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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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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4세기 로마 제국의 역사가로, 325년에서 400년 사이에 활동했다. 그는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군 장교로 복무하며 콘스탄티우스 2세와 율리아누스 황제의 군대에서 활약했다. 암미아누스는 '레스 게스타에'라는 라틴어 역사서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네르바 황제 즉위부터 발렌스 황제 사망까지의 로마 제국 역사를 다루며, 4세기 로마 제국에 대한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그의 저서는 명료하고 객관적인 서술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문학적 재능 부족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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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로마자 표기Ammianus Marcellinus
출생기원전 330년경
출생지로마 시리아, 아마도 암미아 (아미운, 레바논 현대 지역)
사망기원전 391년에서 400년 사이
국적로마
직업역사가 및 군인
주요 작품사적
가족
자녀(정보 없음)

2. 생애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로마 제국 후기의 중요한 역사가이자 군인이었다. 그는 325년에서 330년 사이 제국 동부의 그리스어 사용 지역, 아마도 시리아나 페니키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9][10][11] 그는 스스로를 "전직 군인이자 그리스인"(miles quondam et Graecus|밀레스 쿠온담 에트 그라이쿠스la)이라고 칭했으며,[1] 그리스어가 모국어였고 라틴어에도 능통했다.

젊은 시절 군에 입대하여 프라이토리안 근위대와 엘리트 부대인 프로텍토레스 도메스티치에서 복무하며 군 경력을 쌓았다.[2] 콘스탄티우스 2세와 율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장교로 복무하며 갈리아와 동방 전선 등 제국 여러 지역에서 군사 작전을 직접 경험했다. 특히 우르시키누스 장군의 참모로 활동하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참여했고, 359년 아미다 포위전에서는 극적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깊이 존경했던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에도 참여했으며, 율리아누스 사후에는 요비아누스 황제와 함께 후퇴했다.

군에서 은퇴한 후에는 로마에 정착하여, 자신의 경험과 타키투스의 역사 서술을 이어받아 로마 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Res Gestae|레스 게스타이la(업적록)를 집필했다. 이 역사서는 본래 네르바 황제 시대부터 378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까지 다루려 했으나, 현재는 353년부터 378년까지의 기록만 남아있다.[12] 그는 이교도였지만 기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종교 자체보다는 인간의 행동과 도덕성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략 392년에서 400년 사이로 추정된다.

2. 1. 출생 및 초기 경력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흉상(시리아 출토)


암미아누스는 325년에서 330년 사이,[9][10] 로마 제국 동부의 그리스어 사용 지역에서 태어났다.[11] 출생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시리아 또는 페니키아 지역으로 추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안티오크 출신으로 보기도 하지만 논란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인"(Graecus|그라이쿠스la)이라고 칭했으며, 귀족 그리스인 가문 출신으로 여겨진다. 그의 모국어는 그리스어였고, 제2언어로 라틴어를 배웠으며 시리아어에도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12]

그는 젊은 시절 군에 입대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 치세에 니시비스(현재의 누사이빈)의 총독이자 마기스터 밀리툼인 우르시키누스의 휘하에서 복무했다. 그는 엘리트 부대인 ''프로텍토레스 도메스티치''(근위대)에 소속되었는데, 이는 그가 중산층 이상의 배경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암미아누스는 우르시키누스 휘하에서 동방 전선에서 두 차례 복무했다.

이후 우르시키누스가 갈리아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한 실바누스를 토벌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소환되었을 때, 암미아누스도 그를 따라갔다. 실바누스 제거 후, 그는 우르시키누스의 참모로 갈리아에 머물며 율리아누스가 부제(카이사르)로 임명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359년 아미다 포위 공격 당시의 성벽. 암미아누스는 이 도시가 함락되기 직전까지 머물렀다.


359년,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2세가 침공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우르시키누스를 다시 동방으로 보냈다. 암미아누스도 우르시키누스와 함께 동방으로 돌아가 참모로 활동했다. 그는 니시비스 근처에서 페르시아 정찰대를 발견하여 우르시키누스에게 경고했으며,[3] 코르두에네로 파견되어 페르시아 본대의 위치를 성공적으로 파악해 보고하기도 했다.[4]

이후 암미아누스는 유프라테스강의 다리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우르시키누스를 수행하던 중 페르시아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격렬한 전투 끝에 로마군은 흩어졌고, 암미아누스는 부상당한 동료와 함께 간신히 아미다(현재의 디야르바키르)로 후퇴했다.[5] 페르시아군은 곧 아미다를 포위했고, 73일간의 공방전 끝에 도시는 함락되었다. 암미아누스는 함락 직전 극적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안티오크의 청동 주화에 새겨진 율리아누스의 초상화


우르시키누스가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해임되면서 암미아누스도 잠시 군을 떠났던 것으로 보이나,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다시 군에 복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율리아누스를 깊이 존경했으며, 그의 휘하에서 알레만니족과의 전투 및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다. 율리아누스가 전사한 후에는 새로운 황제 요비아누스를 따라 안티오크까지 후퇴했다.

이후 군에서 은퇴한 암미아누스는 372년경 안티오크에 거주하며 발렌스 황제의 후계자를 점치려 했다는 혐의로 테오도루스 등이 처형되는 사건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는 380년경 로마에 정착하여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서 『레스 게스타이』(Res Gestae, 업적록) 집필을 시작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략 392년에서 400년 사이로 추정된다.

2. 2. 콘스탄티우스 2세 치하의 군 복무



암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동방의 황제였을 때 어린 나이에 군대에 입대하여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프라이토리안 근위대에서 군 장교로 복무했으며[2], 이후 엘리트 부대인 ''프로텍토레스 도메스티치''(근위대)에 편입되었다. 이는 그가 중산층 이상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니시비스의 총독이자 ''마기스터 밀리툼''이었던 우르시키누스의 휘하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암미아누스는 우르시키누스 아래에서 두 차례 동방에서의 군사 작전을 경험했다.

이후 그는 우르시키누스와 함께 이탈리아로 갔다가 갈리아로 파견되었다. 이 원정의 목적은 스스로 황제를 선포한 장교 실바누스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우르시키누스는 실바누스를 암살하여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이후 우르시키누스는 갈리아에 남아 율리아누스를 갈리아, 스페인, 브리튼카이사르로 임명하는 과정을 도왔다. 암미아누스는 갈리아에서 우르시키누스의 참모로 복무하는 동안 율리아누스를 처음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359년, 콘스탄티우스 2세는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2세가 이끄는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우르시키누스를 다시 동방으로 보냈다. 암미아누스 역시 그의 지휘관을 따라 동방으로 돌아와 참모로 복무했다. 당시 동방의 ''마기스터 페디툼''이었던 사비니아누스는 우르시키누스보다 경험이 부족했으나 그의 상관이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이로 인해 우르시키누스가 지휘하는 메소포타미아오스로에네의 국경 수비대(리미타네이)와 사비니아누스의 야전군(코미타투스) 사이의 협력이 원활하지 못했다.

니시비스 근처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암미아누스는 우르시키누스를 생포하려던 페르시아 순찰대를 발견하고 제때 지휘관에게 경고하여 위기를 모면했다.[3] 페르시아 군대의 주력 부대 위치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은 암미아누스는 코르두에네로 파견되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우르시키누스에게 보고했다.[4]

코르두에네에서의 임무 후, 암미아누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는 다리를 파괴하라는 임무를 받고 우르시키누스와 함께 아미다의 본부를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아미다를 기습하려던 페르시아 선봉대와 마주쳤고, 격렬한 기병전 끝에 로마군은 흩어졌다. 우르시키누스는 멜리테네로 피신했고, 암미아누스는 부상당한 동료와 함께 간신히 아미다로 돌아왔다.[5] 페르시아군은 곧 아미다를 포위했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도시는 함락되었다. 암미아누스는 함락 직전 극적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아미다 함락의 책임을 물어 우르시키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군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이 시기에 암미아누스 역시 군에서 잠시 물러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율리아누스 치하에서 다시 복무한 기록이 있어, 그의 군 경력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2. 3. 율리아누스 황제 치하의 군 복무

암미아누스는 갈리아에서 우르시키누스의 참모로 복무하는 동안 율리아누스를 처음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우르시키누스가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군 지위에서 해임되었을 때, 암미아누스도 군에서 은퇴한 것으로 보이지만,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대한 현대 학문의 재평가는 그가 계속 복무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암미아누스는 율리아누스를 열렬히 칭찬하고 사모했으며, 일부 기록에 따르면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그의 지위도 회복되었다고 한다. 그는 율리아누스 휘하에서 알레만니과 사산조에 대항한 원정에 참여했다.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원정 중 사망한 후, 암미아누스는 새로운 황제 요비아누스를 따라 안티오키아까지 후퇴했다. 암미아누스는 율리아누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가 이교도 희생 제의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기독교인들을 교사직에서 효과적으로 배제한 칙령을 내린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2. 4. 은퇴 이후

율리아누스의 죽음 이후, 암미아누스는 새로운 황제 요비아누스의 군대를 따라 안티오크까지 후퇴했다. 그 후 군대에서 은퇴하여 380년경부터 로마에 거주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372년경 안티오크에 거주할 당시, 점술에 의해 발렌스 황제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는 이유로 테오도루스와 다른 여러 사람들이 고문을 받고 잔혹하게 처벌받는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고 기록했다.

로마에 정착한 암미아누스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서 『Res Gestae|레스 게스타이la』(업적록) 집필을 시작했다. 이 책은 타키투스의 『역사』를 계승하여 네르바 황제 시대부터 378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까지의 기간을 다루려 했으나, 현재 전해지는 부분은 353년부터 378년까지의 기록이다.[1] 그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392년에서 400년 사이로 추정한다.

현대 학계는 암미아누스를 기독교를 관용적으로 대하는 이교도로 평가한다. 그는 기독교 자체를 "단순하고 명료하며, 오직 정의롭고 온화한 것만을 요구하는" 종교로 묘사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행동, 특히 아리우스 논쟁과 같은 장기간의 종파적 다툼과 그로 인한 폭력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어떤 야생 동물도 기독교 종파들이 서로에게 하는 것만큼 인간에게 적대적이지 않다"고 쓰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존경했던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해서도 이교 제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기독교인들을 교사직에서 배제한 칙령 등은 비판적으로 보았다.

3. 《역사》(Res Gestae)

1533년판 ''Res gestae'' 27-31권 초판의 제목 페이지. 현존하는 책들 중 완전한 판본으로는 최초이다.


''역사''(''Res Gestae'' 또는 ''Rerum gestarum libri XXXI'')는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가 380년대 로마에 머물며 라틴어로 저술한 로마 제국의 역사서이다. 이 책은 네르바 황제의 즉위(96년)부터 시작하여 발렌스 황제가 아드리아노플 전투(378년)에서 사망할 때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어, 사실상 타키투스가 저술한 역사서의 후속편 성격을 띤다.[6] 암미아누스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움을 제국의 영광으로 칭찬한 기록(22.16.12)을 볼 때, 이 책은 세라페움이 파괴된 391년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총 31권으로 구성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앞부분 13권은 소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18권은 갈루스 황제 시기인 353년부터 아드리아노플 전투(378년)까지의 사건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현존하는 부분은 4세기 로마 제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1차 사료로 평가받으며, 동시대인이 직접 경험하고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명확하고 종합적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역사』는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에드워드 기번은 이 책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의 저술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했다. 그러나 다른 고대 역사가들처럼 암미아누스 역시 완벽하게 객관적이지만은 않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의 저술에는 개인적인 도덕관이나 종교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으며, 수사학적인 기교를 사용한 부분도 있어 내용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6] 책의 원본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사본 전승 과정에서 상당 부분 손상되었고, 초기 인쇄본들 역시 완전하지 못했다.

3. 1. 개요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380년대 로마에 거주하며 라틴어로 로마 제국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의 저작 『역사』(''Res gestae'', 또는 ''Rerum gestarum libri XXXI'')는 네르바 황제의 즉위(96년)부터 발렌스 황제가 아드리아노플 전투(378년)에서 사망할 때까지의 시기를 다루며, 이는 사실상 타키투스의 역사 서술을 이어가는 작업이었다.[6] 암미아누스는 그의 저술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움을 제국의 영광으로 칭찬했는데(22.16.12), 이를 근거로 그의 저술은 391년 세라페움이 파괴되기 전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는 원래 31권으로 구성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첫 13권은 소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현존하는 18권은 갈루스 황제의 죽음 전년인 353년부터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까지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며, 4세기 로마 제국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 책들은 당대인이 쓴 명확하고 종합적이며 비교적 공정한 기록으로 칭송받는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암미아누스를 "편견이나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문장으로 저자 자신의 시대를 정확하고 성실하게 기록한 안내자"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고대 역사가들처럼 암미아누스 역시 완벽하게 공정하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강한 도덕적, 종교적 편견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이교도였던 탓에 기독교도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보다는 이교도 황제 율리아누스에게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수사학에 능숙하여 때로는 화려한 문체를 구사했는데, 이로 인해 일부 내용의 사실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현대 연구자들은 『역사』에서 이 시대의 특징적인 과장 표현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공개 출판을 염두에 둔 서술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과장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암미아누스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타키투스단테 사이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작가"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7] 그의 문체는 다소 거칠고 과장된 표현이나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으며 사회 및 경제 문제를 탁월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로마 제국 내의 비(非)로마인들에 대해서는 티투스 리비우스타키투스보다 더 폭넓은 시야를 보여주며, 그가 직접 방문했던 여러 지역에 대한 묘사는 흥미롭다.

『역사』에서 암미아누스는 반복되는 외침(外侵)으로 인한 국내 체제의 피폐, 중산층의 경제적 몰락, 군 기강의 해이 등 붕괴해 가는 로마 제국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는 그의 사후 약 20년 뒤 발발한 고트 전쟁(376년~382년)으로 제국이 더욱 쇠퇴할 것을 예견하게 한다. 에리히 아우어바흐는 암미아누스를 뛰어난 표현력을 지닌 작가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스토아적이고 조감적인 문체가 암울한 현실과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더 무서운 느낌을 준다고 지적했다.[8]

그의 저서는 사본 전승 과정에서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 첫 13권이 분실된 것 외에도 나머지 18권 역시 많은 부분이 손상되고 라쿠나(탈자)가 많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사본의 모태가 된 것은 9세기 샤를마뉴 시대의 카롤링거 왕조 양식으로 작성된 바티칸 라틴어 1873(V) 사본으로, 이는 풀다에서 더 오래된 사본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또 다른 독립적인 텍스트 출처는 마르부르크 단편(M)인데, 이는 15세기에 다른 9세기 프랑크족 사본을 해체하여 그 일부만 남은 것이다. V와 M의 관계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으나, 1936년 R. P. 로빈슨이 V가 M에서 복사되었음을 증명했다.

초기 인쇄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초판은 1474년 로마에서 인쇄되었으나 26권까지만 포함되었다. 이후 볼로냐(1517년), 바젤(1518년) 등에서 판본이 나왔지만 불완전하거나 오류가 있었다. 암미아누스 역사의 마지막 5권까지 포함된 완전한 판본은 1533년 마리안젤로 아코르소가 편집하여 출판된 것이 처음이다. 최초의 현대적인 판본은 C.U. 클라크(베를린, 1910-1913년)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영어 번역본으로는 1609년 필레몬 홀랜드의 번역과 1862년 찰스 듀크 용의 번역 등이 있다.

3. 2. 구성 및 내용



암미아누스는 380년대 로마에 거주하며 라틴어로 로마 제국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의 저서 『역사』('''Res gestae''', 또는 '''Rerum gestarum libri XXXI''')는 네르바 황제의 즉위(96년)부터 발렌스 황제가 아드리아노플 전투(378년)에서 전사할 때까지의 기간을 다룬다. 이는 타키투스의 역사서[6]를 계승하려는 의도였다. 암미아누스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움을 제국의 영광으로 칭찬한 기록(22.16.12)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저술은 세라페움이 파괴된 391년 이전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는 원래 31권으로 구성되었으나, 첫 13권은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역사가 T. D. 바네스는 원본이 36권이었으며, 따라서 18권이 소실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갈루스 황제 시절인 353년부터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까지의 사건을 다루는 후반부 18권이다. 이 현존하는 부분은 4세기 로마 제국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동시대인이 직접 기록한 명확하고 종합적인 서술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암미아누스를 “편견이나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문장으로 저자 자신의 시대를 정확하고 성실하게 기록한 안내자”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다른 고대 역사가들처럼 암미아누스 역시 완벽하게 공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스스로 공정함을 표방했지만, 저술에는 강한 도덕적, 종교적 편견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이교도였던 그는 기독교도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보다는 이교도 황제 율리아누스에게 더 호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또한, 일부 초기 연구자들은 그의 문체가 문학적으로 부족하다고 비판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했으며, 이는 때때로 내용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대 연구자들은 그의 저술에서 당시의 특징적인 과장된 표현들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개 출판을 염두에 둔 저술이었기에 단순함보다는 화려한 서술이 필요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과장이 그의 역사서 가치를 크게 훼손하지는 않는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역사』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일부에서는 그를 “타키투스단테 사이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작가”[7]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의 문체는 다소 거칠고 과장되거나 모호한 부분도 있지만, 날카로운 비판 의식과 함께 당시의 사회 및 경제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특히 로마 제국 내의 비(非)로마인들에 대해서는 티투스 리비우스타키투스보다 더 폭넓은 시각을 보여주며, 그가 직접 방문했던 여러 지역에 대한 묘사는 매우 흥미롭다.

암미아누스는 『역사』를 통해 끊임없는 외부 침략으로 인한 제국 내부 체제의 피폐, 중산층의 경제적 몰락, 군 기강 해이 등 로마 제국이 점차 붕괴해 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는 그의 사후 벌어진 고트 전쟁(376년~382년)으로 인한 제국의 본격적인 쇠퇴를 예견하게 한다. 문학 비평가 에리히 아우어바흐[8]는 암미아누스를 뛰어난 표현력을 지닌 작가로 평가하며, 난해함을 제외하면 고대 최고의 문학가 중 한 명으로 꼽았다. 다만, 아우어바흐는 그의 문체가 타키투스처럼 조감적이면서도 스토아적인 면이 있어, 암울한 현실 묘사와 아름다운 문체가 어울리지 않고 어둠에 맞서는 빛이 부재하여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진다고 평하기도 했다.

『역사』의 원본 텍스트는 사본 전승 과정에서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 첫 13권이 완전히 사라진 것 외에도, 현존하는 18권 역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고 내용이 누락된 부분(라쿠나)도 많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사본의 원형이 되는 유일한 사본은 9세기 샤를마뉴 시대에 카롤링거 문체로 작성된 바티칸 라틴어 1873(V) 사본이다. 이 사본은 풀다 수도원에서 더 오래된 섬 지역(insular) 사본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암미아누스 텍스트에 대한 유일한 독립적인 증거는 마르부르크 단편(M)인데, 이는 15세기에 회계 장부 표지로 사용하기 위해 해체된 또 다른 9세기 프랑크족 사본의 일부이다. M 사본은 단 6장만이 남아있지만, 해체되기 전에 헤르스펠트 수도원장이 지기스문트 겔레니우스에게 빌려주었고, 겔레니우스는 이를 이용해 두 번째 프로벤 판(G)의 텍스트를 준비했다. V와 M 사본의 연대와 관계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으나, 1936년 R. P. 로빈슨이 V가 M에서 파생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다. L. D. 레이놀즈에 따르면, "M은 따라서 원형의 단편이며, 섬 지역의 원형 이전 사본의 징후가 분명하다."

초기 인쇄본의 편집 상태도 썩 좋지는 않았다. 『역사』의 '''초판'''은 1474년 로마에서 게오르크 자흐젤과 바르톨로메우스 골슈에 의해 인쇄되었으나, 26권 중간에서 내용이 끊겼다. 다음 판본인 볼로냐판(1517년)은 편집자가 1474년 판의 불완전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추측하여 내용을 보충하려 했기 때문에 오류가 많았다. 1474년 판은 첫 번째 프로벤 판(바젤, 1518년)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마침내 1533년에 이르러서야 실반누스 오트마르가 인쇄하고 마리안젤루스 아쿠르시우스가 편집하여 마지막 5권까지 포함된 완전한 판본이 출간될 수 있었다. 최초의 현대적인 비평 교정본은 C.U. 클라크(베를린, 1910-1913년)에 의해 제작되었다. 최초의 영어 번역은 1609년 필레몬 홀랜드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후 1862년 C.D. 용에 의해 다시 번역되었다.

3. 3. 평가

암미아누스의 저술 『역사』(Res gestae|레스 게스타이la)는 네르바 황제 즉위(96년)부터 발렌스 황제가 아드리아노플 전투(378년)에서 사망할 때까지의 로마 제국 역사를 다루며, 사실상 타키투스의 역사 서술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다.[6] 비록 원본 31권 중 앞의 13권이 소실되었지만, 현존하는 18권(353년~378년)은 4세기 로마 제국 역사에 대한 현대적 이해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사료로 여겨진다.

『역사』는 명료하고 포괄적이며 동시대인이 쓴 기록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암미아누스를 "정확하고 충실한 안내자로, 동시대인의 마음을 흔히 좌우하는 편견과 열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시대의 역사를 기록했다"고 높이 평가했다.[6] 오스트리아 역사가 에른스트 슈타인(Ernst Stein)은 암미아누스를 "타키투스단테 사이에 세상이 낳은 가장 위대한 문학적 천재"라고 칭송했다.[7] 문학 비평가 에리히 아우어바흐는 암미아누스의 뛰어난 표현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문체가 거칠고 때로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비판적 시각으로 사회·경제 문제를 훌륭하게 묘사했다고 평가했다.[8] 특히 로마 제국 내의 비로마인에 대해서는 리비우스타키투스보다 더 넓은 시야를 보여준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기번은 암미아누스의 문학적 재능 부족을 지적하며 "아미아누스의 조잡하고 식별력 없는 붓은 피비린내 나는 인물들을 지루하고 역겹도록 정확하게 그려냈다"고 비판했다. 또한 많은 고대 역사가들처럼 암미아누스 역시 공정성을 표방했음에도 강한 도덕적, 종교적 편견을 가졌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특히 이교도였던 그는 기독교도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보다 이교도 황제 율리아누스에게 더 호의적이었음이 분명하다.[6] 현대 연구자들은 그의 저술에 당시 수사학의 영향으로 과장된 표현이 포함되어 있어 일부 내용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다만 공개 발표를 염두에 둔 저술의 특성상 어느 정도 수사적 표현은 불가피했다는 시각도 있다.[6] 킴벌리 케이건(Kimberly Kagan)은 그의 전투 묘사가 병사들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하지만, 전투의 전체적인 전략이나 결과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암미아누스의 『역사』는 4세기 로마 제국의 정치, 사회, 군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1차 사료로 인정받는다. 그는 반복되는 외침으로 인한 제국 내부의 피폐, 중산층의 경제적 몰락, 군 기강 해이 등 로마 제국 쇠퇴의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기록했으며, 이는 그의 사후 고트 전쟁 등으로 현실화될 제국의 위기를 예견하게 한다.[8]

3. 4. 문체 및 특징

암미아누스의 『역사』(Res gestae)는 명료하고 시야가 넓은 저술로 평가받는다.[6]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암미아누스를 “편견이나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문장으로 저자 자신의 시대를 정확하고 성실하게 기록한 안내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현대 연구자들 역시 그의 저술이 당대인이 쓴 명확하고 종합적이며 일반적으로 공정한 사건 기록이라고 인정하지만, 동시에 이 시대의 특징적인 과장된 표현이나 저자의 강한 도덕적, 종교적 편견이 존재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암미아누스는 이교도였기 때문에 기독교도인 콘스탄티우스 2세보다는 이교도 황제 율리아누스에게 더 호의적인 시각을 보였다는 점이 분명하다.[6] 그럼에도 『역사』는 공개적인 출판을 염두에 둔 글이기에, 때로는 단순함보다 화려한 수사적 표현이 필요했을 수 있으며, 그 과장의 정도가 심각하지 않아 크게 문제 삼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6]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에 대해서는 초기 비판도 있었으나, 수사학에 능숙했다는 평가와 함께 “타키투스단테 사이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작가”라는 찬사도 존재한다.[7] 그의 문체는 다소 거칠고 과장되거나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7]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회 및 경제 문제를 예리하게 묘사했다는 강점을 지닌다.[7] 특히 로마 제국 내의 비로마 민족들에 대해서는 티투스 리비우스타키투스보다 더 폭넓은 관점을 보여주며,[7] 자신이 직접 방문했던 여러 지역에 대한 묘사는 매우 흥미롭다는 평가를 받는다.[7]

에리히 아우어바흐[8]는 암미아누스를 뛰어난 표현력을 지닌 작가로 보았으며, 그의 글이 난해하지만 않다면 고대 최고의 문학가 중 한 명으로 꼽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8] 다만, 타키투스와 유사하게 객관적이고 스토아적인 문체가 그가 묘사하는 암울한 현실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어둠에 맞서는 희망이나 빛이 부재하여 오히려 글 전체에 무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분석했다.[8]

암미아누스는 『역사』를 통해 계속되는 외침으로 인한 로마 내부 체제의 약화, 중산층의 경제적 붕괴, 군 기강 해이 등 제국이 점차 쇠락해가는 모습을 강조한다.[7] 이는 그가 사망한 지 약 20년 후에 발발한 고트 전쟁(376년~382년)과 그로 인한 제국의 본격적인 쇠퇴를 예견하는 듯한 서술로 읽힌다.[7]

3. 5. 종교관

암미아누스는 이교를 믿었던 인물로, 그의 종교관은 저서 『역사』(Res Gestae|레스 게스타이lat) 서술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현대 연구자들은 그가 기독교도였던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보다는 같은 이교도였던 율리아누스 황제에게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한다.[6] 이는 『역사』가 동시대의 다른 기록들처럼 과장된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암미아누스의 『역사』는 공개적인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쓰였기 때문에, 때로는 단순함보다는 화려한 서술을 우선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그의 종교적 입장에 따른 편향성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책 전체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할 정도는 아니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암미아누스를 "편견이나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문장으로 저자 자신의 시대를 정확하고 성실하게 기록한 안내자"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lassical Literature: Volume 2, Latin Literature, Part 1, The Early Republic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07-14
[2] 서적 Handbook to Life in Ancient Rome OUP USA 1998
[3] 서적 Res gestae
[4] 서적 Res gestae
[5] 서적 Res gestae
[6] 서적 年代記 岩波文庫
[7] 서적 Geschichte des spätrömischen Reiches Vienna 1928
[8] 서적 미메시스 筑摩書房 1994
[9] 서적 Illustrated Encyclopedia of the Classical World Harper and Row 1975
[10] 웹사이트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 Ammianus Marcellinus http://www.britannic[...]
[11] 학술논문 Ammianus Marcellinus's hometown
[12] 서적 The Eye of Comm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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