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넨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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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그넨티우스는 갈리아 아미앵 출신으로, 황실 근위대 코메스였다. 350년 오텬에서 아우구스투스로 추대된 후, 콘스탄스를 살해하고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를 장악했다. 그는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와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353년 자살했다. 그의 종교적 신념은 논쟁의 대상이며, 기독교와 이교 사이에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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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 로마 황제
로마 황제는 로마 제국의 통치자를 지칭하며,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27년 최고 권력자로 인정받으며 시작되었고, 공화정 시대 직책의 권한을 집중시켜 절대 권력을 행사했으며, 명확한 계승 체계 부재로 권력 투쟁이 잦았으나, 서로마 제국 멸망 후에도 동로마 제국은 존속했다. - 로마 - 오스티아
오스티아는 고대 로마의 항구 도시였던 오스티아 안티카 유적지 근처에 1884년 건설되어 로마 시민들의 해변 휴양지로 발전했으며, 현재는 로마와 연결되는 교통망을 갖춘 관광 명소이다. - 고대 로마 사람 -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는 로마 공화정 말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연인이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로,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가문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 활동한 귀족 여성이다. - 고대 로마 사람 - 트리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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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넨티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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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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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그누스 마그넨티우스 |
출생 | 기원후 303년경 |
출생지 | 사마로브리바, 갈리아 |
사망 | 기원후 353년 8월 10일 (약 50세) |
사망지 | 루그두눔 (리옹), 갈리아 |
배우자 | 유스티나 |
자녀 | 이름 미상의 딸 |
종교 | 논쟁 중; 아래 참조 |
통치 정보 | |
직위 | 서방의 로마 황제 (동방에서는 인정받지 못함) |
재위 기간 | 기원후 350년 1월 18일 – 353년 8월 10일 |
이전 통치자 | 콘스탄스 |
경쟁 통치자 | 베트라니오 (350년), 네포티아누스 (350년) |
다음 통치자 | 콘스탄티우스 2세 |
2. 초기 생애와 즉위
마그넨티우스는 갈리아의 아미앵에서 태어났으며,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크족 어머니를 두었다고 전해진다.[1]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의 출생 배경이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선전을 위해 과장되거나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2]
그는 황실 수행 부대인 '프로텍토레스'에서 복무했고, 황실 근위대인 헤르쿨리아니와 요비아니의 코메스로 진급했다.[3] 마그넨티우스는 자신의 직무를 잘 수행하여 마르켈리누스를 포함한 다른 중요한 궁정 관리들의 지지를 얻었다.[4]
이후 궁정 관리들은 콘스탄스 1세를 몰아내고 마그넨티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2. 1. 콘스탄스 1세 살해
마그넨티우스는 350년까지 인기가 없어진 콘스탄스 1세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스 1세는 방탕하고 무능하며 동성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1]350년 1월 18일, 오텬에서 열린 만찬에서 마그넨티우스는 황제를 상징하는 자주색 토가를 입고 나타나 황제 즉위를 선언했다. 만찬 참석자들은 그를 아우구스투스로 추대했다.
마그넨티우스는 도시 경비대에게 뇌물을 주어 충성을 확보하고, 오텬 주민들이 소식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도시를 봉쇄했다. 당시 피레네 산맥 근처에서 사냥 중이던 콘스탄스 1세는 페르피냥 근처의 헬레나에서 마그넨티우스가 보낸 병력에게 살해되었다.[1] 조시무스는 이 병력을 가이소가 이끌었으며, 351년 그의 집정관 임명은 이 행위에 대한 보상이었다고 주장한다.
3. 찬탈자
마그넨티우스는 즉위 직후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속주의 충성을 얻었고, 곧바로 이탈리아를 장악하려 했다. 그는 즉위 한 달 안에 이탈리아를 장악하여 파비우스 티티아누스를 도시 장관에 임명하여 로마를 통치하게 했다.[1] 또한 아프리카도 빠르게 장악하여 일리리아를 제외한 콘스탄스의 이전 영토를 모두 차지했다. (일리리아는 곧 베트라니오의 지배를 받게 된다).
3. 1. 정통성 확보 노력
마그넨티우스의 초기 통치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특징지어진다.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혈연 관계가 없었던 마그넨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증손녀일 가능성이 있는 유스티나와 결혼했다.[1] (유스티나는 훗날 발렌티니아누스의 아내가 된다). 마그넨티우스는 스스로를 해방자로 묘사하려 했고, '로마 세계의 해방자'와 같은 문구가 새겨진 동전을 주조했다.[1][2]
마그넨티우스는 콘스탄티우스와 외교 정책을 펼쳐 황제가 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즉위 후 처음 6개월 동안 콘스탄티우스를 자신의 상사로 칭하고 그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했다.[1]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게 호소했지만, 아타나시우스는 결국 콘스탄티우스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콘스탄스가 이탈리아에서 이교 제사에 대한 일부 제재를 철회했는데, 이는 부유한 이탈리아 이교도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소 서투른 정치적 책략이었고, 마그넨티우스는 스스로 이교도라는 평판을 얻었다.[1][3]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그넨티우스는 정치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콘스탄티우스는 자신의 형제를 살해한 자를 정당화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선례를 세우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서쪽으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이탈리아에서 마그넨티우스의 로마 지배는 불안정했고, 콘스탄티누스의 조카 율리우스 네포티아누스는 도시를 점령하고 27일 동안 유지했다. 마그넨티우스는 마르켈리누스를 ''magister officiorum''으로 승진시켜 도시를 탈환하게 했다.[2] 일리리아에서는 베트라니오가 350년 3월 1일 콘스탄티우스의 누이 콘스탄티나의 지지를 받아 황제로 추대되었다.[2][1] 베트라니오는 공개적으로 마그넨티우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많은 현대 학자들은 베트라니오가 처음부터 콘스탄티우스를 위해 일했으며, 콘스탄티우스가 서쪽으로 진군할 수 있을 때까지 마그넨티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한다.[1]
마그넨티우스의 통치가 폭정적이거나 부당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황제 율리아누스를 위한 장례 연설에서 웅변가 리바니우스는 마그넨티우스가 "법에 따라 [제국을] 통치했다"고 인정한다. 이는 그가 브리타니아와 히스파니아 속주를 신속하게 확보한 것과 함께 그의 행정이 비교적 유능했음을 나타낼 수 있다.[4]
3. 2. 이교도 유화 정책
마그넨티우스는 부유한 이탈리아 이교도들의 지지를 얻고자 콘스탄스가 이탈리아에서 이교 제사에 대해 내렸던 일부 제재 조치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서투른 정치적 책략으로 평가받았으며, 마그넨티우스는 이교도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1]분류:4세기 기독교
분류:4세기 로마 제국 사람
분류:로마 제국의 찬탈자
분류:353년 죽음
3. 3. 네포티아누스의 반란 진압
율리우스 네포티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조카로, 로마에서 반란을 일으켜 27일 동안 도시를 점령하여 마그넨티우스의 로마 지배가 불안정해졌다. 마그넨티우스는 마르켈리누스를 ''magister officiorum''으로 승진시켜 도시를 탈환하도록 파견했다.4. 내전
350년 여름,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마그넨티우스 사이의 전쟁은 불가피해졌다.[1] 마그넨티우스는 이미 봄에 동쪽으로 이동했고, 갈리아를 통제하기 위해 그의 형제 데켄티우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했다.[2]
콘스탄티우스와 마그넨티우스는 351년 초까지 몇 달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콘스탄티우스는 마그넨티우스에게 갈리아 지배권을 제안했지만, 마그넨티우스는 이를 거부했다.
4. 1. 베트라니오의 등장과 몰락
350년 여름, 콘스탄티우스와 마그넨티우스 사이의 전쟁은 불가피해졌다.[1] 마그넨티우스는 이미 봄에 동쪽으로 이동했고, 부재 중 갈리아를 통제하기 위해 그의 형제 데켄티우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했다.[2] 동쪽에서 콘스탄티우스는 350년 대부분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350년 가을, 콘스탄티우스는 니시비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포위를 성공적으로 풀고 사산 제국과 명목상의 평화를 맺었다.[3][4]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하고 동부 군단의 지휘를 루킬리아누스에게 맡긴 콘스탄티우스는 서쪽으로 이동했다. 350년 12월 25일, 그는 일리리아에서 베트라니오의 사임을 받아들였다.4. 2. 무르사 전투 (351년)
350년 여름,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마그넨티우스 사이의 전쟁은 불가피해졌다.[1] 마그넨티우스는 이미 봄에 동쪽으로 이동했고, 갈리아를 통제하기 위해 그의 형제 데켄티우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했다.[2] 콘스탄티우스는 350년 대부분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350년 가을, 니시비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포위를 성공적으로 풀고 사산 제국과 명목상의 평화를 맺었다.[3][4]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하고 동부 군단의 지휘를 루킬리아누스에게 맡긴 콘스탄티우스는 서쪽으로 이동했다. 350년 12월 25일, 일리리아에서 베트라니오의 사임을 받아들였다.콘스탄티우스와 마그넨티우스는 351년 초까지 몇 달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콘스탄티우스는 마그넨티우스에게 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제안했지만 마그넨티우스는 이를 거부했다. 마그넨티우스의 군대는 그를 버리고 있었을 수 있는데, 그는 전투를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전투 전날 밤이나 그 이전에 실바누스가 콘스탄티우스에게로 망명했다. 마그넨티우스의 군대는 무르사 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 후, 콘스탄티우스의 군대에 접근했고, 무르사 마요르 전투가 벌어졌다. 콘스탄티우스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에서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었다. 5만 명 이상이 사망한것으로 추정된다. 전투 현장을 본 콘스탄티우스는 눈물을 흘리며 로마가 야만족의 침략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에우트로피우스와 같은 동시대 평론가들은 로마 군인들의 낭비를 한탄하며, 외국 침략을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병력이 손실되었다고 지적했다.
5. 몰락
마그넨티우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를 지지하는 수비대가 이탈리아에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퇴각했다. 그는 서쪽 통로를 막았고, 콘스탄티우스는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북동쪽의 야만족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다.[2]
352년, 마그넨티우스는 콘스탄티우스와 평화를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간첩 행위를 우려한 콘스탄티우스에게 사절단을 보냈지만 접근이 차단되었다. 이후 주교 회의를 통해 콘스탄티우스 아래에서 군인으로 물러날 의사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이 제안 역시 거부되었다.[2] 라인강을 따라 있던 마그넨티우스의 군단은 대거 탈영하기 시작했고, 북부 갈리아와 스페인으로의 접근이 차단되어, 결국 그의 진영에서도 탈영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2]
353년, 마그넨티우스는 동부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콘스탄티우스의 ''카이사르''인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암살하려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사건은 조나라스의 기록에만 언급되어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한 구절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본다. 그러나 일부 현대 학자들은 조나라스의 기록에 연대기적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 사건의 역사적 진실성은 불확실하다.[2] 어쨌든 이 음모가 존재했다면, 갈루스가 내전을 생존했으므로 실패했을 것이다.
몬스 셀레우쿠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마그넨티우스는 루그두눔(리옹)으로 도망쳤다. 353년 8월 10일, 대부분의 자료에 따르면 그는 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2] 그의 형제 데켄티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목을 매달았다.[2]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이 진압된 후,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의 추종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는데, 이 수색에 ''프리미케리우스 노타리오룸''인 파울루스 카테나("사슬 파울루스")가 고용되었다.
5. 1. 몬스 셀레우쿠스 전투 (353년)
콘스탄티우스 2세를 지지하는 수비대가 이탈리아 진입을 막았기 때문에, 마그넨티우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퇴각했다.[2] 마그넨티우스는 서쪽 통로를 막았고, 콘스탄티우스는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북동쪽의 야만족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다.353년 콘스탄티우스는 알프스 산맥을 건넜고,[2] 마그넨티우스는 같은 해 7월 몬스 셀레우쿠스 전투에서 최후의 저항을 한 후, 루그두눔(리옹)으로 도망쳤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의 집이 콘스탄티우스의 군대에 포위되었고, 그는 그의 형제 데시데리우스를 공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353년 8월 10일에 그가 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
5. 2. 마그넨티우스의 죽음과 반란 진압
마그넨티우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퇴각했는데, 이는 콘스탄티우스 2세를 지지하는 수비대가 이탈리아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일 수 있다. 마그넨티우스는 서쪽 통로를 막았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북동쪽의 야만족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다.[2]
352년, 마그넨티우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와 평화를 중재하려다 실패했다. 마그넨티우스는 간첩 행위를 우려한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접근이 차단된 사절단을 보냈다. 그 후 마그넨티우스는 주교 회의를 보내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에서 군인으로 물러날 의사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2] 라인강을 따라 있던 마그넨티우스의 군단은 대거 탈영하기 시작했고, 북부 갈리아와 스페인으로의 접근이 차단되었으며, 결국 그의 진영에서도 탈영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2]
353년, 마그넨티우스는 동부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카이사르''인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암살하려 시도했을 수 있다. 이 사건은 조나라스의 기록에만 언급되어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한 구절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본다. 그러나 일부 현대 학자들은 조나라스의 기록에 연대기적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이 사건의 역사적 진실성은 불확실하다.[2] 어쨌든 이 음모가 존재했다면, 갈루스가 내전을 생존했으므로 실패했을 것이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3년에 알프스 산맥을 건넜고,[2] 마그넨티우스는 같은 해 7월 몬스 셀레우쿠스 전투에서 최후의 저항을 했고, 이후 루그두눔(리옹)으로 도망쳤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의 집이 콘스탄티우스 2세의 군대에 포위되었고, 그는 그의 형제 데시데리우스를 공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료에 따르면, 353년 8월 10일에 그는 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2] 그의 형제 데켄티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목을 매달았다.[2]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이 진압된 후,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의 추종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 수색에 고용한 가장 악명 높은 요원은 ''프리미케리우스 노타리오룸''인 파울루스 카테나("사슬 파울루스")였다.
6. 종교
마그넨티우스의 종교적 신념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다. 많은 학자들은 마그넨티우스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기독교인이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일부 자료에서는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이교 부흥이 있었다고 시사한다.
6. 1. 기독교인 vs 이교도
많은 학자들이 마그넨티우스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기독교인이었다고 주장한다.[1],[2] 그러나 일부 자료에서는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이교 부흥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비문 증거에 따르면 그는 이교도들이 밤에 제물을 바치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는 콘스탄스가 금지했던 행위였다.[1] 필로스토르기우스는 마그넨티우스를 악마 숭배자로 묘사하고, 조나라스는 그가 흑마술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3] 화폐학적으로, 마그넨티우스의 주화는 그리스도 문장이 새겨진 일련의 주화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이교적이거나 기독교적이지 않다.[3] 이 기호는 기독교와 독점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당시의 태도를 반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맥멀렌은 마그넨티우스가 이교도였으며, 4세기 중반까지 키-로(Chi-Rho)가 기독교적인 색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4]참조
[1]
웹사이트
Constans I (337–350 A.D.)
http://www.roman-emp[...]
[2]
웹사이트
Cuirassed bust of diademed emperor (‘Magnentius’). Vienna (Viennensis). Mid-fourth century. LSA-577
http://laststatues.c[...]
[3]
서적
マグネンティウス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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