으나, 1513년 6월 노바라 전투 (1513년)에서 스위스 용병에게 패배했다.
1513년 2월 교황 율리오 2세가 사망한후, 레오 10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즉위 하였다.[2] 1515년 1월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죽고 프랑수아 1세 (프랑스)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였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을 이끌고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군을 격파하고 밀라노를 탈환했다. 이 전투 이후 교황 레오 10세와 스페인이 밀라노를 포기하면서 신성 동맹은 무너져 내렸다. 1516년 8월 누아용 조약 및 브뤼셀 조약에 의해 북 이탈리아 전체가 프랑스와 베네치아에 항복했다.
3. 4. 제3차 이탈리아 전쟁 (1521년-1526년)
1519년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면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영토에 둘러싸이게 되어 국가적 위협을 느꼈다.[27] 이에 프랑수아 1세 (프랑스)는 전쟁을 일으켰으나,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응하기 위해 레오 10세는 황제 편에 섰고, 잉글랜드의 헨리 8세도 참전하여 프랑스는 베네치아 공화국 외에 동맹이 없는 상황에 놓였다.[27]
카를 5세는 1521년 프랑스로부터 밀라노를 빼앗아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에게 돌려주었다. 프랑스군은 스페인의 아쿼버스 전술에 고전하며, 1522년 4월 비코카 전투에서 패배하여 롬바르디아를 상실했다. 이후 1524년 4월 세시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한후, 1524년 10월 프랑수아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롬바르디아를 침공하였지만,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서 완패하고 그 자신도 포로로 잡혔다.[27]
프랑스는 왕을 석방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대제와 동맹을 맺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28][29][30][31]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1526년 마드리드 조약을 통해 밀라노, 플랑드르, 부르고뉴를 모두 포기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3. 5. 코냐크 동맹 전쟁 (1526년-1530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1526년 5월 22일 코냐크 동맹을 결성했다.[8] 동맹에는 교황령, 프랑스 왕국[9], 잉글랜드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이 참여했다. 동맹군은 로디를 점령하는 등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제국군이 로마를 약탈하는 등[8] 전세가 역전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마드리드 조약을 파기하고 코냐크 동맹에 가담하였으나, 프랑스 군은 롬바르디아를 떠났다.[8] 캉브레 조약으로 프랑스는 동맹에서 이탈했고, 베네치아 역시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1529년에는 제1차 빈 포위전이 발발하기도 했다.
피렌체는 1529년 제국군에 포위되어 10개월간 농성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메디치 가문이 복귀했다.[8] 이는 피렌체 공화국의 종말과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의 통치 시작을 알렸다.
1530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에게 대관식을 거행했고, 이탈리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우위가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프랑스와의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프랑수아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와 동맹을 맺는 등[8]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3. 6. 제4차 이탈리아 전쟁 (1536년-1538년)
1535년 11월, 후계자 없이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사망하자 카를 5세는 그의 아들 펠리페를 밀라노 공작에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와 제노바, 아스티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며, 1536년 3월, 24,000명의 보병과 3,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프랑스군을 사보이아 공국으로 진군시켜 샹베리를 함락시키고, 4월에는 토리노를 점령했다. 그러나, 밀라노 점령에는 실패했다. 아스티의 친프랑스 세력은 황제군 주둔지를 축출했다.
이에 카를 5세는 프로방스를 침공, 엑상프로방스를 점령했으나, 프랑스군이 마르세유로 향하는 길을 막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아비뇽 공격도 포기한 채 스페인으로 퇴각했다.
카를 5세가 프로방스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피에몬테의 프랑스군은 남부 롬바르디아의 이탈리아 군사 귀족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노바로 향했다. 프랑수아 1세는 1536년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연말에 마르세유에 도착한 프랑스-오스만 연합 함대는 제노바를 위협했다. 그러나 제노바의 수비가 강화되어 프랑스군은 피에몬테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는 데 그쳤고, 바르바로스 하이렛딘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해군은 이탈리아 해안 도시를 공략했지만 프랑스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양면전쟁을 원치 않았던 카를 5세는 평화를 찾게 되었고, 1538년 6월 니스 조약으로 전쟁은 끝났다. 토리노는 프랑스에 남게 되었지만, 이탈리아의 지도에 중요한 변화는 없었다. 교황 바오로 3세의 중재로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후 교황령, 스페인,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몰타 기사단 등이 참여한 신성 동맹이 결성되어 오스만 해군을 격퇴하려 했으나, 1538년 9월 프레베자 해전에서 패배했다.
3. 7. 제5차 이탈리아 전쟁 (1542년-1546년)
1538년 휴전은 밀라노를 여전히 주장하는 프랑수아 1세와 마드리드 조약과 캉브레 조약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카를 5세 사이의 근본적인 긴장을 해소하지 못했다.[10] 1540년 카를 5세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를 밀라노 공작으로 임명하면서 프랑스로의 반환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붕괴되었다.[9][10] 1541년 카를 5세는 오스만 제국의 항구 알제리에 대한 재앙적인 공격을 감행했고, 이는 그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고 술레이만 1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재개하게 되었다.[10]
1541년 8월 21일 오스만 군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헝가리 부다(Buda) 점령했다.[32] 9월 8일 제노바에서 이 소식을 접한 카를 5세는 분노하며 복수를 위해 알제 원정을 추진하였다.[33] 원정준비가 지연되어 10월 중순이 넘어서자 안드레아 도리아는 출정을 반대했지만 카를 5세의 고집을 꺽을 수 없었다.[34] 악천후 속에 강행된 무리한 원정은 선박 침몰등 엄청난 피해속에 대실패로 끝났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를 꺽고 밀라노 공작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여[35] 오스만과 동맹을 맺은후 1542년 7월 선전포고를 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프랑수아 1세는 1542년 7월 12일 다시 한번 신성 로마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1542년-1546년 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했다.[10] 밀라노는 다시 한번 전쟁의 구실이 되었다.[9] 8월에 프랑스군은 스페인 국경의 페르피냥과 아르투아, 플랑드르, 그리고 1477년 이전 발루아 가문의 영지였던 룩셈부르크를 공격했다. 제국군의 저항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고, 이러한 공격의 대부분은 쉽게 격퇴되었다.
1543년 6월 오스만 해군 사령관 바르바로사 하이레딘은 함대를 이끌고 마르세유로 이동하여 프랑스 해군과 합동 작전을 펼쳤다.[36] 프랑스-오스만 함대는 1543년 8월 당시 카를 5세의 영지였던 니스를 점령하고 성을 공성전 끝에 함락시켰다. 하지만 방어를 푸는 데는 1달이 걸렸다.
기독교와 이슬람 군대가 기독교 도시를 공격하는 것은 충격적인 일로 여겨졌는데, 특히 프랑수아 1세가 바르바로사가 프랑스 항구 툴롱을 겨울 기지로 사용하도록 허용했을 때 더욱 그러했다.[11]
앙기앙 백작 프랑수아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1544년 4월 14일 세레솔레 전투에서 제국군을 패퇴시켰지만,[11] 롬바르디아의 다른 지역에서 진전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전략적 가치는 제한적이었다.[12] 6월 세라발레에서 알폰소 다발로스가 피렌체 망명자 피에로 스트로치가 이끄는 용병 부대를 앙기앙 백작과 합류하는 길에 패퇴시키면서 제국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1543년 헨리 8세는 카를 5세와 동맹을 맺고 플랑드르에서 그의 공세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프랑스 본토에서는 헨리 8세가 1544년 7월 14일 칼레에 상륙했고,[13] 이미 진군하고 있던 잉글랜드군과 합류하여 곧 부롱뉴 포위전이 7월 19일에 시작되었다. 9월 10일 영국군은 불로뉴를 함락시켰고, 제국군은 파리에서 60km 이내로 진격했다. 그러나 재정이 고갈되고 지중해의 오스만 해군의 강력함에 우려하여, 카를 5세는 9월 14일 프랑수아 1세와 크레피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1542년의 상황으로 복귀시켰다. 이 합의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1546년까지 계속하고 불로뉴를 점유한 헨리 8세는 제외되었다.[14]
1545년 9월까지 전쟁은 완전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어느 나라도 병력과 자금 부족에 시달렸고,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실패했다.[15] 결국, 끝까지 버틴 헨리 8세도 꺾이고, 1546년 6월 7일, 아르드르 조약이 프랑스 대표와 잉글랜드 대표 사이에 서명되었다.[16]
3. 8. 제6차 이탈리아 전쟁 (1551년-1559년)
프랑스의 앙리 2세는 합스부르크를 제치고 유럽의 정치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자 1551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9] 로렌에 대한 초기 공격이 성공했지만, 1554년 8월 2일 마르차노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패배했다.[37] 1556년 카를 5세의 은퇴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페르디난트 1세로 분열되었다.[17]
전쟁의 초점은 플랑드르로 이동했고, 펠리페 2세는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공작과 연합해 1557년 8월 10일 생캉탱에서 프랑스군을 패배시켰다.[18] 1557년 잉글랜드가 참전한 가운데, 프랑스는 1558년 1월 칼레를 점령했다.[19] 프랑스 군대는 스페인 소유의 저지대를 약탈했다.
앙리 2세는 국내 문제로 1559년 4월 3일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고,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으며 사보이아 공국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에게 반환했다.[21]
4. 영향과 충격
이탈리아 전쟁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559년 전쟁이 끝난 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은 프랑스를 꺾고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했다.[3] 반면 이탈리아의 국가들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2류 세력으로 전락하거나 몰락했다.[4] 이탈리아 반도는 대부분 "외국 지배 시대"라고 불리는 상황에 놓이며 르네상스 시대의 선진국에서 정치·사회적으로 뒤처진 상태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세력 균형은 크게 변화하였다. 1494년경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세력이 확립되자,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이 반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 주변에 "합스부르크 고리"를 형성했다. 이는 샤를 5세의 광대한 상속으로 이어졌다.[3] 마지막 이탈리아 전쟁은 샤를 5세의 퇴위 이후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사이에 합스부르크 제국이 분할되면서 끝났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이탈리아 남부, 남아메리카의 왕국들을 상속받았고, 페르디난트 1세는 독일에서 이탈리아 북부까지 이어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와 밀라노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스페인 국왕과 인적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샤를 5세 제국의 분할과 함께 칼레 해협과 세 주교령의 함락은 프랑스에게 긍정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합스부르크가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를 희생하여 이탈리아에서 탁월한 지위를 확보했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세력에 대한 반대를 종식하고 이탈리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해야 했다. 앙리 2세는 사보이아 공국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공작에게, 코르시카를 제노바 공화국에게 반환했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에게 이탈리아 전쟁의 결론은 혼합된 결과로 여겨진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탈리아의 약 절반은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았다. 이탈리아 남부 전체(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니아)와 밀라노 공국이 이에 해당한다. 나머지 절반은 독립을 유지했지만, 북부는 신성 로마 제국 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형식적인 봉토로 구성되었다.[4] 교황청은 중부 이탈리아에서 바로크 문화 및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며 중요한 세력으로 남았다. 전쟁 중 중단되었던 트리엔트 공의회는 평화 조약에 따라 다시 소집되어 1563년에 종결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앙리 2세가 평화 축하 마상 창시합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40] 그의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곧 사망했고, 1562년 위그노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랑스는 혼란에 빠졌다.[40]
사보이아 공국을 돌려받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공작은 1561년 공국의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바꾸었고, 1563년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천도하였다. 이를 통해 사보이아 가문은 이탈리아인으로 정체성을 확립했고, 300년 뒤 이탈리아 통일을 이루는 사르데냐 왕국의 전신이 되었다.
이탈리아 전쟁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1495년에 계획했던 "그란 카발로" 기마상은 청동 70톤이 소요될 예정이었으나, 준비된 청동은 밀라노 방어를 위한 무기 제조에 사용되었다.[22] 이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거처를 옮겨 앙부아즈 성 근처 끌로 뤼세 성에서 말년을 보냈다.[38][39]
이탈리아 전쟁은 군사 기술과 전술의 큰 발전을 가져왔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이탈리아 전쟁을 중세와 근세의 분기점으로 보기도 한다.[25]
5. 무기와 군대
이탈리아 전쟁은 군사 기술과 전술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보병, 기병, 포병의 발전과 제병 연합 부대 전술이 등장했으며, 축성술의 발전도 이루어졌다.
보병은 이탈리아 전쟁 기간 큰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 파이크(pike)와 핼버드(halberd)를 휘두르던 군대는 진화해 아르케부스(arquebusiers), 파이크맨(pikemen)과 기타 군대로 더 다루기 쉬운 부대로 정리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s)와 스위스 용병(Swiss mercenaries)이 전장을 좌우했으나, 1521년 이탈리아 전쟁부터는 밀집된 소화기(firearms)의 힘이 충분히 입증되면서 모든 보병 대형의 기초로 채용되게 되었다.
중장 기병(Heavy cavalry)은 이탈리아 전쟁의 전장에서 중요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프랑스 장다르메(gendarmes)는 일반적으로 성공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탈리아 전쟁에서 포병, 특히 야전 포병대(Field artillery)는 일급 군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샤를 8세는 이탈리아 침공 기간 이동할 수 있는 공성 수레-캘버린(culverins)과 사석포(bombards)를 실은 사륜거-를 충실히 준비해 와서 적의 견고한 성 앞에 도착해 곧바로 전개 배치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전쟁 기간 많은 전투가 공성전으로 시간을 보냈고, 연속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한 군대에 대항해 축성술의 수준도 올라가면서 여러 기법이 채용되었다. 새로운 발전으로 성채에서 보루(bastions)가 분리되어 포병대의 포격에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6. 역사 문헌
이탈리아 전쟁은 참전자들의 방대한 당대 기록을 접할 수 있는 최초의 주요 분쟁 중 하나이다. 이는 교양 있고, 종종 매우 훌륭한 교육을 받은 지휘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근대 인쇄술의 발명 또한 이 전쟁에 대한 기록 보존에 큰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 전쟁의 초기 부분을 다룬 주요 동시대 문헌으로는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의 《이탈리아의 역사(Storia d'Italia)》가 있다. 이 책은 귀차르디니가 교황청 업무에 접근할 수 있었던 덕분에 유리한 입장에서 저술되었다. 당시 주요 역사가로는 프란체스코 기치아르디니와 파올로 사르피가 있다.
그 외의 문헌으로는 다음이 있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피렌체사』(1512년, 피렌체)
- 윌리엄 셰익스피어 『헨리 8세』(1612년 - 1613년, 영국)
- 빅토르 위고 『왕은 즐긴다』(1832년, 프랑스)
- 알렉상드르 뒤마 『볼지아 가문의 풍운록』(1839년, 프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농민 전쟁』(1850년, 독일)
- 조지 엘리엇 『로몰라』(1862년, 영국)
- 서머싯 몸 『옛날과 지금』(1946년, 영국)
- 시오노 나나미 『신의 대리인』(1972년, 일본)
- 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의 여인들』
- 시오노 나나미 『체사레 보르자 또는 우아한 냉혹함』
- 시오노 나나미 『로드스 섬 공방기』(1985년, 일본)
- 시오노 나나미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피렌체 존망』(1987년, 일본)
참조
[1]
웹사이트
Alessandro VI papa nell'Enciclopedia Treccani
https://www.treccani[...]
2023-05-25
[2]
웹사이트
Treaty of Noyon, 13 August 1516
http://www.historyof[...]
2022-01-21
[3]
서적
The Book of Dates; Or, Treasury of Universal Reference: ... New and Revised Edition
https://books.google[...]
[4]
서적
The Italian Wars 1494-1559: War, State and Society in Early Modern Europ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4-06-11
[5]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2-12
[6]
서적
Peace Treaties and International Law in European History: From the Late Middle Ages to World War One
[7]
서적
Europe and England in the Sixteenth Century
[8]
서적
The Italian Wars: 1494–1559
[9]
서적
France: A Modern History
[10]
서적
The Italian Wars: 1494–1559
[11]
서적
The Italian Wars: 1494–1559
[12]
서적
Renaissance Warrior
[13]
서적
England Under the Tudors
[14]
서적
Emperor Charles V
[15]
서적
Renaissance Warrior
[16]
서적
Letters & Papers
[17]
서적
France: A Modern History
[18]
서적
The Italian Wars: 1494–1559
[19]
서적
The Italian Wars: 1494–1559
[20]
서적
Europe Divided: 1559–1598
HarperCollins
[21]
서적
The Italian Wars: 1494–1559
[22]
서적
Leonardo da Vinci
[23]
기타
[24]
서적
The Complete Paintings of Leonardo da Vinci
[25]
서적
War Made New: Technology, Warfare, and the Course of History, 1500 to Today
Penguin Group Inc.
[26]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27]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
2005-12-10
[28]
서적
술레이만
시공사
[29]
서적
100문 100답 세계사 산책
백산서당
[30]
서적
The Italian Wars: 1494–1559
[31]
기타
[32]
기타
[33]
서적
L'Alliance Impie
Editions du Felin
[34]
서적
해적의 세계사
AK커뮤니케이션즈
[35]
서적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도서출판 한길사
[36]
서적
해적의 세계사
AK커뮤니케이션즈
[37]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38]
서적
유럽인 이야기 1
휴머니스트
[39]
백과사전
François I
Robert Appleton Company
2007-10-04
[40]
백과사전
앙리 2세 [Henri II]
두산백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