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마리아 1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리아 1세는 포르투갈의 여왕으로, 1777년부터 1816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다. 그녀는 리스본에서 태어나 조제 1세의 장녀로, 베이라 공주로 임명되었다. 1760년 삼촌 페드루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 1777년 즉위 후 폼발 후작을 해임하고 브라질 식민 정책을 펼쳤다. 1792년 정신 질환으로 인해 아들 주앙이 섭정하게 되었으며, 나폴레옹 전쟁 시기 브라질로 천도했다. 이후 브라질에서 사망했으며, 그녀의 유산은 브라질 독립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바르셀루스 공작 - 주앙 4세
    주앙 4세는 1640년 포르투갈 독립을 쟁취하고 스페인과의 복고 전쟁을 이끈 브라간사 공작 출신의 국왕으로, 외교적 군사적 성과와 더불어 음악가로서 문화 예술 발전에도 기여했으며 그의 딸은 잉글랜드 국왕과 결혼했다.
  • 브라질의 군주 - 이자베우 두 브라질 황태녀
    이자베우 두 브라질 황태녀는 브라질 제국의 황족이자 페드루 2세의 장녀로, 형제들의 요절로 황위 계승자가 되어 섭정 중 노예 폐지법에 서명했지만, 이 정책은 제정에 대한 반발을 일으켜 망명하게 되었다.
마리아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주세페 트로니가 그린 마리아 1세 초상화 (토리노, 1739-리스본, 1810)
주세페 트로니가 그린 마리아 1세 초상화, 1783년
전체 이름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사벨 조제파 안토니아 게르트루데스 리타 조아나
별칭경건왕 마리아
통치
즉위포르투갈 여왕
재위 기간1777년 2월 24일 – 1816년 3월 20일
즉위식1777년 5월 13일
선임자주제 1세
후임자주앙 6세
섭정페드루 3세 (1777–1786)
공동 통치자페드루 3세
섭정브라질 공 주앙 (1792–1816)
재위 기간21815년 12월 16일 – 1816년 3월 20일
즉위2브라질 여왕
선임자2(신설)
후임자2주앙 6세
섭정2브라질 공 주앙
결혼 및 자녀
배우자포르투갈의 페드루 (1760년 6월 6일 결혼, 1786년 5월 25일 사망)
자녀브라질 공 조제
주앙 6세, 포르투갈 왕
마리아나 비토리아 드 브라간사
왕가
가문브라간사 가문
출생과 사망
아버지주제 1세
어머니마리아나 빅토리아 데 에스파냐
출생일1734년 12월 17일
출생 장소히베이라 궁, 리스본, 포르투갈
사망일1816년 3월 20일 (향년 81세)
사망 장소카르모 수녀원, 히우데자네이루, 브라질
매장 장소1816년 3월 23일: 히우데자네이루, 아 주다 성모 수녀원
1822년 3월 18일: 에스트렐라 대성당, 리스본, 포르투갈
기타 정보
종교로마 가톨릭교
서명

2. 초기 생애

''D. 마리아 프란시스카, 베이라 공주, 바르셀루스 공작''; 파보나; 1739.


마리아는 리스본의 리베이라 궁전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명은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자벨 조제파 안토니아 게르트루데스 리타 조아나였다. 그녀는 돔 조제(Joseph), 브라질 공 (후에 포르투갈 국왕 조제 1세)과 인판타 마리아나 빅토리아 데 에스파냐 사이에서 태어난 4명의 딸 중 장녀였다. 그녀의 아버지 조제는 당시 국왕이었던 포르투갈의 주앙 5세와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의 장남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스페인 국왕 돈 펠리페 5세와 왕비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의 장녀였다. 이로써 그녀는 포르투갈의 주앙 5세와 스페인 국왕 돈 펠리페의 맏손녀가 되었다. 주앙 국왕은 손녀 마리아를 태어난 날 베이라 공주로 임명했다.

마리아의 할아버지 주앙 5세는 1750년 7월 31일에 사망했다. 그녀의 아버지 조제 왕자는 조제 1세로 왕위를 계승했다. 조제의 장녀였던 마리아는 그의 상속 추정자가 되었고 브라질 공주와 브라간사 여공작이라는 전통적인 작위를 받았다.

2. 1. 출생과 가족

마리아는 리스본의 리베이라 궁전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명은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자벨 조제파 안토니아 게르트루데스 리타 조아나였다. 그녀는 돔 조제(Joseph), 브라질 공 (후에 포르투갈 국왕 조제 1세)과 인판타 마리아나 빅토리아 데 에스파냐 사이에서 태어난 4명의 딸 중 장녀였다. 그녀의 아버지 조제는 당시 국왕이었던 포르투갈의 주앙 5세와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의 장남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스페인 국왕 돈 펠리페 5세와 왕비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의 장녀였다. 이로써 그녀는 포르투갈의 주앙 5세와 스페인 국왕 돈 펠리페의 맏손녀가 되었다. 주앙 국왕은 손녀 마리아를 태어난 날 베이라 공주로 임명했다.

마리아의 할아버지 주앙 5세는 1750년 7월 31일에 사망했다. 그녀의 아버지 조제 왕자는 조제 1세로 왕위를 계승했다. 조제의 장녀였던 마리아는 그의 상속 추정자가 되었고 브라질 공주와 브라간사 여공작이라는 전통적인 작위를 받았다.

2. 2. 폼발 후작의 영향

브라질 공주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사벨. 비에이라 루지타누의 초상화, 1753년


주앙 1세의 정부는 폼발 후작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었다. 폼발 후작은 약 10만 명의 사망자를 낸 1755년 리스본 지진 이후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했다. 마리아의 출생 궁궐도 이 재앙으로 파괴되었다.[2]

지진 이후 주앙 1세는 폐쇄 공포증을 겪었다. 왕은 시내 중심가에서 떨어진 아유다에 나무로 만든 궁전을 지었는데, 이 궁전은 Real Barraca de Ajuda(아유다 왕실 오두막)로 알려지게 되었다. 왕가는 이 대형 궁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1794년 궁전이 불에 타자 아유다 궁전이 그 자리에 세워졌다.[2]

1760년 6월 6일 마리아는 왕의 남동생이자 삼촌인 페드루(나중에는 주앙 3세)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2]

2. 3. 결혼

마리아는 1760년 6월 6일에 삼촌인 페드루와 결혼했다.[7] 결혼 당시 마리아는 25세였고 페드루는 42세였다.[7]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7] 1777년 마리아가 즉위하자 남편은 명목상 포르투갈의 국왕 도밍 페드루 3세가 되었다.[7]

이름출생사망비고
주제, 브라질의 왕자1761년 8월 20일1788년 9월 11일외숙모 포르투갈의 베네디타 공주와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브라간사의 주앙 프란시스쿠1763년 9월 16일1763년 10월 10일아주다 국립 궁전에서 태어났다.
주앙 6세1767년 5월 13일1826년 3월 10일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장녀인 카를로타 호아키나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포르투갈의 마리아나 빅토리아 공주1768년 12월 15일1788년 11월 2일카를로스 3세 국왕의 아들인 스페인의 가브리엘 공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브라간사의 마리아 클레멘티나1774년 6월 9일1776년 6월 27일켈루스 국립 궁전에서 태어났다.
브라간사의 마리아 이사벨라1776년 12월 12일1777년 1월 14일켈루스 국립 궁전에서 태어났다.


3. 치세

미겔 안토니우 두 아마랄이 그린 여왕 마리아 1세와 국왕 페드루 3세의 초상화


1785년 브라질에서 공장과 제조업을 금지한 마리아 여왕의 칙령 일부


국왕 호세 1세가 1777년 2월 24일에 사망하면서, 그의 딸인 마리아는 포르투갈의 첫 번째 여왕이 되었다.[3] 마리아의 즉위와 함께 그녀의 남편은 국왕 페드루 3세로 추대되었지만 실제 왕실 권위는 마리아에게만 있었다.[3] 페드루의 국왕 지위는 ''유부인권''(jure uxoris)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사망하면 그의 통치는 종료되고 왕관은 마리아의 후손에게 상속될 것이었다.[3] 그러나 페드루는 1786년에 그의 아내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1세는 즉위 직후 독재적인 총리인 폼발 후작을 해임하였다.[3]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는 포르투갈의 무장 중립 동맹 가입(1782년 7월)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델라고아 만을 포르투갈에 할양한 사건(1781년)이 있다.[3]

1785년 1월 5일, 마리아 1세는 브라질의 산업 활동에 대한 강력한 제한을 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예를 들어, 노예와 노동자들을 위한 거친 천 산업을 제외하고는 식민지 내 모든 섬유 제조업을 폐지하여 직물 및 기타 제품의 생산을 금지했다. 이는 포르투갈 식민 행정부가 경제적, 어쩌면 정치적 독립을 우려하여 브라질의 산업 활동 발전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1789년에는 엥사인 티라덴테스의 재판, 유죄 판결, 처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왕이 앓고 있던 우울증과 악화되는 정신 건강(아마도 포르피린증 때문일 것이다)은 1792년 이후 그녀가 국정을 처리할 수 없게 만들었다.[4]

폼발 후작의 지나친 독재를 시정했지만, 공업화를 지속하고 도로, 운하 건설, 광산 검사, 직물업의 기술 개선 등을 실시했다. 1740년 이후,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의 무역 수지는 흑자였으며, 1789년에 여러 나라와 맺은 통상 조약의 결과, 포르투산 와인, 브라질산 설탕 등의 수출이 증가했다. 브라질과 영국의 중계국으로서 번영을 누리던 포르투갈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로 사태가 악화된다.

3. 1. 즉위와 초기 정책



국왕 호세 1세가 1777년 2월 24일에 사망하면서, 그의 딸인 마리아는 포르투갈의 첫 번째 여왕이 되었다.[3] 마리아의 즉위와 함께 그녀의 남편은 국왕 페드루 3세로 추대되었지만 실제 왕실 권위는 마리아에게만 있었다.[3] 페드루의 국왕 지위는 ''유부인권''(jure uxoris)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사망하면 그의 통치는 종료되고 왕관은 마리아의 후손에게 상속될 것이었다.[3] 그러나 페드루는 1786년에 그의 아내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1세는 즉위 직후 독재적인 총리인 폼발 후작을 해임하였다.[3]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는 포르투갈의 무장 중립 동맹 가입(1782년 7월)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델라고아 만을 포르투갈에 할양한 사건(1781년)이 있다.[3]

1785년 1월 5일, 마리아 1세는 브라질의 산업 활동에 대한 강력한 제한을 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4] 예를 들어, 노예와 노동자들을 위한 거친 천 산업을 제외하고는 식민지 내 모든 섬유 제조업을 폐지하여 직물 및 기타 제품의 생산을 금지했다.[4] 이는 포르투갈 식민 행정부가 경제적, 어쩌면 정치적 독립을 우려하여 브라질의 산업 활동 발전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1789년에는 엥사인 티라덴테스의 재판, 유죄 판결, 처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왕이 앓고 있던 우울증과 악화되는 정신 건강(아마도 포르피린증 때문일 것이다)은 1792년 이후 그녀가 국정을 처리할 수 없게 만들었다.[4]

3. 2. 브라질 식민 정책

3. 3. 정신 질환과 섭정

마리아의 정신 이상은 1786년 처음 공식적으로 감지되었는데, 그녀는 헛소리 상태로 자기 방으로 옮겨져야 했다. 그 후, 여왕의 정신 상태는 점차 악화되었다.[6] 1786년 5월 25일, 그녀의 남편 페드루 3세가 사망하자 마리아는 큰 충격을 받았고 어떤 궁정 행사도 금지했다. 동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국가 축제는 종교 의식과 비슷해지기 시작했다.[6] 여왕의 장남이자 왕위 계승자인 주앙 왕자는 1788년 9월 11일 27세의 나이로 천연두로 사망했고, 그녀의 고해 신부인 살로니카의 명목 대주교 이나시우 지 상 카에타누는 그 해 11월에 사망했다. 이러한 죽음은 마리아 여왕이 주요 우울 장애를 겪게 되는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5] 또 다른 잠재적 원인은 그녀의 근친상간적인 조상이었는데, 이는 그녀의 두 자매가 비슷한 증상을 겪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5]

1792년 2월, 마리아는 정신 이상으로 간주되어 프랜시스 윌리스의 치료를 받았는데, 그는 영국 왕 조지 3세를 치료했던 의사였다.[5] 윌리스는 그녀를 영국으로 데려가고 싶어했지만 포르투갈 궁정은 이 계획을 거부했다. 윌리스가 마리아의 치료에 있어 조언자 역할에 더 집중하고 조지 3세처럼 직접적인 치료를 제공하지 못한 결과인지, 윌리스는 여왕을 불치병으로 판단했다.[5] 마리아의 둘째 아들인 주앙 왕자는 그녀의 이름으로 정부를 인수했지만, 1799년에야 섭정 왕자라는 칭호를 받았다.[4] 1794년 아유다 왕실 막사가 불타자, 궁정은 켈루스 궁전으로 이사를 가야 했고, 병든 여왕은 온종일 자기 방에 누워 있었다. 방문객들은 궁전 전체에 울려 퍼지는 끔찍한 비명 소리에 대해 불평하곤 했다.

4. 나폴레옹 전쟁과 브라질 천도

1786년 마리아 1세의 판화


1801년, 스페인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는 프랑스 지도자 나폴레옹의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을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이는 오렌지 전쟁으로 이어졌다.[6] 스페인은 침공을 종료했지만, 1801년 6월 6일 바다호스 조약으로 포르투갈은 올리벤사와 기타 국경 마을을 스페인에 할양해야 했다.[6] (이 할양은 현재 포르투갈 정부가 인정하지 않으며, 포르투갈은 해당 영토를 여전히 포르투갈 영토로 공식적으로 간주한다.)[6] 1801년 9월 29일, 주앙 왕자는 마드리드 조약 (1801)에 서명하여 포르투갈령 기아나의 절반을 프랑스에 할양했고, 이 지역은 프랑스령 기아나가 되었다.[6]

포르투갈 정부가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유럽 대륙 봉쇄령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것은 1807년 말, 장-안도슈 쥐노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의 포르투갈 침공으로 절정에 달했다.[6] 포르투갈에 대한 궁극적인 나폴레옹의 계획은 포르투갈을 세 부분으로 분할하는 것이었다.[6] 도루강에서 미뉴강까지의 포르투갈 북부는 북 루시타니아 왕국이 될 것이며, 그 왕좌는 에트루리아의 루이 2세 왕에게 약속되었다.[6] 알렌테주 주와 알가르브 왕국은 합쳐져 '알가르브 공국'을 형성하고, 마누엘 데 고도이가 통치자가 될 예정이었다.[6] 나머지 포르투갈은 프랑스가 직접 통치할 예정이었다.[6]

1793년, 카탈루냐에 침입한 프랑스 혁명군과 싸우던 스페인군에 원군을 파견했다. 초반에는 우세했지만, 이후 패배가 거듭되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는 태도를 바꿔 1795년 프랑스와 바젤에서 평화를 맺었다. 재상 마누엘 데 고도이는 혁명 정부에 포르투갈 점령을 제의했다.

1801년, 제1통령으로 취임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포르투갈 공략을 시작, 국경을 넘어선 스페인군이 알렌테주 전역을 점령했다. 포르투갈은 프랑스와의 강화 협상을 모색했지만, 올리벤사 양도, 브라질 북부 할양, 250만 프랑 지불, 포르투갈 국내 항구의 영국 선박 봉쇄라는 조건은 1805년 트라팔가 해전 이후 해운 무역 루트의 영국 의존을 강화하는 포르투갈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리아의 둘째 아들인 주앙 섭정공과 그의 어머니 흉상


1806년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발령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밀약을 맺어 포르투갈을 3분할하여 그 중 하나를 재상 고도이의 왕국으로 하기로 합의했다.[6] 1807년 11월, 장 앙도슈 주노 장군의 군대가 포르투갈에 침입하자, 섭정 주앙은 영국 국왕 조지 3세와 맺은 밀약에 따라 왕족이 탑승한 포르투갈 함대를 영국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브라질로 피난시켰다. 이때 다수의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도 합류하여 총 1만 명이 왕실과 함께 탈출했다.[6]

브라간사 왕가 전체는 1807년 11월 29일에 포르투갈령 브라질 부왕령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도망가기로 결정했다.[3] 마리아 1세는 왕족들과 함께 캐러크 ''프린시페 레알''에 탑승하여 이송되었다. 왕궁에서 부두로 이동하는 동안 그녀는 군중 속에서, 그리고 마차 안에서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여왕의 치매는 매우 심해서, 하인들이 이동 중에 그녀를 고문하거나 강탈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3]

1808년 1월, 주앙 섭정공과 그의 궁정은 사우바도르 다 바이아에 도착했다. 현지 귀족과 영국의 압력으로, 섭정공은 도착 후 브라질과 우호국 간의 상업을 개방하는 상업 규정을 서명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영국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 법은 이전에 브라질이 포르투갈과만 직접적인 상업 관계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던 중요한 식민 조약을 깼다.[3]

1808년 8월 1일, 영국 장군 아서 웰즐리(후에 웰링턴 공작)는 반도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리스본에 영국군을 상륙시켰다. 웰즐리가 비메이루 전투 (1808년 8월 21일)에서 주노를 상대로 거둔 초기 승리의 영향은 신트라 협약 (1808년 8월 30일)에서 그의 상사들에 의해 무효화되었는데, 이는 패배한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에서 평화롭게 철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6] 웰즐리 (곧 웰링턴 경이 됨)는 1809년 4월 22일 포르투갈로 돌아와 캠페인을 재개했다. 영국 지휘 하의 포르투갈군은 토레스 베드라스 선 방어 (1809–1810)와 스페인과 프랑스의 그 후의 침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15년, 주앙 공의 정부는 브라질의 지위를 왕국으로 격상시켰고, 마리아는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 왕국의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나폴레옹이 1815년에 마침내 패배했을 때, 마리아와 그녀의 가족은 브라질에 머물렀다.[6] 1816년, 마리아 1세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붕어했으며, 시내의 상 프란시스쿠 데 파울라 교회에 매장되었다. 포르투갈 왕가의 본국 귀환 후, 관이 이송되어 현재는 자신이 건립한 에스트렐라 대성당에 매장되어 있다.

4. 1. 프랑스의 침공

1801년, 스페인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는 프랑스 지도자 나폴레옹의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을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이는 오렌지 전쟁으로 이어졌다.[6] 스페인은 침공을 종료했지만, 1801년 6월 6일 바다호스 조약으로 포르투갈은 올리벤사와 기타 국경 마을을 스페인에 할양해야 했다.[6] (이 할양은 현재 포르투갈 정부가 인정하지 않으며, 포르투갈은 해당 영토를 여전히 포르투갈 영토로 공식적으로 간주한다.)[6] 1801년 9월 29일, 주앙 왕자는 마드리드 조약 (1801)에 서명하여 포르투갈령 기아나의 절반을 프랑스에 할양했고, 이 지역은 프랑스령 기아나가 되었다.[6]

포르투갈 정부가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유럽 대륙 봉쇄령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것은 1807년 말, 장-안도슈 쥐노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의 포르투갈 침공으로 절정에 달했다.[6] 포르투갈에 대한 궁극적인 나폴레옹의 계획은 포르투갈을 세 부분으로 분할하는 것이었다.[6] 도루강에서 미뉴강까지의 포르투갈 북부는 북 루시타니아 왕국이 될 것이며, 그 왕좌는 에트루리아의 루이 2세 왕에게 약속되었다.[6] 알렌테주 주와 알가르브 왕국은 합쳐져 '알가르브 공국'을 형성하고, 마누엘 데 고도이가 통치자가 될 예정이었다.[6] 나머지 포르투갈은 프랑스가 직접 통치할 예정이었다.[6]

1793년, 카탈루냐에 침입한 프랑스 혁명군과 싸우던 스페인군에 원군을 파견했다.[6] 초반에는 우세했지만, 이후 패배가 거듭되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는 태도를 바꿔 1795년 프랑스와 바젤에서 평화를 맺었다.[6] 재상 마누엘 데 고도이는 혁명 정부에 포르투갈 점령을 제의했다.[6]

1801년, 제1통령으로 취임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포르투갈 공략을 시작, 국경을 넘어선 스페인군이 알렌테주 전역을 점령했다.[6] 포르투갈은 프랑스와의 강화 협상을 모색했지만, 올리벤사 양도, 브라질 북부 할양, 250만 프랑 지불, 포르투갈 국내 항구의 영국 선박 봉쇄라는 조건은 1805년 트라팔가 해전 이후 해운 무역 루트의 영국 의존을 강화하는 포르투갈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6]

4. 2. 브라질 천도



1806년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발령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밀약을 맺어 포르투갈을 3분할하여 그 중 하나를 재상 고도이의 왕국으로 하기로 합의했다.[6] 1807년 11월, 장 앙도슈 주노 장군의 군대가 포르투갈에 침입하자, 섭정 주앙은 영국 국왕 조지 3세와 맺은 밀약에 따라 왕족이 탑승한 포르투갈 함대를 영국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브라질로 피난시켰다. 이때 다수의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도 합류하여 총 1만 명이 왕실과 함께 탈출했다.[6]

브라간사 왕가 전체는 1807년 11월 29일에 포르투갈령 브라질 부왕령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도망가기로 결정했다.[3] 마리아 1세는 왕족들과 함께 캐러크 ''프린시페 레알''에 탑승하여 이송되었다. 왕궁에서 부두로 이동하는 동안 그녀는 군중 속에서, 그리고 마차 안에서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여왕의 치매는 매우 심해서, 하인들이 이동 중에 그녀를 고문하거나 강탈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3] 왕궁에서 마차로 테주 강 항구로 급히 향할 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마리아 1세는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 없어 "그렇게 서두르지 마세요. 국민들은 우리가 도망치려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1808년 1월, 주앙 섭정공과 그의 궁정은 사우바도르 다 바이아에 도착했다. 현지 귀족과 영국의 압력으로, 섭정공은 도착 후 브라질과 우호국 간의 상업을 개방하는 상업 규정을 서명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영국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 법은 이전에 브라질이 포르투갈과만 직접적인 상업 관계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던 중요한 식민 조약을 깼다.[3]

1808년 8월 1일, 영국 장군 아서 웰즐리(후에 웰링턴 공작)는 반도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리스본에 영국군을 상륙시켰다. 웰즐리가 비메이루 전투 (1808년 8월 21일)에서 주노를 상대로 거둔 초기 승리의 영향은 신트라 협약 (1808년 8월 30일)에서 그의 상사들에 의해 무효화되었는데, 이는 패배한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에서 평화롭게 철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6] 웰즐리 (곧 웰링턴 경이 됨)는 1809년 4월 22일 포르투갈로 돌아와 캠페인을 재개했다. 영국 지휘 하의 포르투갈군은 토레스 베드라스 선 방어 (1809–1810)와 스페인과 프랑스의 그 후의 침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15년, 주앙 공의 정부는 브라질의 지위를 왕국으로 격상시켰고, 마리아는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 왕국의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나폴레옹이 1815년에 마침내 패배했을 때, 마리아와 그녀의 가족은 브라질에 머물렀다.[6]

4. 3. 브라질에서의 삶과 죽음



1806년,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이 발령되었지만, 포르투갈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밀약을 맺어 포르투갈을 3분할하여 그 중 하나를 재상 고도이의 왕국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1807년 11월, 장 앙도슈 주노 장군의 군대가 포르투갈에 침입했다. 섭정 주앙은 영국 국왕 조지 3세와 밀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왕족이 탑승한 포르투갈 함대는 영국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브라질로 피난했다.[6] 브라간사 왕가 전체는 1807년 11월 29일에 포르투갈령 브라질 부왕령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도망가기로 결정했다.[3] 다수의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도 합류하여 총 1만 명이 왕실과 함께 탈출했다. 마리아 1세는 왕족들과 함께 캐러크 ''프린시페 레알''에 탑승하여 이송되었다. 왕궁에서 부두로 이동하는 동안 그녀는 군중 속에서, 그리고 마차 안에서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여왕의 치매는 매우 심해서, 그녀는 하인들이 이동 중에 그녀를 고문하거나 강탈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3] 왕궁에서 마차로 테주 강 항구로 급히 향할 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마리아 1세는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 없어 "그렇게 서두르지 마세요. 국민들은 우리가 도망치려 한다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1808년 1월, 주앙 섭정공과 그의 궁정은 사우바도르 다 바이아에 도착했다. 현지 귀족과 영국의 압력으로, 섭정공은 도착 후 브라질과 우호국 간의 상업을 개방하는 상업 규정을 서명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영국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 법은 이전에 브라질이 포르투갈과만 직접적인 상업 관계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던 중요한 식민 조약을 깼다.[3] 1808년 8월 1일, 영국 장군 아서 웰즐리 (후에 웰링턴 공작)는 반도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리스본에 영국군을 상륙시켰다. 웰즐리가 비메이루 전투 (1808년 8월 21일)에서 주노를 상대로 거둔 초기 승리의 영향은 신트라 협약 (1808년 8월 30일)에서 그의 상사들에 의해 무효화되었는데, 이는 패배한 프랑스군이 포르투갈에서 평화롭게 철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6]

웰즐리 (곧 웰링턴 경이 됨)는 1809년 4월 22일 포르투갈로 돌아와 캠페인을 재개했다. 영국 지휘 하의 포르투갈군은 토레스 베드라스 선 방어 (1809–1810)와 스페인과 프랑스의 그 후의 침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15년, 주앙 공의 정부는 브라질의 지위를 왕국으로 격상시켰고, 마리아는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 왕국의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나폴레옹이 1815년에 마침내 패배했을 때, 마리아와 그녀의 가족은 브라질에 머물렀다.[6] 1816년, 마리아 1세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붕어했으며, 시내의 상 프란시스쿠 데 파울라 교회에 매장되었다. 포르투갈 왕가의 본국 귀환 후, 관이 이송되어 현재는 자신이 건립한 에스트렐라 대성당에 매장되어 있다.

5. 유산

마리아 1세는 브라질과 포르투갈 양국에서 중요한 인물로 칭송받는다. 포르투갈에서는 강인한 여성으로,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독립의 핵심 인물로 존경받는다. 그녀는 8년 동안 브라질에 거주했으며, 1816년 리우데자네이루의 카르모 수도원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리스본으로 돌아와 에스트렐라 바실리카에 안치되었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에스트렐라 바실리카에 있는 마리아 1세의 묘


마리아 1세의 유산은 그녀가 구상하는 데 일조한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걸작인 포르투갈 켈루스 궁전에서 빛을 발한다. 궁전 앞에는 그녀의 대형 동상이 있으며, 궁전 근처의 포우사다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리스본의 포르투갈 국립 도서관에는 조아킴 마차도 데 카스트루의 제자들이 세운 여왕의 대형 대리석상이 있다.

브라질에서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비록 아들의 섭정을 통해서였지만, 브라질의 많은 국립 기관과 조직들이 창설되었다. 이들 기관은 현대 브라질 기관의 전신이며 브라질 식민지 주민들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다.

6. 자녀

마리아 1세는 1760년 6월 6일에 삼촌인 페드루와 결혼했다.[7] 결혼 당시 마리아 1세는 25세, 페드루는 42세였다.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였다.[7] 마리아 1세가 1777년 즉위하자 남편은 명목상 포르투갈의 국왕 도밍 페드루 3세가 되었다.[7]

이름출생사망비고
주제1761년 8월 20일1788년 9월 11일베이라 공, 브라질 공 및 브라간사 공. 외숙모 포르투갈의 베네디타 공주와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남동생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7]
조앙1762년
브라간사의 주앙 프란시스쿠1763년 9월 16일1763년 10월 10일아주다 국립 궁전에서 태어났다.[7]
주앙 6세1767년 5월 13일1826년 3월 10일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장녀인 카를로타 호아키나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1816년부터 1826년까지 포르투갈 국왕이었고, 1825년부터 1826년까지 명목상의 브라질 황제였다.[7]
마리아 아나 비토리아1768년 12월 15일1788년 11월 2일카를로스 3세 국왕의 아들인 스페인의 가브리엘 공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7]
브라간사의 마리아 클레멘티나1774년 6월 9일1776년 6월 27일켈루스 국립 궁전에서 태어났다.[7]
브라간사의 마리아 이사벨1776년 12월 12일1777년 1월 14일켈루스 국립 궁전에서 태어났다.[7]


7. 조상

포르투갈의 마리아 1세의 조상은 다음과 같다.[8]

1대2대3대4대
1. 포르투갈의 마리아 1세2. 포르투갈의 호세 1세4. 포르투갈의 주앙 5세8.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
3.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5.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9. 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소피아
6. 스페인의 펠리페 5세10.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
7. 엘리사베타 파르네세11.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12. 루이, 프랑스의 도팽
13.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
14. 파르마의 에도아르도 파르네세 세습공
15. 노이부르크의 도로테아 소피


참조

[1] 서적 Saraiva
[2] 서적 A history of Portugal https://books.google[...] CUP Archive
[3] 서적 A Concise History of Portugal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History of Portugal: Pamphlet Collection https://books.google[...] CUP Archive 2012-09
[5] 간행물 Maria I of Portugal: Another royal psychiatric patient of Francis Willis https://www.research[...]
[6] 서적 A history of Portugal https://books.google[...] CUP Archive
[7] 웹사이트 Trajetória política de D. Maria I: ideias ilustradas, convulsão política e melancolia https://repositorio.[...] 2018-07-03
[8]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